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의사가 만난 사람] 고세중(열방친선병원 원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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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즈베키스탄 찍고 , 아프가니스탄으로
오랜만에 ‘고국’을 찾은 소감을 묻는 질문에도 그의 표정은 심상하기만 하다. 그리고 익숙한 듯 따라오는 설명.
“우리 집은 우즈베키스탄에 있어요. 여기가 아녜요. 벌써 간 지 7년째인 걸요. 한국에서 그리운 건 한국음식 뿐이야. 그것도 우즈벡에서 먹을 수 있어요. 아내가 다 해주거든요.”
한국 사람은 세계 어디를 가도 음식, 말, 냄새를 그리워한다는 선입견이 있어서일까. 가볍게 ‘내가 사는 곳은 우즈베키스탄’이라고 말하는 고세중 선생에게서는 낯선 이국의 냄새가 유난하다.
소아과 의사이자 우즈베키스탄 열방친선병원의 ‘서류상 원장’이기도 한 그는 지금 7년간 애정을 쏟은 우즈베키스탄을 떠나 새로운 고향이 될 아프가니스탄에 정착할 계획으로 마음이 바쁘다. 이번에 한국에 들어온 것도 아프가니스탄의 참상을 조금이라도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기 위해서다.
병원차로 중앙아시아를 누빈다
그가 일하는 우즈베키스탄 열방친선병원은 아시아문화개발협력기구(IACD)의 지원으로 설립된 일종의 NGO다. 병원이 위치한 곳은 우즈베키스탄이지만 병원의 활동영역은 카자흐스탄, 키르기즈스탄, 타지키스탄 등 중앙아시아 대부분 지역이다. 그는 의사 다섯 명으로 구성된 이동 진료팀의 일원으로 중앙아시아 대륙을 누빈다.
“이동 진료용 차가 있어요, 치과차도 있고. 의료수준이 상당하죠. 초음파도 있고, 혈액검사기도 있고, 한국으로 치면 3차 의료기관에서 하는 CT, MRI 같은 것만 없지, 웬만한 건 다 하죠.”
도시인 경우는 의료기관이 제법 있는 편이지만, 도시에서 조금만 멀어지면 의료손길은 찾아볼 수 없다. 그래서 이동 진료팀이 방문하면 온 동네 사람들이 진료소 앞에 줄을 선다. 이동진료 한번에 맞는 환자 수는 대략 7백 명에서 천 명 선. 덕분에 주민들이 사례로 가져다주는 과일이며, 음식의 양도 만만찮다. 의술을 진정한 봉사의 도구로 쓸 수 있다는 만족감은 이런 것과 같이 오는 더 기쁜 선물이다.
이제는 아프가니스탄으로
이동진료소 의사 역할 말고도 그가 하는 일은 다양하다. 우즈베키스탄 출신의 젊은 의사들에게 영어와 의료를 가르치는 것도 그 중의 하나다. 이렇게 훈련된 사람들은 우리나라나 미국으로 길게는 2년에서 짧게는 3주까지 파견되어 연수를 받게 된다. 지금까지 이렇게 연수를 받은 사람이 열 명 이상. 이들은 나중에 우즈베키스탄의 열방친선교회를 이끌어나가는 중추 역할을 할 예정이다. 또 정부 관계자나 의과대 총장 등 의료 체계를 실질적으로 이끌어나가는 사람들에 대한 연수와 세계 곳곳에서 몰려오는 의료물자를 관리하는 일도 담당하고 있다.
이런 작업은 우즈베키스탄의 의료계를 자체 인력으로 이끌 수 있는 미래를 만들기 위한 것이다. 그리고 지난 7년간 작업의 결과를 뒤로 하고, 고세중 선생은 이제 다음 봉사지로 아프가니스탄을 생각하고 있다.
“아프가니스탄의 경우는 영양, 보건, 민생 이런 분야가 하나도 해결된 게 없습니다. 앞으로는 아프간에서 더 일을 해야겠죠. 여기는 일단 병원을 세워놨으니, 자체적으로 꾸려나갈 수 있는 시스템이 다 마련된 상태니까요. 이제 아프가니스탄으로 옮겨갈 생각입니다. 상황이 열악하니 당분간은 왔다갔다 해야겠지만요.”
해야 하는 일을 하는 것뿐
그가 이 일을 해야겠다고 생각한 것은 91년부터. 결심한 지 5년만에 우즈베키스탄 행 비행기를 탔다. 83년 의대졸업과 수련기간을 따져 봐도 ‘한국의사’로 있었던 시기는 10년 남짓이다. 소위 ‘의사로서의 기득권’을 포기하기까지 갈등은 없었는지 궁금했다. 그러나 그의 대답은 더없이 확고하다.
“처음부터 더 중요한 일이 있을 거라 생각했기 때문에 뿌리를 깊이 내리지 않았습니다. 그냥 잘 먹고 잘 사는 것도 좋지만 사람이 한번 사는데 의미 있는 일을 해야죠. 문학을 하는 아내도 제 선택을 지지했고, 지금은 같이 활동하고 있습니다. 미국에 계신 어머니도 이런 제 선택을 더없이 자랑스러워하시죠.”
이런 흔들림 없는 태도는 종교의 힘이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그에게 이 일은 봉사가 아니라 ‘해야 할 일을 하는 것’뿐이다. 그의 표정은 일찌감치 선택한 자신의 삶에 대한 의지로 가득해 보였다.
“다 그렇게 시작하는 거지, 뭐”
“준비하는 데 일년 반 정도 걸렸죠. 현지상황도 좀 알아봐야했고, 뭘 가져가야 되나 그런 생각들…. 준비래 봤자 다 마음의 준비였죠. 중요한 건 사람이 가느냐죠. 컨테이너에 실린 구호물자들은 사람이 가면 다 따라오게 돼 있더라구요.”
맨손으로 갔는데도 겨우 6년만에 번듯한 병원과 수백만 달러의 구호물자를 마음놓고 쓸 수 있게 됐다며, “여기 있었으면 이만큼 돈 못 벌었을 걸요”하고 농담을 건넨다. 그만큼 그는 뜻을 같이 하는 사람들의 손길을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있다.
사실 삼성의료원 등에서 이미 친선병원의 환자들을 수술해주고 있고, 세브란스병원의 박병윤 교수는 4년째 우즈베키스탄을 방문해서 한번에 30~40명씩 언청이 수술을 하고 간단다.
“조금만 돕지 뭐, 그런 식으로 와서 보고, 그러다가 내가 이렇게 살아서 안 되겠다 싶으면 몸을 던질 수도 있고. 다 그렇게 시작하는 거죠.”
‘집’에서 보내온 사진
“아프가니스탄으로 옮기고 나면, 이라크 쪽도 생각하고 있습니다. 거기도 전쟁으로 의료 인력이 모자라는 대표적인 지역이니까요. 위험요? 매일 타고 다니는 게 비행긴데요, 그것보다 더 위험한 것도 있나요?”
고세중 선생의 머릿속에는 우즈베키스탄에서 이뤄놓은 많은 일들은 사라지고 없다. 앞으로 아프가니스탄에서 할 일들, 더 나아가 이라크에서 해야 할 일들이 이미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즈베키스탄에서 찍은 사진 속의 그는 차가운 서울 공기 속에서 인터뷰 사진을 찍을 때보다는 확실히 편안해 보인다. 인터뷰 때문에 긴장했던 탓일까. 그보다는 ‘집’에 있다는 익숙함 때문이 아닐까.■
김민아 기자 licomina@ 사진 김선경 기자 potopia@ |+ 목록보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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