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
본문 : 마태복음 5장 7절
제목 : 팔복산의 통로
말씀 : 김양재 목사님
팔복의 중앙에 있는 의에 주림은너는 나보다 옳도다 하는 이 마음은, 팔복산 지름길 통로인 상대를 불쌍하게 여기는 미션인 긍휼로 나타나는 거에요. 의인은 너는 나보다 옳도다 이고, 긍휼은 불쌍히 여겨달라는 것입니다. 긍휼은 주님이 올라가시면 함께 올라가고, 내려가시면 함께 내려가는 것입니다. 사명 감당의 시작이 되는 거죠. 다섯째 복인 긍휼에 대해 생각해 보겠습니다.
1. 긍휼히 여기는 것입니다.
긍휼은 남의 아픔을 자기 아픔처럼 여기는 것입니다. 박애도, 동정도 아니고 조건적이거나 차별적이지 않습니다.
(1) 동정이 아닙니다. 동정에는 비교의식과 우월의식이 있어요. 기부했는데 안 좋은 일이 생기면 생색이 나요. 내가 그렇게 녹취하고 목장 섬겼는데 왜 이런 일이 일어나나 하게 됩니다.
(2) 조건적인 것도 아닙니다. 측은지심이라는 말이 있는데, 아이가 우물에 빠졌을 때 쓰는 말인데, 강도나 원수가 우물에 빠져도 측은지심이 생길까. 세상에서는 긍휼은 조건적, 차별적이라서 죄인은 고통받아도 되고 의인은 고통받아서는 안된다고 합니다.
(3) 상식, 도덕, 윤리적 오해를 바로잡아 주십니다. 조건, 친분이 아니라 누구든지 가리지 않고 긍휼히 여기는 자가 복이 있다고 했어요. 인간의 옳고 그름은 팔복산의 통로가 될 수 없어요. 팔복산에 오르기 위해서는 세상 윤리를 뛰어넘는 주님의 가르침에 순종하여 모두를 긍휼히 여겨야 합니다.
왜 긍휼히 여겨야 하나요? 우리 모두 밑둥 잘린 나무로 차별하지 않고 죽음이 다가오는 거에요. 자신이 불쌍한 존재임을 깨닫는 것은 화가 아니라 복인 거에요. 알지도 못하고 본인이 밑둥 잘린 나무인데 인지하지 못하잖아요. 그걸 알게 된 것이 복이라는 거죠. 그러니까 우리가 건강하든 아프든 부하든 가난하든 유식하든 무식하든 성격이 좋든 나쁘든 착하든 악하든 모든 사람은 죽음 앞에 무기력한 불쌍한 존재입니다. 모든 사람은 누구나 죽기에 불쌍하고 긍휼이 필요해요.
고난은 장차 당할 마지막 고난인 죽음의 예고편일 뿐이에요. 작은 고난을 통해 두려움을 경험하면 장차 임할 죽음을 생각하게 될 수 있어요. 항암을 해보니 지옥은 있더라구요. 저에게 너무나 유익했어요. 아무 고난 없는 사람은 훨씬 불쌍한 것이에요. 모든 사람이 긍휼히 여겨야 하는 불쌍한 자임을 아는 사람이 팔복산의 통로에 오를 수 있습니다. 긍휼히 여기는 게 대단한게 아니고요.
나눔이에요. 남편이 피자를 따뜻한 곳에 두었다고 했는데 베란다에 두었어요. 아내는 화가 났는데, 여자 목장에서 화내지 말고 피자를 왜 베란다에 두었냐고 천천히 물어보라고 권면했어요. 남편은 햇빛이 따뜻해서 라고 대답했어요. 남자는 흙이라서 윽박지르면 주먹이 먼저 앞서고. 긍휼히 여기는 건 말 한 마디에서, 작은 일에서부터 시작돼요. 사소한 것부터 적용하셔야 해요.
(적용)남을 불쌍히 여김이 나보다 못한 사람 동정입니까? 의인과 죄인 차별하는 긍휼입니까? 무조건적인 주님의 긍휼입니까? 우리 모두 밑동 잘린 나무라는 인식이 있습니까?
2. 긍휼히 여김을 받는 것입니다.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을 긍휼히 여기는 게 쉽지 않아요. 다른 사람을 긍휼히 여길 수 있는 사람은 구원의 반석에 오른 사람 뿐이에요. 죽음이 흔들 수 없는 반석에 서있기에 반대인 죽음의 늪에 빠진 사람을 불쌍히 여길 수 있는 거에요. 신약에서 긍휼로 번역한 헬라어 엘레오스는 구약에서 히브리어 라함 + 헤세드가 합친 번역어로 많이 쓰였어요. 라함은 어머니의 자궁이라는 뜻으로, 창자가 끊어지듯이 아파하는 슬픔과 애통이라는 뜻. 슬픔과 아픔으로 공감해주고 자비라는 뜻의 헤세드는 공감에서 실제적으로 손과 발이 가는 행동을 의미하는 거에요. 긍휼은 그 어머니의 사랑을 먼저 받았다는 거에요. 그래서 먼저 내가 긍휼히 여김을 받았다는 거에요.
이사야서 49장 15절-16절(15.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16. 내가 너를 내 손바닥에 새겼고 너의 성벽이 항상 내 앞에 있나니)에서 처럼 먼저 내가 긍휼을 받는 것. 무너진 성벽 (내 인생, 가정, 사람)을 주님은 보고 계세요. 아무리 형편 없어도 하나님의 손바닥에 새겼다는 거에요.
주님은 죄인인 우리를 위하여 창자가 끊어지는 슬픔과 애통으로 공감해주시고, 그 헤세드를 베푸셔서 나의 주홍 같은 죄를 용서하시고 구원하시기까지 사랑하신 것을 말한 것이 긍휼이에요. 대표적인 예로 성육신이 있죠. 하나님의 긍휼, 깊이, 넓이는 측량할 수 없어요.
갚을 길 없는 1만 달란트의 탕감 받은 자에요. 그 사랑을 모르기에 1만 달란트의 긍휼을 받고도 100 데나리온의 긍휼을 베풀지 못해요. 긍휼을 베풀어주시는 주체가 전적으로 하나님. 시점이 미래에요. 지금 긍휼을 베풀어주시면 잘살아야 되잖아요. 하나님만 믿으면 되는데, 전적으로 긍휼의 주체는 하나님이신데, 인간이 아무것도 하지 않는 건 아니죠.
내가 100데나리온 탕감한 긍휼히 여긴 것도 하나님은 기억하세요. 팔복은 근본적으로는 마지막을 준비하는 종말론적인 의미로 해석돼요. 절대 긍휼을 받은 사람이 긍휼의 통로가 될 수 있는 거죠. 우리의 긍휼은 주님의 긍휼을 입지 않고 서는 동정이나 자선의 차원을 넘지 못해요.
요한복음 8장에서 간음한 여자를 돌로 치지 말라고 했어요. 죄인들끼리 뭘 서로 정죄하냐고. 예수님은 예수님의 어머니에게 했던 호칭 '여자여'를 쓰셨어요.
긍휼의 선지자 호세아 이야기. 자녀는 나의 분신이기에 기대에 못 미치면 잠이 안옵니다. 중독은 날마다 그 생각하는 것인데 집착인지 사랑인지 끊어보면 알게 됩니다. 자녀 중독이 있습니다. 이스라엘을 살리기 위해 하나님은 호세아 가정을 쓰십니다. 자녀들은 안 믿고 폐하고 아내는 남자 찾으러 가고. 그럼에도 호세아는 멸망의 메시지를 전합니다. 그 삶은 망한게 아니에요. 하나님은 어떤 경우에도 회복의 약속을 주세요.
예배 드리면서 공동체에서 나의 죄를 내놓으면 죄가 힘을 잃습니다. 호세아 선지자도 고통을 겪다보니 백성의 아픔을 이해하게 된 거에요. 불행한 결혼 생활은 잠시 힘들겠지만 밑둥 잘린 나무라고 생각하면 하나님 나라를 이루기 위해 너무 좋은 약재료인거에요. 인생이 짧잖아요. 호세아 가정이 이렇게 쓰임 받는게 하나님이 주신 소명인 거에요. 북이스라엘은 가장 부강했지만 망하기 직전인거에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교회를 다녀도 구원과 아무 상관이 없는거에요. 이 시대가 그런 시대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제일 잘사는데 동성애, 성 논란 말도 못하잖아요. 그 때 북이스라엘과 똑 같은 거에요.
요즘 어디를 가도 가정 지키라는 말씀부터 전해요. 큐티를 위한 큐티, 부흥을 위한 큐티가 아니고 가정을 지키기 위한 큐티를 전하고 있습니다. 자식은 하나님 것이에요 나에게 맡긴 것이에요.
(적용) 여러분은 사랑받고 자랐나요? 무너진 내 가정 때문에 늘 책임을 누군가에게 돌리고 있나요?
3. 그래서 가장 힘든 사람을 데리고 함께 올라야 합니다.
불쌍히 여길만한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것은 기복산의 사람도 합니다. 피해의식이라는 바위를 깨야하니까 너무 쉽지 않아요. 이지선 교수는 사고를 당했다가 아니라 만났다고 표현했습니다. 진정한 긍휼, 용서는 하나님뿐이에요. 용서할 수 없다 이름을 대며 부르짖는 것 부터가 시작입니다.
구원이 너무 크기에 그 원수를 데리고 올 수 밖에 없어요. 내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근거가 없기에, 내 원수에게도 그럼 구원의 근거가 있을 수 있잖아요. 내가 잘나서 구원 받는게 아니니까. 성도는 긍휼히 여김받는 존재에 불과한 거에요. 날마다 부족하고 넘어지고 실족해요. 그러니까 눈물이 앞을 가려요. 저를 보면 사명을 감당할 수 없는데, 부활을 제자들이 완악하게 못믿는다고 했어요. 그래도 새 방언에 표적을 주면서 증인 삼으셨잖아요. 잘나서가 아니라 오늘도 내일도 말씀 전하러 다니니 다시 주님께 설 수 있음을 믿습니다. 내가 너무 부족하니까 51:49, 52:48 부족하니까 다른 사람의 부족함이 보이는 거에요.
잘나서 목자를 하는게 아니고 내가 너무나 부족한데 목자를 시켜줬으면 그게 눈을 뜨면 말씀 묵상하고 순종하고 하는 것들이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다 그랬잖아요. 날마다 말씀 볼 때 나도 모르게 부족함이 채워져요. 긍휼이 여기는 것은 하나님께 긍휼히 여김을 받아야 가능하고, 힘든 사람을 데리고 기도하고 입에 담기도 싫은 사람을 기도 리스트에 올리고 손과 발이 가는 적용으로 주님의 긍휼을 전하는 통로가 되어야 합니다.
불쌍히 여겨달라, 긍휼히 여겨달라고 주문처럼 외웠어요. 겸손할 수 밖에 없는 환경을 평생 주시는 것 같아요.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 덕분에 내 자신의 모습을 볼 수있게 되기 때문에, 나를 힘들게 하는 그 사람이 복의 통로다!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 환경이 있어서 제주도에서 부산에서 돈은 그런데서 쓰는 거에요. 죽을 것 같으면 말을 하고 싶은 거에요. 내 죄를 본 사람은 다른 죄인을 보고 손가락질 할 수 없어요.
(적용) 용서해야 하지만 내가 용서할 수 없는 존재임을 얼마나 인정합니까? 주님만이 용서의 종결자이심을 믿습니까? 부활절 전도축제 때 내가 팔복산의 통로가 되기 위해 어떤 순종을 하시겠습니까?
<나눔>
나눔 참석: 전유정, 김주원, 나희영
(적용) 여러분은 사랑받고 자랐나요? 무너진 내 가정 때문에 늘 책임을 누군가에게 돌리고 있나요?
모두 사랑받고 자랐다고 생각하지만 각자 가정의 아픔, 상처들을 나누었습니다.
내 가정이 이랬다면 나는 이런 우울, 불안이 없지 않았을까? 하고 생각하는 점들이 있었습니다.
각자의 진로 (가장 고민이 큰듯), 가정, 교제에 대해 나눴습니다.
<기도제목>
A
- 4월 안에 서울로 이직할 수 있도록
B
- 내 열심과 N년을 채우는 집착을 내려놓도록
- 하루하루 말씀의 인도함을 받도록
- 건강을 잘 챙기는 한 주 되도록
- 전세사기 불안해하지 않고 보험 가입 잘 되도록
C
- 부모님께 감정을 솔직히 표현 할 수 있도록(참지 않고)
- 나 자신을 먼저 용납하도록
- 쉬는 가운데 즐겁게 보내고 무기력하지 않도록
- 하고 싶은 일 잘 찾아서 할 수 있도록
D
- 매 주일 현장 예배 승리 할 수 있도록
- 어떤 방향으로 살아가야 할지 인도해 주시고 은혜를 주세요
- 매 순간 평안과 기쁨으로 살 수 있도록
<공통>
- 장결자 친구들이 부활절 예배에 나올 수 있도록
- 신교제, 신결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