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팔복산의 통로
본문: 마태복음 5:7
설교: 김양재 목사님
7.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가난한 심령으로 애통하고, 온유하며, 의에 주리고, 목이 마르게 되어, 영적 배부름을 경험하게 되면 여기가 좋사오니~하며 있는 것이 아닙니다. 팔복의 중앙에 있는 의에 주림은 '너는 나보다 옳도다'하는 마음으로 팔복산의 지름길 통로인 상대를 불쌍하게 여기는 미션인 긍휼로 나타납니다. 그래서 주님이 올라가시면 따라서 함께 올라가고, 내려오시면 또 함께 내려와서 사명을 감당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팔복산의 통로인 다섯 번째 복 긍휼에 대해서 생각을 해보겠습니다.
첫째, 긍휼히 여기는 것입니다.
7절이에요. 긍휼은 매우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에요. 남의 아픔을 마치 자기 아픔처럼 아파할 만큼 불쌍히 여기는 것인데 그러나 주님이 말씀하시는 긍휼은 인간 자체를 아무 차별 없이 존중하고 사랑한다는 박애는 아니에요. 그래서 긍휼은 사람의 동정과 다르고 또 조건적인 것도 아니에요. 그래서 이 세 가지로 살펴보려고 하는데 첫째로 긍휼은 동정이 아니에요. 나보다 훨씬 못한 여러 가지 조건에 있는 사람에 대해 불쌍히 여기는 동정은 긍휼히 아닙니다. 우리가 동정이라는 것을 가만히 잘 생각해보면 그 안에 숨겨있는 비교의식, 우월감, 자기 만족감을 볼 수가 있습니다. 이게 참 인정하고 싶지않은 우리 본성인데요. 뭔가 좋은 일에 기부하거나 동정을 베풀었을 때 후에 우리 마음에서 일어나는 감정이나 생각을 솔직히 직면해서 점검해보면 인간이 100% 죄인이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는 말이죠. 내게 있던 것이 없어지면 또 안 좋은 일이라도 생기면 그렇게 돕고 베풀었던 일들에 대해서 생색이 생기는 법이에요. 내가 그렇게 선하게 살았는데하며 예전에 자신의 선함을 기억하고 억울해합니다. 두번째 긍휼은 조건적인 것도 아니에요. 아리스토텔레스는 수사학이라는 책에서 긍휼을 한마디로 남이 부당하게 고통을 당할 때 내 마음에 생기는 고통스러운 감정이라고 했어요. 저 사람은 그런 일을 당할 사람이 아닌데 그런 사람이 고통을 당하니 이제 불쌍히 여기는 측은지심이 생긴다는 거죠. 맹자가 측은지심을 설명하면서 든 예도 어린아이가 우물에 빠지려고 할 때 불쌍히 여겨 도와주려는 마음이라고 했죠. 여기에서 건장한 장정, 강도나 원수라고 하지 않았어요. 그런 사람이 우물에 빠지려고 한다면 측은지심이 생긴다고 했을까요? 이런 관점에서 보자면 고통 당해 마땅한 사람이 고통을 당할 때 우리는 불쌍히 여기지 않아요. 이렇게 세상의 상식이나 윤리의 기준에서 긍휼은 아주 조건적이고 차별적입니다. 죄인이 고통을 겪는 것은 당연한 법이니까 불쌍히 여길 필요가 없어요. 근데 의인이 고통을 당하는 것은 억울한 일이니까 불쌍히 여겨 도와야 한다는 것이죠. 사실 이런 판단이 있어야 죄인들이 모여 사는 인간 사회의 질서가 유지되지 않겠습니까? 그게 도덕이고 법 아니겠습니까? 다 여기쯤에서 이제 동정과 조건적인 이런 긍휼에 다 머물러 있죠. 세 번째 주님의 긍휼은 상식적이고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오해를 바로잡아주시는 거예요. 주님은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라고 하실 때 어떤 자격이나 조건을 붙이지 않으세요. 이웃을 긍휼히 여기는 자라거나 긍휼히 여길 만한 자를 긍휼히 여기는 자라고 하시지 않았어요. 그저 긍휼히 여기는 자예요. 상식과 도덕과 윤리로 기복산에는 오를 수 있지만 팔복산에 올라 진정한 복을 누릴 수는 없지요. 인간의 옳고 그름은 팔복산의 통로가 결코 될 수 없습니다. 팔복산에 오르기 위해서는 세상 윤리의 한계를 뛰어넘는 주님의 가르침에 순종하여 모두를 긍휼히 여겨야 합니다. 그러면 왜 긍휼히 여겨야 하나요? 우리 모두 밑동 짤린 나무 상태로 차별하지 않고 죽음이 다가오는 거예요. 원수까지 포함한 모두에게 불쌍히 여겨야 할 내용은 우리 모두 죄인이라는 것이죠. 따라서 자신이 불쌍한 존재임을 깨닫는 것은 화가 아니라 복이에요. 왜냐하면 알지도 못한 채 떨어지고 있던 통로가 죽음의 낭떠러지로 가고 있다는 것을 이제야 알게 되었기 때문에 복인 거죠. 그러니까 건강하든 아프든 부하든 가난하든 유식하든 무식하든 성격이 좋든 나쁘든 착하든 악하든 모든 사람은 죽음 앞에서 한없이 무기력한 불쌍한 존재에요. 권한이 있으면 있는 대로 불쌍하고 권한이 없어도 없는 대로 불쌍한 게 인간이에요. 그래서 사람은 누구나 긍휼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평생 겪는 모든 고난과 고통과 환난과 재앙은 결국 죄에 뿌리를 두고 고난은 장차 당할 마지막 고난인 죽음의 예고편일 뿐인 거예요. 이렇게 나 자신이 내 가족이 이웃이 심지어 내 원수를 포함한 모든 사람이 긍휼히 여겨야 하는 불쌍한 존재임을 아는 사람이 팔복산의 통로에 오를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팔복산의 통로는 긍휼히 여겨야 합니다.
Q. 남을 불쌍히 여김이 나보다 못한 사람 동정입니까? 의인과 죄인 차별하는 긍휼입니까? 무조건적인 주님의 긍휼입니까? 우리 모두 밑동 잘린 나무라는 인식이 있습니까?
두 번째, 긍휼히 여김을 받는 것입니다.
7절. 그러나 누구나 긍휼이 필요하다는 것을 머리로는 알지만 실제로 다른 사람을 긍휼히 여기기란 쉽지 않아요. 게다가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을 긍휼히 여기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죠. 사실 같이 죽어가는 상태라면 누가 누굴 긍휼히 여길 수 있겠습니까? 내가 죽어가는데 남을 걱정할 여유가 없잖아요. 그래서 죄 가운데 모든 인간을 긍휼히 여기는 것은 구원의 반석에 오른 사람에게만 가능한 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신 구원을 알기에, 죽음이 흔들 수 없는 구원의 반석 위에 서 있기에 그래서 그 반대인 죽음의 늪에 빠져 있는 사람을 불쌍히 여길 수가 있는 거예요. 신약에서 긍휼로 번역한 헬라어 엘레오스는 구약에서는 히브리어 라함과 헤세드가 합친 번역어로 많이 쓰였어요. 라함은 어머니의 자궁이라는 뜻으로 창자가 끊어지듯이 아파하는 슬픔과 애통이라는 뜻이 있고요. 자비란 뜻의 헤세드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그 슬픔과 애통으로 상대방의 감정에 공감할 뿐 아니라 실제적으로 행동하는 거예요. 마음의 슬픔과 애통으로 공감을 하고 헤세드의 이 자비로 행동하는 긍휼이에요. 그러니까 긍휼은 그 자궁 속에서 같이 아파하는 엄마의 사랑을 내가 먼저 받았다는 여김을 받았다는 거예요. 이사야 49장 15절 16절. 그 당시 이스라엘의 무너진 성벽인 너의 성벽이 항상 내 앞에 있다는 거예요. 무너진 내 가정, 무너진 내 사랑, 무너진 내 인생을 주님은 보고 계신 거예요. 자기 태중에 나온 자식이기에 아무리 형편없어도 끝까지 손바닥 안에 새겼다는 뜻이에요. 즉 하나님은 죄인인 우리를 위하여 창자가 끊어지는 슬픔과 애통으로 공감해 주시고 그 해세드를 베푸셔서 죄를 용서하시고 구원해 주시기까지 사랑하신 것을 말하는 것이 긍휼이에요. 성육신으로하나님의 긍휼이 어떤 깊이와 넓이와 높이를 가진 것인지 가늠할 수 없는 확실한 증거를 주님이 보여주셨어요. 일곱 번씩 일흔 번씩 용서하고 십자가에 이 죄 많은 우리를 위해서 죽어주신 거죠. 이와 같은 실천적 긍휼은 얼마 전 큐티 본문이었던 마태복음 18장에 일만 달란트의 채무를 탕감받은 자가 백 데나리온밖에 되지 않은 채무를 진 자에게 인색하고 모질게 구는 것에 대해서 꾸짖으시는 예수님의 비유에서 보여주셨죠. 우리는 그렇게 대단한 사랑을 받은 자에요. 이 사랑을 모르기 때문에 일만 달란트의 긍휼을 받고도 백 데나리온의 긍휼로 나가지를 못하는 거예요. 그런데 본문에서 이 동사는 미래 수동태로 사용되었고 이것이 신적인 수동태인 거예요. 긍휼을 베풀어주시는 주체가 전적으로 하나님이고 그 시점은 미래인 거예요. 우리가 뭐든 다 응답되고 이러면 참 믿기가 좋을 텐데 긍휼은 하나님이 하시니까 인간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것은 아니죠. 이런 의미에서 볼 때 팔복은 근본적으로는 마지막을 준비하는 종말론적인 의미로 해석될 수 있는 거예요. 주님의 절대 긍휼을 입은 사람만이 빈곤한 자를 불쌍히 여길 수가 있어요. 주님께 받은 긍휼을 이웃에게 흘려보내는 긍휼의 통로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긍휼은 주님의 긍휼을 입지 않고서는 동정이나 자선의 차원을 넘어서지 못합니다. 즉 인간에게 긍휼을 베푸는 자는 다른 인간으로부터 긍휼히 여김을 받는다는 의미가 아니라, 내가 다른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 수 있는 것은 긍휼의 근원이신 하나님으로부터 긍휼히 여김을 받는다는 의미에요. 근데 거기 하나님이 개입되지 않으니까 옳고 그름으로 따지는 거예요. 내가 긍휼함을 입었기 때문에 긍휼히 여길 수 있다는 것이죠. 요한복음 8장.의인이신 주님도 간음한 여인을 용서해 주시는데 어차피 본성이 똑같은 죄인들끼리 서로 정제할 수 있느냐는 것인데요. 긍휼을 받은 우리는 타인에 대해서 어떤 마음을 가지게 될까요? 은혜에 빚진 자는 타인에게도 당연히 긍휼히 여기는 마음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이 현장에서 간음하다 붙잡힌 여인을 주님은 그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에게 불렀던 여자여란 호칭을 똑같이 붙여주고 계세요. 그 여인을 예수님은 긍휼히 여기고 계신 거예요. 구원이란 이런 거예요. 긍휼인 그 라함과 헤세드 하면 망하기 직전에 호세아 선지자가 대표적이에요. 우리가 중독된 것에 1위가 자식이라고 할 수 있는데하나님께서 우리를 테스트해 보시기에 가장 좋은 대상이 자식이에요.우린 자녀가 착실하고 공부 잘하길 너무 바랍니다. 자식이 나니까요. 나의 안녕과 모든 기대를 자식에게 걸고 온 사랑을 쏟아붓는데 그 기대에 못 미치면 잠이 안오는 거예요. 그게 집착이에요. 근데 다들 너무 사랑해서 한다고 생각을 하는 거예요. 내 인생의 행복의 근거를 오직 자식에게 두기 때문에 열심히 뒷바라지 하면서 들들 볶아요. 그것도 안 되면 이제 때리고 욕하고 난리를 칩니다. 그러니까 자식 하나만 내려놓아도 정말 큰 적용인데요. 우리가 자녀 중독, 배우자 중독에 걸렸기 때문에 망하기 직전의 호세아와 같은 역할 모델이 꼭 필요합니다. 하나님은 30년 정도 후에 망할 이스라엘 백성을 살리기 위해서 호세아의 가정을 통로로 쓰십니다. 그런데 백성이 너무 미련하기 땜에 망하기 30년 전인데도 당장 재앙으로 다가오지 않으니까 어떤 말씀도 들리지가 않아요. 그래서 호세아가 낳는 족족 자녀들이 망하고 죄를 사하지 않고 내 백성이 아닌 식구들이 역사하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호세아를 이런 역할 모델로 쓰이게 하신 거예요. 그러나 그 삶은 구원을 위한 소명의 삶이에요. 선지서의 주제가 멸망 포로 회복이라고 했습니다. 계속적인 형벌은 없어요. 그렇다고 호세아 가정이 망하는 게 아니에요. 이스라엘이 30년 후에 망했다고 진짜 영적인 이스라엘은 망하지 않아요. 하나님은 어떤 경우에도 회복의 약속을 주십니다. 근데 인간의 힘으로는 무너진 성벽을 중수할 수가 없는 거예요. 이렇게 와서 예배드리면서 공동체에서 나의 죄를 내놓으면 죄가 힘을 잃는 거예요. 예전에 국민일보와 인터뷰를 하는데 우리들교회가 건강한 교회로 소문이 났다고 목회 노하우가 무엇이냐 물었어요. 그래서 저는 날마다 큐티와 누구보다 힘든 결혼 생활을 해보았기 때문이라고 대답을 했어요. 구약의 호세아 선지자도 그 아픔을 겪다 보니까 백성의 아픔을 이해하게 된 거죠. 불행한 결혼 생활은 잠시 힘들겠지만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가기 위해서 아주 좋은 약재료예요. 내 식구의 불순종을 보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얼마나 행음하고 있는지를 깨닫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계획이 있습니다. 지금 이 시대가 너무 부요해서 성적으로 문란하고, 동성애가 2백 년 전에만 해도 있을 수가 없었던 일이었잖아요. 결혼의 목적이 행복이 아니고 거룩이라는 말을 이해를 못합니다. 요즘은 어디를 가도 무조건 가정을 지키라는 말씀부터 전합니다. 큐티를 위한 큐티가 아니라 부흥을 위한 큐티가 아니라 가정을 지키기 위한 큐티를 전하고 있습니다. 자식한테 무슨 일이 생길까 생각만 해도 여러분 죽을 것 같다면 그것은 중증의 집착이에요. 내 집착 때문에 자녀들의 인생이 불행해지는 거예요. 자식은 하나님 것이에요. 하나님이 나에게 맡기신 거예요. 슬픔과 애통으로 공감해 주시고 해세드를 베푸셔서 죄를 용서하시고 구원해 주시기까지 사랑하신 주님의 긍휼을 먼저 경험한 우리들교회 성도들의 이 긍휼히 여김받은 이 헤세드가 지금 전 세계에 울려 퍼지고 있어요. 긍휼히 여김 받았기 때문에 긍휼히 여기는 간증들이 계속 흘러 퍼지고 있는 거죠.
Q. 그 사람은 긍휼을 입을만한 자격이 없다며 정죄하는 사람은 없습니까? 그래서 내가 하나님의 긍휼을 보여주어야 할 사람은 누구입니까?
여러분은 사랑받고 자랐나요? 무너진 내 가정 때문에 늘 책임을 누군가에게 돌리고 있나요? 내가 다른 사람을 긍휼히 여기는 것 자체가 하나님께 긍휼히 여김을 받은 증거라고 몇 % 생각이 되나요?
세 번째, 그래서 가장 힘든 사람을 데리고 함께 올라야 합니다.
마태복음 5장 44절. 불쌍히 여길 만한 사람 불쌍히 여기는 것은 기복산에 사는 사람들도 많이 하죠. 그런 긍휼은 팔복산에 오르는 통로가 아니에요. 원수를 용서하라를 넘어 사랑하라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입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긍휼을 입었기에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해야 되고 주님이 십자가에 못박히시기까지 모든 것을 내어주셨기에 이것이 긍휼이에요. 그런데 나는 이런 애끓는 긍휼로 사랑할 수가 없어요. 가해자와 피해자라는 이 단단한 사고의 틀은 절대 깨지지 않아요. 몇십 년 몇백 년이 지나도 피해 의식이라는 것은 가정별로 지역별로 나라별로 정말 없어지기 힘든 일인 것을 우리가 보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의 존재의 한계가 이렇기 때문에 용서하라는 말은 한낱 구호에 지날 수밖에 없어요. 그러니 진정한 용서의 종결자는 하나님뿐이심을 인정해야 합니다. 진정한 용서는 저는 도저히 용서할 수 없으니 주님 저를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 라고 부르짓는 것, 힘든 대상자를 팔복산에 데리고 올라가는 것과 같은 거예요. 내 사연, 억울함, 미움 등이 여전히 남아 있겠죠. 그러나 그 고난을 겪으며 내 죄악을 깨닫고 주님을 만난 구원이 너무 크기에, 그 구원이 가장 중요함을 알기에 나를 힘들게 한 원수 같은 그 사람도 구원을 받았으면 좋겠어요. 구원의 자리에 문자적으로 내가 데리고 나오는 건 헤세드지만 라함으로 슬픔과 애통으로 공감하라 그랬잖아요. 가해자가 받고 있는 그 고통이나 똑같아요. 근데 내가 그 사람을 구원의 자리에 놓고 기도하는 것만 해도 힘든 사람 데리고 올라가는 것이에요. 그래서 긍휼은 한 번 맛보았다가 완벽해지는 게 아니에요. 날마다 부족하고 넘어지고 실족해요. 그런데 그 구원의 긍휼히 여김의 근거가 주님 앞에 있기 때문에 다시 주님 앞에 설 수 있는 근거가 되는 것입니다. 내가 너무 부족하기에 다른 부족한 사람들이 보이기 시작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자기 죄를 보는 사람은 부족한게 보이잖아요. 다른 사람의 부족이 보이니까 그 사람에게 긍휼을 베품으로 베푸는 것만큼 나의 부족한 부분을 채워가게 하시는 거예요. 여러분들이 지금 목장에서 섬기는 것도 섬기다 보니까 나의 부족한 긍휼이 채워져 가는 거예요. 긍휼히 여기는 것은 하나님께 긍휼히 여김 받아야 가능하고, 힘든 사람을 데리고 기도하고 손과 발이 가는 적용으로 긍휼을 전하는 통로가 돼야 할 줄 믿습니다. 쉽게 말해 날 힘들게 하는 사람을 보고 그 사람만 없으면 내게 복일 텐데로 대하는 게 아니라 그 사람이 있어서 내게 복이다로 대하는 거예요. 나를 힘들게 하는 그 사람 덕분에 내가 내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있기 때문이에요. 목장을 하면서 내 자신의 모습을 많이 보게 되죠. 그러니까 나를 힘들게 하는 그 사람이 다같이 복의 통로다 외치세요.
Q. 용서해야 하지만 내가 용서할 수 없는 존재임을 얼마나 인정합니까? 주님만이 용서의 종결자이심을 믿습니까? 부활절 전도축제 때 내가 팔복산의 통로가 되기 위해 어떤 순종을 하시겠습니까?
목장에 그 이름을 내어놓고 함께 기도하는 것부터 힘든 사람 데리고 함께 올라가는 거예요. 같이 기도하는 것, 내 입에서 그 사람의 이름이 나왔다는 것이 벌써 불쌍히 여기시는 거예요. 세상 사람 다 용서해도 너만은 안돼 그건 아직 하나님의 긍휼히 여김을 받지 못한다는 뜻이에요. 하나님의 뜻에 민감하게 되면 이렇게 긍휼히 여기게 돼요. 그리고 내가 긍휼히 여김을 받으면 창자가 끊어지듯이 아픕니다. 내 자신이 얼마나 긍휼이 필요한가를 아는 사람만이 긍휼히 여길 수 있는 거예요. 힘든 사람과 같이 갈 수 있는 것이 복 있는 사람이고 긍휼의 사람인 줄 믿습니다.
기도제목
박가영
1. 먼저 용서받은 죄인임을 잊지않고, 하나님 주시는 긍휼의 마음구하고 몸부림하는 한주되기를
2. 직장내 불안,회피성 상사에 대한 생색불평내가보다 먼저 중보하도록
3. 목요일 임원진 교육 등 부담스러운 일정에 지혜와 담대함 더해주시기를
4. 세상화평 아닌 진짜 구원의 화평을 믿지않는 가족에게 허락해주시길 불쌍히여겨주시기를
5. 손목통증등 체력관리잘하도록, 주변 아픈지인들 중보쉬지않도록
6. 서로 긍휼히여기고 여김받는 목장되기를
7. 고통속 열방들 회복시켜주시기를, 혼돈의 이나라 불쌍히여겨주시길 악법세워지지않도록
이미선
1. 일만달란트의 긍휼히 여김받은 은혜를 기억하고 내 힘으로 할 수 없는 용서의 종결자이신 하나님을 신뢰하며 일주일을 잘 살아내도록
2. 매일 말씀과 수요예배 말씀, 일대일 양육 준비 말씀이 잘 들리고 내 죄를 보는 하루하루되길
3. 정신과 약 먹고 위가 아프지않도록
4. 담임 목사님의 영적 육적으로 강건하고 사역에 기름부어주시고 부교역자님들에게도 동일한 은혜로 함께해주시길
5. 우리나라를 불쌍히 여겨주시고 차별금지법 등의 악법이 통과되지않고 태아생명보호법이 제정되고 교육개정안이 폐기되도록
6. 나라를 위해 헌신하고 희생하고 책임지는 지도자가 준비되도록
오지은
1. 하나님의 긍휼을 입은 자로서 내가 죄인임을 먼저 보지 못하고 아직도 의로움과 옳고 그름으로 정죄하는 여전한 나를 불쌍히 여겨주시길 나보다 옳도다가 절로 고백되어지기를
2. 직장과 지인들과의 관계 속에서 믿는자로서 좀더 낮은 자세로 섬길 수 있도록, 아직 주님을 모르는 친구들을 위해 애통하는 마음으로 기도할 수 있도록
3. 엄마 아빠의 건강 지켜주시고 특히 아빠가 말씀이 들려 삶이 해석되는 큰 축복을 누리실 수 있도록
4. 신교제 신결혼을 위한 만남의 축복을 허락해 주시길
5. 이번주 부부목장이 우리집에서 있는데 은혜의 시간 되길
6. 이번주 일본 당일출장 시간이나 동선에 무리없이 다녀 올 수 있도록
7. 김양재 목사님의 영육간의 강건함을 지켜주시고 함께 동역하시는 사역자분들께도 동일한 은혜주시길
8. 우리 목장 식구들 한주간 주님안에서 햇살처럼 따듯한 매일매일이 되도록
이다솜
1. 가족과 목장식구들의 건강 위해 기도합니다
2. 취미라던지 동호회라던지 욕심을 내려놓기가 쉽지가 않은데 내려놓을수 있도록
3. 아빠의 교회방문을 위해 기도합니다
4. 화풀이를 하지않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정세린
1. 동정과 자선이 아닌 진정한 궁휼의
자리로 갈수있도록
2. 체력 회복 되기를
3. 우리반 (애플반) 아이들 어머님들을 위해
4. 엄마 언니 마음가운데 성령님 임하기를
5. 큰삼촌 구원확신 보여주시기를
6. 양교 엉덩이 붙이기 적용하는데 힘주시기를
7. 김양재 목사님 강건하기시를
8. 전쟁 종식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