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1009 성령의 항해
사도행전 27:1-8
지난주 이 시대의 지성이신 강영안 철학 교수님 설교에 많은 은혜를 받았죠? 부활이 nothing이라는 이 교수님의 말과는 달리 전도자가 말하는 허무함이 nothing이 아니라 부활이라고 말씀을 해 주셨어요. 가을에는 뭐죠? 전어가 아니라 전도서입니다. 그래서 다들 전도서 큐티가 쉬워졌죠? 허무와 기쁨의 양 날개 가운데서 몸통이 여호와를 경외함이라고 했어요. 결론부터 오늘 나왔습니다.
사도 바울이 아덴에서 그 시대의 최고의 지성 세네카를 인용해서 설교를 했었는데 그 세네카가 이렇게 말했어요. '인생은 험난한 항해다.' 그럼 우리는 항해를 하든지, 표류하든지 둘 중에 하나겠죠. 그런데 험난한 항해를 했는데 그냥 '나는 살았다.' 생존한 것으로 끝난다면 그 험난한 인생이 아깝지 않습니까? 여러분들이 항해를 하고 있다면 여러분들의 선장은 누구입니까? 내가 인생의 선장이 되어 항해를 합니까? 아니면 환난이 주제가 되고, 성경이 교과서가 되고, 또 성령이 스승이 되어서 성령의 항해를 하고 있나요? 바울이 긴 재판 시간을 끝내고 드디어 항해를 떠납니다. 그래서 오늘은 바울이 떠나는 성령의 항해에 대해서 우리가 생각을 해봤으면 좋겠어요.
1. 작정하는 것이 아니라 작정 되는 것입니다. (1절)
1 우리가 배를 타고 이달리야에 가기로 작정되매 바울과 다른 죄수 몇 사람을 아구스도대의 백부장 율리오란 사람에게 맡기니
-> 이 작정되매는 능동태가 아니라 수동태예요. 로마로 향하는 이 배는 바울이 결정하고 작정한 배가 아니죠. 하나님을 향한 열심으로 다메섹을 갈 때는 바울 자신이 결정하고 계획하고 갔어요. 그러나 '사울아 사울아 니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의 음성을 듣고 주님을 만난 후로는 내가 계획하고 결정하고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가 계획한 것에 끌려간다는 뜻이에요.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인생의 주인의 자리에서 내려옵니다. 그리고 지금 바울은 어느 자리까지 내려가 있죠? 그는 지금 이 배에 선장이 아니라 죄수로 타고 있어요. 그렇게 내가 얼마나 뼛속까지 죄인인 줄 아는 사람이 죽음 앞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처절하게 깨닫게 되고 내 인생이라는 배에 선장이 아니라 이렇게 죄인으로 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오늘 해외 단기 선교 주보 광고가 나왔습니다. 코로나 이후에 첫 해외 선교예요. 그런데 이번에는 이전과는 다른 점이 있는데 뭘까요? 바로 영문 큐티인을 들고 간다는 거예요. 영어권인 필리핀, 네팔, 탄자니아, 영국 등을 방문하여 영문 큐티인으로 간증도 하고, 함께 큐티도 하고, 또 그래서 그 영문 큐티인을 선교 현장에 보급한다는 것이 크게 달라진 점이에요. 그런데 이 영문 큐티인도 뭔가 거창한 세계 선교를 위해서 작정하고 계획해서 나온 게 아니예요. 오늘 이 본문이 제가 작년 8월에 미국에 출발할 때 바로 그날 큐티 본문이었어요. 이달리야로 가기로 작정되매 그때 최고의 나라가 이달리야, 로마였자나요. 그리고 주일 설교는 성령의 경영인데 바로 그 단어가 작정이라는 단어였어요. 그리고 미국에서 처음으로 방문한 베델교회 집회 슬로건이 바로 I am put here였어요. '성령께서 put하셔서, 떠미셔서 우리가 여기 서 있다.' 이런 뜻이죠. 그렇게 계획에도 없던 미국에서 그저 이 배에 타고 있는 죄수로 제가 얼마나 죄인이었는지 간증 설교를 하는, 정말 그 자리에서 우리 미국의 베델교회 김한요 담임목사님께서 이제 이 큐티인을 온 교회가 바로 쓰시겠다고 작정을 하셨고, 그리고 베델교회 도움으로 영어 큐티인이 나오게 된 것이죠. 그런데 이번에 이 칼빈대학교 교수님이신 강영안 교수님도 영어 큐티인을 보셨다는 거예요. 그런데 '번역이 너무 훌륭하게 잘 돼있더라.'고 교수님이 검증을 하셨네요. 돌아보면 강에서 바다로 흐르게 하시는 것은 우리의 계획이 아니라 작정되어진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자랑할 것이 하나도 없죠. 여러분들의 간증이 이제 영어로 번역되어 곳곳에 흐르는데 자칭 우리 스스로 죄수들의 간증이 얼마나 많은 가정을 살리는지 모릅니다. 이 배에는 스스로 죄인이 있고, 죄를 모르는 죄인이 있자나요, 지금. 스스로 죄인, 여러분들 다 스스로 죄인 맞죠? 저 역시 제가 인생을 작정했을 때는 온 힘을 다하고 노력해가지고, 또 일류 대학을 갔고, 또 그렇게 해서 또 장로님 댁, 부자집 며느리가 되었는데 저의 노력의 결과가 무엇인지 여러분들 다들 아시자나요. 제가 갇혀 있고, 매맞고, 걸레질하면서 드디어 저의 죄를 보고 주님을 만나 엎드러지니까 그 간증으로 주님이 저를 I am put here하기 시작하니 남편이 구원을 받게 되고 제 계획에 하나도 없던 강남 한복판에 교회를 세우시고, 또 판교에 교회를 세우시고, 또 피아노만 치던 제가 이렇게 목회를 하게 될 줄은. 거기다가 이슬비로 시작한 큐티인이 이렇게 영문판까지 나오게 될 줄은 정말 몰랐습니다. 그저 우리는 늘 배에 탄 죄수로, 그저 수동태로 이렇게 죄인됨을 간증하고 죄수로 이 배에 묶여가니까 사명으로, 로마로 그분이 작정하셔서 이끌어 가시는 것이죠. 이것이 성령의 항해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점이 있어요. 그저 수동태로 끌려가기만 하면 되나요? 내가 할 일도 있다는 거예요. 성령의 항해의 핵심은 끌려가나 누가 앞장서나, 말씀이 앞장선다는 거예요. 사도행전 23장 11절에 그 날 밤에 주께서 바울 곁에 서서 이르시되 담대하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언한 것 같이 로마에서도 증언하여야 하리라 하시니라 이 말씀이 바울을 로마로 이끌었어요. 그런데 이미 바울은 3차 전도여행 때 로마서를 기록해서 이미 말씀을 로마에 먼저 보냈습니다. 로마로 가기 전에 이미 로마서가 로마의 문을 두드리고 있었던 것이죠. 그런데 바울도 이런 죄수의 신분으로 재판받으며 로마로 갈 줄은 몰랐겠죠. 그런데 '예루살렘에서 증언한 것 같이 로마에서도 증언하여야 하리라.' 그러니까 하루하루 주신 말씀 앞에서 내 죄를 고백하고 전하며 늘 증언한 것 같이, 또 공동체에 물으며 가는 바로 이것이 결국은 로마에 가서도 증언하게 되는 줄 믿습니다. 제가 이제 가 가지고 그렇게 미국에서 전하는 게 바로 그거 아니겠습니까? 제가 집에서 날마다 한 사람, 한 사람 증언했더니 어느 날 미국에서 딱 증언을 하게 되는 것, 날마다 목장에서 증언하는 사람은 어디 가서도 하게 되고 다 강에서 바다로 나가게 될 줄 믿어요. '로마도 가야 하리라.'가 지금 바울의 주제입니다. 바울이 지금 이미 보내 놓은 로마서가 있듯이 바울이 이런 심정으로 쓴 로마서가 어떤 내용인지 여러분 너무 이 로마서 내용이 궁금하지 않으세요? 지금 이렇게 재판받고 난리 치면서 로마 가야 되는데 이미 로마인이 읽어야 될 로마서를 보내 놨다는 거예요. 자, 가을에 읽는 전도서가 끝나면 겨울이 오기 전에 읽는 로마서를 읽어 보시기를 권합니다. 그 로마서는 제 큐티 강해집이에요. 어떤 목사님께서 로마서가 정말 이렇게 딱딱하고 너무 좀 어려운데 진짜 복음을 너무 쉽게 이해하도록 쓰셨다는 피드백을 제가 들었습니다, 그렇죠? 거울이 오기 전에 읽어보세요. 그러니까 항상 작정되어지는 인생, 그러니까 이제 한 부목자님이 항상 누가 전하면 '거기까지.' 그렇게 입장이었다가 예수님을 믿게 되신 거예요. 그랬더니 누가 말하기만 하면 '미쳤구나.'했는데 이제 자기 보고 '미쳤다.' 이 얘기를 한다는 거예요. 왜, 어떤 일이 있었을까요? 그 아이의 뇌종양 사건을 당해서 세상에 아무것도 못하는 게 의사라는 걸 깨달았다는 거예요. 그래서 참되고 온전한 말 하기는 하는데, 간증할 때 '제가 늘 의사로써 교만했는데 의사로써 어찌할 수 없는 자녀의 병을 주셔서 예수님을 만났다.' 이 얘기를 늘 하신다는 거예요. 또 환자들한테 간증할 때는 '나도 수면제 먹고 우울증 약 먹는다.'고 큐티책을 줄 때 꼭 또 그 얘기를 한데요. '저도 힘들 때 도움받고 우울증 아닌 줄 알았는데 약 먹고 도움받았다.' 이 소리도 하신데요. '진료실에서 환자에게 그런 얘기를 하는 거 보면 나의 약함을 숨기는 것 같지는 않다.'고 했어요. '그러나 환자들이 놀라기는 하더라고요. 제가 잘해서 하는 게 아니라 처음에 교회 왔을 때 제대로 밟혀가지고 교육이 된 것 같습니다.' 여러분들 밟히는 게 축복이에요. 한 번 밟혔다고 그렇게 교회를 떠나고 이러지 마세요. 으, 그러지 마세요. 어떻게 밟혔냐? '주일날 예배 안 드리고 학회 가면 차 사고가 나고, 조금만 흐트러지려고 하면 몸을 치시고, 앓아 눕고 그래서 엄하게 인도하셔서 저절로 무서운 게 있습니다.' 작정만 하다가 작정되는 인생을 사시는 것 같습니다. 적용 질문이에요.
[적용] 여러분은 인생을 끌고 가나요? 끌려 가나요? 말씀이 앞장 서나요? 내 의지가 끌고 가나요? 로마서를 읽으셨나요?
2. 함께 배에 탄 우리가 있습니다. (1-3절)
1 우리가 배를 타고 이달리야에 가기로 작정되매 바울과 다른 죄수 몇 사람을 아구스도대의 백부장 율리오란 사람에게 맡기니 2 아시아 해변 각처로 가려 하는 아드라뭇데노 배에 우리가 올라 항해할새 마게도냐의 데살로니가 사람 아리스다고도 함께 하니라
-> 우리 인생의 항해에 우리가 죄수의 신분으로 가지만 홀로 가는 게 아니예요. 우리가 로마로 가는 길에 함께 하는 우리가 있어요. 누가가 우리라고 쓴 표현이 세 번 나오는데, 마게도냐 환상을 볼 때 16장 10절에 나왔어요. 또, 21장 18절에 모든 전도 여행을 마치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을 때 우리가 또 나왔어요. 그리고 오늘 27장 이렇게 1절, 2절에 오늘 로마로 출발을 할 때 또 이제 우리가 나오는 거예요. 이게 무슨 말인가 하면 내 인생의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고 중요한 일들이 시작될 때 보니까 항상 내 옆에 우리가 있네요. 지금 바울 곁에 누가 있죠? 바울의 건강과 힘이 되어주는 의사 누가. 이 사람은 여러분 누가복음을 누가 썼죠? 사도행전을 누가 썼죠? 누가 썼죠? 누가가 썼죠. 그래서 누가행전 누가가 썼다고 이렇게 외우시면 됩니다. 정말 그 누가는 의사요, 문필가요, 탁월한 역사학자라고 생각이 돼요. 그리고 이제 누가와 오늘 2절에 데살로니가 사람 아리스다고가 있는데요. 아리스다고에 대해서 우리가 생각해보면 그 이름의 뜻이 최고의 통치자인데, 아마도 유력한 집안 출신 같아요. 그런데 이런 아리스다고가 어떤 사람인가 하면 성경에 다섯 번이 나오는데요. 처음으로 사도행전 19장 29절에 아리스다고가 바울 대신 붙들려 갔어요. 그때 바울이 피했죠, 막 다 잡으러 오니까. 그래서 아마 죽기 직전까지 매를 맞지 않았을까 싶어요. 또 20장 4절에 예루살렘에 갈 때 가장 중요한 일인 헌금을 맡은 원정대에도 함께 했어요. 또, 오늘 27장 2절에 바울이 죄수로 잡혀갈 때 이 죄수의 신분으로 바울과 함께 있었어요. 골로새서 4장 10절에도 바울과 함께 감옥에 갇혀 있기도 했습니다. 빌레몬서 1장에 보면 나의 동역자, 나와 함께 갇힌자라고 다섯 번이나 등장하는 바로 이런 우리가 바울 옆에 딱 있어요. 그런데 이 우리에는 친구도 있더라고요.
3 이튿날 시돈에 대니 율리오가 바울을 친절히 대하여 친구들에게 가서 대접 받기를 허락하더니
-> 이 바울의 친구들은 당연히 성도들이겠죠. 그런데 그들을 이렇게 친구들이라고 쓴 게 참 특별하네요. 문자적으로는 사랑하는 사람, 애인이라는 뜻인 만큼 아주 그냥 끈끈한 우정을 담고 있어요. 그래서 사도행전 19장 31절에 그 바울이 에베소 소동을 당할 때 아리스다고는 대신 잡혀갔자나요. 그런데 아시아 관리 중 바울의 친구 된 사람들이 그를 걱정해서 연극장에 들어가지 말라고 했어요. 우리가 있으면 친구가 있어요. 24장 23절에는 바울이 가이사랴에 감금되었을 때 벨릭스 총독이 바울의 친구들이 바울을 돌보는 걸 금하지 말라고 했어요. 기억나시죠? 또 요한삼서 1장 15절에 보면 사도 요한이 가이오에게 마지막 인사를 이렇게 했죠. .... 여러 친구가 네게 문안하느니라 너는 친구들의 이름을 들어 문안하라 그러니까 지체 중에서도 특별히 사랑하는 관계를 강조할 때 이렇게 친구라는 표현을 썼습니다. 바울을 대접한 이 시돈의 성도들이 바울에게 얼마나 특별한 존재가 되었는지 보여주는데요. 시돈은 그 악명 높은 아합의 부인 이세벨의 고향이자나요. 몇 백년이 지나서 이렇게 바울의 친구 성도들이 있다는 것이 너무 놀랍지 않아요? 누구도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다는 거예요. 부모가 이상하다고 그래서 자녀가 안 되는 그런 거 없다는 거예요. 다 될 수 있다는 거죠. 그런데 이 친구들이 대접, 대접이라는 단어가 아주 여기 딱 성경에 한 번 쓰였는데요. 아주 집중해서 돌보는 걸 말해요. 앞으로 어떤 일을 당할지 모를 로마로 가는 바울을 지극정성으로 모든 정성을 다 해서 대접하고 응원하고 힘을 불어넣었어요. 그러니까 막 좋은 잠자리에, 귀한 보양식에, 그냥 목욕할 물에, 깨끗한 옷에, 항해 중에 먹을 식량도 정성껏 준비해서 지금까지 보지 못한 대접을 바울에게 대접을 한 거예요. 그런데 여기서 아주 중요한 거를 발견했는데 이 사람들의 이름이 안 나오는 거예요. 그런데 바울의 친구로 기록이 되었어요. 누군지 소개되지 않았지만 그 특별한 섬김을 특별한 단어로, 한 번 밖에 나오지 않는 이 단어로 성경에 기록해주신 줄 믿습니다. 바울이 받은 위로와 격려가 정말 컸기 때문에 이들이 이름도 빛도 없이 섬겼지만 이 생색 없는 대접 때문에 바울이 로마까지 갈 힘을 얻었어요. 이렇게 대접해주는 친구들이 있었기 때문에 바울이 로마까지 성령의 항해를 이어갈 수 있었습니다. 우리 인생은 또 연약하자나요, 그렇죠? 다 또 그렇게 힘들어요. 이순신이 너무 대단한 사람이지만 그 일기를 보면, 그냥 그 난중일기 이순신 일기가 유명하자나요. 거기다 그렇게 원균을 욕해놨대요. 사람들은 다 이렇게 힘들어요. 그렇게 날마다 '원균 그 놈이 말이야.' 그래서 우리는 사람 믿음의 대상이 아니예요. 그런 것이 이순신을 굉장히 더 이순신 장군 답게 해준다고 생각합니다. 인간적으로는 너무 힘들고 외롭고 어려운 사명의 길을 가는 게 성도의 삶이에요. 이순신도 너무나 그냥 감옥에 갇혀서 고문을 받았자나요. 나라를 위한다고 하는데 그렇게 알아듣지를 못해요. 자, 힘든 배우자와 이혼을 하는 게 가정을 지키는 것보다 사실 훨씬 쉽죠. 낳아서 키울 형편이 안 되는 것 같으면 낙태를 하는 게 생명을 지켜 낳는 것보다 이익인 것 같습니다. 어떤 사역자는 '돈도 그렇게 없는데 왜 엄마가 그렇게 아이를 많이 낳았냐?' 그랬더니 '낙태할 돈이 없어서 그렇게 낳았다.'고 그러시더라고요. 얼마나 다행이에요, 돈이 없었던 게. 그런데 세상은 이혼과 낙태를 지금 부추겨요. 우리가 수요일에 본 영화 언플랜드는 실화자나요. 요즘 우리나라가 인권을 주장하면서 정말 이혼과 낙태를 얼마나 권합니까? 술 권하는 사회가 아니라 이혼과 낙태를 권하는 사회에 우리가 살고 있어요. 참 외롭고 힘든 길이지만 행복이 아닌 거룩을 목적으로 성령의 항해를 하면 내가 잘 될 때도, 못 될 때도, 심지어 내가 죄수의 신분이 되었을 때도 나와 함께 말씀을 보는 우리와 이렇게 특별한 대접으로 응원해 줄 친구가 있는 줄 믿습니다. 그래서 우리들교회 오니까 결혼도 잘 되고 아이도 많이 낳고 그러자나요. 어저께는 우리 사역자가 42살인데 2살이나 연상인 44살 자매하고 결혼을 했지 뭡니까? 그런데 요새 다 그렇게 결혼하지 않을 자유, 아이를 낳지 않을 자유, 낙태할 자유, 이런 걸 자유라 그러는 게 아니거든요. 예수가 없으면 설명이 안되는 것 같아요. 그러니까 이런 친구들이 어디 있겠어요. 정말 또 한 집사님은 시설에서 자랐는데 너무 멋져요. 다 그런데 이 친정이 없다는 걸로 정말 시댁에서 무시하고 이런다 그러는데, 여러분 이 우리들교회 나와서 목장에 나왔는데 이런 친정이 어디 있겠습니까? 세상 친척들도 요새 다 원수처럼 안 만나는 거 아시죠? 정말 좋은 친정이 바로 교회와 목장 식구들이 이런 우리와 친구들이 되어주는 줄 믿습니다. 그런가하면 하나님께서 허락한 우리에는 나에게 세상에서 호의를 베푸는 높은 직책의 백부장 율리오도 포함됩니다. 오늘 율리오 때문에 알렉산드리아 배를 탈 수가 있어요. 그런데 쭉 오는데 보면 세상 친구도 그렇게 다 절교하고 살 수가 없는 거예요. 주의 일을 위해서 율리오도 우리에게 그렇게 허락해 주시는 줄 믿어요. 니고데모처럼 방에 오기는 했어도 아리마대 사람 요셉처럼 세상에서 도움을 주는 친절한 율리오가 또 우리에게 있어요.
그리고 이제 이 우리에 포함되는 가장 중요한 사람들이 또 있습니다. 누구죠? 큐티를 좀 열심히 하시기를 바래요. 자, 1절에 지금 다 언급한 사람 외에 언급하지 않는 사람이 있자나요. 바로 죄수들이죠. 이들은 역사가에 따르면 로마인은 아니고, 로마인을 사자밥이 되게 할 수는 없다는 거죠. 각 곳의 식민지에서 차출한 사형수로 바로 죽음이 눈 앞에 있는 자들이었다는 거예요. 곧 있으면 로마 사람들에게 유흥거리가 되고 사자밥이 되어 죽을 이 죄수들은 살아갈 아무 소망이 없는 사람들이에요. 바울도 다른 죄수, 다른 죄수라 그랬자나요. 다 다른 죄수인데 바울은 죄목이 없는 죄수고, 이 사람들은 죄목이 있는 죄수고. 여기는, 바울은 스스로 죄수된 사람이고, 이들은 억울한 죄수죠, 그렇죠? 끝까지 그냥 주님을 못 만난 사람들은 그냥 억울해요, 모든 게. 죽을 때까지 억울해요. 그래서 이 원수를 갚아야 돼요. 스스로 죄수하고 억울한 죄수가 같이 만났습니다. 사실 그 사람들은 죄의 대가를 치러야 하는 죄인인데도 불구하고 사실 내 인생의 배에 함께 오른 우리 중에 우리가 가장 주목해야 할 사람들은 바로 이 죄수들인 거예요. 인생에 아무 소망이 없는, 이 항해 끝에 죽음을 맞이해야 하는 결국 사람들의 손가락질과 웃음거리로 사자밥이 돼야 하는 그들에게 우리가 우리가 돼야 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바로 내 옆에 같이 배에 타우신 것이에요. 이들 역시 예수를 만나 우리가 돼야 하기 때문에 나에게 누가도, 아리스다고도, 친구들도, 나에게 친절을 베푸는 율리오도 함께 해 주신 이유는 그 죄수들을 섬기라고, 섬기라고 그렇게 우리를 허락해 주셨어요. 그러니까 좋은 우리 친구들은 몇 명 안 돼. 죄수들이 많아요, 죄수들이 내 옆에. 이미 바울은 로마로 향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나와 함께 배에 올라탄 내 옆의 죄수들에게 복음이 닿지를 않아요. 너무 가까운 죄수들에게 복음이 닿지를 않아요. 그러나 그곳에 복음을 전하는 이것이 바로 로마로 항해하는 성령의 항해인 줄 믿습니다. 내 옆의 죄수들을 다 제쳐 놓고, 어디 딴 로마로 가겠다고 하시면 안 되는 거죠. 요즘 바울과 이 다른 죄인, 억울한 죄인들이 너무 많아요. 아무리 힘들어도 주님 손 붙잡고 돌아오시기만 하세요. 주님은 기뻐하십니다. 자격과 공로가 필요가 없어요. 내가 죄인입니다. 돌아오시기만 하면 주님께서 손을 붙잡아주실 줄 믿습니다. 적용 질문 드립니다.
[적용] 우리, 친구, 백부장, 죄수 중에 있는 것은 무엇이고 없는 것을 찾아보세요.
우리와 친구와 백부장은 이 죄수들을 위해서 있는 거예요. 나는 우리끼리 너무 행복해서 믿는 사람들 끼리끼리 놀고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아름다운고.'하면서 아론이 금송아지 이렇게 만들어 놓고 섬겼어요, 형제들과. 모세가 내려와서 돌판 깨뜨렸죠. 그러니까 목장에 힘든 사람들 들어오면 그렇게 여러분들이 '어, 난 저 사람만 없으면 좋겠어.' 이런 얘기하시면 성령의 항해가 안 되는 거죠.
3. 역풍으로 참 목적지를 찾습니다. (4-6절)
4 또 거기서 우리가 떠나가다가 맞바람을 피하여 구브로 해안을 의지하고 항해하여 5 길리기아와 밤빌리아 바다를 건너 루기아의 무라 시에 이르러 6 거기서 백부장이 이달리야로 가려 하는 알렉산드리아 배를 만나 우리를 오르게 하니
-> 이제 지도를 좀 보여줍니다. 그러니까 이제 시돈에서 이렇게 이제 출발을 지금 하자나요, 그렇죠? 하는데 저기 옆에 보면 길리기아도 있고, 그 다음에 밤빌리아도 있어요. 이제 잘 봐 두세요. 고향이고, 여기 1차 전도 여행지고. 그리고 이제 너무 맞바람이 세서 구브로 해안을 의지하고, 이제 저쪽 아시아 저 위에 가서 에베소 위에 아드라뭇데노가 있거든요? 저기 에베소 위에. 거기까지가 지금 목적지인데 사실은 지금 이제 가이사랴에서 서쪽을 쫙 가가지고 로마로 가는 거는 서진을 해야 되거든요. 지중해를 통해서 완전히 직행을 해야 되는데 지금 아시아 위로 이렇게 꼬불꼬불 해안선을 타고 아드라뭇데노 배를 탄 거예요. 저기 아드라뭇데노 보이나요? 에베소 위에, 지금 거기까지 가는 배를 탄 거예요. 그런데 이제 역풍이 불어서 구브로 해안을 의지하고 갔다가 이제 오늘의 내용입니다. 바울이 항해를 하고 타고 있는 배는 그 2절이 그 이름이 나오는데 아드라뭇데노 배예요. 그런데 아드라뭇데노는 배 이름이 아니라 아까 에베소 위쪽에 있는 항구 도시 이름이에요. 즉, 이 배는 가이사랴에서 출발해서 목적지가 아드라뭇데노라는 도시까지 가는 배인데 아시아 각 해안지역 항구, 항구마다 들리는, 그냥 '비 내리는 호남선 완행열차'에 몸을 실은 거예요. 곳곳에 이렇게 이제, 무궁화호라고나 할까요? 지나가는 지역들이 나오는데 먼저 이렇게 시돈을 보면서 '야, 이 시돈에 내가 전도를 했구나. 이세벨의 고향.' 그리고 이제 구브로 해안을 지금 지나가는데 그 길리기아는 바울의 고향이고요. 밤빌리아는 바울이 1차 전도 여행 때 첫 발을 디딘 그 버가, 비시디아 안디옥, 뭐 이제 루스드라, 더베 이런데 있었자나요. 지역이에요. 또 구브로도 마찬가지고요. 구브로는 잊을 수 없는 바나바 때문에 때마다 바라봅니다. 구브로를 바라보면서, 설교 기억 나시죠? 또 지금 구브로를 의지하여. 이것이 아마 마지막 여행이 되는 것을 알았을까요? 그런데 이제 믿는 사람들은 자기가 뭘 하는지도 모르고 말씀따라 가면 그게 이제 마지막이 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고. 추억의 장소들이에요. 그러니까 길리기아는 바울의 고향이니까 바울이 길리기아를 지나가며 예수님 믿기 전의 삶과 주님 만난 이후의 삶, 그의 첫 전도 여행 다 회상할 수 있는 시간이 되었을 거예요. 그래서 이제 아드라뭇데노 종점에 그 위에까지 가서 다다르면, 또 반대로 지역 항구들을 다시 들리면서 운행을 하는 거예요. 거기 갔다가 또 이렇게 내려오게 되는 거예요. 그 배를 타면 그래서 오르락 내리락 반복한다는 것인데, 그런데 이 아드라뭇데노의 뜻이 무엇인가 하면 죽음의 공회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추억 속에 젖어서 내 기억 속에 갇혀 반복되는 이것들이 죽음의 공회라는 거예요. 전도자의 말처럼 헛되고 헛되고 모든 것이 헛되니 바람을 잡는 것 같은 반복이라고 계속되는데, 나는 그냥 거기 좋은 것도 있고, 싫은 것도 있고, 막 아픔도 있고 이러는데 우리 추억에서 벗어나지를 못하는 거예요. 어떤 목자님이 7년간 짝사랑했던 여인을 아이러브스쿨에서 만났대요. 그랬더니 '그때는 내가 짝사랑을 했는데 지금은 그 여자가 나를 좋아하게 됐다.'는 거예요. 그래서 막상 사귀었는데 '사귀고 나니까 별 게 아니더라.'는 거예요. '왜냐하면 제 꿈을 이뤘자나요. 그러니까 너무 허무하더라고요.' 이래요. 꿈을 이루면 다 허무한가봐요. 그러니까 바람 잡는 것 같다고 그러자나요. 그러니까 여러분들 첫사랑 어쩌고 저쩌고 할 때 '가 봐.' 그냥 그렇게 두세요, 조금 이따 허무해서 돌아올 거니까. 그러니까 우리가 보지 않았을 때는 굉장한 뭐가 있는 것 같지만, 그래서 이 성령의 항해를 하려면 내 과거의 기억과 작별을 해야 되는데 과거에는 상처, 아픔, 영광, 슬픔 다 있자나요, 그렇죠? 그러니까 바울이 말을 못하는 것이 영광도 있었지만 자기가 얼마나 사람들을 잔멸하고, 정말 죽이는데 가담을 하고 그랬어요. 그러면 그 친구들, 친척들 바울만 보면 '야 이 살인자야.' 그러지 않았겠습니까? 그러니까 이제 자기가 예수 믿었지만 그런 거만 생각하면 아픔이 있는 거예요. 또 같이 예수를, 같은 성도가 같이 믿었는데도 '너는 몇 날, 몇 월, 몇 일에 누구 죽였자나. 너 욕했자나. 너 돌 던졌자나.' 이거를 예수가 없으면 늘 과거의 상처와 미움에서 벗어나지를 못하는 거예요. 내려와야 되는데 지금 이제, 어제도 우리 평원님, 초원님이 설교를 했지만 날마다 '몇 월, 몇 일, 몇 시 학교 안 왔자나. 안 데리러 왔자나.' 맨날 부르짖고 반복하죠, 아이들이 그렇죠. 그래서 그냥 공감하시는 분들이 많은지 엄청 리플을 많이 달았더라고요. 다 같이 맞아요. 그러니까 우리는, 제가 바울을 생각해보니까 그냥 곳곳에서 바울보고 '니가 우리 누구 죽였자나.' 이랬을 걸 같아요. 이 사람 죄인이야. 말을 못해요. 바울이 겸손한 게 아니고 환경이 겸손한 거예요. 죄 없는 사람들은 그걸 이해를 못할 거 같아요. 그런데 우리는 스스로 죄수이기 때문에 누가 뭐라고 그럴 때마다 이제 그 모든 것에서 내려야 돼요. 그 완행열차에서 내려야 돼요. 이 배에 계속 머물러 있다가는 그 죽음의 공회가 종착점인 거예요, 아드라뭇데노. 죽음의 공회로 갈 수밖에 없는 거예요. 그런데 또 우리가 내릴 수가 없는 거예요. 내가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 그랬자나요, 작정되어지니까.
오늘 4절에 떠나다가 맞바람이 부니, 이 맞바람을 피하여 구브로 해안을 의지했다고 그러자나요. 맞바람은 서로 바람 피는 게 아니고 역풍. 그저 바람밖에 모르죠, 여러분은. 역풍이 부니까 이제 가다가 구브로 해안을 의지해서, 올라가다가 구브로 해안을 의지해서 무라라는 항구에 머물게 되고, 그리고 6절에 알렉산드리아행 배를 갈아탄다고 하자나요. 그러니까 즉 내 인생에 맞바람, 즉 역풍이 불어야 내가 타고 있는 이 완행 열차에서 내릴 수 있는 것을 아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배에서 내린다는 것은 그것을 그냥 덮어놓고 잊어버린다는 것이 아니죠. '내가 거쳐왔던 모든 세월들이 나를 로마로 보내기 위한, 사명을 감당케 하기 위한, 그리고 나를 구원하기 위한 하나님의 시간들이었구나.'하며 이 모든 시간들이 구속사로 해석되어져야만 내릴 수가 있는 것이에요. 그 배에서 내려 내 삶을 한 걸음 떨어져 바라볼 때 내 삶이 객관적으로 보이게 되고 그때 내 과거의 아픔과 상처, 그리고 얽히고 섥힌 감정들과 작별할 수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제 바울이 생각할 때 그 유대인들과 기독교인들 둘이 서로 안 믿자나요, 바울을. 이쪽에서는 잔멸했고, 저쪽에서는 배신자자나요. 그러니까 어디를 가도 지금 유대인들이 바울을 그렇게 잡아 죽이고자 하는 이유가 있는 거예요. 믿음이 없으니까 '니가 우리 배반했자나, 니가 우리 죽였자나.' 이러니까 바울이 겸손한 게 아니고 정말 그냥, 정말 죄수예요, 죄수. 그만큼 자기 죄에 대해서 '난 예수 믿었는데 하나님이 다 덮어 주셨자나.' 이러면 안 되는 거예요. 덮어주셨어도 당한 사람은 죽을 때까지 난리를 치는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 남편이 바람 피웠는데 부인이 난리친다.' 그거 죽을 때까지 감당해야지 '한 번 했으면 용서해줘야 되자나.' 그딴 얘기는 자기가 하면 안 되는 거예요. 이쪽에서 용서를 해줘야지. 그러니까 잘못했는데 내 죄를 깨닫게 되면 죽을 때까지 내 죄를 지고 간다는 생각을 해야 되는데 '아니 예수 믿으면 다지 왜 맨날 과거를 들먹거리냐.'고. 그런데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하는 전공이 과거를 들먹거리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거를 '그래서 나는 이혼하고 못산다.' 이러시면 안 되는 거예요. 과거 들먹거리는 게 전공이기 때문에 '아 또 시작됐구나. 그러면 내 죄를 또 봐야 되는구나.' 그렇게 좀, 그게 작별인 거예요. 지금 온 교회가 양육 중이에요. 내 삶을 말씀 앞에 내어놓아서 죽음의 공회로 달려가고 있는 쳇바퀴처럼 도는 과거의 아픔에서 이제 내려서 새로운 배에 올라타기를 기도합니다. 그런데 그 내가 타고 있는 이 과거의 배에서 내리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은 역풍을 허락하신다는 거예요, 무라에서. 그러니까 거기에서 또 내가 못 타니까 율리오를 허락해서 알렉산드리아행 배를 만나서 다시 오르게 하자나요, 그렇죠? 내가 작정되어서 가는 게 없어요. 그냥 내 죄만 보고 배에 타고 있으면 돼요, 그렇죠? 그런데 지나고 보니까 에베소 위까지 가는 게 아드라뭇데노 종점인데 거기까지 안 가고 지금 이제 구브로 해안을 다시 의지하려고 이쪽으로 턴했으니까 그렇게 별로 이렇게 손해가 없이 정확한 지점에서 바꿔 타게 하셨다는 거예요, 지금. 끝까지 북쪽으로 안 가고. 이 배는, 알렉산드리아 배는 중간에 여기 저기 서는 게 아니라 지중해를 가로질러서 로마로 지금 서진하는, 직행하는 배인 거예요. 이 목적지가 아드라뭇데노가 아니고 로마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알렉산드리아에서 출발해서 로마로 가는 배, 무려 276명을 태우고 수많은 곡식을 실을 수 있는 대형 선박인 거예요. 목적지가 완전히 사명, 로마로 가는 배에 올라탔다면 이제 정말 하나님께서 고생 끝, 행복 시작해야 되는데 여전히 바람이 거세고 배가 더디 가는 거예요.
7 배가 더디 가 여러 날 만에 간신히 니도 맞은편에 이르러 풍세가 더 허락하지 아니하므로 살모네 앞을 지나 그레데 해안을 바람막이로 항해하여 8 간신히 그 연안을 지나 미항이라는 곳에 이르니 라새아 시에서 가깝더라
-> 7절, 8절입니다.
그래서 거기서 이제 그레데를 이렇게 돌면 거기 살모네가 있고 지금 이제 그 니도, 그쪽 니도 맞은편에 이르러서 그 다음에 이제 미항까지 나오는 거예요, 구브로 섬 거기 안에. 그걸 이제 다시 좀 찾아보세요. 배를 옮겨 탔는데 여전히 힘든 거예요. 풍세가 허락하지를 않아요. 죽음의 공회에 내려서 사명의 배를 탔는데, 내 인생의 목적이 행복이 아니라 거룩으로 목적지가 달라졌는데 여전히 결혼이 안되고, 취업도 안 되고, 먹고 살 것도 안 되고, 여전히 아프고 그냥 힘이 들어요. 여전히 아픈 사람은 아프고, 더디 가는 것 같고. 돌아보면 제자리고, 돌아보면 제자리고 그래요. 배가 더디 갔다는 말은 풍랑이 너무 거세어서 지그재그로 갔다는 뜻이에요. 그런데 지그재그로 갔지만 조금씩 로마에 가까이 가고 있다는 거죠. 그러니까 목적지가 사실 로마와 다른 북쪽 방향이었자나요, 그 위에. 그런데 지금 이 서쪽, 그러니까 목적지가 이제 바르게 설정이 되니까 아무리 거세고 힘들어도 지금 한 발자국씩 가고 있는 거예요. 성도 인생이 이래요. 늘 제자리인 것 같지만 우리가 제대로 목적지가 바른, 지금 이제 우리들 호에 타고 있으면 나선형 계단처럼 내가 볼 때는 늘 제자리 같은데 남이 보면 조금씩, 조금씩 올라가고 있는 거예요. 할렐루야. 오늘 제목 항해는 헬라어 아나고인데 낮은 곳에서 높은 곳으로, 그러니까 물결을 거슬러 올라가야 되니까 얼마나 그냥 그 간신히 갈 수 있는, 그러니까 성화되는 길, 거룩한 길이 간신히 가는 거지. 여러분, 토끼하고 거북이하고, 거북이가 간신히 가. 그런데 누가 이겼어요? 거북이, 거북이를 생각해야 되는 거예요. 그런데 감사한 것은 내가 바람을 일으킬 필요도, 노를 저을 필요도 없고 그냥 가만히 타고 있으면 그냥 가는 거예요, 목적지에. 그러니까 그 배에, 알렉산드리아 배에 타는 게 중요한 거예요. 아드라뭇데노에서 내려서, 그 배에서 내려서 타야 되는 거예요.
7절에도 간신히, 8절에도 간신히, 간신히 정말 너무 예수 믿는 게 간신히, 간신히. 그런데 '예수 이렇게 믿는 게 힘들어?' 하나님 원망하는 거예요. '이 결혼이 왜 이렇게 힘들어. 아이 낳고 사는 게 왜 이렇게 힘들어.' 그런데 주목해서 봐야 될 말이 뭡니까? 간신히가 아니고 간신히 이르렀다자나요. 할렐루야. 이르렀다를 봐야죠. 거북이가 이긴다니까요. 토끼는 빨리 가다가 자자나요. 글쎄 말이에요. 우리들교회 목사님 중에 새벽 기도를 자다가 안 나오신 분이 처음으로 19년만에 한 번 생겼어요. 그러니까 토끼가 자다가 잊어버렸어. 주여. 그러니까 그 길이 힘들고, 좁고, 눈물 마를 날이 없을지라도 우리의 목적지만 바르게 잡는다면, 이제 간신히 이를지라도 말씀을 붙들고 간다면 마침내 마침표를 찍게 되는 줄 믿습니다. 모든 것이 무너져 회복 불능의 상태에서 이제 거슬러 가야 되기 때문에 더디지만 세상이 보기에는 아름답지 않죠. 오늘 우리 집사님 간증, 장애 아이를 데리고. 그렇지만 그 아름답지 않더라도 하나님 보시기에 그 아름다운 미항에 우리는 결국 이르게 될 줄 믿어요. 오늘 미항에 도착했자나요. 그냥 타고만 있었더니, 왜 미항이라고 거기 적었겠어요, 아름다울 미 자. 사람들은 그게 너무 조롱해서 미항이라고 썼다 그래요. 그런 게 어디 있어요. 우리의 항해는 너무 남들이 보기에 아름답지 않아도 하나님이 아름답다고 미항이라고 해 주실 줄을 믿습니다. 그래서 이제 어떤 우리 청년이 상사가 '너는 우리들교회에 와야 결혼하겠어.' 그랬더니 그 한 마디에 왔대요. 딱 와서 청년부에 등록을 했는데 다들 '양육을 어디까지 받으셨냐고 물어보니까 '아. 연애하려면 양육을 받아야 되겠네,' 그래서 양육을 받았더니 신기하게 7, 8주만에 데이트 신청이 들어왔대요. 그렇지만 딱 거절했대요. '면허증을 따려면 제대로 따야지.' 그래가지고 양육 다 받았더니 그 자매가 기다리고 있다가, 그래서 만나서 결혼하고. 그 다음에 이제 자기가 목장을 해서 집이 있어야 되는데 2순위라서 청약할 수가 없는데 목장에 물어보니까 '경험 삼아 한 번 넣어보라.'고 그랬더니 또 딱 당첨이 됐어요. 우리들 호에 타기만 했더니 결혼도 하고, 보금자리도 마련하고, 그냥 되는 일만 있는 부목자님의 나눔을 새벽 기도에서 들었습니다. 이야말로 작정된, 끌려가는 인생 아닌가 싶어요. 적용해봐요.
[적용] 우리들교회로 데려다 준 역풍은 무엇입니까? 간신히 간신히 가고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아름다운 목적지 미항에 이를 줄을 믿습니까?
말씀 맺어요. 성령의 항해는 작정하는 것이 아니라 작정 되는 것이에요. 그런데 함께 배에 탄 우리가 있다고 그랬어요. 우리가 있고, 친구가 있고, 백부장 율리오가 있고, 276명의 흉악한 죄수들이 있어요. 그런데 그 죄수들이 우리의 목적이 돼야 되겠는데, 우리는 우리하고, 친구하고, 율리오 밖에 모르자나요, 그렇죠? 그 죄수들 섬기라고 같이 배에 타게 했는데, 그러니까 너무나 목적을 모르니까 그 참 목적지 사명을 알게 하려고 여러분들에게 역풍을 허락하는 줄 믿습니다.
목장 모임 (영화 관람으로 대체되었습니다.)
기도제목
엄마 피부병 때문에 아직까지도 많이 힘들어 하시는데 속히 회복되기를
아빠가 주일 성수할 수 있는 직장으로 인도해 주세요.
부모님 연로하신 데 건강하시고 안녕하시도록 주님 보호하여 주시옵소서
산발적으로 이곳 저곳에 번갈아가며 올라오는 가려움증과 상처가 낫도록 중보기도 부탁드립니다.
여동생이 대기업 다니는데 결국 퇴사 결정하고 일본으로 대학원 진학을 선택했는데 오는 길 가는 길 주님이 동행해주시고 지켜주세요.
여동생이 선택한 그 곳에 하나님의 뜻이 있기를 진심으로 기도합니다.
남동생 발령이 속히 날 수 있도록 하나님의 인도를 바랍니다.
가족구원도 인생의 종착역이라는 믿음으로 무시로 기도할게요.
매일 가는 직장에서 즐거운 마음으로 태도로 일하고 감사히 여기고 저 역시도 늦기 전에 안정적이고 편하게 일할 수 있도록 진로탐색과 준비를 하고 도전하도록
나이가 벌써 많이 먹어서 그런가 걱정이 돼서 먹고 살수 있도록 안정된 직장 편안한 직장에서 일하고 온전한 십일조 신앙을 지키도록 기도해 주세요.
목장모임 사모하고 목원들 각자가 말씀 붙들고 하루를 잘 살아내고 만날 수 있도록 건강과 학업과 아이디어와 프로젝트에 기름을 부어주세요.
미혜
일상을 살면서 죽음의 공회 아드라뭇데노 행을 자주 승선합니다. 원망, 상처, 자기 연민, 피해의식에 갇혀 내리지 않고 왕복합니다. 그게 습관이 되어 편할 때가 있는 저입니다. 이제는 크고 작은 역풍의 사건을 만날 때마다 하나님 말씀 의지하여 과거의 나에서 매순간 잘 내릴 수 있도록
늙어가시는 부모님을 보면 인간적인 연민과 걱정에 마음이 아픈 요즘인데 일평생 수고한 부모님의 삶 또한 하나님의 선물임을 알고
슬퍼하기보다는 아빠의 구원과 엄마의 영적 회복을 위해 기도하기를
회사에서의 제 역할 잘 감당하고 회사의 모든 상황을 성령께서 인도해 주시기를
성령님께서 우리 목장 식구들의 인생의 선장 되어 주셔서 버거운 일상의 항해를 잘 할 수 있기를
민희
하나님의 아들 최 관 우 형식적이지만 그 마음을 고백하는 세례를 받도록 하나님 시간을 제발 허락해주시고 시간을 관우가 내줄 수 있는 마음도 주시고 세례를 통해 삶이 정착되고 안정되며 풀려가는 경험을 하게 하나님 기복적이지만 축복도 주시고 영적 축복도 함께 주세요.
관우(남자친구)가 삶의 중심이 예수님을 통한 하나님을 바라보는 신앙이 절대 퇴색되지 않고 점점 그 사랑이 진해지고 깊어지는 은총을 주시길, 살아서 역사해주시길, 재정에 지혜를 주시길
일이 다음주까지는 너무 바쁩니다. 처음하는 일인데 상사가 쪼아서 버거운 부분들이 있습니다. 그래도 상처받지 않고 차분하게 잘 해내길 지켜주세요.
면역력이 약해지는 거 같은데 건강에 대해서도 돌봐주시길
일도 중요하지만 내 몸을 잘 돌보며 건강하게 갈 수 있기를
결혼준비 잘 해 나가길 - 드레스 고르기, 웨딩 촬영, 신혼여행이랑, 집 평수를 넓힐지에 대해서도 지혜주시길
엄마와 예비 시어머님 건강에도 마음에도 평안함이 함께 머물기를 기도합니다
예선
그날 주시는 말씀으로 말씀이 앞장서는 하루를 잘 살도록
나에게 누가도, 아리스다고도, 친구들도, 나에게 친절을 베푸는 율리오도 함께 해 주신 이유는 그 죄수들을 섬기라고 인 것을 기억하며 감사하며 가도록
역풍으로 우리들교회로 인도해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때마다 만나는 역풍에 거스르려 애쓰지 말고 간신히 간신히 가는 게 인생임을 알고 목적지로 잘 인도될 수 있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