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흥과 분리개척이 나온다. 엘리사가 이끄는 선지학교 이야기다. 거주할 처소를 세우려면 어떻게 해야될까?
1. 부흥으로 이어지는 양육이 있어야 합니다.
처소가 좁다. 부흥했다는 뜻이다. 왜 부흥했을까? 평신도들 보다 수제자가 골칫덩이다 (게하시). 게하시가 얼마나 거룩했으면 수제자가 되었을까? 성도들을 인도해야 하는 사역자들은 경건을 이익의 재료로 쓰고자 하니 구속사의 말씀이 들리지가 않았다.대표적인 제자가 게하시이다. 참다참다 게하시의 탐심을 엘리사가 나병으로 치리했다. 그랬더니 도리어 공동체가 부흥하는 일이 일어났다. 치리하는 공동체는 믿을만 하다는 것이다.우리도 치리를 하는 교회이다. 양육이 제대로 되어지니 부흥이 되어진다. 부흥을 내려놓으니 부흥이 이어지는 양육이 되었다.
선지자와 제자들이 단순히 거주하는 기숙사가 아니다. 선지학교이다. 하나님 사람들이 모여 말씀으로 양육받는 곳이다. 교회이기도 한 것이다. 잘 가르쳐야 전파가 되고 치유가 일어나는 것이다. 성경을 제대로 읽히고 가니 매 주일 치유가 일어난다.제자들이 함께 앉아 선생님의 말씀을 듣는다. 그것이 배움의 기본이며 양육의 시작이다. 양육이 잘 되니 듣기만 하는 게 아니라 말할때도 있다. 엘리야가 떠날 때 엘리사에게 제자들이 여호와께서 오늘 당신의 머리위로 데려갈 줄을 아시나이까? 하며 걱정하며 물은 것이다.걱정이 안도로 바뀌는 감탄의 외침도 있었고, 두려움의 외침도 있었고, 오늘 1,2절이 제자들이 말한 4번째 말이다.
요단강 근처에 거주할 처소를 세우자는 제안의 말을 한 것이다. 현실의 문제 앞에 걱정하고 두려워하던 제자들, 놀라운 능력에 감탄하던 제자들이 많이 커서 자신들의 의견을 제안한다. 제자가 많아져 선지학교 건물이 좁아졌으니 건물을 세우자는 것이다. 제자들이 엘리사를 회사 사장쯤으로 생각해서 무조건 충성해서 아무말도 못하면 그 양육은 실패한 것이다.당시 상황을 생각해보면 제자들이 기뻐하는 마음이 이해가 된다. 이스라엘은 여호람의 통치안에서, 영적으로는 우상숭배, 육적으로는 감옥과같은 캄캄한 환경이었다.그 때 하나님이 엘리야가엘리사를 제자로 맞게 하셨고, 제자가 늘어 선지학교 공동체 생활을 하게 되었다. 아무리 엘리야에서 엘리사로 승계가 이루어져도 여전히 같이 믿는다고 하면서도 사회적으로 소수이고 비주류였다. 하나님 배척하는 왕이 다스리는 이스라엘에서 왕따였기 때문에 생존 문제가 있었다. 그 환경에서 엘리사도 목숨을 다해 사역을 했다.그 열매가 게하시의 치리와 맞물려 선지생도의 대단한 부흥이 일어난 것이다.
왜 이렇게 거주하는 곳이 차고 넘치는 부흥이 일어났을까? 사람들이 살아났기 때문이다. 살아나는 사람들이 많아지면 살고싶은 사람들이 모여들기 마련이다. 그들을 섬길 일꾼도 많이 필요하고 그렇게 부흥의 결과가 된다.살아나는 기적은 하늘에서 떨어지는 게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사건을 통해 엘리사도 키워가시고, 사람들도 키워가시는 성장을 통해 말씀에 담긴 메세지도 키워가신 것이다. 믿음으로 성장하고 구원의 메세지가 풍성해지는 것이 양육이다. 우리가 말씀으로 양육받는 이곳이다. 기적으로 일어난 부흥은 일시적이지만, 말씀에 의한 양육은 영원해서 영원히 이루어진다. 말씀이 영원한 만큼 양육도 영원하다. 양육을 통해 진정한 부흥이 일어날 때 거주할 처소를 세우게 된다.
* 적용질문
- 말씀으로 양육받아 살아난 경험이 있습니까?
- 내 교회를 사랑합니까? 이유는 무엇입니까?
2. 내 힘에 대한 신뢰가 떨어져야 합니다.
전국적 가뭄으로 성전 건축에 쓸 나무가 모자랐다. 그래서 요단강에 가서 나무를 베어 처소를 세우자고 한다. 새로운 채플을 세워야 할 정도로 부흥한 것을 엘리사가 가장 기뻐했을 것이다. 엘리야의 외로운 사역을 엘리사가 이어가며 선지학교가 부흥하니 제자들에게 가라고 허락합니다. 제자들은 엘리사도 종들과 함께 하자며 매우 강력한 요청을 표한다. 제자 한 명의 간청에 엘리사는 주저하지 않고 가겠다고 대답한다. 그리고는 함께하는 우리 공동체가 되어 모두 함께 요단강에 도착해 건축에 쓸 나무를 벤다.
나무를 베던 제자 한 명이 빌려온 도끼를 물에 빠트려 낙심한다. 쇠도끼는 오늘날 최고급 전기톱일 뿐 아니라, 빌려준 사람도 신앙 고백으로 돕고자 한 것일 수 있다. 다른 사람이 돌 도끼로 한 그루를 겨우 벨 때 쇠도끼를 쓴 생도는 10그루 20그루 막 벨 수 있었을 것이다. 너무 열심히 베다가 도끼 머리가 자루에서 빠져나갔다. 그러니 점검을 확실히 해야 하는데, 너무 열심히 한 나머지 한 사람이 점검을 소홀이 한 것이다.다행이 사람을 피해 요단강에 떨어진 것이다. 이 사람은 갚을 돈도 없고 빌려준 사람에게 은혜를 원수로 갚게 된 것이고, 어쩔 수 없이 남의 집 노예가 되게 생겼다. 쇠도기가 떨어진 사건은 이 생도에게는 인생이 떨어진 사건이 된 것이다. 내 힘을 신뢰하게 만드는 도구가 떨어져 쓸 수 없게 된 것이다.
하나님은 기쁨과 감사로 일하고 있는 생도에게 일이 수월하게 되도록 책임져주셔야 하는 거 아닌가? 교회 개척의 명분과 헌신이 대단한데, 시작부터 위기가 왔다. 내 힘의 신뢰가 떨어지는 일이 생기게 되면 내 인생 망했다, 끝이다 라고 생각한다.한 명의 믿음이 전체를 살리기도 하고 한 명의 실수가 전체를 죽이기도 한다. 전체를 살리는 공동체의 사랑이 있어야 한다.
왜 하나님은 이런 사건을 주셨을까? 사람의 힘으로 지은 것은 결국 사람의 힘을 벗어나지 못한다. 우리 힘으로는 우리가 거주할 처소를 지을 수 없기 때문에 처음부터 우리의 힘을 꺾는 것이다. 이것이야 말로 우리 생각을 뛰어넘는 하나님의 사랑인 것이다.
* 적용질문
- 내가 쇠도끼처럼 의지하고 있는 사람(대상)은 누구 (무엇)입니까?
- 그것이 떨어지는 사건이 있었는가? 그것이 사랑으로 느껴지는가?
3. 사명의 십자가를 내밀어 잡으면 됩니다.
내 힘으로 알 수 없는 그 상황을 피하지 말고 직면하라고 한다. 그것을 보이라고 하시는 것이다. 목장에서 내놓아야 안다. 아무리 힘들어도 가만히 있으면 아프고 병들어 죽는다. 말씀이 참 위대하다.
쇠도끼가 떨어진 장소를 보여줬지만 할 수 있는게 없다. 엘리사가 이상한 행동을 한다. 나뭇가지를 베어서 물에 던진다. 솥에 가루를 던져 해독이 되니 해독 공동체이고, 나뭇가지를 물에 던져 깊은 물에서 쇠도끼가 떠오르게 한다.오래된 나무가 아니다. 나무를 물에 던지려면 나뭇가지를 베어서 던져야 한다. 우리가 일상에서 십자가를 던지면 쓴 물도 달아지고 쇠도끼도 떠오르게 된다는 것이다.쇠도끼가 떠올랐으니 집어야 한다. 물에 뜬 쇳덩어리를 보고 넋이 나갔을 그에게 그것을 집으라고 했다. 나에 대한 신뢰가 떨어졌으니 그것을 생각하며 아쉬워하지 말고 나를 살리신 주님의 십자가를 높이 들어올리라는 것이다. 내게 맡기신 사명의 십자가를 들어올리라는 것이다.
집은 것은 잡았다, 뽑았다, 집었다 라는 뜻이다. 도저히 들어올릴 수 없을 것 같은 사명의 십자가를 맡기실 때, 못하겠다고 주저앉지 말고 그저 손을 내밀어 잡으라는 것이다. 들어올릴 힘은 없어도 손은 내밀어 잡을 수 있다. 내 열심으로 떨어트린 것, 나를 믿고 덤비다 실패한 것, 교만하게 나대다가 넘어진 것 모두 내 눈앞에 떠오르면 상처라며 도망가고 싶지만, 그러는 것은 여전히 내 힘이 남아있다는 것이다. 내 힘이 온전히 떨어졌으면 도망갈 수도 없는게 맞다. 피하고 싶은 사명 다시 보여주시면서 들어올리라고 하실 때 믿음으로 손을 내밀어 잡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사명의 십자가를 손 내밀어 잡는게 순종이다. 사명을 맡기실 때 거부하지 말고 순종하며 받는 것이 손 내밀어 잡는 것이다. 하나님의 능력으로 높이 들어 올려주실줄을 믿는다.
우리들교회도 시작부터 부흥이 목적이 아닌 한 가정 살리는게 목적이었다. 시대적 뜻이 있으신 하나님이 큰 부흥을 주셨다. 분리 개척을 해도 넘칠 부흥이었다. 가정을 해체하고 창조질서를 부정하는 소용돌이가 너무나 세지고 있다. 세속사적 가치관의 태풍과 해일이 몰아쳐 많은 가정을 떠내려가게 하고 있다.말씀 묵상과 가정 중수의 사명을 잡으라고 말씀하신다. 너무나 무거운 십자가라 세태를 보면 불가능해 보이는 사명이다. 하지만 너무나 귀한 사명의 십자가이다. 우리를 살린 십자가이다. 이 십자가를 오늘 손을 내밀어 잡아 순종하는 믿음으로 대구와 광주에 손을 내밀어야 한다.
* 적용질문
- 주님이 내게 지불하고 명령하시는 사명의 십자가는 무엇입니까? 그것을 외면하고 있습니까? 피하시고 있습니까? 손을 내밀어 잡고 있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