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장보고서
[말씀요약]
1. 의심에 빠질 때, 나아가 예배해야 합니다(20-22)
20 네가 싸울 만한 계교와 용력이 있다고 한다마는 이는 입에 붙은 말 뿐이라 네가 이제 누구를 의뢰하고 나를 반역하였느냐 21 이제 네가 너를 위하여 저 상한 갈대 지팡이 애굽을 의뢰하도다 사람이 그것을 의지하면 그의 손에 찔려 들어갈지라 애굽의 왕 바로는 그에게 의뢰하는 모든 자에게 이와 같으니라
의지와 의뢰라는 단어가 19절부터 27절까지 무려 8번이나 나온다.
사람은 누군가를 늘 의지한다.
그런데 랍사게의 말로 히스기야의 의뢰를 외치는 것이다.
내가 무엇을 의뢰했는지 원수가 안다.
예수 믿지 않는 사람이 내가 무엇을 의뢰했는지를 안다.
상대방이 내가 무엇을 의뢰했는지를 외치는 것이다.
아버지 아하스의 악함으로 히스기야를 깨어있게 하시더니 개혁을 해도 앗수르가 쳐들어오고,
계속 의뢰할 수밖에 없게 하시고 의지할 수밖에 없게 하시는 것이
히스기야로서는 그것이 가장 믿을만한 환경이 되게 하신 것이다.
그래서 히스기야가 이사야를 좋아하고 그의 말씀을 좋아할 수밖에 없게 하신 것이다.
그렇기에 오늘 랍사게를 통한 조롱이 또 시작된다.
아픈 곳을 딱 꼬집는다.
'네가 나를 배반해서 작전도 짜고 군사력도 키우면 될줄 알았지?'한다.
그러고는 히스기야를 대신해서 답까지 해주는데 '애굽을 믿는구나!' 한다.
실제로 히스기야는 하나님을 의뢰하지만 애굽의 힘을 기대했다.
애굽이 반앗수르 동맹의 뒷배였다.
이스라엘, 유다, 아람, 블레셋 등 앗수르와 애굽 사이에 있던 작은 나라들을 앞세워서
앗수르가 애굽까지 공격하는 것을 막으려고 했다.
작은 나라들 뒤에서 그렇게 조종하여 앗수르에 반대하게 만들어놓고는 정작 앗수르가 침략을 하니 입을 싹 씻는다
세상에서 누가 나를 도와주겠는가.
앗수르왕 산헤립은 애굽을 상한 갈대 지팡이라고 한다.
지팡이는 지팡이인데 지팡이가 아니라는 것이다.
재료가 참나무가 아니라 갈대고, 심지어 상했다.
쓸 수 없는 지팡이라는 것이다.
도와줄 것처럼 하다가 뒤에 싹 숨어버리는 애굽이 바로 상한 갈대 지팡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런데 사실 이것은 애굽의 문제가 아니라 유다의 문제다.
몸에 벤 애굽의 습성이 없어지지 않는다.
안되는줄 알면서도 끊지 못하는 것이 애굽이다.
유다가 이렇게 달라붙으니 매력이 하나도 없는 것이다.
결국 애굽을 상한 갈대 지팡이로 만드는 것은 유다다.
누가 진짜 갈대인가를 물어본다면 애굽이 아니라 유다다.
유다의 믿음이 갈대처럼 흔들리고,
심지어 상한 갈대처럼 꺾이고 부서져 내리니까 하나님이 아닌 애굽을 의뢰한다는 것이다.
나를 지탱해줄 지팡이인줄 알았는데 상한 갈대라니 속았어!가 아니라,
그런 지팡이를 의뢰한 내가 상한 갈대라는 것이다.
허리가 끊겨 말라가는 갈대, 밑동 잘린 나무가 바로 나라는 것이다.
그런데 유다가 이렇게 자기 모습은 보지 못하고 앗수르 왕 말만 들으면 의심만 생긴다.
상한 갈대는 멀리서 보면 표가 하나도 안난다.
도리어 멋있어 보인다.
그런데 막상 가까이 가보면 상한 갈대다.
그러니 외모를 취하면 안된다.
22 너희가 내게 이르기를 우리는 우리 하나님 여호와를 의뢰하노라 하리라마는 히스기야가 그들의 산당들과 제단을 제거하고 유다와 예루살렘 사람에게 명령하기를 예루살렘 이 제단 앞에서만 예배하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셨나니
앗수르 왕은 히스기야가 얼마나 하나님을 경외하고 의지했는지 안다.
대단한 종교 개혁을 했다는 것도 안다.
유다 전국에서 산당과 제단을 제거한 것도 아는데, 하나님만 모른다.
그래서 히스기야가 산당과 제단을 다 제거하였기에 하나님도 더이상 히스기야를 돕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히스기야는 하나님만 경외하고 의뢰해서 어디로 가든 형통했는데, 앗수르가 쳐들어오니
하루 아침에 유리한 상황이 불리한 상황이 되었다.
바로 이런 상황에서 '하나님도 너를 돕지 않는거야!' 이렇게 말하게 되면
당장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에 대한 의심이 생긴다.
갑작스런 고난의 파괴력은 바로 이런 것이다.
우리의 믿음을 흔든다.
가뜩이나 약한 믿음을 무너뜨린다.
의심에 빠지게 하는 것이다.
이때 어떻게 해야할까?
놀랍게도 앗수르 왕의 말에서 그 힌트를 얻을 수 있다.
'예루살렘 이 제단 앞에서만 예배하라 하지 아니하였느냐'(22)
'네가 여호와만 예배하라고 했잖아! 그것이 잘못이야! 산당은 많을수록 좋고 신도 여럿일수록 좋은데
오직 성전에서만 예배하라고 하니 이런 문제가 생긴거야!'
이런 말이 히스기야로 하여금 의심에 빠지게 한다.
문제가 생기면 우리도 이런 의심이 생긴다.
이런 사탄의 궤게는 무긍무진하다.
이것이 고난 앞에서 상한 갈대 지팡이를 의지하게 만든다.
의심에 빠뜨리는 생각이다.
이럴 때일수록 여전한 방식으로 예배의 자리를 더욱 굳세게 지켜야 예배를 통해 깨닫는 것이 있다.
의심의 치료제는 믿음밖에 없다.
그런데 혼자서 지킬 수 없으니 하나님이 불러서 함께 묶어주신 공동체로 나아가야 한다.
함께 모이고 뭉쳐서 예배하는 것이다.
Q. 자꾸 의지하고 싶은 나의 애굽 지팡이는 무엇입니까?
Q. 의지하는 지팡이가 상한 갈대라서 슬픕니까, 내가 상한 갈대라서 슬픕니까?
Q. 주일, 수요, 목장 예배에 어떤 마음으로 나아갑니까?
2. 절망에 빠질 때, 엎드려 기도해야 합니다(23-25)
23 청하건대 이제 너는 내 주 앗수르 왕과 내기하라 네가 만일 말을 탈 사람을 낼 수 있다면 나는 네게 말 이천 마리를 주리라 24 네가 어찌 내 주의 신하 중 지극히 작은 지휘관 한 사람인들 물리치며 애굽을 의뢰하고 그 병거와 기병을 얻을 듯하냐 25 내가 어찌 여호와의 뜻이 아니고야 이제 이 곳을 멸하러 올라왔겠느냐 여호와께서 전에 내게 이르시기를 이 땅으로 올라와서 쳐서 멸하라 하셨느니라 하는지라
랍사게는 이제 산헤립 왕의 말로 유다 백성들을 의심에 빠뜨렸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이제는 자신의 목소리를 낸다.
바로 조롱의 목소리다.
조롱하고 또 조롱하다 이제는 하나님까지 조롱의 대상으로 삼아버린다.
하나님을 전혀 모르는 자가 하나님의 뜻을 들먹인다.
하나님의 뜻으로 자신이 예루살렘을 멸하러 왔다는 것이다.
그리고 심지어 하나님이 자신에게 말씀하셨다고 한다.
'이 땅으로 올라와서 쳐서 멸하라!' 하며 직통계시를 받았다고 한다.
랍사게의 이 말은 히스기야나 유다 백성들에게는 훨씬 더 심각하게 들렸을 것이다.
왜냐하면 아하스 왕 때부터 이사야 선지자가 계속해서 경고한 내용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유다 백성들은 안들었다.
다들 귀를 기울여 회개하지는 않았어도 알고는 있었다는 것이다.
이사야 선지자의 말대로 지금 앗수르의 포위를 받게 되었는데,
그 지휘관이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말씀하셨다고 말하니 얼마나 경악했겠는가.
히스기야가 이 의뢰인 하나님을 최후의 보루처럼 믿고 있을지도 모르니
랍사게는 이제 마지막 하나 남은 이 의뢰를 부숴버리려고 하고 있다.
깊은 절망에 빠지게 된다.
그런데 이것이 사탄의 전략임을 알아야한다.
사탄은 호시탐탐 우리를 삼키려고 믿음을 흔든다.
의심은 물음표지만, 절망은 느낌표다.
사탄은 의심을 넘어 절망에 빠뜨리려고 한다.
'하나님이 너를 버렸다!', '더이상 희망이 없다!'
사탄은 의심과 절망으로 욥을 삼키면서 그 정점으로 욥의 아내의 입술에서 나오는 말을 사용한다.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
의심에 빠졌다고 예배의 자리에 나오지 않으면 점점 더 깊은 의심의 늪으로 빠져들다 결국 절망에 잠긴다.
절망은 끝이자 죽음이다.
죽고싶다는 생각은 사탄의 유혹이다.
절대로 들으면 안된다.
우리는 자동적으로 기대가 생기고 욕심이 발동하고 야망이 나오는 존재다.
상황이 다르고 정도가 다를뿐 있는 것은 모두가 똑같다.
문제는 그 대상이다.
하나님만을 기대하고, 하나님만을 사랑하고, 하나님만을 원한다면 무슨 문제가 있겠는가.
그런데 하나님 아닌 것들을 기대하고 탐내고 바라니까 문제가 되는 것이다.
세상에는 우리의 기대와 욕심과 야망을 채워줄 수 있는 곳이 없기 때문이다.
잠깐은 만족시켜준다.
그러나 언제 사라져도 이상할 것이 없는 것이 돈, 쾌락, 권력, 인기, 명예다.
그러니 하나님을 떠난 기대나 욕심이나 야망은 반드시 절망으로 끝날 수밖에 없다.
왜 하나님은 믿는 우리를 절망에 빠지게 하는 세상의 조롱을 허락하실까?
정말 멸하려는 뜻일까?
절대로 아니다.
하나님은 멸하기로 하셨다가도 우리를 불쌍히 여기셔서 뜻을 돌이키시는 분이다.
구원하기로 작정하셨다가 뜻을 돌이키는 경우는 없다.
성경에 한 번도 없다.
사울 왕을 폐하신 것도 구원을 약속하셨다가 멸하신 것이 아니다.
계속 경고하시는데도 사울이 돌이키지 않자 심판하신 것이다.
하지만 출애굽 때 이스라엘 금송아지 사건이나 북이스라엘 아합이나 남유다의 므낫세의 경우만 보아도
하나님은 멸하기로 하셨다가도 그들을 불쌍히 여기셔서 살려주신다.
지금 예루살렘을 포위하고 있는 앗수르 군대도 그렇다.
불과 60년 전만해도 앗수르의 수도 니느웨에는 선지자 요나가 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외쳤다.
요나 선지자는 그곳에 너무 가기 싫어서 대충 외쳤는데도 거기에는 회개 운동이 일어났다.
그랬더니 뜻을 돌이키셔서 니느웨를 살려주셨다.
앗수르 군대가 사실 하나님의 은혜의 최대 수혜자 중 하나다.
그런데 단 2세대 지나서 하나님을 모를뿐만 아니라 대적하고 심지어 모욕하는 악인으로 나타났다.
그래서 우리가 정말로 깨닫고 기억해야할 것은 지금 내가 처한 형편이 아니다.
내 형편이 살 만한 환경인지, 살 수 없는 환경인지는 큰 문제가 아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나를 택하시고 구원해가시는 하나님께서 어떤 형편에서도 나를 붙들고 계시다는 사실이다.
나를 부르신 뜻을 절대로 후회하지도 바꾸지도 않으시는 하나님을 믿으면 일희일비하지 않을 수 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도 절망의 사건을 허락하시는 이유는
우리 시선을 형편이 아니라 하나님께 붙잡아 두시려는 사랑이다.
절망의 사건은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시는 음성이다.
그러니 나를 절망하게 하는 환경 앞에 엎드릴 것이 아니라
그 환경을 통해 나를 부르시는 하나님 앞에 꿇어 엎드려야 한다.
그것이 기도다.
기도를 통해서 내 마음이 정답인줄 알고 살던데서 돌이켜서 말씀을 정답으로 삼고 내 삶은 거기에 맞추어야 한다.
그래서 우리의 기도는 늘 말씀을 바탕으로 한다.
말씀으로 드리는 기도가 진정한 기도요 100% 응답받는 기도다.
사건이 올 때 죽겠다만 외치지 말고 '주여'를 외쳐야 한다.
날마다 QT하며 오늘 주신 말씀 한 구절이라도 주님의 뜻이 담긴 음성으로 받고
그 말씀을 받들고 기도해야 한다.
Q. 조롱과 무시를 받는 사건이 왔습니까? 그래서 너무 화가 납니까, 절망합니까?
Q. 절망의 사건 가운데 환경 앞에 엎드려 있습니까, 하나님 앞에 엎드려 있습니까?
Q. 이번 한주 어떤 기도를 드리겠습니까?
3. 피하고 싶을 때는 함께 나누어야 합니다(26-28)
26 힐기야의 아들 엘리야김과 셉나와 요아가 랍사게에게 이르되 우리가 알아듣겠사오니 청하건대 아람 말로 당신의 종들에게 말씀하시고 성 위에 있는 백성이 듣는 데서 유다 말로 우리에게 말씀하지 마옵소서
히스가야의 장관 세 사람은 의심에 빠뜨리게 하는 산헤립의 교묘한 설득과
절망에 빠뜨리는 랍사게의 치명적인 조롱을 들었다.
이에 '청하건대 아람 말로 당신의 종들에게 말씀하시고
성 위에 있는 백성이 듣는 데서 유다 말로 우리에게 말씀하지 마옵소서'한다.
상한 갈대인데 상한 갈대라는 말을 하지 말라는 것이다.
엘리야김과 셉나와 요아는 당시 최고의 엘리트들이다.
이들이야말로 히스기야 개혁의 주역들이다.
히스기야의 성공한 개혁이었기에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여 그 형통의 열매도 가장 많이 받았을 것이다.
그런데 이 사람들이 눈 앞에 닥친 문제를 직면하지 못한다.
나라가 곧 망하게 되어 상한 갈대가 되었는데 그 모습을 차마 직면하지 못한다.
그렇다는 말도 듣기가 싫다.
자신이 듣는 것은 그나마 나은데, 백성들이 듣는 것은 참을수가 없다.
수치스럽기 때문이다.
자기 명예가 무너지고 비난을 받는 일을 당할 수가 없다.
27 랍사게가 그에게 이르되 내 주께서 네 주와 네게만 이 말을 하라고 나를 보내신 것이냐 성 위에 앉은 사람들도 너희와 함께 자기의 대변을 먹게 하고 자기의 소변을 마시게 하신 것이 아니냐 하고
주님은 사람이 침묵하면 돌들이 소리지르게 하신다.
유다 최고 엘리트들 수준이 이러하니
하나님은 할 수 없이 랍사게를 사용하셔서 들어야할 말씀을 들려주시는 것이다.
랍사게는 이 경고의 메세지를 왜 지도자들만 듣고 다른 사람들은 듣지 못하게 하냐고 다시 한번 비꼬고 있다.
하나님은 랍사게를 통해서 유다 지도자들의 문제를 정확히 드러내신다.
의심에 떨어지고, 절망에 떨어져도 끝까지 체면만 중요하게 여기는 모습을 드러내신 것이다.
죽어도 자기 수치는 오픈 못한다.
나중에 지옥에 떨어지는 것보다 지금 부끄럽고 욕먹는 것이 훨씬 더 두렵다.
그래서 그렇게들 자살을 한다.
이런 사람들에게 주님은 똥, 오줌처럼 느껴지는 수치, 부끄러움을 성 위에 앉은 사람들,
즉 잘못 보이는 것이 죽기보다 싫은 사람들과 함께 나누라고 하신다.
별 인생이 없다.
하나님 앞에서는 똑같이 이 땅에 벌거벗고 왔다가 벌거벗고 간다.
자기 모습 감추려고 쓰는 방패들이 너무 많다.
우리는 상한 갈대라는 것을 기억해야한다.
지금은 내가 좀 특별한거 같아서 수치가 드러나는 것이 싫고, 내 약점은 감추고 싶고,
내 죄 고백하는 것이 싫지만 사실 그런 것들은 다 지나가는 것이다.
계속 피하려고만 하다가 천국까지 피해서야 되겠는가.
천국이 상한 갈대의 유일한 소망인데 피해서야 되겠는가.
직면하기 싫고, 피하고 싶은 일이 생길 때 도망가지 말고 믿음의 지체들과 함께 나누어야한다.
갈대의 특징 중 하나가 군락을 이루고 있다는 것이다.
하나씩 뜯어보면 너무나 가늘고 약하지만 무리로 모여있기 때문에 엄청난 생명력으로 살아난다.
내가 상한 갈대임을 인정하기 싫어서 피하고 싶을 때 피하지 말고 공동체에서 함께 나누면
세상 그 무엇도 주지 못하는 자유를 주신다.
Q. 너무 듣기 싫은 말은 무엇입니까? 왜 듣기 싫습니까?
Q. 피하고 싶은 자리는 어디입니까?
Q. 공동체에서 믿음으로 나누었더니 자유롭게 된 일이 있습니까?
롯이 상한 갈대의 대표적인 인생이다.
그는 끊임없이 세상을 택하고 그때마다 아브라함은 그를 끊임없이 돕는다.
소돔을 택한 그는 어쩔수없이 세상의 육적인 아내를 택했기에 그 아내는 뒤를 돌아보다가 소금기둥이 되었다.
그 사위들도 롯의 말을 농담으로 여겼다.
딸들도 그곳에서 살았기에 소돔과 고모라를 피해 나왔어도
세상의 도리를 쫓아 배필될 사람이 없는 것을 걱정하여 아버지와 동침하였다.
염려는 내가 하나님 자리보다 높은 자리에 있는 것이기에 교만한 것이다.
하나님의 도리를 쫓는 것을 도무지 모른다.
그렇다면 이런 롯을 왜 아브라함에게 붙이셨을까?
아브라함에게 롯의 시험을 준 것은 아브라함을 위해서다.
이렇게 지겹게 힘들게 하는 사람이 없고서는 믿음의 1대가 형성되기 힘들다.
교회를 나가기는 하는거 같은데 도무지 믿음이 없는것 같은 경우가 바로 이런 경우다.
골육의 힘듦은 알맞는 아브라함의 멍에인 것이다.
없으면 좋을 사람, 내 재산 다 가지고 갔으면 되었지
죽게 되었다고 하니 또 생명을 내놓고 가서 도움을 주어야 하는 식구와 친척.
마지막 심판이 오거나 말거나해도 될텐데 간절히 중보기도하는 아브라함을 보면서
롯이 상한 갈대 같은 인생이 아닌가 생각해보게된다.
그가 망하는 것과 상관 없이 나는 아브라함처럼 그 한 사람이 바람에 꺾이지 않도록 손을 써야 한다는 말이다.
가만히 내버려두어도 꺾이고 말 갈대를 꺾지 아니한다는 것은 버려두지 아니하고 손을 쓴다는 말이다.
철사라도 갖다대고 줄로 묶어 놓으면 상한 갈대라도 바람에 꺾이지 않는다.
상한 갈대 같은 나를 인식하고 상한 갈대 같은 사람을 위해서 두루 파고,
공동체 간증이 거름이 되어서 살려내는 것이다.
우리가 예배 드리고, 기도하고, 공동체에서 나누는 것이 두루 파고 우리가 거름이 되어서 살려내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품질 좋은 사람만 내 식구 하고 싶고 함께 어울리고 싶어한다.
애굽이 썩은 지팡이인데 그것을 모른다.
히스기야는 아버지에게 당하고, 개혁하면서 당하고, 산당 예배자들에게 당하고,
앗수르에 당하고, 돈도 다 털리고 하면서 성군이 되어간 것이다.
어떤 환경에도 구원밖에 답이 없다.
구원만이 답이다.
환경이 아니고 구원이 답이다.
상한 갈대 지팡이, 밑동 잘린 나무기에 짧은 인생에서 내가 구원을 얻었다면 그것이 최고인 것이다.
다 없어질 것을 쫓는데 그것이 상한 갈대 지팡이를 의지하는 모습인 것이다.
[나눔]
A - 요새 내가 의지하는 것은? - 시험이 끝나고 다시 달려야 하는데, 내 생각을 많이 의지하는 것 같다. 나는 나를 믿는다. 학교를 안 다니고 온전히 공부만 할 수 있게 됐는데 파워 J라서 어떻게 공부할 지 구상중인데 하나님보다 나를 더 의지하는게 있다. 가장 큰 애굽은 나 자신인것 같다. 무릎꿇고 기도하질 않는다. 살만해서 기도를 안 하는 것 같다. 살만한건 아닌데 살만하다고 생각하고 있는것같다.
B - 요새 내가 의지하는 것은? - 돈을 의지하고 있다. 돈만 쫒아가느라 하나님과 멀어진 것 같다. 전에는 말씀도 듣고 큐티를 했다면 올해부터는 다 까먹고 있다. 양교하면서 다시 되돌아 와 보려고 한다. 요새 나눔을 안 올리는 이유는 큐티를 거의 안 하기 때문이다. 내가 큐티를 하는게 잘 하는 건지 못 하는 건지 잘 모르겠다. 큐티를 하더라도 이해도 안되고, 왜 해야 하는지도 모르겠다. 지금은 해소할게 많고 다른 잡을게 많아서 그런 것 같다.
C - 요새 내가 의지하는 것은? - 요즘 말씀 보면서 가려고 노력하고 있다. 요즘 예배도 좀 들리고 있다.
D - 요새 내가 의지하는 것은? -여러가지를 의지하고 있어 잘 모르겠다. 내 자신, 운동 등 의지를 많이 하고 있다. 약을 먹고 있어서 잘 되는 것 같다. 오늘 말씀이 내 얘기인 것 같다. 썸을 타고 있고 우리교회 사람인데, 마음을 정리하려고 한다. 그 분이 먼저 저에게 다가왔다. 단 둘이서 밥만 먹어봤다. 정리하는 이유는 제가 만났던 전 여자친구들도 저에게 목적이 있어 다가왔는데, 그럴 것 같은 태도가 보여서 끊으려고 한다. 내 자신을 더 봐야 해서 3년간 연애를 안 한 이유가 있다. 나도 인간이라 상처를 받는데 그 상처를 받지 않으려고 묻고 넘어가려는 척 하는 것 같다. 내가 아직 준비가 안 된 상태라는 걸 인지했고 그래서 아직 연애를 할 상황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질서를 순종안하고 바로 나에게 다가온것도 이상해서 더 그런 것도 있다. 여지를 준 내가 죄인이다.
E - 요새 내가 의지하는 것은? - 여자친구는 대학 동기가 소개해줘서 만났고 너무 잘 맞는다. 요새 스트레스를 받는게 우리집에 내 방이 없다. 내 방에 할머니에게 드리고 나는 거실에 나와서 살고 있기에 내 짐들이 다 거실에 있는데, 어머니가 내 물건을 함부로 사용하셔서 정말 스트레스를 받는다. 그리고 연예인 경호 일을 하다가 힘든 사람을 만나서 너무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 지금 일을 관두고 반복적인 일상을 살면서 매일 큐티를 하고 있는데 너무 건강해지는 느낌을 받고 있다. 요즘 의지하는 것은 나를 의지하지만 나를 의지하기도 힘들어서 여자친구를 의지하고 있다. 군대에서부터 빠져 있는 기독교 서적이 있는데 책을 쓰신 목사님이 문제점이 있다. 그래서 내가 이 책을 또 읽고 싶은데 읽는게 맞는것인지 궁금하다.살만해서 목장에 잘 안 나오려고 하는 것 같습니다.
F - 요새 내가 의지하는 것은? - 의지할데가 없어서 말씀에 의지하고 있다. 공부를 열심히 해서 취업을 했는데 잘 안 맞아서 불안한 상태이다. 원래 교회를 잘 안 나왔는데 최근에 힘들어서 말씀을 봤다. 무화가 나무를 찍는다는 말씀이었는데 그 말씀을 보고 내가 교회를 안 나오면 무화과 나무처럼 찍히겠구나 라고 생각해서 잘 나오고 있다. 예수님을 의지하라고 하는데 내 힘으로 뭔가를 이뤄내려고 하는건 안 된다고 하면서 가만히 있으면 안된다고 하는데 그 중간을 잘 못찾겠다.
G - 요새 내가 의지하는 것은? - 핸드폰을 의지한다. 핸드폰이 없으면 인생이 망한다고 생각한다. 유튜브도 보고 지갑의 역할도 하고 그러니 없으면 죽을 것 같다.
[기도제목]
A - 다시 월요일부터 말씀 붙잡고 성실하고 치열하게 살고 싶다. 하나님께 부끄럽지 않게.
B - 양육교사 잘 참여할 수 있길. 신앙적으로 한 단계 성장할 수 있길. 회사 적응
C - 취업 고난이 잘 해결될 수 있길. 신교제 소망 가질 수 있길
D - 말씀과 큐티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양육 잘 받을 수 있길.
E - 복학해서 적응 중인데 말씀 붙잡고 잘 공동체에 붙어가길.
F - 한 주간 성실하게 잘 살아갈 수 있도록.
G - 취업의 고난이 해결될 수 있길. 건강(다이어트) 잘 챙길 수 있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