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을 뜨는지라
9/10/2023
열왕기하4:31-37
김양재 담임목사님
데이비드 호킨스의 의식지도를 얼마전에 알려드렸는데. 여러 종교에서 궁극적으로 목표로 삼는 600 영적지수의 평화는 초월적인 삶이고 영속적인 행복한 상태로 천만명중 한명인 꼴이래요. 평안입니다가 대단한 수준인 거 있죠. 최고의 경지는 에너지 수준 700-1000으로 추정되는 깨달음인데 이 깨달음은 항상 신성과 연결되어 있다고 했어요. 우리는 최악의 마음 상태인 수치심, 죄책감으로 뭉쳐진 죄인인데 평안할 수가 없죠. 깨달음은 신성과 결합되어 있다고 하니까 예수님을 믿으면 평안이 가능하다는 것이죠. 그래서 이제 정말 어두운 세상에 소경으로 있다가 눈을 뜨는 거는 부활의 주님을 만나는 것인데 좀 더 구체적으로 어떻게 눈을 뜨는 것인지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1. 엘리사의 지팡이라고 눈을 뜨게 하는 것은 아닙니다.
게하시는 엘리사의 명령대로 지팡이를 아이의 얼굴에 대었지만 아무 변화가 없었습니다. 당황한 게하시는 돌아가서 엘리사에게 아이가 깨지 않았어요 라고 보고합니다. 깨어나다는 죽은상태로부터 일으키다 소생의 의미로 사용되었는데요. 누 11장에서는 죽은 나사로의 상태를 잠들었도다 라고 말씀하시고 그러나 내가 깨우러 가노라 말씀하셨죠. 죽은 상태에서 깨어나는 것은 인간의 힘으로는 불가능 합니다. 엘리사도 믿고 보냈지만 게하시를 몰랐어요. 하나님이 아니니까요. 지팡이가 부적은 아닙니다. 유명한 설교를 그대로 하고 흉내를 내어도
진실하지 못하면 사람을 살리기는 어렵습니다. 엘리사 밑에서는 쉬워보였지만 게하시 혼자 보내니 아이에게 말씀이 들리지가 않네요. 애통함 없이 그야말로 약장수처럼 사기꾼처럼 연기를 한다고 살아나는 건 아니지요. 이 연기는 수냄여인과 연기는 아주 다른 여기지요.
똑같이 수냅여인도 연기를 했는데 이게 분별이 안되시나봐요.
수냅여인의 연기는 게하시의 연기와는 다르다는거. 진실한 연기가 있는거에요. 게하시는 엘리사 옆에 있었다는 이유로 자신을 과대평가했습니다. 게하시도 하나님을 경험하고 변화가 있어야 하는데 예수님이 변화산에 올라가셨을 때 제자들이 귀신들린 아이를 고치지 못했어요. 그렇다고 담임목사만 찾으라는 얘기가 아니에요. 수냅여인의 믿음이 더 좋아보인다고 평신도만 찾으라는 얘기도 아닙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은 항상 겸손하셔야 합니다. 겸손해야 분별이 됩니다. 똑같은 연기라도 구원을 위한 연기가 있고 이익을 위한 연기가 있는 거에요.
수냅여인은 게스트하우스를 성전으로 여기고 자신의 침상에 아이를 눕혀놓고 온거에요. 그니까 엘리사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여긴거는 맞아요. 여인의 말은 항상 앞뒤가 같아요. 이 아이는 죽기위해서 태어난 아이 같았어요. 다른 사람이라면 이 사건 자체가 해석이 되기가 어려운 사건이 아니겠습니까. 처음부터 여인은 아이를 바라지도 기대하지도 않았어요. 누가 아이달라고 했습니까. 주신분은 하나님인데 왜 하나님은 아이를 줬다가 뺏느냐 말이에요. 하지만 여인은 하나님께서 여인을 깨우치기 위해서 아이를 데려간 것을 께달았어요. 내가 아들의 가짜 평안에 속아서 하나님의 진짜 평안을 멀리했어요. 내가 다시는 하나님을 떠나지 않겠습니다 외쳤잖아요.
엘리사는 아들이 죽을 것은 몰랐어요. 여인이 아들을 낳으리라는 것은 알았지만 그 아들이 죽을 거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알려주시지 않았어요. 그래서 그동안 여인이 엘리사를 통해 하나님을 섬겼다면 아들이 죽은 후에는 이 여인이 직접 하나님을 통해 하나님의 사람을 섬기게 됩니다. 아이가 죽은 게 얼마나 조롱거리가 되었겠습니까. 그렇게 열심히 하나님을 섬겼는데. 그 조롱 소리가 모두 들렸다면 그런 저주가 어디 있겠어요. 항상 구속사가 해석이 안되고 들리지 않는 사람은 비난을 하더라구요. 내가 평안입니다를 외쳐도 비난의 소리를 다 들었다면 저주가 따로 없었겠는데 알맞게 들리게 하셔서 고만큼만 들린만큼만 살아있게 하셨어요. 여인은 믿음이 좋은 여인이었어요. 여인의 믿음의 수준이 높았기 때문에 다시 한번 죽음에 이르는 고통을 통과하게 하시고 생명을 걸만큼 이 여인에게는 간절함을 원하셨어요. 한번씩 죽음을 경험하게 되면 말씀이 잘 깨달아지는 역사가 있지요.
진리가 보이니까 암초가 그대로 있는데 암초보다 깊은 깨달음으로 암초를 넘어가게 하십니다. 성경이 깊은 진리로 다가오니까 이런 거를 깨달음이라고 하는거에요. 사건이 없으면 성경이 깨달아지지 않아요. 우리는 성경을 깨달을 수가 없어요.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깨달을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고난을 비교하는 사람은 목사님 고난도 고난인가 하는 분들이 계시더라구요. 사람에게는 절대치의 고난이 있죠. 나로서는 죽음에 이르는 십자가에 이르는 고난 이었기에 하나님을 만났고 사명을 찾았어요. 고난이 풀려지기만을 바라는 사람은 늘 고난도 비교를 해요. 저번 주 설교에 돈 없는 과부의 고난이 더 큰 고난이다 하시는 분들이 많더라구요. 그러면 어째서 수냄여인의 고난이 더 큰 고난인가 설명을 해 볼게요. 제가 힘들 때 저는 소위 장로님, 권사님 집안에 의사남편이니까 저같은 사람이 환경 그대로 있고 저 같은 사람은 별로 고난도 아닌 것 처럼 보였어요. 근데 큐티하다가 남편이 간후 곳곳에서 책을 내자고 했어요. 하지만 내가 삼십댄데 내가 앞으로 어떻게 될 줄 알고 책을 내겠어요. 저 자신에 대해서도 자신이 없었고 50이 돼서 신학을 하고 교회를 개척할 때 까지는 책을 못 냈었죠. 늘 숨죽이고 나같은 사람이 큐티 모임을 하는데 오시는 것이 이상해서 일절 테이프도 안만들고 녹음도 못 하게 했어요. 제가 힘들었다는 생각 안 드세요? 저는 그냥 알려지면 알려질 수록 사는게 힘든거에요. 조금 하다보면 아무도 안 올거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늘 자신이 없었어요. 지나 온 날들을 생각하면 여기까지 어떻게 왔나 싶어요. 분명 목회 성공이 목표는 아니에요. 근데 이게 한쪽에서는 큐티를 했으면 좋겠는데 한쪽에서는 늘 두렵고 떨리고 자신이 없었어요. 이렇게 두렵고 떨리는데 교회를 이익의 재료로 내 자랑의 지팡이로 두고 올수는 없지 않았겠어요.
목자들 초원모임에서 과부의 가난과 수냄여인의 고난중에 어떤게 더 크냐고 물어보니까 다들 과부의 가난이 더 크다고 했어요. 앉으나 서나 돈이 하나님 처럼 보이는 거에요. 그럴 때 돈이 생기면 사명은 간곳 없고 세상으로 떠내려가는 경우가 많잖아요. 돈이 있다면 세상에서 쾌락과 정욕의 길에 빠지기가 정말 쉽죠. 그니까 그 좋은 돈보다 더 좋은 하나님이 상급이 되는 삶을 보여야 하는 것은 후자가 훨씬 힘든 거에요. 그래서 오죽하면 부자가 천국가는게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보다 더 어렵다고 하겠어요. 수냅여인은 갖춰진 환경에서 아들을 잃었어요. 죽음에 이르는 아들 고통을 통해서 하나님이 예수님을 잃는 고통을 체휼하게 하셨어요. 하나님보다 더큰 평안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된 거에요. 엘리사가 이것을 어떻게 알아봤을까요. 엘리사가 자기도 잘 살아봤잖아요. 수냅여인이 세상이 감당못 할 믿음이라는 것을 알아보았습니다. 여러분 중에는 저를 알아보는 사람도 잇고 아직도 아니라고 생각하면서 다니시는 분도 있어요. 제가 잘났다는 것이 아니고 저를 여기에 세우셨으면 저를 믿으시면 저는 그런 분들을 위해서 안타까워 하면서 기도할 수 밖에 없잖아요. 그런데 여러분들이 안 믿으면 기도도 튕겨져 나갈 수 밖에 없겠죠. 엘리사도 수냄여인이 자신을 신뢰한다는 것을 알고 기도하기로 마음을 먹습니다.
적용질문
여러분이 자랑하는 엘리사의 지팡이는 무엇입니까? 모태신앙입니까? 유명한 교회입니까? 직분입니까? 여러분의 신앙 패턴은 한결같습니까? 오르락내리락 합니까?
2.여호와께 기도해야 합니다.
살리기로 작정하고 엘리사는 방문을 닫아요. 수냅여인도 아이를 침상에 눕히고문을 닫았다고 나오죠. 방 바깥의 어떤것도 의지하지 않겠다는 뜻인 거에요. 엘리사도 자기와 하나님과의 문제인 거에요. 우리들의 행동이 남들 보는데서만 하면 안되는 거에요. 안보는 데서 살려야 되는 거에요. 제일먼저 한일은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전능의 하나님이 아니라 언약의 여호와 하나님께. 그거는 언약이니까 말씀이잖아요. 우리가 기도에 대해서 가장 먼저 생각해야 할 것은 기도는 독백이 아닌 대화라는 거에요. 기도에 대상이신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하나님의 뜻을 알고 순종하고 적용으로 나아가게 되는 것이 순서이죠. 그런데 처음부터 하나님의 뜻을 알기가 어려워요. 그래서 사건을 주시고 사람과 메시지를 키워가십니다. 그래서 하나님과의 말씀을 들어야 상담도 기도도 교제도 다 하는거죠. 이게 큐티에요. 그래서 하나님 말씀듣고 내가 또 질문하는 거에요. 이게 기도에요 기도.
하나님의 사람은 곧 기도하는 사람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열왕기 상 하에서 문자적으로 엘리야가 기도했다는 기록이 없어요. 엘리사가 기도했다는 말이 두번 나왔는데 첫번째가 바로 33절이에요. 그러니까 우리가 부르짖었다 간구했다고 해도 되는데 기도했다. 기도의 히브리어 팔라는 영적지도자가 공동체와 지체들을 위해 기도했다는 것을 의미할 때 써요. 팔랄은 성경에서 총 84회 사용이 되었는데 이것은 하나님께 간곡히 호소하다는 뜻도 있지만 자신을 판단하다 통회하다 는 두가지 뜻이 있어요. 둘 중 어느 의미가 강하던 간곡한 기도에는 항상 통회가 따라오는 것을 우리가 경험하지 않습니까. 너무 간절하면은 내 죄부터 보이지 않습니까. 그래서 눈물이 나오는 거에요. 엘리사도 회개하는 거에요. 왜 그랬을까요? 그동안 많은 기적을 베풀었지만 게하시 편에 보낸 지팡이는 아무 일도 하지 못했어요. 가장 소중한 수냄여인의 아들이 죽었는데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것이 없어요. 엘리사는 그동안 기적을 일으키신 분이 하나님이라는 것을 절절히 깨닫는 거에요. 사랑하면 낮아지고 낮아져서 기도하게 돼요. 회개가 저절로 나오고 간곡히 간곡히 기도하게 되는 거에요.
그니까 저도 있잖아요. 잠자고 있는 남편을 깨워야 되겠는데. 문 닫고 통회자복을 하니까 제가 회개해야 될 것이 많더라구요. 여전히 교만하고 여전히 인정을 받기를 원하고. 골방기도를 하게 되니까 잠자는 남편이 화를 내도 회개가 되고. 너무 불쌍한 마음이 드는거에요.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되는 거잖아요. 제가 큐티를 하는데 이게 이제 말씀 듣는 거죠. 에스겔 3:24. 사실은 남편이 때리면 내가 이혼을 해야지 왜 내가 회개를 하냐구요. 성령이 임하셔서 말씀하시는게 너는 네 집에 들어가 문을 닫으라 이거잖아요. 잘 묶여있으라는 거에요. 그 남편에게.
무슨 이혼이야 이혼은. 너 주님 잘 믿어. 집에 들어가서 잘 묶여있어. 그리고 너를 가둔 그 남편의 책망자가 되지 못한다고 하는 거에요. 여호와께서 말씀하실 때만 말해라. 그야말로 큐티하며 말씀으로만 대화를 해라. 니 생각을 다 내려놓고. 이 결혼에 잘 묶여있으라. 하나님은 나와 깊이 교제하기를 원하셨기 때문에 나가지 못하고 문 닫힌 세월을 오래 주셨어요. 여러분이 보기에는 그 정도 고난 가지고 그렇게 쓰실 수 있나 이런 분들이 많더라구요. 제가 다시 생각해도 뭐 그정도 가지고 나를 쓰실 수 있나. 그래서 송구스럽기가 그지없어서 늘 나서기를 싫어했다고 했잖아요. 나는 늘 형편없는 사람이니까. 뒤집어 생각하면 저 만한 사람도 없어서 나를 쓰시는 거잖아요. 얼마나 사람이 없으면 나같은 걸 쓰느냐 이거지. 우리는 겉으로 드러나는 고난으로만 사람을 분별하니까 수냄여인의 고난이 얼마나 컸으면 주님을 만났을까 이 생각을 못하는 거에요. 저만큼만 쓰이기를 원해요 여러분.
적용질문
여러분은 절망적인 상황에서 통회자복이 나오나요?
'다 끝났어!', '이제 이혼이야', '사표야', '죽어야 해' 하는 일은 무엇인가요?
말씀대로 기도하고 적용하는 게 왜 중요한지 이해가 되나요?
요즘 언약의 하나님께 기도합니까? 전능의 하나님께 기도합니까?
질문 훈련 잘 하며 큐티 잘 하고 있습니까?
3. 고정관념을 뒤엎고 엎드려야 합니다.
그러니까 이런거 보이면 안되는 거에요. 내가 어떻게 아이를 살리는지 다 문열어 놓고 보이는 거가 능사가 아니라는 거에요. 34,35절에 엎드리다 동사가 세번이 나오잖아요. 첫번째는 눕다=부정한 시체를 살리기 위해 끌어안는 행동. 두,세번째 구부리다는=끌어안는 것의 영적의 의미를 알려주는데요.
특별히 구부리다는 이그리다라는 단언데 한번은 열왕기상에 나오는데요. 엘리야가 갈멜산 꼭대기로 올라가서 땅에 꿇어 엎드려 그 머리를 무릎 사이에 넣고에서 꿇어 엎드려가 바로 이그하르 인데요. 몇 년간 이어진 가문이 극에 달했을 때 바알 선지자들을 제압하여 다 죽이고 아합에게 큰 비가 내릴 거라고 했잖아요. 바알 선지자 850명을 죽이고도 아합을 변화시키지 못했잖아요. 변화시키지 못한 자신의 생각과 판단과 정죄감과 감정을 다 꺾고 하나님 손에 맡기며 아합에게 예언을 했으니까 이제 비가 와야되는 거에요. 이렇게 기도하는 것이 바로 꿇어 엎드리는 것이죠. 자기 생각을 꺾고 내려 놓는 거에요. 엘리사가 아이의 시신위에 엎드리는 것도 구원을 위해서 자신의 고정관념과 판단과 감정을 꺾고 구체적으로 적용하는 거에요. 하나님의 사람은 죄와 구별된 사람인 거에요. 시체는 부정한 것이기에 하나님의 사람은 시체를 만지면 안되는 거에요. 통회 자복한 엘리사가 다음에 한 일이 아이를 만진 일이었어요. 아이 위에 올라 엎드렸다고 했어요. 아이위에 자기 몸을 눕혔다는 것이에요. 영혼에 대한 사랑이 없으면 결코 할 수 없는 행동인거죠. 한 영혼을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려면 간절한 기도 뿐 아니라 구체적인 사랑의 수고가 따라야 합니다. 자기 처소에서 자기 침소에 누일 뿐만 아니라 자신의 온기로 덮어주라고 하시잖아요? 엘리사에게 거리낌이 전혀 없었을까요? 이래도 되나 하는 의문이 전혀 없었을까요? 시체를 안았으면 14일정도 부정하게 지내야 되나 하는 마음이 전혀 없었을까요? 우리와 성정이 똑같은데 왜 이런 마음이 없었겠습니까. 그런 생각 다 했겠죠. 근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게 연습이 되는 거에요. 훈련이 되는 거에요. 엘리사는 아이의 차가운 몸을 끌어안았어요. 근데 이런 적용을 보면서도 여러분 진정성 타령을 해서야 되겠습니까. 그러면 안됩니다. 내가 인정하는 진정성 보다 훨씬 크고 귀한게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적용이고 순종이에요. 그런데 적용으로 사과했기 때문에 진정성이 없다고 하는 분들이 많더라구요. 여러분 인간의 사랑보다 하나님 때문에 적용한 것이 훨씬 귀한 거에요. 이것이 구속사에요. 그런데 늘 과거의 상처를 들먹이면서 행위구원에서 못 벗어나는 거에요. 예전에 바람폈어 그런데 지금 사과를 하는데 진정성이 안 느껴진다는 거에요.
그래서 날마다 여러분들 지금 오늘 사과를 하는데 예전에 한 사랑 바람 다 옛날의 사랑이잖아요. 인간의 사랑이잖아요. 그 사랑을 또 할지도 몰라요. 하지만 오늘 사과를 하잖아요. 사랑은 인간의 사랑이고 적용은 하나님 말씀에 대한 순종이잖아요. 하여튼 날마다 진정성이 없대. 내 판단보다 더 중요한게 구원이에요. 이 세상에서 구원보다 더 중요한 게 무엇이 있겠어요.
그러니까 우리가 한사람 살리기 위해서 못할 일이 없는거에요. 주님이 먼저 우리를 위해서 다 생명을 꺾고 십자가에 달려서 죽어주셨잖아요. 우리 한사람의 구원을 위해서. 이 마음으로 엘리사가 엎드렸을 때 아이의 몸에 온기가 돌았어요. 아무리 진정성이 있어도 여기가 받을 그릇이 안되면 전달이 안되는 거에요. 그래서 엘리사가 몇번이나 엎드리잖아요. 그러니까 아이의 살이 차차 따뜻해졌어요. 하나님의 응답이 차차 왔어요. 금방 따뜻해지면 여러분이 훈련이 안되기 때문에 안돼요. 여러분은 계속 진정성 없다는 얘기를 들어도 싸요.
너무 빈틈이 없으신 분은 지난 주 말씀이 어떻게 연기를 하라고 하지 이해가 안돼. 목자님이 너무 빈틈이 없으셔가지고. 주님의 사랑을 받았기 때문에 우리도 주님을 사랑하는 거에요. 주님의 엎드리는 사랑으로 우리가 사랑해야 하는거에요. 우리의 고정관념을 꺾고 사랑해야 하는 거에요. 원수같이 여기는 사람이라도 주님이 구원하시기를 원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수고해야 하는 거에요. 그니까 저도 드디어 사명을 받아가지고 주여 저도 생명을 꺾을 테니 남편이 구원받게 해주세요. 했잖아요. 사명은 여기까지 가야하는 거에요.
아이가 눈을 뜨니까 수냄 여인을 불렀어요. 엘리사가 엎드리는 사랑으로 아이 위에 엎드리니까 지팡이에게는 아무 반응도 없던 아이가 일곱 번 재채기를 했더니 눈을 번쩍 떴어요. 엘리사는 살아난 아이를 수냄여인을 불러 돌려주죠. 여인은 다시 한 번 엘리사 발 앞에 엎드려 절합니다. 여인도 엘리사도 쉬운 게 없어요. 엘리사가 처음 집에 들어간 날은 거룩한 날, 아들이 태어난 날은 기쁜 날, 아들이 다시 살아난 날은 더 기쁜 날 아니겠어요? 거룩을 목표로 두면 행복은 따라오는 거에요.
우리를 쓰시기 위해 이런 사건을 허락하신느 거에요. 우리 수준을 높이시려고. 여러분의 모든 고난이 더 기쁜 날이 될 것을 믿으십시다.
죽기전에 아들의 생명이 수냄여인의 전부였겠죠. 죽은 아들을 다시 살아나니 이제는 하나님의 아들인 거에요. 그런데 여러분은 전부 내 아들로 키우고 있어요. 하나님의 아들로 키우라고 사건이 오는 거에요. 여러분들도 잠에서 깨라고. 하나님의 아들로 키우는 것은 자녀를 객관적으로 보는 거에요. 수냄여인은 엎드리고 아들을 받아 나가요. 눈을 뜨는 데는 엎드리는 겸손과 적용이 필요해요.
엘리사도 수냄여인도 자신들에게는 공로가 하나도 없음을 알고 있어요. 평안입니다 는 엎드림의 사랑과 겸손이 절대 필요합니다.
엎드리는 적용을 하는 게 힘드세요? 열매가 없는 것 같아 낙심이 됩니까? 엎드리고 엎드리는데 지쳐서 나가 떠나고 싶습니까? 하지만 엎드리는 사람이 하나님의 사람이에요. 엎드리는 사람은 반드시 부활로 이끄실 줄로 믿습니다. 주님 편에 선 한 사람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적용질문
고정관념을 내려놓고 구원 때문에 입과 눈과 손을 맞추는 수고로 엎드려야 할 사람은 누구입니까?
이 수고가 헛되지 않고 부활로 결실할 줄 믿습니까? 여러분 눈을 뜨게 하시려고 여러분이 말로 태도로 마음으로 엎드렸기에 다들 눈을 뜨신 줄 믿습니까?
A: 내가 믿는 엘리사의 지팡이는 직업인 것 같다. 나도 속고 남도 속이는 불신교제를 신교제라고 착각하며 결혼을 준비했었다. 그 자매는 스스로 기독교인이라고 하였지만 태어나서 교회를 한번도 다녀본 적이 없는 친구였는데 나의 열심과 조건으로 그 친구를 전도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결혼 준비과정에서 심하게 다툰 후 양육교사를 담당하던 목사님께 상담하였는데 이것은 불신결혼이니 그 친구의 구원을 기다려줄 수 있으면 기다려주고 아니면 헤어지는 게 맞다고 처방해주셨다. 그 친구에게 우리 둘 다 준비가 안 된 것 같으니 같이 양육을 받고 예식 날짜를 다시 잡자고 하였다. 그 자매에게 이런 저의 의견은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고 결국 파혼을 당하게 되었다. 내 인간적인 열심과 노력으로는 누군가를 구원으로 이끌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하시는 사건이었다.
B: 이번 여름 마음에 드는 자매가 있어서 서로 연락을 하게 되었다. 미국에 온 뒤로도 같이 교제하며 큐티를 하였다. 그러던 중 신교제에 대한 얘기를 했는데 나는 교제를 하고 있다고 생각했던 반면 그 친구는 아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뒤로 연락도 뜸해지고 그 자매가 부담스러워 하는 것 같이 느껴졌다. 이 사실을 주변사람들에게 나누고 싶지 않았는데 그 모습을 보면서 내 죄를 보게 되었다. 남들에게 어떻게 보이는 지를 중요시 여기는 내 모습을 보게 되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내가 그 자매를 엘리사가 이 아이를 사랑하는 것 만큼 사랑하지도 않는구나 하는것을 깨달았다. 친구를 통해서 채워지지 않는 것을 여자친구를 통해서 채우려고 했던것 같다.
C: 이번 여름에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한국을 다녀왔다. 한국에 있는 동안 말씀을 들으며 마음이 불편했다. 특히 사건이 있을 때 그것을 구원의 기회로 삼으라는 얘기를 너무 많이 들었는데 그것이 인정이 되지 않았다. 하나님을 열심히 믿으시던 아버지께서 결국 돌아가시는 것을 보며 아버지를 지켜드리지 못했다는 죄책감과 하나님에 대한 불신으로 마음이 힘들었다. 아이를 이끌어 주는 것은 부모의 역할인데 아버지이신 하나님께서 내 아버지를 지켜주지 못하셨나 하는 원망의 마음이 들었다.
D: 요즘 내가 자랑할 수 있는 게 없어서 정말 예수님밖에 자랑할 것이 없다고 생각한다. 요즘 마지막 과목 수업을 듣고 있는데 이 과목을 패스할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 된다. 예전부터 친하게 지냈던 친구들이나 형들을 생각해보면 대학교를 졸업하지 못한 사람들이 너무 많다. 내 주변에 그런 사람들이 많다 보니까 나도 그런 케이스가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된다.
E: 엘리사의 지팡이는 상황마다 다른것 같다. 처음에 생각이 난 건 어려운 상황이나 힘든 상황이 있을 때 나 자신과 부모님을 믿고 있다는 것이다. 재정적으로는 부모님을 믿고 있고 과제를 해야할 때는 나 자신을 믿고 있는 것 같다.
나의 가장 큰 죄는 나태인 것 같다. 하나님이 무엇을 주실 때 감사합니다하고 받기만 하고 열심히 하지 않는 것 같다. 만남의 축복을 허락하셔서 좋은 친구들과 믿음의 동역자들을 만나게 하셨지만 정작 내가 노력하는 부분은 없다는 생각이 든다. 규칙적인 생활을 하고 한달 전 시작한 큐티를 꾸준히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F: 새 아빠가 자꾸 이것저것 명령하듯 부탁해서 힘들었다. 이것들을 해주지 않으면 엄마가 나한테 화를 내기 때문에 이전에는 해드렸었다. 하지만 계속해서 무리한 것들을 부탁하듯 명령하고 안해주면 나쁜 사람 취급하는 것에 화가 났다. 이런 부탁들을 들어주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이다.
A: 학기 시작해서 감사하게 잘 시작했는데 주어진 일 맡은 일 성실하게 해낼 수 있도록.
B: 공부 계속 잘 할 수 있게
C: 아버지 돌아가시고 나서 정리 할 게 많이 있는데 마무리 잘 되도록.
D: 가족들과 목원들의 영육의 강건함을 위해서. 예수님으로 자존감 채워질 수 있게. 마음으로부터 하나님의 사랑이 끊기지 않고 흘러 넘치도록. 학교 수업과 프로그램 듣는 거 잘 마무리 할 수 있도록.
E: 신교제와 신결혼을 위해서.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도록. 목장과 목원들 위해서 기도하고 내가 먼저 말씀으로 바로 설 수 있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