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821 성령의 위엄
사도행전 25:23-27
요즘 화제인 드라마가 있죠. 자폐 스펙트럼이 있는 정말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를 보니까 법률 실력이 너무 탁월하니까 그 실력 하나로 결정적으로 약자를 살려내니까 그렇게 이상한 부분이 다 감춰지고 좋은 일을 하는 데는 위엄이 따르더라고요. 그래서 우리가 그렇지 않은가 싶어요. 성경 구절 하나로 사람 살려내면 우리들의 찌질한 모습이 다 감춰지고 우리들에게도 성령의 위엄이 따르는 줄 믿습니다.
성령의 상소는 그래서 인내가 따라야 하는데 비굴과 위축함으로 인내하면 아니함만 못하죠. 제가 그랬자나요. 어머니에게 비굴하게 '네, 네.' 하다가 '예배 드리십시다. 기도 드리십시다.' 할 수 있었던 것이 어머니의 구원 때문에 인내를 하니까 성령의 위엄을 주신 것이죠. 그런데 구원은 이 세상 어떤 일보다 가장 좋은 일이기 때문에 구원 때문에 인내하면 위엄을 주십니다. 내가 너무나 당하는 것과 상관없이 나에게는 하나님의 자녀라는 자존감이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이 시간 예수 믿는 우리에게 허락된 성령의 위엄이 무엇인지 함께 말씀을 듣도록 하겠습니다.
1. 과시가 아니라 자신의 수치를 드러낼 때 주어집니다. (23절)
23 이튿날 아그립바와 버니게가 크게 위엄을 갖추고 와서 천부장들과 시중의 높은 사람들과 함께 접견 장소에 들어오고 베스도의 명으로 바울을 데려오니
-> 23절입니다.
베스도가 이제 엄청난 지금. 쇼를 계획을 했어요. 어마어마한. 로마 황제에게 상소한 바울을 심문하기 위해서 아그립바 왕과 버니게가 크게 위엄을 갖추고 접견 장소로 나오는 것이 오늘 본문의 시작이죠. 그런데 이때 그들이 바울의 말을 듣기 위해 왔는데 특이하게 크게 위엄을 갖추었다고 묘사를 해요. 즉, 위엄이 있는 게 아니라 위엄이 있어 보이려고 지금 갖추었다고 하는 거예요. 자신을 과시하려고 호화찬란한 모습으로 접견 장소에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위엄이라는 단어는 일반적인 단어로 영광, 위대함, 화려함, 탁월함 이런 단어가 아니고, 누가가 쓴 단어는 판타시아예요. 우리가 자주 쓰는 판타지 바로 여기서 온 말입니다. 공상 상상, 환상이라는 뜻이죠. 이 단어는 신약에서 여기서 단 한 번만 쓰였는데, 이 단어는 구약의 70인 역에도 네 번 밖에 안 쓰였는데 네 번 중 두 번은 상상으로 쓰였습니다. 하박국이나 스가랴에 구름이나 바다의 움직임을 마치 사람의 움직임처럼 상상해서 표현할 때 썼어요. 구름이 막 너무 대단하면 사람, 의인화해가지고. 그런데 사실 허구죠. 그런데 나머지 두 번은 하박국 2장 18절부터 보면 우상에 대한 번역어로 쓰였습니다. 겉은 화려하지만 그 속에 생명은 전혀 없는 그 우상의 헛됨을 강조하기 위해서 우상을 이 판타시아로 번역을 했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우상은 진짜 신이 아니라 인간이 상상으로 만들어낸 허구라는 뜻입니다. 아그립바와 버니게가 옷과 치장과 자태와 신하들로, 다들 대단히 옷을 입고 나왔는데 신하들도 안 그렇겠어요? 잔뜩 부풀린 큰 이 위엄이야말로 세상 사람들이 누구라도 한 번쯤 가져보고 싶은 판타지입니다. 그런데 이 판타지는 아무리 좋아야 판타지예요. 그림의 떡예요. 실상이 아니예요. 허구예요. 그런데 이 심문 쇼를 대단히 화려하게 한 거는 저는 그만큼 바울에게 열등감이 있어서 이렇게 화려하게 꾸몄다고 생각을 하는데요. 이 심문 쇼의 감독 베스도가 주인공 아그립바의 상대역으로 정한 피고 바울이 등장하는 거예요. 입장을 합니다. 원어로는 끌려나왔다예요. 베스도나 아그립바나 버니게나 찬부장들이나 높은 사람들이나 그 동작이 모두 능동태인데 바울만 수동태입니다. 그 높은 사람들에게 바울이 지금 구경거리가 되어서 지금 심문을 받는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지금 위엄을 뽐내는 다수의 높은 사람들 앞에서 세상 위엄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이 초라하게 서 있는 바울이 택자인 거예요. 감옥에 갇혀 있던 바울 자신은 정말 초라하기 짝이 없는 노인이고 키도 작고 대머리예요. 다리도 휘어서 안짱다리이고 코도 삐뚤어져서 매부리코라고 해요. 외모로도 아주 밀립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조용하지만 그리스도를 닮은 기품과 자신감으로 이 법정을 압도했어요. 우영우가 법정을 압도하자나요, 그렇죠? 실력이 있으면 압도해요. '하나님이 어떻게 볼까?'가 중요하지 '사람이 어떻게 보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죠. MRI를 찍으러 가면, 그걸 찍으러 가야 되는데 있는 대로 화려하게 치장하고 가면 진짜로 중요한 건 내장인데 얼마나 웃겨요, 그렇죠? 그러니까 지금 이제 그 접견 장소에서 바울만 유일하게 내장이 병 들은 거 아는 거죠. 세상의 위엄이 허상임을 알고 성령의 위엄 앞에 무릎을 꿇고 순종하여 지금 사명을 감당하고 있기 때문에 위엄이 있는 거죠. 그런데 잘 보세요. 그들은 자신을 드러내기 위해서 수많은 옷과 화려한 장식품을 갖췄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들은 드러낸 것이 아니라 옷 속에 자신들을 숨긴 거죠. 겉을 드러내고 과시할수록 자신을 숨기고 싶은 게 많은 거예요. 자신들의 실체를 숨기고 있기 때문에 그들에게는 위엄이 주어질 수가 없는 거예요. 어제도 신문에 났는데 골프 옷이 비쌀수록 잘 팔린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거 다 과시하려고 비싼 거 입죠. 거기가 화려한 데자나요. 그것뿐이 아니죠. 명품을 사려고 다 줄을 서고. 그러니까 이게 다 열등감이 있는 거죠.
그러면 아그립바와 버니게의 실체, 열등감이 뭘 까요? 지난 주일에는 제가 잠깐만 다뤘죠. 아그립바와 버니게는 아그립바 1세의 아들과 딸로 오누이간이에요. 헤롯 아그립바 2세인데 당시 한 32살쯤 됐는데요. 당시 친 여동생과 근친상간을 했는데 로마의 칼리굴라 황제와 같이 이들도 근친상간의 의심을 받고 있었죠. 이 아그립바 2세는 아주 방탕하게 살다가 돈도 없어서 쩔쩔매는데 돈을 꿔주는 사람도 없이 그렇게 그랬을 때 마음이 가난해졌죠. 로마의 칼리굴라가 황제가 되기 전에 전임 티베료 황제가 '저거 왜 빨리 안 죽냐?'고 말한 것을 누가 밀고를 한 거예요. 그때 이 아그립바 2세가 자기가 말한 거라고 뒤집어쓰고 감옥에 간 거예요. 스스로. 후에 황제가 된 칼리굴라가 그의 공을 얼마나 치하했겠습니까. 우리 정치가 다 이래요. 아그립바가 아주 머리가 좋은 사람인 거죠. 사람 팔자 시간 문제라고 하듯이 칼리굴라 황제가 그냥 전임 유대 분봉왕들의 땅도 다 몰아주고 예루살렘 성전 관리권과 대제사장 임명권까지 줬어요. 그러니 대제사장도 세습을 하는 건데 아나니아에서 이스마엘로 마음대로 바꿨죠. 이런 사람을 세상은 정치를 잘 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제 워낙 이 집안의 뿌리를 우리가 살펴볼 필요가 있는데요. 증조 할아버지였던 헤롯 대왕은 예수님의 탄생 소식을 듣고 유아 살해 명령을 내리고 다 죽였던 인물이죠. 그리고 이 헤롯 대왕의 아들이, 뭐 부인이 열 명이니까, 여러 명 있었지만 세례 요한을 죽인 헤롯 안디바는 빌라도와 한 편이 되어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도록 결정한 사람이죠. 이런 헤롯 안디바의 조카가 헤롯 아그립바 1세예요. 이 헤롯 아그립바 1세는 사도행전 12장에 보면 사도 야고보를 칼로 죽이고 오늘 아그립바 2세처럼 왕복을 입고 단상에 서서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채다가 벌레에게 먹혀 죽었어요. 기억나시죠? 그런데 그의 아들인 아그립바 2세는 유대 반란과 이어진 전쟁에서 유대가 마지막 망할 때 이 아그립바 2세인데 유대 왕이 되가지고 글쎄, 로마 편에 선 거예요. 알죠? AD 70년에 디도에 의해서 완전히 돌 하나도 남지 않고 망한. 그리고나서 망하고 나서도 20-30년 더 살면서 그 전쟁의 참혹한 결과를 보면서 여생을 보냈어요. 그러니까 헤롯 대왕부터 지금 100년이 훨씬 넘도록 악인의 형통을 보여주고 있어요. 예수님을 대대로 지금 죽이는 집안인데도. 그러니까 이 땅에서 아그립바처럼 악하게 살다가 기회를 잡아서 벼락 출세하는 것이 아니라 받을 벌이 영원 무궁하도록 너무 중하다는 것을 알아야 돼요. 악인의 형통을 보여주는 모델입니다. 그러나 세상은 칼리굴라 황제에게 줄 섰다고 부러워하죠. 줄을 잘 서면 죄만 더 크게 지을 뿐이에요. 그런데 기회를 잡아서 출세하는 것을 인생 최고의 복으로 아는 사람도 많아요. 죄는 과녁을 떠나는 것인데 정말 이들의 과녁을 떠난 문란한 삶을 좀 더 자세히 보십시다. 그는 결혼도 하지 않았고 자식도 없었어요. 그런데 이상하게 그의 곁에는 연년생 동생인 버니게가 있었습니다. 그들의 동생인 드루실라는 벨릭스 총독의 아내였자나요. 즉 아버지가 다 같다는 뜻이죠. 삼 남매인 거죠. 드루실라가 3차례 결혼을 했다는 것을 우리가 이미 살펴보았습니다. 그런데 이 버니게도 만만치가 않아요. 그는 13살 때 철학자 필로의 조카 마르쿠스와 결혼을 했는데 곧 사별을 합니다. 이어 바로 그의 삼촌 칼키스와 결혼을 해서 두 아들을 낳았어요. 그런데 이 칼키스가 또 일찍 죽습니다. 그래서 버니게는 칼키스의 그 땅을 다 몰아서 아그립바에게 줬거든요. 칼키스의 후계자가 된 아그립바와 함께 살게 됩니다. 결혼하지 않은 남매가 함께 살고, 또 이렇게 함께 다니니까 당연히 나쁜 소문이 나겠죠. 이 소문을 잠재우려고 길리기아왕 플레몬에게 시집을 가요. 결혼 조건으로 할례 받을 것을 요구합니다. 그런데 이 부부가 서로 자기 민족의 굴레를 벗지는 못했죠. 그러니까 이렇게 살면서도 '당신 할례 받아야 돼. 믿어야 돼.' 이런 거예요. 정말 웃기지 않아요. 이렇게 지역 감정, 이렇게 다 문란하게 살아도 이런 것들은 아주 이렇게 우리가 진짜 율법적인 거예요. 당할 자가 없는 거예요. 그런데 오래지 않아 이혼했습니다. 버니게는 다시 오빠의 집으로 돌아옵니다. 친정 오빠가 아주 천하 무적의 왕이고, 또 올케도 없고 조카도 없으니까 언제든지 돌아갈 나의 고향이에요. 아무 아쉬움 없이 이혼하고 쿨하게 돌아오기를 반복했어요. 친정이 부자이면 이혼이 이렇게 참 쉬워 보입니다. 이게 끝이 아니예요. 아까도 말했듯이 유대 전쟁으로 '돌 하나도 남지 않고 무너뜨리우리라.'하는 마태복음 24장의 예수님의 예언을 성취시킨 이 로마의 황제 아들이자 유다를 멸망시킨 이 디도 장군. 이 디도 장군과 버니게가 눈이 또 맞았어요. 자기의 정욕을 위해서는 원수도 상관없고, 나라도 상관없고, 근친상간도 관계도 없는 거예요. 디도 장관이 무려 11살이나 연하였어요. 버니게는 그때 이미 40이 넘었어. 2천 년 전에. 그러면 얼마나 지금 늙은 사람인지 몰라요. 나중에 황제가 될 정도로 모든 것을 다 갖춘 디도 장군이 11살의 나이 차이를 넘어 사귈 정도였으니까 버니게의 매력은 치명적이었나봐요. 너무 부럽습니까? '죽어도 그렇게 한 번 살아보고 싶네.' 그것이 여러분들의 소원이죠. 그런데 이 버니게는 거기다가 자기 동생, 그렇게 이쁘면서도 자기 동생 드루실라의 미모를 그렇게 또 질투했다네요. 참 끝이 없습니다. 아무튼 버니게와 디도의 관계는 지속되었고 디도가 황제가 될 때 버니게를 황후로 삼으려고 했는데 로마 황실에서 너무 거세게 반대해서 그 뜻을 이루지 못해서 버니게는 평생에 황후가 되지 못했어요. 여기서 저기서. 그래서 그렇게 하지 못하고 버니게는 또 편한 오빠 아그립바에게로 또 돌아갔을 것입니다. 대단한 여자 맞죠? 그래서 우리는 아그립바를 '어머니 평생의 순정을 지킨 대단한 사람이야. 헤롯 아그립바는 어떻게 그렇게 버니게를 끝까지 기다려줄까?' 그래서 우리는 너무 아그립바를 환상의 남자로 이렇게 봅니다. 그렇죠? 그들의 편력은 정말 환타스틱합니다. 자 이러한 배경으로 화려한 청문회장에 아그립바와 버니게가 나타났어요. 그러니까 교양과 화려한 치장으로 그들은 나타났지만 지금 제가 말했던 이런 것들 드러냈어야 합니다. 우리는 작은 죄만 있어도 숨기려 하고 가리우려고 자신의 위엄을 갖추어 드러냅니다. 이 깊은 죄성이 찬란한 옷과 스펙, 또 이 깊은 열등감이 자신의 외적인 것을 끊임없이 자랑하게 하는 거예요. 하지만 진정한 위엄은 나 자신을 정확히 드러내는 것에서부터 시작합니다. 즉, 내가 있어야 할 자리가 어디인지를 아는 것에서부터 위엄은 위로부터 주어지는데 버니게는 그 자리를 모르니까 그 아내의 자리, 동생의 자리를 모르자나요. 그러면 우리가 있어야 할 자리가 어디입니까? 바로 죄인의 자리인 거예요. 하나님 앞에서 내가 죄인임을 고백하는 자리. 그때 하나님의 위엄이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이죠. 환자가 자신이 환자임을 알 때 탁월한 의사의 위엄이 환자에게 임하듯 우리가 정말 죄인임을 알 때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성부 성자 성령의 위엄이 우리를 뒤덮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위엄이 우리를 이끕니다. 지금 아그립바와 버니게가 어디에 서 있습니까? 접견 장소에 들어왔다고 기록되어 있어요. 이 접견 장소는 영어로 place of hearing, 즉, 듣는 장소입니다. 듣는 장소가 어디입니까? 바로 목장입니다. 이듣는 장소에서 바울 말을 듣고, 바울 앞에서 자신의 화려함과 신분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아무에게도 드러내지 못했던 듣다 보도 못한 이러한 화려한 편력, 이 모습을 드러냈다면 바울에게 임한 성령의 위엄이 동일하게 임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목장에서 나눌 때 '아니, 왜 저런 이야기를 해.'하며 교양 있게 잘 된 이야기만 하는 바로 그 사람이 헤롯이고 버니게인 줄 압니다. 안 그렇습니까? 적용이에요.
[적용] 세상의 위엄이 허상이라는데 몇 퍼센트 동의합니까? 꿈에서라도 한 번 누리고 싶은 판타지는 무엇입니까? 나의 갖추어진 모습 속에 감추고 싶은 모습은 무엇입니까? 내가 끝까지 지켜야 할 자리는 어디입니까?
내가 죄인의 자리를 모르면 끝까지 지켜야 할 자리가 아내의 자리, 남편의 자리부모의 자리, 자녀의 자리. 그걸 몰라요. 그래서 이혼을 밥 먹듯이 하는 거예요. 이 아그립바하고 버니게는 이런 거 몰라요. 그런데 최고의 지도자 자리에서 바울을 심문하고 있어요. 정말 얼마나 우습습니까?
2. 한 영혼을 살필 때 위엄이 주어집니다. (24-26절)
24 베스도가 말하되 아그립바 왕과 여기 같이 있는 여러분이여 당신들이 보는 이 사람은 유대의 모든 무리가 크게 외치되 살려 두지 못할 사람이라고 하여 예루살렘에서와 여기서도 내게 청원하였으나 25 내가 살피건대 죽일 죄를 범한 일이 없더이다 그러나 그가 황제에게 상소한 고로 보내기로 결정하였나이다 26 그에 대하여 황제께 확실한 사실을 아뢸 것이 없으므로 심문한 후 상소할 자료가 있을까 하여 당신들 앞 특히 아그립바 왕 당신 앞에 그를 내세웠나이다
-> 큰 위엄을 갖춘 모습으로 아그립바 왕과 버니게가 접견 장소, place of hearing, 목장에 나왔어요. 지금. 그런데 이때 베스도 목자가 그 말을 하는 거를 잘 들어보면 이러해요. '이 사람은 유대 무리가 살려 두지 못할 사람이라 하여 내가 그 사람을 잘 살폈는데 죽일 죄를 범한 일이 없었다. 그런데 그가 상소를 했기 때문에 황제한테 보내야 하는데 뭐가 문제인지 보려고 당신들을 불렀다.' 이를 더 짧게 요약해보면 '나는 잘못한 게 하나도 없다. 나는 탁월하게 처리했다. 내가 그를 다 살펴봤어요. 그런데 죄는 없는데 그가 문제예요. 글쎄 그가 황제한테 상소를 해버려 가지고 일이 복잡하게 되었어요. 우리끼리 끝날 문제인데 그냥 고발을 했자나. 고소를 했자나. 그래서 복잡하게 됐어요.' 이야기하는 거예요. '나는 문제가 없어. 그런데 황제에게는 확실한 사실을 말할 것이 없다.' 그럴듯해 보이죠? 확실한 사실은 헬라어로 아스팔레스 실상이라는 뜻이에요. 올해 1월에 성령의 실상 설교할 때 헬라어로 그 기억나시죠? 아스팔트. 재료를 단단히 붙힌 아스팔트처럼 떨어지지 않는 것, 틀림이 없는 것 그래서 확실한 것을 실상이라고 그랬습니다. 언젠가 드러날 가짜가 아니라 변함이 없는 실상을 말하는데 그 실상을 황제에게 말할 게 없다는 거예요. 그런데 베스도는 지금 바울에 관한 실상을 알아요, 몰라요? 이미 다 아스팔트처럼 확실한 실상을 다 파악했어요. 그런데 황제께 보고할 만한 진상을 아직 알아내지 못한 것처럼 말해요. 핑계를 댑니다. 왜죠? 자기 위엄을 더 드러내기 위해서, 영향력을 더 크게 보이기 위해서 지금 바울을 이용할 뿐인데 이것마저 마치 자신이 황제에게 더 정확한 보고를 하기 위해 애쓰는 것처럼 연출을 하고 있어요. 베스도의 연출력은 대단합니다. 지금. 그러니 '내가 최선을 다했는데 이 복잡한 문제를 좀 도와달라.' 그러니까 베스도의 주장은 '나는 다 잘했다. 잘했다. 내가 다 살펴봤다. 처리했다. 그가 문제다. 보니까 그는 죄는 범하지 않았는데 상소 때문에 복잡하게 됐다.' 자, 성경이 인간론이자나요. 여러분들이 큐티를 잘 하면 부부간이나 인간론에 대해서 이렇게 쫙 분석이 나오는 거예요. 베스도는 정직한 관리인 거예요. 여러분 정직한 관리라고는 평가할 수 있지만 베스도에게는 위엄이 있다고는 못해요. 왜냐하면 베스도는 자신이 책임지려는 이 태도, '나는 잘못 없다.'하는 이 태도는 어떤 존경도 이끌어낼 수 없습니다. 직장에서, 가정에서, 그리고 우리 삶의 현장에서 우리는 이런 사람을 참 많이 만나요. '나는 잘못 없어. 나는 문제없어. 니가 그렇게 말해서 그렇게 한 거자나. 그러니까 니가 책임져.' 그리고 이런 사람의 가장 맹점이 '그러니까 처음부터 끝까지 나는 죄가 없어. 나는 공정했고 저 사람이 문제인 거야.' 그런데 우리의 선함, 우리의 착함은 우리를 속이기에도 충분하고 우리의 선함은
잘 들어보세요. 우리의 선함은 우리를 지옥에 보내기에도 충분합니다. 즉, 착한 게 악한 거죠. 베스도는 이 사건을 잘 살펴서 정말 바울이 문제가 없었더라면 바울을 즉시 풀어줬어야 해요. 그리고 그런 결정을 할 수 있고 책임을 질 수 있는 자리에 있어요. 유대 분봉왕들의 위를 다루는 사람이 로마 총독이자나요. 그런데 이 듣는 자리에서 그가 정말 죄가 없다면 풀어줘야 하는데 '나는 신임 총독인데다가 유대인 원고들이 너무 유력하기 때문에 비위를 거스르면 안 된다고 생각을 했어요.' 이거 누구하고 비슷한가요? 빌라도하고 비슷하지 않아요? 빌라도가 예수님을 넘길 때 자신의 손을 딱 씻으며 '나는 아무 죄가 없다. 이 사람에게 어떤 죄도 발견하지 못했다. 다만 너희가 원해서 그런 거니까 너희가 책임져라.' 그렇지만 아이러니컬하게 우리가 날마다 고백하는 사도신경에는 이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다고 2천년 동안 전 세계가, 전 역사에 걸쳐서 이렇게 레코드처럼 반복하고 있어요. 유대인도 아니고 누구도 아니예요. 왜냐하면 그때 책임질 자리가 로마 총독이었거든요. 결국 책임지지 않는 모습이 가장 큰 죄악이라는 거예요. 성령의 위엄은 나에게 맡겨 준 한 사람을 책임지려 할 때 그 사람에게 주어지는 거예요. '나는 죄가 없어. 니가 문제야. 나는 이 문제와 상관이 없어.' 이 책임지지 않는 모습에 하나님께서도 '나도 너와 상관없다. 나도 널 책임지지 않는다.' 그렇게 말씀하실 것이에요. 목사도, 목자도 다 마찬가지예요. 목사가 위엄이 주어지는 거는 멋지게 설교할 때가 아니죠. 목자에게 위엄이 주어지는 것도 뭐 잘 가르쳐서가 아니예요. 정말 죽어가는 한 가정 한 영혼을 살리려고 할 때 위엄이 주어지는 줄 믿습니다. 베스도나 빌라도는 그냥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은 아무 죄가 없어요. 이 죄가 없다는 목자는 아주 곤란한 거예요. 죄가 없다는 목자는 목장을 이끌고 갈 수가 없어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가장 큰 죄를 물어요. 우리는 이걸 기억해야 합니다. 목장에서도, 가정에서도 '그러니까 이혼했지. 니가 알아서 해. 난 처방 다 했으니까 알아서 해. 처방에 따르지 않은 니가 잘못이지 니가 책임져.' 그게 맞는 얘기래도 그렇게 하면 안 돼요. 안 들어도, 엇나가도, 고통이 있더라도 우리는 가정에서도, 목장에서도 '니 문제가 내 문제지. 니 아픔이 내 아픔이지.' 그의 아픔을 껴안을 때 성령의 위엄이 우리를 뒤덮어 우리의 모든 문제를 하나님께서 껴안아 주실 줄을 믿습니다. 그러니까 이게 참 인간의 힘으로 안되는 거죠.
지난 주일에 제가 청년부 아웃리치를 하려다가 시간이 없어서 못했는데 우리들교회에서 하는 것과 똑같이 간증 페스티벌을 하고, 목자 양육하고, 큐티 페스티벌 하고, 청소년 아이들과는 VIPS 캠프를 하고, 부부 목장도 했다고 해요. 통영과 부산과, 또 제주도. 그래서 한 13군데를 갔다 왔습니다. 그런데 어떤 교회에서는 그 목사님이 목세를 세 번이나 참석을 하고, 그래서 진짜 한, 두 가정으로 시작한 그 큐티 목회가 지금 40 가정으로 늘어났다고 해서 큐티 목회의 저력을 보고. 그리고 많은, 섬기러 갔는데 막 큐티 때문에 살아났다고 전체를 막 커피를 쏘고, 거기에 나눔 장소를 제공해주시고, 그 카페에는 제 책으로 도배가 되어 있고. 그 다음에는 그냥 식사를 누가 내고, 또 간식을 내고. 그래서 출애굽하면서 은 금 패물을 가지고 나온 것처럼 갔다가 섬겨야 되는데 살아난 사람 한 사람 때문에 또 이렇게 대접을 받고 왔다는 놀라운 얘기를 듣고 큐티 목회의 가능성을 좀 봤습니다. 그런데 부부목장도 사역자와 여자 권사님들, 또 남자 목자님 다 직접 가셔서 자원하는 마음으로 섬겨 주시고, 자신의 죄패를 나누고 삶과 고난 수치를 나누며 그날 출애굽기 말씀에 따라서 오픈하니까, 글쎄 그 중에서 한 집사님이 이렇게 나누셨다는 거예요. '자신은 죄인이라는 생각이 없다. 그런데 아버지가 부유했지만 나중에는 내리막길로 내려가면서 늘 술마시고 폭력을 행하시다가 뇌졸중으로 객사를 하셨는데 이제 자신은 외지로 나가 홀로 노력을 해서 대기업에 취직해가지고 오게 되었는데 자신은 너무 만족했고 예쁜 딸도 낳고 모든 게 만족했는데 또 다른 대기업에 다니던 아내가 늘 직장을 힘들어하고 상사가 괴롭힌다. 집에 들어오면 회사가 힘들다. 우리 다시 서울로 돌아가자 늘 이야기를 했는데 아내의 문제로만 여겼지 이 생활이 너무 좋으니까 듣지 않았다는 거예요. 그거는 아내의 책임이지 내 책임이 아니다. 그런데 어느 날 지금 그냥 너무 좋아가지고, 서울을 떠나니까 무조건 좋은 게 있는 거예요. 그렇게 글쎄 힘들다고 그러더니만 어느 날 아내에게 다른 남자가 생긴 걸 알게 되었다는 거예요. 그래서 이 목장을 하기 불과 얼마 전에 양육권 때문에 협의 이혼을 했다고 나눠 주셨는데 그 이야기를 그 지방에 내려가자마자 다녔던 이 교회에서 아무도 모르고 한 번도 얘기 안 했는데 그냥 우리들의 목장 거기에서 처음으로 오픈했다고 그걸 나눠준 거예요. 평생 본인은 책임이 없고 잘못이 없다고 생각을 했었는데 오늘 목장을 통해서 내가 오히려 더 잘못했구나 가 깨달아졌다는 거예요. 그래서 떠나간 아내에게 진심 어린 사과를 할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를 했다는 것입니다. 공동체 한 번의 나눔으로 대단한 발상의 전환이 일어난 거예요. 따지고 보면 이 집사님도 베스도처럼 잘못한 게 없죠. 자기 일 잘하고 열심히 산 죄밖에 없다고 그러죠. 하지만 아내의 말을 듣지 않고, 아내의 일을 내 일로 여겨 함께 아파하고 공감하지 못하고, 그 아픔을 내가 함께 껴안고 책임지지 못한 것에 대한 결과가 너무 큰 아픔으로 다가온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에게 맡겨주신 자리에서 내 옆의 사람의 그 구원을 살필 때, 너의 구원을 살필 때 우리에게 성령의 위엄을 주시고 그 위엄이 우리 앞길에 나아가 대신 싸워주실 줄을 믿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다른 사람의 아픔과 죄를 책임질 수 있겠어요. 우리 할 수 있는 게 없어요. 그냥 목장에서 함께 나누며 공감하고 나에게 허락한 가족의 아픔을 책임지려고 결단하고 적용하려고 할 때 '나는 문제가 없어.'가 아니라 아파하는 너를 살필 때 성령의 위엄이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이죠. 그래서 정말 약속하신 말씀대로 하나님의 위엄이 내 앞에 가며 모든 원수를 물리쳐 주시고 이 가정에서 남편의 위엄 아내의 위엄을 허락해서 함께 살아나는 것이죠. 이것의 성령의 위엄입니다.
제가 오늘도 편지를 하나 받았어요. 우리가 그렇게 결혼을 잘 했는데 요즘에 전부 핵가족이다 보니까 참지를 못해요. 이 청년부 출신인데도 그냥 조금만 잘못하면, 돈 조금 못 벌면 무시하기가 짝이 없고. 그 다음에 무서운 사람이 없고, 그리고 마음대로 남자를 만나고. 그 다음에 왜 그러냐 그러면 이혼하자 그러고. 그게 다 핵가족이고. 부모님한테 얘기하면 절대로 병원 같은데 안 가. '내 아들이, 내 딸이 어때서 병원을 가냐.'고. 그러니까 근본적으로 우리가 말이 안 통해요. 이 세상하고. 그래서 우리 교회에서 도피성이 되어주지 않으면 백발백중 다 이혼하고, 또 갈라지고 찢어지고, 또 재혼해서 또 찢어지고. 지금 그러고 나가서 딴 남자 만난들 그래서 거기서 가정이 제대로 해결이 되겠습니까? 그러니까 지금 이렇게 공동체에서 이렇게 말하는 게 최고인데도 불구하고 워낙 이 시대가 자기 밖에 모르고, 자기 아들, 딸 밖에 모르기 때문에 자꾸 가정을 찢어주고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정말 우리 정신을 차리고, 부모부터 정신을 차리고 있어야 되겠다고 생각을 합니다. 적용 질문이에요.
[적용] 나는 문제 없어 네가 문제야 하며 살고 있지 않습니까? 내가 죽어도 책임지고 싶지 않은 것은 무엇입니까? 아내입니까? 남편입니까? 부모입니까? 자녀입니까? 내게 주신 은혜는 망각하며 나만 이 가정을 책임진다고 억울해 빌라도 베스도처럼 손을 씻고 있지 않습니까?
'부모가 나한테 해 준 게 뭔 데. 당신이 나한테 해 준 게 뭔 데. 너희들이 나한테 해 준 게 뭔 데.' 이러면서 '니가 문제야. 나한테 더 이상 원하지 말아.' 이러고 있지는 않습니까?
3. 무리한 일을 분별할 때 위엄이 주어집니다. (27절)
27 그 죄목도 밝히지 아니하고 죄수를 보내는 것이 무리한 일인 줄 아나이다 하였더라
-> 27절입니다.
바울은 지금 죄인의 신분으로 앉아 있습니다. 그동안 더둘로 변호사가 와도, 대제사장이 와도, 이스라엘 최고 기관인 산헤드린 공회원들이 와도, 모든 법에 능통한 로마 총독이 벨릭스 베스도 두 번이나 바뀌어도, 심지어 유대 법에 정통한 유대 땅을 다스리는 유대 왕이 와도 바울의 조목을 발견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어디를 가나 설교할 때 자신이 죄인임을 고백합니다. 아이러니하죠. 정작 어느 사람도 바울을 처벌할 죄목을 발견하지 못하는데요. 그 죄목이 없어도 바울은 자신이 죄수임을 인정하며 갑니다. 죄수임을 인정하며 가는 사람은 무리한 일인지, 아닌지 분별할 수 있어요. 어떤 사건이 왔을 때 이 일의 옳고 그름만 따지고 '나는 죄목이 없으니 죄인이 아니라.' 말한다면 이 베스도처럼 무리한 일인지 아닌지 분별하지 못하고 죄목만 찾다가 싸움만 나는 거예요. 요즘 정치권을 보면 죄목만 찾다가 지리한 싸움을 지금 합니다. 최고 통수권자가 우리들교회 목장에 오면 얼마나 좋을까 이 생각을 합니다. 이 평범한데서 나누면 말할 걸 입에 다 넣어드릴 텐데 말이에요. 다음에 아침에 기자회견 할 때 뭔 얘기를 할까 목장에서 다 가르쳐주거든요. 그 평범한 사람들의 얘기를 들어야 되는데 이런 목장에 평생에 안 가봤기 때문에 아마 듣는 훈련이 진짜 힘드실 거라는 생각이 들어요. 죄목이 없지만 내가 죄수인 것을 아는 것이, 이것이 성도의 위엄인 거예요. 우리가 오픈하고 고백할 수 있는 것은 이 죄를 십자가에 못 박았기 때문이거든요. 그리고 그 죄를 온전히 이지 못했더라도 그 죄를 날마다 십자가에 못 박아 그 죄에 대해 온전히 죽었기 때문에 오픈하며 고백할 수 있는 것이고 오픈하며 고백하므로 날마다 내 속에 다시 살아나는 그 죄와 치열하게 싸우면서 갈 수 있는 거예요. 자, 이렇게 죄라는 것은 경계를 넘어서는 거자나요. 하마르티아 그러니까 오늘 말씀으로 경계를 또 앞당기는 거죠. 또 제자리에 저울추처럼 가져오고, 가져오고. 온전히 죄에 대해 십자가에 죽어졌기에 우리는 마땅히 영원한 형벌을 받아 마땅한 죄인임을 온 몸으로 인정하면서 동시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실 때 독생자 예수의 옷을 입혀주심으로 '너는 죄가 없다.' 그러니까 나는 죄인이지만 죄목이 없는 죄인이라 이거예요. 나는 죄인이지만 죄목이 없는,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용서해주시고 간과해주셨기 때문에. 그러니까 정말 죄인의 모습으로 살아가는 그 모습이 필요한데 '왜 자꾸 저기는 죄만 보라.' 이런 성도의 아이러니를 세상은 이해하지 못합니다. 목장에서 죄 고백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죄 용서함 받는 십자가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러니까 이 일을 베스도는 무리한 일이라고 말합니다. 무리하다 부정 접두어 아와 이성을 뜻하는 로고스의 합성어로 알로곤이라는 단어인데요. 그러니까 이성이 없는, 말이 되지 않는, 비합리적인 이런 뜻이에요. 이게 무리하다는 뜻입니다. 즉, 베스도는 도대체 왜 바울이 감옥에 갇혀 있고 이런 상황에 있는지 이성적으로 이해를 할 수 없는 거예요. 죽었다가 깨어나도 베스도는 이게 이해가 안돼요. 왜 이런 남편과 살고 있고, 왜 이런 적용을 하고, 왜 오픈을 하고, 왜 나를 힘들게 하는 저 사람을 끝까지 돌보는지 구원과 십자가를 모르면 이 모든 일들을 무리한 일들이라고 말하는 거예요. 이런 모든 일들을 무리한 일들이라고 말하는 거예요. 이성과 합리의 토대 위에 살아온 베스도는 이해할 수가 없는 거예요. 이해할 수가 없는 거예요. 답답해요 그냥. 이해할 수가 없어요. 우리의 옆에 모든 똑똑한 사람들이 이해할 수가 없어요. 이게 다 애굽 사람들이고, 로마 사람들이자나요. 이 사람들 왕복 이렇게 입고 '도대체 이해할 수가 없다.'고 이야기 합니다. 내가 구원 때문에 하는 적용, 이거 전부 다 조롱하고 그럽니다. 우리는 '내가 믿음이 있으면 그렇게 조롱을 하겠냐?' 이해가 안돼요. 절대로 이해가 안돼요. 그래서 이걸 당하고 가야돼요. 너무 힘들다 이러지 말아요. 이 세상과 하나님은 공존할 수가 없기 때문에. 어떤 집사님이 집에서 쫓겨났는데 아내의 역할을 끝까지 감당하기 위해서 자신을 쫓아낸 남편의 사는 집 앞에 반찬을 걸어놨다는 거예요. 남편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도 아니고, 뭔가 욕심을 위해서도 아니고, 정말 자기도 하기 싫었지만 아내의 역할을 잘하지 못한 자신을 회개하며 목장 처방에 순종해서 했어요. 그런데 아주 합리적이고 이성적이었던 이 정신과 의사는 '이혼을 해야지. 왜 그런 미련한 짓을 하냐.'면서 자신이 배운 수많은 지식과 상담해 온 많은 경험을 통해서 '이 가정은 결코 합쳐질 수 없고, 반찬을 해서 가져다주는 그런 미련한 일 좀 하지 말라.'고, '그래서 남편이 돌아오는 게 아니라.'고 그런데 이 남편의 마음이 변했다는 거예요. 아직 돌아오기까지는 아니지만 변했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 의사가 '내가 졌다.'고, '목장이 맞았다.'고 상담을 해줬다는 거예요. 여러분들 그러니까 상담은 목장에서 받고 약만 처방 받아 오시기를 바라요.
요새는 육아교가 있어요. 기독교, 불교가 아니라 육아교. 그러니까 아이들이 조금이라도 상처받지 않고, 그게 아니고 좋은 부모 나쁜 부모 없고, 알코올 중독 부모 밑에서 훨씬 훌륭한 아이들 많이 나왔어요. 구원에 초점을 둬야지 '우리 애가 어떻게 될까?' 그러니까 구원에 초점을 둬야 돼요. 아셨습니까? 그래서 우리가 합리라고 생각하는 것들을 정말 객관적으로 이 욕심이 없는 목장에서 검증을 받아야 돼요. 목장에 목자와 목원들은 욕심이 많아도 목장은 욕심이 없어요. 왜냐하면 구원의 공동체이니까.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무리한 일이 합리적이라고 생각을 하고 무리한 일을 분별할 수가 없습니다. 구원을 위한 일이 때로는 미련해 보여도 말씀 안에서 가장 이성적인 적용이고 이런 것들을 공동체 안에서 분별하며 나아갈 때, 이 일이 무리한 일인지 아닌지 이렇게 묻고 분별해 나갈 때 나도 살고 너도 살고 함께 살아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은 '어머 저 여자가 바람 피웠대. 저 남편이 바람 피웠대.' 죄목만 주목합니다. 1부 예배에서 세례 간증을 그 도박한 청년이 했어요. 첫날부터 말씀이 들렸다는 거예요. 그리고 너무 세례 받고 싶어서 받는다는 거예요. 제가 눈물이 났어요. 20년이 되도 말씀이 안 들리는 사람들이 많은데 세상은 죄목만 주목하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는 죄목이 아니라, 옳고 그름이 아니라, 잘못한 것 따지는 게 아니라 내가 죄수임을 알고 갈 때, 이 사건에 나의 죄목이 없더라도 내가 죄수임을 알고 갈 때 우리는 무리한 일, 아닌 일을 분별할 수 있고 구원을 위한 일이 무엇인지를 분별할 수 있는 것입니다.
마틴 루터 킹이 흑인을 죽인 백인 있자나요. 그 사람이 용서하죠. 그러니까 흑인을 죽인 백인도 사람이고 흑인도 사람이라는 거예요. 그런데 사람은 다 죄인이라는 거예요. 그런데 사람이 100% 죄인이라는 것을 인정할 때가 가장 존엄하고, 이 존엄을 훼손할 수 있는 도구는 이 세상에 없다고 얘기를 해요. 인간이 가장 존엄할 때가 100% 죄인인 것을 인정할 때라고 한 것입니다. 이게 제가 얘기한 건 줄 알았더니 루터 킹이 그렇게 얘기를 했더라고요. 이 존엄이 성령의 위엄 아니겠습니까? 아니, 내가 그 얘기 듣고 한 건 아니예요. 그러니까 루터 킹이 담배도 피고 여자들하고 놀아났지만 마틴 루터 킹이 하나님 나라를 무너지게 했어요, 세웠어요? 아브라함도 마찬가지죠. 인간은 완전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자기 죄를 보는 사람은 그래도 날마다 날마다 그냥 태산을 넘어서 갑니다. 저 높은 곳을 향하여 갑니다. 그런데 그때 죄를 졌다고 '니가 어떻게, 니가 지도자냐?' 그래도 이 분이 하나님을 믿어요. 이게 바로 성령의 위엄이 임하는 거죠. 그러니까 성령의 상소를 할 때 인내로 통과해야 되는데 이때 필요한 것이 위엄이에요. 그런데 어떤 사람에게? 자기 죄를 보는 사람에게 이 위엄이 임하는 거예요. 다른 어떤 조건도 없어요. 자기 죄를 보는 사람에게 이 위엄이 임하는 것입니다.
[적용] 지금 묻지 않고 무리하게 진행하고 있는 것이 있나요? 주변에서 모두 무리한 일이라 하는데 이것이 합리적이라 여기는 것은 무엇인가요? 죄목이 없다고 난 죄인이 아니라 외치고 있지는 않나요?
저는 너무 아픈 나눔을 하나 봤어요. '제가 수련회를 위해서 그렇게 기도한 적이 없었는데 아들을 데려가기 위해서 한 달 동안 거의 빠짐없이 기도를 했는데, 아이가 상태가 변화무쌍하기 때문에 아무리 간다고 해도 당일 차에 태워봐야 알기 때문에. 그래서 결국 당일 날 차를 태우고 너무 감사해서 파주에 다 도착을 했는데 캔슬이 되었다고. 그래가지고 그날 아침에 새벽 기도 말씀을 들으면서 저기 떨기나무 아래에서 사명 주시기 위한 수련회라는 말씀을 주셨어요. 저가 아들이 수련회에 가서 말씀도 들리고 동생도 변하고 아내도 변할 것이라는 저의 또 다른 야망을 버리게 하시고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의 고백을 할 수 있는 시간을 주신 것에 감사했습니다. 아들은 집에 와서 온라인 수련회는 택도 없이 다음날 학교로 도망갔고 저녁 7시 반에 들어왔는데, 우리가 온라인으로 하는데 아내와 막내는 다른 교회 수련회에 갔고 딸은 친구네 가서 자고 온다고 하고 저와 아들 둘이 저녁 밥을 먹을 때 수련회 유튜브를 켜고 목사님 말씀을 크게 털어놨어요. 그런데 아들은 목사님의 말씀을 듣자마자 5분도 안 돼서 밥 다 먹고 방에 가서 게임을 하더라고요. 그래서 저 혼자서 무릎 꿇고, 목사님이 꿇으라 그러면 꿇고, 기도하라면, 일어나라면 시킬 때마다 다 했어요. 중, 고등부 수련회를 저 혼자서 참여하고 은혜 혼자 받았습니다. 아이는 방에서 게임만 하고 있는데 아빠는 기도하고, 일어나고, 무릎 꿇고 하는 것을 하늘의 주님이 다 보고 계셨을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온라인으로 수련회 할 때는 부모가 꼭 옆에 있어줘야 하는데 아내와 막내는 다른 교회 수련회 갔답니다. 물론 아직 우리들교회 오지 않아서 그랬겠죠. 그런데 아들은 게임하고. 이것이 얼마나 힘들게 내린 결정인데 이 대목이 제가 얼마나 슬프고 아프더라고요. 성령의 상소를 하면서 가시니까 정말 위축이 되실만 한데요. 무릎 꿇고, 기도하고, 바로 이런 것이 성령의 위엄이라고 생각합니다. 계속 상소하시면서 성령의 위엄이 그득하시기를 기도합니다.
말씀 맺어요. 성령의 위엄은 과시가 아니라 자신의 수치를 드러낼 때 주어집니다. 그렇게 위엄을 잔뜩, 어깨 뽕을 잔뜩 하면서 한다고 그렇게 위엄이 생기는 게 아니예요. 그것은 한 영혼을 살필 때 위엄이 주어지는 거예요. 말 잘한다고 위엄이 주어지는 것이 아니죠. 그리고 비합리적인지, 합리적인지, 구원이 자기 죄를 모르면 무리한 일을 분별할 수가 없다고 그랬어요. 무리한 일을 분별하는 것이 이 위엄이 주어지는 것이라고 합니다.
목장 모임 참석
미혜, 연수, 민희, 해정, 예선
기도제목
미혜
코로나 확진인데 큰 증상 없게 하셔서 증상이 심한 언니를 잘 도울 수 있기를
저희 언니가 코로나에서 잘 회복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약을 먹으면 구토를 해서 약을 먹지 못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오늘 약 대신 수액을 맞고 있는데 구토가 나지 않게 하시고 목 통증을 완화시켜 주시기를
나의 판타지가 안정된 환경인데 그런 환경은 허상이었음을 진정으로 알고 그것을 찾아 헤매는 나를 볼 때마다 회개하며 가기를
우리 목장식구들 각자의 환경에서 하나님의 세밀한 도우심을 경험하며 갈 수 있기를
지영
약이 엄마한테 정말 잘 맞아서 엄마 몸속에 잇는 암세포들이 다 죽을 수 있는 일이 일어날 수 있도록
예선
목장에 붙어가며 나의 수치를 잘 나누고 갈 수 있도록
바쁘고 피곤하다는 핑계로 피하지 말고 가족과 목장 식구들을 위해 틈틈이 기도할 수 있도록
무리한 일을 만났을 때 놀라지 말고 그날 주시는 말씀을 가만가만 생각하여 분별하며 갈 수 있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