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성령의 상소
본문: 사도행전 25:10-22
설교: 김양재 목사
10 바울이 이르되 내가 가이사의 재판 자리 앞에 섰으니 마땅히 거기서 심문을 받을 것이라 당신도 잘 아시는 바와 같이 내가 유대인들에게 불의를 행한 일이 없나이다
11 만일 내가 불의를 행하여 무슨 죽을 죄를 지었으면 죽기를 사양하지 아니할 것이나 만일 이 사람들이 나를 고발하는 것이 다 사실이 아니면 아무도 나를 그들에게 내줄 수 없나이다 내가 가이사께 상소하노라 한대
12 베스도가 배석자들과 상의하고 이르되 네가 가이사에게 상소하였으니 가이사에게 갈 것이라 하니라
13 수일 후에 아그립바 왕과 버니게가 베스도에게 문안하러 가이사랴에 와서
14 여러 날을 있더니 베스도가 바울의 일로 왕에게 고하여 이르되 벨릭스가 한 사람을 구류하여 두었는데
15 내가 예루살렘에 있을 때에 유대인의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그를 고소하여 정죄하기를 청하기에
16 내가 대답하되 무릇 피고가 원고들 앞에서 고소 사건에 대하여 변명할 기회가 있기 전에 내주는 것은 로마 사람의 법이 아니라 하였노라
17 그러므로 그들이 나와 함께 여기 오매 내가 지체하지 아니하고 이튿날 재판 자리에 앉아 명하여 그 사람을 데려왔으나
18 원고들이 서서 내가 짐작하던 것 같은 악행의 혐의는 하나도 제시하지 아니하고
19 오직 자기들의 종교와 또는 예수라 하는 이가 죽은 것을 살아 있다고 바울이 주장하는 그 일에 관한 문제로 고발하는 것뿐이라
20 내가 이 일에 대하여 어떻게 심리할는지 몰라서 바울에게 묻되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이 일에 심문을 받으려느냐 한즉
21 바울은 황제의 판결을 받도록 자기를 지켜 주기를 호소하므로 내가 그를 가이사에게 보내기까지 지켜 두라 명하였노라 하니
22 아그립바가 베스도에게 이르되 나도 이 사람의 말을 듣고자 하노라 베스도가 이르되 내일 들으시리이다 하더라
내일은 77주년 광복절입니다. 나라가 없으면 예배도 못 드린다는 말을 수없이 얘기했지만, 다음 세대들은 이 말을 잘 몰라서 안타깝습니다. 우리 부모님도 북한에서 디아스포라로 남한에 오셔서 고국에 돌아가지 못하고 소천하셨습니다. 미국에 동포들도 고국에 돌아오지 못하는 분들도 많을겁니다. 우리는 모두 천국의 디아스포라로 고향에서 만나자고 성령의 상소를 했습니다.
정말 성령의 호의 말씀대로 코로나로 인해 잠시 거절의 격리도 당하면서 말씀대로 이루어지니 신기하고 놀라울 뿐입니다. 우리들 역시 언젠가는 심판이 구원일지 영원한 사망일지 모르지만,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우리나라는 3번의 재판을 받을 수 있는데요, 항소, 상고, 항고, 재항고를 모두 통틀어서 상소라고 부릅니다. 따라서 우리가 이 땅에서 심판을 받는 것은 축복입니다. 왜죠? 심판이 확정되지 않았고 돌이키라는 기회 이기 때문입니다. 상소할 수 있는 기회가 있는거에요 이 땅에. 수 많은 심판을 통해 회개로 돌이켜 영원히 피할 수 없는 심판을 받기 전에 피하는 상소를 해야 합니다. 상소라는 단어가 4번 나오는데요.
성령의 상소
1. 인내의 때를 채워야 합니다.
10 바울이 이르되 내가 가이사의 재판 자리 앞에 섰으니 마땅히 거기서 심문을 받을 것이라 당신도 잘 아시는 바와 같이 내가 유대인들에게 불의를 행한 일이 없나이다
11 만일 내가 불의를 행하여 무슨 죽을 죄를 지었으면 죽기를 사양하지 아니할 것이나 만일 이 사람들이 나를 고발하는 것이 다 사실이 아니면 아무도 나를 그들에게 내줄 수 없나이다 내가 가이사께 상소하노라 한대
3차 전도 여행 마지막에 바울은 아시아 각 교회에서 부조를 모아 예루살렘 교회에 드리려고 도착했어요. 그렇게 열심히 선교하고 예루살렘 교회에 헌금도 얼마나 지혜롭게 가져왔는데 결론이 감옥입니다. 바울을 이렇게까지 죽이려고 할 줄 몰랐어요. 바울이 무슨 욕심으로 선교합니까? 주님 만나서 70여곳 되는 곳에서 복음 전했는데, 유대인 지도자들은 이런 바울을 죽여야 한다고 집요하게 고발합니다. 예루살렘에서 오히려 장로들에 순종해서 바울은 결례를 행했죠. 결례를 위해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갔는데, 거기서 소동이 나서 결국 체포되었어요. 21장의 내용이에요. 지금 25장 내용이거든요. 하지만 여전히 감금된 피고에요. 그동안 잡히고 끌려가고 영내에 감금되고 천부장에게 심문 받고, 벨릭스, 이제 베스도에게 조사를 받고 있는 이 모든 고난을 받는 바울은 처음부터 지난 2년동안 가이사의 제판자리에 섰다고 해요. 최고의 심판관인 로마 황제에게 심판 받을 자격이 있죠. 이렇게 계속 하나님 응답대로 가는데 그게 가이사의 재판 자리에 섰다고 하는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의 재판자리에 섰다고 생각하고 모든 일을 감당하기 바랍니다. 상소권을 왜 이 상황에서 당당하게 사용할 수 있을까요? 이런 모든 상황들을 바울은 인내하고 기다렸습니다. 로마 시민의 당연한 권리가 있지만 그 권리를 사용하지 않았어요. 그러나 자기를 도와줄 것 같았던 새로 부임한 성실한 베스도가 유대인 지도자들에게 노골적으로 유리하게 처리하려 해요. 진짜 아무도 믿을 사람이 없는 거에요. 자기 편들은 다 밖에 있어요. 혼자서 감당하고 있어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자고 하니깐, 드디어 로마 상속권을 사용하고자 합니다. 더 이상 지체할 수 없는 그 날, 그 밤이 왔어요. 그런데 이 상속권이 얼마나 대단한지, 바울이 이렇게 한마디 하자마자 총독 베스도는 허락하지 않을 수 없었어요. 로마 시민권자이죠. 로마 시민권이기 전에 하나님이 보시기에 인내의 때를 채웠어요. 왜냐고요? 고난은 쓰는 것 보다 쓰지 않는게 더 힘들어요. 높은 고난을 가지고 있을 때 더 높은 지혜가 필요합니다. 바울이 로마 시민권 한번쓰기까지 얼마나 많은 고민을 했는지, 그리고 그 권을 쓰기전에 그간의 고난을 보면 알 수 있어요. 붙잡히고 매맞고 감옥에 갇히고, 그 고난을 다 견뎌낼 때까지 인내했습니다. 인내의 때를 다 채운 후에 비로소 자기가 로마 시민인 것을 밝혔죠. 그마저도 자기 안위나 복수를 위한 것이 아닌, 빌립보 교회의 보호를 위해서 그 형제자매들을 아무도 건들이지 않게 하기 위해, 떠나면서 로마 시민권을 썼습니다. 진작 쓸 수 있는 권리를 쓰지 않고 참다가 때가 차매 쓰니깐 그 상소가 빛이 납니다. 인내를 하면서 상소권을 써야지, 인내도 하지 않고 날마다 기도 한다고 들어주시는게 아니에요. 참으니깐 들어주시죠.
적용질문:
구원을 위해 쓰는 권과 쓰지 않는 권은 무엇입니까?
할 수만 있다면 상소해서라도 당장 해결하고 싶은 억울한 일은 무엇입니까?
구원을 위해 얼마나 인내하고 있습니까?
상대방을 인내하게 만들고 있지는 않습니까?
성령의 상소
2. 부르짖어야 합니다.
12 베스도가 배석자들과 상의하고 이르되 네가 가이사에게 상소하였으니 가이사에게 갈 것이라 하니라
상소하다는 헬라어로 에픽칼리오 인데요, 1차적인 의미는 이름을 부르다 에요. 그런데 이 단어가 동일하게 쓰인 곳이 사도행전
21절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22장 16절 일어나 주의 이름을 불러 세례를 받고 너의 죄를 씻으라 하더라
상소는 간절히 부르짖고, 구원을 위해 온 힘을 다해 부르짖고, 주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에요. 하나님의 은혜로 내어줄 수 없는, 내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이 상황이 온 것은 부르짖게 하기 위함입니다. 나를 능히 죄에서 구원할, 내 왕 아버지께 부르 짖는 것이죠. 하지만 묶이지 않았다면, 나를 감옥에서 내어 자유롭게 다녔더라면 결코 부르짖지 않죠. 큰 세력들이 나를 둘러싸고 내어줄 수 없는 환경이기에 부르짖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간절한 나의 목소리를 간절히 듣기 원하십니다. 사람 찾고 방법 찾고 나를 내어줄 누군가를 찾을 것이 아니라 먼저 나의 아버지를 찾아야 합니다. 이런 훈련이 없으면, 큰 시험이 올 때 결코 부르짖지 않습니다. 예배자리 나와서 두 손을 모아야 합니다. 최고 상급기관인 내 아버지를 부르짖어야 합니다. 넋이 나갈 환경 가운데 있을지라도.. 미약한 음성이나마 주여 주여.. 불러야 돼요.
이런 마음으로 바울은 가이사에게 상소했습니다. 자기 살고자 하는 상소가 아닌 성령의 상소, 이타적인 상소였습니다. 로마 시민인 바울의 상소에도 베스도가 즉각 응답했는데, 천국 시민권자인 우리가 하나님 앞에 부르짖을 때 하나님께서 반드시 응답하십니다. 그 응답은 우리 생각과 기대와 다를 수 있어요. 구속사를 여러분들이 깨달아야 해요. 우리가 생각하기엔 2년동안 갇혀 있는 것이 아니라 풀려나고, 예루살렘에서는 환대받고, 능력이 생기고 힘이 생겨 열심히 전도하는 것이 하나님의 응답이라고 생각하죠. 하지만 성령의 상소를 통해서 2년동안 갇혀 있고 그럼에도 죽이려는 사람이 끊임없이 있고 여전히 이 힘과 권세에 둘러싸여 바울을 죽이려는 이 상황을 누가 응답이라고 생각하겠습니까?
하지만 이 상황이 바울에게는 가장 안전한 상황이고 갇혀 있는 것이 하나님의 용서하심이며 은혜임을 보게 되어요. 응답입니다. 왜? 2년동안 그 어느때에 석방되었으면 그 자리에 죽는거에요. 나가면 죽는거에요. 그러나 이렇게 끝까지 성령의 상소로 하나님의 응답을 얻게 되면, 로마, 거기까지 2240 km를 그 누구도 같이 호송할 수 없어요. 로마 군인이 함께 가장 안전하게 가게 하심이,, 복음 때문에 응답이 되어야 하는 것이지, 여러분의 안위와 평안을 위해 복락을 위해 기도하니 매번 응답이 없다고 해요.
오늘도 눈을 뜨고 큐티 하고 기다리며 그거 자체가 날마다 하루하루가 응답인 줄 믿습니다. 가장 나에게 좋은 방법으로 응답하세요. 주님이 들으신다는 믿음이 있어야 부르짖습니다. 하나님은 나의 세밀한 부르짖음도 다 듣습니다.
적용질문:
문제가 생기면 나는 누구를 가장 먼저 찾습니까? 주님께서 나의 상소를 들으신다고 믿어지십니까? 최고의 응답을 주심을 믿습니까?
뭐든지 기도하면 금나와라 뚝딱.. 이게 응답이 아니라, 이렇게 기도하는데도 집요하게 죽이려 하자나요
성령의 상소
3. 지겨운 괴롭힘을 통과할 때 기회를 주십니다.
그 지겨운 괴롭힘을 통과해야 합니다.
13 수일 후에 아그립바 왕과 버니게가 베스도에게 문안하러 가이사랴에 와서
14 여러 날을 있더니 베스도가 바울의 일로 왕에게 고하여 이르되 벨릭스가 한 사람을 구류하여 두었는데
15 내가 예루살렘에 있을 때에 유대인의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그를 고소하여 정죄하기를 청하기에
베스도에게 있어서 전임 벨릭스 총독이 남기고 간 바울은 잔류물 중 하나였고, 귀찮은 존재였어요. 베스도는 이제 가이사에게 제출할 보고서를 작성해야 하는데, 유대인과 바울 사이에 있었던 고소와 변론을 보니깐 가이사에게 상소할 죄목이 없는 거에요. 그렇다고 유대인들을 무시할 수 없자나요. 난제입니다. 바로 그때 아그립바왕과 여동생 버니게가 짠하고 나타납니다. 아그립바 왕은 헤롯 대왕의 손자고 야보고를 죽였던 아그립바 왕의 2세와, 누이동생 버니게는 문제많은 당사자였어요. 그러나 그런걸 다 떠나서 아그립바왕은 종교적인 면에 있어서 신실한 유대교 신자에요. 유대인의 종교 문제에 전문가라는 평판이 있었어요. 바울의 문제는 로마 실정법으로 다룰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 유대인 종교에 관해 해결 가능했기 때문에, 이 아그립바 왕은 로마 총독의 의논 상대일 뿐만 아니라, 그리고 분봉왕이기 때문에 책임을 전가할 수 있는 왕으로 나타난거죠. 베스도가 일처리 만큼은 대단히 지혜롭고 노련합니다. 내 옆에 의논 상대가 있다는 것은 복입니다. 그러나 의논도 욕심이 앞서면 친구하고도 의논을 안해요. 목장에서 이런걸 물어보고 의논할 수 있는, 일주일에 한번 만날 수 있는 상대가 있다는 것은 최고의 상대에요. 그러나 목장도 욕심이 생기면 안 나눠요. 망하고 나서 나눠요. 작은 것도 나누면 나눈다는 사실이 겸손이자나요. 하나님은 그게 응답이에요. 나눈다는 것 자체가 응답이에요. 벌써 거기에 겸손함이 들어가기 때문에..
동족에게 고소당한 피고 바울에 대해 베스도가 설명하는거에요. 아그립바왕에게 베스도가 설명하는 거에요.
16 내가 대답하되 무릇 피고가 원고들 앞에서 고소 사건에 대하여 변명할 기회가 있기 전에 내주는 것은 로마 사람의 법이 아니라 하였노라
17 그러므로 그들이 나와 함께 여기 오매 내가 지체하지 아니하고 이튿날 재판 자리에 앉아 명하여 그 사람을 데려왔으나
원고들이 바울을 달라고 자기들이 처리하겠다고, 하지만 로마법이 아니라서 내가 그러지 않았다.
그래서 그 사람을 데려왔는데,
18 원고들이 서서 내가 짐작하던 것 같은 악행의 혐의는 하나도 제시하지 아니하고
19 오직 자기들의 종교와 또는 예수라 하는 이가 죽은 것을 살아 있다고 바울이 주장하는 그 일에 관한 문제로 고발하는 것뿐이라
요지는, 자기는 로마 총독으로써 법대로 공정하게 처리하려고 했다며 생색냅니다. 그런데 바울 악행혐의는 증명할 수 없었고, 바울이 주장하는 것은 예수라 하는 이의 부활이더라. 종교적 논쟁에 불가하더라 고 얘기합니다.
복음의 핵심에 대해서는 사도 바울이나 베스도나 아는 것에서는 차이가 없어요. 우리 다 알아요. 그러나 예수님의 부활을 말할 때 바울에게는 영혼의 떨림, 감격이 있어요. 베스도는 너무나 dry한 목소리로 예수의 부활을 전합니다. 이 둘 사이에, 베스도가 엘리트지만 차이가 있어요. 여러분 다 알아요. 성경도, 큐티도 다 알아. 그러나 하나도 감격과 떨림이 없어요.
바울이 유대인들과 충돌이 있었던 것은, 부활의 예수를 믿어야 구원을 얻는다. 바울은 떨림이 있고 유대인은 떨림이 없어요. 바울이 틀린말 하는 것이 아닌데,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한다. 이것 때문에 충돌이 계속 일어납니다.
그러면 바울이 아니라 그러겠습니까? 십자가와 부활의 구속사를 매일 주장합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직속 계보인 유다를 계속 외쳐요.
바울에 대한 이런 보고가 몇 번째인가요? 바울도 여러 차례 변명, 설명을 했어요. 유대 지도자들의 고소 내용도 여러 차례 나왔습니다. 천부장 글라우시오가 벨릭스 총독에 보고하는 내용에도 다 있어요. 이런 시간을 다 인내하면서 통과했어요. 이제 때가 되어 상소권을 써서 드디어 끝나나 했더니또 반복되는 아그립바 왕 앞에서 또 설명해야하는 거에요. 인간적으로 정말 지겨운 괴롭힘이에요. 아무리 지겨운 괴롭힘이더라도 내 힘을 빼고 열심을 멈추고 판단을 괄호치고, 두려워하지 말고 가만히 서서 통과하면 여호와께서 오늘 우리에게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하시자나요. 출애굽기 14장, 가만이 서서 구원을 보라 하시자나요.. 변명할 기회가 필요할 땐 변명을 주시구요 상소할 기회가 필요하면 상소를 주세요. 그런데 우리는 내 열심히 앞서게 되면 기회 조차 만들려고 해서 망하는 거에요. 당장이라도 벗어나고 싶은 지겹게 반복되는 고난에서 단번에 벗어나려는 기회가 어디있을까? 어떻게 기회를 만들 수 있을까? 늘 두리번두리번 거리면서 새로운 사람, 새로운 환경을 꿈꾸는 거에요. 내가 여기서 이러고 있을 사람이 아닌데... 이런 불평과 원망과, 그런 지옥을 사는 거에요. 지겨워 지겨워 여기를 떠나야 해. 하지만 기회는 만드는 것이 아니에요. 성경에 기회라는 말이 여러 번 나와요. 그런데 기회를 찾는 주체는 한정되어 있어요. 누가 기회를 찾느냐? 악인이 기회를 찾아요. 가롯유다가 예수를 넘겨줄 기회를 찾아요, 죄가 기회를 타서 잡아서 탐심을 이루고 우리를 속이고 죽인다고 나오죠. 그런데 거룩할 성도가 기회를 찾거나 노린다는 말은 성경에 없어요. 성도는 기회 있는 데로 착한 일을 할 뿐이라고 했어요. 기회가 있으면 주님이 보내신 곳에 가는거에요. 성도의 때나 기회는 인간이 스스로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것을 인정해야해요. 특히 주님은 우리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십니다. 우리는 이것을 찾고 잡아야 하는데, 우리는 이타적으로 회개할 기회, 착한 일 할 기회, 이런 걸 찾는 것이니, 악인의 기회를 찾으면 안되요.
주님이 주시는 기회가 올 때 잡는 것이 우리가 기회를 얻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내가 당하고 있는 지겨운 괴롭힘에서 벗어날 기회를 내가 얻겠다는 헛된 욕심을 버리는 것이, 가만히 서서 주님이 행하시는 구원을 보는 비결이에요. 지겨운 괴롭힘은 벗어나기 위해 오는 것이 아니에요. 만일 그렇다면 주님이 새디스트에요? 우리가 지겨운 것은 내 죄가 내 고난 보다 크다는 구속사가 깨달아지지 않기 때문이에요.
그런데 그러니까 이 지겨운 괴롭힘이 구속사가 깨달아지면 내 인생의 결론이 인정되는 거죠. 그 지겨운 괴롭힘에서 내가 주님 앞에서 얼마나 지겨운 죄인인가를 알아야 하는거에요. 그걸 피해야 하는게 아니라 그 지겨운 괴롭힘 속에서 내 자신을 아는 거에요. 제가 이걸 경험했자나요. 우리 남편만 지겹다고 하다가, 제 지겨움을 보게 되었어요. 이게 입으로 설명이 안되는거에요.
바울이 지겨운 괴롭힘을 통과하면서도 나의 무죄의 변명 보다 더 강조해서 전한 것이 부활하신 주님이자나요. 자신이 이 지겨운 괴롭힘을 당해도 할말없는 죄인임을 철저히 알았기 때문에, 사과하는 마음으로 변명하면서 부활하신 주님만 전할 수 있었던 것이에요. 이 확실한 자기 인식과 하나님 인식이 있으면 지겨운 괴롭힘도 통과할 수 있어요. 우리 인생이 사실 지겨운 괴롭힘이자나요... 외적이든 내적이든 각자 지겨운 문제를 안고 사는 것이 우리 인생이에요. 그런데 자기를 모르면 하나님을 모르고 하나님을 모르면 자기를 몰라요. 하나님과 자기를 모르면 문제만 보여요. 이게 애굽 바로의 관점이자나요. 사건이 오면 모든 것이 재앙이 되고, 문제만 보이니까.. 이런 사람은 마지막 열가지 재앙을 치지 않으면 절대로.. 자기를 모르고 하나님을 모르니깐... 하지만, 하나님을 알고 나를 아는 사람은 문제를 해석해요. 모르면 재앙 밖에 안되어요.
우리도 기막힌 고난을 말씀으로 통과하니 성령의 상소를 통해 놀랍게 구원을 얻게 되죠. 지금까지 열심히 상소한 것 같아요, 하나님을 모르고 자기를 모르면 세상으로 떠내려가요. 하나님을 알고 자기를 알고 상소를 해야하는데, 고난이 오면 주님께 왔다가 해결되면 떠남.. 기복이 왜 무서운가 하면 하나님도 모르고 자기도 모르는데 날마다 빌어요. 그런데 이렇게 해결되면 하나님을 떠나는.. 그런일이 있으면 안되는데요.. 그래서 내가 젖과 꿀 속에 들어가면 하나님을 알기가 너무 어려워요. 그동안은 하나님을 믿는 것 처럼 그렇게 빌다가, 그게 딱 오니까 하나님을 믿은 게 아니니 떠나죠. 목적이 문제해결에 있기 때문에 그러는 거에요. 하루 하루 지겨운 괴롭힘을 통과할 때, 때가 되면 주님이 필요한 기회를 주시는거에요.
어두운 터널을 통과하며 우리의 모든 상소를 주님이 기억하시며 기회를 주세요. 그래서 우리는 기회가 오기 전에 할 일은 성령의 상소에요.
적용질문
괴롭도록 지겨운 사람, 지겨운 상황, 지겨운 사건은 무엇입니까?
여기서 벗어날 기회를 얻으려고 누구를 또는 무엇을 기웃거리고 있나요?
지겨운 것을 넘어갈 생각을 안하고 다 벗어날 생각을 해요.
바울을 2년동안 죽이고자 했지만, 그것을 벗어나려고 한 게 아니라 그때 마다 전도하고 있자나요. 언제나 기회만 있으면 복음을 전할려고 하는데..
성령의 상소
4. 한 사람에게 말씀을 전하는 것이 목적입니다.
20 내가 이 일에 대하여 어떻게 심리할는지 몰라서 바울에게 묻되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이 일에 심문을 받으려느냐 한즉
21 바울은 황제의 판결을 받도록 자기를 지켜 주기를 호소하므로 내가 그를 가이사에게 보내기까지 지켜 두라 명하였노라 하니
22 아그립바가 베스도에게 이르되 나도 이 사람의 말을 듣고자 하노라 베스도가 이르되 내일 들으시리이다 하더라
아그립바 왕은 '나도 이 사람, 바울을 말을 듣고 싶은데?' 이렇게 되었어요. 겉으로는 모든 것을 다 가진 왕이고 남매죠. 아그립바 왕은 다 가졌어요. 그러나 그들의 삶을 보면 아그립바는 헤롯 대왕도 그렇고 자기 아버지 헤롯도 충이 먹어 비참하게 죽었죠, 권력의 냉혹한 현실을 보았고, 자기가 분봉왕이지만 모든 것은 황제의 뜻대로 해야하지 하나도 실권이 없어요. 버니게도 여러 남편을 거쳐서 결국 지금 여기 같이 와있어요. 왕위, 재물, 결혼으로 채울 수 없는 인생의 실존적인 허무함, 죄악, 공허함이 있으니깐 이들이 바울에게 말을 듣는거에요. 어떤 말을 가장 듣고 싶을 까요? 예수라 하는 이의 죽은 것을 살아있다. 예수의 부활을 나도 듣고 싶은대? 인생의 허무함이 허무함인지도 모르고 목적없이 살아가는 아그립바, 버니게에게 전하기 위해, 바울은 또 구류되고 기다려야 하는거에요. 바울의 상소가 성령의 상소이기 때문에 억울함을 풀고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상소의 목적이 구원이기 때문에 구원을 이루는 것이기 때문에 또 몇 일을 묶여서 기다려야 했어요. 아그립바 왕에게 말씀을 전하기 위해서요. 로마에 가는 것 또한 한 사람이라도 더 구원해야 하는게 목적이에요. 우리의 모든 기도제목이 우리가 혐의를 벗고 억울함을 풀고 복수가 목적이 아니라, 전도와 영혼 구원이 우리의 기도와 상소의 목적인 줄 믿습니다. 큐티의 꽃은 적용, 열매와 결론이 영혼구원이라는 귀에 못이 박히도록 얘기하는 것이 다 이유가 있어요.
적용질문
인생이 허무할 때가 있습니까? 허무함을 무엇으로 채우고 싶습니까? 내 인생 최고의 목적은 무엇입니까? 구원은 몇 번째 목적입니까? 말씀 전할 한 사람은 누구입니까?
인내의 때를 채워야 합니다. 그리고 이제 부르짖어야 합니다. 주여 주여. 지겨운 괴롭힘을 통과할 때 기회를 주십니다. 우리가 기회를 엿보는게 아니에요. 한사람에게 말씀을 전하는 것이 목적입니다.
기도제목
형주
(생략)
성도
폭우로 인한 피해 가운데 있습니다. 예전의 일상생활로 잘 돌아갈 수 있도록
주영
지혜를 허락해주셔서 배우는 내용들을 빨리 습득할 수 있기를
세진
위로를 주시길
혜국
다음주 회사 생활 잘 적응할 수 있기를
관계 에 대해서 배워갈 수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