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515 성령의 고백
사도행전 24:10-20
여러분은 살면서 어떤 고백이 가장 감동스러우셨어요? '사랑해, 미안해, 고마워'입니까? 저는 남편에게 살아서 이 모든 고백을 못 받았어요. 고백보다는 고발을 많이 받았죠. 그래서 지난주 성령의 고발이 개념이 어려우셨으리라고 생각하는데, 고발이 좀 안 좋은 단어니까. 그런데 안 좋을수록 우리는 성령이 임하면 좋게 바뀐다고 했죠? 쉽게 말하면 고발당한 내가 세상으로 내려가지 않고 자기 자리를 잘 지키면 그 모습이 누군가에게 찔림이 되어서, 회개가 되어서 아름다운 성령의 고발이 된다는 것이죠. 그래서 결국 저는 사랑의 고백은 못 받았어도 가장 좋은 성령의 고백을 받아냈어요. 그래서 오늘 그럼 성령의 고백이 무엇일까 좀 생각해볼게요.
1. 사과로 시작하는 고백입니다. (10-13절)
10 총독이 바울에게 머리로 표시하여 말하라 하니 그가 대답하되 당신이 여러 해 전부터 이 민족의 재판장 된 것을 내가 알고 내 사건에 대하여 기꺼이 변명하나이다 11 당신이 아실 수 있는 바와 같이 내가 예루살렘에 예배하러 올라간 지 열이틀밖에 안 되었고 12 그들은 내가 성전에서 누구와 변론하는 것이나 회당 또는 시중에서 무리를 소동하게 하는 것을 보지 못하였으니 13 이제 나를 고발하는 모든 일에 대하여 그들이 능히 당신 앞에 내세울 것이 없나이다
-> 더둘로가 바울을 고발했자나요. 그래서 그거에 대해서 오늘 바울이 변명을 하는 거죠. 그래서 모든 유대인들이 바울의 죄인됨을 같이 고발했어요. 무엇을 고발했나요? 소요를 일으키는 전염병 같은 자라고 몰아넣었어요. 그리고 또 나사렛 이단의 우두머리다. 그 다음에 성전을 더럽게 한 것도 아니고 성전을 더럽게 하려는 사람이다. 이 세가지로 고발을 했어요. 유대인들이 모두 '맞다, 맞다.' 그랬습니다. 우리는 이럴 때 어떻게 반응해야 하나요? 싸워야 하나요, 피해야 하나요? 요즘 청문회를 보면서 야 우리나라 최고 의결 기관이 국회인데 여러 가지 생각을 합니다. 바울 같은 사람 한 사람이 있었다면 어떨까 생각을 했어요. 그런데 이렇게 자기를 잡아 죽이겠다고 고발을 하는 이들에게 놀랍게도 오늘 10절에 보면 기꺼이 변명을 한다고 시작을 합니다. 이 기꺼이는 신약에 한 번 밖에 안 나온 단어로 굉장히 기쁘게, 기분 좋게 변명을 했다. 이런 뜻입니다. 지금 고발을 당하고 펄펄 뛰어야지 기분이 좋을 일이 뭐가 있겠어요? 그런데 바울은 언제나 이 복음 전하는 게 목적이에요. 그러니까 총독이 그 말 다 듣고 무시를 하면서 고개를 까딱이면서 이제 얘기해 보라고 굉장히 무시하는 그런 모션을 취했죠. 또 바울은 '야 내가 말할 기회를 얻는 게 어디냐.' 너무 기뻐하는 거예요. 이런 기분을 세상은 전혀 알 수가 없기 때문에 아주 이게 기분이 묘해서 한 번 밖에 나오지 않은 단어로 이걸 이제 표시를 했는데, 제가 이게 왜 이렇게 체휼이 되냐하면 저 아무리 뭐 무시하고 여자 목사다 그래도 한 번만 전하라 그러면 그때 그렇게 기쁜 거예요. 진짜 이 마음을 이해를 하시겠습니까? 날 욕하든 말든 한 번 전하고 가면 그 다음에 큐티를 하니까 그 마음이 그래도 제가 이해가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기분이 좋으면 이렇게 복음도 겸손하게 잘 전할 수 있죠. 그래서 바울이 전한 변명은 거기에서부터 출발을 하는 거예요. 더둘로는 진실성 없는 아첨을 하니까 듣는 사람도 그것이 느껴져요. 그거는 이제 벨릭스나 좋아할 것이죠. 그런데 바울은 기분이 좋다고 고귀하신 각하라고 그러지 않았어요. 그냥 재판장이라고 팩트로 호칭을 하는 거예요. AD 52년부터 이미 총독이 되었고 3차 여행 후에 AD 58년에 바울이 왔기 때문에 이미 여러 해 전부터 재판관이었던 것이고요. 그러니까 바울이 기뻐한 것은 유대의 상황을 이 사람이 알 것이고, 바울의 상황을 이해할 만하다고 해서 그래서 1차적으로 기뻐요. 벨릭스가 사실 모든 걸 다 알고 있어요. 그러니까 기분이 좋으면 우리 말이 순하게 나가죠. 바로 그것이에요. 이 변명하다의 원어는 아폴로게오마이로 여기에서 영어 Apology, 사과가 파생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아폴로게오마이는 말로 자신을 지키는 거예요. 어떻게? 감정을 표출하거나 폭력을 쓰는 게 아니라 아주 이성적인 논리로 자기를 지키는 걸 말하는데요. 그건 이제 논리적으로 막 치열하게 다투면서 이기는 게 아니라 바로 Apology, 사과하는 태도로 자기를 지키는 거예요. 이게 말로 지키는 거예요. 우리는 소위 복음을 전한다고 할 때 내가 할 말만 하고 끝나는 경우가 있죠. 그런데 오늘 성경에서 변명한다고 하는 것은 대화하는 거예요. 그런데 이 대화가 사과에 기반을 두고 있어요. 또한 상대방이 복음에 관해 물을 때 준비하는 동시에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라고 하자나요. 항상 누가 너에게 물을 때에. 그럼 이제 이게 예를 들면 고발당했을 때 기꺼이 변명하는 게 뭔가 하면 '당신이 그렇게 생각했다면 오해예요. 오해가 되서 너무 죄송해요. 그런데 제가 의도한 건 그게 아니었거든요.' 바로 이렇게 사과하는 태도로 기꺼이 복음을 증언하는 거를 말해요. 그럼 어떻게 바울은 이 판국에도 그럴 수가 있죠? 바울은 언제나 시종여일하게 죄인이자나요. 특히 유대인 동족을 향해서 그들을 핍박했던 죄인 중의 괴수자나요. 본인이. 그래서 언제 어디서나 툭 치면 죄인의 마음으로 사과를 할 수가 있는 거예요. 어떤 무서운 고발을 당해도 내가 죄인으로 사과의 마음을 가지고 고백을 하는 것이 바로 성령의 고백입니다. 자기 부인과 그리스도의 사랑을 깨달은 사람만이 이렇게 성령의 고백을 할 수 있는 것이죠. 그래서 지난번에도 말 한마디에 넘어가지 않는 것, 이게 내가 내 죄인됨을 보니까 발상의 전환으로 뭐라고 그래도 이렇게 많은 고발을 당해도 결국은 복음 전해서 성령의 고백을 받아내야 합니다. 그러니까 고발을 받았을 때 이렇게 사과로 변명을 하고 더 나아가서 복음을 전하는 것이 성령의 고백의 결론이에요. 그리고 이제 기꺼이, 기쁘게 오늘 세 가지에 대해서, 더둘로의 고발에 대해서 바울의 변명, 이게 오늘 세 가지 주제입니다. 이제 소요를 일으켰다고 한 것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팩트 체크 들어가서 설명을 하는 거예요. 벨릭스에게 당신이 아실 수 있는 바와 같이 내용인즉 '벨릭스 각하에게, 벨릭스 재판관에게 오해하게 해서 죄송한데요. 저는 예루살렘에 온 지 지금 열이틀밖에 안 됐어요. 그리고 예루살렘에 도착해서도 유대인의 니가 법을 안 지킨다고 그래서 빨리 결례를 행하라고 그래서 7일, 일주일간이나 그 결례를 지키는 것을 성전에서 본 사람이 한 둘이 아니예요. 그러니까 성전에서 소란을 일으킨 사실도 없어요. 그리고 일주일이 끝나자마자 체포되었기 때문에 제가 무슨 이단 사설이나 소요를 일으킬 만한 시간도 없었고 그런 실행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다 이해가 되게 설명을 했어요. 그러니까 자기는 성전에서 누구와도 변론한 적이 없다. 이건 변명하고 다른, 내가 너에게, 또는 니가 나에게 말하는, 아주 상대를 향해서 말하는 경쟁의 의미가 강한 변론 있죠. 변론. 이건 아폴로게오마이가 아니라 디아로기아로 변명하고 변론하고 뜻이 굉장히 다릅니다. 바울이 정말 이 상황에서 변론을 하고 싶었을 것 같아요. 더둘로 못지 않은 철학과 수사학 교육을 받았자나요. 로마서나 갈라디아서를 보면 바울이 아주 논증에 강합니다. 그런데 이제 그 힘으로 더둘로와 한 판 붙고 싶었을 텐데 예루살렘 성전에서도, 여기 가이사랴 벨릭스 총독의 재판장에서도 절대로 변론하지 않아요. 상대를 공격하는 말을 하지 않아요. 청문회에 아무리 대단한 사람이 나왔다고 해도 좀 이런 원칙으로 공격하지 않으면서 바울처럼 변명을 하면 얼마나 좋았을까. 큐티하는 사람이 그 후보자가 되면 참 좋겠다 이런 생각을 했어요. 그러니까 우리는 알게 모르게 큐티를 하게 책도 좀 주고 그러자고요. 사람을 상대로 경쟁하지 않아요. 그러니까 이기려고 하는 말이 아니예요. 그래서 있는 사실을, 자신이 사는 삶을, 그래서 증인들을 데리고 올 수 있는 그 실제 이야기를 있는 그대로 사과하는 태도로 변명하여서 아폴로게오마이 자신을 지키는 거예요. 이게 말로 자기를 지키는 거예요. 사과하는 말로. 이게 성령의 간증이고 성령의 변명입니다. 자 적용해보세요.
[적용] 기막힌 고발을 당했는데 그 말을 즉시 인정하고 사과로 시작하는 복음을 기쁘게 전할 수 있을까요? 그만큼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은혜가 있습니까?
2. 죄의 자백이고 공동체 고백입니다. (14-15절)
14 그러나 이것을 당신께 고백하리이다 나는 그들이 이단이라 하는 도를 따라 조상의 하나님을 섬기고 율법과 선지자들의 글에 기록된 것을 다 믿으며 15 그들이 기다리는 바 하나님께 향한 소망을 나도 가졌으니 곧 의인과 악인의 부활이 있으리라 함이니이다
-> 14절, 15절이에요.
이제 바울은 자신을 두번째 고발인 나사렛 이단의 우두머리로 고발한 것에 대한 팩트 체크를 들어가면서 그 말을 하기 전에 중요한 고백을 합니다. 그것은 나사렛 그리스도교가 이단임을 인정한 게 아니고 '내가 바로 그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도를 믿는다.' 이걸 인정했어요. 그래서 자신이 '그 도를 따라 유대인들의 조상의 하나님을 섬기고 율법서와 선지서에 기록된 구약을 다 믿는다. 난 너무나 신실한 유대인이다.' 이걸 주장합니다. 그렇다면 바울이 더둘로가 비방했던 이 이단이라는 도를 따르는 자라고 담대하게 고백할 수 있었던 근거가 무엇입니까? 그에게는 하나님께 향한 소망이 있었기 때문이고 그 소망은 다름 아닌 의인과 악인의 부활에 대한 믿음이었어요. 그래서 이런 소망을 갖고 있었기에 더둘로의 고발에 대해서 인정할 것은 아주 담대하게 인정을 했어요. 그때 벨릭스도 부요하고 와서 바울을 다 고발한 그 유대인 장로들과 아나니아는 우리가 알다시피 사두개인들이에요. 부활을 믿지 않는. 부유층이자나요. 부활을 믿게 않는 그들에게 부활을 말하는 것은 굉장히 불이익을 당하기 쉬운 고백인 거예요. 그러나 바울은 말을 안 할 때는 안 하지만 할 때는 부활 신앙을 가졌기 때문에 지금은 때가 마지막 때가 되서 누가 뭐라고 해도 두렵지 않아요. 그래서 오히려 비난받고 판난 받는 불리한 자리에 처할지라도 지금은 담대하게 자신의 믿음을 시인하고, 인정할 건 인정하고 지금 신앙 고백을 한 거예요. 천하의 전염병자라고 해도 지금 발상의 전환이 일어나서 사과하는 마음으로 '맞습니다.'했자나요. 그런데 이 구절은 지금 바울이 만인의 부활을 주장하는 유일한 구절이에요. 지금 의인과 악인의 부활. 악인은 무슨 부활이야 그럼. 바울은 의인의 부활은 상급을 위한 부활이고, 악인의 부활은 영원한 형벌을 위한 부활이라는 점을 있자나요. 자기를 고발하는 자들에게 딱 전하고 있는 거예요. 지금. 의인의 부활은 영원한 생명을 얻고 천국의 축복을 누리는 것이지만 악인의 부활은 지옥에서 영원한 징벌과 심판을 받는다는 것이죠. 그러니까 악인의 부활은 평생을 죄에 매여서 사망을 월급으로 받고 살아가는 거죠. 요한복음 5장 29절에서도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따라서 바울은 부활 신앙에 대한 고백을 통해 지금 자신을 고발하고 있는 대제사장과 장로와 더둘로와 벨릭스에게 지금 딱 경고를 한 거예요. 아무도 안 듣죠. 그들이 안 들어요. 지금 제가 아무리 얘기해도 여러분들이 부활 신앙이 관심이 없는 사람에게 안 들려요.
그런데 여기서 이제, 내가 이제 당신들에게 고백을 한다고 지금. 오늘 제목, 이 고백이 여러 뜻이 있더라고요. 이 고백은 호몰로게오인데요. 호모는 하나, 동일한, 로게오는 말하다 그러니까 같은 말을 하는 건데 이 방점이 어디에 있냐 하면 혼자 하는 말이 아니고 여러 사람이 함께 같은 말을, 그러니까 하나의 목소리를 낸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여러 사람이 동의 한 말, 합의한 선언인데, 한마디로 이건 개별적인 고백이 아니고 공동체적인 고백이라는 뜻이에요. 내 목소리가 아니고 우리 목소리라는 거죠. 이것이 오늘 성령의 고백의 중요한 뜻입니다. 그러니까 성령의 고백은 내가 하는 게 아니라 그리스도가 하시는데 자기 생명을 접붙임으로써 몸으로 연결된 지체를 통해, 즉 목장과 교회를 통해서 고백 되어져 내 속의 그리스도가 고백 되어지는 것 이것이 호몰로게오이며 성령의 고백입니다. 서로 다른 우리가 한 마음, 한 목소리로 동일하게 선언하는 말이 뭐예요. 이것은 우리의 간증이고 우리의 이야기고 우리의 신앙 고백이고 이것이 바로 성령의 고백인 거예요. 우리가 예배에 사도신경을 함께 고백했어요. 그래서 거기 기록된 모든 조항을 믿는다고 한 마음, 한 목소리를 고백하는 것이 성령의 고백이고요. 찬양을 드릴 때도 같은 곡조, 같은 가사를 함께 부르는 것이 바로 그 가사대로, 그 곡대로 한 마음, 한 목소리가 되어서 고백하는데 그것이 또한 성령의 고백입니다. 기도자의 기도를 들으며 한 마음으로 '아멘.'으로 화답하는 것도 성령의 고백이고요. 설교를 들으며 함께 생각하고 결단하고 '아멘.하는 것 역시 성령의 고백입니다. 봉헌도 그래요. 분량만큼 드리지만 같은 같은 신앙으로 주님께 드리는 것, 이것도 역시 마음으로 하나가 되어 드릴 때 성령의 고백이 됩니다. 새가족 환영 또한 나와는 다르나 또한 동일한 죄인이요 똑같이 주님이 필요한 죄인을 두 팔 벌려 환영하면서 그를 위해 축복하고 기도하는 것이 성령의 고백입니다. 가정에서는 온 가족이 매일 같은 본문으로 묵상하고 적용하며 묵상을 나누는 것이야 말로 성령의 고백의 또 클라이맥스라고 생각해요. 이 고백이 없으면 가족끼리 어디서 하나가 되겠습니까? 주님의 말씀만이, 말씀으로 우리 안에 넣어 주시는 성령님만이 갈등을 한 짐씩 지고 사는 우리 가족들을 하나 되게 하는 끈인 줄 믿습니다. 그래서 우리 목소리인 거예요. 이 성령의 고백은.
그런데 이 고백에는 또 다른 뜻이 있어요. 동의하다, 시인하다 요한일서 1장 9절에 보면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이 자백이 고백하고 똑같은 단어인데요. 이 자백라는 단어, 그래서 공동 번역은 이거를 아예 시인이라고 번역했고, 그러니까 이제 지금 사도행전에 여기 14절을 공동번역은 시인이라고, 우리는 고백이라고 했자나요. 시인이라고 번역을 했어요. 이 성령의 고백은 자백과 같아요. 우리의 모든 죄 고백의 자백들은 성령의 고백이 되어서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에요. 그러니까 우리가 이렇게 목장에서 나눌 때 나의 죄를 나누는 것이, 그거 나누는 거 자체가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하게 하세요. 목장에서 나의 죄를 얘기할 때 '왜 자꾸 저렇게 얘기를 하나.' 그럼 얘기 안 하는데는 깨끗하고 얘기하는데는 더러운가요? 여러분 이렇게 정말 우리가 자백해서 우리를 깨끗하게 하는 게 맞는 게 이게 이제 인생의 목적이 거룩이니까 자꾸 이렇게 깨끗하게, 거룩하게 하니까 우리들교회 온 이후에는 죄 짓는 그거가 현저히 떨어지죠. 일단 교회 온 사람들은 죄를 짓지 않아요. 거의 그런데 이걸 감추고 있으면 그거는 이제 고백한 죄인이 있고, 고백 안 한 죄인이 있는데 고백 안 한 죄인이 더 무서운 거죠. 그러니까 이거는 비교될 성질이 아닙니다. 그래서 고발 당한 사실을 인정하고 동의하는 태도가 발상의 전환이라고 했죠. 그러니까 사람 앞에서 그 예수님을 시인하는 것은 성령이 아니고는 할 수 없는 죄의 자백이고, 성령의 자백이고 고백인 것이에요. 그러니까 이 부활의 소망으로 개인 구원에서 나가서 자백을 하니까 공동체적 구원으로 나아가는 고백이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바울이 박해 가운데 계속되는 고백을 통해서 나사렛 이단의 도인 기독교를 계속 알리는 고백이 된 거예요. 고난이 축복인 것이 지금 계속 박해를 받을수록 이렇게 계속 나사렛 이단 예수님을 계속 전하고 있으니까, 2천 년 동안 우리에게까지 전해졌으니까 여러분들에게는 핍박과 박해가 올수록 '예수는 그리스도다.'라고 전할 수 있는 비결 중의 비결이라 이거예요. 그러니까 바람 피면 이혼하고, 때리면 이혼하고, 뭐 실직하면 회사 그만두고 이렇게하면 안된다는 거예요. 이것이 이 죄 고백을 통해서 공동체적 고백으로 나가는 이 때에 우리가 그걸 하게 되면, 우리가 지금 우리들교회도 자꾸 기독교를 알리는 그런 툴이 되게 하시자나요. 그렇죠? 그러니까 이 세상 사람은 도저히 알 길 없는 죽음을 무릅 쓴 고백을 하게 하시는 분은 바로 성령님이에요. 찬양 우리가 아까 불렀지만 본 회퍼가 완전 죽음을 무릅 쓴 고백을 하고 죽었자나요. 히틀러가 죽기 3주일 전에 조금 이따가. 안 돌아가셨어도 될 건데. 그러니까 이런 성령의 고백은, 그러니까 뭐 굉장히 십자가가 아름답다 그랬지만 원칙을 지키는 이 적용을 하는 거죠. 지금 뭐라 고백합니까? '내가 전염병자다. 나는 이단의 우두머리다.' 나사렛 그 수치를 내놓고 '나는 전염병자다.' 그래서 그 예수가 고백 되어지는 현장이 지금 죽어서가 아니라 오늘 지금 내 삶에 생명의 부활로 나타나는 거예요. 천국과 지옥은 죽어서 가는 곳이 아니예요. 지금 내가 이런 고백을 하게 되면 지금 천국이 임하는 거예요. 이 부활에 동참한다는 것은 지금 내게 주신 말씀에 반응하여 더러운 죄악을 끊고 이 한 가지를 말씀 앞에 고백하고 적용하는 것이죠. 이 때 내 삶을 소생시키시는 생명의 부활을 날마다 경험하게 되는 것이 성령의 고백으로 말미암음이라는 것이죠. 그러니까 늘 이번주간도 전염병자라는 내 죄패, 빛이 비치지 않는 갈릴리의 소외되고 무시받는 동네, 그 나사렛이라는 나의 수치. 죄패와 수치. 그 다음에 이단의 우두머리라는 이 비방을 인정하며 나아갈 때 내 속에 있는 그 도, 예수가 고백되어지기 때문이에요. '예수가 그리스도다.' 이거를 바울은 어디서나 이 얘기를 하는 거죠. 이 도가 The way자나요. 예수 그리스도예요. 그러니 정관사가 붙어서, 그러니까 The way, 하나님께 유일하게 나아갈 수 있는 길, 하나님께서 완성하신 길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 The way. 자신을 비방하고 고소하는 것에 인정하면서, 사과하면서 자신의 속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를 고백한 것, 이게 성령의 고백인 거예요. 벨릭스 법정에서 예수를 구주로 시인했다는 거예요. 우리 황송영 초원님이 No spec, No money, Only Jesus. 이게 맞는 거예요. Wow. 그게 항상 우리가 어디서나 거기에 무슨 스펙이 필요해, 무슨 돈이 필요해. 예수가 그리스도다. 예수가 그리스도다. 그 분이 힘든 게 많자나요. 내 죄를 공동체에서 드러내면서 고백할 때 성령의 고백이 되어서 우리가 목장에서 내가 막 전염병, 나사렛 수치, 죄패. 이거를 막 얘기하면 막 전염이 일어나서 다른 사람들이 또 그 고백을 하게 되니까 다른 사람의 고백을 불러 일으키게 되는 것이 성령의 고백이라 이거죠. 그냥 내가 성령님이 없이 내 죄패와 수치를 얘기를 하면 그게 전염을 일으키진 않아요. 왜냐하면 회개가 없이 말로 하니까. 그래서 성령의 고백이 중요한 것이죠. 그래서 적용을 해보세요.
[적용] 나는 의인의 부활만 믿습니까? 악인의 부활도 믿습니까? 죄의 자백이 확실합니까? 공동체 고백도 확실합니까?
3. 양심에 거리낌이 없는 고백입니다. (16-20절)
16 이것으로 말미암아 나도 하나님과 사람에 대하여 항상 양심에 거리낌이 없기를 힘쓰나이다 17 여러 해 만에 내가 내 민족을 구제할 것과 제물을 가지고 와서 18 드리는 중에 내가 결례를 행하였고 모임도 없고 소동도 없이 성전에 있는 것을 그들이 보았나이다 그러나 아시아로부터 온 어떤 유대인들이 있었으니 19 그들이 만일 나를 반대할 사건이 있으면 마땅히 당신 앞에 와서 고발하였을 것이요 20 그렇지 않으면 이 사람들이 내가 공회 앞에 섰을 때에 무슨 옳지 않은 것을 보았는가 말하라 하소서
-> 자 이제 소요에 대해서 고백을 했어요. 나는 소요케 한 적이 없다. 두번째 나사렛 이단의 두목이다. '맞다. 나는 그 도를 믿는다.' 신앙 고백을 했습니다. '예수가 그리스도다.' 세번째는 더둘로의 마지막 고발은 성전을 더럽히려고 했다고 지금 고발을 했어요. 그래서 16절에서부터 20절까지.
아주 청문회에 나가는 사람이 이런 걸 좀 잘 보면. 법정에서 이렇게 하는 거다. 그럼 성령님이 그 마음을 주장해 줄 건데 정말 그런 사람이 없더라고요. 하나님과 사람에 대하여 항상 양심에 거리낌이 없기를 힘쓴다고 했는데 힘쓰다는 말은 운동선수나 군인이 항상 열심히 훈련하는 걸 말해요. 현재형으로 썼어요. 매일, 매 순간 양심에 거리낄 것이 없도록, 다시 말해 선한 양심에 찔리는 일이 없도록 열심이 연습하고 훈련한다는 것입니다. 무슨 말이에요. 주님의 말씀을 읽고 그 말씀대로 자기를 쳐서 복종시키는 적용을 한다는 말이죠. 이게 바로 큐티하는 거예요. 우리가 큐티를 하니까 이게 얼마나, 이게 대단한 일인지 몰라요. 그러면서 이제 중요한 얘기를 합니다. 17절에 '그런데 제가 이 예루살렘 교회를 위해서 이방교회에서 부조를 걷어와서 드렸다.' 자신의 민족은 자신을 죽이려고 작당했지만 자신은 도리어 어려움에 처한 우리 민족을 돕기 위해서 구제 헌금까지 마련했다는 사실을 지금 은연 중에 대비를 시키고 있어요. 부조를 걷는 일도 쉽지 않았겠지만 그것을 예루살렘에 안전하게 가져오기 위해서 얼마나 치밀하게 작전을 세워서 왔는지 우리 그거 다 봤어요. 지금. 그런데 제일 신경 써서 세심하게 적용한 것은 그 부조를 예루살렘 교회에 전달하는 일이었어요. 모으기도 어려운데 전달하기 더 어려워요. 왜냐하면 이 부조의 목적은 예루살렘 교회의 어려움을 돕는 것뿐만 아니라 더 궁극적으로는 유대인과 이방인의 화합이었죠. 그런데 예루살렘 성도들의 자존심이 하늘을 찌르기 때문에 이걸 배려해야 되는 거예요. 예루살렘 성도들의 자존심. 누가가 분명하게 기록하지 않았을 만큼 아주 조심스럽게 전달을 했어요. 그런데 지금 여기 기울어진 이 재판정에서 유능한 변호사 더둘로를 앞세운 대제사장과 장로들 앞에서, 그들과 한 편이 된 총독 앞에서 이 헌금에 대해서 지금 이제 비로소 밝히는 거예요. 이게 생색내기 위함이 아니예요. '내가 이렇게 했으니까 좀 봐달라.' 그것도 아니예요. 이것을 지금 밝히는 것은 이것이 바로 양심에 거리낌이 없도록 힘쓴 일이기 때문인데 자기 의를 위한 양심도 아니고 하나님 말씀과 함께 생각하는 양심, 말씀에 순복하는 양심을 지키기 위해서 이렇게 이제 헌금은 모아 가져와서 전했다 이 얘기를 합니다. 그럼 이게 왜 중요한가 하면 지금 있자나요 이 모든 전쟁의 가장 중심에 돈이 있어요. 돈이. 끝에는 돈이 있다고 그랬는데 이 초라한 노인 바울이 돈을 받으려고 지금 소요를 일으킨 것도 아니고, 돈 때문에 나사렛 이단의 괴수가 되어서 사람들을 '우와.' 이렇게 모든 것도 아니고, 또 돈 때문에 성전의 주인공이 되어서 성전을 더럽힌 것도 아닌데 그런데 이 노인이 '내가 여기 성전에 돈 갖다 주려고 왔다.' 이러는 거예요. 예루살렘 성전에. 너무 실제적인 증거가, 이 사랑의 증거가 딱 나타났어요. 이방 교회에서 가져다가 예루살렘 교회에 드린 부조는 사랑의 적용이라는 거죠. 자꾸 둘로 나뉘려는 두 공동체를 하나되게 하려는 이 노력을 얘기하는 거예요. '이 노력을 내가 양심의 거리낌이 없이 했다.' 말로만 사랑을 부르짖으면서 실제로 하나되는 노력을 하지 않은 게 아니라 온갖 방해, 어려움과 비난을 무릅쓰고 정말 세심하게 살펴서 '뭐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라고 하면서 철저히 자기를 숨기고 이방 교회 사랑을 예루살렘 교회에 전했다는 거예요. 그냥 자기가 돈 많아서 딱 줬다가 아니라 지금 얼마나 얼마나 이 돈을 갖다 주는 것도 말할 수 없이 기도하고 전했다는 거예요. 이렇게 하나되기를 힘쓰는 사랑이 바로 우리 모두가 한 마음 한 목소리로 외쳐야 할 성령의 고백입니다. 그래요 언제나 돈이 있네요. 가장 결정적인 고백의 증거가 돈이네요. 물질 가는데 마음이 간다고 하죠. 헌금을 많이 가지고 왔을 것인데 돈을 내놓는 바울과 돈을 바라는 더둘로는 게임이 안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딱 이해타산을 내려놓으면 게임이 안되는 거예요. 어디나. 그러니까 내가 돈 가지고 왔지만, 그래서 다시 아까 10절부터 13절에 했던 설명을 다시 하는 거예요. '내가 돈 가지고 왔지만 율법적인 유대인들을 위해서 돈 가져왔다고 자랑하지 않고 성전에서부터 너 율법 안 지킨다고 그러니까 빨리 결례부터 행해라 그래서 일주일이나 내가 결례를 행했다. 돈을 가져왔음에도 생색을 내지 않고.' 그러니까 이제 자기는 처음에 그냥 처음에 소요케 하지 않았다고 그 얘기만 했지만 죄의 고백, 부활의 소망을 고백하고 난 후에 내가 헌금 가져왔다고 하고 한 후에 다시 한 번 그 일을 상기시키니까 이게 딱 이해가 되는 거예요. 돈을 그렇게 가져왔는데도 결례를 행했구나. 그러니까 이 사람은 소요를 일으킬 수가 없는 거예요. 이 사랑으로. '그런데 여기에서 아시아로부터 온 어떤 유대인들, 그 사람들이 나를 그렇게 괴롭혔는데 진짜 나를 성전에서 봤으면 여기 증인으로 나오라 그래라. 지금 안 나오지 않았냐.' 이 얘기를 하는 거예요. 아시아로부터 온 이 어떤 유대인들은 그 에베소에서 아데미 여신을 섬기면서 신전 지키며 사는 여자 사제들이 거기 있는데 그들과 성관계 맺는 것이 예배의 마지막인 거예요. 그러니까 제사 드리는 명목으로 음란을 행했어요. 너무 좋겠죠? 남자분들. 그래서 아주 그냥 아데미가 너무 그냥 돈을 많이 벌었어요. 그리고 아데미 우상을 만들어서 돈을 많이 벌었죠. 그런데 바울이 거기 들어가서 성경 공부 두란노 서원에서 2, 3년 시키면서 '사람으로 만든 것은 신이 아니다.' 그냥 바울이 밥줄을 다 끊었어요. 이 사람들이 이가 갈려가지고 바울 죽이겠다고 계속 쫓아오는 거예요. 그러니까 바울은 이방인을 성전에 끌어들인 적이 없어요. 그런데 이방인 들어가면 죽는 거예요. 성전을 더럽혔다고. 그런데 드로비모라는 제자를 데리고 왔는데 거기 안 데려갔거든요. 그런데 바울 따로 보고 저자거리에서 따로 보고 그 다음에 자기네들이 완전히 이제 가짜 뉴스 만들어 내는 거죠. 그러니까 소문이란 한 사람만 거치면 진짜가 된다고요. 그러니까 18절에 성전에 있는 것을 그들이 보았나이다 '내가 성전에서 결례 드리는 것을 저희가 다 보았나이다.' 여기서 그 휴리스코라는 단어는 보았나이다 지난 번에도 썼자나요. '주의 깊게 보지 않아도 일주일 동안 그냥 거기 성전만 갔다 오면 바울을 다 볼 수 있었다. 우연히 보다. 그냥 한 번만 봐도 다 안다.' 그런데 이 바울의 그 변명 앞에 지금 이제 더둘로나 대제사장이 한마디도 못하는 거예요. 왜, 증거가 없기 때문에. 아시아의 그 못된 인간들도 나타나지를 않았어요. 오히려 더둘로가 증인조차 없이 거짓으로 고발했기에 위증죄로 지금 처벌을 받게 생겼어요. 그러니까 바울의 변명은, 아까 변명 냉철하게 논리적으로, 그러나 사과를 하면서 온유하며 그렇게 전했기 때문에 2천년 동안 승자일 수밖에 없는 걸 믿습니다. 그렇지만 팩트가 참 중요할 때가 있어요. '뭘 그거를 진실은 시간이 가면 다 나타나는데 주저리 주저리 변명을 하고 있어. 가만히 있어. 아유 정말 치사스러워.' 정말 잘났어요. 잘났어. 이렇게 밝혀야 될 때는 밝혀야 되는 거예요. 그런데 이제 자존심이 강하고 교만한 사람은 어디서 밝혀야 되고 어디서 가만히 있어야 되는지를 몰라요. 가만히 있어도 날 다 알아준데. 그런 게 없어요. 그러니까 우리는 원칙대로, 오늘 바울이 얼마나 원칙을 지킵니까? 그냥 헌금을 하나 가져와도 원칙대로. 나를 드러내지 아니하고 이게 구원을 위하여. 이렇게 한 장로님이 우리들교회 3P가 있대요. Principle, Philosophy, Pride 우리가 원칙을 너무 잘 지키니까 그게 우리들교회 철학이 되어서 우리들교회 교인들이 너무 프라이드가 있다는 거예요. 여러분 너무 있는 거 같지 않아요? 프라이드가 있으니까 사람이 매력이 있자나요. 자존감이 있자나요. 그렇죠? 그러니까 원칙과 프라이드. 우리들교회 교인들이 그래서 멋있는 것 같아요. 할렐루야. 적용해보세요.
[적용] 여러분은 원칙을 지켜서 긍지를 갖게 된 적이 있나요? 스승의 날에 원칙을 지키게 해주시고 긍지를 갖게 해 주신 스승님이 있으신지요?
말씀 맺어요. 성령의 고백은 사과로 시작하는 고백이에요. 그리고 죄의 고백과 공동체의 고백이 이어지는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 목장에서 여러분들 죄의 고백을 그냥 목장에서 나누는 게 공동체의 고백이 되는 거예요. 그게 성령의 고백입니다. 양심에 거리낌이 없는 이런 고백. 끝에 돈이 있다고 그랬는데 이거를, 정말 팩트 체크를 너무 해야 될 때 정확하게 하고 우리는 3P가 있는, 정말 원칙이 있고 정말 프라이드가 있는 이런 여러분들이 돼야 목장이 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그 전염이 되서 내가 오버도 하지 말고 너무 부족하지도 말고 겸손하게 이번 목장을 섬기면서 자랑이 아니고 진짜 애통한 마음으로 이 목장을 여러분들이 그렇게 이번에 섬겨 주시면 너무 감사하겠어요.
목장 모임 참석
미혜, 연수, 예선, 민희
기도제목
미혜
사업 제안을 하시는 고객과 어떻게 해야 할지 하나님께서 지혜주시기를!
개발자 채용이 필요한데 채용이 순적히 이뤄지기를!
일상에 예수님을 더욱 사모하기를!
아빠 술이 끊어지도록!
우리 목장 식구들의 간절한 기도제목에 하나님 신실하게 응답해주시기를!
예선
그날 주시는 말씀으로 하루만 잘 살도록
울림 기도회, 큐티 기도회 참석하여 나와 붙여 주신 지체들을 위해 기도하도록
작은 것에도 비난받을 것이 두려워 지옥을 사는데 고발당했을 때 즉시 인정하고 사과로 시작하는 고백할 수 있는 용기와 힘 주시길
혼나지 않으려고 억지로 원칙을 지키며 가는 것이 아니라 기쁨으로 지키며 갈 수 있는 마음 주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