제목 : 그 날에 ( 행 8 : 1B - 8 )
오늘 말씀 8장 1절 시작하는 절이 그 날에로 시작한다. 그런데 이 그 날이 어떤 날인가? 앞에 보면 아시겠지만 그 날은 스데반이 순교한 날이다. 죽은 날이다. 죽음의 날이며 슬픔의 날이며 비통의 날이 바로 그 날이다. 그런데 조금 독특한 표현으로 스데반의 죽음을 성경에 기록했다. 스데반이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이르되 주어 이 죄를 이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하고 자니라고 표현한다. 여기서 자니라 는 뜻은 깊은 잠에 빠져들다 라는 뜻이다. 헬라어에는 죽음이라는 단어가 여러개 있다. 또 성경 곳곳에 이 단어들을 사용했는데 왜 스데반의 죽음은 죽음이 아닌 잔다라고 표현했을까? 창세기 47장 39절에 야곱의 죽음을 누워 잔다 , 잠들었다라고 표현한다. 신명기 31장 16절에 모세의 죽음도 잠들었다라고 표현한다. 누가복음 8장 52절에 회당장 야이로의 딸이 죽었을 때 예수님께서는 이 아이가 잔다라고 표현하신다. 요한복음에서도 나사로의 죽음을 우리의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다고 한다. 사도행전 13장의 다윗의 죽음도 마찬가지이다. 왜 그럴까? 자는 사람은 깨어나기 때문이다. 성도의 죽음은 끝이 아닌 부활이 있다. 기독교 신앙의 가장 중요한 핵심은 부활이다. 잠든 사람은 일어난다. 엄마가 깨워서, 자명종 소리를 들어서 깨게 된다. 마지막 날 하나님이 우리를 깨워 일어나 활짝 웃으며 만나게 된다. 그래서 성도의 죽음을 잔다라고 한다.
최근 목장 탐방에서 부목자님이 장남의 죽는 사건을 통해 실의에 빠져 어차피 기도해봤자 하나님의 뜻대로 하실텐데 기도해봤자 무슨 소용인가 하며 8년이나 우울증의 자리에 있었다고 하신다. 그런데 마지막 아이가 죽기 전에 엄마, 아빠 천국에서 다시 만나요 라고 말했다고 한다. 다시 만난다는 것이다.
세월이 참 빠르다. 원래 이 시간이면 부채질을 해야하는데 긴팔을 입으신 성도분들이 계신다.
우리가 이 땅에 있는 이유는 사명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1절에 스데반의 죽음은 슬픔이 아닌 부활이 임한 날이고 다시 만날 날을 꿈꾸는 날이고 생명이 임하는 날이다. 우리 주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이유는 죽을 자에게 생명을 주기 위해서이다.
1. 큰 박해가 있습니다.
1절
사도들에게 예루살렘은 앞으로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살아갈 인생 여정의 출발점일뿐 종착역이 아니었다. 그들에게는 가야 할 아득히 먼 길이 있었다. 그런데 사도들은 예루살렘에 머무르고 떠날 생각을 안 한다. 설교 한 번 하면 3-5천명이 돌아오니 복음에 굴복하는 예루살렘의 성공에 안주하고 말았다.
주님의 마지막 유언이 무엇이었는가? 사도행전 1장 8절에 나와있다. 예루살렘에 머물라고 하지 않으셨다.예루살렘과 유대 땅끝까지 가야한다고 하셨다. 그런데 이들은 머무르고 있다. 이것이 스데반의 순교를 기점으로 예루살렘에 대박해가 시작된 이유이다. 사도들로 하여금 예루살렘을 넘어서게 하기 위한 하나님의 섭리이다. 박해는 사도행전에 처음 쓰이는 단어이다. 그런데 박해 앞에 큰이 쓰여있다. 이 큰은 MEGAS가 쓰인다. 백만배를 뜻하는 메가인데 옛날 성경에는 큰 박해를 큰 핍박이라고 했다. 감당할 수 없는 상상할 수 없는 박해가 임한다. 그런데 이 박해로 머물러 있던 그들이 움직이기 시작한다.
흩어지니라 움직이기 시작한다. 예수님의 마지막 지상명령이 다시 살아 움직이기 시작한다. 이제 그 부활의 생명이 예루살렘을 넘어서 유대와 사마리아와 다른 땅으로 흩어지기 시작한다. 이 단어로부터 흩어진 사람을 뜻하는 디아스포라가 유래됐다. 예루살렘은 씨를 한 곳에 두는 것이 아니라 농부가 흩어 뿌렸다. 그래서 좋은 밭, 길가, 가시떨기에 떨어지기도 했다. 그런데 흩어뿌리는 이 동작이 농부로 표현될 때는 능동적이나 씨앗의 입장에서는 수동적이다. 흩어 뿌려짐을 씨가 당한 것이다. 그래서 이 말은 씨가 어디로 뿌려질지는 씨가 아니라 농부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이다. 본문 1절 다 흩어지니라 이것은 이 사람들이 능동적이 아닌 수동적으로, 하나님의 섭리에 의해 그들이 흩어졌음을 나타낸다.
큰 박해로 인해 나에게만 머물러있던 지경이 이제 다른 사람에게 나아가는 것이다 내 삶, 내 가족 내 식구 나에게만 관심이 있었던 이제는 그런 사람이 예루살렘 밖으로, 구원도 내 구원도 내 내 회개, 다른 사람의 어떤 상처 받았는지 상관없니 나만 회개 받으면 돼 이런 삶에서 박해로 인해 다른 사람의 구원, 회개, 스데반의 그날처럼 흩어지기 시작한다.
박해로 자신밖에 몰랐던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관심이 생기니 날마다 해줄 말이 많아진다. 박해로 내 영이 무너진 만큼 하나님이 세워주신다.
뼛속까지 죄인인 우리의 본질은 자기 중심성이다. 나로 인해 세상이 움직인다는 것이다. 자기 중심성은 내가 정말 중요한 존재인가에서 비롯된 병적인 자기 집착이라고 한다. 늘 자기 시선으로 세상을 보고 자기가 세계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 내가 소중한 존재야 이런 것과는 다르다. 내가 정말 중요한 존재가 되어야 하는데 여기서 이 사실이 좌절된, 내가 중요한 존재가 아닌 모든 환경으로부터 오는 절박한 반응이 자기 중심성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선 뼛속까지 자기 중심성인 이런 나와 사도들을 깨뜨리신다. 이것이 깨어져야 생명이 퍼져나간다.말씀 앞에 죽는 것이부활이다. 내가 죽어져야 부활이 임한다. 큰 박해로 죽을 수 밖에 없는 내 자아가 깨뜨려져야 우리는 사자로 나아갈 수 있다. 이것이 사명이다. 그런데 깨뜨림에는 항상 아픔이 온다. 깨뜨림은 아픔이다. 그런데 새는 아픔이 와야 알을 깨어야 진정한 생명을 얻을 수 있다. 알을 깨뜨리면 또 다른 세계를 맞이하듯 개인과 교회의 박해에는 하나님이 새로운 국면을 준비하신다. 깨어지지 않고 숨어있으니 계속 박해를 다한다. 잘 당하고 잘 깨어져야 한다. 그래야 흩어진다. 당한 것이 없는 사람은 늘 집에만 예루살렘에만 나만의 알 속에만 있다. 그러나 깨어져야 한다. 스데반의 박해로 사도행전 11장을 보면 이 사람들이 아프리카와 유럽 안디옥까지 흩어진다. 안디옥이 어떤 곳인가? 예루살렘 교회와 더불아 사도바울과 사도들의 선교 중심지가 된 곳이다. 내가 받는 박해로 흩어지니 하나님은 교회를 세우신다. 흩어진 나로 인해 교회가 세워진다.
서론에 말씀드린 집사님은 감당하기 힘든 고난으로 사명이 주어졌다. 너무 슬픈 아픔으로 자녀가 먼저 떠난 이 집안으로 가서 내 첫째 아들, 장남도 똑같았습니다 이 말 한 마디만 하면 위로가 됐다. 저도 알콜 중독 아버지, 폭력, 폭언 속에 자란 아이들을 보면 남 일 같지가 않다. 말하지 않아도 마음이 가다. 바람펴서 집나간 어머니를 보면 말할 수 없는 아픔이 속에서 올라온다. 이것이 바로 나에게서 너에게로 전달되는 것이다. 마지막 그 날에 예수님이 우리 눈물을 닦아주실 것이다. 고난이 축복이다.
적용
내가 받은 큰 박해는?
그 박해로 흩어져 내 지경이 넓어졌나요?
큰 박해로 그저 예루살렘에 숨어 지내고 있지는 않나요?
깨어져야 할 자기 중심성은 무엇입니까?
저도 자기중심성이 너무 심해서 담임목사님께 나르시시즘이 심하다는 소리를 들었는데 인정이 안 됐는데 저도 제가 늘 세상의 중심이 되어야 하는데 안되니까 치리를 4번이나 받음으로써 깨어져갔다.
부활의 그날이 우리에게 임하려면
2. 큰 울음이 있습니다.
2절
그 날에 죽음이 아닌 부활, 생명이 임한 그 날에 똑같이 큰 울음이 있다고 한다. 큰 박해 뒤에 큰 울음이 따른다. 동일하게 megas가 사용됐다. 울다는 가슴을 치는 동작을 나타낸다. 그 때 당시 산헤드린 공의회에서 이 사람은 죄인이다라고 판결을 받은 사람을 위해서는 울지 못했다. 이 사람이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 죽은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옆에 있던 사람들은 개의치 않고 크게 스데반의 죽음 앞에 울었다. 이것이 무엇인가? 가슴을 치고 소리내어 운다 그리고 그 뒤에 나오는 구절은 스데반을 장사하고 기록된다. 함께 가져가다 함께 짐을 지다 내가 스데반과 함께 가겠다는 뜻이다. 그러니 이들의 울음은 저 사람과 상관없어가 아니라 내가 스데반과 함께 가겠다는 뜻이다. 공회와 많은 사람들이 죄인이라고 해도 저도 죄인입니다 나도 그러합니다 하며 함께 가겠습니다라는 고백이 큰 울음이다. 크게 울었으니 사람들이 다 알아본다. 그런데 이렇게 함께 운 사람들은 오늘 2절에 경건한 사람들이라고 기록된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이라는 뜻으로 인간적인 슬픔을 넘어선 것을 말한다. 상대방의 아픔을 함께 우는 자를 하나님은 경외하는 사람이라고 한다. 그리고 결국 이들이 흩어져서 사마리아로 땅끝으로 하나님의 교회를 세운다.
헨리 나우웬은 care이라는 단어를 비탄이라는 고토 카라에서 유래됐다고 한다. 진정한 돌봄은 고통이 연대될 때 가능하다라는 뜻이다. 하나님께서 우리 삶에 이러한 고통과 비탄을 제거하지 않고 이것이 있어야 care로 가야 연대되고 연결된다. 진정으로 약자된 자들과 연대도게 하신다. 그래서 예수님은 하늘에만 있지 않으시고 이 땅에 오셨다.
저는 오랜 기간 울음이 없었다. 오히려 아버지께서 아내가 떠나고 감옥다녀오시고 모든 것이 무너지니 술을 드시고 비통의 눈물을 흘리셨다. 저는 울지 않았다. 분노와 증오는 제 감정을 고장나게 만들었고 오랜 세월 아버지의 고통에 공감하지 못한 채 살아왔다. 그런데 이것이 악이었다. 눈물은 우리의 고장난 감정을 다시 회복시켜준다. 하나님을 향한 사랑에 내 심장을 뛰게 한다. 이것에 전혀 공감하지 못한 것이 큰 죄이고 악이다. 무엇이 악인가? 악의 평범성을 쓴 저자는 홀로코스트 전범 중 한 명이 교수행 집행 당하는 날 보러 갔는데 깜짝 놀랐다고 한다. 너무 모범적이고 선량한 얼굴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그냥 한 명의 공무원으로서 내려온 공문에 충실하게 일만 했다. 여기에 공감과 울음이 결여되어 있었다. 아우슈비츠의 그 광기, 큰 악과 죄는 공감의 결여에서 비롯됐다. 그러면서 이 책에 생각을 하지 않았기에 이런 악이 저질러졌다고 한다. 결국 우리의 띵크함으로 말씀과 내가 연결되고 공감이 되어 십자가가 나의 십자가가 되는 것이다.
도구적 조작적 지식을 가지고 그저 성실하게 일을 수행했던 것이 엄청난 악을 행하며 세기의 범죄를 행했다. 그래서 악의 평범성이 된다. 내가 하는 일에 악이라고 생각 못하고 공감능력이 없고 상식적인 동정심이 없는 사람, 다른 사람이 죽겠다고 아우성쳐도 공감하지 못하는 관료적 성실성이 가장 악한 것이다. 여기에 대표적인 사람이 빌라도이다. 예수님이 죄인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으나 총독의 자리, 가이사의 충신의 자리에 있으려면 공감을 결여한 채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는다. 우리도 간증을 들으며 손가락질 하는게 아니라 나도 저 상황에 가면 그랬을 것이다 하며 공감해야한다. 가슴을 치고 그 사람의 아픔을 생각하며 죄의 비참함을 생각해야 한다. 이것이 얼머나 한 사람 한 가정을 무너뜨리는 일인지 생각해야 한다. 울음은 그 사람을 이해하며 생각할 때 나오는 반응이다. 공감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신 십자가에까지 나아가게 된다. 결국 예수님이 내 삶에 있으려면 큰 울음이 있어야 한다.
제가 섬기는 고등부 한 아이는 아버지가 집을 나가 안 돌아오시니 어머니가 손을 잡고 아버지를 찾으러 나갔고 아버지가 자살을 한 장면을 봤는데 아이는 그 상황에서도 장례식장에서 울지 못했다. 감정이 고장났다. 그런데 이 아이가 고등부에 올라가서 사무엘 큐티를 하다가 성전에서 사무엘이 홀로 자라는 것을 보고 하나님이 말을 걸어주는 본문을 보고 울음이 터졌고 이것이 공감이 되니 그 때 아버지의 죽음 사건이 묵상이 되고 성전에 있는 자신의 현실이 해석되니 펑펑 울었다고 한다.
3절
나를 잔멸한 이 사람으로 경건한 사람들은 울기 시작한다. 잔멸은 멧돼지가 포도밭을 마구 짓밟는 행위이다. 포도가 짓밟히니 터져서 마치 피가 낭자한 것처럼 흥건한 상황, 이런 상황이 바로 잔멸이다. 잔멸하다가 미완료로 표현되어서 이것이 오랜 시간 지속적으로 행했다는 표현이다.
누가하고 사울은 친했다. 사울이 나중에 바울이 되는데 바울과 함께 누가가 따라간다. 내가 친한 사람, 존경하는 사람의 과거를 가려줘야하는데 다 기록하고 있다. 이게 참 구속사이다. 그런데 잔멸하는 사람이 누구인가 사울이 도대체 누구인가? 스데반이 죽을 때 옷을 맡고 있었다고 한다. 내 옆에 나를 잔멸하는 사람으로 인해 큰 박해가 임하고 내 옷을 가지고 있는 사람을 통해 내 울음이 회복되는 것이다. 결국 나의 구원, 부활을 맡고 있는 사람이 내 옆에 있는 사람이다. 집에서 아내가 남편이 내 옆에 나를 잔멸하는 그 사람이 나의 구원을 도우는 자이다.
그런데 우리는 어떤가? 잔멸하니 끊어버리려한다.
적용
내가 크게 통곡하며 울었던 적은 언제인가요?
수많은 간증을 들으며 공감하나요? 아니면 이성적으로 판단하며 평가하나요?
내 옆에 옷 맡은 자는 나에게 어떤 존재인가요?
그 날에 우리 삶에 부활 기쁨의 그 날이 임하려면
3. 큰 기쁨이 있습니다.
4-8절
큰 박해, 큰 울음 뒤에 큰 웃음이 있다고 한다. 박해로 인해 흩어질 사람들은 다 흩어졌다. 그런데 그 성에 큰 기쁨이 있다고 한다. 그 성은 바로 사마리아 성이다. 사마리아 성은 다시 한 번 살펴보면 본래 이스라엘은 하나였으나 르호보암 때 남북이 분단되고 사마리아는 북왕국의 수도가 된다. 그런데 200년 뒤에 앗수르 제국에 의해 북왕국이 멸망된다. 앗수르 당시 사르곤 대왕은 북이스라엘을 멸망시킨 후에 새로운 정책을 만들었는데 다른 나라 살던 사람을 이스라엘 땅에 데리고 와서 살게 했다. 순수혈통에 집착하는 유대인들의 결집력을 흩어버리게 하기 위해 혼합시켰다. 그렇기에 남유다 사람들은 이 사마리아 사람들을 경멸했다. 개보다 못한 존재로 취급했다. 그 때 당시 여자보다 낮은 신분으로 여겼다. 그래서 원래 길을 가면 사마리아를 통과하며 가까운데 사마리아 땅을 밟지도 않으려고 빙 돌아갔다. 그러니 어떤가? 이 사실을 알고 있는 사마리아인들도 유대인들을 증오했다. 서로 골이 매우 깊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마지막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 너희가 그 경멸하는 그 사마리아에도 증인이 되라고 하신다. 사도들은 시도조차도 안 했다. 그런데 큰 박해와 큰 울음으로 흩어지게 되니 4절에도 한 번 더 흩어지다가 나온다. 8장에만 두번이나 쓰인다. 이 흩어지게 되니 흩어진 사람 중에 한 사람 빌립이 등장한다. 이 빌립으로 복음이 전해진다. 사마리아까지 전해지는 이 복음으로 이 성에 큰 기쁨이 가득했다고 나온다.
빌립은 어떤 사람인가? 우리는 대단한 사람 아니야? 생각하겠지만 대단한 사람들은 흩어지지도 않았다. 사도들은 흩어지지도 않았다. 족보도 이름도 없는 헬라파 유대인들이 흩어졌다. 빌립은 도망자였다. 스데반의 마지막 설교가 이것을 지적했다. 스데반의 설교로 인해 유대인들의 선민의식 율법을 깨뜨린다. 너희가 그렇게 대단했던 아브라함이 어떤 사람인줄 아니? 그 아브라함의 과거를 들통낸다. 아브라함이 원래 메소포타미아 출신이다 그 메소포타미아에서 우상을 섬기며 살았다라고 한다. 아브라함이 얼마나 찌질한지 우리는 안다. 아내를 두번이나 팔아먹었다. 그런데 이런 찌질이들도 하나님이 붙드니 쓰이더라가 스데반 설교의 초점이다. 사람이 아닌 하나님이 하신 일이다 그리고 그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로 이 땅에 오셨다.
그리고 모세도 누군지 얘기한다. 모세는 살인자요 도주자라고 한다. 그런데 우리는 아브라함, 모세를, 다윗을 본받아야 해 한다. 그러나 우리는 정확하게 알아야 한다. 사람이 아닌 하나님, 우리의 초점을 본받아야 할 사람이 아닌 하나님이 이 교회를 세우시고 복음을 퍼뜨리는 것을 알아야 한다. 빌립이 대단해서가 아니다. 빌립도 했다는 것이다. 오늘 6절 보면 무리가 빌립의 말도 듣고 라고 표현한다. 빌립도 하더라 이다. 원래 안 들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빌립은 사도가 아니라 집사였기 때문이다. 그러니 너희도 하나님의 손에 붙들리면 너희도 할 수 있다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 사람을 통해 사마리아 땅에 기쁨이 전해지며 기쁨이 그 성에 가득하게 된다. 무리 속에 한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성령님이 함께 하시니 빌립도 함께 한다. 그리고 이 빌립이 사마리아 땅으로 간다. 빌립은 도망자이자 죄인임을 아는 사람이었고 이런 사람들이 수천년간 내려왔던 그 경계를 넘어 복음을 전한다. 사마리아 인들이 그들이 원해서 그 땅에 혼합된 것이 아니야 하는 그 이해가 경계를 넘어 사마리아 온 성에 복음을 전한다. 그리고 그 복음으로 말미암아 기쁨이 가득하게 된다. 사마리아는 무시받던 곳이었다. 이런 곳에 빌립이 평신도가 된다. 그리고 4절에서 빌립이 전한 흩어진 사람들이 전한 내용은 예수 그리스도였다. 잘 살고 잘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 핍박 받고 십자가에 돌아가신 예수께서 부활하셨다 이 사실이 증거되니 이 사마리아 땅에 기쁨이 가득하게 된다.
적용
아직도 내가 넘지 못한 편견과 고정관념은 무엇인가요?
아직도 용서가 되지 않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그 사람이 이해가 되시나요? 그 사람과 내가 똑같은 죄인임이 믿어지시나요?
나는 어떤 경계를 넘어서서 어디로 나아가야 하나요?
공동체 고백입니다.
어느 날 아침에 전화가 왔다. 전화기 너머에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119구조대원이라고 자신을 밝힌 분이 다급하게 이야기 하셨다. 큐티하려고 시작했던 그 때에 전화가 와서 아버지가 교통사고를 당했는데 큰 트럭에 부딪혀서 날아가셨고 병원에 안가시려고 행패를 부리시고 계신다 하니 제가 급하게 전화받아서 아버지께 내려갔다. 그런데 그 병원에 안 계셔서 찾으니 아버지가 다리가 부러지셨는데 기어서 술을 드시러 가셨다. 첫 번째 설교했던 늘 앉아있던 그 자리. 갔더니 아버지 옷이 다 기어져있었는데 술을 드시는 모습을 보니 마음이 무너졌다. 하나님께 기도하며 모시고 서울로 올라왔다. 차에 태우는데도 소리를 지르시며 아프다고 하시고 참 버려버리고 싶었다. 그런데 끝이 아니었다. 입원할 곳이 없어서 돌아다니다가 간신히 입원시켰는데 병원에서 나가라고 했다. 이것이 4번 반복됐다. 마지막에 큰 병원에 가서 검사 다 받는데 아버지를 휠체어에 태우고 움직이는데 환자가 해야할 것이 참 많이 있어서 겨우 혼자 고군분투하며 뛰어다녔는데 돌아오니 아버지가 병원 바닥에 소변을 누셔서 치우고.... 입원한 곳에서도 얌전히 있는 것이 아니라 행패를 부리셨다. 정말 저에게 큰 박해가 임했다.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나에게 왜 이런 박해가 임했냐, 내가 아버지 구원을 위해 적용했는데 한 번도 아버지기도를 빠뜨린 적이 없는데 왜 이런 시간을 주시나 했으나 이 큰 박해로 인해 제 지경이 넓어졌다. 어느 날 병원에서 쫓겨나 이동하는데 화창한 오후 아버지가 제 옆에서 울음을 터뜨리셨다. 그 때 아버지의 삶이 이해되기 시작했다. 내가 떠나고 아내가 떠났을 때가 제 나이 때였는데 용서가 되고 이해가 되기 시작했다. 햇살이 굉장히 화창했는데 아버지 어떻게 천국갈 수 있냐고 물어봤는데 쫓겨나면서도 계속 예배를 드렸었는데 아버지께서 예수 이름으로 라고 대답하셨다.이 울음으로 아버지가 이해가 되고 용서가 되고 정말 증오했던 아버지 내가 넘지 못했던 경계의 아버지였던 사마리아까지 복음이 전해졌고 그로 말미암아 제 삶에 큰 기쁨을 허락해주셨다. 왜 이런 박해를 주셨는지 처음에는 이해가 안 됐는데 하나님께서는 그 날을 저에게 허락해주시기 위해였다. 아버지 마지막 날 발인 날 본문이 데살로니가 전서 4장 13절이었다. 아버지의 죽음을 하나님께서는 죽음이 아니라 잔다라고 해주셨다. 그리고 이 자는 자들이 먼저 일어난다고 하신다.
a :
1.양육과정을 잘 인도해주시기&큐티 잘하길
2.사업 가운데 맡겨진 자리를 지키는 은혜주시길
3.삶 가운데 물질적 축복이 넘치길
4.가족이 아프지 않고 건강하길
5.나와 목장원들 모두 신교제&결혼 하길.
b :
1.주중5일동안 열심히 큐티할 수 있도록,
2.신교제,신결혼을 위해 기도할 수 있도록,
3.캘린더에 적어놓은 모집공고에 입사지원서 넣을 수 있도록.
c :
1.신교제 및 기다려야 할 일에 대해서 인내할 수 있도록.
2.큐티잘 할 수 있도록.
3.신교제, 신결혼 할 수 있도록.
d:
1. 돈 많이 벌 수 있는 지혜가 깃들여지길
2. 한주동안 많이 바쁠거 같은데 직장에서 체력유지 잘 할 수 있길,
3. 신교제 신결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