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어나 걸으라. 행3장 1-10절.
김성우목사님
오늘 본문에 평생 주저 앉은 한 사람이 일어섭니다. 어떻게 이 사람은 그 비극의 자리에서 일어설수 있었을까요?
우리가 주저 앉은 자리에서 일어나 걸으려면
첫째, 구걸하는 인생임을 알아야 합니다.
1-3절입니다.
1 제 구 시 기도 시간에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올라갈새
2 나면서 못 걷게 된 이를 사람들이 메고 오니 이는 성전에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구걸하기 위하여 날마다 미문이라는 성전 문에 두는 자라
3 그가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들어가려 함을 보고 구걸하거늘
사도행전 2장에 오순절 성령이 임했죠. 오순절이란 50일을 말합니다. 구약에서 50일은 하나님의 은혜로 홍해를 건너 구원받은 출애굽 백성들이 50일만에 시내산에서 말씀을 받은 날짜입니다. 성령이 임하고 베드로의 설교로 신약에서 교회가 처음 세워진 이후 본문이 오늘 본문입니다. 성령이 임하고 교회가 세워진 후 교회에 첫 기적이 행해지는 본문이죠.
이 성령 충만과 교회가 세워지는 놀라운 역사 가운데 서 있었던 두 사람. 요한과 베드로가 등장합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뭘하나요? 1절에
1 제 구 시 기도 시간에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올라갈새
제 9시는 오후 3시입니다. 6을 더하면 알 수 있어요. 성령의 놀라운 역사를 경험한 이후에도 여전히 정해진 기도 시간에 기도를 하러 성전에 올라가는 것이죠. 성전에 올라간다를 미완료 과거형을 사용하여 계속해서 습관이 될 만큼 자주 기도의 시간을 가졌다는 말씀입니다. 베드로가 혼자 간 것이 아니죠. 요한과 함께 갔다는 것은 공동체가 함께 기도하고 예배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교회에요. 그리고 이렇게 함께 올라갈 때 하나님께서는 또 다른 한 사람을 일으키십니다. 오늘 본문에는 누가 나오나요?
2절에
2 나면서 못 걷게 된 이를 사람들이 메고 오니 이는 성전에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구걸하기 위하여 날마다 미문이라는 성전 문에 두는 자라
2절에 보니 나면서 못 걷게 된 한 사람. 성전에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구걸합니다. 자발적으로? 자기가 자원해서 구걸하나요? 아니죠. 2절에는 구걸하기 위하여 날마다 성전 문에 두는 자라고 기록되어 있죠. 자의가 아니라? 사람들이 메고 와서 이 사람을 통해서 돈을 벌기 위해서.. 성전 문에 두는 거죠.
자기가 원치 않은 장소에.. 던져진 존재로.. 자기가 원치 않은 모습으로 태어나.. 구걸하는 일로 살아가는 거죠. 그냥 던져진 존재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던져진 존재로 태어나고 던져진 존재로 구걸하며 그 구걸한 돈까지도 딱 먹을만큼만 빼고 다른 사람들이 가져가죠. 이것이 우리의 모습이 아닌가 생각이 됩니다. 하나님이 없는 그리고 하나님을 떠난 우리의 모습입니다. 이 세상에 그저 던져진 채로.. 실존을 위해 구걸하며 살아가는 것이죠.
구걸을 하려면 어떻게 하나요? 이 아름다운 문을 등 뒤에 두고 앉아야 합니다. 이 성전의 아름다움 앞에서 그 문을 열고 들어가지 않고 성전을 등 뒤에 두고 세상을 향해 앉아 있으며 성전에 오는 사람들에게 구걸을 하고 있는 것이죠. 세상을 향해 구걸하는 이 모습이 바로 우리의 모습, 내 모습임을 알아야 합니다.
이 본문을 묵상하니 제일 먼저 생각난 사람이 저희 아버지였습니다.
3절 그가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들어가려 함을 보고 구걸하거늘
그런데 이 사람은 왜 구걸을 할까요? 바로 자기가 앉은 뱅이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아는 것이 지혜입니다. 자기가 이 성문 앞에 던져 졌고 자기가 앉은 뱅이임을 알기에 구걸을 하는 거죠. 이게 중요합니다. 구걸이 나쁜 것이 아니에요. 구걸이란 헬라어 단어를 찾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이 단어가 자비 동정 긍휼이란 단어더라구요. 심지어 사도행전 9장 36절이나 10장 2절 24장 17절에는 자비의 마음에서 나오는 구제로 하나님이 칭찬하실 때 이 단어를 쓰십니다. 이 단어 엘레에모쉬네는 이 단어 자체가 하나님의 속성을 의미하는 단어로 인간에게서 나올 수 없는 즉 우리가 가지고 있는 어떤 것이 아닌 누군가가 주어야만 할 수 있는 어떤 것인거죠.
즉 무엇입니까? 구걸하는 행위가 잘못된 것이 아니라 그 대상을 바로 찾아가야 되는 것입니다. 세상을 향할때는 구걸이지만 등을 돌려 하나님께 구하면 기도가 됩니다. 남에게 구하면 구걸이지만 내 아버지께 구하면 기도이죠. 말씀의 약속으로 하나님께 구해야 합니다. 내 모습이 어제 또 넘어지고 실수해도.. 내 아버지 하나님께.. 약속을 의지해서.. 주님 저는 날때부터 앉은뱅이입니다. 저는 스스로 설 수가 없습니다. 주님 도와주시옵소서. 구하는 이것이 구걸이 아니라 기도이죠.
누가 구걸할 수 있습니까? 나 혼자 잘살 수 있어 하는 사람은 결코 구걸하지 않습니다. 내힘을 의지하고 스스로 일어서려 하죠. 그러나 내가 날때부터 죄인이며 뼛속까지 죄인임이 인정된 사람. 주님의 도움 없이는 하루도 내가 설 수 없다는 사람. 그 사람이 바로 주님께 구걸, 즉 구하는 것이고 약속과 말씀으로 구하는 것죠. 이것이 바로 기도입니다. 아침마다 일어나 구해야 합니다. 어찌보면 저희 아버지가 믿음이 참 좋았던 것 같습니다. 거절해도 그다음날 또 바로 전화가 옵니다. 주여.
베드로와 요한 역시 성전에 하나님께 구걸하러 올라간 거에요. 구한것이죠. 왜냐하면 베드로는 자기가 얼마나 죄인인지 알기 때문에.. 삼천명이 모였지만 결코 자기가 이 교회를 할 수 없는 사람임을 알기에 구걸하러 갔고, 날때부터 앉은뱅이인 한 구걸하는 사람을 만난 겄어죠.
하나님이 없다면 우리는 세상에 던져진 존재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믿는 우리는 하나님의 정확한 뜻으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누군가의 도움으로 성전에 뒀어요. 이곳에 하나님의 뜻과 계획으로 던져진것이죠. 매주 여기에 앉혀 놓았겠죠. 그렇다면 여러분들을 사랑하시고 여러분들의 아버지 되신 하나님께.. 구걸하십시오. 말씀을 붙들고 오늘 구하십시오. 구걸하는 행위가 틀린 것이 아니라 우리가 구걸하는 방향과 대상이 틀린 거죠. 세상이 아니라 우리는 우리 아버지께 구걸, 구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분의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주님 저는 앉은뱅이입니다. 저는 이 중독을 끊어낼 수가 없습니다. 저는 이 자리에서 일어설수가 없습니다. 주님 제가 죽게 되었습니다. 구할 때.. 긍휼하시고 자비하신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을 일으키실 것입니다.
적용질문 드립니다.
내가 지금 주저앉아 일어서야 할 자리는 어딘가요? 그래서 사람에게 구걸하나요? 하나님께 구걸하나요? 무엇을 구걸하나요? 시간을 정해 놓고 구걸 즉 기도하나요?
두번째, 일어서기 위해서 더불어 주목해야 합니다.
3 그가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들어가려 함을 보고 구걸하거늘
4 베드로가 요한과 더불어 주목하여 이르되 우리를 보라 하니
5 그가 그들에게서 무엇을 얻을까 하여 바라보거늘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들어갈 때 구걸하는 이 앉은 뱅이를 바라 봅니다. 그런데 3절에 보니 이 거지가 먼저 베드로와 요한을 바라보죠. 3절부터 5절까지 보다라는 동사가 4번이나 반복됩니다. 3절에 보고 4절에 주목하여 보라 5절에 바라보거늘
이 4가지가 다 본다는 내용이자나요. 그런데 놀랍게도 이 4개의 단어가 전부 다릅니다.
4절 읽어보겠습니다.
4 베드로가 요한과 더불어 주목하여 이르되 우리를 보라 하니
주목하여 제일 중요한 단어에요. 4개 각기 다른 단어 중에 주목하다는 원어로 아테니조인데 이게 왜 중요한가? 요한과 베드로가 더불이 주목했어요. 누구를? 구걸하는 거지를.. 날때부터 장애를 입은 하반신 마비자. 평생 성전 문 앞에 앉았지만 성전에 안 들어가본사람. 사람들이 처다보지도 않는 사람. 동전 몇푼 던져다 주고 사람들의 뒷 모습만바라보는 그 사람을 더불어 주목했다. 아테니조 했다.
아테니조가 뭐냐면 이 단어가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볼 때 쓰이는 단어에요. 구약에 이 단어가 쓰인 본문이 모세가 하나님께서 직접 쓰신 율법을 받아 시내산에서 내려올 때 사람들이 모세얼굴에서 빛이 나니 모세를 하나님처럼 봤어요. 출애굽기 34장 30절에 보면 모세의 얼굴에 광채가 남을 보고 두려워했다고 해요. 그를 하나님처럼 보니 얼굴을 수건으로 가렸죠. 그때 모세를 바라보던 사람들의 시선이 아테니조에요. 저분은 하나님이다.
신약에도 아테니조가 나와요. 사도행전 1장 8절. 우리가 큐티해서 너무 잘아는 구절이죠?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이 말씀을 유언처럼 하신 후에 9절 구름이 그를 가리워 보이지 않게 하더라. 구름이 가려졌죠? 구름이 가리워졌으니 유심히 봤겠죠? 10절에 제자들이 자세히 하늘을 처다보고 있는데 이게 아테니조에요. 그러니 아테니조가 뭐냐? 아테니조는 하나님의 영광을 자세히 살피는 것이 아테니조에요. 스데반이 죽기 직전 사도행전 7장 55절에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예수님을 바라봄. 아테니조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영광을 살피는 아테니조를 오늘 본문에 누구를 보고 있어요? 이 눈을 바라보는 눈을 가지고 총독도 아니고 율법사도 아니고 바리새인도 아니고 누굴 봅니가? 한낱 장애인. 그것도 거지. 평생 구걸하는 아무 소망이 없는 한 사람 인생에 실패한 것 같은.. 나에게 도움이 안되는 오히려 나에게 불필요한 감정을 일으키는 한 사람. 그 사람을 어떻게 보나요? 그 사람을 하나님처럼 보는 거에요.
우리는 대단하고 성공하고 멋있어야 그 곳에 하나님의 형상, 영광이 있는 줄 알아요. 그래서 구름에 가리운것처럼 볼수 없기에 자세히 봐야 합니다. 내 옆에 한 사람. 쓸모없다고 여긴 한 사람. 그 사람을 어떻게? 아테니조. 마치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그 속에 하나님의 영광이 숨어있어요. 우리들교회 와서 평생 증오하고 원망했던.. 매일 나에게 전화해서 구걸하던 알콜중독자인 아버지속에 하나님의 영광이 있는지 몰랐어요. 하지만 우리들교회와서 내 안에 거대한 죄악. 내 뿌리 깊은 죄를 바라보니.. 나의 깊은 어둠, 그 죄악속에 숨겨진 그 가운데 예수의 영광을 보게 되니 평생 죽이고 싶었던 저희 아버지를 아테니조 할 수 있었습니다.
이 바라봄이 우리를 일으킵니다. 사형선고 받은 것 같은 죄악으로 얼룩진 우리를 하나님께서.. 구걸하며 그저 세상에 구걸하며 살아가는 인생인 우리를.. 하나님 보실 때 칭찬할만한 어떤 것도 없는 우리를 어떻게 보십니까? 하나님께서 자신의 영광, 예수그리스도 독생자 아들의 영광으로 우리를 바라 보는 것이죠. 제일 안되는 것이 가족이에요. 아프리카 불쌍한 사람은 도울수 있어도 술처먹고 욕을 퍼붇는 내 가족을 돕기는 너무 힘이듭니다. 하지만 가족은 구원으로 묶어두신.. 내 거룩을 위한 최고의 선물입니다. 도울 힘도 나에게 주세요. 또 실수하고 또 죄짓고 또 넘어지는 우리를 여전히 자신의 아들처럼 바라보시는 하나님의 바라봄으로..
그 은혜로 우리가 일어섰기에 우리 역시 내 옆에 한 사람을 이렇게 바라 봐야 합니다. 나에게 아무 유익이 되지 않은 그 사람을 섬기는 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에요. 잠언 19장 17절에 뭐라하나요? 가난한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사람은 여호와께 빌려 드리는 것이니 그가 한 일에 대해 그분이 갚아주실 것이다고해요. 나에게 갚을 수 없는 그 사람을 돕는 것이 하나님께 빚을 지게 하는 것입니다.
적용질문드립니다.
나를 힘들게 하는 내 가족, 직장 상사, 내 친척을 어떻게 바라보나요? 그 가운데 하나님의 영광이 있음이 믿어지나요? 목장에서 또는 부서에서 힘든 지체를 어떻게 바라보나요? 더불어 주목해야 할 한 사람은 누구인가요?
세 번째, 나사렛 예수 이름으로 손을 잡아 일으켜야 됩니다. 6-8절입니다.
6 베드로가 이르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하고
7 오른손을 잡아 일으키니 발과 발목이 곧 힘을 얻고
8 뛰어 서서 걸으며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송하니
베드로와 요한이 구걸하는 이 앉은뱅이를 더불어 주목하여 바라보니 어떻게 합니까? 아마 자신을 바라보는 베드로와 요한에게 뭔가 동전 한닢을 얻을수 있겠다고 생각했겠죠. 그런데 베드로는 이렇게 말합니다.
6절에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하고 아멘.
은과 금을 이야기한 이유가 뭘까요? 바로 눈앞에 미문이 있자나요. 은과 금으로 치중된 황동 이중문. 다 은과 금을 떠올립니다. 마치 성전에 들어가면 은 과금을 얻을 수 있는 것처럼,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과 금을 주는 것처럼 믿게 하는 문이 미문이에요. 이 어마어마한 은과 금 앞에 베드로는 나사렛 예수 이름을 전합니다.
그런데 그냥 예수 이름으로라고 말할 수도 있었을 텐데? 왜 나사렛 이라 했을까요?
나사렛은 예수님께서 어릴 적 자란 해발 380미터의 작은 마을입니다. 당시 사람들에게는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할 정도로 무시와 멸시의 장소이죠. 무시받고 멸시받는 나사렛 이름으로 베드로는 한 사람을 일으킵니다. 우리는 나사렛 예수의 이름을 전해야 합니다. 나의 가장 낮은 모습, 연약한 모습, 나의 실패와 눈물로 예수를 전하며 그 사람을 일으켜야 하는 것이죠. 예루살렘, 베들레헴 멋진 성전에 계신 미문에 앉으신 예수님이 아니라 지금 일어설 수 없는 한 사람, 넘어져 도저히 일어날 힘이 없는 한 사람에게 누구를? 나사렛 예수를 전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베드로가 어떻게 하나요?
7 오른손을 잡아 일으키니 발과 발목이 곧 힘을 얻고
그냥 말만 한 것이 아니에요. 오른손을 잡았습니다. 오른 손을 잡아 일으키니 발과 발목에 힘을 얻은 것이죠. 베드로는 아마 생각했을 것입니다. 비슷한 경험이 있었죠. 언제인가요? 베드로가 폭풍 가운데 물에 빠져 죽게 되었을 때.. 허우적 거릴 때.. 혼자서는 결코 일어설 수 없는 그 때에.. 거대한 세상의 바람을 바라보며 두렵고 무서워 주님 살려주세요! 외칠 때.. 정말 자신 만만했죠. 자신은 어부고 갈릴리 바다는 자기 나와바리에요. 어릴때부터 놀던.. 눈감고도 가는 그런 곳이 갈릴리 바다입니다. 그런데 가장 자신 있던 그곳에서 베드로가 빠져 죽게 된것이죠. 모든 능력이 사로잡혀 죽게 되어.. 도저히 스스로 일어설 수 없는 베드로를 바라보며.. 주님 살려달로고 소리치는 베드로에게.. 우리 예수님께서 어떻게 하사니요? 즉시 손을 내밀어... 즉시 오른 손을 잡아 베드로를 일으킵니다. 베드로는 주님이 자신에게 하신 일을 생각하며 손을 잡았을 거에요. 자신의 실패. 나사렛. 연약함을 기억하며 주님 이 사람도 일으켜 세워 달라고 나사렛 예수 이름으로 그의 오른손을 잡아 일으켰을 것입니다.
믿음이 없어 물에 빠진 자신. 그리고 예수님을 3번 부인하며 저주하였던 자신. 마지막 순간에 예수님을 떠난 자신의 나사렛. 자신의 연약함. 그 연약함 속에서도 자신의 손을 놓치 않으신 우리 주님의 오른손이 자신의 간증이기에...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하며 오른손을 잡아 일으킨 것이죠.
목요일에 한 집사님을 심방 하였습니다. 점심에 심방한 집사님이.. 아내를 살찍 밀친 것이 화근이 되어 꼬이고 꼬여 접근 금지명령을 당하여.. 살짝 밀치고 화가나 집을 나갔는데 그 뒤로 2년반동안 집을 못들어가고 지난주 이혼 판결을 당하셨습니다. 때린적도 없고.. 너무 억울했는데 내 집에 내가 왜못들어가?하며 사업도 하고 돈도 있고 법쪽 인맥도 있었기에 자신만만하게 경찰 조사도 하지않고 있다 결국 이혼을 당하게 되었죠. 2년반 시간동안 얼마나 많이 회개하고 돌이키고 철저히 법을 지키고 아내에게 모든 것을 다 줘도 되니 이혼은 안되도록 사수하였지만 결국 이혼이라는 법원 판결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점심에 이 집사님 심방을 하고 저녁에 또 목장 탐방을 갔는데.. 똑같이 접근 금지 명령을 당한 집사님이 계신거에요. 그런데 이분은 이혼 할거다. 나도 아내 필요없다. 하며 아내욕을 막 하시는데... 이 집사님에게 점심때 만난 집사님 나사렛 간증을 들려줬습니다. 그리고 모든 목장식구들이 이 집사님 편을 들며 아테니조. 주목하여 바라보며 함께 목장을 하니 이 분이 목장을 마치고 아내에게 사과하겠습니다 그리고 오랫동안 주일예배에 못드렸는데 이번주 나가겠습니다. 그리고 이분은 접근금지를 당해.. 목장 밥에 제일 은혜를 받는다고해요. 은과 금은 내게 없으나 목장 밥이 우리를 일으킵니다. 저하고 약속했는데 장집사님 오셨나요? 하는 적용을 한 것이죠. 증오와 원망의 앉은 자리에서 일어나 성전으로 함께 걸어간 것입니다. 뭐죠? 우리의 눈물과 아픔. 수치의 나사렛이 다른 사람을 일으키는 예수그리스도의 능력이 되는 것이죠. 이것이 사명입니다. 이것이 교회입니다.
저 역시 평생 죽이고 싶었던 아버지였는데.. 긴 세월 내가 하나님 앞에 얼마나 죄인임을 깨닫고.. 아버지 안에 숨은 하나님의 영광을 아테니조 하게 되니.. 예수 믿게 해준 부모가 최고의 부모임을 고백할수 있었습니다. 아버지 속에 있는 하나님의 은혜의 경륜을 깨닫게 되니.. 아버지의 손을 잡게 되었고.. 그 잡은 손으로 아버지를 휘문 성전에 모셔 올수 있었어요. 그때 아버지 모시고 올 때 아내와 장모님이 베드로와 요한이 되어 오른손을 잡아 모시고 오셨죠. 평생 술에 취해 앉아 있었던 아버지가 휘문 성전에 들어와 일어나 예수를 영접했습니다.
(아버지 휠체어에서 일어선 사진)
8절에
8 뛰어 서서 걸으며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송하니
평생 성전에 등을 돌렸던 한 사람이 돌아옵니다. 세상을 향해 구걸하다 이제 하나님을 향해 기도하게 됩니다. 제일 중요한 것은 나사렛 공동체입니다. 우리는 세상에 은과 금을 공급하는 자들이 아닙니다. 은금이 없고 가난했어도 나사렛 예수 이름만 있으면 생명이 있는 것이 교회이죠. 걷고 뛰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성전에 들어간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평생 넘지 못했던 미문을 열고 들어가 예배하는 것이죠. 평생 구걸만 했기에 앞으로 구원을 향한 힘든 훈련들이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 문을 열고 이 사람만 들어갔나요? 아니죠. 베드로와 요한도 함께 들어갔습니다. 나사렛 예수 이름으로 걸으라!는 미완료입니다. 다시는 주저 앉지 말라는 거죠. 주저 앉더라도 이 공동체와 함께.. 베드로와 요한과 함께 다시 일어서라는 것이죠. 이것이 교회입니다. 주님이 나를 어떻게 바라보셨는지를 바라보며.. 내 옆에 지체를 바라볼 때.. 우리의 나사렛 간증으로 주님이 나를 사용하셔서 교회를 세워 나가실 것입니다.
적용질문드립니다.
목장에서 밥을 하고 있나요? 나의 나사렛 간증은 무엇인가요? 공동체가 함께 손을 잡고 일으켜야 할 한 사람은 누구인가요?
---------
기도제목
A
- 내가 앉은뱅이임을 인정하고 잘 사과하고 주일성수할 수 있는 부서로 잘 선택할 수 있도록
- 언니 낼부터 시험관 하는데 생명 주시기를
B
- 언니한테 사과 적용할 수 있도록
- 전도하려는 친구를 위해 기도하고 적응할 수 있도록
- 취준 불안할때마다 말씀 볼 수 있도록
- 가정예배 위해서도 큐티하면서 기도할 수 있도록
C
- 사람에게 구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구걸할 수 있도록
- 양육자로써 말씀보고 나눔 잘할 수 있도록
- 가족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