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904 성령의 권한
사도행전 26:8-18
요즘 뉴스를 보면 자신에게 주어진 권한을 잘 행사하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 새삼 생각하게 됩니다. 권한이 큰 사람일수록 당연히 더 그렇겠죠. 클수록 권한의 경계를 지키기가 그렇게 어려운 것 같아요. 이것이 남의 일이라 구경할 때는 참 분별이 잘 되는 것 같은데 자기 일이 되면 다 눈이 가려지는 듯합니다. 아그립바 유대인으로 유대인의 사정을 너무 잘 알자나요. 그런데 이 사람이 로마편에 서 있자나요. 그러니까 우리가 정말 몰라요.
추석입니다. 명절의 하이라이트는 집안 싸움이라고 하죠. 내 사정을 너무 잘 아는 부모, 형제, 아내이지만 막상 다 남의 편에 서 있어요. 그래서 남편이에요. 남편은 다 남의 편에 서 있어요. 다른 편에 서 있는 그들에게 성령의 약속을 받은 내가 오직 구원을 위해서 세상의 권한이 아니라성령의 권한을 가지고 나가야죠. 오늘 본문에 권한이 두 번 나옵니다. 18절에도 권세가 나오는데 다 같이 원어는 엑스우시아 똑같은 말이에요. 오늘은 성령의 권한에 대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겠습니다.
1. 죽은 사람을 살리심을 믿어야 합니다. (8절)
8 당신들은 하나님이 죽은 사람을 살리심을 어찌하여 못 믿을 것으로 여기나이까
-> 사두개인과 달리 바리새인은 부활을 믿습니다. 그런데 부활을 지금 여기서 경험한다는 것은 믿을 수 없는 일로 치부했어요. 게다가 듣기만해도, 보기만해도 저절로 무시가 되는 극형을 받고 죽은, 십자가 참수형을 받고 죽은 이 나사렛 청년 목수의 아들 이 예수가 부활했다는 일은 더더욱 못 믿을 것이었습니다. 부활을 우리가 가능한 개념으로만 믿는 것은 부활을 믿는 것이 아니죠. 하나님을 가능한 개념으로만 믿는 것은 사실 하나님을 믿는 게 아닌 것과 같아요. 우리는 하나님이 계심을 믿어야 하자나요. 개념이 아니라 실재로, 실재 중의 실재로, 최고의 실재로 온 우주를 다스리시는 주님이 계심을 믿어야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볼게요. 세상에서 가장 좋은 부모라는 개념을 머리 속으로는 생각할 수 있어요. 그러나 그 개념은 나를 낳고 기르신 내 부모가 아닌 거예요. 사실 부족하지만 내 앞에 계셨던, 또는 지금 계신 내 부모님이 나를 존재하게 한, 나아가 나를 예수 믿게 한 진짜 부모라고요. 나를 버렸어도 이제 우리들교회 와서 그 엄마를 용서했다고 그러자나요. 그런데 부활을 머리 속으로 아무리 생각한다고 해도 절대로 용서할 수 없는 엄마, 아버지를 지금도 용서하지 않으면 부활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 본문을 자세히 보면 그들은 이미 어떤 현상을 믿고, 안 믿고를 떠나 설령 내 눈앞에 예수님이 나타나더라도 이미 그들 마음 속에 '이것은 믿을 것이 못 된다.'고 여기고 있는 것이죠. 여기다는 헬라어 크리노는 판단하다, 결정하다, 그리고 더 나아가 정죄하다, 비난하다, 헐뜯다라는 뜻이에요. 즉, 내 속의 이 부활은 못 믿을 것이라고 판단하고, 결정하고, 그리고 이 잘 믿는 유대인들이 말이죠. 거기서 더 나아가 이 부활을 비난하고, 헐뜯고 있는 것입니다. 수많은 부활의 간증을 이 자리에서도 목격하고 들었습니다. 그런데 왜 못 믿느냐는 것이죠. 밤낮으로 섬기고, 바라고 바랬던 부활이었는데 막상 별반 다를 바 없는 내 환경, 그냥 다를 바 없는 내 고난, 다를 바 없는 예수님의 이 부활을 보니까 딱 믿기가 싫어요. 짠하고 나타나지 않는 것 같아요. 그래서 계속 못 믿을 것으로 여깁니다. 여기는 것에서 끝나지 않고 헐뜯어요. 하지만 이 모습은 아직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기 전의 모습입니다. 성령의 약속으로 이 땅에 다시 오실 예수님은 온 세상을 발 아래 두며 해처럼 빛나고, 모든 달과 별을 몸에 두르고, 온 세상의 세력들을 멸하실 모습으로 반드시 오십니다. 그러면 이건 나중에나 볼 모습인가요? 이 모습은 우리가 기복에서 팔복의 가치관으로 바뀌어질 때, 이것이 이 땅에서도 중력에서 무중력으로 나가는 것처럼 이 땅에서도 맛보게 하시는 부활의 모습이에요. 이 중력에서 뾰족한 연필 하나를 여러분들이 세울 수 없어요. 절대로 세울 수 없어요. 그런데 무중력으로 나가게 되면 그게 서게 되는 거예요. 우리가 다리 재활을 할 때 그거를 재활 치료 병원에 가면 이제 이렇게 들어가서 무중력 상태에서 발을 놓으면 움직일 수가 있는 거예요. 몇 분 하고 굉장히 많은 돈을 치르고 오자나요. 그러니까 우리가 수영하라 그러자나요. 거기에 중력이 없으니까. 그러니까 그렇게 쉽게 죽어가는 다리가 그 속에 무중력 상태에 들어가면 움직일 수가 있는 거예요. 자, 우리가 기복과 팔복의 가치관도 도저히 내가 할 수 없는데 이렇게 둥둥 떠다니게 되는 거예요.
우리 남편이 가기 전까지 남편이 하나도 안 바뀌었어요. 남편이 갑자기 변해서 저를 사랑해주고, 피아노 치게 하고, 외출하게 해주고 그런 모습 하나도 없었죠. 도리어 여러분들이 알다시피 가기 전에 옷에 샴푸를 들이붓고, 성경책을 찢고 이런 상황 속에서 제가 정말 '부활이 있긴 있는 거야?' 의심한 것이 아니라 점점 제가 둥둥 떠다니니까 남편이 '밥.'하면 밥 차리고, '외식.'하면 외식하고, '들어가.'하면 들어가고, 복숭아를 던지면 떨어진 복숭아를 딱 주워 먹고. 어떻게 그럴 수 있냐고요. 성령의 권한을 주셨기 때문이죠. 그건 제 힘에 아니예요. 이 팔복의 가치관으로 둥둥 떠다닐 수 있기 때문이죠. 그것은 내가 죽은 자임이 깨달아져야 합니다. 죽은 채 하면 그 무거운 십자가 때문에 늘 불평하고 불만하며 깔려 죽습니다. 그런데 좋은 왕 좋은 부모가 내 임금이고 부모이지, 가족 버린 부모, 이혼한 부모, 때린 부모는 내가 교회를 다녀도 용서가 안 되는 것이 부활을 못 믿는 거예요. '나는 몇 월, 몇 일, 몇 시에 그 부모의 모습을 용서할 수 없어.', '그때 나를 안 데리러 온 그 부모를 용서할 수가 없어.' 뭐 이러면서 내가 죽으면 십자가가 아무리 무거워도 느껴지지 않자나요. 죽을 뻔한 자, 죽은 자가 아니라, '나같은 죄인, 나같은 죽은 자도 살리셨으니까 하나님께서 저 사람도 살리실 거야.' 이것이 마음 속으로 깨달아져야 성령의 권한이 주어지는 비결이 될 줄을 믿습니다. 그러니까 결코 부활과 상관없으리라고 여겨졌던 제 남편에게도 이 죽은 자의 부활이 임한 것이죠. 그런데 어떤 설명을 해도 부활은 본질적으로 하나님의 권능에 속한 사건이에요. 그러나 이 부활을 맛본 사람들은 내가 둥둥 떠다니니까 너무 안타깝게 막 애쓰는 사람을 보고 설명해주고 싶자나요. 듣던지, 안 듣던지 우리는 잠시 후에 내 고향으로 가야 되니까 가기 전에 어떤 욕을 먹든지 설명을 하고 싶은 거예요. 하다가 가야 되는 거예요. 내가 밤낮으로 예수를 섬겼는데 이미 내 속의 부활이 이루어졌어요. 그런데 아직 남은 부활이 있자나요. 이것을 성령의 약속으로 받았어요. 그러니까 내가 하루 아침에 행함이 완전해지지 않아요. 그런 권한은 아직 주지 않으셨어요. 지옥 같은 내 환경, 변하지 않는 내 환경, 믿어도 부활은 눈곱만큼도 볼 수 없는 내 가족들이 있죠. 여전히 외도하고 술 먹고 행패를 부리고 정신이 이상하고 나를 괴롭히는 내 옆의 식구를 바라보면서 오늘 우리는 아그립바 왕 옆에 서 있는 유대인들처럼 부활을 못 믿을 것으로 여기며 나를 영화롭게 해 줄 새로운 부활을 찾아다니며, 새로운 남편, 새로운 직업, 새로운 중독을 찾아다니면서, 그래서 다 합리화시키면서 산으로 들로 가죠. 그리고 내 가정에, 저 사람 속에, 그리고 무엇보다 내 속에 이곳에 더 이상 부활이 없다고 여기지 마시기 바래요. 이번 추석 때 '저 집구석탱이는 절대 안 변해.' 먼저 판단하며 헐뜯고 마음 속에 못 믿을 것으로 여기지 마시고 성령의 권한이 임해서 사명을 감당하시기를 바랍니다. 적용해보세요.
[작용] 부활이 개념으로 믿어집니까? 실제로 믿어집니까? '저 사람은, 저 가정은 절대 변하지 않아'하며 못 믿을 것으로 여기는 것은 무엇입니까? 죄로 인해 내가 죽은 자임이 인정이 되십니까?
2. 나도 그랬다의 고백이 있어야 합니다. (9-12절)
9 나도 나사렛 예수의 이름을 대적하여 많은 일을 행하여야 될 줄 스스로 생각하고 10 예루살렘에서 이런 일을 행하여 대제사장들에게서 권한을 받아 가지고 많은 성도를 옥에 가두며 또 죽일 때에 내가 찬성 투표를 하였고 11 또 모든 회당에서 여러 번 형벌하여 강제로 모독하는 말을 하게 하고 그들에 대하여 심히 격분하여 외국 성에까지 가서 박해하였고 12 그 일로 대제사장들의 권한과 위임을 받고 다메섹으로 갔나이다
->우리는 바울의 간증을 세 번 들어요.
9장은 제3자가 쓴, 누가가 쓴 것이고, 22장, 26장은 바울이 직접 간증 설교한 것이에요. 자세히 보면 모든 간증이 청중에 따라 조금씩 다르지만 세 번이나 한 인생의 스토리가 이 성경에 일점일획이 중요한데 이렇게 기록이 됐어요. 대단한 복음을 전한 기록보다는 이런 바울의 간증이 훨씬 더 자세히 기록되어 있고 반복되어 있음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내 수치와 죄와 연약함을 간증하는 것이 성령의 권한이 주어지는 비결입니다. 그러니까 내 간증, 바울의 간증, 여러분들이 성령이 임하지 않으면 '왜 그 쓸데없는 얘기를 자꾸 해요.' 저보고도 '목사님 간증 똑같은 거 왜 맨날 똑같이 해요.' 이래요. 성경에 이렇게 나와있자나요. 자기 죄에 대한 솔직한 고백은 고백하는 그 사람의 영혼을 소생케하는 힘이 있기 때문이에요. 그런데 때마다 성령이 다르게 역사하세요. 30년을 간증해도 때마다 다르게 역사하세요. 그러니까 '목사님은 왜 맨날 똑같은 간증하러 미국 가냐.' 이런 분이 계시더라구요. 그러니까 이 부활이 안 믿어져서 그래요. 그래서 9절에 이렇게 시작하는 거죠. '나도 너희와 똑같이 예수님을 대적하던 사람이었다.' 이거는 이러한 의식이 이미 유대인 사회 전반에 널리 퍼져 있었어요. 바울은 그 가운데 한 사람일 뿐이에요. 우리 모두 예수 믿기 전에는 누구나 할 거 없이 예수의 대적자로 사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착한 사람, 나쁜 사람이 없어요. 예수는 바리새인, 사두개인이 같이 힘을 합하여 죽이자고 했어요. 보통 때는 이익이 첨예하게 대립되어 있다가 예수님 죽이자고 할 때는 같이 모여서 죽이자고 했어요. 이 땅은 그 누구도 예수님의 대적자예요. 누구에게 점수를 줄 게 없어요.
그리고 10절에도 번역은 안 되었지만 '나도 똑같았다.' 그러면서 내가 이렇게 시작해요. '내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밤낮으로 열심히 했던 일이 뭔지 아세요? 많은 성도를 옥에 가두고, 죽이고, 강제로 모독하는 말을 하게 하고, 예수님을 배반하게 하고, 땅끝까기 이르러 이렇게 심히 격분해가지고 쫓아가서 그들을 박해했다.' 그래요. 여기서도 부족해가지고 외국 성 다메섹까지 가가지고 했대요. 박해를. 바울은 정말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어떤 바리새인보다도 압도적인 예수님의 대적자였다는 거예요. '내가 그런 대적자였다.' 이 압도적 지위를 확실히 표현하는 단어가 바로 오늘 권한이에요. 헬라어로는 엑스우시아라고 하는데, 자기 존재 우시아를 발산한다. 엑스 그래서 엑스우시아 이렇게 여기는 것이 권한이에요. 힘과 권세를 행사할 수 있도록 공적으로 주어지는 자격을 의미하는데, 게다가 권한에다가 산헤드린의 위임까지 받아가지고 막강한 권한으로 예수님의 대적자로 군림을 했죠. 대제사장이 바울에게 준 권한은 예수님을 믿는 성도들을 괴롭히고 체포할 권한이었어요. 바울은 그 대제사장의 종이자 수단이에요. 그리고 성도들은 바울의 그 권한 아래 있어야만 하는 대상이었죠. 그러니까 수직적 종속적인 관계, 주인과 종의 관계예요. 바울이 인간 대제사장의 종으로 이 일을 했다는 것이죠. 그러니까 더 엄하게, 더 가혹하게 권한을 행세합니다. 권한이 없을 때는 다 올라가면 잘 할 거 같아도 내가 종으로 있다가 올라가면, 노예로 있다가 올라가면 권한을 마음껏 행사하면서 더 엄하게 가혹하게 행사하는 거예요. 그렇게하지 않으면 자기 존재가 종에서 끝날 거 같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그 권한으로 권한 아래 있는 사람을 괴롭게 하면서 자기 존재 우시아를 발산하는 거예요. 엑스, 진짜 엑스우시아예요. 이게 엑스우시아. 실상은 한 줌 뿐인 권한에 취해서 진짜 자기 주제를 넘어서는 것이죠. 이것이 세상 권한의 공통 특징이에요. 이렇게 악하게 세상의 권한을 휘두르다가 자신이 인간으로써 얼마나 월권을 행사했는지 이실직고하는 거예요. '나도 똑같다.' 그 사람들이 바울을 죽이려고 하면서 '나는 더 했다. 나도 똑같다.' 그렇게 하면서 자신의 죄악을 낱낱이 지금 고백을 하는 거예요.그럼 우리한테 이게 어떻게 적용이 됩니까? 가족을 사랑한다고 생각하며 했던 일이, 인생을 열심히 살아보겠다고 했던 일이 그냥 밤낮 내 자녀를 지금 죽이고, 옥에 가두고 하나님을 모독하게 하는 말을 하게 하고, 자녀를 격분케 하는 일이 되었단 말이에요. 자녀를 사랑해서 자녀가 원하는대로 교회를 빠지게 하고, 열심히 공부를 시켰더니 그 자녀들 입에서 지근하나님을 모독하는 말이 그냥 자연스럽게 나온다는 거예요. 바울은 이처럼 죽이고, 모독하고 격분케하고, 옥에 가뒀던 모든 일들이 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줄 알았다고 고백을 합니다. 그 출발이 어디입니까? 바울이 오늘 9절에 스스로 생각해서 한 일이래요. 스스로 생각해서 대제사장에게 그 권한을 위임 받아서 스스로 이 백성들을 핍박했어요. 이 일이 정말 자녀를 내거 사랑하는 사람을 위한 일이고 생각된다면 여러분들 제발 좀 물어보세요. 스스로 생각하지 마시고 목장과 공동체에 물어봐야 돼요. 다들 내가 너를 사랑해서 그랬대요. 내 스스로 생각한 그 일이 결국 내 사랑하는 사람을 죽이는 일이고, 예수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일일수도 있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여러분 회심 전에 사도 바울이 특별히 악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면 그것은 큰 오해입니다. 그는 율법의 의로 흠이 없는 사람이었어요. 제발 '내가 얼마나 착하고 똑똑한 사람인 줄 아냐.' 이딴 얘기 좀 하지 마시고. 속에 선한 마음을 가득 품고 그것을 실행하기 위해서 애썼던 사람인 거예요. 로마서 7장 18절에 보세요. 그러나 바울이 겉으로 나타나는 것은 의나 선이 아닌 악이었다고요. 내가 아무리 선한 일로 열심이래도 겉으로 나타나는 일이 악이라고요. 그러면 그건 하면 안 되는 거예요.그러니까 속에 선이 가득 쌓였는데 어떻게 이유를 알 수 없는 분노에 사로잡혀가지고 전혀 죄가 없는 그리스도인들을 향해서 폭발을 시킨 거예요. 이것이 바로 육체로 나서 거듭나지 못한 상태로 있는 사람들의 실체인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는 이 기복의 이 땅에 저 팔복의 무중력에 둥둥 떠서 다니면 여기서 막 열심히 이러고 사는데 그냥 자기 조금, 윗사람의 지금 명령을 받고 하는데 그게 그렇게 화가 날 수 있을까요? 분해가지고 대제사장 편을 들라고, 너무 분해가지고 막 별 소리를 다 하자나요. 그런데 자기 죄를 몰라요. 우리가 그래서 정치를 보면서 그런 걸 너무 많이 보고 있어요. 거듭나지 못한 상태에 있는 사람들은 윗사람 말 들어요. 그게 왜냐하면 나도 엑스우시아, 자기 존재를 발산하는, 그래서 장차 저 상관처럼 될 거니까. 그러니까 육체로 난 자는 자기 권한으로 마구 박해를 하는 거예요. 아버지의 권한으로 자녀를, 상사의 권한으로 부하를, 그냥 모두 그 권한을 얻으려고 하는 건 다 박해를 하려고. 누군가를 진심으로 사랑하기 위해서는 내 자아가, 내 생각이, 스스로 생각하는 그 생각이 먼저 무너져 내려야 되는 거죠. 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을 내 방식대로 섬기고 스스로 생각해서 결국은 그 사람의 입에서 하나님을 모독하게 하는 말이 나오게 하며 격분케 되는 일이라는 걸 몰라요. 그렇게 싸우는데 서로 옳다 그래요. 옳고 그른 사람이 없어요. 다 똑같아. 똑같이 다 혈기를 내요. 결국 내 자아가 하나님의 원수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예수를 대적하는 가장 큰 대적은 바람도, 도박도, 술도 아닌 제일 무서운 것이 무엇인 줄 아세요? 바로 자기애와 자기 열심인 거예요. 자기를 사랑하면 십자가의 최고의 원수가 되는 거예요. 내 열심이, 내 생각이 구원을 가로막고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이런 사람들이 꼭 많은 일을 행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많은 일을 행할수록 많이 죽이고 많이 핍박함을 깨달아야 합니다. 제발 스스로 생각하지 말고. 여러분 박사 할아버지라도 공동체에서 목장의 말을 들어야 해요. 목장이 잘나서가 아니죠. 너무 여러분들이 보기에 찌질한 사람들이 있죠. 목장에서 물어야 돼요. 하나님이 그 겸손함을 보시는 거예요.
남편이 저를 너무 사랑했자나요. 사랑해서 외출도 못 하고, 친구도 못 만나게 하고, 꼬박꼬박 집에 와서 삼시 세끼를 챙겨 먹었죠. 제가 어느 날 머리를 잘랐는데 막 불같이 화를 냈자나요. 그런데 왜 잘랐는지 그 마음에는 관심도 없고 오직 이유는 '자기가 먹여주고 재워주고 돈 벌어주고 했는데 자기가 긴 머리를 좋아했는데 왜 잘랐냐.'는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가 모든 것을 준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자기 생각에서부터 출발하는 이런 사랑이 얼마나 상대를 죽이고 있는지 깨닫지 못해요. 부모들이 그래요. '내가 먹여주고 재워주고 학비 다 줬는데 왜 너는 내 말을 안 들어.' 큰 권세가 있을수록 환경이 좋을수록 깨닫지 못하고 내가 해 준 게 많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바울도 대제사장의 권세까지 받고 위임을 받아가지고 그 일이 예수님을 대적하는 일이라고 결코 깨닫지 못해요. 부활을 다 개념으로 믿고 있어요. 유대인들이 다 모태신앙이자나요. 개념으로 다 믿고 얼마나 예수 믿는 사람을 지금 이방인도 아니고 유대인들이 바울의 복음을 목숨 걸고 지금 막고 있자나요.
크레이그 말킨이 소개한 에코이스트라고 있는데요. 이건 이기주의와 반대되는 성향이에요. 그래서 이 성향은 주목받는 거 싫어하고, 자기 늘, 문제만 생기면 자기 탓을 하고, 유독 자기에게 가장 엄격하고, 갈등은 늘 피하고, 남의 말을 너무 잘 들어주는 너무 이타적인 성품이자나요. 그런데 이 세상에 존재하는 많은 에코이스트들은 나르시시스트를 자석처럼 끌어당기는 원인이 된답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많은 고통을 받고 끌려 다닌다고 해요. 그래서 이 나르시시스트는 소시오패스만큼 위험한 존재라고 하는데, 성품으로 에코이스트가 되가지고 평생 끌려 다니다가 가스라이팅도 당하고 자살도 하죠. 그런데 저는 이 부활이 안 믿어지는 사람은 다 똑같아, 피해자, 가해자가. 평생을 바쳐 소시오패스를 연구한 마사 스타우트의 답은, 그러니까 '나르시시스트 보다 더 똑똑해져라. 그러기 위해서는 알아야 된다.' 그런데 어떻게 알까요? 거기까지예요. 우리는 그 다음에 이 팔복의 그 가치관으로 가는 큐티와 목장, 이거를 대안을 제시해야 되는데 분석만 해, 분석. 그러니까 사실은 예수 안 믿으면 그냥 나르시시스트나, 에코이스트나 다 똑같다는 거예요. 도리어 에코이스트가 믿기가 너무 어려운 거예요. 그래서 내가 그걸 읽으면서 '야 내가 믿음이 있는 게 아니고 혹시 에코이스트가 아닐까?' 이 생각을 해봤어요. 속아, 자기가 속아요. 이 성품 때문에. 한번 완전히 회개하고 다시는 죄를 짓지 않는 상태는 천국에서 영화롭게 된 상태예요. 이 땅에서는 우리에게 그런 상태의 권한은 주지 않으셨어요. 우리는 내가 안 되는 것 때문에 전도를 못하자나요. 우리는 안돼요. 천국에 가는 그날까지 완전에 이르지 못해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출애굽한 백성에게 가나안 땅에서 대적을 한 번에 다 쫓아내신다고 하지 않으셨어요. 조금씩, 조금씩 쫓아내시겠다고 하셨자나요. 출애굽기 23장에. 무엇이 조금씩이고, 무엇이 점진적인 것이죠? 그냥 매일 여전한 방식으로 큐티하고 그만큼 회개하고, 그만큼 회개하고 이루어가는 모습이 이 소시오패스나 이 모든 것에서 해결될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우리들교회 와서 놀라운 간증이 일어나고 있어요. 누구도 불쌍한 사람 없어요. 예수 안 믿는 사람이 가장 불쌍한 사람인 거예요. 그러니까 맨날 목장에서 남편 욕하고, 다른 목자 욕하고 그러는 게 아직 부활을 개념으로 믿어서 그래요. 다 똑같아. 내가 예수 믿으면 팔복의 가치관으로 둥둥 떠다니면 무게가 안 느껴지는 거예요. 그 상황으로 가시기를 바랍니다. 적용해보세요.
[적용] 내 권한이라 여기면 자랑스럽게 여기는 영육의 역할은 무엇입니까? '나도 그랬다!'며 이번 명절에 내 간증을 준비하고 있나요? 나는 자기애성의 나르시시스트입니까? 남만 생각하는 에코이스트입니까?
3. 나의 피 흘림이 예수를 박해하는 것임을 깨닫는 것입니다. (13-15절)
13 왕이여 정오가 되어 길에서 보니 하늘로부터 해보다 더 밝은 빛이 나와 내 동행들을 둘러 비추는지라 14 우리가 다 땅에 엎드러지매 내가 소리를 들으니 히브리 말로 이르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가시채를 뒷발질하기가 네게 고생이니라 15 내가 대답하되 주님 누구시니이까 주께서 이르시되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
-> 왕이여로 시작되는 13절로부터 다시 사도 바울은 아그립바 한 명에게 집중해서 복음을 전합니다. 1절부터 아그립바에게 얘기하다가, 8절부터 유대인 그들 모인 사람들한테 얘기하다가, 다시 한 명에게 집중을 했어요. 9장 3절과 22장 6절에서는 그 하늘에서 내려오는 빛이 자신을 둘러 비추었다고 개인적 경험을 강조했는데, 오늘 13절에서는 나와 내 동행들을 둘러 비추었다고 객관적으로 증할 수 있는 사건이라는 거를 간증에서 좀 더 달라졌어요. 앞에 간증과 조금 달라진 내용은 9장에서는 눈 뜨게 해 준 아나니아가 길게 등장을 하죠. 그런데 오늘 15절에서 예수께서 자신을 소개할 때 그 나사렛 예수라 했던 이전 본문과 달리 나사렛이라는 말이 빠졌어요. 왜냐하면 나사렉을 비하하고 있는 아그립바에게 구지 나사렛이란 말은 쓸 필요가 없지만, 9절에서 자신이 핍박자로 행할 때는 자기가 나사렛 예수를 핍박했다고. 그러니까 항상 이렇게 상대에게 맞는 말 한마디, 어휘 하나가 광장히 중요합니다. 자 이때, 이제 오정쯤이에요. 때는 정오입니다. 사막의 정오보다 훨씬 더 밝은 빛이 비춰서 다 땅에 엎드러지는 본문이 나왔어요. 그런데 그 빛보다 더한, 눈을 뜰 수 없는 그 대단한 빛으로 찾아오셨어요. 그 빛에 얼마나 놀랐는지 그냥 모두가 다 엎드러지는 사건으로 찾아오신 거죠. 내가 그 정오의 빛에서도 눈 시력을 상하는데 이렇게 지금 핍박을 하고 있으니까. 이제 출애굽기에서도 뇌성과 번개와 나팔로 찾아오셨다고 그러죠. 우리는 주님을 보면 다 엎드러져요. 왜 엎드러져야 하는지를 설명을 해주시죠. 이런 상황은 제 9장과 22장의 성령의 회심과 성령의 말함의 이전 설교를 좀 참고하세요. 오늘은 그것까지 할 시간이 없는 게 다른 본문에 나오지 않았던 새로운 표현이 나왔기 때문에. 히브리 말로 이르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그리고 14절 후반절에 가시채를 뒷발질 하기가 네게 고생이니라 이 표현이 나와서 이걸 좀 보겠습니다. 이 말을 연결해서 생각해 볼 수 있는데요. 사울아 사울아는 누구도 알아들을 수 없지만 바울이 너무나도 익숙한, 어릴 때부터 사용했던 바울의 모국어죠. 학식을 갖춰 배웠던 헬라어, 라틴어가 아니라 체면, 학력, 신분, 위치, 모든 것이 하나도 없는 아기 시절 바울이더라도 알아들을 수 있는 모국어로 사울아 사울아 이게 뭘 의미하죠? 예수님의 관심사는 바울이 핍박하는 그리스도인들 이전에, 그냥 '더욱 예수님이 관심을 가지는 대상은 오직 바울 너 한 사람이다.' 그러니 히브리어로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직접 화법으로 생생하게 기록을 한 거예요. 이 사울아 사울아는 전 세계적으로 유명한 언어가 됐죠.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이후에 등장하는 가시채를 뒷발질 하기가 네게 고생이니라 이 말도 우리가 들으면 달 모르지만 그때 당시 농경 문화에 있던 유대 사람들이 누구나 알 수 있는 비유적 표현이에요. 이 뜻은 이 당시 가시채를 차서 심하게 상처 입은 소에서 유래했는데요. 소가 말을 듣지 않을 때 뒤에서 뾰족한 쇠나 가시가 달린 막대기로 찌르는데 소가 반항해서 뒷발질을 할수록 그 소가 점점 더 심하게 찔리게 되어서 상하게 되고 고통을 당하게 된다는 뜻입니다. 즉, '바울아 니가 바로 이 소야. 니가 교회를 핍박하고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는 것 같은데 사실은 니가 너 스스로를 지금 찌르고 피를 흘리고 있는 거야. 왜 나를 박해하니.' 이 말씀을 이전 본문에서는 '나를 믿는 사람들과 교회를 핍박하는 것이 결국 나를 핍박하는 것이다.'로 이해할 수도 있지만, 오늘 본문에서는 '바울아 나의 관심사는 너다. 바울 너 한 사람이야.' 그러니까 바울이 전도자가 되든 안 되든, 무엇을 하든 안 하든 그것이 아니라, 니가 남을 핍박하는 것 같지만 스스로 핍박하며 피 흘리는 바울 자체에 주님이 관심을 가지시고 계시는 거예요. 이걸 세번째 간증에서 바울이 1, 2, 3차 전도 여행을 다 가지고 핍박을 받으면서 이거를 간증에서 자기 자신을 더 직면을 했어요. 가시채를 뒷발질 하면서 스스로 피 흘리는 인생. '열심히 살아간다고 하지만 스스로를 찌르고, 피 흘리고 이것이 나를 박해하는 것이야. 너의 피 흘림이 나의 피 흘림이야. 니가 그토록 열심히 뒷발질 하면서 가시에 찔려 고통스러워하는 것이 바로 나를 핍박하고 박해하는 것이야. 바울아 니가 어찌 나를 그렇게 박해하냐. 이 가시채를 뒷발질하기가 네게 고생이야. 바울 너의 아픔이 나의 아픔이다.' 즉, 바울이 이렇게 절절히 바울의 아픔이 예수님의 아픔이라고. 바울은 자신의 삶을 간증하면서 자신의 이 상처를 위해 십자가에서 박해당하신 예수님의 사랑을 지금 아그립바 왕에게 전하고 있는 거예요. '왕이시여. 아무도 알지 못해도 당신의 삶 속에는 커다란 가시채가 있는 걸 알아요. 당신이 입은 화려한 옷 속에 수많은 상처로 난도질당한 깊은 상처를 예수께서 아셔요. 왜요. 제가 그런 삶을 살았기 때문이에요. 당신이 피 흘리며 아파할수록 예수님께서도 함께 피 흘리시며 박해를 당하십니다. 이해할 수 없는 수치스러운 부모의 죽음과 그 가계의 비극과 근친상간과 피로 얼룩진 삶 속에 결코 해결할 수 없는 거대한 가시채가 있는 걸 제가 알죠. 그런데 이제 그만 뒷발질 하세요. 그거 그만하세요. 당신이 아파할수록 그것이 예수를 박해하는 것이에요. 당신은 유대인의 왕이자나요.' 바울은 자신의 삶을 간증하며 아그립바 왕에게 전하는 거예요. 이런 식으로 추석에 가서 전해야 되는 거예요. 난리를 치는 사람들일수록 아픔이 많은 거예요. 자신을 찌르고 있는 거예요. 스스로 아파하면서도 계속 뒷발질을 하며 자해하고, 상처 입고. 우리 아이들이 맨날 자해하고, 자살 기도를 하고, 약을 먹고. 그 피 흘릴 때 지금 누구보다도 예수님께서도 같이 상처입고 피를 흘리신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렇게 얘기를 하니까 바울이 '당신은 누구십니까?' 그러니까 '내가 니가 박해하는 예수라.' 내 속의 수많은 상처와 이 가시채를 보면서 예수님도 함께 아파하고 피 흘리신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 사랑을 깨달을 때 가시채임을 알면서도 어떻게 해야 되는지를 몰라 계속 뒷발질을 하고 있어, 소가. 어리석어가지고. 딱 멈추면 되는데 그냥 소가 너무 열심히 살자나요. 칼로 난도질당한 내 발과 손을 보면서, 수많은 말과 폭력으로 난도질 당한 내 마음과 기억들을 보며 이것이 내 핍박이고, 내 고난이다. 이제 그만 아파하라.'고 '그렇게 니가 가시채를 뒷발질하기가 네게 고생이야. 너 이제 이 고생 좀 그만해. 그냥 STOP만 하면 되는데 니가 할 것 아무것도 없는데.' 이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사랑을 깨달을 때 예수님이 바로 이런 사랑으로 우리 죄를 위해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으셨다는 거예요. 우리는 그 사랑으로 우리의 고난을 내려놓고 스스로 그 사랑에 매이면 성령의 권한이 임하게 될 줄 믿습니다. 여러분들 가시채를 뒷발질하기가 너무 고생 아니예요? 이제 그만 좀, 예수님 그것이 내가 뭔가 열심히 하고 다 하려는 것에서 나를 딱 내려놓고. 아이가 이 땅에 나올 때는 막 이러고 오지만 죽을 때는 탁 내려놓자나요. 죽을 때는 손을 내려놔요. 그걸 이 땅에서 이렇게 내려놓으면 되겠는데 아니라는 거죠. 위협과 살기가 등등해 가지고. 이런 사람한테 어떻게 다가가서 정말 복음을 전하겠어요, 이 무서운 혈기 중에. 그러나 부드러운 말로 사울아 사울아 그러나 정확한 복음으로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바울이, 제가 이제 이번에 다시 이렇게 보면서 2번의 간증 속에서는 이 가시채 얘기가 안 나왔자나요. 그런데 이 유대인들한테 너무 지금 죽이려는 이 모함을 받고 세번째 간증을 하면서 그들을 미워하는 게 아니고 좀 더 자신을 직면하게 된 거 같아요. '주님이 나 때문에 얼마나 힘드셨을까?' 자신을 생각하면 유대인들의 그 죽이겠다는 박해는 당연히 받아야 된다는 생각이 들었으리라고 생각해요. 가시채를 뒷발질하는 소처럼 그 유대인들이 지금 그렇게 뒷발질하는 걸 보면서 그냥 바울은 피눈물을 흐르는 거예요. 자기는 지금 둥둥 떠다니는데, 조금 있으면 이제 천국으로 가야하는데 너무 너무 지금 다들 핍박을 하는 거자나요. 자기 모습을 보면서 유대인들의 삶 속에 이런 커다란 가시채가 있는 것을 그들이 지금 모르자나요. 모르니까 눈물이 나는 거예요. 그래서 할 수 없이 이 정오의 빛보다 더 밝은 빛으로 오셔서 드러지게 했다고 지금 간증을 하자나요. '할 수 없이, 내가 너무 말을 안 들으니까, 내가 가시채를 뒷발질하고 있으니까 주님은 내 눈을 멀게 할 수밖에 없었다. 이것이 나의 간증이에요.' 성경이 끊임없이 성도들에게 순종할 것을 권면하는 것은 교회를 위해서가 아니에요. 목회자를 위해서도 아니예요. 더 더욱 예수님을 위해서도 아니예요. 바로 여러분 자신을 위해서인 거예요. 가시채를 그만 뒷발질 하라고, 그렇게 찌르고 있냐고.
'나를 괴롭혔자나. 나는 그거 용서 못해. 몇 월, 몇 일, 몇 시에 나는 그거 영서 못해. 사과 받아야 해. 이런 걸로 평생을 가시채를 뒷발질 하고 았자나요. 여러분 인생 최고의 상급은 내가 뭔가를 할 수 있게 해주는 건강, 자녀, 돈, 권력, 명예, 지식이 아니예요. 여러분들 자녀를 지금 그렇게 교회도 안 오게 하고, 학원 보내고 이러는 게 아니예요. 여러분들이 부활의 주님을 만나셨다면 이제는 다른 권한을 찾아서 기웃거리는 일을 멈추셔야 해요. 주님이 최고의 상급임을 고백하면서 정말 주님이 주시는 성령의 권한을 누리시기를 바랍니다. 내가 누려야지 보일 수 있겠죠. 그렇죠? 그런데 바울도 이 정도나 되야 가시채 뒷발질 이 얘기가 나오는 걸 보면. 그러니까 우리는 기도할 수밖에 없는 거죠, 성령의 약속을 기다리면서. 적용해 보세요.
[적용] 주님은 내게 가장 밝은 빛이십니까? 더 밝게 여기는 빛이 있지는 않습니까? 내 삶에 결코 해결할 수 없는 아픔, 나를 계속 찌르는 가시채는 무엇입니까? 내가 스스로 정죄하며 비난하고 자해하는 것이 예수를 박해하는 것임을 아십니까? 그 가시채로 인해 내 삶을 돌이켜야 할 부분은 무엇입니까?
말씀 맺어요. 성령의 권한은 죽은 사람을 살리심을 믿어야 해요. 부활이 개념이 아니고 실제로 믿어져야 해요. 여러분들 용서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으면 부활이 안 믿어지는 거예요. 그런데 안 믿어지는 사람 앞에서 어찌 못 믿느냐가 아니고 나도 그랬다의 고백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나의 그 정말 가시채를 뒷발질하는 그런 피흘림이 예수를 박해하는 것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목장 모임 참석
미혜, 연수, 예선, 민희
기도제목
미혜
가시채를 뒷발질하듯 자기 비하로 자책할 때가 많은데 그것이 예수님을 핍박하고 슬프게 하는 일임을 알고 나에게 집중하시는 예수님의 사랑을 더 사모하기를
회사에서의 나의 역할과 경계를 바로 알고 권한을 넘는 일을 하지 않기를
아빠 영혼 구원과 부모님 건강 지켜 주시기를
우리 목장 식구들 매일 똑같은 일상을 여전하게 잘 살아 내기를
지영
엄마 2차 항암해서 기적같이 암세포가 줄어들어 제 곁에 건강하게 계시기를
엄마 생명줄 이어주셔서 건강한 몸이 될 수 있도록 기적을 베풀어 주시기를
누구한테는 명절이고 쉬는 날이지만 저희 가족은 전쟁터입니다. 아버지께서 이 수고와 고통을 아시고 기적을 베풀어 주시기를
예선
가시채를 뒷발질하듯 사건이 오면 옳고 그름으로 피해자, 가해자로 나누어 정죄 판단하는데 인간은 모두 100% 죄인임을 기억하며 그날 주시는 말씀으로 목장에 잘 물으며 갈 수 있도록
추석 때 경계를 잘 지키며 나의 자리 잘 지킬 수 있도록
목장 식구들과 공동체 지체들을 위해 기도의 자리 잘 지키며 갈 수 있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