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장모임>20240107
본문: 열왕기하 7:3~11
제목: 이제 가서 알리자
1. 죽을 것 같은 고난이 기회다. 열왕기하 7장 3~4절, 성문 어귀에 나병환자 네 사람이 있더니 그 친구에게 서로 말하되 우리가 어찌하여 여기 앉아서 죽기를 기다리랴 만일 우리가 성읍으로 가자고 말한다면 성읍에는 굶주림이 있으니 우리가 거기서 죽을 것이요 만일 우리가 여기서 머무르면 역시 우리가 죽을 것이라 그런즉 우리가 가서 아람 군대에게 항복하자 그들이 우리를 살려 두면 살 것이요 우리를 죽이면 죽을 것이라 하고, 2차 침공에서 장로들은 드디어 엘리야의 말씀을 들으러 왔고 왕은 죽이려고 하고 장관도 물가가 떨어진다는 말을 안 믿는다. 이런 상황에서 누가 믿는지 보자. 성벽은 장벽이 되어 버렸다. 넘어가면 죽음이다. 먹을 것이 동난 지금 성안도 성밖도 다 죽음 아래에 있다. 지금 극한 굶주림 속에서 어디에도 끼지 못하고 공동체의 보살핌도 받지 못하는 극과 극사이에 끼어 있는 사람들이 있다. 바로 오늘 주인공인 나병환자 네 사람이다. 굶어죽어도 아무도 쳐다보지 않는 불가촉 천민이었다. 지금까지 열왕기하 읽으면서 나병환자가 두사람 나왔는데 나아만 장군과 엘리사의 사환 게하시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 나병환자가 네 명 나온다. 이 급박한 상황에서 나병환자가 또 나온다. 주님은 나병환자가 뭐라고 이렇게 열왕기서에서 등장시키실까? 그들은 나병환자로서 육신의 병을 얻어서 구원을 얻었지만 고통에 무감각한 영적 나병환자인 우리 자신을 생각해보라는 말이다. 유대인의 탈무드는 여러 곳에서 이 나병환자를 게하시와 그의 아들들이라고 한다. 구원받지 못하고 끝난다는 것이다. 시간 순서로도 게하시가 맞다고 보지만 시간순서로 쓰인게 아니라고 해도 그렇다. 나병의 치리가 구원의 사건이 되지 않고 영원한 심판으로 끝났다면 왜 게하시를 이어지는 8장에 나오게 하셨겠는가? 물론 예수님 시대에 열명의 나병환자중에 다 고쳐주셨지만 한명도 사마리아 나병환자만 감사해서 그에게 구원이 이르렀다고 하신다. 그럼 병 고쳤는데 구원을 못 받았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성경은 구원의 스토리다. 하나님이 이뤄가시는 양육과 드라마를 봐야 한다. 탈무드처럼 나병환자는 저주고 옳고 그름의 문제로 따질 문제는 아니라고 본다. 네명의 나병 환자 가운데 게하시가 있다고 본다. 6장에서 아람 군대가 1차 침공때 엘리사를 잡으려고 도단을 포위했다. 기억나는가? 무섭게 나병으로 치리를 했어도 치리의 목적이 구원이기에 쫓아내지는 않은 것으로 보였다. 하지만 엘리사 옆에서 사환 역할을 한 것도 하나도 없이 아람 군대가 오니까 두려워서 아 내 주여 어찌하리이까만 외쳤다. 엘리사는 눈높이를 맞춰서 그의 눈을 열어달라고 기도했다. 그래서 게하시는 불말과 불병거를 보았다. 도대체 게하시가 뭐라고 이런 은혜를 주시는가? 한 영혼을 천하보다 귀하게 여기시며 구원하시려는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이다. 그런데 거기까지였다. 2차 침공때는 게하시가 사라진다. 어떤 적용도 하지 않았다는 말이다. 그리고 오늘 아무 이름도 없는 나병환자 넷 중 한명으로 등장한다. 물론 치리받은 후로 게하시라는 이름으로 호칭된 적은 없다. 여전히 이름만 없는게 없다. 사환이라는 직분도 없다. 아직 회개가 제대로 되지 않았다는 뜻이다. 게하시는 이제 선생님을 향한 죄송함을 넘어 자기 자신을 향한 절망에 빠졌을 것이다. 엘리사 선생님은 내치지 않으셨지만 눈을 열어 보게 하시는 은혜도 주셨지만 은혜를 소화하지 못하는 자신을 인정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은혜는 잠깐 이고 금새 악하고 음란한 자기 본성으로 돌아가버리는 자신을 보며 절망했을 것이다. 한편 2차 침공이 일어나고 온 나라가 굶주림으로 아비규환이니 게하시 같은 나병 환자는 설 자리가 없다. 엘리사는 1차하고는 달리 장로들, 여호람 왕, 장관들을 상대하고 있는데 나병환자인 자신이 그 당시의 고정관념으로 그 자리에 있을수도 없었을 것이다. 드디어 사명 이고 다 포기하고 나병환자라는 자기 분수에 맞는 자리에 주저앉아 버렸다. 여러분도 그러고 싶을 때가 너무 많죠? 그렇게 양육을 해도 되었다, 안되었다, 가정이고 교회고 사명이고 환경을 탓하며 다 버리고 주저앉고 싶을 때 말이다. 게하시가 곧 우리다. 이들의 주제가는 죽을 것 같다이다. 여기까지 와야 한다. 자기의 자리는 나병환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는 주제를 알아야 한다. (목사님 이야기) 나병환자들은 여기서도 죽을 것이고 저기서도 죽을 것이다. 그래서 죽을 것같은 고난, 이것이 나병환자 네 명의 인생을 요약하는 말이다. 네 사람은 어떻게 하는가? 어찌하여 여기 앉아서 죽기를 기다릴까? 피투성이가 되었으니 죽겠다가 아니라 피투성이라도 살겠다는 것이다. 이 사람들이 믿음이 있어서가 아니라 나병이라는 죽을 것 같은 고난에 있으니 하도 무시를 받아서 이게 가능한 태도다. 낮은 마음이다. 다 포기하고 들어온 게하시가 이런 나눔을 주도하지 않았을 것이다. 오히려 그는 그대로 죽고 싶었을 것이다. 다른 나병환자 친구들이 태어나면서부터 나병 환자 친구들이 어찌 여기서 죽기만 기다리랴, 같이 살아보자 외쳐주니까 같이 끌려갔을 것이다. 환경이 겸손한게 겸손한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그것이 끌려가서 엄청난 구원의 시작이 된다. 이런 나병환자에 비해 여호람왕은 아람이 쳐들어와서 피투성이가 된 재앙에서 하나님을 향한 소망조차 끊었다. 어찌하여 여호와를 더 기다리리요 반문한다. 여호람이 의지하는 능력있는 장관도 마찬가지다. 구원을 약속하는 말씀을 듣고도 어찌 이런 일이 있으리요 믿지 않았다. 왜? 마음이 높을 수밖에 없는 사람들은 피투성이가 된 삶을 감당할 수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상식 밖의 기적을 바라며 피투성이 같은 삶을 이어가느니 현실을 깔끔히 인정하고 쿨하게 죽겠다는 것이다. 게하시가 나병환자가 아니라 왕과 장관 옆에 있었다면 또 그대로 따라갔을 것이다. 내 옆에 누가 있는가? 어떤 공동체가 함께 있는가가 이렇게 중요하다. 공동체가 평생을 좌우한다. 피투성이라도 살겠다는 나병환자와 피투성이니까 죽겠다는 왕과 장관 중 누가 더 멋져보이는가? 누구처럼 되고 싶은가? 엉망진창이 되어버린 결혼이라도 지켜야 된다고 생각하세요? 이혼해야 한다고 생각하는가? 세속사적인 가치관으로 보면 신뢰가 깨어져버린 결혼을 이어가느니 쿨하게 이혼하고 새출발하는게 훨씬 폼나는 듯 하다. 이 세속사적인 가치관으로 보면 피투성이처럼 망가진 삶을 놓치 않고 살아내느니 미련 없이 스스로 세상을 떠나는 것이 더 멋진 것 같으니 요새 이런 일을 행하는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깨뜨리는 이혼도, 하나님의 형상인 자기 생명을 스스로 끝내는 자살도 하나님을 반역하는 악한 죄다. 자꾸 이것에 공감하면 안될 것 같다. 이게 죄라고 무섭게 알려줘야 될 것 같다. 왜냐하면 결론이 영원한 심판이기 때문이다. 영생의 반대는 영벌이 있지 않겠는가? 앞으로 남는 것 같지만 뒤로 밑지는 선택이다. 구속사적인 가치관으로 보면 수치를 지고 사는 유다에게서 예수님이 오신다. 수치스러운 삶을 거부하며 구원을 기다리지 않는 왕과 장관이 아닌 수치를 무릅쓰고 구원받기를 소망하는 나병환자가 구원을 얻는다. 나병이라는 고난 속에 이미 들어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제 성 안에서 밖에도 갈 수 없는 죽을 것 같은 고난보다 생명이 귀한 것을 알기 때문에 망가질 줄 아는 것이다. 거듭난 사람은 잘 망가진다. 왕과 장관은 수치를 당해본적이 없기에 망가질 줄 모른다. 그래서 재미가 없다. 죽을듯한 고난이 오면 살 소망을 쉽게 버린다. 배우자들, 자식들에게 무시를 받고 있는가? 시댁에도 친가에도 속할 곳이 없는가? 본가에도 처가에도 갈 데가 없는가? 가정에도 직장에도 쉴 자리가 없는가? 여기서도 죽을 것 같고 저기서도 죽을 것 같은 고난에 있는가? 이런 고난은 죽을 이유가 아니다. 거듭날 기회다. 복음을 경험할 기회다. 그래서 피투성이라도 살아 있어야 한다. 깨어진 결혼도 지켜야 한다. 그러면 주님이 온전히 회복시키고 구원하신다. 상상 못하게 힘든 집이 많다. 자녀가 욕을 하고 아내가 남편이 욕을 하고 서로 욕을 하고 폭력을 행하면 살고 싶지 않을 것이다. 어떻게 그런 집이 있어? 이렇게 체휼하지 못하는 사람도 똑같다. 너무 비참하다. 매를 맞고 욕을 먹으면 너무 비참하다. 다 아파서 그런다. 제 정신 가지고 그러겠는가? 대인관계가 안된다. 그런 식구랑 같이 살아내야 하는게 밑동 잘린 나무의 사명이다. 힘든 여러분들을 응원한다. 살아줘서 고맙다. 하나님이 화살을 쏘셨으면 책임을 지신다. 훈련이다. 길이 참길 바란다. 그래서 여기와서 앉아 있는 것이다. 어떻게 저럴 수 있어 이러지 좀 말자. 하나님이 만든 것 중에 질서가 위대한데 남편을 자꾸 무시하고 그러지 말라. 술먹고 난리 쳤다고 자녀들앞에서 남편을 무시하지 말라. 물론 아내도 무시받으면 안되지만 아내는 복종, 남편은 사랑이다. 아내의 머리가 남편, 남편의 머리가 그리스도다. 아무리 때려 부셔도 난리쳐도 남편을 욕함으로 자녀를 망가지게 하지 마세요. 똑같은 자녀가 된다. (적용)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죽을 것 같은 상황에 있다면 무엇인가? '피투성이가 되었으니 죽어야 한다.'와 '피투성이라도 살아야 한다' 중 어디에 동의하는가?
2. 값없이 받은 구원이 알릴 소식이다. 열왕기하 7장 5~8절, 아람 진으로 가려 하여 해 질 무렵에 일어나 아람 진영 끝에 이르러서 본즉 그 곳에 한 사람도 없으니 이는 주께서 아람 군대로 병거 소리와 말 소리와 큰 군대의 소리를 듣게 하셨으므로 아람 사람이 서로 말하기를 이스라엘 왕이 우리를 치려 하여 헷 사람의 왕들과 애굽 왕들에게 값을 주고 그들을 우리에게 오게 하였다 하고 해질 무렵에 일어나서 도망하되 그 장막과 말과 나귀를 버리고 진영을 그대로 두고 목숨을 위하여 도망하였음이라 그 나병환자들이 진영 끝에 이르자 한 장막에 들어가서 먹고 마시고 거기서 은과 금과 의복을 가지고 가서 감추고 다시 와서 다른 장막에 들어가 거기서도 가지고 가서 감추니라, 죽을 것 같은 고난에서 죽기만 기다리기를 거부한 나병환자 네 명은 그 자리에서 일어난다. 죽지 않고 살고 싶은 마음을 품는 것도 중요하지만 죽으면 죽으리라하고 일어나는 적용도 필요한 것이다. 실날 같은 소망을 붙들고 죽음의 자리에서 일어난 네 사람은 아람 진영으로 갔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진영이 텅텅 비었다. 더 이상한 것은 군대가 먹던 식량과 쓰던 무기는 물론 의복과 장막도 그대로 있다. 심지어 말과 나귀도 안 타고 갔다. 은도 금도 다 두고 갔다. 그야말로 사람들만 쏙 빠져나간 것이다. 이 넷은 영문을 모른다. 배가 너무 고팠기에 이런 저런 거 따질 여유가 없다. 제일 가까이 있던 장막에 들어가서 허겁지겁 배를 채운다. 허기를 달래니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이 무엇인가? 은과 금과 의복이다. 돈이다. 왜 은과 금과 의복일까? 이 셋이 언제 나왔는가? 나아만이 엘리사를 찾아 이스라엘에 올 때 가지고 온 선물이다. 나병에서 치료받은 나아만에게 게하시가 달라고 한 것은 무엇인가? 은과 의복이다. 아마 금은 차마 구하지 못했을 것인데 은 두달란트도 엄청난 가치니까. 게하시가 욕심 때문에 치리를 받았는데 그 치리로 자신에 대해 절망하며 사명을 다 포기하게 되었는데 적군이 다 도망간 진영에서 은과 금과 의복을 보니 또 눈이 뒤집혔다. 여기서는 게하시가 다른 셋을 주도했을 것 같다. 재물을 싹 다 가져다가 다른 사람이 찾지 못하게 잘 감춘다. 돈 감추는데는 게하시가 또 박사다. 자기 전공 나오니까 얼마나 신나게 감췄겠는가? 장막 하나 싹 털고 나와 보니까 와 이런 장막이 들판을 가득 채우고 있는 것이다. 눈이 더욱 돌아간다. 와 이제 고생 끝이다 나병도 문제가 없어, 어디 가서도 잘 먹고 잘 살 수 있겠다, 이게 행복 시작이네, 이런 기대에 부풀어 이 장막 저 장막 다니며 보이는 은과 금과 의복을 가져다가 감춘다. 오기 전까지 통장도 없이 다 망한 인생인데 갑자기 새 통장 개설과 함께 잔고가 수십억원이 쌓이게 되었다. 그런데 네 사람은 아람 군대가 모든 물품을 그대로 두고 몸만 빠져 나간 이유를 모른다. 성경은 우리에게 그 이유를 알려준다. 열왕기하 7장 6~7절, 이는 주께서 아람 군대로 병거 소리와 말 소리와 큰 군대의 소리를 듣게 하셨으므로 아람 사람이 서로 말하기를 이스라엘 왕이 우리를 치려 하여 헷 사람의 왕들과 애굽 왕들에게 값을 주고 그들을 우리에게 오게 하였다 하고 해질 무렵에 일어나서 도망하되 그 장막과 말과 나귀를 버리고 진영을 그대로 두고 목숨을 위하여 도망하였음이라, 주께서 아람 군대를 도망가게 하셨다. 주께서 아람 군대가 병거 소리 말 소리, 큰 군대 소리를 듣게 하셨다고 한다. 그 소리를 들은 아람 군대는 착각에 빠졌다. 자기들이 감히 맞서 싸울 수 없는 엄청난 적군이 이스라엘을 도울 원군으로 온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너무 급해서 아무것도 챙기지를 못하고 말도 나귀도 타지 못할 정도로 혼비백산해서 몸만 겨우 도망갔다. 이 모든 일을 주께서 하셨다고 한다. 왕이라고 전쟁을 잘 하는 것이 아니다. 나병환자 네 명 주목해야 한다. 열왕기하에서 처음으로 하나님을 주, 아도나이라고 부른다. 지금까지 여러 주들이 나와서 저마다 주를 행세했다. 여호람왕과 아람의 벤하닷왕은 물론 여호람의 장관도 자신을 실세로 여기면서 까불었다. 진짜 주님이 등장하신다. 만왕의 왕, 만유의 주이신 하나님이 등장하신다. 사마리아를 에워싼 군대를 한순간에 몰아내신다. 사업이 되고 안되고 주께서 하시는 일이라고 믿으면 하나님이 굶기지 않으신다. 있으면 먹고 없으면 금식하고 죽으면 천국간다, 왜냐 밑동 잘린 나무기 때문이다. 인생이 참 짧다. 구원의 은혜로 네 사람의 나병환자는 구원을 뜨겁게 경험한다. 구원을 위해서 아무 수고와 노력을 하지 않았다. 예상과 기대도 하지 않았다. 애굽 땅에 아무리 물을 부은들 감사하는가? 죽을 것 같은 고난에서 죽으면 죽으리라 하고 그 죽음의 자리에서 일어나 아람 진영에 왔을뿐인데 거기서 엄청난 구원을 아무 값도 없이 받았다. 세상 어디에도 속하지 못했던 그들인데 하나님이 은혜로 베푸신 구원을 제일 먼저 누리고 있다. 이렇게 값없이 받는 구원이 우리가 알릴 소식이다. 합격과 취업과 승진은 노력한만큼 성취하는 것이다. 물론 노력한다고 되는게 아니다. 계획한다고 이뤄지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내 힘으로 수고하지 않고서는 이런 성취를 기대할 수 없다. 공짜 좋아하면 어떻게 된다고 한다. 그런데 우리는 이런 성취를 너무도 전하고 싶다. 이런 소식만 전할 수 있는 인생을 살고 싶다. 우리 자녀들이 그런 소식을 많이 많이 들려주기를 너무도 간절히 원하고 빌고 또 빌지 않는가? 이런 성취의 소식은 내 강함을 자랑하는 것이다. 이런 자랑은 풍선과 같다. 바람을 아무리 넣어도 작게 보이는 풍선이다. 만족하지 못한다. 더 크게 하려고 바람을 자꾸 넣는다. 자랑에 자랑을 더하고 없는 것도 지어내고 보태도 펌프질을 멈출수가 없다. 그러다 결국 펑하고 터진다. 한방에 추락하고 만다. 처음에 잠깐 아름다운 소식처럼 보이지만 결국 더 큰 수치로 끝나고 만다. 예수가 없다면. 그래서 고린도후서 11장에는 사도바울이 부득불 자랑하게 되더라도 오직 약한 것만 자랑하겠다고 한다. 왜 그런가? 고린도후서 12장, 내 약함을 자랑할 때 그 약함을 통해 구원을 이루어가시는 주님의 강한 능력이 전파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가 알려야 할 아름다운 소식은 주님이 나같은 죄인에게 은혜로 베푸신 구원뿐이다. 모두가 100% 죄인이다. 주님이 100% 이루신 구원을 똑같이 받는다. 그래서 우리 모두가 값없이 받은 구원을 전해야 한다. 구원은 아무리 자랑해도 터지지 않는다. 자랑하면 자랑할수록 더욱 커져서 허다한 죄를 덮는다. 구원의 소식을 듣는 모든 사람을 구원한다. 주님의 능력이기 때문이다. 거저 받은 구원을 알리고 나눌 때 표어대로 거주할 처소가 가정과 교회에 이 복음이 필요한 곳곳에 세워질 줄 믿는다. 이런 마음으로 선교에도 동참하기 바란다. 값없이 받은 구원을 알리는 모임이 바로 목장 아니겠는가? 약함을 자랑하지 않는가? 목장 가는게 선교의 첫 교두보다. 왜 그런가? (목장 나눔) (적용) 주로 자랑하는 것은 무엇인가? 더 자랑하고 싶어서 과장하는 것은 없는가? 값없이 받은 구원을 알리기 위해 자랑할 내 약함은 무엇인가?
3. 나를 힘들게 한 사람에게도 알려야 한다. 열왕기하 7장 9~11절, 나병환자들이 그 친구에게 서로 말하되 우리가 이렇게 해서는 아니되겠도다 오늘은 아름다운 소식이 있는 날이거늘 우리가 침묵하고 있도다 만일 밝은 아침까지 기다리면 벌이 우리에게 미칠지니 이제 떠나 왕궁에 가서 알리자 하고 가서 성읍 문지기를 불러 그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우리가 아람 진에 이르러서 보니 거기에 한 사람도 없고 사람의 소리도 없고 오직 말과 나귀만 매여 있고 장막들이 그대로 있더이다 하는지라 그가 문지기들을 부르매 그들이 왕궁에 있는 자에게 말하니, 나병환자 네 사람은 게하시가 주도한 약탈 아닌 약탈을 신나게 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게하시가 정신이 번쩍 들었을 것 같다. 우리가 이렇게 해서는 아니되겠도다 하는 것이다. 이게 왜 게하시라고 그러냐면, 나아만의 옷을 탈취했다가 선생님에게 걸려서 치리 받은게 딱 생각이 났을 것이다. 치리의 결과 나병이 보였을 것이다. 그 이후 겪은 많은 일들이 떠올랐을 것이다. 뭐가 잘못인가? 아름다운 소식을 사마리아에 알리지 않고 있는게 잘못이다. 기아에 허덕이는 동료 시민이 생각난 것이다. 자기가 엘리사의 제자였다는 것이 생각이 났다. 엘리사의 오랜 양육이 그래도 빛을 발하는 순간이다. 은과 금과 의복이 전부인 인생이 이제 은과 금과 의복 너머에 있는 구원을 생각하게 된 것이다. 은과 금과 의복을 그냥 가질 수 있었다. 감추었다고 표현한 것은 절대 진리를 생각한 것이다. 사실 도둑질이라고 할 수도 없다. 침략군이 버리고 간 것 주워 담는게 뭐 도둑질이겠는가? 그런데 감추었다고 표현했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지금 당장 가서 알리지 않는다면, 아침까지 기다린다면 벌이 자기들에게 미치리라고 한다. 선지자의 말씀으로 받은 양육이 있기에 벌에 대한 개념이 있다. 죄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한다는 의식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 당한 게 많은 것은 인생에서 손해가 아니다. 당한만큼만 인생에서 두려워할줄 알게 되기 때문이다. 당한 게 없어서 무서운게 없으면 자기가 주인 자리에 앉아 내려올줄 모른다. 여호람이 두려운 게 없다. 착하고 일류인 사람이 두려운게 없다. 거절을 당해본적이 없기 때문이다. 장관도 그렇다. 당한게 없어서 그렇다. 그런데 당한것만 있다고 또 되는게 아니다. 아무리 당한게 많아도 말씀으로 양육되지 않으면 두려워할줄 아는 사람이 아니라 두렵게 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네가 내 고난을 알아? 이런다. 어떻게 생각해보면 괴물 같은 존재가 될 수 있다. 인간이 선한게 없다. 우리 머리만으로는 죄가 뭔지 죄에 대한 책임이 뭔지, 죄에 대한 벌이 뭔지 알 수 없다. 고난만 많고 양육되지 않은 사람과 고난은 없지만 좋은 교육을 받은 사람 중에 누가 더 좋고 나쁘고 따지는 것은 하나도 의미가 없다. 인간은 어떤 모양으로 살든 다 악하고 음란하다. 구원받을 자격은 단 한 사람도 없다. 그래서 이걸 알 수 있는 말씀이 필요한 것이다. 주의 말씀으로 양육을 받아야 한다. 말씀이 없으며 좋은 교육도 꽝이고 고난의 경험도 무용지물이다. 드라마틱한 고난에 속아서도 안되고 모두가 부러워할만 교양과 스펙에 속아서도 안된다. 엘리사의 사환이자 수제자로서 거만해져서 스승의 지팡이를 휘두른 게하시에게는 겸손한 나병환자 친구들과 있는 것이 그가 있어야 할 자리였다. 고난만 충만한 나병환자에게는 그래도 말씀으로 양육받은 한 사람 게하시가 꼭 필요한 존재였다. 양육받은 게하시 덕분에 그래도 구원을 생각할 수 있게 되었다. 아름다운 소식을 알리는 사람이 되었다. 고난과 양육이 만나니 절망뿐인 인생이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는 복된 인생으로 거듭날 수 있었다. 그래서 이제는 자기들을 버린 사람들이 있는 사마리아 성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사마리아 성에 도착했다. 떠났던 자리로 돌아왔다. 그리고 누구를 부르는가? 문지기를 부른다. 그들에게 문지기는 어떤 존재인가? 가장 못된 간수다. 나병 걸린 자기들을 향한 사회 전체의 배척과 조롱을 상징하는 존재가 문지기다. 한마디로 문지기는 나를 힘들게 한 사람이다. 나병 걸린 게하시가 말씀으로 양육을 받을수록 나를 힘들게 한 사람이 내 구원 때문에 가장 수고한 사람이라고 고백하는데까지 드디어 복음이 깨달아진 것 같다. 나병환자를 무시하지만 앞장서서 무시하는 사람은 문지기라는 것이다. 나를 앞장서서 무시하고 조롱하고 수치를 주는 사람이 가장 공로자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런데 이 아름다운 소식은 왕이나 장관을 통해 알리지 않으신다. 엘리사 선지자를 통해서도 알리지 않으신다. 성 밖에 격리된 나병환자를 통해서 알리신다. 아무리 양육받고 치리 받아도 변하지 않는 게하시가 포함된 나병환자들을 통해서 알리신다. 대체 왜 이렇게 어려운 방법으로 알리실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는 사람은 그에 걸맞는 아름다움을 가져야 한다는게 우리 고정관념 아니겠는가? 아름다운 소식은 하나님이 직접 은혜로 알리신다는 것을 보여주시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믿음이 좋으면 얼굴도 아름다워야 할 것 같고 다른 것도 다 교양도 있어야 될 것 같고, 그게 아니고 많은 영혼을 주께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빛난다고 했다, 십자가는 지혜고 지혜는 타이밍이다, 지혜를 알고 말씀을 잘 적재적소에 갖다 쓰는 사람은 광채 같이 빛나고 별과 같이 빛날 줄 믿는다. 그것이 이쁜 것과 무슨 상관인가? 성령의 광채, 하나님이 직접 하시는 일이기 때문에 자격 있는 사람 쓸 이유가 없으시다. 다 무너진 인생, 소망없는 인생, 자랑할게 악함뿐인 인생을 통해 알리셔서 그것이 오직 주님의 은혜임을 알게 하신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세속적인 고정관념이 너무 강해서 아름다운 소식을 듣지 않는다. 2024년 이 말씀을 주신 것이 우연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거주할 처소를 세우는 사명은 세속사적인 가치관이 왕노릇하는 시대에 너무도 중요하고 시급한 일인 구속사적인 말씀 운동을 일으키자는 것이다. 말씀 묵상 운동을 일으키자는 것이다. 이것이 가정 중수, 인구절벽 문제까지 해결하는 것이다. (출산율 이야기) 게하시 같은 제자들이 하나도 빠짐없이 다 분수령적인 회개의 눈물을 흘리고 돌이키기를 소망한다. (나눔) (적용) 고난과 양육이 조화를 이루는가? 나를 힘들게 한 사람은 누구인가? 나를 살린 아름다운 소식을 그에게 어떻게 가서 알리겠는가? 선교의 첫 걸음이 목장에 가는 것이다.
(목장모임)
우리 목장은 다음 세 가지 사항을 나눴습니다. 자기 소개, 교회 오게 된 이유, 신앙을 가지게 된 과정 등을 나눴습니다. 나눔 후반부엔 이상형과 기도제목 한 가지씩을 나눴습니다. 추워지는 날씨, 모두 건강 조심하고 모두 다음 목장때 만나요!!
(기도제목)
현숙: 1. 나병환자같은 나의 주제를 잘 알고 나를 힘들게 한 아빠에게 구원의 소식을 잘 알리도록
2. 폐암수술 후 항암중인 아빠의 건강을 지켜주시고 부모님을 광주채플로 인도해주시도록
3. 오빠(조현우), 동생(조중대) 공동체로 돌아오게 하시고 구원해 주시도록
4. 신교제 신결혼 하도록
은희: 1. 매일 큐티로 값없이 얻은 구원의 은혜에 감사할 수 있기를
2. 가족 구원
부모님 구원
- 친언니 가정이 흘러 떠내려 가지 않고 하나님을 소망하고 예배와 목장이 다시 생각날 수 있기를
- 친오빠 가정을 불쌍히 여겨주시길, 심한 당뇨와 술과 담배중독으로 몸이 많이 상해있는 오빠를 하나님께서 꼭 방문하여 주시고 가정이 살아나길
- 조카들에게 돌아가면서 안부 전할 수 있기를
3. 목장중보
4. 직장에서 우선순위를 잘 잡고, 일할 수 있는 체력 주시기를
5. 신교제 신결혼
명현: 1. 예배와 말씀으로 나아가기
2. 가족들이 교회에 나올 수 있도록
3. 건강 허락해주시기를
선영: 1. 말씀 잘 보며 한 주간 살도록
2. 체력과 지혜 주시길
3. 투석하시는 아빠의 혈압과 체력 붙들어 주시길
4. 동생 가족의 영육의 건강과 평안
영훈: 1. 어머니 영육간의 강건함과 평안함 주시길
2. 사랑부 순종함으로 잘 섬기고 버디와 어머니에게 위로와 평안함 주시길
3. 직장에서 업무할 때 현명하게 잘 대처하고 말할 수 있는 능력 주시길
4. 큐티해라 목장가라 잘 적용할 수 있기를
5. 잘 깎이고 다듬어져서 신교제 할 수 있기를
성은: 1. 오랫동안 계속되는 속 울렁거림과 기운없는 상태로 힘들고 불안한데 하루속히 회복해서 일상생활을 하고 건강해지기를
2. 가족모두의 건강
호진: 1. 꾸준히 큐티하며 말씀을 잘 이해하고 내 삶을 잘 해석해가도록
2. 주일 예배 설교 말씀을 잘 이해할 수 있도록
3. 취업과 진로의 문제에서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며 말씀으로 인도함 받도록
4. 생색내지 않고 가족들을 구원의 목적으로 바라보며 도울 수 있도록
5. 아버지, 어머니, 형의 건강과 아버지와 형의 구원, 형과 저에게 돕는 베필을 허락해 주시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