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단이 목장 보고서
■예배일자:2022년 9월 4일
■예배장소: 파리크라상
■참석인원:오OO, 김OO, 윤OO, 송OO,박OO(총 5/8명)
■목장풍경
소희의 결혼예배가 한 달 앞으로 다가와 청첩장을 받았습니다:D~ 초록초록하니 너무나도 예쁜 청첩장이었습니다♡
결혼식 날짜가 다가오니서로 예민해져서 작은 다툼이 있다고 하는데 그 과정을 잘 통과해가기를 기도합니다~!
또 오늘은오랜만에 예진이가목장에나왔습니다!!:D
다음주에는 함께 현장예배를 드리기로 했는데 꼭! 꼭!~ 함께 예배드릴 수 있도록 기도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우리 목장 식구들이 한 주간챌린지를 하기로 했는데 할 수 있는 힘 주시고, 못하더라도 가시채 뒷발질하며 자책하지 말고, 모두 화이팅입니당♡!!
■말씀읽기
본문:사도행전 26:8-15
제목:성령의 권한
설교: 김양재목사님
■설교요약및 적용질문
요즘 뉴스를 보면 자신에게 주어진 권한을 얼마나 잘 사용해야 하는지를 새삼 생각하게 됩니다.
권한이 클수록 권한의 경계를 지키기가 어렵습니다.
그것이 남의 일이면 분별이 잘 되지만 자기 일이 되면 눈이 가려집니다.
아그립바가 유대인의 왕으로 유대인의 사정을 너무 잘 알지만 로마 편에 서 있습니다.
추석 명절의 하이라이트는 집안싸움이라고 합니다.
내 사정을 잘 아는 부모, 형제, 남편, 아내이지만 늘 다른 편에 서 있습니다. 그래서 남의 편, 남편입니다.
다른 편에 서 있는 그들에게 성령의 약속을 받은 내가 오직 구원을 위해서 세상의 권한이 아닌 성령의 권한으로 나가야 합니다.
성령의 권한은?
첫 번째, 죽은 사람을 살리심을 믿어야 합니다.(8절)
사두개인과 달리 바리새인은 부활을 믿습니다.
그런데 부활을 경험한다는 것을 믿을 수 없는 일로 치부했습니다.
게다가 듣기만 해도, 보기만 해도 저절로 무시되는 극형을 받고 죽은 나사렛 청년, 목수의 아들, 예수가 부활했다는 일은 더더욱 못 믿을 것이었습니다.
부활을 가능한 개념으로만 믿는 것은 부활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가능한 개념으로만 믿는 것은 사실 하나님을 믿는 게 아닌 것과 같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계심을 믿어야 합니다.
개념이 아니라 실재! 在(있을 재) 온 우주를 다스리시는 주님이 계심을 믿어야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ex. 세상에서 가장 좋은 부모라는 개념을 머릿속으로는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개념은 나를 낳고 기르신 내 부모가아닙니다.
부족하지만 내 앞에 계신 나의 부모님이 나를 존재하게 한, 나를 예수 믿게 한 진짜 부모입니다.
나를 버렸어도 우리들교회에 와서 엄마를 용서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부활을 머릿속으로 아무리 생각한다고 해도 절대로 용서할 수 없는 부모님을 지금도 용서하지 않으면 부활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유대인들)은 이미 어떤 현상을 믿고 안 믿고를 떠나 설령 눈앞에 예수님이 나타나더라도 그들 마음속에 이것은 믿을 것이 못된다고 여기고 있는 것입니다.
⊙ 여긴다 = 헬라어로 크리노 :판단하다, 결정하다, 정죄하다, 비난하다, 헐뜯다.
☞ 부활을 못 믿을 것이라고 판단하고, 결정하고, 더 나아가 부활을 비난하고 헐뜯고 있는 것입니다.
수많은 부활을 이 자리에서 목격하고 들었습니다. 그런데 왜 못 믿을까?
밤낮으로 섬기고 바라고 바랬던 부활이었는데 막상 별반 다를 바 없는 내 환경, 다를 바 없는 내 고난, 다를 바 없는 예수님의 부활을 보니까 믿기가 싫습니다.
짠! 하고나타나지가 않는 것 같습시다. 그래서 계속 못 믿을 것으로 여깁니다. 여기는 것에서 끝나지 않고 헐뜯습니다.
하지만 이 모습은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기 전의 모습입니다.
성령의 약속으로 이 땅에 다시 오실 예수님은 온 세상을 발아래 두고, 해처럼 빛나고, 모든 달과 별을 몸에 두르고, 온 세상의 세력들을 멸하실 모습으로 반드시 오십니다.
이 모습은 우리가 기복에서 팔복의 가치관으로 바뀔 때! 이 땅에서 중력에서 무중력으로 나가는 것처럼 이 땅에서도 맛보게 하시는 부활의 모습입니다.
우리는 중력의 영향 속에서 뾰족한 연필 하나를 세울 수 없습니다. 그런데 무중력으로 나가면 섭니다.
ex. 다리 재활-무중력 상태에 발을 놓으면 움직일 수가 있는 것, 수영장에서 쉽게 움직일 수 있는 것
⊙ 팔복의 가치관: 도저히 내가 할 수 없는데.. 둥둥 떠다니게 되는 것입니다.
[목사님 남편]
남편이 가기 전까지 남편은 하나도 안바뀌었습니다.
남편이 갑자기 변해서 목사님을 사랑해 주고, 피아노 치게 하고, 외출하게 하고 그런 모습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도리어 가기 전에 옷에 샴푸를 들이붓고 성경책을 찢었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목사님이 부활이 정말 있긴 있는 거야? 의심한 것이 아니라
점점 둥둥 떠다니니까 남편이 '밥!' 하면 밥 차리고, '외식!' 하면 외식하고, '들어가!' 하면 들어가고, 복숭아를 던지면 떨어진 복숭아를 주워 먹고..
어떻게 그럴 수 있나? 성령의 권한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제 힘이 아닙니다. 팔복의 가치관으로 둥둥 떠다닐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내가 죽은 자임이 깨달아져야 합니다. 죽은 체하는 것이 아니라.. 죽은 체하면 그 무거운 십자가 때문에 늘 불평하다가 깔려죽습니다.
그런데 좋은 왕, 부모가 내 임금이고 부모이지 가족 버린 부모, 이혼한 부모,때린 부모는 내가 교회를 다녀도 용서가 안 되는 것이 부활을 못 믿는 것입니다.
ex. '나는 몇 월, 며칠,몇 시에 그 부모의 모습을 용서할 수 없어! 그때 나를 안 데리러 온 그 부모를 용서할 수 없어!'
내가 죽으면 십자가가 아무리 무거워도 느껴지지 않습니다.
죽을 뻔한 자, 죽을 자가 아니라 나 같은 죄인, 나 같은 죽은 자도 살리셨으니까 하나님께서 저 사람도 살리실거야~가 깨달아져야 성령의 권한이 주어집니다.
결코 부활과 상관없다고 여겨졌던 목사님 남편에게도 죽은 자의 부활이 임한 것입니다.
부활은 본질적으로 하나님의 권능에 속한 사건입니다.
그러나 이 부활을 맛본 사람들은 내가 둥둥 떠다니니까 너무 안타깝게 애쓰는 사람을 보고 설명해 주고 싶습니다.
듣던지 안 듣던지 우리는 잠시 후에 내 고향으로 가야 하니 가기 전에 어떤 욕을 먹든지 설명을 하고 싶은 것입니다. 하다가 가야 합니다.
내가 밤낮으로 예수를 섬겼으니 이미 내 속에 부활이 이루어졌습니다. 그런데 아직 남은 부활이 있습니다. 이것을 성령의 약속으로 받았습니다.
그러니까 내가 하루아침에 행함이 완전해지지 않습니다. 그런 권한은 주지 않으셨습니다.
지옥같은 내 환경, 변하지 않는 내 환경, 믿어도 부활은 눈꼽만큼도 볼 수 없는 내 가족들이 있습니다.
여전히 외도하고 술 먹고 행패를 부리고 정신이 이상하고.. 나를 괴롭히는 내 옆의 식구를 바라보며
우리는 아그립바왕 옆에 서 있는 유대인들처럼 부활을 못 믿을 것처럼 여기며 나를 영화롭게 해줄 새로운 부활을 찾아다니며
새로운 남편, 새로운 직업, 새로운 중독을 찾아다니면서 합리화하며 산으로, 들로 갑니다.
내 가정에는, 저 사람 속에는, 그리고 무엇보다 내 속에는 더 이상 부활이 없다고 여기지 맙시다!
이번 추석 때 저 집구석은 절대 안변해! 판단하며 헐뜯고 마음속에 못 믿을 것으로 여기지 말고, 성령의 권한이 임해서 사명 감당합시다!
Q 1. 부활이 개념으로 믿어집니까? 실재로 믿어집니까?
Q 2. '저 사람은, 저 가정, 나는 절대 변하지 않아' 하며 못 믿을 것으로 여기는 것은 무엇입니까?
Q 3. 죄로 인해 내가 죽은 자임이 인정이 되십니까?
두 번째, 나도 그랬다의 고백이 있어야 합니다.(9-12절)
'어찌 못 믿을 것으로 여기십니까?' by바울: 도발적인 질문을 한 것 같지만 그것이 아닙니다.
[바울의 간증 3번]
9장-제3자인 누가가 쓴 것 / 22장, 26장-바울이 직접 간증 설교한 것입니다.
자세히 보면 모든 간증이 청중에 따라 조금씩 다르지만 한 인생의 스토리가 3번이나 성경에 기록이 됐습니다.
대단한 복음을 전한 기록보다 이런 바울의 간증이 훨씬 더 자세히 기록되어 있고, 반복되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내 수치와 죄와 연약함을 간증하는 것이 성령의 권한이 주어지는 비결입니다.
내 간증, 바울의 간증! 성령이 임하지 않으면 '왜 그 쓸데없는 이야기를 자꾸 해요?!', '똑같은 간증을 왜 똑같이 해요?!'합니다.
그러나 성경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자기 죄에 대한 솔직한 고백은 고백하는 그 사람의 영혼을 소생하게 하는 힘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때마다 성령이 다르게 역사하십니다. 30년을 간증해도 때마다 다르게 역사하십니다.
그러니까 '목사님은 왜 똑같은 간증하러 미국 가냐?!' 이런 분들이 계시는데 부활이 안 믿어져서 그렇습니다.
9절에 '나도 너희와 똑같이 예수님을 대적하는 사람이었다~'라고 시작합니다.
이것은 이러한 의식이 이미 유대인 사회 전반에 널리 퍼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그 가운데 한 사람일 뿐입니다.
우리 모두 예수 믿기 전에는 누구나 할 것 없이 예수의 대적자로 사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착한 사람, 나쁜 사람이 없습니다.
예수는 바리새인, 사두개인이 같이 힘을 합하여 죽이자고 했습니다.
보통 때는 첨예하게 대립되어 있다가 예수님 죽이자고 할 때는 같이 모여서 죽이자고 했습니다.
이 땅은 그 누구도 예수님의 대적자입니다. 그러니까 누구에게 점수를 줄 게 없습니다.
10절에도 번역은 안되었지만 '나도 똑같았다.' 이러면서 '내가~' 이렇게 시작합니다.
'내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밤낮으로 열심히 했던 일이 뭔지 아세요? 많은 성도를 옥에 가두고, 죽이고, 강제로 모독하는 말을 하게 하고,
예수님을 배반하게 하고, 땅끝까지 이르러 이렇게 심히 격분해서 쫓아가서 그들을 박해했다.'고 합니다.
여기서도 부족해서 외국에서! 다메섹까지 가서 박해를 했다고 합니다.
바울은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어떤 바리새인보다도 압도적인 예수님의 대적자였다는 것입니다.
내가 그런 대적자였다는 것입니다.
이 압도적 지위를 확실히 표현하는 단어가 권한입니다. 헬라어로는 엑소시아(자기 존재-우시아를 발산한다)
힘과 권세를 행사할 수 있도록 공적으로 주어지는 자격을 의미하는데 산헤드린 권한 + 위임까지 받아서 막강한 권한으로 예수님의 대적자로 군림했습니다.
대제사장이 바울에게 준 권한은 예수님을 믿는 성도를 괴롭히고 체포할 권한이었습니다.
바울은 그 대제사장의 종이자, 수단입니다.
성도들은 바울의 그 권한 아래에 있어야만 하는 대상이었습니다.
즉, 수직적, 종속적 관계(주인과 종의 관계)입니다.
바울이 인간 대제사장의 종으로 이 일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더 엄하게, 더 가혹하게 권한을 행세합니다.
권한이 없을 때는 다 올라가면 잘 할거 같아도 내가 정작 종(노예)으로 있다가 올라가면 권한을 마음껏 행사하면서 더 엄하게+ 가혹하게 행사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자기 존재가 종에서 끝날 것 같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권한으로 권한 아래에 있는 사람을 괴롭게 하면서 자기 존재(우시아)를 발산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실상은 한 줌뿐인 권한에 취해서 진짜 자기 주제를 넘어서는 것입니다.
이것이 세상 권한의 공통 특징입니다.
이렇게 악하게 세상의 권한을 휘두르다가 자신이 인간으로서 얼마나 월권을 했는지 이실직고합니다.
'나도 똑같다!' 사람들이 바울을 죽이려고 하는데 '나는 더 했다.'하며 자신의 죄악을 낱낱이 고백하는 것입니다.
ex. 가족을 사랑한다고 생각하며 했던 일이, 인생을 열심히 살아보겠다고 했던 일
= 밤낮 내 자녀를 죽이고, 옥에 가두고, 하나님을 모독하게 하는 말을 하게 하고, 자녀를 격분하게 하는 일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자녀를 사랑해서 자녀가 원하는 대로 교회를 빠지게 하고, 열심히 공부를 시켰더니 그 자녀들 입에서 하나님을 모독하는 말이 그냥 자연스럽게 나오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처럼 죽이고, 모독하고, 격분하게 하고, 옥에 가두었던 일들이 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인 줄 알았다고 고백합니다.
그 출발은?! 스스로 생각해서 한 일이라고 합니다.
스스로 생각해서 대제사장에게 그 권한을 위임받아서 스스로 백성들을 핍박했습니다.
이 일이 정말 자녀를,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위한 일이라고 생각된다면 꼭 물어봅시다! ★스스로 생각하지 말고 목장과 공동체에 물어봐야 됩니다.★
다들 내가 너를 사랑해서 그랬다고 합니다.
내가 스스로 생각한 그 일이 결국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죽이는 일이고, 예수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일일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회심 전의 사도바울은 악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율법의 의로 흠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속에 선한 마음을 가득 품고, 그것을 실행하기 위해서 애썼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바울의 겉으로 나타난 행동은 의나 선이 아닌 악이었습니다.
내가 아무리 선한 일로 열심히 해도 겉으로 나타나는 모습은 악입니다.
그러면 그것은 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니까 바울은 속에 선이 가득한데 이유를 알 수 없는 분노에 사로잡혀서 전혀 죄가 없는 그리스도인들을 향해서 폭발을 시킨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육체로 나와서 거듭나지 못한 사람들의 실체입니다.
윗사람의 명령을 받고 하는데 그게 그렇게 화가 날 수 있을까?
대제사장 편에 들려고 너무 분해서 별소리를 다 합니다.그런데 자기 죄를 모릅니다.
거듭나지 못한 상태의 사람들은 윗사람 말을 듣습니다. 왜? 나도 엑소우시아!
나도 장차 저 상관처럼 될 것이니까..
그러니까 육체로 난 자는 자기 권한(아버지의 권한, 상사의 권한..)으로 마구 박해를 합니다.
권한을 얻으려고 하는 것은 다 박해를 위함입니다.
★누군가를 진심으로 사랑하기 위해서는 내 자아가, 내 생각이 먼저 무너져 내려야 됩니다.★
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을 내 방식대로 섬기고, 스스로 생각해서 결국은 그 사람의 입에서 하나님을 모독하게 하는 말이 나오게 하고 격분하게 하는 일이라는 것을 모릅니다.
그렇게 싸우는데 서로 옳다고 합니다. 옳고 그른 사람이 없습니다. 똑같이 다 혈기를 냅니다.
★결국 내 자아가 하나님의 원수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예수를 대적하는 가장 큰 대적은 바람, 도박, 술도 아닌 자기애와 자기열심입니다.
자기를 사랑하면 십자가의 최고의 원수가 되는 것입니다.
내 열심, 내 생각이 구원을 가로막고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이런 사람들이 꼭 많은 일을 행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많은 일을 행할수록 많이 죽이고, 많이 핍박함을 깨달아야 합니다.
제발 스스로 생각하지 맙시다!
박사 할아버지라도 공동체에서 목장의 말을 들어야 합니다.
목장이 잘나서가 아닙니다. 목장에서 물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그 겸손함을 보십니다.
남편이 목사님을 너무 사랑해서 외출도 못하게 하고, 친구도 못 만나게 하고, 꼬박꼬박 집에서 삼시세끼를 챙겨 먹었습니다.
어느 날 목사님이 머리를 잘랐는데 불같이 화를 냈습니다.
왜 잘랐는지 그 마음에는 관심도 없고, 오직 이유는 자기가 먹여 주고 재워 주고 돈 벌어주고 했는데 자기가 긴 머리를 좋아하는데 왜 잘랐냐 이겁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모든 것을 준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자기 생각에서부터 출발하는 이런 사랑이 얼마나 상대를 죽이고 있는지 깨닫지 못합니다.
부모들이 그렇습니다. '내가 먹여주고 재워주고 학비 다 줬는데 왜 너는 내 말을 안 들어?!'
큰 권세가 있을수록, 환경이 좋을수록 깨닫지 못하고 내가 해준 게 많다고 합니다.
바울도 대제사장의 권세까지 받고 위임을 받아서 그 일이 예수님을 대적하는 일이라고 결코 깨닫지 못합니다.
부활을 개념으로 믿고 있습니다. 이방인도 아니고 유대인들(모태신앙)이 바울의 복음을 목숨 걸고 막고 있습니다.
[크레이그말킨-에코이스트]
⊙ 에코이스트: 이기주의와 반대되는 성향으로 주목받는 것 싫어하고, 늘 문제만 생기면 자기 탓하고, 유독 자기에게 엄격하고, 갈등은 늘 피하고,
남의 말은 늘 잘 들어주는 너무 이타적인 성품입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 존재하는 많은 에코이스트들은 나르시시스트들을 자석처럼 끌어당기는 원인이 된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많은 고통을 받고 끌려다닌다고 합니다.
그래서 나르시시스트는 소시오패스만큼 위험한 존재라고 하는데 성품으로 에코이스트가 되어서 평생 끌려다니다가 가스라이팅도 당하고 자살도 합니다.
그런데 부활이 안 믿어지는 사람은 다 똑같습니다. 피해자, 가해자가 다 똑같습니다.
평생을 바쳐 소시오패스를 연구한 마사 스타우트의 답은 나르시시스트보다 더 똑똑해져라. 그러기 위해서는 알아야 한다고 합니다.
거기까지입니다. 어떻게 알아야 할까?
팔복의 가치관으로 가는 큐티와 목장의 대안을 제시해야 하는데 분석만 합니다.
그러니까 사실 예수 안 믿으면 나르시시스트나 에코이스트나 똑같습니다.
도리어 에코이스트가 믿기 너무 어렵습니다.
그래서 그걸 읽으면서 내가 믿음이 있는 것이 아니라 혹시 에코이스트가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그러니까 이 성품 때문에 속습니다.
완전히 회개하고 다시는 죄를 짓지 않는 상태는 천국에서 영화롭게 된 상태입니다.
이 땅에서 우리에게 그런 상태의 권한은 주지 않으셨습니다.
우리는 내가 안되는 것 때문에 전도를 못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안됩니다.
천국에 가는 그날까지 완전에 이르지 못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출애굽 한 백성에게 가나안 땅에서 ★대적을 한번에 다 쫓아내신다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조금씩 쫓아내시겠다고 하셨습니다.★
무엇이 조금씩? 점진적인 것이죠?
그냥 매일 여전한 방식으로 큐티하고, 그만큼 회개하고, 이루어가는 모습이 소시오패스나 이 모든것에서 해결될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우리들교회 와서 놀라운 간증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누구도 불쌍한 사람 없습니다. 예수 안 믿는 사람이 제일 불쌍합니다.
매일 목장에서 남편 욕, 다른 목자 욕하는 것은부활을 개념으로 믿어서 그렇습니다.
내가 예수 믿으면, 팔복의 가치관으로 둥둥 떠다니면 무게가 안 느껴집니다.★
그 상황으로 가시기 바랍니다.
Q 1. 내 권한이라 여기며 자랑스럽게 여기는 영육의 역할은 무엇입니까?
Q 2. '나도 그랬다!'며 이번 명절에 내 간증을 준비하고 있나요?
Q 3. 나는 자기애성의 나르시시스트입니까? 남만 생각하는 에코이스트입니까?
[허풍을 낱낱이 고백한 부목자님]
가난이 콤플렉스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고 성형외과 의사라는 직업으로 실제 가진 것 없어도 가진 자처럼 살았음.
몰래 카드 만들어드리기, 송금하기, 회식 비용 계산하기 등등..
옷 욕심 없다고 말하지만 가끔 살 때면 꼭 명품 옷을 사고, 좋은 차, 능력있는 남자는 여자친구 하나는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음.
결과적으로 능력이 없어서 빚을 지며 두 집 살림을 살았으니 얼마나 큰 죄인인지 모름.
회칠한 무덤-세상적으로 멋있게 살고자 했던 바램: 복음은 모르고 위엄만 내세운 허상이었음
☞ 인간이 100프로 죄인인데 어떻게 깨달았나? 아들이 수고해줘서 낱낱이 고백을 했습니다.
세 번째, 나의 피 흘림이 예수를 박해하는 것임을 깨닫는 것입니다. (13-15절)
바울은 '왕이여~'로 시작하며 아그립바에게 집중해서 복음을 전합니다.
1절~ 아그립바에게 얘기하다가 8절부터 유대인에게 말하다가 다시 한 명에게 집중을 합니다.
바울은 9장 3절과 22장 6절에서는 하늘에서 내려온 빛이 자신을 둘러 비추었다고 개인적 경험을 강조했는데
오늘 13절에서는 나와 내 동행을 둘러 비추었다고 객관적으로 증명할 수 있는 사건임을 말합니다.
[앞 간증과의 차이]
⊙ 9장: 눈뜨게 해준 아나니아가 길게 등장합니다.
⊙ 15절: 예수께서 자신을 소개할 때 나사렛 예수라 했던 이전 본문과 달리 나사렛이라는 말이 빠졌습니다.
나사렛을 비하하고 있는 아그립바에게 굳이 나사렛이라는 말을 쓸 필요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9절에서 자신이 핍박자로 행할 때는 자기가 나사렛 예수를 핍박했다고 합니다.
☞ 항상 상대에게 맞는 말 한마디, 어휘 하나가 굉장히 중요합니다.
사막의 정오보다 훨씬 더 밝은 빛이 비춰서 모두 땅에 엎드러지는 본문이 나왔습니다.
눈을 뜰 수 없는 빛으로 찾아오셨습니다. 출애굽기에서도 번개와 나팔로 찾아오셨습니다.
우리는 주님을 보면 다 엎드러집니다.
왜 엎드러져야 하는지를 설명해 주십니다.
히브리말로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가시채를 뒷발질하기가 네게 고생이다.'
⊙ '사울아~ 사울아~': 바울에게 너무나도 익숙한 어릴 적부터 사용했던 바울의 모국어(체면, 학력 등이 하나도 없는 아기시절 바울도 알아들을 수 있는 모국어)
예수님의 관심사는 바울이 핍박하는 그리스도인들 이전에 오직 바울 한 사람입니다.
그러니 히브리어로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직접화법으로 생생히 기록한 것입니다.
⊙ 가시채: 당시 농경문화에 있던 그들이 들으면 누구나 알 수 있는 비유적 표현입니다.
이 뜻은 이 당시 가시채를 차서 심하게 상처 입은 소에서 유래했습니다.
소가 말을 듣지 않을 때 뒤에서 뾰족한 쇠나 가시 달린 막대기로 찌르는데 소가 반항해서 뒷발질을 할수록 그 소가 점점 더 심하게 찔리게 되어 고통을 당하게 됩니다.
☞ '바울아~ 네가 바로 이 소야. 네가 교회를 핍박하고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는 것 같은데 사실은 네가 너 스스로를 찌르고 지금 피 흘리고 있는거야.'
⊙ 이전 본문 해석: 왜 나를 박해하니? = 나를 믿는 사람들과 교회를 핍박하는 것이 결국 나를 핍박하는 것이다.
오늘 본문에서는 '바울아~ 나의 관심사는 너 한 사람이다.'
즉, 바울이 전도자가 되든 안 되든 무엇을 하든 안 하든이 아니라 남을 핍박하는 것 같지만 스스로 핍박하며 피 흘리는 바울 자체에 주님이 관심을 가지시고 계시는 것입니다.
바울이 1,2,3차 전도여행이 끝나고 핍박을 받으며 3번째 간증에서 자기 자신을 직면했습니다.
'네가 그토록 열심히 뒷발질하면서 가시에 찔려 고통스러워하는 것이 바로 나를 핍박하고 박해하는 것이야.'
'바울아, 네가 어찌 나를 그렇게 박해하냐? 이 가시채로 뒷발질하기가 네게 고생이야.' = 바울 너의 아픔이 나의 아픔이다.
☞ 바울은 자신의 삶을 간증하면서 자신의 상처를 위해 십자가에서 박해당하신 예수님의 사랑을 아그립바왕에게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왕이시어, 아무도 알지 못해도 당신의 삶 속에는 커다란 가시채가 있는 것을 알아요. 당신이 입은 화려한 옷 속에 수많은 상처로 난도질당한 깊은 상처를 예수께서 아셔요.
왜? 제가 그런 삶을 살았기 때문이에요. 당신이 피 흘리며 아파할수록 예수님께서도 함께 피 흘리시며 박해를 당하십니다.
이해할 수 없는 부모의 수치스러운 죽음과 가계의 비극과 근친상간 등 피로 얼룩진 삶 속에 결코 해결할 수 없는 거대한 가시채가 있는 것을 제가 압니다.
그런데 이제 그만 뒷발질하세요. 당신이 아파할수록 그것이 예수를 박해하는 것입니다. 당신은 유대인의 왕이잖아요.'
바울이 자신의 삶을 간증하며 아그립바왕에게 전했듯이 우리도 이렇게 추석에 가서 전해야 합니다.
난리를 치는 사람들일수록 아픔이 많은 것입니다. 자신을 찌르고 있는 것입니다.
스스로 아파하면서도 계속 뒷발질하며 자해하고 상처 입고, 우리 아이들이 매일 자해, 자살기도, 약 먹고 피 흘릴 때 누구보다도 예수께서 같이 상처를 입고 피 흘리신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당신은 누구십니까?'하니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
내 속에 수많은 상처와 가시채를 보면서 예수님도 함께 아파하고 피 흘리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사랑을 깨달을 때, 가시채인지 알면서도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몰라서 어리석은 소는 계속 뒷발질합니다.
딱 멈추면 되는데 그냥 소는 너무 열심히 살지 않나?
칼로 난도질된 내 발과 손을 보면서, 수많은 말과 폭력으로 난도질당한 내 마음과 기억들을 보며 이것이 내 핍박이고 내 고난이다~ 이제 그만 아파하라고
'그렇게 네가 가시채를 뒷발질하기가 네게 고생이야~ 그리고 이 고생좀 그만해.'
★'그냥 스톱만 하면 되는데.. 네가 할 것은 아무것도 없는데..'★
예수님은 바로 이런 사랑으로 우리 죄를 위해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으셨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사랑으로 이제 우리의 고난을 내려놓고 스스로 그 사랑에 매이면 성령의 권한이 임하실 줄 믿습니다.
내가 열심히 하려고 하는 것에서 나를 딱! 내려놓고~!
아이가 이 땅에 올 때는 주먹 쥐고 오지만, 죽을 때가 되면 잡은 손을 내려놓듯이 이 땅에서 그렇게 내려놓으면 됩니다.
앞선 2번의 간증 속에서는 가시채 얘기가 안나왔습니다.
유대인들한테 죽이려는 모함을 받고 3번째 간증을 하면서 바울은 그들을 미워하는게 아니고 좀 더 자신을 직면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주님이 나 때문에 얼마나 힘드셨을까?
자신을 생각하면 유대인들의 죽이겠다는 박해는 당연히 받아야 된다는 생각이 들었으리라 생각합니다.
가시채를 뒷발질하는 소처럼 그 유대인들이 그렇게 뒷발질하는 것을 보면서 바울은 지금 피눈물이 흐르는 것입니다.
자기는 지금 둥둥 떠다니는데.. 조금 있으면 천국으로 가야 하는데..
유대인들의 삶 속에 이런 커다란 가시채가 있는 것을 그들이 지금 모르니까 눈물이 납니다.
그래서 할 수없이 정오의 빛보다 더 밝은 빛으로 오셔서 자신을 엎드러지게 했다고 간증을 합니다.
★내가 너무 말을 안들으니까! 내가 가시채를 뒷발질하고 있으니까! 주님은 내 눈을 멀게 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 간증입니다.★
성경이 끊임없이 성도들에게 순종할 것을 강조하는 것은 교회를 위해서가 아닙니다.
목회자를 위해서도 아니고, 예수님을 위해서도 아닌 나 자신을 위해서입니다.
가시채를 그만 뒷발질하라고.. 그렇게 찌르고 있냐고..
'나를 괴롭혔잖아! 나는 그거 용서 못해! 몇 월 며칠 몇 시에! 사과받아야해!' 이런 걸로 평생을 가시채로 뒷발질하고 있잖아요.
인생 최고의 상급은 내가 뭔가를 할 수 있게 해주는 건강, 권력, 돈, 자녀, 명예, 지식이 아닙니다.
자녀를 교회 안오게 하고, 학원 보내고 이러는 것이 아닙니다.
부활의 주님을 만났다면 이제는 다른 권한을 찾아 기웃거리는 일을 멈춰야 합니다.
주님이 최고의 상급이심을 고백하면서 정말 주님이 주시는 성령의 권한을 누리기 바랍니다.
바울도 이 정도나 되어야 가시채, 뒷발질 이야기가 나오는걸 보면..ㅜㅜ
우리는 성령의 약속을 기다리며 기도할 수밖에 없습니다.
Q1. 주님은 내게 가장 밝은 빛이십니까? 더 밝게 여기는 빛이 있지는 않습니까?
Q 2. 내 삶에 결코 해결할 수 없는 아픔, 나를 계속 찌르는 가시채는 무엇입니까?
Q 3. 내가 스스로 정죄하며 비난하고 자해하는 것이 예수를 박해하는 것임을 아십니까?
Q 4. 그 가시채로 인해 내 삶을 돌이켜야 할 부분은 무엇입니까?
■기도제목
오OO
1.좋은 마음이라는 나의 마음에 집중하지 말고 친구, 부모님의 마음에 집중해서 말할 수 있도록
2. 집주인 할머니가 계약만료로 다시 계약서를 써야 한다고 하는데 월세나 관리비 등 오르는 것 없이 그대로 재계약될 수 있도록
그 이야기를 하는 과정에 갈등없이 진행될 수 있도록
김OO
1. 큐티하기
2. 동생이 회사가 바빠서 교회에 안나오는데 교회에 나올 수 있도록
3. 결혼식이 얼마 안남은 상황이라 예민한데 서로 배려하면서 준비할 수 있도록
윤OO
1. 작정기도하고 있는 것 열심히 할 수 있도록
2.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향으로 갈 수 있도록
송OO
1. 이번주에 운동과 차단인증하고 앱 깔지 않을 수 있도록
2. 나를 칭찬하는 습관 기를 수 있도록
박OO
1. 정말 중요한 전공 공부 할 수 있도록
2. 추석 때 엄마,아빠가 하자는대로 묵묵히순종할 수 있도록
3. 아빠와 공예배 참석할 수 있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