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08.21. 성령의 위엄 (행25:23-27) 김양재 담임목사님
요즘 화제의 드라마가 있다. 자폐 스펙트럼이 있는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이다. 우영우는 법률 실력이 탁월해서 그 실력 하나로 결정적으로 약자를 살려낸다. 그러니 이상한 부분이 다 감춰지고 좋은 일을 하는 데 있어 위엄이 따른다.
우리가 그렇지 않은가 싶다. 성경구절 하나로 사람을 살려내면 우리의 모든 찌질한 것들이 다 감추어지고 우리들에게도 성령의 위엄이 따르는 줄 믿는다.
성령의 상소는 인내가 따라야 한다. 우리가 인내하면서 비굴과 위축감으로 인내하면 아니함만 못하다.
제가 그랬다. 어머니에게 비굴하게 네네 하다가 예배 드리십시다, 기도 드리십시다 할 수 있었던 것은 어머니 구원 때문에 인내하니 성령의 위엄을 주신 것이다. 구원은 이세상 어떤 좋은 일 보다도 가장 좋은 일이기 때문에 구원 때문에 인내하면 위엄을 주신다. 내가 당하는 것과 상관없이 나에게는 하나님의 자녀라는 자존감이 있기 때문이다.
오늘 이 시간 예수 믿는 우리에게 허락된 성령의 위엄이 무엇인지 함께 말씀을 듣도록 하겠다.
1. 과시가 아니라 자신의 수치를 드러낼 때 주어집니다.
지난 주 아그립바 왕이 바울의 말을 듣고싶다고 하니 베스도 총독이 내일 들으리이다 했다.
23절 이튿날 아그립바와 버니게가 크게 위엄을 갖추고 와서 천부장들과 시중의 높은 사람들과 함께 접견 장소에 들어오고 베스도의 명으로 바울을 데려오니
베스도가 엄청난 쇼를 계획했다. 로마황제에게 상소한 바울을 심문하기 위해 아그립바 왕과 버니게가 크게 위엄을 갖추고 접견장소로 나오는 것이 오늘 본문의 시작이다.
그런데 이 때 그들이 바울의 말을 듣기 위해 왔는데 특이하게 크게 위엄을 갖추었다고 한다. 위엄이 있는 것이 아니라 위엄이 있어 보이려고 갖추었다고 하는 것이다. 이것은 자신을 과시하기 위해 호화찬란한 모습으로 접견장소로 들어왔다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 위엄이라는 단어는 일반적인 단어인 영광 위대함 탁월함 이런 단어가 아니다. 누가가 쓴 단어는 판타시아 이다. 우리가 자주 쓰는 판타지가 여기서 온 말이다. 공상 상상 환상이라는 뜻이다.
이 단어는 신약에서 여기서만 단 한번 쓰였다. 이 단어는 구약 70인역에서도 4번밖에 안쓰였는데, 네 번 중 두 번은 상상이라는 뜻으로 쓰였다. 하박국이나 스가랴에서 구름이나 바다의 움직임을 마치 사람의 움직임처럼 상상해서 표현할 때 썼다. 구름이 너무 대단하면 사람으로 의인화 하여 쓴다. 사실 이것은 허구이다. 나머지 두번은 하박국 2:18에 보면 우상에 대한 번역어로 쓰였다. 이 이야기는 겉은 화려하지만 그 속의 생명은 전혀 없는, 그 우상의 헛됨을 강조하기 위해 우상을 판타시아로 번역한 것이다. 무슨 뜻인가? 우상은 진짜 신이 아니라 인간이 상상으로 만들어 낸 허구라는 뜻이다.
아그립바와 버니게가 옷과 치장과 자태와 신하들로 대단한 옷을 입고 나왔다. 잔뜩 부풀린 큰 위엄이야 말로 세상사람들이 누구라도 한번쯤 가져보고 싶은 판타지이다. 그러나 이 판타지는 아무리 좋아봐야 판타지다. 그림의 떡이다. 실상이 아니다. 허구이다. 그런데 이 심문 쇼를 대단하게 한 것은 그만큼 바울에게 열등감이 있어서 그런 것이라 생각한다.
이 심문쇼의 감독인 베스도와 주인공 아그립바의 상대역으로 정한 피고 바울이 입장한다. 원어로는 바울이 끌려나왔다고 한다. 베스도나 아그립바나 버니게나 천부장들이나 높은 사람들이나 그 동작이 모두 능동태인데, 바울만 수동태이다. 그러니 그 높은 사람들에게 바울이 구경거리가 되어 심문을 받는 것이다.
위엄을 뽐내는 다수의 사람들 앞에서 세상 위엄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이 초라하게 서 있는 바울이 택자이다. 감옥에 갇혀있던 바울 자신은 초라하기 짝이 없는 노인이고 키도 작고 대머리고 다리도 휘어서 안짱다리이고 코로 삐뚤어져서 매부리코라고 한다. 외모로도 아주 밀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조용하지만 그리스도를 닮은 기품과 자신감으로 이 법정을 압도한다. 실력이 있으면 압도한다. 하나님이 나를 어떻게 볼까가 중요하지, 사람이 어떻게 보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MRI를 찍으러 가는데 있어 중요한 것은 내장인데 있는대로 치장하고 가면 그게 얼마나 웃긴가? 그런 것을 웃긴다고 한다. 그 접견장소에서 바울만 유일하게 내장이 병든 것을 안다. 세상의 위엄이 허상임을 알고 성령의 위엄 앞에 무릎을 꿇고 순종하여 사명을 감당하고 있기에 위엄이 있다.
그런데 잘 보라. 그들은 자신을 드러내기 위해 수많은 옷과 장식품을 갖추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들은 자신을 드러낸 것이 아니라 옷 속에 자신을 숨긴 것이다. 겉을 드러내고 과시할수록 자신을 숨기고 싶은 것이 많다. 자신들의 실체를 숨기고 있기에 그들에게는 위엄이 주어질 수가 없다. 신문에 나오기를 골프 옷이 비쌀수록 잘 팔린다고 한다. 과시하려고 다 비싼 것을 입는다. 그것 뿐 아니다. 명품을 사려고 줄을 선다. 이것이 다 열등감이 있는 것이다.
그러면 아그립바와 버니게의 실체, 열등감은 무엇일까?
지난주에는 잠깐만 다루었다. 아그립바와 버니게는 아그립바 1세의 아들과 딸로 오누이간이다. 헤롯 아그립바 2세는 당시 32살쯤 되었는데, 친여동생과 근친상간을 했던 로마 칼리굴라 황제처럼 이들도 근친상간의 의심을 받고 있었다.
이 아그립바 2세는 아주 방탕하게 살았다. 돈 없이 쩔쩔매다가 돈 꿔주는 사람도 없어 마음이 가난해졌을 때, 로마의 칼리굴라가 황제 되기 전에 전임 티베료 황제가 빨리 안 죽냐고 말한 것을 누가 밀고했는데, 그때 아그립바 2세가 자기가 말한 것이라 뒤집어 쓰고 스스로 감옥에 갔다. 후에 황제가 된 칼리굴라가 감옥에서 나온 그의 공을 얼마나 치하했겠는가?
정치가 다 이렇다. 아그립바가 아주 머리가 좋은 사람인 것이다. 사람 팔자 시간문제라고 하듯이 칼리굴라 황제가 전임 유대 분봉왕들의 땅도 다 몰아주고 예루살렘 성전 관리권과 대제사장 임명권까지 줬다. 그러니 대제사장들도 세습하는 것인데 아나니아에서 이스마엘로 마음대로 바꾸었다. 세상은 이런 사람보고 정치를 잘 한다고 한다.
그러나 이 집안의 뿌리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증조 할아버지였던 헤롯대왕은 예수님의 탄생 소식을 듣고 유아 살해 명령을 내리고 다 죽였던 인물이다. 그 이 헤롯대왕 아들의 부인이 여러 명 있었는데 그 중 세례 요한을 죽인 헤롯 안디바는 빌라도와 한 편이 되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도록 결정한 사람이다. 이런 헤롯 안디바의 조카가 헤롯 아그립바 1세이다. 이 헤롯 아그립바 1세는 사도행전 12장에 보면 사도 야고보과 칼로 죽이고 오늘 아그립바 2세 처럼 왕복을 입고 위엄을 부리면서 단상에 서서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채다가 벌레에게 먹혀 죽었다. 그런데 그의 아들인 아그립바 2세는 유대 반란과 이어진 전쟁에서 유대가 마지막으로 망할 때 유대 왕이 되어 로마 편에 섰다. AD 70년에 디도에 의해 완전히 망했다. 그렇게 망하고 나서도 20-30년간 더 살면서 전쟁의 참혹한 결과를 보며 여생을 보냈다.
헤롯대왕부터 예수님을 대대로 죽이는 집안인데도 100년이 훨씬 넘도록 악인의 형통을 보여주고 있다. 이 땅에서 아그립바처럼 악하게 살다가 기회를 잡아 벼락출세하는 것이 좋은 것이 아니라 받을 벌이 영원무궁하도록 너무 중하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악인의 형통을 보여주는 모델이다. 그러나 세상은 칼리굴라 황제에게 줄 잘 섰다고 다 부러워한다. 줄을 잘 서면 죄만 더 크게 지을 뿐이다. 그러나 기회 잡아서 출세하는 것을 인생 최고의 복으로 아는 사람도 많다.
죄는 과녁을 떠나는 것인데, 이들의 과녁을 떠난 이 문란한 삶을 좀 더 자세히 보면 좋겠다.
그는 결혼도 하지 않았고 자녀도 없었다. 이상하게 그의 곁에는 연년생 동생인 버니게가 있었다. 그들의 동생인 드루실라는 벨릭스 총독의 아내였다. 즉 3남매의 아버지가 다 같다는 뜻이다.
드루실라가 3차례 결혼했다는 것을 우리가 살펴보았다. 그런데 버니게도 만만치 않다. 그는 13세살때 철학자 필로의 조카 마르쿠스와 결혼했는데 곧 사별했다. 이어 바로 그의 삼촌 칼키스와 결혼해서 두 아들을 낳았다. 그런데 칼키스가 또 일찍 죽는다. 버니게는 칼키스의 땅을 다 모아서 아그립바에게 주고 칼키스의 후계자가 된 오빠 아그립바와 함께 살게 된다.
결혼하지 않은 남매가 같이 살고 함께 다니니 당연히 나쁜 소문이 돌았다. 이 소문을 잠재우려고 길리기아왕 플레몬에게 시집을 간다. 그리고 결혼조건으로 할례 받을 것을 요구한다. 그런데 이 부부가 서로 자기 민족의 관습의 굴레는 벗지 못했다. 이렇게 살면서도 당신 할례받으라고 한 것이다. 정말 웃기지 않는가? 문란하게 다 살아도 이것은 다 율법적이다. 당할 자가 없다. 그런데 오래지 않아 이혼했다. 버니게는 다시 오빠의 집으로 돌아온다. 친정오빠가 천하무적의 왕이고 올케도 조카도 없으니 언제든지 돌아갈 나의 고향이다. 아무 아쉬움 없이 이혼하고 쿨하게 돌아오기를 반복한다. 친정이 부자이면 이혼이 이렇게 쉬워보인다.
그런데 이것이 끝이 아니다. 아까도 말했듯이 유대 전쟁으로 돌 하나도 남지 않고 무너뜨리우리라 하는 마태복음 24장의 에수님의 예언을 성취시킨, 로마의 황제 아들이자 유다를 멸망시킨 디도 장군과 버니게가 눈이 맞았다. 자기 정욕을 위해서는 원수도 나라도 근친상간도 상관이 없다. 디도 장군이 무려 11살이나 연하였다. 버니게는 그 때 이미 40이 넘었다. 그럼 그 당시 얼마나 늙은 사람인지 모른다. 그런데 나중에 황제가 될 정도로 모든 것을 다 갖춘 디도장군이 11살의 나이차이를 넘어 사귈 정도였으니 베니게의 매력은 치명적이었던것 같다. 너무 부러운가? 죽어도 그렇게 한번 살아보고 싶네 하는 것이 여러분의 소원이다. 그런데 버니게는 자기 동생의 드루실라의 미모를 그렇게 질투했다고 한다. 참 끝이 없다.
버니게와 디도의 관게는 지속되었고 디도가 황제가 될 때 버니게가 황후로 삼으려고 했는데 로마 황실에서 너무 거세게 반대하여 그 뜻을 이루지 못해서 버니게는 평생 황후가 되지 못했다. 그러니 버니게는 또 편한 오빠 아그립바에게로 돌아갔을 것이다.
대단한 여자 맞지 않는가? 그래서 우리는 아그립바 보고 평생 순정을 지킨 대단한 사람이라고, 헤롯 아그립바는 어떻게 끝까지 버니게를 기다려줄까 하며 아그립바를 환상의 남자로 본다. 그들의 편력은 정말 판타스틱하다.
이런 배경으로 화려한 청문회장에 아그립바와 버니게가 나타났다. 그들은 교양과 화려한 치장으로 나타났지만 지금 제가 말했던 이런 것들을 드러냈어야 한다.
우리는 작은 죄만 있어도 숨기려 하고 가리우려 하고 자신의 위엄을 갖추어 드러낸다. 이 깊은 죄성이 찬란한 옷과 스펙, 깊은 열등감이 자신의 외적인 것을 끊임없이 자랑하게 하는 것이다. 하지만 진정한 위엄은 나 자신을 정확히 드러내는 것 부터 시작한다. 즉 내가 있어야 할 자리가 어디인지를 아는 것에서부터 이다. 위엄은 위로부터 주어지는데, 버니게는 그 자리를 모른다. 아내의 자리 동생의 자리를 모른다.
그럼 우리가 있어야 할 자리가 어디인가? 바로 죄인의 자리이다. 하나님 앞에서 내가 죄인임을 고백하는 자리, 그때 하나님의 위엄이 우리에게 주어진다. 환자가 자신이 환자임을 알 때 탁월한 의사의 위엄이 환자에게 임하듯, 우리가 정말 죄인임을 알 때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성부 성자 성령의 위엄이 우리를 뒤덮는다. 그리고 이 위엄이 우리를 이끈다.
지금 아그립바와 버니게가 어디에 서있는가? 접견장소에 들어왔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접견장소는 영어로 Place of hearing, 즉 듣는 장소이다. 듣는 장소가 어딘가? 바로 목장이다. 이 듣는 장소에서 바울 말을 듣고 바울 앞에서 자신의 화려함과 신분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아무에게도 드러내지 못했던 듣도 보도 못한 이런 화려함 편력을 드러냈다면 바울에게 임한 성령의 위엄이 동일하게 임했을 것이다. 그런데 목장에서 나눌 때 왜 저런 이야기를 하나 하며 교양있게 잘 된 이야기만 하는 바로 그 사람이 헤롯이고 버니게이다.
적용) 세상의 위엄이 허상이라는데 몇 퍼센트 동의합니까? 꿈에서라도 한번 누리고 싶은 판타지는 무엇입니까?
나의 갖추어진 모습 속에 감추고 싶은 모습은 무엇입니까? 그래서 내가 끝까지 지켜야 할 자리는 어디입니까?
내가 죄인의 자리를 모르면 끝까지 지켜야 할 자리가 아내의 자리 남편의 자리 부모의 자리 자녀의 자리임을 모른다. 그래서 이혼을 밥먹듯이 한다.
이 아그립바와 버니게는 이런것을 모른다. 그러나 최고의 지도자 자리에서 바울을 심문하고 있다. 정말 얼마나 우스운가?
성령의 위엄 두번째
2. 한 영혼을 살필 때 위엄이 주어집니다.
24 베스도가 말하되 아그립바 왕과 여기 같이 있는 여러분이여 당신들이 보는 이 사람은 유대의 모든 무리가 크게 외치되 살려 두지 못할 사람이라고 하여 예루살렘에서와 여기서도 내게 청원하였으나
25 내가 살피건대 죽일 죄를 범한 일이 없더이다 그러나 그가 황제에게 상소한 고로 보내기로 결정하였나이다
26 그에 대하여 황제께 확실한 사실을 아뢸 것이 없으므로 심문한 후 상소할 자료가 있을까 하여 당신들 앞 특히 아그립바 왕 당신 앞에 그를 내세웠나이다
큰 위엄을 갖춘 모습으로 아그립바 왕과 버니게가 접견장소, 목장에 나왔다. 이 때 베스도 목자가 말을 하는 것을 잘 들어보면 이렇다.
'이 사람들은 유대무리가 살려 두지 못할 자라고 하여 내가 그 사람을 잘 살폈는데 죽일 죄를 범한 일이 없었다. 그런데 그가 상소를 했기에 황제에게 보내야 하는데 뭐가 뭔지 몰라서 당신들을 불렀다.'
이를 더 짧게 요약하면 '나는 잘못한 것이 하나도 없다. 나는 탁월하게 처리했다. 내가 다 살펴봤다. 그런데 죄는 없는데 그가 문제이다. 그가 황제에게 상소해서 일이 복잡하게 되었다. 우리끼리 끝날 문제였는데 고소를 해서 복잡하게 되었다.' 이다. 나는 문제가 없다. 그런데 황제에게는 확실한 사실을 말할 것이 없다는 것이다.
확실한 사실이라는 것은 헬라어로 아스팔레스, 실상이라는 뜻이다. 올해 1월 성령의 실상 설교 할 때 헬라어로 아스팔트처럼 떨어지지 않는 것, 틀림이 없는 것, 그래서 확실한 것을 실상이라고 했다. 이것과 같은 이야기다. 언젠가 드러날 가짜가 아니라 변함이 없는 실상을 말한다. 그 실상을 황제에게 말할 것이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베스도는 지금 바울에 관한 실상을 아는가 모르는가? 이미 다 아스팔트처럼 확실한 실상을 다 파악했다. 그런데 황제께 보고할 만한 진상을 아직 알아내지 못한 것처럼 말한다. 핑계를 댄다. 왜 그런가? 자기 위엄을 더 드러내기 위해서, 영향력을 더 크게 드러내기 위해서 바울을 이용할 뿐인데 이것마저 마치 자신이 황제에게 더 정확한 보고를 하기 위해 애쓰는 것 처럼 연출하고 있다. 베스도의 연출력은 대단하다. 내가 최선을 다 했지만 복잡한 문제를 도와달라는 것이다. 베스도의 주장은 나는 다 잘했다, 내가 다 살펴봤다, 처리했다, 그가 문제다 이다. 그런데 그는 죄를 범하지는 않았는데 상소 때문에 복잡하게 되었다 이다.
성경이 인간론이다. 큐티를 잘 하면 부부관계나 인간론에 대해 분석이 된다.
베스도는 정직한 관리이다. 정직한 관리라고는 평가할 수 있지만 베스도에게 위엄이 있다고는 못한다. 왜냐하면 베스도의 나는 잘못없다는 태도는 어떤 존경도 위엄도 이끌어낼 수 없다.
직장에서 가정에서 우리 삶의 현장에서 이런 사람들을 많이 만난다.
나는 잘못 없고 나는 문제없어, 니가 그렇게 말해서 그렇게 한거니 니가 책임져라
이런 사람의 가장 큰 맹점은 처음부터 끝까지 죄가 없고 나는 공정했고 저 사람이 문제라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선함과 착함은 우리를 속이기에도 충분하고 지옥에 보내기에도 충분하다. 즉 착한 것이 악한 것이다.
베스도는 이 사건을 잘 살펴서 정말 바울이 문제가 없었다면 바울을 즉시 풀어줬어야 했다. 그리고 그런 결정을 할 수 있고 책임질 수 있는 자리에 있다. 유대 분봉왕들의 위를 다루는 사람들이 로마총독이기 때문이다. 듣는 자리에서 그가 정말 죄가 없다면 풀어줘야 하는데 신임 총독인데다가 유대인 원고들이 너무 유력하기에 비위를 거스르면 안된다고 생각했다.
누구와 비슷한가? 빌라도와 비슷하다. 빌라도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넘길 때 자신의 손을 씻으며 '나는 아무 죄가 없다. 이 사람에게 어떤 죄로 발견하지 못했다. 다만 너희가 원해서 그런거니 너희가 책임져라' 라고 했다. 그렇지만 너무 아이러니하게 우리가 날마다 고백하는 사도신경에는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다고 2천년 동안 전세계가 전 역사에 걸쳐서 레코드처럼 반복하고 있다. 유대인도 아니고 누구도 아니다. 그때 책임질 자리가 로마총독이었기 때문이다. 결국 책임지지 않는 모습이 가장 큰 죄악이라는 것이다.
성령이 위엄은 나에게 맡겨진 그 한사람을 책임지려고 할 때 그 사람에게 주어진다. 나는 죄가 없고 네가 문제다, 나는 이 문제와 상관이 없다 하며 책임지지 않는 모습에 하나님께서도 나도 너와 상관이 없다, 나도 너를 책임지지 않는다고 말씀하실 것이다.
목자도 목사도 다 마찬가지이다. 목자도 위엄이 주어질 때는 멋지게 설교할 때가 아니다. 잘 가르쳐서도 아니다. 정말 죽어가는 한 영혼, 한 가정을 살리고자 할 때 위엄이 주어지는 줄 믿는다.
베스도나 빌라도는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은 아무 죄가 없다. 죄가 없다는 목자는 목장을 이끌고 갈 수가 없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가장 큰 죄를 묻는다. 우리는 이것을 기억해야 한다. 목장에서도 가정에서도 그러니 이혼했지, 니가 알아서 해, 난 처방 다 했으니 알아서 해, 처방에 따르지 않는 니가 잘못이지 니가 책임져 그것이 맞는 이야기라도 그렇게 하면 안된다. 안 들어도 엇나가더라도 고통이 있더라도 우리는 목장에서 가정에서도 네 문제가 내 문제지, 네 아픔이 내 아픔이야 하며 그 아픔을 껴안을 때 성령의 위엄이 우리를 뒤덮어 우리의 모든 문제를 하나님께서 껴안아주실 줄 믿는다. 이것이 참 인간의 힘으로 안된다.
지난주에 청년부 아웃리치 이야기 하려다가 시간이 없어서 못했다. 우리들교회에서 하는 것과 똑같이 간증 페스티벌 목자 양육 큐티페스티벌 청소년 VIP 부부목장도 했다고 한다. 13군데를 다녀왔다. 그런데 어떤 교회에서는 목사님이 목세를 세번이나 참석하면서 한 두가정으로 시작한 큐티목회가 40가정으로 늘어났다고 해서 큐티 목회의 저력을 보았다고 한다.
섬기러 갔는데 큐티 때문에 살아났다고 커피를 쏘고 나눔 장소로 섬겨주시고 식사 내주시고 간식 내주셨다. 출애굽 하며 은금 패물을 가지고 나온 것 처럼, 가서 섬겨야 하는데 살아난 사람 한 사람 때문에 대접을 받고 왔다는 놀라운 이야기를 듣고 큐티 목회의 가능성을 보았다.
부부목장도 사역자와 여자권사님들 남자 목자님 다 직접 가셔서 자원하는 마음으로 섬겨주시고 자신의 죄패를 나누고 삶과 고난 수치를 나누며 그날 출애굽기 말씀에 따라 오픈하니 그 중에서 한 집사님이 이렇게 나누셨다 한다.
자신은 죄인이라는 생각이 없다. 아버지가 부유했지만 나중에는 내리막길로 내려가며 늘 술마시며 폭력을 행하시다가 뇌졸증으로 객사하셨다. 자신은 외지로 나가 홀로 노력해서 대기업 회사에 취직해서 오게 되었다. 자신은 너무 만족했고 예쁜 딸도 낳아 너무 만족했다. 그런데 또 다른 대기업에 다니던 아내가 늘 직장을 힘들어하고 상사가 괴롭힌다, 집에 들어오면 회사가 힘들다, 우리 다시 서울로 돌아가자 이야기를 했다. 그런데 아내의 문제로만 여겼지 이생활이 너무 좋으니 듣지 않았다. 그것은 아내의 책임이지 내 책임이 아니라 생각했다. 그런데 어느 날 아내에게 다른 남자가 생긴 것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목장 하기 얼마전에 양육권 때문에 협의 이혼했다
이렇게 나누어 주셨다. 이 이야기를 지방에 내려가자마자 다녔던 교회에서는 아무도 모르고 한번도 이야기 안 했는데 우리들의 목장에서 처음으로 오픈했다고 나누어 주었다. 평생 본인은 책임 없고 잘못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오늘 목장을 통해서 내가 오히려 더 잘못했다는 것이 깨달아졌다고 한다. 떠나간 아내에게 진심 어린 사과를 하게 해달라고 기도했다고 한다. 공동체 한번의 나눔으로 대단한 발상의 전환이 일어난 것이다.
따지고 보면 집사님도 베스도처럼 잘못한 것이 없다. 자기 일 잘 하고 열심히 산 죄 밖에 없다고 한다. 그러나 아내의 말을 듣지 않고 아내의 일을 내 일로 여겨 함께 아파하고 함께 공감하지 못하고 그 아픔을 내가 껴안고 책임지지 못한 것에 대한 결과가 너무 큰 아픔으로 다가온 것이다. 우리에게 맡겨주신 자리에서 내 옆 사람의 구원을 살필 때, 너의 구원을 살필 때 우리에게 성령의 위엄을 주시고 그 위엄이 우리 앞길에 나가 대신 싸워주실 줄 믿는다.
우리가 어떻게 다른 사람의 아픔과 죄를 책임질 수 있겠는가?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그냥 목장에서 함께 나누며 공감하고 나에게 허락한 가족의 아픔을 함께 책임지려고 결단하고 적용하려고 할 때 나는 문제없어가 아니라 아파하는 너를 살필 때 성령의 위엄이 우리에게 주어진다. 그래서 약속하신 말씀대로 하나님의 위엄이 내 앞에 가며 모든 원수를 물리쳐주시고 이 과정에서 남편의 위엄 아내의 위엄을 허락해서 함께 살아나는 것이다. 이것이 성령의 위엄이다.
오늘도 편지를 하나 받았다. 우리가 결혼을 잘 했지만 요즘 전부 핵가족이라 참지 못한다. 청년부출신인데도 조금만 잘못하면, 돈 조금 못 벌면 무시하기 짝이 없고, 무서운 사람이 없고, 마음대로 남자를 만나고, 왜 그러냐 하면 이혼하자고 한다. 그게 다 핵가족이고 부모님께 말하면 절대 병원에 안 가기 때문이다. 내 아들이 내 딸이 어때서 병원에 가냐고 한다. 근본적으로 이 세상과 말이 안통한다. 교회가 도피성이 되어주지 못하면 백발백중 이혼하고 갈라지고 찢어지고 나가서 또 재혼하고 찢어진다. 그렇게 나가서 다른 남자 만난들 제대로 해결이 되겠는가? 그러니 공동체에서 말하는 것이 최고인데도 불구하고 워낙 이 시대가 자기 밖에 모르고 자기 아들 딸 밖에 모르기에 자꾸 가정이 찢어지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정신을 차리고 부모부터 정신을 차리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적용) 나는 문제없어, 네가 문제야 하며 살고 있지 않습니까? 내가 죽어도 책임지고 싶지 않은 것은 무엇입니까? 아내입니까? 남편입니까? 부모입니까? 자녀입니까?
내게 주신 은혜는 망각하며 나만 이 가정을 책임진다고 억울해 하며 빌라도 베스도처럼 손을 씻고 있지 않습니까?
부모가 나에게 해 준 것이 뭔 데, 당신이 나에게 해 준 것이 뭔 데, 너희들이 나에게 해 준 것이 무엇인데 하면서 네가 문제야, 나에게 더 이상 원하지 말라 하고 있지는 않은가?
성령의 위엄 세번째
3. 무리한 일을 분별할 때 위엄이 주어집니다.
27절 그 죄목도 밝히지 아니하고 죄수를 보내는 것이 무리한 일인 줄 아나이다 하였더라
바울은 지금 죄수의 신분으로 앉아있다. 그 동안 더둘로 변호사 대제사장 이스라엘 최고기관인 산헤드린 공회원이 와도 모든 법에 능통한 로마 총독인 벨릭스 베스도 두번이나 바뀌어도 심지어 유대법에 정통한 유대땅을 다스리는 왕이 와도 바울의 죄목을 발견하지 못한다. 그러나 바울은 어디를 가나 설교할 때 자신이 죄인임을 고백한다. 정작 어느 사람도 바울을 처벌할 죄목을 발견하지 못하는데도 그렇다.
그 죄목이 없어도 바울은 자신이 죄수임을 인정하며 간다. 죄수임을 인정하며 가는 사람은 무리한 일인지 아닌지 분별할 수 있다. 어떤 사건이 왔을 때 옳고 그름만 따지고 나는 죄목이 없으니 죄인이 아니라 말한다면 베스도 처럼 무리한 일인지 아닌지 분별하지 못하고 죄목만 찾다가 싸움만 난다.
요즘 정치권을 보면 죄목만 찾다가 지리한 싸움을 한다. 최고 통수권자가 우리들교회 목장에 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을 한다. 평범한 데서 나누면 말할 것을 입에 다 넣어드릴텐데 말이다. 그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야 하는데 이런 목장에 평생 한번도 안가봤기에 이런 듣는 훈련이 힘드실 거라는 생각이 든다.
죄목이 없지만 내가 죄수임을 아는 것이 성도의 위엄이다. 우리가 오픈하고 고백할 수 있는 것은 이 죄를 십자가에 못박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죄를 온전히 이기지 못했더라도 그 죄를 날마다 십자가에 못박아 그 죄에 대해 온전히 죽었기 때문에 오픈하며 고백할 수 있는 것이고 오픈하고 고백함으로 날마다 내 속에 다시 살아나는 죄와 치열하게 다시 싸우며 갈 수 있는 것이다.
죄라는 것은 경계를 넘어서는 것이다. 오늘 말씀으로 경계를 앞당겨야 한다. 저울 추처럼 가져오고 또 가져와야 한다. 온전히 이 죄에 대해 십자가에 죽어졌기에 우리는 마땅히 영원한 형벌을 받아 마땅한 죄인임을 온몸으로 인정하면서, 동시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실 때 독생자 예수의 옷으로 입혀주심으로 너는 죄가 없다, 즉 나는 죄인이지만 죄목이 없는 죄인이라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용서해주시고 간과해 주셨기 때문이다.
죄인으로 모습으로 살아가는 그 모습이 필요한데 왜 죄만 보라고 하는가 한다. 이런 성도의 아이러니는 세상은 이해하지 못한다. 목장에서 죄 고백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죄 용서함 받는 십자가를 이해하지 못한다.
이 일을 베스도는 무리한 일이라고 말한다. 무리하다는 말은 알로곤 이라는 단어로, 이성이 없는, 말이 되지 않는, 비합리적인 이라는 뜻이다. 이것이 무리하다는 뜻이다. 즉 베스도는 도대체 왜 바울이 감옥에 갇혀있고 이런 상황에 있는지 이성적으로 이해할 수 없다. 죽었다 깨어나도 베스도는 이것이 이해가 안된다.
왜 이런 남편과 살고 있고 왜 이런 적용을 하고 왜 오픈하고 왜 나를 힘들게 하는 저 사람을 끝까지 돌보는지, 구원과 십자가를 모르면 이 모든 일들을 무리한 일들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성과 합리의 토대 위에 살아온 베스도는 이해할 수 없다. 답답하다. 우리 옆의 모든 똑똑한 사람들이 이해할 수 없다. 다 애굽사람들이고 로마사람들이라 그렇다. 이 사람들은 왕복을 입고 도대체 이해할 수 없다고 이야기한다. 내가 뭘 구원때문에 하는 적용도 전부 조롱한다. 믿음 있으면 조롱을 하겠는가? 절대 이해가 안된다. 그래서 이걸 당하고 가야 한다. 그러니 너무 힘들다 하지 말라. 이세상과 하나님은 공존할 수 없기에 그렇다.
어떤 집사님이 집에서 쫓겨났다. 아내의 역할을 끝까지 감당하기 위해 자신을 쫓아낸 남편의 집 앞에 반찬을 해서 걸어두었다고 한다. 남편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도 아니고 욕심을 위해서도 아니다. 자신도 정말 너무 하기 싫었지만 아내의 역할을 잘 하지 못하는 자신을 회개하며 목장 처방에 순종하여 했다. 그런데 아주 합리적이고 이성적이었던 정신과 의사는 이혼해야지 왜 그런 미련한 짓을 하냐며 자신이 배운 수 많은 지식과 상담해온 많은 경험을 통해 이 가정은 결코 합쳐질 수 없고, 반찬해서 가져다주는 그런 미련한 짓을 하지 말라고, 그래서 남편이 돌아오는 것이 아니라 했다. 그런데 이 남편의 마음이 변했다고 한다. 아직 돌아온 것은 아니지만 변했다고 한다. 그러니 의사가 내가 졌다고 목장이 맞았다고 상담해주었다고 한다. 그러니 상담은 목장에서 받고 약만 처방받아오시길 바란다.
요즘은 육아교가 있다. 기독교 불교가 아니라 육아교이다. 아이들이 조금이라도 상처받지 않게 하려는 육아교이다. 그런데 좋은 부모 나쁜 부모 없고 알콜중독 부모 밑에서 훌륭한 아이들이 훨씬 많이 나온다. 구원에 초점을 둬야지 우리 애가 어떻게 될까 하면 안된다. 구원에 초점을 둬야 한다. 그래서 우리가 합리라고 생각하는 것들을 정말 객관적으로 욕심 없는 목장에서 검증받아야 한다. 목자와 목원은 욕심 많아도 목장은 욕심이 없다. 왜냐하면 구원의 공동체이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무리한 일이 합리적이라 생각하고 무리한 일을 분별할 수가 없다. 구원을 위한 적용이 때로는 미련해보여도 말씀 안에서 가장 이성적인 적용이고 이런 것들을 공동체에서 분별하며 나갈 때 이 일이 무리한 일인지 아닌지 분별해 나갈 때 나도 살고 너도 살고 함께 살아내는 것이다. 그런데 세상은 저 여자가 바람폈다 저 남편이 바람폈다 하며 죄목만 주목한다.
1부예배에서 도박한 청년이 세례 간증을 했다. 첫날부터 말씀이 들렸다고 한다. 그리고 너무 세례 받고 싶어서 받는다고 한다. 제가 눈물이 났다. 20년이 되어도 말씀이 안 들리는 사람들이 많은데, 세상은 죄목만 주목한다. 우리는 죄목, 옳고 그름, 잘못한 것을 따지는 것이 아니라 내가 죄수임을 알고 갈 때, 이 사건에 나의 죄목이 없더라도 내가 죄수임을 알고 갈 때 우리는 무리한 일 아닌일을 분별할 수 있고 구원을 위한 일이 무엇인지를 분별할 수 있는 것이다.
마틴 루터 킹이 흑인을 죽인 백인을 용서한다. 흑인을 죽인 백인도 사람이고 흑인도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은 다 죄인이라는 것이다. 사람이 100% 죄인이라는 것을 인정할 때가 가장 존엄하고, 이 존엄을 훼손할 수 있는 도구는 이 세상에 없다고 이야기했다. 인간이 가장 존엄할 때가 100% 죄인이라는 것을 인정할 때라고 한 것이다. 이 존엄이 성령의 위엄 아니겠는가?
그러니 루터킹이 담배 피고 여자들과도 놀아났지만 마틴루터킹이 하나님 나라를 무너지게 했는가 세웠는가? 아브라함도 마찬가지다. 인간은 완전할 수 없다. 그래도 자기 죄를 보는 사람은 날마다 태산을 넘어서 간다. 저 높은 곳을 향해 간다. 그 때 죄를 지었다고 니가 어떻게 그러냐, 니가 지도자냐 그래도 이 분이 하나님을 믿는다. 이게 바로 성령의 위엄이 임하는 것이다.
성령의 상소를 할 때 인내로 통과해야 하는데, 이 때 필요한 것이 위엄이다. 근데 자기 죄를 보는 사람에게 이 위엄이 임한다. 다른 어떤 조건도 없다. 자기 죄를 보는 사람이 위엄이 있는 것이다.
적용) 지금 묻지 않고 무리하게 진행하고 있는 것이 있나요? 주변에서 모두 무리한 일이라 하는데 이것이 합리적이라 여기는 것은 무엇인가요?
난 죄목이 없다고 난 죄인이 아니라 외치고 있지는 않나요?
저는 너무 아픈 나눔을 하나 보았다.
수련회 위해서 이렇게 기도한 적이 없었는데 아들을 데려가기 위해 한달동안 빠짐없이 기도했다. 아이 상태가 변화무쌍하기에 아무리 간다고 해도 당일 차를 태워봐야 안다. 당일날 차 태우고 너무 감사해서 파주에 도착했는데 캔슬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날 아침 새벽기도 말씀 들으며 저를 떨기 나무 앞에서 사명 주시기 위한 수련회라는 말씀을 주셨다. 제가 아들 수련회가서 말씀도 들리고 동생도 변하고 아내도 변할 것이라는 또다른 야망을 버리게 하시고,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의 고백의 시간을 가지게 해 주셔서 감사했다.
아들은 집에 와서 온라인 수련회는 택도 없이 다음날 학교로 도망갔고 저녁 7시반에 들어왔다. 우리는 온라인으로 수련회 하는데 아내와 막내는 다 른교회에서 하는 수련회에 갔고, 딸은 친구네서 자고 온다고 했다. 저와 아들둘이 저녁밥 먹을 때 수련회 유투브를 켜고 목사님 말씀도 크게 틀어놨다. 그런데 아들은 목사님 말씀 듣자 마자 5분도 안되어 밥 다 먹고 방에 가서 게임을 했다. 그래서 저 혼자서 무릎 꿇고 목사님이 꿇으라 하면 꿇고 일어나라 하면 일어나고 시키는 대로 다 했다. 중고등부 수련회를 저 혼자 참여하고 은혜 혼자 받았다.
아이는 방에서 게임만 하고 있는데 아빠는 기도하고 일어나고 무릎 꿇고 하는 것을 하늘의 주님이 다 보고 계셨을 것이라 생각한다. 온라인으로 수련회 할 때 꼭 부모가 옆에 있어줘야 하는데 아내와 막내는 다른 교회 수련회에 갔다고 한다. 물론 아직 우리들 교회에 오지 않아서 그랬을 것이다. 그러나 교회가 얼마나 힘들게 내린 결정인데, 아들은 게임한다는 대목이 제가 너무 슬프고 아팠다. 성령의 상소를 하시며 가시니 정말 위축되실 만 한데 무릎꿇고 기도하는 것이 바로 성령의 위엄이라 생각한다. 계속 상소하시면서 성령의 위엄이 그득하시기를 기도한다.
말씀맺음
성령의 위엄은 과시가 아니라 자신의 수치를 드러낼 때 주어진다. 그렇게 위엄을 잔뜩 부린다고 위엄이 생기는 것이 아니다. 한 영혼을 살필 때 위엄이 주어지는 것이다. 말 잘한다고 위엄이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비합리적인지 합리적인지, 자기 죄를 모르면 무리한 일을 분별할 수 없다고 한다. 무리한 일을 분별하는 것이 위엄이 주어지는 일이다. 우리에게는 오직 주가 일하신다. 내가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기도제목]
보련
1. 일주일 말씀으로 살기
2. 하나님의 자존감 가질수 있도록
교희
1. 무슨 일이 있어도 하나님께 피하여 안식할 수 있도록
2. 맡겨드리지 못하고 불안하여 내가 해결하려는 죄를 불쌍히 여겨주시도록
3. 나의 경계를 잘 세우고 지킬 수 있는 분별과 지혜와 용기를 허락해 주시기를
+ 은우언니 위해서 같이 기도 부탁드립니다. 열도 많이 나고 많이 힘들어하는 상태입니다.
속히 회복되도록, 후유증 남지 않도록 같이 기도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