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친 이는 예수라 (요한복음 5:1-15) 2024.01.14 주일예배 -정정환 목사
[주일 설교말씀 요약]
날씨도 많이 추운데 아침부터 추운 얼굴을 한 목사가 앞에 올라와서 심심한 유감의 말씀을 전한다. 게하시 정이다.
어젯밤에 설교 준비를 마치고 기도하는데 왜 말씀을 전하게 하실까 궁금했는데 이런 생각이 들더라. 엘리사 선지자가 계속 나오지만 그 옆에 하루도 빠지지 않고 나오는 인간이 있으니, 게하시이다. 게하시의 죄고백을 들으라고 이런 기회를 주시지 않았나 생각했다.
몇년 전 전세계적으로 인기를 얻은 한류드라마 <오징어게임>이 있다. 456억 원을 위해 456명이 죽고 죽이는 서바이벌 게임을 치른다. 헛된 소망에 사로잡힌 참가자들은 자기가 살기 위해 상대방을 죽인다. 이 과정을 지나면서 인간성의 실종을 느끼고 고통스러워한다. 마치 <오징어게임>의 모습은 우리 사회의 축소판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다 보니 전 세계 많은 사람들이 공감했다. 자비를 말하지만 자비가 없는 무자비한 곳, 행복을 추구하지만 행복은 없는 적자생존 승자독식의 공간. 그럼에도 행복하고 싶어 몰려든 사람들. 바로 이 모습이 사회의 자아상이기도 하다. 그리고 베레스다 연못의 풍경이기도 하다.
이 연못에는 어느 누구도 관심 갖지 않은 38년 된 병자가 있다. 그리고 고쳐주시는 예수님이 등장하신다. 나를 고쳐주시는 예수님은 어떤 분인지 생각해 보겠다.
1. 나의 누운 것을 보시고 먼저 찾아오십니다.
1-3절
유대인의 명절에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올라가신다. 이 예루살렘에는 베데스다라는 연못이 있었다. 이름의 뜻은 자비의 집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연못 주위에는 수많은 병자들이 앉아 누워 있었다. 천사가 가끔 연못에 와서 물을 움직이게 하는데 그 순간 바로 먼저 들어가는 사람이 병이 낫는다는 소문이 있었다. 그러다 보니 물이 움직이기 시작하면 서로 먼저 들어가기 위한 치열한 경쟁의 장소로 돌변했다. =제일 먼저 들어가는 사람이 나으면 나머지 병자들은 얼마나 허탈했겠는가. 자비의 집인데, 자비를 찾아볼 수 없고 선착순의 논리만 있는 무자비한 전쟁터였다. 미신과 요행의 근간, 잘못된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기약 없는 세월을 보내고 있었다. 오랜 질병으로 삶의 소망을 상실한 한 사람이 누워있다. 5절, 서른여덟 해 된 병자가 있다고 한다. 절망과 외로움과 아픔과 공허함 속에서 하루하루 숨 쉬고 있었을 것이다.
제 아버지는 16년 동안 중풍을 앓아오셨다. 본문에 나오는 혈기 많은 사람에 해당된다. 그 긴 시간 동안 병을 앓아오시는 것을 자식으로서 옆에서 보는데 마음이 아프더라. 지금 그런 경험이 있는 분들이 계실 것이다. 이처럼 오랜 시간의 병은 사람을 무력하게 하고 희망조차 상실하게 만든다.
바로 그때 예수님은 어느 누구도 주목하지 않는 이 병자에게 먼저 다가오신다.
6절
예수님은 38년 된 병자를 보고 계셨다. 그리고 그의 병이 오래된 것도 알고 계셨다. 그리고 질문하신다. 네가 낫고자 하는가. 당연한 질문을 왜 하실까? 왜 뻔한 질문을 하실까 생각하지 않았을까? 하지만 예수님은 지금 이 병자로 하여금 그의 마음 가운데 회복되길 원하는 소망이 일어나길 원하셨다. 아무런 소망이 없는 이 병자가 예수님으로 인해 구원받아야 할 존재라는 것을 말씀하신 것이다. 그래서 이 질문은 내가 너의 구원자다의 시작이다.
베레스다 연못에 누워있는 38년 된 병자처럼 우리도 이런 시간을 보낼 때가 있다. 오랜 시간 동안 육신의 질병, 마음의 병으로 누워있는 나. 관계에서 깊은 상처를 받아 쓰러져있는 나. 번번이 실패하면서 되는 게 없다고 생각하고 모든 의욕을 상실해버린 나. 죄와 중독에 찌들릴 때로 찌들려서 널브러져있는 나. 38년 된 병자를 보고 있는 예수님은 오늘 이런 나를 주목하고 계신다. 그의 병이 오래된 줄 알고 계셨던 예수님은 내가 지금 어떤 마음의 상태인지도 알고 계신다. 이 병자의 깊은 절망과 외로움을 체휼하신 주님은 오늘 내 마음을 체휼하신다. 나의 외로움, 나의 절망, 고통, 연민, 수치심, 죄책감, 열등감. 이 모든 것을 아시는 주님은 나에게 오셔서 물으신다. 네가 낫 고자 하느냐 왜 이 질문을 나에게 하실까? 날마다 베데스다 연못만을 바라보고 있는, 그 연못에 물이 동하기만을 기대하고 있는 나의 시선과 관심을 이제 예수님께로 돌이키라는 것이다. 그리고 내 안의 모든 것들을 그분께 드러내게 하시므로 나 스스로를 직면하게 하시는 것이다. 암이 생겼다면 부위를 절개하고 드러내는 것이 치료의 시작이다. 주님께서 내 속의 것을 드러내게 하시는 것이 치료의 시작, 구원의 시작이다. 널 고쳐줄 분은 바로 나란다. 너의 구원자는 바로 나란다. 그것을 깨닫게 하시는 것이다.
그래서 오늘 내게 일어나는 사건은 예수님이 나에게 찾아오시는 사건이다. 그 사건은 나에게 주님께서 먼저 말을 걸어오시고 나에게 질문하시는 사건이다. 그 질문에 대한 반응이 바로 신앙의 시작이다. 우리는 그 질문에 답을 하기 위해 생각한다. 이것이 말씀 묵상이고 큐티이다. 날마다 우리는 이 질문에 답을 하면서 그동안 내가 붙들고 온 인생의 주도권이 나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대학시절 학업으로 힘이 들었다. 강의를 들으면 방언을 듣는 것 같았다. 아무리 책을 봐도 적성에 맞지 않으니 이해가 안 가더라. 노력해도 안되는구나, 절망감이 엄습해왔다. 공부를 해도 누군가가 나보다 먼저 베레스다 연못에 들어간다고 생각하니 좌절감만 들었다. 아는 게 없으니 시험을 봐도 답을 쓸 게 없고, 나도 모르게 알파벳과 숫자만 쓰고 나왔다. 친구가 답안지를 좀 보여달라는데 돌겠더라. 그 당시에는 시험 때 가장 먼저 제출하고 나오는 친구를 금메달 딴다고 놀리곤 했다. 매번 제가 금메달을 따다 보니 지겹더라. 그때부턴 수업도 들어가지 않았다. 열등감이 많았다. 잠을 자고 나면 아침에 눈을 뜨는 게 참 싫더라. 혼자서 강둑 길을 걷다가 오락실에 하루 종일 앉아있다가 밤에는 혼술을 하고 자곤 했다. 내 목소리를 잃어버린, 마치 실어증에 걸린 사람 같았다. 자존감은 바닥을 치고, 열등감과 자기 연민 공황 속에 폐인처럼 누워있었다. 제 인생에 하나님이 안 계시는 것 같았다.
도저히 이렇게 살 수 없어 도피처로 군대에 갔다. 제가 갔던 그곳은 강원도 산속에 달랑 70여 명의 부대원만 있었다. 폐쇄적인 분위기에 고참들의 권위가 하늘을 찌르다 보니까 밤이면 불이 꺼진 내무반 안에서 폭행과 폭언과 성추행이 종종 일어났다. 주먹으로 맞기도 하고 쇠 파이프에 맞기도 해보고. 어느 날엔 내가 사람이 아니라 개라고 생각하자 하는 마음도 들더라. 시간이 흘러 제대할 때가 다가오니 이제 여기를 떠난다는 기대감도 들었지만 한편으로는 다시 사회로 나가 과거 그 생활로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이 드니 숨이 막히고 두렵더라. 내 인생에 아무런 소망도 기대도 들지 않던 어느 날 군인을 대상으로 한 수련회에 참석하게 되었다.
적용
내가 지금 누워있는 자리, 주저앉아있는 자리, 널브러진 자리는 어디입니까?
나는 어떤 베데스다에서 나의 갈망과 소원이 이뤄지길 바랍니까?
돈, 건강, 학벌, 행복, 스펙, 성공, 외모, 사람 등 어떤 베데스다 입니까?
2. 말씀으로 구원의 은혜를 베푸십니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라는 예수님의 질문에 병자는 이렇게 대답한다.
7절
병자의 대답에는 병든 몸을 가진 현 상황에 대한 절망이 오롯이 묻어난다. 사람들과의 정쟁에서 번번이 안되는 피해의식도 있다. 오랜 시간 동안 병을 앓아왔기에 자기 연민도 있고, 세상에 대한 비관도 있고, 자기를 데리고 못에 들어갈 사람이 없는 것에 대한 원망도 있다. 육신의 질병도 깊었지만 마음의 질병도 깊었다.
이런 그에게 예수님이 말씀하신다.
8절
예수님은 내가 널 고쳐주겠다고 말씀하시지 않으셨다. 일어나라고 하셨다. 이 병자가 연못으로 들어가도록 돕지 않으셨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고 하셨다. 여기서 일어나라는 명령은 예수님의 부활에도 쓰인 단어이다. 따라서 병자가 일어난다는 것은 그에게 부활의 사건이기도 한 것이다. 예수님의 말씀에는 능력이 있다. 그 말씀은 회복이다. 그 말씀은 생명이다. 그 말씀은 구원이다. 그래서 병자가 할 일은 말씀 그대로 따르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이 병자처럼 내가 절망 가운데 있을 때, 피해의식으로 몸부림칠 때, 낙심 가운데 있을 때, 깊은 죄악 가운데 있을 때, 헛된 소망에 미련을 버리지 못할 때 예수님은 나에게 찾아오셔서 말씀하신다. 얘야, 내가 다 보고 있었단다. 내가 다 알고 있어. 이제 일어나라. 너의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그 말씀으로 날 고치신다. 그 말씀의 능력으로 날 구원해 주시는 것이다.
예수님의 이 말씀이 끝나면서 38년 병자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
9절
예수님의 치유 방법은 이 병자가 이 병자로 하여금 자비의 집이라고 하는 연못으로 스스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었다. 예수님 그분 자체가 자비이기 때문에 자비의 말씀으로 고쳐주신 것이다. 베데스다 연못 물이 생명수가 아니라 예수님의 말씀이 생명수이기 때문이다. 이 생명의 말씀으로 병자를 고치신다. 살리시고 구원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사건을 일으킨다. 말씀이 새로운 생명을 낳는다. 그 말씀을 듣고 받아들일 때 내 안에서 새로운 창조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이다. 우리가 날마다 읽고 듣고 묵상하는 이 말씀이 나를 치유하고 나를 구원하신다. 그 이유는 이 말씀이 곤고한 나의 삶에 육신으로 찾아오신 예수그리스도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내가 할 일은 나에게 찾아오신 주님을 신뢰하고 따르고 순종하는 것 외에는 없다. 그분의 긍휼과 사랑과 인애와 자비하심에 나의 모든 것을 맡기고 의탁하는 것 외에는 없는 것이다.
오늘 예수님이 병자를 고쳐주신 방법은 스스로 자력으로 연못에 들어가게 하신 게 아니다. 말씀으로 고쳐주신 것이다. 이게 은혜이다. 이게 진정한 자비이다. 베데스다 연못이 자비의 집이 아니라 예수그리스도께서 자비의 집이다. 지금 내 눈앞에 보이는 저것만 가지면 내 인생이 좀 더 좋아질 텐데. 저곳에만 들어가면 행복해질텐데. 저사람만 만나면 내가 좀 더 만족할 텐데. 여러분, 그걸 자비의 집 베데스다라고 생각하는가? 그렇지 않다. 내 곁에 찾아오신 예수그리스도, 바로 그분이 자비의 집이다. 나를 오랫동안 주목하고 계셨고 나의 절망과 아픔, 외로움과 상처, 욕망과 과거와 현재 미래. 이 모든 것을 알고 계신 바로 그 주님께서 베레스다인 것이다.
제대가 얼마 남지 않은 상황에서 우연히 참석한 집회가 다 끝나갈 때였다. 저 혼자 양지바른 한구석에 쪼그려앉아 있는데 내 속에 묻어두었던 두려움, 자기 연민, 피해의식, 원망이 솟구쳐 올라왔다. 그리고 수년 동안 저를 사로잡고 있던 영적인 질병과 마음의 병을 그 시간에 주님께 솔직하게 드러내게 되었다. 그때 제 앞에 찬양집이 있었는데 이 가사에 시선이 머물렀다. 그리고 마음으로 그 가사를 부르게 되었다.
'나의 등 뒤에서 나를 도우시는 주.
나의 인생길에서 지치고 곤하여
매일처럼 주저앉고 싶을 때
나를 밀어주시네.
일어나 걸어라 내가 새 힘을 주리니,
일어나 너 걸어라 내 너를 도우리'
눈에서 하염없이 눈물이 흘렀다. 나 혼자 일어설 수 없는 저에게 일어나고 싶지만 도무지 일어날 힘도 능력도 의지도 없는 저에게 주님께서 찾아오셔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았다. 정환아 내가 다 보고 있었어. 내가 다 알고 있어. 이제 일어나라. 내가 널 도울 거야. 고칠 거야. 일어나 걸으렴. 그날 주님은 그렇게 저를 찾아와주셨다. 그리고 절 만나주셨다. 주님께서 내 인생의 주인이 되신다는 걸 알게해주셨다. 그 찬양에 담긴 말씀으로 저의 상한 마음과 감정을 고쳐주셨다. 그리고 제가 공부했던 목적, 제 인생의 목적은 오로지 세상에서의 성공과 출세였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신 것이다. 제 깊은 두려움의 밑바닥에는 욕심이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주님을 만나고 부대로 돌아온 저에게 두 가지 확신이 생겼다. 황량하고 삭막한 내 인생도 그동안 주님이 보고 알고 계셨다는 것과, 또 다른 하나는 이곳에서 주님을 만나 구원을 받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 예수님을 만난 감격은 무엇과도 비할 것이 없더라. 나의 회복과 구원을 나보다 주님이 더 원하셨고 나보다 먼저 주님이 바라고 계셨다. 부대로 복귀한 주일에 11명의 후임병들과 함께 교회로 향했다. 교회 마당에 도착해서 후임 병자들을 벤치에 앉게 했다. 그리고 그들에게 물었다. 혹시 예수님이 나의 구원자라는 것을 믿는 사람이 있냐고. 한 사람만 손을 들더라. 제가 만난 예수님을 그때 전하게 되었다. 이 예수님이 너와 나의 우리의 구원자가 되시고 내 죄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신 분이라고 간증했다. 이 복음을 전한 뒤에 예수님을 영접하고 싶은 사람 손을 들라고 하니 나머지 열 명이 손을 들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영접 기도를 드리고 모두가 예수님을 영접하게 되었다.
예수님은 38년 된 병자와 다를 바 없던 저를 일으키셨다. 그리고 구원의 은혜를 그 지체들과 함께 나누고 베풀어주셨던 것이다. 그리고 제대 후에 주님은 전혀 예상치도 기대치도 않았던 방식으로 제 적성에 가장 알맞은 곳으로 인도해 주셨다. 이전에는 책을 보기만 해도 힘들고 화가 나서 눈물이 났는데 새로운 학업을 시작한 곳에서는 책을 보는데 너무 재밌고 감사해서 눈물이 다 나더라. 정말 기이했다. 저를 찾아오신 예수님은 그렇게 절 일어나게 하시고 제 자리를 들고 걸어가게 해주셨다.
적용
내 속에 있는 절망과 원망, 상처, 자기 연민, 피해의식은 무엇입니까?
나는 베데스다에 누워 무엇을 보고 듣고 있습니까?
사람들의 소문입니까? 예수님의 말씀입니까?
3. 행복이 아닌 거룩을 목적으로 살라고 하십니다.
38년 된 병자가 고침 받게 된 날은 안식일이었다. 그리고 이 병자가 병에서 회복되었다는 소식을 유대인들이 들었다. 그들이 어떻게 반응했을까?
10절 유대인들은 무언가를 한 곳에서 다른 곳으로 옮기는 일을 포함해서 안식일에 하지 말아야 할 39가지 종류의 일을 분류했다. 이 병자는 안식일에 자기가 누워있던 자리를 들고 걸어가는 안식일 위반을 했기 때문에 율법을 범한 셈이었다. 예수님 또한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셨기에 율법을 범한 걸로 간주되었다. 유대인들은 생명보다 전통이 중요했다. 지독한 율법주의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었다. '사랑은 고통에 대한 감수성이다.' 라는 말이 있다. 상대방이 아프면 그 아픔을 느끼는 것이 사랑이다. 아들이 아프다고 하면 엄마가 밥을 차려주는 게 사랑이다. 아들이 배가 고프다고 하는데 허구한날 배가 고프냐 하면 사랑이 아닐 것이다. 딸이 아프다고 하는데 딸의 손을 잡고 병원 가는 게 사랑이다. 왜냐하면 엄마는 딸의 아픔을 체휼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본문에 나온 유대인들은 병자의 아픔에는 1도 관심이 없다. 관심이 없는데 무슨 체휼이 있고 동정이 있고 공감이 있겠는가. 율법의 핵심은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인데. 율법에 대해 가장 잘 안다고 하는 자들이 정작 율법의 정신은 외면하고 있다. 병자가 안식일에 자리를 들고 걸어간 것. 예수님이 안식일에 병을 고쳐주었다는 것 자체에만 꽂혀있다. 병자가 38년 된 병에서 회복되었다면 다 같이 기뻐해야 하는 게 정상이잖아요. 그런데 12절, 병자에게 널 고쳐준 사람이 누구냐고 따진다. 안식일에 병을 고쳐주는 것은 죄라고 잣대를 들이대고 있다. 숨 막히지 않는가. 예수님이 왜 이 일을 하셨는지에 대해서는 도무지 관심이 없다. 오로지 예수님이 안식일을 어긴 것에만 관심이 사로잡혀있다. 알맹이에는 관심이 없고 껍데기에만 관심이 있는 것이다. 생명엔 관심이 없고 오로지 전통에만 관심이 있다. 그러니 할 수 있는 게 뭡니까. 옳고 그름으로 판단질만 하는 것이다. 이렇게 본질을 외면하면 일평생 비본질에게만 천착해서 인생을 낭비해버린다. 유대인들은 진정한 안식이 예수님께만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다. 그러니 안식을 누리지 못하고 있다. 영혼엔 관심이 없다. 그러니 사람을 살리지 못한다. 종교적인 열심은 있으나 그 열심으로 안식일의 주인 되시는 예수님을 핍박하고 죽이려 하고 있다. 영적인 나병에 걸려서 자기 문제의 심각성조차 모르고 있으니 중증 환자들이다. 38년 된 병자보다 더 심각한 병자인 것이다.
저도 그랬다. 제가 가지고 있는 틀, 잣대로 언제나 사람들을 판단하고 재단했다. 그러다 보니 편한 사람이 되지 못했다. 집에서도 공동체에서도 늘 다른 사람이 제 눈치를 보게끔 만들었다. 38년 된 병자처럼 주님을 만나 구원받긴 했지만 오늘 본문의 유대인들처럼 영적인 질병이 저에게도 있으니, 그것은 자기애와 자기 기만과 위선과 탐욕이다. 내 마음 편하고 내 몸 편한 게 저의 우선이다 보니까 이런 환경과 조건이 갖춰지지 않으면 온몸으로 그 불편을 들어내고 아니면 회피를 하곤 했다. 이 회피와 무관심의 영적인 나병에 걸려 사역을 하다가 치리를 받기도 했다. 이런 저에게 제 아내는 이런 말을 한다. 이 세상에서 당신이 가장 사랑하는 사람은 정정환이라고요. 제 아들이 태어나기 전이었는데. 그때 수요일에 사역을 마치고 자정쯤 귀가했다. 만삭이었던 아내가 누워있는데 진통이 시작되고 있다고 했다. 그때 피곤해서 누워있는 아내에게 눈을 감고 잠을 청해봐. 내일 날 밝으면 병원 가자.했었다. 그때 아내가 어이없는 눈으로 절 바라보았는데 십수 년이 지났어도 잊히지 않는다. 그리고 그길로 병원에 갔는데 애가 나왔다. 하마터면 집에서 애를 받을뻔 했다.
이렇게 목사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예수님도 아니고 영혼도 아니고 식구도 아니고 목사 자신이라고 하니 얼마나 함량 미달, 수준 미달인지 모르겠다. 지난주에는 역사 공부를 하던 저에게 이렇게 물었다. 아빠 신라가 좋으세요 백제가 더 좋으세요? 나는 내가 더 좋아. 웃자고 한 농담이었지만 그 말속에 얼마나 뿌리 깊은 자기애와 나르시시즘이 있는 것인가. 그러니 제 기준, 제 틀이 얼마나 강하겠는가. 그 기준과 잣대로 주위 사람들을 끊임없이 판단하고 나만의 경계를 치는 완고함이 저에게 있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좋은 사람처럼 보이고 싶어서 아닌 척, 있는 척 위선을 떤다. 바로 이것이 자기 기만이다. 내가 유대인이면서도 유대인이라는 것을 모르고 지냈던 것이다. 육적인 사람, 인본적인 사람의 전형이다. 그러니 옆에 있는 사람들을 불편하게 만든다. 간혹 이런 저를 보면 아, 하나님도 날 쓰시기 얼마나 불편하실까 하는 생각도 든다. 나 같은 게 목사로 사역할 자격이 있는 걸까. 게하시처럼 번번이 걸림돌이 되는 게 아닐까. 이런 생각이 들면 자기 연민에 빠지기도 한다.
이런 저에게 예수님은 오늘 본문 14절, 보라 네가 나았으니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예수님께서 고쳐주신 병자를 성전에서 다시 만나 해주신 말씀이다. 이 병자는 병 고침을 받긴 했지만 여전히 죄 가운에 머물러있었다. 지난주 네 명의 나병환자들처럼 아무 수고도 하지 않았는데 값없이 구원을 받았다. 그런데도 회개의 삶을 살지 않고 여전히 죄 가운데 있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 또 그를 찾아오신 것이다. 게하시를 포기하지 않으신 주님은 오늘 38년 된 병자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신다. 구원의 감격과 기쁨을 상실한 이 병자에게 너 구원받았다는 것을 기억하고 이제 남은 구원을 이루어 가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은혜로 얻게 된 새 생명에 감사하고 이제는 변화된 삶, 행복이 아닌 거룩을 목적으로 한 삶을 살아가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38년 된 병에서 고침 받은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 병 때문에 만난 예수그리스도, 그 예수님으로부터 받은 구원을 감사하고, 구원을 받은 자로써 오늘을 회개하며 살아내는 것이다. 그리고 날 살리신 이 복음의 아름다운 소식을 증거하고 전하는 증인 된 삶으로 걸어가는 것이죠.
그저께 새벽 설교를 했는데 그날 오후에 한 집사님의 부모님 영접 심방을 위해 요양원에 가게 되었다. 여든이 넘은 집사님의 아버님은 신경섬유화로 온몸에 근육이 빠져버린 상태로 누워계셨다. 젊은 시절 알코올중독에 분노조절장애, 폭력적이기도 하셔서 자녀들과 관계가 좋지 않으셨다. 본인의 생각이 옳다고 여기고 불편한 건 참지 않고 화를 내기도 하셔서 심방 요청하신 따님 집사님은 혹여나 심 방중 저에게 화를 내지 않으실까 걱정하시더라. 어머님은 한 번도 교회 오신적은 없었다. 사전에 미리 듣다 보니 그날 만날 두 분이 베레스다 연못에 누워있는 병자와 비슷한 상황이구나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요양원에 들어가 병상에 누워계신 아버님과 휠체어에 계신 어머님을 만났다. 오늘 38년 된 병자의 심정이 이분들의 심정 같았다. '아버님 어머님 이렇게 계시니 너무 외롭고 고단하고 힘드시죠?' 두 분 모두 고개를 끄덕이셨다. '아버님 어머님, 내 외로움을 가장 잘 아시는 분이 하나님이세요. 하나님이 아버님과 어머님을 창조하셨고 이 모든 상황을 너무 잘 알고 계세요. 바로 그분이 육신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는데 예수그리스도이시고, 죄에 빠진 우리를 구원해 주셨습니다. 그분을 나의 구주로 믿고 받아들이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거예요. 그분을 모르고 살아가는 것이 죄에요. 그분을 믿고 받아들일 때 우리는 천국 백성이 되는 겁니다.' 하고 복음을 전했다. 예수님을 영접하시겠냐고 여쭤봤는데 두 분 모두 고개를 끄덕이셨다. 기도를 다 마치고 났는데 갑자기 아버님이 눈을 뜨고 외치셨다. '하나님 도와주세요. 예수님 이름으로 말씀드립니다.' 놀랍기도 하고 감격이 되었다. 영접기도 후에 베레스다 연못의 말씀도 함께 전해드렸다. 어머님께서 이렇게 답하셨다. 내가 휠체어에서 일어나게 되면 우리들교회로 갈게요. 예수님은 이날 말씀대로 베데스다 연못에 누워있는 두 분을 만나주셨다. 사실 그날 요양원에 가면서 화를 내시면 잘 당하고 돌아오자 했는데 그것은 기우였다. 제가 병실을 떠날 때까지 두 분은 연신 고마워하셨다. 헤어지고 돌아오는 차 안에서 하나님의 구원의 일에 눈물이 났다. 사역을 하면서 가장 기쁜 순간은 한 영혼이 주님께 돌아오는 그 순간을 볼 때인 것 같더라. 바로 이 기쁨이 주인의 기쁨에 참여하는 거구나. 종의 기쁨은 주인의 기쁨에 참여하는 것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주님이 이 기쁨 주시려고 38년 된 병자 같은 나를 다른 이의 아픔에는 아랑곳하지 않던 유대인 같은 나를 불러주신 거구나, 게하시 같은 나를 구원해 주시고 값없이 받게 된 구원의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해주셨구나 하고 생각되니 너무 감사가 되었다. 한 영혼이 주님께 돌아오는 기쁨은 온 천하를 얻는 기쁨보다 크다고 하셨는데, 저 또한 이 기쁨을 알게 되니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감사가 제 마음 가운데 올라오더라. 돌아보면 유대인처럼 경건을 이익의 재료로 삼았고 사역을 통해 높임 받으려고 했던 저였다. 게하시처럼 탐심으로 사역하다가 영적인 나병에 걸려 수넴여인 같은 성도님들의 아픔을 체휼하지 못했고 엘리사 같은 담임목사님의 마음을 근심하게 하던 사역자였다. 과거 치리 받았을 때 말씀이 요한계시록 말씀이었다. 그때 담임목사님의 설교 말씀이 이 땅에서 내가 육적 수치를 드러냄으로써 영적 수치를 가려주시는 축복이 있다고 하셨는데, 그 말씀이 정말 게하시같은 날 위한 주님의 나팔소리였음이 깨달아졌다. 그리고 큐지컬의 주인공이 게하시였다는 그 자체가 저에게는 충격이자 위로였다. 죄 많고 지질한 게하시 같은 저를 외면하지 않으시고 회개하는 인생으로 견인해 주시고 끝까지 품어주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공동체의 사랑에 눈물이 났다.
저는 공사중이라는 단어를 좋아한다. 운전하 다보면 공사중이라는 표지판이 보인다. 되었다함이 없는 인생이기에 오늘도 저는 공사중이다. 다 지었다 싶은데 비가오면 줄줄 새고 바람이 불면 여지없이 흔들린다. 잘 지어졌다 싶은데 태양이 작열하면 또 허물어지는 인생이다. 그래서 여전히 공사중이다. 그런데 이런 공사중인 저에게 주님은 오늘도 말씀하신다. 네가 공사중이더라도 내가 너의 구원자잖아. 나를 의지하고 이제는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짓지 말렴. 그래서 이 말씀은 저에게 큰 위로가 되기도 한다. 또 엄중한 명령으로 들리기도 한다. 그리고 내 삶을 끝까지 지켜주시겠다는 신실한 주님의 약속으로도 들리기도 한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38년 된 병자도, 유대인들도 모두 아픈 사람들이다. 공사중인 사람들이다. 구원이 필요한 사람들이다. 양쪽 모두 예수님을 만나지 않으면 가망 없는 인생들이다. 한쪽은 한없는 절망과 고통과 원망 속에서 자신을 세상과 비관하다가 끝날 인생이다. 또 한쪽은 끝없는 교만과 정죄 속에서 세상과 사람들을 비난하다가 망할 인생이다. 그리고 바로 저 자신도 이 둘처럼 그렇게 살다 끝날 인생이겠죠. 하지만 이런 저에게 주님은 오늘 또다시 찾아오신다. 그리고 지금 말씀해 주신다. 니가 구원받았으니 이제 구원받은 자에 합당한 인생, 하나님의 자녀 된 인생을 살아가렴. 혹시나 지금도 베데스데 연못가에서 잘못된 믿음과 거짓 희망에 사로잡혀 넋 놓고 앉아계신 분이 있습니까? 그 베데스다에서 내 마음에 깊은 갈망이 채워지고 세상 소망과 욕심이 채워지고 그토록 고대하던 행복이 이루어질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좋은 학교에 들어가고 이름있는 직장에 취업하면 성공할 것만 같고 더 많은 투자를 받아서 사업하면 대박이 날 거라는 소망을 갖고 있지는 않으십니까? 내 눈에 보기 좋은 그 사람을 만나면 내가 안식하게 될 거라고 기대하고 있지는 않는가? 아직도 그 베데스다를 떠나지 못한 채 <오징어게임> 참가자들처럼 헛된 세상 신화에 나를 던지고 있지는 않는가?
진짜 베데스다는 예수그리스도이다. 나의 과거부터 지금까지 모든 삶을 주목하고 계셨고 나의 결핍과 부족과 아픔, 그 모든 것을 아시는 바로 그 주님께서 나의 베데스다이다. 그 주님께서 나의 생명, 나의 전부가 되심을 믿는다. 그래서 그 예수님 한 분이면 충분한 것이다. 바라기는 오늘도 내 곁에 찾아오신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지금 있는 그 절망의 자리, 헛된 소망의 자리, 무기력의 자리, 죄악의 자리에서 일어나시길 바란다. 그리고 나에게 허락하신 이 길을 주님과 함께 걸어가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적용
내 기준에 따라 옳고 그름으로 판단하고 정죄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내가 또다시 범하지 않아야 할 죄, 피해야 할 죄는 무엇입니까?
내 인생의 목적은 행복입니까? 거룩입니까?
[기도제목]
아름
1. 코로나 회복되어 사무실 복귀해서 일하는데 체력적으로 지치지 않도록
2. 회사랑 진로 문제에 있어서 하나님이랑 공동체에 묻고 가며 지혜롭게 정할 수 있도록
3. 배우자 기도하며 하나님의 때를 잘 기다릴 수 있도록
설희
1. 갑작스럽게 저희 집을 부동산 7군데에 올리신 외삼촌 때문에 힘든 엄마의 마음의 평강을 주시어 사건을 하나님께서 강력히 주관해 주시고, 외삼촌이 알츠하이머로 고생하시는 할머니를 요양병원에 보내버리셨습니다. 상실감으로 힘든 외할머니께서 12월부터 갑작스럽게 지내게 되신 요양원에서 요즘 식사를 못하고 계신다고 합니다. 환경이 바뀐 외할머니와 결혼을 준비하는 언니와 집이 이제 사라질 위기에 처하여 독립해야 하는 제 마음에 풍요와 안식이 있을 수 있도록 제발 마음과 실질적인 처소를 구해주시옵소서
2. 목장 식구들 마음이 요동치지 않고 편안이니이다. 할 수 있도록
3. 친언니 결혼 준비하면서 마음이 힘들 수 있고 고난이 많을 텐데 마음이 편안할 수 있도록 세세하고 작은 것들까지도 모든 것을 주님께서 주관하여 주세요.
4. 사고로 갑작스럽게 죽게 된 애완조 키위(동물은 영이 없어 천국에 갈 수 없다고는 하지만)와 제발 하늘에서 만나게 해달라고 이틀째 네 시간씩 울며 '하나님, 예수님. 제가 뭐하나 바라며 기도한 적 도 없잖아요. 제발 이 기도만큼은 들어주세요. 뭐 다른 거 바라지도 않을게요. 제발 가엽고 불쌍한 우리 키위 좀 하늘에 살려주세요. 최근에 엄마를 물어서, 집 안에서 나오지도 못하고, 목욕도 시켜주지 못했는데 너무 후회가 돼요. 멍청했던 저 대신 제발 만날 때까지 우리 키위를 가족처럼 예뻐해 주세요. 우리 가족들이 천국에 가는 날, 제발 사고로 두 살도 되지 못하고 죽은 불쌍한 우리 키위 만나서 함께 지내게 해주세요.'라고 기도했던 다음날, 하나님께서 '네 아들이 살아있다' 너희들은 꼭 표증을 보여줘야 믿는다고. 무지하고 멍청한 저를 이렇게도 가엽게 여겨주시고 사랑해 주셔서 큐티 말씀의 제목과 내용으로 안심시켜주셔주셔서 감사합니다. 다음날 '고친 이는 예수라'라는 말씀으로 응답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부디 키위를 천국 갔을때 가족들과 함께 만나서 다 같이 건강하게 지낼 수 있게 해주세요.
현주
1. 아빠랑 오빠의 구원을 위한 힘을 주실 수 있도록
2. 일하고 남은 시간들을 잘 쓸 수 있도록
3. 정신적으로 건강할 수 있도록
은정
1. 진로와 결혼에 대한 불안과 스트레스 잘 이겨낼 수 있도록
2. 예배에 잘 참석할 수 있도록
3. 가족들 건강 잘 회복할 수 있도록
성은
1. 주님만이 베데스다인 것을 기억하기 위해 큐티할 수 있도록
2. 체력을 위해 건강하게 먹고 운동 빠지지 않도록
3. 남동생과 사촌 동생, 수련회 참석할 수 있도록
4. 믿지 않는 가족들이 결혼 예배 통해 하나님 만날 수 있도록
5. 결혼 예배까지 남은 준비와 일정관리 지혜롭게 할 수 있도록
6. 우리 목장 이번 주 말씀 안에서 참된 안식 누릴 수 있도록
이번주 말씀처럼 고침받게 해주신 큰 은혜는
예수님 속에서만 이루어졌음을 깨닫고 일어나는 역사하심으로
한주간도 아픔에서 온전케되는 은혜속에 살아나게 하여주옵소서.
아픈 마음 세세하게 알아주시는 주님.
우리를 살려주시고 처소가 되어주시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