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을 거리 - <<캡틴 브라운>>
작성자명 [김헌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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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2005.04.07
*아주 예전에 교회 홈페이지 자유나눔란에 올렸었던 글을 조금 손봐서 다시 올려봅니다. 생각할 거리를 주게하는 글.
<늘 성경을 품고 다니던 어린소년 브라운은 노예소년이 주인에게 이유없이 쇠삽으로 얻어맞는 것을 보았다..그것이 모든것의 시작이었다.>
1837년 11월 7일 달 밝은 밤. 노예제도를 찬성하는 2백명의 무리가 횃불을 들고, 미국 일리노이 주 앨튼 시의 미시시피강 동쪽 제방 위에 있던 한 건물을 포위했다.
그 건물에는 주간지 <관찰자>의 발간시설이 있었고,편집자인 엘리야 P.러브조이 목사는 이미 반노예제도 주창자로서, 강건너 세인트루이스에서 축출되어 왔던 터였다.폭도들은 러브조이 목사를 다섯차례나 총격하여 살해했다.
흑인노예문제로 백인이 사망한 최초의 사건이었다. 북부 전역에서 항의집회가 열리고,노예제도와 상관없다고 생각해 온 수많은 시민이 언론의 자유를 위협하는 사태로서 이사건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오하이오 주의 허드슨에 있는 한 교회에서는 목사가 우리는 폭도의 법 아래 있는 노예인가? 라는 제목으로 설교하였다. 교회 뒷마당에는 미지의 한 수척한 남자가 오른손을 들고
이곳 하나님 앞과 증인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나는 나의 생명을 노예제도 폐지를 위해 바칠것을 선서한다 고 말하였다. 그는 바로 존 브라운 이라는 사람 이었다.
존 브라운 그는 무능한 사업가 였다. 6개 주에서 스무차례나 사업에 실패하였고,언제나 채무를 해결하지 못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이땅이 노예제도로 더럽혀지기 전에 그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부여받은 사명만은 이행해야한다고 확신하곤 했다.
브라운이 가장 좋아하는 성경 구절은 히브리서 9장 22절의 율법을 좇아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케 되나니 피흘림이 없은 즉 사함이 없느니라 였다.
노예제도 폐지를 위해서라면 자기 자신이 피흘리는 것쯤은 주저하지 않는 브라운을 돕기 위하여 북부의 노예폐지론자들 가운데 소수가 비밀리에 후원 하였다.그 가운데는 보스턴의 목사,교수,교육자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로부터 21년이 지난 후인 1859년 10월 16일 저녁, 마치 구약성서에 나오는 선지자처럼 수염에 덮인 브라운은 5명의 흑인과 13명의 백인으로 구성된 그의 소규모 군대 를 이끌고 버지니아 주의 하퍼스페리에 나타났다.
그는 2백정의 소총, 2백정의 권총,그리고 1천개의 창을 마차에 싣고 왔는데,그에게 몰려들 노예들을 무장시키기 위한것 이었다.
브라운과 그의 일당은 하퍼스페리에 있는 연방군 병기창과 무기고를 점령하고,조지 워싱턴의 증조카를 포함한 인질을 확보하였다.
그러나 그뒤에 일어난 일은 그의 계획대로 된것이 하나도 없었다.
혹인노예들의 궐기대신 마을 주민들이 들고 일어나 브라운 일당이 점거하고 있던 병기창을 포위하고 사격하였다. 브라운 일당중 가장 먼저 쓰러진것은 버지니아 농장에있는 그의 아내와 자식들을 해방시킬 목적으로 가담했던 노예출신 뉴우비 였다.누군가가 기념품으로 그의 두귀를 잘라갔다.
화요일 아침 90명의 기병대가 워싱턴으로부터 도착했다.
연방정부의 다급한 요청에 따라 당시 휴가중이던 기병장교 리(Robert E.Lee 후의 남부의 명장 리장군)중령은 군복으로 갈아입지도 못한채 작전에 임하였다.
브라운은 칼을 맞고 체포되어 버지니아 주에 넘겨졌다.
그는 반역죄로 교수되었다.
그방법에 대해서는 동의하지 않았지만 브라운의 열의와 용기에 대해서만은 칭찬했을 만큼,북부인의 사고 속에는 반노예제도 성향이 깊이 침투했 있었다.남부의 연방 지지자들은 이 것을 과격한 노예폐지론 자의 망동이라 규정하고 남부가 연방에 머무는 한 남부에 평화는 없다 는 생각을 이 사건을 통해 갖게 되었다.
찰스타운에서 브라운이 교수되는 현장에 1천5백명의 군대가 경비를 섰다. 그 가운데는 잭슨(후에 Stone Wall-돌벽장군 잭슨 이라 불리는 남부의 명장)에 인솔되는 버지니아 사관학교 생도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리치먼드로부터 온 한 민병대 일등병-훗날 링컨 대통령을 암살한 배우출신 존 부스 도 그들 가운데 있었다.
존 브라운은 교수대에서 죽기 전, 다음과 같은 유서를 남겼다.
I, John Brown, am now quite certain that the crimes of this guilty land will never be purged away, but with Blood. I had, as I now think, vainly flattered myself that without very much Bloodshed it might be done.
나, 존 브라운은, 이제, 이 죄많은 땅은 피를 흘리고 나서야 다시 살아날 것을 확신하게 되었다. 지금 생각해보니, 내가 이 땅이 피를 흘리지 않고서도 다시 살아날 것이라고 믿은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자기 기만이었다.
그가 그렇게 유서를 남기고 죽은지 몇해 후, 미국은 남북전쟁이라는 초유의 내전을 치르게 되었다.
훗날 시인 에머슨은 그를 진실하고 선의에 가득 찬 위대한 이상주의자 라고 평가하였다. 또한 링컨을 암살했던 존 부스 조차 노예제 폐지론자들은 싫어 하지만 브라운은 진실로 용감한 사람이었다 고 평하였다.
존 브라운의 시체는 무덤 속에서 썩어가고 있으나,그의 영혼은 계속 전진하고 있다네. 영광 영광 할렐루야. 그는 하나님 군대의 병사가 되어서 계속 전진한다네 영광 영광 할렐루야 라는 노래(존 브라운의 시체)가 유명해지기 시작하여 남북전쟁시에 북군의 행진곡으로 사랑받았다.
하루는 하우 부인 을 방문한 클라크 목사 가 이 행진곡을 듣고 그녀에게 섬뜩한 가사가 붙은 이 곡에 좀더 점잖은 가사를 붙여 보지 않겠느냐고 물었다.
후에 하우부인은 이곡에 찬송시를 붙여 존 브라운의 시체 는 훗날 우리가 알고있는
찬송가 388장 이 되었다. battle hymn of the republic
존 브라운의 방식이 폭력적 성향을 내포하여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역사가들도 적지 않다. Radical급진적 내지는 광신적 이라는 것이 대체적인 주장이다.
사실 브라운 일당은 캔사스州의 노예제 지지자들을 사살하기도 하여.남부인들의 반발이 컸다.
북부인들도 앞서 말했듯, 존 브라운의 용기와 열의는 칭찬하였지만 그의 방법은 연방의 법과 질서를 모독하는 것 이라며 비판했다.
존 브라운 개인의 신앙적 열의(자신이 내세운)에서 나온 행동이, 방법에서 잘못되었다는 것이 그의 부정적 평가의 대체적인 이유다.
그럼에도 아직까지 적지 않은 이들이 그에게 결코 차갑지 않은 시각을 가지고 있다.
아래와 같은 글은 그 분위기를 잘 전달해주고 있다.
노예해방을 위해서 브라운과 같은 방법을 쓰는 사람이 나와도 나는 결코 그의 방법이 틀렸다고는 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자유냐 죽음이냐의 선택을 이야기 하지 않는 박애주의자보다 노예의 입장을 대변한 캡틴 브라운의 박애주의 편을 들겠다.
제 생각엔,
말씀과 함께하는 사람은 고통,고난 받는 사람들의 입장에 서야 한다구 동감하지만, 과연 싸우기 위해 총을 들어야할지는 잘 모르겠네요.
답 = 우리가 판단할 문제는 아님.. ^^;;
인간 브라운을 평가하기 보다... 모든 사건 가운데 계획하심이 있는 하나님에 대해서 묵상해 보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