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925 성령의 원함
사도행전 26:24-32
1947년에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라는 노래가 만들어져서 북한에 가보니까 거기서도 너무 너무 열심히 불리는 거예요. 이 정성 다 해서 통일 이 나라 살리는 통일 서로가 너무도 간절히 통일을 원하는데 통일에 대한 그 원함의 목적과 방향이 너무 다른 거예요, 이 두 나라가. 서로 상대방 죽이고 나만 사는 이런 통일을 원하는 거예요. 우리도 마찬가지로 똑같죠. 예수는 죽이고 나만 사는 소원이 얼마나 많은지 몰라요. 나는 죽고 예수는 사는 통일을 원해야 하겠는데 마찬가지로 우리의 소원을 부부나 자녀나 가족이나 교회나 나라 안에서 성령으로 품어야 최고의 소원이 될 것입니다. 오늘은 성령의 원함에 대해서 생각을 해볼게요.
1. 참되고 온전한 말을 해야 합니다. (24-25절)
24 바울이 이같이 변명하매 베스도가 크게 소리 내어 이르되 바울아 네가 미쳤도다 네 많은 학문이 너를 미치게 한다 하니
-> 이같이가 뭐죠? 지난 주일에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하는 하늘의 소리를 인정하여서 '맞습니다.'하고 거스르지 아니하고 순종해서 피 바람이 불 다메섹으로 가서 은혜의 도시로 변화시킨 간증을 했자나요. 그런데 그걸 듣고 그들은 바울을 죽이고자 했어요. 그런데 바울이 굴하지 않고 성경대로 이루어진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이 세상의 빛이라는 데까지 증언을 딱 했는데요. 아직 다 끝나지 않았는데 그때 베스도가 큰 소리를 질러서 바울의 말을 끊었어요. 바울아 네가 미쳤도다 네 많은 학문이 너를 미치게 한다 '도저히 더 들어줄 수가 없구나. 거기까지.' 이 미쳤도다로 번역된 마이네는 미치다, 헛소리를 하다라는 의미를 지닌 동사의 현재형이거든요. 그러니까 베스도가 바울의 현재 상태를 정신 이상 상태로 평가하는 거예요. 그것은 베스도가 죽은 사람의 부활과 또 부활하신 예수와 바울이 나눈 대화, 즉 '사울아 사울아 니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이게 완전히 귀신하고 얘기를 하는구나.' 정신 나간 사람으로 여겼어요. 실제적이고 행정적인 일에 익숙했던 베스도로써는 바울이 자신이 보기에 하나도 중요하지 않은 문제를 가지고 지금 유대인들의 반감만 일으키고 있는 이상한 사람이구나 결론을 내리고 많은 학문이 너를 미치게 한다고 했는데 '너를 바꾸다, 너를 돌려놓았구나. 방대한 구약 성경의 박식함으로 니가 실성했구나.' 이겁니다. 그래도 이제 긍정이든 부정이든 베스도가 깊은 인상을 받은 건 분명해요. 그게 안 들리면 이런 얘기조차도 못하자나요. 욕하는 사람은 항상 가능성이 있어요. 가만히 있는 사람이 제일 문제예요. 사실 바울은 시대의 석학 가말리엘의 제자 아니겠습니까? 예수께서도 요한복음 10장 20절에 보면 이제 미친 자로 취급이 되셨어요. 그런데 저도 평생 교회를 다녔는데 주님을 만나고 나니까 저 보고 '광적으로 믿지 말라.'는 얘기를, 그게 미쳤다는 얘기자나요. 저희 시어머니도 저보고 '예수에 미쳤다.' 이 얘기를 많이 제가 기억이 납니다. 베스도는 이제 바울의 그 무죄를 밝혀주려고 지금 청문회를 열었는데 자기 상식으로 정신 나간 사람을 말하게 한 것 같아서 너무 창피한 거예요, 지금. 아그립바 왕과 이 모든 유대인들, 관료들. 그래서 너무 부끄러운 거 같아요. 무엇이 그렇게 더 이상 들을 수 없게 부끄러웠을까요? 자기 상식으로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자체가 미련한 것이라고 생각이 되는 거예요. 고린도전서 1장에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러고 하셨자나요. 그러니까 '이 미련한, 감히 나같이 이렇게 지식인 앞에서 이렇게 미련한 미신 같은 얘기를 그렇게 하네.' 도저히 참을 수가 없는 거예요. '니가 미쳤다.'고 하는 베스도의 말에 바울이 뭐라고 대답합니까? 잘 들으세요.
25 바울이 이르되 베스도 각하여 내가 미친 것이 아니요 참되고 온전한 말을 하나이다
-> 아주 극존칭으로 각하라고 그래요. 신약 성경에서 각하라고 부르는 사람은 데오빌로, 벨릭스, 베스도 세 분 한테만. 그러니까 이렇게 극존칭을 쓰면서 정중하게 말하는데 미친 사람은 이렇게 안 해요. 바울은 자신이 미쳤다는 비난에 대해서 '그게 아니고요.'하고 부정하는 게 아니라 '그러게요.' 이것도 아니고요, 그러면 자기가 미쳤다는 평가를 인정하는 게 되니까. 그것도 아니고, 이것도 아니고 어감도 중요하고, 지금 그 사람들 앞에 종과 증인으로 서 있기 때문에 그런 사명이 있는 사람은 인정할 때와 부인할 때를 딱 알아요. 어감도 알아요. 소리의 높낮이도 알아요. 그러니까 '그러게요.'하면 여기서는 안돼요, 그렇죠? 그렇지만 자기가 미치지 않았다고 얘기를 하는 거자나요. 그러니까 이게 아주 뉘앙스도 굉장히 중요해요. '제가 미치지 않았습니다.', '날 어디다 보고 미쳤다고 그래. 나 미치지 않았다니까요?' 이렇게 말투도 굉장히 중요합니다, 구원에 관심이 있는 사람은. 남편이 그렇게 막 욕할 때 가만히 있으면서 '난 한 마디도 안했다.'고 그러는데 대드는 거보다 백 번 더 얄미워. 그리고 '나는 한 마디도 안 했다.' 어감부터 이상해. '한 마디도 안 했다.' 그거는 맞아야 돼요. 진짜 그래서 싸우는 거예요. 사람 열불 나게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항상 어감이 중요해, 구원에 속한 사람들은. 그러니까 사명이 있는 사람은 인정할 때, 부인할 때를 잘 아는데 미친 게 아니라 미친, 헛된 말의 반대인 참되고 온전한 말을 선포하는 것이라고 분명히 말합니다. 진리에 대해 온전한 정신으로 하는 말인데요.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우리가 개념으로 이해하려면 이건 인간의 경험을 뛰어넘기 때문에 통념으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미련한 거예요. 하지만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은 실제로 일어난 일이자나요. 진짜예요. 참이에요. 그걸 온전한 정신으로 바울이 만났어요. 또렷이 기억해요. 허다한 증인들이 한 목소리로 다 고백해요. 그러니까 지금 바울이 전하는 복음은 미친 사람의 헛소리가 아닌 거예요. 참되고 온전한 말인 거예요. 바울이 이렇게 힘든 시간을 거쳐가면서 더욱 그 부활의 실제를 지금 경험하게 됐는데요. 이제 마지막 변론이 끝나는 거예요, 지금. 다시 이렇게 바울의 인생을 되짚어 보면 20장부터 26장의 일곱장의 기록들은 우리가 전도하며 거절당할 때 일고, 또 읽어야 하는 교과서가 되었어요. 바울은 1, 2, 3차 전도 여행을 통해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래서 20장에 그 사람들의, 이방 교인들의 구제 헌금을 모아서 예루살렘 교인을 위로하러 가기로 했자나요, 다 반대했지만. 그런데 가자마자 21장에 잡혔죠. 그리고 22장부터 26장까지 천부장과 유대인들을 향해서 전했어요. 산헤드린 공회에서 전했어요. 벨릭스에게 전했어요. 또 벨릭스와 드루실라에게 전했어요. 베스도에게 전했어요. 아그립바에게 전했어요. 계속 같은 복음을 전하고, 또 전하고. 그런데 아무도 안 믿어요. 저, 바울의 선교가 13장부터 선교를 나가서 19장까지 7장동안 70여곳을 전도하는 아주 혁혁한 성과를 올렸죠. 그런데 20장부터 26장까지는 복음을 전해도 아무도 안 믿는 얘기를 또 하고, 또 하고 하면서 똑같이 7장이에요. 자, 열매 7장, 감옥 7장. 이유가 있겠죠. 선교는 우리 사도행전에 행이 다닐 행자 자나요. 늘 다니면서 선교를 하는 때도 있는데, 그러니까 학교 짓고 교회 세우고 으쌰으쌰 이럴 때도 있어요. 그런데 다녀야만 신령한 선교가 아니라는 거죠. 박해받고 갇혀 있는 그 시간에 바울은 한 사람에게, 자 아무도 안 듣는 이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바울은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리고 끝없는 반대를 경험합니다. 이렇게 끝없이 안 되는 거, 안 되는 정도가 아니고 날마다 죽이려는, 목숨 걸고 죽이려는 살해의 위협을 느끼면서 7장이나 왔자나요. 그러면서 저는 바울은 자신의 죄성에 대해서 점점 깊이 직면하게 되었다고 생각을 해요. 그래서 이 가시채의 뒷발질 얘기도 처음에 9장, 22장 간증에 안 나왔어요. 마지막 간증 26장에 나왔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고난을 점점 더 깊이 이해하게 됐고, 그러니까 그 7장의 찬란한 선교의 시간보다 7장의 박해받고 갇혀 있던 이 시간들이 바울을 세계적인 전도자가 되게 하셨는데요. 왜냐하면 바로 이때부터 로마의 감옥에서까지 바울이 천국 소망이 더 확실해지면서 하늘의 언어를 땅의 언어로 풀어서 자신의 약함을 내어 놓는 이 주옥 같은 13개의 여러 서신서들을 썼습니다. 간증을 사전으로 찾아보면 범죄의 관계에 있는 증인이라고 해요. 그러니까 이 죄 얘기가 빠지면 안 되는 거예요, 간증에. 그런데 범죄, 죄 얘기는 하나도 없이 높아진 것을 내놓으면 하나님이 안 보이는 거예요. 역함과 죄됨과 추함을 이제 은혜로 구원해 주셨다는 죄고백을 하는 것이 간증인데요. 그런데 그 시간에 고린도전서 9장 26절에 보면 그러므로 나는 달음질하기를 향방 없는 것 같이 아니하고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 것 같이 아니하며 이런, 우리 요새 큐티 했자나요. 향방이 이제 잡혔다는 거예요. 갇혀 있으면서. 그러니까 우리의 통일도, 나라의 통일도, 부부간의 통일도 향방이 없으면 안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참되고 온전한 말은 이런 간증을 말하는 거예요. 하늘에서 보이신 것을 거스르지 않는 이 '맞습니다.'의 순종의 말이 참되고 온전한 말이에요. 저 또한 하나님은 저의 연약함을 정말 끊임없이 보게 하셨어요. 남편이 갔을 때는 성령 충만해서 뭔가 다 할 것 같았지만 저는 그때도 그런 기도를 했네요. 성경을 봐 왔자나요. 인간이 100% 죄인이라는 거 알아요. 저는 정말 목사 할 사람이 아니자나요. 그러니까 어떻게 사역을 할지도 모르겠는데 머리 끝부터 발 끝까지 정말 목사하고는 안 맞아. 지금도 어디만 가면 저 보고 '사모님, 사모님.' 그래요. 그러니까 집사님들도 저 만나기만 하면 그렇게 그냥 목사님이라고 자기도 모르게 안 나와. 그러니까 나는 그게 아닌데, 언제 무너질지 모르니까 '내가 혹시 무너지게 되면 저를 붙들어 달라.'고 제가 처음부터 그렇게 기도를 했어요. 그렇게 저에 대해서 항상 자신이 없었습니다. 이렇게 주의 일을 한다는 것이 날마다 감사하고, 날마다 자신이 지금도 없어요. 그러니까 남편이 가기 전에 13년 동안 갇혀 있던 것도 저의 힘이 아니었고요. 그 후에 35년이 지났는데 그때보다 훨씬 더 갇혀 있는 삶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남편 갈 때부터 덤으로 사는 인생인데 여기까지 왔어요. 굉장한 자유함이 있지만 저에 대한 자신이 없으니까, 그런데 목회를 하게 하시니까 저는 이것이 바울처럼 갇혀 있다는 생각을 날마다 해요. 그래서 이런 본문이 너무 이해가 되는 거예요. 한마디로 창살 없는 감옥이었기 때문에 그 감옥에 있으니까 죄에?? 소원에 있는 이 내면의 죄를 정말 날마다 직면하게 하셨어요. 누가 저보고 죄가 없다고 그러는데 그런 기가막힌 말을 하면 안 되는 거예요. 정말 죄가 없는데 어떻게 회개를 하겠습니까. 그러니까 고린도전서 9장 27절에, 여러분들 큐티했으니까.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 이게 이 때 쓴 거예요, 갇혀 있을 때. 그 막 승승장구할 때 쓴 얘기가 아니고. 그러니까 저 또한 알다시피 가장 제가 불쌍한 과부의 원형이자나요, 젊었을 때. 그러므로 그때부터 누구를 만나고, 여행을 하고, 무슨 안식년을 하고 그럴 수가 없었어요. 그냥 너무 조심스러워서 저는 이제 갇혀 있을 수밖에 없었지만, 그러나 지나고 보니까 갇혀 있었기 때문에 지금 쉬지 않고 책이 나왔다고 생각이 듭니다. 우리 모두 주 안에 갇힌 자가 되어서 참되고 온전한 말을 해야 될 줄 믿습니다.
[적용] 여러분은 예수 때문에 미쳤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까? 아니면 거기까지 하면서 막은 적이 있습니까? 참되고 온전한 말인 약함의 죄인 간증을 하신 적이 있습니까?
2. 담대히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26-28절)
우리는 늘 위축되자나요. 늘 담대히 말할 수 있어야 돼요. 이방인인 베스도가 전혀 이해를 못하니까 바울은 그래도 유대인의 피가 흐르고 있을 뿐만 아니라 유대인의 모든 풍속과 문제의 전문가인 유대인의 왕, 아그립바 왕에게 말합니다.
26 왕께서는 이 일을 아시기로 내가 왕께 담대히 말하노니 이 일에 하나라도 아시지 못함이 없는 줄 믿나이다 이 일은 한쪽 구석에서 행한 것이 아니니이다
-> 원어에는 이게 아그립바에게 하는 게 아니고 베스도에게 하는 말이에요. 그래서 2인칭으로 쓰였어요. 그러니까 그동안 구약을 모르는 천부장 등에게 전할 때는 너무 답답했는데 성전에 보호자이고 구약과 유대교를 잘 아는 왕에게 전하게 되니까 그 1절부터 나오는 다행이라고 그랬자나요, 이 마카리우스. 다행이다, 복이다. '내가 이제는 담대히 말할 수 있어요. 지금까지는 모르는 사람들한테 얘기를 했는데 '예수의 죽으심과 부활이 비밀스럽게 어느 한구석에서 일어난 게 아니니예요. 예수님이 다 알게 죽으시고, 다 알게 부활하셨지만 안 믿고, 못 믿어요.' 그러니까 예수님을 모르니 하나님을 높일 수가 없죠. 그러니까 참되고 온전한 말은 하나님을 높이는 말이에요. 그런데 나를 높이는 말이야 말로 미친 말인 거예요. 헛된 말인 거예요. 악하고 음란한 이 세상에서 나를 높일 말이 무엇이 있겠어요. 그런데 내가 주님을 박해했어요. 나의 약함과 추함을 은혜로 덮어 주셨다고 간증하면 세상이 속한 사람들은 무시를 한다고요. '아이고 쟤가 가난하대, 다 뺐겼대, 당했대.' 이렇게 하면 딱 찌질하게 보는 거예요. 그러니까 위엄을 갖춘 대단한 데서 이 초라해 보이는 바울이 이렇게 얘기를 하니까 '미쳤다.' 이러는 거예요. '너의 성경공부가 너를 미치게 하는구나.' 여러분들 교회에도 있자나요, 너무 대단한 직분과 부자가 딱 와서 하나도 믿음이 없어도 '당신 미쳤구나.' 이런 얘기 아무도 못해요. '교양이 굉장히 있으시네요.' 이렇게 얘기해요. 가난하면 '정말 미쳤네.' 그래서 가난한 자가 복이 있는 거예요. 부자가 하늘 나라 가기가 낙타가 바늘 귀로 들어가는 것보다 어려운 거예요. 말을 못해요, 부자들에게는. 다들 예수를 전하는 것도 다 어려워해요. 맞죠? 뭐 그런 걸 또 어떻게 하겠어요. 부자는 또 어려워하시기 바래요. 그러니까 우리도 '큐티가 다냐? 니가 미쳤구나.' 이 얘기도 많이 들어요. 7장 동안 세계적인 최고의 복음 전도자인 바울이 설교를 해도 교회를 다니는, 하나님을 믿는다는 대단한 이 대제사장, 유대인 왕, 총독 아무도 안 믿자나요. 그런데 내가 믿는 게 이거 기적 중의 기적 아니겠습니까? 어저께 결혼식에 처음 오셔가지고 딱 그냥 오늘 오셨어요. 일어나셨어요. 인사까지 했어요. 분명히 등록도 하고 가셨을 거예요. 이거 기적 아니예요? 아그립바 왕도 안 믿는데 이분이 와서 믿었다고. 여러분 '내가 베스도 총독보다 낫구나, 아그립바 왕보다 낫구나.' 할렐루야. 이 대단한 석학의 얘기를 한 번 하겠는데 이어령 교수의 마지막 수업이라는 책에 부활에 대해 언급한 부분이 있어요. 이분이 참 '지혜를 갖는다는 게 얼마나 슬픈가 말이야.' 이거 인터뷰 한 거니까. '다른 생명체는 죽어도 자기 죽음이 갖는 의미를 몰라. 그런데 인간은 죽는 것의 의미를 아는 동물이야. 인간이 참 슬픈 존재인 동시에 교만한 존재라는 것이지요. 죽음을 생각하면서도 또 현실을 살아가야 하기에 모순을 안고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것이에요. 지금 참 여기까지 너무 멋있죠, 멋있죠? 그러니까 우리가 헷갈리는 거예요. 그 다음에 그런데 뭐라고 하셨나면 '환생, 부활 나는 그런 걸 아직 몰라. 기독교인이니 겉으로는 받아들이지만, 그 부분에 관해서는 사실은 낫싱(nothing)이야. 부활 안 죽어보고 어떻게 알아 낫싱(nothing)이야. 무언가 있다고 생각하면 삶이 이렇게 절실할까. 끝이라고 생각하니 절실한 거야. 나는 환생이나 부활도 삶의 양식으로 생각한다네. 내가 죽음 이후를 생각했다면 그렇게 일관되게 메멘토 모리, 즉 죽음을 기억하라고 얘기했겠나? 앞뒤가 안 맞지.'이렇게 책에 그대로 나온 얘기입니다. 지성과 영성의 대가인 이어령 교수가 생의 마지막 인터뷰에서 부활은 낫싱이라고 하셨어요. 그러니까 우리가 얼마나 분별하기 어렵습니까. 그래서 나중에 믿으셔서, 제가 생각하기에는 목장을 안 나오셔서, 목장을 좀 안 나오셔서 여기에 대한 그런 게 좀. 너무 안타까운 거죠, 이렇게 쓰셔가지고. 이 부활이라는 게. 그러니까 지성이 많을수록 참 쉽게 믿기가 어려운 거예요. 이러니 바울의 고독이 이해가 되시죠. 아무리해도 안 되는 거예요. 내 이성과 지성과 이걸로 안되는 거예요. 이제 26절까지 베스도에게 얘기하고 이제 27절에 아그립바에게 묻는 거예요.
27 아그립바 왕이여 선지자를 믿으시나이까 믿으시는 줄 아나이다
-> 바울은 아그립바에게 이렇게 얘기를 해 놓고는 '선지자를 믿으십니까?' 그러니까 유대의 왕이자, 특별히 대제사장 임명권자이자, 예루살렘 성전 관리 총책임자인 아그립바로써는 선지자를 믿는다고 대답해야지 그럼 안 믿는다고 대답해요, 유대인의 왕인데? 그런데 믿는다고 하면 이 죽음과 부활도 믿을 수밖에 없는 거죠, 지금. 자기가 선지자를 믿으면. 예수님이 선지자자나요, 그렇죠? 그러니까 그러면 유대 지도자들의 지지를 또 잃는 거예요. 그러니까 아그립바는 이 바울의 질문에 긍정도 부정도 할 수 없는 거예요. 그러니까 바울의 또 너무나 재치있는 화술로 곧 믿으시는 줄 아나이다 이렇게 퇴로를 열어 줬어요. 바울은 베스도에 의해 험악해진 청문회의 분위기와 그로 말미암아 발생한 곤경을 이렇게 아그립바 왕을 대화의 상대자로 삼으면서, 이렇게 우리가 예수를 믿으면 이렇게 교묘하게 다 이거를 비켜나갈 수도 있어야 되는 거예요. '어떻게 믿지도 않는 아그립바한테 각하라 그럴수가 있어, 베스도 보고 각하라고 할 수 있어.' 이딴 얘기를 하면 안되는 거예요. 이게 옳고 그름의 화신인 거예요. 그러면 안돼요. 그렇지만 바울이 아그립바 왕에 대해서 그 선지자들의 예언한, 선지자 중의 선지자 우리 예수님을 믿으라는 그 결단을 촉구하는 의미를 지닌 건 분명하죠. 물론 선지자이지만 하나님의 아들이시자나요. 아그립바는 유대인의 왕이에요. 그는 1절에 바울에게 말하라고 허락을 했어요. 그러니까 들으려는 마음이 있었다고요. 공부도 좋아하고 부활의 개념도 다 알고 있는데 바울보고 얘기하라고 그랬어요. 그런데 들리지가 않아요. Voice로 들리지가 않는 거예요, 이 십자가 부활이. 개념을 알지만 실제를 몰라요. 벨릭스도 들어서 양심에 찔렸다 그랬으니까 또 약간 들린 거자나요. 그런데 또 믿지는 않았어요. 그러니까 이렇게 부자하고 같은 사람들은 수 없는 기회를 날마다 놓치는 거예요. 수 없이 예배가 흘려 퍼져도. '나는 안 믿어진다.' 그러는 여기 교수도 있고, 뭐 그렇자나요. 그렇죠? 그래서 우리는 바울도 할 수 없는 일을 보여주시는 거예요. 내가 전해서 믿는 게 아니란 말이에요. 바울도 할 수 없는 일인데 왜 내가 못했다고 자꾸 자괴감을 가지시면 안 돼요.
28 아그립바가 바울에게 이르되 네가 적은 말로 나를 권하여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려 하는도다
-> 아그립바는 이 바울의 참되고, 잘난 척하지 않자나요. '내가 핍박해가지고 사울아 사울아 어찌하여 나를 핍밥하느냐.' 이런 간증을 다 했어요. 정말 죄 되고, 약하고, 추한 간증을 다 했어요. 바울의 참되고 온전한 말의 간증을 듣고 아그립바는 당황했다고 봅니다. 다 맞는 말만했어요. 그러면 왕의 자리가 그렇게 쉽게 반응해가지고 영접하고 그렇게 될 수 없는 위치자나요. 우리 다 이해해요. 그것이 아그립바의 걸림돌이에요. 그러니까 대답하지 않고 논점을 딱 바꾸죠. '니가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냐?' 그 당시 그리스도인은 아주 무시 받는, 아주 그런 무시를 할 때 그리스도인이라고 그래요. '저 예수쟁이, 저 예수쟁이. 너 나 예수쟁이 되게 하려고 그래? 바울 너의 질문에 대한 대답과 상관없이 니가 아무리 권하고 설득해도 나는 너처럼 예수쟁이가 될 마음이 없어.' 벽을 딱 쳤어요. 누가 그때 예수쟁이가 되겠어요. 예수 믿으면 지금 재산, 권세 다 뺏기는데요. 그러니까 내가 설득이 됐어도 그 적용이 안되는 거예요. 작용을 할 수가 없어요. 결국 지금 아그립바가 바울의 말을 잘 들었어도 결국 누구 눈치를 보는 거예요? 유대 지도자들 눈치를 보는 거예요. 정치인들도 자기 생각을 가졌어도 다 눈치를 봐요, 지금 보니까. 그러니까 베스도나 아그립바나, 여긴 로마 총독이고 저기는 유대인의 왕이니까 굉장히 인정받는 위치, 탑에 있자나요. 그 탑에 아무리 내가 믿었고 이해가 됐어도 그 인정의 탑이 흔들리는 것 자체를 견디지 못하죠. 탑이 높으니까 더 그렇습니다. 그러니 속으로 설득이 됐다 해도 복음을 받아들일 때 걸림돌이 있는 사람이 참 많아요. 후에 아그립바는 굉장히 호의적이었다는 그 얘기는 들었어요. 그런데 우리는 자존심 때문에 '내가 이런 자리에 있는데 어떻게 저 조촐한 노인의 얘기를 들어? 어떻게 여자 목사의 얘기를 들어?' 뭐 이런 사람이 있죠. 그러니까 아무리 들어도 들어오지 못하는 거예요. 그것이 7장 동안 계속된 얘기였어요. 이런 일을 저도 수 없이 겪었습니다. 사실 바울은 지금 유대 지역에서 가장 높은 사람들 앞에서 지금 이제 심문을 받는 상황이에요. 자기 변호를 해야 돼요. 무죄를 주장해야 돼요. 고소를 반박해야 돼요. 그런데 살펴본대로 바울은 계속 자기 간증만 했어요, 7장 동안. 그리고 그 중심 주제가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부활이에요. 그런데 그것이 다른 것 다 해도 그것만 안 하면 좋겠는데 유대인 대표인 아그립바에게는 그게 거리끼는 것이고, 이방인 대표인 베스도가 보기에는 미련한 거예요. 그러니까 바울이 자기 무죄를 밝히기만 원했더라면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구지 말할 필요가 없는 거예요. 그런데 바울은 이 걸림돌이 될 걸 뻔히 알면서도 계속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계속 얘기를 한 거예요. 적용해보세요.
[적용] 복음이 나에게는 미련한 말입니까? 걸림돌입니까?
3. 나처럼 되라는 것입니다. (29-32절)
29 바울이 이르되 말이 적으나 많으나 당신뿐만 아니라 오늘 내 말을 듣는 모든 사람도 다 이렇게 결박된 것 외에는 나와 같이 되기를 하나님께 원하나이다 하니라
-> 하나님께 원한다는 게 원함의 원어예요. 원함은, 나의 원함이라는 거는 원함이 아니예요. 하나님께 기도하는 거, 하나님께 기도하는 게 원함이라고. 바울은 왜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이렇게 증언을 해요? 자기 말을 듣고 있는 모든 사람들이 자기와 같이 되기를 하나님께 원하는데, 그런데 어떻게 그렇게 '나처럼 되라.'고 할 수가 있죠? '나처럼 되라.' 너무 교만해 보이지 않아요, 여러분? 자 여러분, 1부, 나처럼 되라고 여러분들은 말할 수 있어요? 나처럼 되라고 말할 수 있어요? 역시 학습이 됐네. 컨닝이 됐네, 그냥. 1부 때는 '아니요.' 이랬는데. 이 말은 바울을 모델로 삼아서 바울같이 되라는 말이 아니예요. 바울이 삶에서 본이 되어 잘 살았기 때문에 나같이 살라고 한 게 아니라고요. 그런데 우리는 그럼 왜 바울처럼 그렇게 말하지 못할까요? 전자동으로 내 행위를 생각하는 거예요. '나는 그렇게 나처럼 살라고 못해.' 여러분 요셉이 '나처럼 되라.'그러면 수긍이 되죠? 그런데 따라갈 수가 없어요. 나처럼 되라고 그러는데 따라갈 수 없어, 모델은 되지만. 그런데 유다가 나처럼 되라고 하면 수긍이 안돼. 그런데 따라갈 수 있겠다는 생각은 들어요, 하도 유다가 찌질하니까. '아, 따라갈 수 있겠다.' 왜죠? 유다가 잘난 것이 무엇이 있어요. 인간적으로는 며느리와 동침해서 아들까지 낳았는데 어떻게 유다가 '나를 따르라.' 그러겠어요. 그러나 그 아들은 예수님의 직계 계보에 찬란하게 올라갔습니다. 이 하나님 나라 전하는 것은 도덕적으로 옳고 그름이 아니라는 거예요. 세상에서 잘돼서 흠 없는 나처럼 정직하고 의롭게 나처럼 살라는 게 아니고요. 세상에서 밑바닥을 살아서 나같이 사세요.'가 되는 거예요. 그만큼 너무나 바울이 자기의 죄가 천인공노할 죄인데 하나님이 구원해 주셨자나요. 하나님 나라를 맛보았다고요. 맛보아 아니까 그 하나님 나라에 초대하고 싶어서 '나처럼 되라.'고, '나같이 되라.' 유다가 며느리가 믿음으로 행한 일임을 알고 '그는 나보다 옳도다.'했자나요. 그러고나서 이 세상의 가치관에서 천국을 경험하니까 그때부터 유다는 뭘 했겠어요? 그 조롱 받는 며느리 편을 들었겠죠. 유다도 천국 갈 때까지 십자가 짐이었겠죠. 그 당시에 '그 며느리가 옳다.' 이거 누가 알아듣겠습니까? 자기하고 임신해서 아이를 가졌는데 그 며느리를 '옳다.'고 그랬다고요. 그런까 우리가 누군가를 옳다고 해주는 거는 십자가 짐 같은 고생이에요. 우리는 늘, 우리는 그냥 이 편 들었다, 저 편 들었다 이러자나요. 예수님의 직계 조상이 되려면 적어도 이 정도 역할을 해야 하는가 봐요. 그래야 천국을 보여주게 되니까요. 유다는 그냥 늘 조용해요. 말이 없어요. 그런데 결정적일 때 늘 중재자 역할을 하고, 그러니까 거기서 예수님이 오게 되는 거죠. 그러니까 우리의 상식으로 천국은 가는 곳이 아니예요. 유다처럼 이렇게 무너져봐야 보이는 게 있어요. 이 세상과 비교가 안되는 천국을 봤기 때문에 '나처럼 되라.'고 부르짖는 것이에요. 내가 받은 생명이 너무 감사해서 나처럼 되라고 하는 것이지 내가 너무 의롭고 좋은 일 많이 해서, 자격과 공로가 있어서 나처럼 되라고 하는 게 아니예요. 내가 싸우고, 돈 없고, 못되고, 아프고, 무식해도, 도박을 하고, 경매를 하고, 바람을 펴도 받은 은혜가 있으면 나처럼 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총리 요셉이 하나님의 용서를 처절히 깨달았겠습니까? 며느리와 동침한 유다가 하나님의 용서를 처절하게 깨달았겠습니까? '나처럼 되라.'는 바울이 유다의 시각으로 말한 것이기 때문에 구원받은 사람은 누구나 나처럼 되라고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게 '와 할렐루야.'인 거예요. 나같이 되라고 하면, 그럼 됩니까? '하나님께 원하나이다.'처럼 하나님이 역사하지 않으면 이 옆에 지금 같이 앉아 있어도 이 말을 믿을 수가 없어요. 알아들을 수가 없어요. 그래서 최고의 설교자인 바울이 간증을 하는데 지금 7장 동안 아무도 안 믿었어요. 왕, 총독, 유대인 아무도 안 믿었어요. 그런데 바울은 그냥 나와 같이 되기를 원한다고 하지 않고 이렇게 결박된 것 외에는이라는 조건을 붙였어요. 그러니까 이게 무슨 뜻입니까? '결박이 상징하는 사명의 수고는 내가 다 맡을테니까 여러분은 그저 복음 듣고 예수 믿고 구원만 받으세요.' 이런 뜻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여러분은 이게 자꾸 행위로 생각하니까 '나는 구원 때문에 이런 결박을 당하는데 너는 왜 아무 결박도 당하지 않고 그렇게 예수를 믿으려고 그래?' 자꾸 비교를 해요. 고난도 없는데 잘 믿으면 얄밉죠. 그래가지고 자꾸 이거를 값을 내가 공로로, 꼭 나의 행위로 믿는 것처럼 그렇게 자꾸 생각해서 '쟤는 왜 고난도 없는데 잘 믿는 거야.' 이러면서 또 흉악한 강도가 믿었다고 그러면 '아유, 실컷 나도 죄 짓다가 나중에, 맘대로 살다가 나중에 회개하고 믿을 걸 너무 아깝네.' 이런 이상한 생각들을 자꾸 해요. 우리가 마땅히 졌어야 할 십자가를 우리 주님이 자기 십자가로 지셨기 때문에 우리는 아무 결박도 당하지 않고 우리는 구원을 얻었습니다. 그러니까 이 받은 구원이 얼마나 선물인지 알면 내 옆에 있는 사람들도 이 선물 받기를 간절히 원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아무런 수고 안 해도 되니까 제발 구원만 받으면 좋겠다.'는 이 원함이 생기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각자 은사대로 믿는 거예요. 여기까지 결론이 끝났어요.
30 왕과 총독과 버니게와 그 함께 앉은 사람들이 다 일어나서 31 물러가 서로 말하되 이 사람은 사형이나 결박을 당할 만한 행위가 없다 하더라 32 이에 아그립바가 베스도에게 이르되 이 사람이 만일 가이사에게 상소하지 아니하였더라면 석방될 수 있을 뻔하였다 하니라
->그러니까 이제 30절부터 32절까지 '야, 바울이 사형당할 만한 죄가 없구나. 그런데 바울이 가이사에게 상소만 하지 않으면 얘가 무죄로 석방될 텐데.' 안타까워하는 거예요. 그런데 이렇게 석방하는 것만 원하고, 바라고, 기도했다면 아이고 이거 가이사에게 상소한 일은 너무 큰 실수 아니겠습니까? 그러면 로마로 못 가자나요. 그러니까 세상 사람들은 교회를 다녀도 '이 학교를 가야, 여기를 가야 좋은 아이들과 사귀고 학교를 잘 들어가는데.' 그러나 여러분 항상 결론이 중요합니다. 저는 아이들하고 큐티했지만 대학교 다 재수, 삼수했어요. 많이 떨어지는 거 경험했어요. 후회 없어요, 그런데. 큐티하며 결정할 때까지는 수 없이 THINK를 많이 하고, 여러 사람한테 물어보고. 결과에 대해 후회하지 않는 것이 묵상의 결론이에요. 치열하게 고민하지만 그게 하나님의 응답이에요. 우리는 몰라요. 로마로 갈지 어떻게 알아요. 하루, 하루 하나님 말씀 묵상하고 말씀 붙들고 사는 것이 최고의 성령의 원함을 이루는 비결인 줄 믿습니다. 우리가 비록 실수를 해도 보혜사 성령님이 보호하시고, 은혜 주시고, 가르쳐 주셔서 목적지로 인도하시는 줄 믿습니다. 이게 성령의 원함이에요.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뜻이 뭐예요? 우리의 구원이에요. 그러니까 구원을 위해, 우리의 거룩을 위해 잠시 결박당한 채로 있어야 할 때도 있고, 억울한 미움을 당해야 할 때도 있고. 그러니까 항상 이런 데서 빨리 석방되기만 바라는 것은 성령의 원함이 아니죠. 그래서 이제 적용 질문 좀 드릴게요.
[적용] 나처럼 되라고 외칠 수 있겠습니까? 행위입니까? 은혜입니까? 가족에게 생색내고 있는 내 결박은 무엇입니까? '어떻게 저런 사람이 구원을 받을 수 있어'라며 내세우는 조건은 무엇입니까? 구원받기를 하나님께 원하고 있는 내 곁에 있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말씀 맺어요. 성령의 원함은 미쳤다는 말을 들을 정도로 참되고 온전한 말을 해야 돼요. 내가 낮아지고 죽어지고, 추함과 죄 됨과 이런 약함을, 이게 온전한 말이에요. 그런데 그거를 위축되지 말고 담대히 말할 수 있어야 돼요. 그러니까 거기에 구원 받은 '나처럼 되라.'는 거예요, 바울이. '나처럼 되라.'고. 부부 간에나, 이 지역 간에나 다 통일을 이루려면 원함이 같아야 하는 거예요. 꿈에도 소원이 통일이 되려면 부부 간에도 목적이 같아야 돼요. 나라의 통일도 다 마찬가지입니다.
목장 모임 참석 (이영재 목사님께서 탐방 오셨습니다.)
미혜, 연수, 예선, 우정, 민희
기도제목
미혜
내 모습이 아닌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의 그 은혜를 의지하여 강하고 담대하게 일상을 살아갈 수 있기를
회사의 프로젝트에 기름을 부어 주시고 맡겨 주신 역할 잘 감당할 수 있기를
엄마가 아빠의 화와 폭언으로 우울해 하시는데 성령님께서 엄마의 인생을 해석할 수 있는 은혜 주시기를
하나님께서 우리 목장 식구들의 각자의 모든 상황을 아시고 그에 알맞은 은혜를 매순간마다 부어 주시기를
예선
그날 주시는 말씀으로 하루만 잘 살도록
참되고 온전한 말을 목장에 붙어가며 잘 나누고 갈 수 있도록
행위가 아니라 은혜로 받은 구원인 것을 기억하고 비교하지 않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