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5.15. '성령의 고백' (행 24:10-20) 김양재 담임목사님
여러분은 살면서 어떤 고백이 가장 감동스러운가? 사랑해 미안해 고마워 입니까?
저는 남편에게 살아서 이 모든 고백을 못받았다. 고백보다는 고발을 많이 받았다.
지난 주 성령의 고발의 개념이 어려우셨을 것 같다. 고발이 나쁜 단어니까 그런 것 같다. 그런데 안 좋을수록 우리는 성령이 임하면 좋게 바뀐다고 했다. 쉽게 말하면 고발 당한 내가 세상으로 내려가지 않고 자기 자리를 잘 지키면 그 모습이 누군가에게는 찔림이 되어 회개에 이르게 되어 아름다운 성령의 고발이 된다는 뜻이다. 그래서 저는 결국 사랑의 고백은 못받았지만 가장 좋은 성령의 고백을 받아냈다.
그래서 오늘 성령의 고백은 무엇일까 생각해보겠다.
1. 사과로 시작하는 고백입니다.
10-13절
10 총독이 바울에게 머리로 표시하여 말하라 하니 그가 대답하되 당신이 여러 해 전부터 이 민족의 재판장 된 것을 내가 알고 내 사건에 대하여 기꺼이 변명하나이다
11 당신이 아실 수 있는 바와 같이 내가 예루살렘에 예배하러 올라간 지 열이틀밖에 안 되었고
12 그들은 내가 성전에서 누구와 변론하는 것이나 회당 또는 시중에서 무리를 소동하게 하는 것을 보지 못하였으니
13 이제 나를 고발하는 모든 일에 대하여 그들이 능히 당신 앞에 내세울 것이 없나이다
더둘로가 바울을 고발했다. 그것에 대해 바울이 변명한다. 더둘로의 고발로 모든 유대인들이 바울의 죄인됨을 같이 고발했다.
무엇을 고발했나? 소요를 일으키는 전염병 같은 자라고 몰아넣었다. 그리고 나사렛 이단의 우두머리다, 성전을 더럽게 한 것이 아니라 성전을 더럽게 하려는 자라고 세가지로 고발했다. 유대인들이 모두 맞다고 했다. 이 군중심리가 무섭다. 말도 안되는 프레임을 씌워서 고발했는데 어떻게 반응하겠는가? 싸워야 하는가, 피해야 하는가?
요즘 청문회를 보면서 우리는 최고의 의결기관이 국회인데 여러가지 생각을 하게 된다. 바울 같은 사람 한 사람이 있었으면 어떨까 생각했다. 이렇게 자신을 잡아 죽이겠다고 고발하는 이들에게 바울은 놀랍게도 이 고발에 대해 기꺼이 변명한다고 시작한다.
이 기꺼이는 신약에 한번 밖에 안 나온 단어로 기꺼이, 기분좋게 변명을 했다는 뜻이다. 지금 고발 당하고 펄펄 뛰어야 하는데 기분 좋을 일이 무엇이 있겠는가?그런데 바울은 언제나 복음 전하는 것이 목적이다.총독이 그 말 다 듣고 무시하며 말도 안 섞고 고개만 까딱 하는 모션을 취했다. 그래도 바울은 말할 기회를 얻는 것이 어디냐, 드디어 복음 전할 기회가 왔다 하며 바울이 너무 기뻐했다. 이런 기분은 세상은 전혀 알 수가 없기 때문에 한번 밖에 나오지 않은 단어로 이 감정을 표현한 것 같다.
제가 이것이 왜 이렇게 체휼이 되냐고 하냐면, 제가 아무리 무시를 하고 여자 목사라고 해도 말씀 한번만 전하라고 하면 그때 그렇게 너무 기쁘다. 나를 욕하던 말던 한번 전하면 큐티를 하니까 그 마음이 너무 이해가 될 것 같다. 고발을 당하면 기쁠 수가 없다. 그런데 기분이 좋으면 복음도 겸손하게 잘 전할 수 있다. 바울이 전한 변명은 거기서부터 출발한다.
더둘로는 진실성 없는 아첨을 하니 듣는 사람도 그것이 느껴진다. 그것은 벨릭스나 좋아한다. 그러나 바울은 기분 좋다고 벨릭스보고 고귀하신 각하라고 하지는 않았다. 팩트로 재판관이라고 호칭한다. AD 52년부터 이미 총독이 되었고 3차 여행 후 AD 58년까지 이미 여러 해 전부터 재판관이었던 것이다.
바울은 그가 유대인의 총독이니 그 유대상황과 바울의 상황을 이해할 만하다고 생각되어서 일차적으로 기뻤다. 벨릭스가 사실 일차적으로 모든 것을 알고 있다. 그렇게 기분 좋으면 말이 순하게 나간다. 바로 그것이다.
이 변명하다의 원어는 아폴로게오마이로, 여기서 영어 apology 사과가 파생되었다고 한다. 아폴로게오마이는 말로 자신을 지키다 라는 뜻이다. 감정을 표출하거나 폭력을 쓰는 것이 아니라 이성적인 논리로 자기를 지키는 것을 말한다. 그것은 논리적으로 치열하게 다투며 이기는 것이 아니라 바로 사과하는 태도로 지키는 것이다. 이것이 말로 지키는 것이다. 우리는 소위 복음을 전한다고 할 때 내 할 말만 하고 끝나는 경우가 있다. 그런데 오늘 성경에서 변명한다고 하는 것은 대화한다는 것이다. 이 대화는 사과를 기반으로 하고 있다. 또한 벧전 2장에는 상대방이 복음에 관해 물을 때에 온유와 두려움으로 준비하라고 한다. 그러면 실습을 해보자. 예를 들면 고발을 당했는데 어떻게 하면 기꺼이 사과하는 마음으로 변명할 수 있을까?
당신이 그렇게 생각했다면 오해예요. 오해가 되어서 너무 죄송해요. 그런데 제가 의도한 것은 그것이 아니었어요이렇게 사과하는 태도로 기꺼이 복음을 증언하는 것을 말한다.
그러면 바울은 어떻게 이 판국에 그럴 수 있는가?
바울은 언제나 자기가 죄인이다. 특히 본인이 유대인 동족을 향해서 그들을 핍박 했던 죄인들의 괴수였다. 그래서 언제 어디서나 툭 치면 죄인의 마음으로 사과할 수 있다. 어떤 무서운 고발을 당해도 내가 죄인으로 사과의 마음을 가지고 고백하는 것이 바로 성령의 고백이다. 자기 부인과 그리스도의 사랑을 깨달은 사람만이 이렇게 성령의 고백을 할 수 있다.그래서 지난번에도 말 한 마디에 넘어가지 않는 것이다. 내 죄인됨을 보니 발상의 전환으로 뭐라고 그래도, 고발을 당해도 복음 전해서 성령의 복음을 받아내야 한다. 고발을 받았을 때 사과로 변명하고 더 나가서 복음을 전하는 것이 성령의 고백의 결론이다.
그리고 오늘 세가지가 주제이다. 더둘로의 고발, 바울의 변명..그 마음으로 기꺼이 기쁘게 소요를 일으켰다고 하는 것에 대해 구체적으로 팩트 체크 들어갔다. 내가 왜 소요를 일으키지 않았는지 변명했다.
당신이 아실 수 있는 바와 같이..
내용인 즉 벨릭스 각하에게 오해하게 해서 죄송한데요, 저는 예루살렘에 온 지 열 이틀밖에 안되었다고, 그리고 예루살렘에 도착해서도 유대인의 법을 안지킨다고 해서 결례를 행하라고 해서 일주일이나 결례를 지키는 것을 성전에서 본 사람이 한둘이 아니라고, 성전에서 어떤 소란을 일으킨 사실도 없고, 그리고 일주일이 끝나자마자 체포되었기에 제가 이단사설이나 소요를 일으킬만한 시간도 없었고 그런 실행도 할 수 없었다고, 다 이해가 되도록 설명했다. 자신은 성전에서 누구와도 변명한 적이 없다고 했다.
변론과 변명은 다르다. 변론은 내가 너에게 또는 네가 나에게 말하는 것이다. 상대를 향해 말하는 것이고 경쟁의 의미가 강하다. 변명하고 변론한다는 뜻이 다른 단어이다.
바울은 이 상황에서 변론하고 싶었을 것이다. 더둘로 못지않은 철학과 수사학 교육을 받았다. 로마서나 갈라디아서에서 보면 바울이 논증에 강하다. 그 힘으로 더둘로와 한 판 붙고 싶지 않았을까 싶다. 그런데 예루살렘 성전에서도 가이사랴에서도 벨릭스 총독의 재판정에서도 절대로 변론하지 않는다. 특히 상대를 공격하는 말을 하지 않는다. 청문회에 아무리 대단한 사람이 나왔다고 해도 이런 원칙으로 공격하지 않으면서 바울처럼 변명하면 얼마나 좋았을까, 큐티하는 사람이 후보자로 나오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바울은 사람을 상대로 경쟁하지 않는다. 이것은 이기려고 하는 말이 아니다. 그저 있는 사실을, 자신이 산 삶을, 그래서 증인들을 데리고 올 수 있는 그 실제 이야기를 있는 그대로 사과하는 태도로 변명하여 자신을 지키는 것이다.이것이 사과라는 말로 자신을 지키는 것이다. 성령의 간증이고 성령의 변명이다.
적용) 기막힌 고발을 당했는데 그 말을 즉시 인정하고 사과로 시작하는 복음을 기쁘게 전할 수 있을까요? 그만큼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은혜가 있습니까?
어머 오해하셨네요, 미안해요 오해하게 해서. 그런데 제 의도는 그게 아니었거든요.
이렇게 시작하라 무조건 어떤 말이든 누구이든.
어제 새벽큐티 설교하셨던 거식증 걸렸던 권사님은 거식증 알콜중독 외도로 귀신들린 여종 같은 모습으로 아주 힘들게 살았던 모습을 간증해 주셨다. 그러니 그 하루 하루가 체휼이 되고 오버랩이 되었다. 그런데 귀신이 나가니 앉으나 서나 사과의 복음으로 기쁘게 복음을 전하고 계신다. 초원과 청소년부 청년부 엘더 여자 목장 부부목장 권찰..집도 내놓으셨고 정말 목숨을 내걸고 섬기시는데 제가 하나도 미안하지 않다. 왜 안 미안한가 하면 귀신들렸던 것을 주님이 살려주셨기 때문이다. 저도 살려주었고 권사님도 살려주었다. 자신이 살아났는데 제가 미안하다고 할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이런 분들께는 수고했다는 말을 한 적이 없다. 그러나 때마다 너무 수고했다고 하는 사람은 아직 귀신이 안나가서 그렇게 아부하고 아첨한다. 내가 가서 아부하고 아첨하면 내가 귀신 안 나갔구나 생각하면 딱 맞다. 한번도 미안하다 그런 소리 안한 사람은 귀신이 나갔다. 그래서 누가 뭐라고 말하지 않아도 섬긴다. 이해가 되시는가? 성령의 고백이다.
성령의 고백 두번째는
2. 죄의 자백이고 공동체 고백입니다.
14-15절
14 그러나 이것을 당신께 고백하리이다 나는 그들이 이단이라 하는 도를 따라 조상의 하나님을 섬기고 율법과 선지자들의 글에 기록된 것을 다 믿으며
15 그들이 기다리는 바 하나님께 향한 소망을 나도 가졌으니 곧 의인과 악인의 부활이 있으리라 함이니이다
바울은 자신을 두번째 고발인 나사렛 이단의 우두머리로 고발한 것에 대해 팩트 체크 하기 전에 중요한 고백을 한다. 그것은 나사렛 그리스도교가 이단임을 인정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나사렛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을 인정했다. 그래서 자신이 그 도를 따라 유대인들의 조상의 하나님을 율법서 선지서에 기록된 구약을 다 믿는다, 나는 너무나 신실한 유대인이라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바울이 더둘로가 비방했던 이단이라는 도를 따르는 자라고 담대히 고백할 수 있는 근거는 무엇인가? 그에게는 말씀대로 하나님을 향한 소망이 있었기 때문이고, 그 소망은 다름 아닌 의인과 악인의 부활에 대한 믿음이었다. 이런 소망을 가지고 있었기에 더둘로의 고발에 대해 인정할 것은 아주 담대히 인정하는 것이다.
그때 벨릭스도 부유했고, 와서 바울을 다 고발한 유대인 장로들과 아나니아는 사두개인들이다. 부유층이다. 부활을 믿지 않는다. 부활을 믿지 않는 그들에게 부활을 말하는 것은 굉장히 불이익 당하기 쉬운 고백이다. 가만히 있으면 중간이나 갈텐데 나는 의인과 악인의 부활에 대해 믿는다고 한 것이다. 그러나 바울은 말을 할 때는 부활 신앙을 가졌기에 마지막 때가 되어 누가 뭐라고 해도 두렵지 않다. 오히려 비난받고 판단받는 불리한 자리에 처하게 될 지라도 지금 담대히 자신의 마음을 시인하고 인정할 것은 인정하는 신앙고백을 한다. 천하의 전염병자라 해도 발상의 전환이 일어나서 사과하는 마음으로 맞습니다 했다.
그러나 이 구절은 바울이 악인과 선인의 부활을 주장하는 만인의 부활을 주장하는 구절이다. 의인과 악인의 부활. 바울은 의인의 부활은 상급을 위한 부활이고 악인의 부활은 영원한 형벌을 위한 부활이라는 점을 자기를 고발하는 자들에게 전하고 있는 것이다. 의인의 부활은 영원한 생명을 얻고 천국의 축복을 누리는 것이지만 악인의 부활은 지옥에서 영원한 징벌과 심판을 받는다는 것이다. 악인의 부활은 평생을 죄에 매여 사망을 월급으로 받고 살아가는 것이다.
요5:29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따라서 바울은 이 부활신앙에 대한 고백을 통해 자신을 고발하고 있는 대제사장들과 장로와 더둘로와 벨릭스에게 경고를 한 것이다. 아무도 안 듣는다. 그들이 안 듣는다. 제가 아무리 이야기해도 부활 신앙에 관심이 없는 사람은 안 들린다.
근데 여기서 내가 당신들에게 고백을 한다고 한다. 근데 여기서 고백이라는 단어를 뜻을 살펴보면 고백은 호몰로게오 이다 호모는 하나, 동일한 이고 로게오는 말하다 이다. 같은 말을 하다는 것이다. 방점은 혼자 하는 말이 아니라 여러 사람이 함께 같은 말을, 즉 하나의 목소리를 낸다는 것이다. 여러 사람이 동의한 말, 합의한 선언이다. 한마디로 이것은 개별적인 고백이 아니라 공동체적인 고백이라는 뜻이다. 내 목소리가 아니라 우리 목소리라는 뜻이다. 이것이 오늘 성령의 고백의 중요한 뜻이다. 성령의 고백은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하시는 것인데, 자기 생명을 접붙임으로써 몸으로 연결된 지체들을 통해, 즉 목장과 교회를 통해 고백되어져 내 속의 그리스도가 고백되어지는 것, 이것이 성령의 고백이고 호몰로게오 이다.
서로 다른 우리가 하나가 되어 한마음 한 목소리로 동일하게 선언하는 말이 무엇인가? 우리의 간증이요 이야기요 우리의 신앙고백이다. 이것이 바로 성령의 고백이다.
우리가 예배에 사도신경을 함께 고백한다. 거기 기록된 모든 조항을 다 믿는다고 한 마음 한 목소리롤 고백하는 것이 성령의 고백이고, 찬양을 드릴 때도 같은 곡조 같은 가사로 함께 부르는 것이 바로 그 가사대로 그 곳대로 한마음 한목소리가 되어 고백하는 것이다. 그것이 성령의 고백이다. 기도자의 기도를 들으며 한마음으로 아멘으로 화답하는 것도 성령의 고백이고, 설교를 들으며 함께 생각하고 결단하고 아멘하는 것 역시 성령의 고백이다. 봉헌도 그렇다. 분량만큼 드리지만 같은 신앙으로 주님께 드리는 것, 이것도 역시 마음으로 하나 되어 드릴 때 성령의 고백이 된다. 새가족 환영 또한 나와는 다르나 동일한 죄인이요, 똑같이 주님이 필요한 영혼을 두팔벌려 환영하면서 그를 위해 축복하고 기도하는 것이 성령의 고백이다. 가정에선 온 가족이 매일 같은 본문으로 묵상하고 적용하며 묵상을 나누는 것이야말로 성령의 고백의 클라이막스라 생각한다.
이 고백이 없으면 가족끼리 어디서 하나가 되겠는가? 주님의 말씀만이, 말씀을 우리 안에 넣어주시는 성령님만이 갈등을 한 짐씩 짊어지고 사는 우리 가족들을 하나 되게 하는 끈인 줄 믿는다. 그래서 성령의 고백은 우리 목소리이다.
그런데 고백에는 다른 뜻도 있다. 동의하다 시인하다 라는 뜻이다.
요일1:9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이처럼, 이 자백이라는 단어를 공동 번역에서는 시인이라고 번역했다.
성령의 고백은 자백과 같다. 우리의 모든 죄 고백의 자백들은 성령의 고백이 되어 우리를 모든 죄악에서 깨끗케 하실 것이다. 그러니 우리가 목장에서 나눌 때, 나의 죄를 나누는 것이, 나누는 것 자체가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하게 하신다. 목장에서 나의 죄를 이야기 할 때, 왜 자꾸 저렇게 이야기 하나 한다. 그러면 이야기 안 한 곳은 깨끗하고 이야기 한 곳은 더러운가? 우리가 자백해서 우리를 깨끗하게 하는 것이 맞다. 우리의 인생의 목적이 거룩이다. 우리가 깨끗하게 거룩하게 하니 우리들교회 온 이후에는 죄 짓는 것이 현저히 떨어진다. 일단 교회 온 사람들은 거의 죄를 짓지 않는다. 그러나 이것을 감추고 있으면.. 그러니 고백한 죄인이 있고 고백하지 않은 죄인이 있다. 고백 안한 죄인이 더 무섭다. 그러니 이것은 비교될 성질의 것이 아니다.
그래서 고발당한 사실을 인정하고 동의하는 태도가 발상의 전환이다. 사람 앞에서 예수님을 시인하는 것은 성령이 아니고서는 할 수 없는 자백이고 고백이다. 부활의 소망으로 개인 구원으로 나가서 자백하니 공동체적 구원으로 나가는 고백이 된다. 바울이 박해 가운데 계속되는 고백을 통해 나사렛 이단의 도인 기독교를 계속 알리는 고백이 된 것이다.
고난이 축복이다. 바울이 계속 박해를 받을수록 계속 나사렛 예수님을 전했다. 그것이 2000년간 전해졌다. 여러분들에게 핍박과 박해가 올수록 예수는 그리스도라는 것을 전할 수 있는 비결 중의 비결이 된다. 그러니 바람 피면 이혼하고 때리면 이혼하고 실직하면 회사 그만두고.. 이렇게 하면 안된다. 우리가 죄 고백을 통해서 공동체적 고백으로 나가는 것을 하게 되면 우리들교회도 자꾸 기독교를 알리는 툴이 되게 하신다. 이 세상 사람들은 도저히 알 길 없는 죽음을 무릅쓴 고백을 하는 이는 바로 성령님이다.
본회퍼가 죽음을 무릅쓴 고백을 하고 죽었다. 성령의 고백은 원칙을 지키는 적용을 하는 것이다.
지금 무어라 고백하는가? 나는 전염병자다. 나는 이단의 우두머리다, 나사렛 그 수치를 내놓고 전염병자라 하는 것이다. 그러면 예수가 고백되어지는 그 현장이, 죽어서가 아닌 지금 내 삶의 생명의 부활로 나타난다. 천국과 지옥은 죽어서 갑자기 가는 곳이 아니다. 지금 내가 이런 고백을 하게 되면 지금 천국이 임한다. 이 부활에 동참한다는 것은 지금 내게 주신 말씀에 반응해서 더러운 죄악을 끊고 한 가지를 말씀 앞에 고백하고 적용하는 것이다. 이때 내 삶을 소생시키시는 생명의 부활을 날마다 경험하게 되는 것이 성령의 고백으로 말미암는 것이다.
이번 주간도 전염병자라는 나의 죄패, 빛이 비취지 않는 갈릴리의 무시받는 동네 나사렛이라는 나의 수치, 이단의 우두머리라는 비방을 인정하면서 그것을 공동체에서 나누는 것, 이것이 불의에서 깨끗하게 해줄 수 있는 통로가 된다. 그럴 때 내 속에 있는 그 도, 나사렛 예수의 도가 고백되어진다.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것을 바울은 어디서나 이야기 한다.
도가 The Way 이다. 예수 그리스도이다. 정관사가 붙었다. 그렇기에 The Way, 하나님께 유일하게 나아갈 수 있는 길, 하나님께서 완성하신 길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 the way이다. 자신을 비방하고 고소하는 곳을 인정하며 사과하며 자신 속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를 고백하는 것이 성령의 고백이다.
바울은 벨릭스 법정에서 예수를 구주로 시인했다. 황송연 초원님이 노 스펙 노 머니 온리 지저스 라고 했는데 그것이 맞다. 거기에 무슨 스펙이 필요한가, 무슨 돈이 필요한가, 예수가 그리스도다 하는 것이다.
내 죄를 공동체에서 다 드러내며 고백할 때 이것이 성령의 고백이 된다. 목장에서 전염병, 나사렛 수치 죄패를 막 이야기 하면 전염이 일어나서 다른 사람들이 또 그 고백을 하게 된다. 다른사람들의 고백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성령의 고백이다. 내가 성령님 없이 내 죄패와 수치를 이야기 하면 그것이 전염을 일으키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회개가 없이 말로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령의 고백이 중요하다.
적용) 나는 의인의 부활만 믿습니까? 악인의 부활도 믿습니까? (악인의 부활은 심판이다. 지옥을 사는 것이다. 평생 사망을 월급으로 받으면서 지옥을 사는 것이다.)
죄의 자백이 확실합니까? 공동체 고백도 확실합니까?
한마디로 목장에서 내 죄를 보며 목장에서 나눕니까 하는 것이다. 내 죄를 봐야 나눌 수 있다. 이번에 이런 공동체의 죄의 자백이, 공동체에서 고백하는 역사가 일어났으면 좋겠다.
죽을 것 같은 환경이 죽음을 준비하는 최고의 성령의 준비이다. 그래야 성령의 편지가 되어 고백이 일어나게 된다.
청년부 결혼 예비학교 강사들, 우리들교회 평원님들이 가서 강의를 해주면서 늘 한결같이 마지막 결론을 결혼생활의 최고의 준비는 부부목장에 참여하는 것이라고 한다. 최고의 준비를 할 수 있게 해주는 우리들교회 부부목장에 다 오백원 내라고 한다.청년들의 로망이 부부목장에 참여하는 것이다. 결혼을 해야 하기에 싱글은 참석 못해서 유감이긴 하다.
어쨌든 부부목장의 참여로 청년부 출신의 이혼이 없는 것은 기적 중 기적이라 할 수 있다. 어떻게 이혼이 없는가? 청년부들이 믿음이 좋아서인가? 어림도 없다. 이상한 애들 많다. 그런데 청년부에서 커서 결혼하게 되어도 바람 피고 다 한다. 그래도 부부 목장에서 다 달려들어 가면 이혼을 안 한다. 그런데 그 이야기를 듣지 않았으면 여자가 생기면 교회 떠나고 이혼한다. 보이는게 없다. 그래서 어렸을 때부터 이것을 들어두는 것이 너무 중요하다. 여전히 바람피고 돈 사고 치고 죽을 것 같은 일이 일어나지만 다툼 가운데 소망이라고, 우리의 목소리로 자기 죄를 보면서 고백하니 가정을 지킬 수 있게 된다. 이 세상 사람들은 같이 살아오다가 남자 생기고 여자 생기면 아무것도 안보인다. 그래서 이것을 들어두는 것이 너무 중요하다. 아파도 공항이 와도 같이 다 말씀 들으면서 이것을 이겨낸다. 그런데 사람들은 내가 왜 아파 하면서 자기를 정죄한다. 우리는 아플 수도 있고 유혹 받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것이 헛된 것이라는 것을 계속 알려주는 것이다. 기다려 준다. 그런데 그런 사람의 특징은 교회를 떠나고 목장을 떠난다. 바람 펴도 다 좋은데 교회 떠나지 말고 목장 떠나지 말고 피라. 떠나지만 말라. 너무 중요한 이야기를 했다.부부목장 가는 것이 로또이고 오늘 자기의 죄고백, 공동체 고백으로 나간다 했다. 가진 것이 없고 보이는 것이 없고 잡히는 것이 없어도 죄고백이 있는 청년들, 자기 죄고백이 있는 사람은 로또이다. 청년부에 나와서 자기 죄를 보는 것은 정말 드물다. 그러나 이렇게 형편 없이 들었는데도 여기서 결혼하면 들은 것이 있다. 여자 생기고 남자 생겨도 결국 이혼을 안한다. 그런데 대부분은 습관이 안되면 우선 목자 내려놓는다. 목자 내려놓는 사람은 다 수상하다.
3. 양심의 거리낌이 없는 고백입니다.
더둘로의 마지막 고백은 성전을 더럽히려 했다고 고백했다.
16-20절
16 이것으로 말미암아 나도 하나님과 사람에 대하여 항상 양심에 거리낌이 없기를 힘쓰나이다
17 여러 해 만에 내가 내 민족을 구제할 것과 제물을 가지고 와서
18 드리는 중에 내가 결례를 행하였고 모임도 없고 소동도 없이 성전에 있는 것을 그들이 보았나이다 그러나 아시아로부터 온 어떤 유대인들이 있었으니
19 그들이 만일 나를 반대할 사건이 있으면 마땅히 당신 앞에 와서 고발하였을 것이요
20 그렇지 않으면 이 사람들이 내가 공회 앞에 섰을 때에 무슨 옳지 않은 것을 보았는가 말하라 하소서
하나님과 사람에 대해 항상 양심에 거리낌이 없기를 힘쓴다고 했는데, 힘쓰다는 말은 운동선수나 군인이 열심히 훈련하는 것을 말한다. 현재형으로 썼다. 매일 매순간 양심에 거리낄것이 없도록, 다시 말해 선한 양심에 찔리는 일이 없도록 열심히 연습하고 훈련한다는 것이다. 무슨 말인가? 주님의 말씀을 읽고 그 말씀대로 자기를 쳐서 복종시키는 적용을 한다는 말이다. 이것이 바로 큐티한다는 것이다. 큐티를 하는 것이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 모른다.
그러면서 중요한 이야기를 한다. 17절에 예루살렘 교회를 위해 이방 교회에서 부조를 걷어와서 그렸다고 한다. 자신의 민족은 자신을 죽이려고 작당했지만 바울은 어려움에 처한 우리 민족을 돕기 위해서 구제헌금까지 마련했다는 사실을 말했다. 은연중에 TF팀과 대비시키는 것이다.
부조를 걷는 일도 쉽지 않았겠지만 그것을 예루살렘에까지 안전하게 가져오기 위해 얼마나 치밀하게 작전 세워서 왔는지 우리가 그것을 다 봤다. 우리가 제일 신경써서 세심하게 적용한 것은 그 부조를 예루살렘 교회에 전달하는 일이었다. 모으기도 어려운데 전달하기는 더 어렵다. 왜냐하면 이 부조의 목적은 예루살렘 교회의 어려움을 돕는 것 뿐 아니라 더 궁극적으로는 유대인과 이방인의 화합이었다. 그런데 예루살렘 성도들의 자존심이 하늘을 찔렀기 때문에 이 자존심을 배려해야 하는 것이다. 이들이 선민의식이 대단해서 돈을 줘도 배려하며 주어야 하는 것이다. 누가가 분명하게 기록하지 않았을 만큼 아주 조심스럽게 전달했다.
그런데 여기 이 재판정은 기울어진 재판장이다. 여기서 유능한 변호사 더둘로를 앞세운 대제사장들과 장로들 앞에서, 그들에게 뇌물을 받아 한편이 된 총독 앞에서 이 헌금에 대해 비로소 지금 밝히는 것이다. 이것은 생색내기 위함이 아니다. 내가 이렇게 했으니 봐달라는 것도 아니다. 이것을 지금 여기서 밝히는 것은 이것이 바로 양심에 거리낌 없도록 힘쓴 일이기 때문이다. 자기 의를 위한 양심도 아니고 하나님 말씀과 함께 생각하는 양심, 말씀에 순복하는 양심을 지키기 위해서 헌금을 모아가지고 와서 전했다는 것이다.
이것이 왜 중요하냐면, 모든 전쟁의 중심에 돈이 있다. 항상 끝에 돈이 있다. 근데 이 초라한 노인인 바울이 돈을 받으려고 소요를 일으킨 것도 아니고 돈 때문에 나사렛 예수의 괴수가 되어 돈을 모으려는 것도 아니고, 돈 때문에 성전의 주인공이 되어 성전을 더럽힌 것도 아닌데 이 노인이 성전에 돈 갖다 주려고 왔다고 하는 것이다. 너무 실제적인 증거가, 사랑의 증거가 나타났다. 이방 교회에서 가져다가 예루살렘 교회에 드린 부조는 사랑의 적용이라는 것이다. 두 공동체를 하나되게 하려는 노력이다. 이 노력을 말하지 않으면 바울이 양심에 거리끼는 것이다. 말로는 사랑을 부르짖는데 실제로는 하나되려는 노력을 하지 않은 것이 아니다. 온갖 방해의 어려움과 비난을 무릅쓰고 정말 세심하게 살펴서,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하면서 철저히 자기를 숨기고 이방교회의 사랑을 예루살렘에 전했다는 것이다. 돈을 갖다 주는 것도 얼마나 기도하며 전했다는 것이다. 이렇게 하나 되길 힘쓰는 사랑이 바로 우리 모두가 한마음 한 목소리를 외쳐야 할 성령의 고백이다.
가장 결정적인 고백의 증거가 돈이다. 물질 가는데 마음이 간다고 한다. 헌금을 많이 가져왔을 텐데, 돈을 내놓는 바울과 돈을 받는 더둘로는 게임이 안된다. 내 이해타산을 내려놓으면 어디나 게임이 안되는 것이다. 진리는 시간이 가면 나타난다. 자기는 돈을 가지고 왔지만 다시 17절 부터 설명을 다시 한다. 내가 돈 가지고 왔지만 율법적인 유대인들을 위해서 돈 가져왔다고 자랑하지 않고 성전에서부터 율법을 안 지킨다고 결례부터 행하라 하니 일주일이나 결례를 행했다고 했다. 돈을 가져왔음에도 생색내지 않고 그랬다. 바울은 처음에 자기는 성전을 소요케하지 않았다는 이야기만 했지만 15절 부활의 소망을 고백하고 난 후에 내가 헌금을 가져왔다고 한 후에 다시 한번 그 일을 상기시켰다. 그러니 딱 이해가 된다. 돈을 가져왔는데도 결례를 행한 것이다. 다시 한번 나는 결례를 행했기에 나는 절대로 소요케 한 사람이 아니라고 하는 것이 너무 resonable한 것이다. 그래서 이 이야기가 반복해서 들어가는 것이다. 성경에서 순서가 너무 중요하다.
그런데 여기서 아시아로부터 온 어떤 유대인들이 바울을 잡아 죽이겠다고 괴롭혔다. 그들에게 나를 정말 성전에서 봤으면 증인으로 나오라고 했다.
아시아로부터 온 어떤 유대인들에게는 에베소에서 아데미 여신을 섬기며 신전 지키는 여자 사제들과 여자사제들과 성관계를 맺는 것이 예배였다. 제사를 드리는 명목으로 음란을 행했다. 그러니 거기 미어지게 모이는 것이다. 그래서 그것으로 돈을 너무 벌었다. 근데 바울이 거기 들어가서 두란노 서원에서 성경공부 하면서 사람이 만든 것은 신이 아니라고 바울이 외치니 말씀이 들어간 사람은 거기다 절을 안하는 것이다. 바울이 그들의 밥줄을 끊은 것이다. 그러니 그 사람들이 이가 갈려 바울을 계속 쫓아오는 것이다. 우상 팔아 장사하던 자들이 바울을 죽이겠다고, 내 이해타산이 걸리면 다 죽이겠다고, 죽을 때 까지 쫓아다니는 것이다.
바울은 이방인을 성전에 끌어들인 적이 없다고 한다. 성전에 이방인이 들어가면 성전을 더럽혔다고 죽는다. 그런데 드로비모라는 제자를 데리고 왔는데 그 안에 안 데리고 갔다. 거리에서 따로 보고 사람들이 만들어 낸 것이다. 이 사람들은 분명히 성전에도 같이 갔을 것이라고 소문을 낸다. 소문은 한 사람만 거치면 진짜가 된다.
그래서 18절에 성전에 있는 것을 저희가 보았나이다, 내가 성전에서 결례 드리는 것을 저희가 다 보았나이다 하는 것이다.
보았나이다 가 휴리스코이다. 주의 깊게 살펴보는 에이도가, 블레포가 아니라 그냥 대충 지나가다 한번만 봐도 알 수 있는 것이라고 하는 것이다. 주의 깊게 보지 않아도 일주일동안 성전만 갔다오면 다 볼 수 있었다고 한다. 한번만 봐도 다 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단어를 똑같이 바울이 쓰면서 내가 일주일동안 결례를 드리고 있었기에 여러 사람이 내가 혼자 있었던 것을 확인 할 수 있다고 했다.
그런데 이 바울의 변명 앞에 더둘로나 대제사장이 한마디도 못한다. 증거가 없기 때문이다. 아시아의 못된 인간들도 나타나지 않았다. 오히려 더둘로가 증인조차 없이 거짓으로 고발했기에 위증죄로 처벌을 받게 생겼다.
바울의 변명은 굉장히 냉철하고 논리적이다. 그러나 온유하고 두려워하며 사과를 하면서 전했다. 그랬기 때문에 영원한 2000년의 승자일 수 밖에 없다. 우리는 진리대로 하면 언제나 승자이다. 그러나 팩트가 중요할 때가 있다. 진실은 시간이 가면 다 나타나는데 주절주절 변명하냐고, 치사스럽다 한다. 무엇이 치사스러운가? 어디서 팩트를 밝혀야 하는지, 밝혀야 할 때는 밝혀야 한다. 그러나 자존심이 강하고 교만한 사람은 어디서 밝혀야 하고 어디서 가만히 있어야 하는지 모른다.
가만히 있어도 날 다 알아준다 하는것은 없다. 그러니 우리는 원칙대로 해야 한다. 오늘 바울이 얼마나 원칙을 지키는가? 헌금을 하나 가져와도 원칙대로, 나를 드러내지 아니하고 구원을 위해 한다.
어느 장로님이 우리교회에 3P가 있다고 한다. Principle, Philosophy, Pride. 우리가 원칙을 너무 잘 지켜서 그것이 우리들교회 철학이 되고, 그것 때문에 우리들교회 교인들이 너무 프라이드가 있다고 한다. 한 장로님의 멋있는 정리였다. 프라이드가 있으니 사람이 매력이 있고 자존감이 있다. 착해서 매일 이 말 저 말 다 들어주고 거절도 못하면 매력 꽝이다. 거절할 건 거절하고 할 건 해야 한다. 그렇게 하니 거기 원칙의 철학이 있고 프라이드가 있다고 하신다. 원칙과 프라이드, 우리들교회 교인들이 그래서 멋있는 것 같다.
적용) 여러분은 원칙을 지켜서 긍지를 갖게 된 적이 있나요? 스승의 날에 원칙을 지키게 해주시고 긍지를 갖게 해 주신 스승님이 있으신지요?
성령의 고백은 나의 전염병을 나누고 나사렛을 나누고 부끄러움과 수치와 죄패를 나누는 것이 죄의 고백이고 공동체 고백이 아니겠는가?
기도제목에 이런 것이 올라온다.
'남편이 치킨과 술을 팔아요 가게 망하게 해주세요. 망하면 제가 힘들까봐 망하게 해달라는 기도가 멈췄었는데, 망해서라도 주님께 돌아오게 해주세요'
세상에서는 저 여자 나쁜 부인이군 하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이 성령의 고백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또 한분은 일본에서 기도제목을 보냈다.
우리 남편 암 걸리고 주식하고 소그룹 그만두겠다고 한다. 교회 목사님께 남편의 상황을 말씀드리는 것에 두려움을 느끼는데 두려운 이유를 알게 해달라 했다.
이것이 큐티 기도회에 올라왔다. 남편 질서에 들어가고 싶지 않은 거부하고 싶은 마음이 크다고 한다.
또 한분은 67년간 교회를 다녀도 팔복이 아닌 기복으로 똘똘 뭉치신 어머니가 있는데 믿지 않는 아버지가 6번이나 가출한 어머니를 찾으러 다니게 하셨다고 하셨다. 신실한 기복신앙이신 어머니가 여섯번 가출하고, 믿음 없는 아버지는 여섯번 찾으러 다녔다는 것이다. 그 아버지가 암까지 걸렸는데도 여전히 심한 말을 뱉어내시는 엄마가 이해도 안되고 정죄가 된다고 한다. 그런데 그 어머니가 우리들교회 오시고 등록하시고 목장에 오셨다고 한다. 이것도 저는 다 성령의 고백이라 생각한다.
부부목장이 최고의 혼수라고 하지만 현실은 녹록하지 않다. 어느 부부목자의 나눔이다.화 많고 돈 좋아하는 아내가 너무 싫어진다고 한다.
싸운 이유는 목장 때문이다. 저의 생각은 이번 주부터 오프라인 시작하니 목자인 저희 집에서 시작하고 다음주는 목세라서 하고 다음 주에는 새집으로 이사해서 하나님께 감사하며 우리가 다 섬기자 했더니 아내가 힘들 것 같다고 했다. 이번주는 부목자님 댁에 요청하고 저녁은 각자 먹고 다과만 준비하라고 했더니 왜 그 이야기를 자기와 상의하지 않느냐고, 왜 자기만 밥을 하고 부목자는 밥을 왜 안하냐고, 나는 힘든 생각 안하냐고 하길래 너무 기가차서 나보고 어떻게 하라는 것이냐고, 목장하는 것에 대해서도 비교하고 차별한다고 싸우고 지금까지 말을 안하고 있다. 그런데, 침대에서 8살짜리 딸이 중간에서 아빠는 말 하는데 엄마는 왜 말 안하냐고 하고, 아빠 귀에다가 엄마 안으라고 서로 화해를 시켜주려고 하는데 둘다 들으려고 하지 않는다고 한다. 아내는 자기에게 상의하지 않았다고 화를 내고 저는 저의 감정에 목장을 싫어하는 죄인 된 아내, 나는 목장을 사랑하는 착한 남편이라며 아내를 정죄하고 비판하며 내가 쓰레기임을 또 잊고 아내를 쓰레기라며 우울감으로 몰아넣었다고 한다.
아내가 결정할 때 잘 들어주고 공감하고 잘 설득하며 일곱번을 엎드리며 사랑의 언어로 다가가야 함을 깨닫습니다. 오늘 아내에게 일곱 번 엎드리는 적용으로 칭찬을 일곱 번 하겠습니다. 주님 힘을 주세요.
목장이 좋아서 하는 것이 아니지만 둘이 다 하다 보면 다 달라지는 것이다. 이런 솔직한 나눔을 목장에서 다 해주시고 사과하면서 부활의 소망을 가지고 내 죄를 보고 공동체에서 고백하고 거리낌없이 가는 것이 우리 성도들의 황홀한 인생인 줄 믿는다.
저도 사랑의 고백을 못 받았지만 성령의 고백을 하고 갔기에 제가 최고의 고백을 받아냈다. 이렇게 사명 감당하시기를 바란다.
[말씀 맺음]
성령의 고백은 사과로 시작하는 고백이다. 죄의 고백과 공동체 고백이 이어지는 것이다. 목장에서죄의 고백을 목장에서 나누는 것이 공동체 고백이 된다. 이것이 성령의 고백이다. 양심의 거리낌이 없는 이런 고백에는 끝에 돈이 있다고 한다. 팩트체크를 해야 할 때 정확하게 해야 한다 오버도 하지 않고 부족하지도 말고 겸손하게 목장을 섬기면서 자랑 아닌 애통한 마음으로 목장을 섬겨주시면 감사하겠다.
[기도제목]
*크리스틴
1. 큐티말씀 하루동안 생각하기
2. 일 많이많이 밀렸는데 집중하고 일 하고 싶은 마음들 수 있도록
3. 리포트 마무리 잘해서 낼 수 있도록
4. 패밀리닥터와 한국상담선생님께 도움 잘 받을 수 있도록
* 보련
1. 말씀 보면서 하루 잘살도록
2. 서류결과 나올때까지 인내하는시간 가지도록
* 승희
1. 말씀 보고 하루 잘 살아낼수 있도록
2. 기숙사에서 지혜와 명철을 주셔서 룸메와 각자 시간을 잘 활용할수 있도록
3. 양육과제 조금씩이라도 완료하기
* 은선
1. 진로 이번주 부목자모임에서 , 그리고 천천히 엘더님과 목사님, 공동체에 물어보려하는데 잘 인도해주시기를
2 . 5/20일까지 학위논문제출인데, 빠짐없이 잘 수정해서 제출할 수 있기를
3. 내 안의 에서와 채색옷인 여러가지 것들을 잘 분별하고, 죽어지지 않는 내 모습 잘 보고 가기를
* 교희
1. 스스로에게 성령의 사과로 시작하는 고백을 하게 되고, 진정한 복음을 받아들이도록
2. 회사 일에 대해 무가치하다는 생각으로 방황하지 않고 하루만 살도록
3. 하나님과 사람에 대한 건강한 관계를 맺을 수 있도록
* 은우
1. 때에 맞는 영육의 옷 분별해서 입는 지혜와 말씀 주시도록
2. 입사한 회사에서 경계와 처소를 지키는 성령의 고백 있도록
3. 화재가 있었는데 관계들 위로해 주시고 말씀에 해석 되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