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사람
열왕기하 13:19-25
김양재 목사님
믿는 도끼는 발등 찍으라고 있는 것이다. 사람은 믿음의 대상이 아니다. (시작부터 얻어맞음) 내 사람 찾기보단 우리가 하나님의 사람임을 기억해야 한다.
1. 마지막까지 거룩한 분노로 양육합니다.
엘리사가 죽을 병에 걸린 요아스에게 처방을 했지만 끝까지 순종하지 않고 세 번 만에 그치는 걸 보며 마지막까지 사명 감당하다가 분노하면서 갈 수도 있다는 걸 알았다. 자기 생각으로 가득한 요아스를 보며 애통하다 못해 화가 난다. 요아스 개인에 대한 것이 아닌 아합 집에 이어 예후의 집을 사로잡고 있는 강하고 질긴 죄에 대한 분노이다. 세 번만 참으면 되냐, 대여섯 번, 끝까지 참아야지. 우리는 참 화가 많다. 그 본질은 다 내 피해라고 할 수 있다. 나에게 피해와 손해가 생기는 데 대한 본능적인 감정의 반응이다. 이런 인간적인 분노는 거룩한 분노가 아니다. 하나님의 진노는 이런 감정 폭발이 아니다. 거룩한 분노는 언제나 그 대상이 죄이다. 내 손해가 아니다. 죄에 대해 슬퍼하고 두려워하고 미워하고 죄 때문에 좌절하고 죄에 대해 분노하는 사람이 곧 하나님의 사람이다. 죄에 대한 분노는 바꿔 말하면 구원을 위한 애통함이다.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에 대해서 분노하는 건 본능적인 분노이다. 성경적 가치관이 들어가고 하나님의 사람이 되면 내가 분노해야 할 대상이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이 아니라 그 사람을 사로잡고 있는 죄라는 것을 이렇게 깨닫게 된다. 이런 마음으로 상대방을 주님께 인도하는 것이 양육이다. 하나님의 사람은 엘리사처럼 마지막 순간까지 양육에 힘쓴다. 대여섯 번 친다는 게 부족한 것이 많아도 그냥 물귀신처럼 큐티해야 하는 것이다.
- 요즘 무슨 일로, 누구에 대해 화를 냅니까? 죄악에 대한 거룩한 분노입니까? 내 손해에 대한 감정적인 분노입니까? 어떤 양육을 받고 있습니까? 그만두려 하지는 않습니까? 거룩한 분노로 끝까지 마치겠습니까?
2. 죽어서도 생명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엘리사가 죽을 병이 들었다. 하나님의 사람으로 요아스에게 분노하고 양육하다가 요아스가 달라지지도 않았는데 그냥 죽었다. 엘리야와 엘리사는 참 대조적이다. 엘리야는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처럼 등장해 아합에 맞서 약 20년 동안 불꽃처럼 사역을 했다. 죽을 때는 불수레와 불말과 함께 스펙타클하게 하늘로 승천했다. 엘리사는 어떤가. 부유한 농장 주인으로일하던 중 엘리야의 부름을 받는다. 출발이 땅이다. 요람 왕부터 요아스까지 50여년을 넘게 사역을 했다. 왕뿐만 아니라 수넴 여인, 이방 장수 등여러 사람에게 기적을 베풀었다. 그런데 엘리사는 결론이 죽을 병이다. 엘리사가 일은 내가 더 많이 했는데 기적도 더 행했는데 왜 나는 엘리야같이 병거 타고 하늘에 못 가나, 상으로 승천을 주시지 않고 죽을 병을 주셨다. 또한 엘리야에게는 엘리사라는 불세출의 제자가 있었는데 엘리사는 야망의 제자 게하시만 있고 요아스를 분노하며 양육할 제자도 특별히 없다. 그러고 그냥 죽어버렸다. 엘리야는 하늘의 사람같고 엘리사는 땅의 사람같다. 그런데 이렇게 다른 두 선지자가 모두 하나님의 사람이다. 누가 좋고 나쁘고 낮은 게 없다. 어떤 유형의 하나님의 사람이 되고 싶은가? 우리는 생각 자체가 기복적이라 엘리야와 엘리사를 비교하며 엘리야를 더 대단하다고 여기기 쉽다. 우리는 엘리야의 하나님을 찬송한다. 엘리사의 하나님 없다. 그런데 엘리야보다 엘리사가 갑절보다 더 많이 하나님의 사람으로 불렸다. 정말 구속사적인 메시지이다. 그리고 이 두 선지자의 발끝에도 못 미치는 우리도 하나님의 사람으로 불러주신다는 것이 구속사이다. 그러니 엘리사는 인기 관리 같은 거 안 한다. 마지막 양육을 화를 내는 그는 한결같이 이상하다.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엘리사의 관심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가르치고 양육하고 살리는 데 모아져 있다. 우리는 엘리야를 좋아하지만 예수님의 예표는 엘리야보다는 엘리사이다. 이 죽는 모습을 예수님도 더 비참하게 보여주셨다. 죽을 병이 들어도 사명 감당하다 가니까 죽은 뒤 유골이 되어서도 죽은 사람을 회생시켰다. 하나님의 사람은 죽었다가 살아난 사람이다. 회생한 사람은 부활한 사람이다. 하나님의 사람은 죽음 같은 상황에서도 낙심하거나 포기하지 않는다. 우리 생명이 환경에 달려있지 않기 때문이다. 무덤 속 마른 뼈처럼 되어도 피투성이가 되어도 살아낸다. 우리 안에서 성령님이 생명을 끊임없이 채워주시기 때문이다.
- 엘리야처럼 카리스마가 있고 싶으세요? 엘리사처럼 편한 사람이 되고 싶으세요? 죽을병에 걸렸다면 낫는 것이 소원이겠습니까? 가족이 예수 믿는 것이 소원이겠습니까?
3. 언약 때문에 영원한 회복을 누립니다.
여호아하스나 요아스나 여로보암의 죄를 떠나지 않은 죄인이었기 때문에 언제 멸절되어도 이상할 것이 없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왜 나라가 멸망하지 않고 이어지게 하시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이 언약이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언약 때문에 우리에게 은혜와 긍휼을 베푸신다. 생명의 역사를 이어가신다. 생명이 이렇게 귀하기 때문에 영적으로든 육적으로든 절대 지켜야 한다. 피투성이가 되어도 뼈처럼 말라 비틀어지는 상황이 되어도 죽지 말고 살아야 한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람이기 때문이다. 지금의 상황이 인생의 결말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는 회복이라는 말은 듣기만 해도 좋아한다. 특히 잃어버린 것에 대한 회복. 그런데 이 땅에서 회복한 건 반드시 또 이 땅에서 잃어버리기 마련이다. 요아스가 되찾은 성읍은 100년도 못 가서 앗수르에게 빼앗긴다. 나라가 없어진다. 그런 이 땅에서의 회복이 목적이면 인생이 참 허무한 것이다. 회복하다-> 히브리 단어로 슈브(?)인데 하나님께 돌아오는 회개의 의미가 있다. 하나님이 그 성읍을 우리에게 돌려주시는 것이 회복인데,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는 회복은? 하나님이 왜 잃어버린 성읍을 우리에게 돌려주는가? 왜 약속을 지키시고 언약을 지키시는가? 우리를 돌이키시기 위함이다. 이 돌이키는 것이 회개다.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회복은 다른 게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께 돌아가는 회개이다. 요아스의 세 번만큼의 일시적인 회복 말고 영원한 회복을 해야 하나님의 사람이다. 영원한 회복이 뭔가? 그 회개가 날마다 돼야 말인데... 오늘 하루부터 천국 가는 그날까지 말씀 보는 순종으로 회개를 시작해야 된다.
- 나는 일시적 회복을 바랍니까? 영원한 회복을 바랍니까? 영원한 회복은 회개고 회개의 실체는 날마다 큐티하는 것이란 것이 인정되세요?
기도제목
A
-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갈 수 있도록
- 부모님 건강과 현장예배 참석
- 친구 양육 끝까지 잘 받기를
B
- 아빠 교회 잘 정착할 수 있도록
- 무기력할 때 먼저 말씀 볼 수 있도록
- 부모님 건강
- 동반자를 위해 기도할 수 있도록
C
- 무탈한 한 주 잘 보낼 수 있도록
D
- 목장에서 하기로 한 적용 잘 지킬 수 있도록
- 아침에 일어나서 기도하기
E
- 큐티하기
- 양교 숙제 잘 해오기
F
- 매일 큐티하고 기도하기
- 양육 잘 받기 (꼭 수료!)
G
- 아빠의 영혼구원, 부모님 건강
- 목장 식구들을 위해 기도할 수 있도록
- 그 친구들의 구원과그들에 대한 애통함이 생기기를
- 시험 준비 과정에서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고 갈 수 있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