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복산의 통로 - 마태복음 5장 7절
여러분은 팔복산에서 잘지내셨나요? 6개의 교회에서 말씀을 전했는데 다 큐티인을 쓰시겠다고 했습니다 가는 곳마다 열매를 주시는 만큼 사단이 매섭게 공격을 했습니다 이민사회에서는 큐티인간증이 세다고 하시는데 가장 센 간증은 성경에 나온다고 생각합니다 저 혼자지만 여러분의 얘기로 같이 갔기에 미국에서도 팔복산의 통로가 되시길 기도합니다 가난한 심정으로 애통하고 온유함을 경험하면 너는 나보디 옳다는 상대를 불쌍히 여기는 통로인 긍휼로 이어집니다 팔복산의 통로인 긍휼은 불쌍히 여김입니다 사명을 감당하려면 불쌍히 여겨야 됩니다
1.긍휼히 여겨야 합니다
긍휼은 남을 불쌍히 여기는 것인데 남의 아픔을 자신의 아픔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긍휼은 사람의 동정과도 다르고 조건적인 것차별적인 것이 아닙니다
[1]긍휼은 동정이 아닙니다
동정은 긍휼이 아닙니다 동정이라는 것을 생각해보면 비교의식 우월의식이 있습니다 우리의 본성입니다 솔직히 점검해보면 인간이 얼마나 죄인인지 알게 됩니다 열심히 일하고 베풀었는데 그일이 잘 안되면 그렇게 돕고 베푼 것에 생색이 저절로 따라옵니다 예전에 자신의 선함으로 생색이 납니다
[2]긍휼은 조건적인 것이 아닙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긍휼을 남이 부당하게 여길때 고통 중에서 불쌍히 여겨질때 라고 합니다 불쌍히 보여지는 여기에 강조점은 부당한 고통입니다 맹자가 측은지심을 설명할때 어린아이가 우물에 빠질때 불쌍히 여기는 것이 측은지심이라 했습니다 건장한 장년과 강도가 우물에 빠지면 불쌍히 여겨지지 않습니다 고통 당할 사람이 고통을 당하면 긍휼이 안나옵니다 의인이 고통당하면 불쌍히여겨야 된다 생각합니다 그게 도덕이고 법 같지만 동정과 조건적인 것에 머물러 있습니다
[3]주님의 긍휼은 이 상식적이고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오해를 바로잡아 주십니다.
주님은 긍휼히 여기는 것에 어떤 조건을 붙이지 않습니다 그저 긍휼히 여기는 자입니다 가족 친구 이웃 친분이 없어도 나를 힘들게하는 원수 원한이 있어도 조건없이 긍휼히 여기는 것입니다 상식과 지식으로 기복산에 오를 수 있어도 인간의 옳고 그름은 팔복산의 통로가 될 수 없습니다 팔복산의 온유에 순종항ㅅ으로 모두를 긍휼히 여겨야 합니다
왜 그래야 하나요? 우리 모두 밑동짤린 나무처럼 죽음이 있고 죄인입니다 차별없이 다가오는 죽음의 낭떠러지로 가고 있음을 알기에 복인 것입니다 모든 사람은 한없이 죽음 앞에선 불쌍한 존재입니다 고난이 있는데로 없는데로 불쌍한 사람십니다 그래서 사람은 누구나 긍휼이 필요합니다 고난은 장차 당할 죽음의 예고편일 뿐입니다
아무 고난이 없으면 기회조차 없이 죽음을 향해가기에 불쌍한 사람인 것입니다 때문에 남을 불쌍히 여기고 긍휼히 여기는 팔복산의통로가 되는 것입니다
나눔입니다
어제 남편이 피자를 사놓겠다고 하더니 안식게 해놓은다면서 베란다에 내놓았다고. 예전같으면 장난해? 일부러 이러는거지 하고 싸웠을텐데 왜 피자를 베란다에 놨냐고 물어보니 얼버무렸다고. 여자목장에 고발했더니 화내지말고 물어보라고. 왜 베란다에 내놨냐고 싸늘하게 말하니 남편이 얼버무렸을거라고. 집사님 남편도 그것때문에 힘들었을거라고 얘기해주었다고. 목장에서 촌철살인의 처방을 해주었다고 합니다. 그래도 이불 속에 안넣은게 어디냐고. 그래서 다시 남편에게 와서 조용히 물어보았더니 햇빛이 따뜻해서 라고 했습니다그런데 왜 베란다에 놨어! 하니까 얼어서 말을 못한 것입니다
긍휼히 여긴다는 것은 이런 말한마디. 작은 것에서 부터 불쌍히 여기는 것입니다
♤적용질문
남을 불쌍히 여김이 나보다 못한 사람이 동정입니까?
의인과 죄인을 차별하는 긍휼입니까? 무조건적인 주님의 긍휼입니까?
우리 모두 밑동 잘린 나무라는 인식이 있습니까?
2. 긍휼히 여김을 받는 것입니다
누구나 긍휼히 필요하다는 것을 머리로는 알지만 실제로 긍휼히 여겨야 된다는 것은 잘 안됩니다 게다가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을 긍휼히여기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내가 죽어가는데 남을 걱정할 여유가 없습니다 죄가운데 모든 사람을 긍휼히 여기는 것은 구원의 반석에 있어야만 됩니다 예수그리스도가 주신 구원을 알기에 구원의 반석에 섰기에 불쌍히 여길 수 있습니다 신앙에서 긍휼로 번역한 헬라어 엘레오스는 구약에서 라함+ 헤세드입니다
라함은 어머니의 자궁이자 창자가 끊어지는 고통, 애통이자 헤세드는 자비 실제적인 행동입니다 긍휼은 어머니의 자궁 속 보호인 라함과 자비의 헤세드로 같이 아파하는 것입니다
이사야 49장 15-16절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먼저 그 아파함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항상 너를 생각하되 너의 성벽이 내앞에 있다 무너진 내 인생의 성벽을 주님이 보고계십니다 하나님은 죄인인 우리를 위해 창자가 끊어지는 슬픔 ,애통과 헤세드의 자비로 사랑해주십니다 하나님이 사람이 되신 성육신이야말로 어떤 넓이와 높이 ,깊이를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주십니다 무조건 적인 사랑입니다 이와 같은 실천적 긍휼은 얼마전 큐티 본문인 일만달란트 받은 사람이 백데나리온으로 탕감받은 사람 예수님의 비유를 통해 말씀해주십니다 본문에서 동사로 쓰였는데 미래수통태이자 실제입니다 긍휼을 주시는 주최는 하나님이자 미래적입니다 우리는 딱 되면 좋을텐데 긍휼은 하나님이 주시지만 마지막 심판의 날에 긍휼을 베푼 사람을 기억해주십니다 팔복은 마지막을 준비하는 종말론적 결론입니다 하나님께 절대적 긍휼을 받은 사람은 빈곤한 자를 불쌍히 여겨 통로가 됩니다 동정과 자선의 차원을 뛰어넘고 긍휼을 베풀 수 있습니다 긍휼의 여김을 받는 다는 것은 긍휼의 주최인 하나님의 긍휼히 여김을 입었기에 일히일비 없이 베푸는 것입니다 상대방에게 긍휼을 바라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 긍휼이 없이는 베풀 수 없습니다 의인이신 주님도 간음한여인을 용서하듯이 우리는 타인에게도 긍휼히 여기는 마음을 갖게 됩니다 현장에서 간음한 여인을 자신의 어머니인 마리아에게 부른 여자여라는명칭으로 부릅니다 그 여자를 예수님은 긍휼히 여기십니다
♤적용질문
그 사람은 긍휼을 입을 만한 자격이 없다 며 정죄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내가 하나님의 긍휼을 보여주어야 할 사람은 누구입니까?
호세아 선지자가 긍휼의 대표입니다 우리는 자녀가 공부잘하길 바랍니다 자식이 곧 내 자신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더 속썩이고 공부를 못하면 내가 수치스럽습니다 그게 집착입니다 그러며서 모두 사랑해서 한다고 생각합니다 나의 분신인 자식만 내려놓아도 정말 큰 적용입니다 자식을 내려놓는 것을 통해 집착인지 아닌지 판단이 됩니다
우리가 자녀중독, 배우자 중독이기에 호세아의 적용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은 구원을 위해 호세아의 가정을 쓰십니다 당장의 재앙이 두렵기에 어떤 말씀이 들리지 않으니 호세아가 자녀를 낳는 족족 죽습니다 창녀 라는 뜻의 고멜(아내), 흩으시고 폐하는 이스르엘(아들), 사함을 받지 못할 로루하마(딸), 내 백성이 아닌 로함미(아들) 이런 자녀의 이름을 통해 알려주십니다 이런 가족들과 살면서 멸망의 메세지를 전합니다 구원의 선지자로 쓰십니다 선지서의 주제가 멸망 포로 회복이라고 했습니다 계속적인 형벌은 없습니다 그렇다고 호세아의 가정은 망하지 않았습니다 육적 이스라엘은 망해도 영적 이스라엘은 망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어떤 경우에도 회복의 메세지를 주십니다 인간의 힘으로는 무너진 성벽 회복이 안되지만 은혜로는 한 순간에 끊을 수 있습니다 망하기 30년전인데 여로보함이 부강하였고 북이스라엘은 남유다로 가고 망하려는 그 시점에 호세아가 말씀을 전합니다 이 아픔을 격으니 호세아도 백성들의 아픔을 깨닫게 합니다 하나님의 계획이자 사명 소명입니다
여로보함의 부강함을 맡기십니다 그런데 북이스라엘은 망하기 직전이었습니다 지금 이 시대가 그러한 것 같습니다
내 집착때문에 자녀의 인생이 불쌍해집니다 자녀는 하나님의 것입니다 긍휼에 여김받음이 헤세드가 전세계에 울려퍼집니다 긍휼히 여김 받은 간증이 퍼져갑니다
♤적용질문
여러분은 사랑받고 자랐나요? 무너진 내 가정 때문에 늘 책임을 누군가에게 돌리고 있나요?
내가 다른 사람을 긍휼히 여기는 것 자체가 하나님께 긍휼히 여김을 받은 증거라고 몇% 생각이 되나요?
이번 주 나눔입니다 교회다닌지 4년밖에 안되어서 인생 전체를 붙드는 말씀은 아니고 제일 강력한 말씀은 있습니다 목사님이 열왕기상으로 설교하실 때 엘리야가 이세벨을 피해 로뎀나무 아래 누워있었습니다 그때 하나님이 엘리아야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하시며 부르셨습니다 그 말씀을 듣는데 갑자기 눈물이 나기 시작해서 끝날때까지 멈추지 않았습니다 제가 두집살림하는 집앞에서 내연녀와 저녁을 먹으러가는 도중에 아내가 뒤에서 여보 라고 불렀습니다 그때 저를 부른 말이 주님이 날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부르신 것임을 깨달았습니다 그때 이후로 조금씩 말씀이 들리게 되었고 무엇보다 저에게 주시는 말씀으로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옳고그름으로 따지지 않고 하나님의 창자가 끊어지는 사랑에 공감해주시는 것에 오셔서 주님께 나아오신게 아니겠습니까? 내 삶을 내놓는것이 얼마나 헷세드의 적용인지 모릅니다 긍휼히 여김받음이 느껴집니다
3. 가장 힘든 사람을 데리고 함께 올라가아 합니다
마태복음 5장 44절
불쌍히여김 받는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것은 기복적 신앙인 사람들도 합니다 그런 긍휼은 팔복산의 통로가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긍휼을 입었기에 일곱번도 일흔번도 용서해야 됩니다 그런데 가해자와 피해자라는 틀이 깨어지지 않습니다 우리의 존재의 한계가 이러기에 용서의 길에 들어서기 힘듭니다
화상을 당했던 이지선 교수는 23살에 화상당해 23년만에 이화대학 교수로 금의환향했습니다 그런데 가해자가 아지고 사과하러오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는 법의 처벌은 받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자신은 피해자로 살지 않았기 때문에 사고를 당했다고 하지 않고 만났다고 표현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얻은 것이 너무 많다고 합니다 진정한용서의 종결자는 하나님뿐입니다 진정한 용서는 주님 저는 용서가 안되니 용서할 마음을 주세요. 불쌍히 여겨주세요.입니다 나를 힘들게 한 그 사람도 그 구원을 받았으면 좋겠다고 헤세드를 넘어 라함으로 가야 됩니다내 사연 억울함 미움 들이 여전히 남아있겠죠 그러나 그 고난을 겪으며 내 죄악을 깨닫고 주님을 만난 구원이 너무 크기에, 그 구원이 가장 중요함을 알기에 나를 힘들게한 원수같은 그 사람도 구원을 받았으면 좋겠다고, 구원의 자리에 놓고 기도하는것만해도 힘든 사람 데리고 올라가는 것입니다 가해자가 받는 고통을 생각해야 됩니다 기도를 시작했다는 것만으로도 용서의 산에 오른 것입니다
긍휼히 여김에 주최가 주님이기에 날마다 넘어져도 일어설 수 있습니다 내가 너무 부족하기에 다른 부족한 사람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그 다른 사람의 부족이 보이니 긍휼을 통해 나의 부족도 보이고 채워지는 것입니다 긍휼히 여기는 것은 하나님께 긍휼함을 입어야 가능하고 힘든 사람을 데리고 함께 올라가는 통로가 되는 것입니다 날 힘들게 하는 사람을 보고 그 사람만 없으면 내게 복일텐데 라고 대하는게 아니라 그 사람이 있어서 내게 복이다가 되어야 됩니다 그사람을 통해 내 자신을 보게 됩니다 나를 힘들게하는 그 사람이 복의 통로입니다
♤적용질문
용서해야 하지만 내가 용서할 수 없는 존재임을 얼마나 인정합니까?
주님만이 용서의 종결자이심을 믿습니까?
부활절 전도 축제때 내가 팔복산의 통로가 되기 위해 어떤 순종을 하시겠습니까?
ㅇ기도제목
정미언니
일이 바쁜데 건강 지켜주시기를
근무환경 개선될 수 있도록(경영자에게 지혜 주세요)
아버지 건강 지켜주시기를
상아
싫어하는 감정에 에너지 소모 줄여주시기를
측은지심이라도 잃지 않기를
혜령
컨디션 회복
업무 백업해줄 인턴이 무럭무럭 빨리 잘 자랄 수 있도록
다정언니
아침을 큐티로 시작하고 영어공부 시간 늘릴 수 있도록
이번 주 화상영어 시작할 수 있도록
희수
회사일에 요즘 집중이 안되고 일을 미루게 되는데 활기를 다시 되찾을 수 있도록
결혼예비학교 신청했는데 신앙과 앞으로의 결혼생활에 유익한 시간이 되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