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213성령의 황홀
사도행전 22:17-21
지난주 세종의 후궁인 신빈 김씨 얘기를 했어요. 공노비에서 성군인 세종의 후궁이 되었으니까 모두 신데렐라라고 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생각하기에 황홀 그 자체 아니겠습니까? 성군 세종이 뽑아줬다고 이렇게 황홀한데 창조주 하나님께서 나를 신부로 뽑아 주신 이 택하심은 얼마나 황홀하겠어요. 사실 이 두 개가 비교 자체가 불가하지만 이 땅에서는 감히 날마다 비교를 하네요. 그래서 오늘은 성령의 황홀에 대해서 말씀을 듣겠습니다.
1. 돌아와 성전에서 기도할 때 보게 됩니다. (17절)
힘든 곳에 돌아왔어요. 성전에서 기도할 때 황홀을 보게 됩니다.
이제 다메섹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가지고 회심을 했자나요. 바울이. 그리고는 아라비아에서 3년을 보낸 다음 다시 예루살렘을 방문한 때입니다. 생각을 좀 해봤어요. 지난 주일에 다메섹으로 억지로 끌려가기는 했지만 바울이 택함 받았다고 해도 사실 당장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스도인을 죽이고자 한 바울의 간증을 그리스도인들이 믿겠어요? 그리고 자기를 끌고 간 그 엘리트 동료 유대인들도 사람 취급을 하겠습니까? 막상 주님 만났고 사명도 받았지만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는 거예요. 그리고 도저히 사람들 앞에 설 수도 없어요. 그리고 혈육과 의논할 수도 없었어요. 갈라디아서 1장에 보면. 그리고 먼저 사도 된 사람들의 조언도 구하러 갈 수도 없었어요. 오직 주님 앞에 내가 죄인입니다. 고백하면서 그렇게 3년을 광야에서 회개의 때를 지냈어요. 아마도 주님께 양육 받는 시간이었으리라고 보는데 3년 후 바울에게 카이로스의 때가 왔다고 생각했겠죠. 광야 신학교를 졸업하고, 졸업한 학위는 무엇이었을까요? 빌립보서에 그 고백이 요약되어 있다고 생각을 해요. 3장 7절부터 보면 7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8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9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 핵심이 뭐예요? 자기가 30년 동안 쌓아왔던 높은 산 같은 모든 것,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자기 의와 자기 생각, 자기 확신, 가기 열심, 자기의 존재 자체가 실상은 배설물이었음을 깨달았다는 거예요. 어떤 흠도 없는 인생인 줄 알았는데 주님의 광채 아래에서 보니까 그냥 이 똥같은 인생임을 알게 된 거라는 거죠. 그리고 이제 다시 다메섹으로 돌아옵니다. 그래서 사도행전 9장과 갈라디아서를 보면 다메섹에 와서 즉시 각 회당에서 복음을 전했어요. 그랬는데 그 바울의 전도는 유대인들의 화만 돋우어 가지고 그냥 다 죽이려는 사람들이 막 생기니까 밤에 광주리 타고 다메섹 성벽을 빠져나왔죠. 생각나시죠? 그리고 베드로 사도를 만나서 예루살렘을 방문하는데요. 거기서 이제 15일을 머물면서 베드로와 야고보를 만났어요. 바울이 지금 간증하는 내용은 바로 그때 있었던 일입니다. 회심한지 3년 후에, 다시 말해 다메섹 교회를 박해하기 위해서 예루살렘을 떠난 지 3년 만에 그 예루살렘으로 다시 돌아왔다는 것이죠. 그럼 우리가 생각해 볼 게 자기가 유대교의 분파주의나, 혹은 유대교에 대한 이단이라면 이 유대교의 본거지라고 할 수 있는 예루살렘 성전을 오겠어요? 상식적으로 그럼 말이 안 되는 거죠. 그러니까 이 사람은 분파가 아니라고요. 본류라고요. 그런데 지금도 카톨릭은 큰 집이고 개신교는 분파라고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결코 그렇지 않고요. 촛불이 옮겨가는 과정에 있는 거죠. 이렇게 광야의 양육을 통해서 내 죄를 알게 되고 이제 그만큼 하나님을 알게 되어서 성전에 돌아와 주님께 납작 엎드려 기도하니까 성령께서 황홀을 경험하게 하신 거예요. 적용해서 이렇게 왔자나요. 황홀이라는 말은 엑스터시스인데요. 여기서 이게 그 에크는 밖으로라는 접두어고 스터시스는 서 있는 걸 의미해요. 문자적인 뜻은 내가 서 있던 자리 바깥에 있는 상태를 말해요. 그러니까 내 의식을 넘어서는 상태, 내 존재를 넘어서는 상태, 나를 초월하는 경험을 하는 자리를 이 엑스터시스라고 얘기를 하는데, 자 그러면 우리한테 적용을 해보면 우리는 저마다 원하는 엑스터시스, 황홀이 있어요. 바꿔 말하면 각자 벗어나기를 원하는 한계가 있는 거예요. 나를 옥죄는 몸이나 관계, 재산, 지식, 지위 등 제발 좀 탈출했으면 좋겠다하는 이런 제한들이 다 있어요. 거기서 벗어나면 너무 행복할 것 같아요. 칙칙했다가 황홀한 인생으로 바뀔 것 같아요. 그래서 그 황홀함을 얻으려고 온갖 수단을 다 써서 노력을 합니다. 열심히 놀기도 하고, 열심히 일하거나 공부하기도 하고, 열심히 사랑하기도 하고, 열심히 미워하기도 하고, 아무튼 무언가를 열심히, 열심히 합니다. 뭐 때문이에요? 황홀한 인생 될려고요. 원하는 것을 손에 넣어 잠깐 황홀함을 맛보면 어떻게 됩니까? 더 강한 황홀함이 당겨요. 그래서 더 열심히하고 더 더 열심히 하고 그러다가 다 중독이 됩니다. 주식도 다 이렇게 해서 중독이 되는 거예요. 그 끝은 어디입니까? 허무함과 경계를 넘고 또 넘어서 엑스터시스의 엑스터시스를 꿈꾸다가 정말 아무것도 남지 않은 깊은 허무에 빠지고 말아요. 그것이 누구도 예외가 없는 사실 인간의 실존입니다. 인간의 황홀의 결말이에요. 다 마찬가지에요. 자식도 엑스터시스, 주식도, 돈 다 막 예쁜 것 같아도 조금 잘못하면 꼴보기 싫어요. 그러니까 이쁠 때 황홀을 다 경험하죠. 자 성령의 황홀, 성령의 엑스터시스는 이런 밑도 끝도 없는 자기를 벗어나는 그런 자아에서부터, 그게 아니고요. 자기 확신이 아니라 자기 부인이에요. 자기 부인하려면 십자가 길에 서라는 거죠. 십자가 길에 서는 게 성령의 황홀입니다. 그런데 이제 빠져 있던 죄와 사망에 사로잡힌 자기 고정관념, 확신, 열심에서 벗어나는 건대요. 내 생각과 판단에 괄호를 치라고요. 그리고 주님이 말씀으로 알려주시는 생각과 판단에 밑줄 쫙 긋고 그대로 순종을 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 기도가 중요해요. 특별히 말씀대로 하는 기도는 밑도 끝도 없는 내 생각을 정리해 줍니다. 그런데 말씀으로 기도하는 게 성경보고 기도하는데도 안 돼요. 그게 이상하게 낫 놓고 기역자도 모른다고 이게 참 어려워요. 그러니까 말씀대로 기도 못하니까 바리새인처럼 내가 저들과 같지 않음에 감사합니다.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 당당히 기도 드리는데, 그게 아니고 말씀대로 기도하는 거는 화로다 내가 망하게 되었도다하면서 탄식하고 회개하며 드리는 기도입니다. 그래서 그 말씀으로 하는 기도를 통해서 늘 내 고정관념에서 벗어나게 되고 사로잡고 있는 중독, 죄악에서 벗어나게 되고 죽음의 한계 안에서 상처받은 내 존재가 자유롭게 되는 거예요. 말씀으로 기도할 때. 그래서 이 성령의 황홀이 이런 거거든요.
하버드 대학과 옥스포드 포럼 등에서 강연을 한 아주 미국의 유명한 정신의학자 데이비드 호킨스 박사는 의식 혁명이라는 굉장히 유명한 책을 냈어요. 사람의 의식 수준을 영성 지수로 나타내서 20에서 1000까지 구분을 했는대요. 가장 낮은 20은 바로 수치심이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아 비참하다. 쪽팔려. 차라리 없어져 버릴까? 그래서 여기서 피해 의식이 나오기 때문에 피해 의식이 가장 사실은 무서운 거예요. 그게 20이라는 거예요. 그 다음에 죄 의식이 30이고, 무기력 50이고, 슬픔이 75고, 두려움이 100이고, 욕망이 125고, 분노가 150이고, 자존심이 175 등 200 이하의 영성들이 바로 나의 골방 속에서 살고 있는 이런 부정적인 에너지를 막 주는 거죠. 그런데 영성 지수가 200 이상이 될 때 비로소 세상에 보탬이 되는 존재라고 보는데요. 그 기준이 용기라는 거예요. 200이 용기라는 거예요. 용기라는 것은 사람이 사람 답게 살기 위한 출발점과 같은 거라고 하죠. 용기가 있어야 수치도 드러내고, 두려움도 드러내고, 다 드러내는데, 그런데 그게 바로미터가 200, 용기라는 거예요. 용기가 있으면 모든 게 다 되는 거 같아요. 그 다음에 중용이 250이고, 그래서 이제 용기를 가지고 이렇게 다 드러내면 자발성이 310, 이거 대단한 거예요. 자발성. 조건 없이 베푸는 사랑이 500이고, 그보다 더 높은 것이 기쁨의 540이고, 평화가 600인데요. 마지막 700이 깨달음이라는 거예요. 700에서 1000까지. 가이없는 깨달음. 최고의 지수인데 이것이 최고의 기쁨이 아닐까 싶어요. 성령의 황홀은 어디쯤 해당될까요? 아주 미약하지만 시기마다 좀 있겠죠? 성령의 황홀이? 자 적용해 보세요.
[적용] 여러분은 어떤 황홀을 꿈꿉니까? 그러나 여러분의 200 아래의 골방에는 어떤 부정적인 의식이 살고 있는지 용기 있게 드러낼 수 있을까요?
2. 내게 주시는 주님의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18절)
똑같은 얘기지만 우리는 날마다 들어야 돼요.
이제 겸손한 죄인으로 드리는 기도 중에 바울이 성령의 황홀을 경험합니다. 죄에서 해방되는 자유를 얻죠. 그런데 그 황홀한 중에 무엇인가를 봤어요. 바로 자기에게 말씀하시는 주님을 봤죠. 이 황홀이라는 단어는 욥바의 지붕 위에서 베드로가 했던 경험에서도 사용이 되었는데요. 바울이 하나님으로 인해 무한한 기쁨을 느끼는 그 무아지경의 상태를 의미하는데 흔히 신비주의에서 이런 엑스터시스를 추구합니다. 그런데 이건 바울과는 아주 달라요. 그러니까 여러 종류와 양상의 황홀을 신비주의들이 이런 무아지경을 얻으려고 수양을 합니다. 굉장히 오랜 전통을 가지고 있기도 한데요. 초대교회, 사막의 교부들부터, 또 중세의 수도원에서, 오늘날 기도원에서도 이런 엑스터시스, 황홀을 얻으려도 열심히 기도하고 또 열심히 훈련해요. 이런 훈련이 주는 영적 유익도 있고 앞으로도 있긴 있을 거예요.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이 성령의 황홀은 오직 말씀하시는 주님을 보는 거예요. 그러니까 어떤 신비한 체험과 경험보다도 그 말씀하시는 주님을 봐야 돼요.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주님의 말씀을 듣는 것인데 오늘 보매자나요. 오늘 보매 방점이 주님을 보는 데 있지 않고 말씀하시는, 보매 주께서 내게 말씀하시자나요. 말씀하시는 주님이 중요해요. 주님의 말씀이 핵심이에요. 그런데 이 황홀한 중에 주님이 어떤 말씀을 한 걸 들었을까요? 우리가 이제 엑스터시스, 황홀을 경험했자나요. 3년 동안 너무 수고하고. 그럼 뭔가 그 황홀에 맞는 나를 인정해주고 칭찬해주는, 막 황홀을 크게 해 줄 듯한 이런 말씀을 주셔야 되자나요. 그런데 주님께서 바울에게 하신 말씀은 명령이에요. 속히 예루살렘에서 나가라 직역하면 서둘러라 에루살렘에서 빨리 나가라 시제도 부정 과거로 득시 나가라는 거예요. 아주 속도를 굉장히 강조했어요. 이상하자나요. 지금 깊은 기도 가운데 성령의 황홀을 경험하고서 여기가 좋사오니 그랬는데 성전 기도하는 자리도 모자라가지고 아예 예루살렘에서 그냥 없어져, 즉시 나가라는 거예요. 이건 마치, 여기가 예루살렘이 내 사역지인데 복음 전하라고 왔는데 마치 찬물을 확 끼얹는 듯한 초치는 말씀을 주셨어요. 우리가 생각하기에 은혜 충만한 뜨거운 성령 체험과는 아주 어울리지 않는 거절의 말씀인 것 같아요. 오늘 청년이 간증했는데 거절 당했자나요. 다메섹에서 전도하다가 박해도 받아보고 사역을 해보려고 하는데 이 황홀한 중에 주님이 말씀하시는 것까지 봤는데 니가 전하는 복음을 아무도 안 들을거야. 여기서 있자나요 원어를 보면 단순히 듣지 않는 걸 넘어서 아예 용납조차 하지 않아. 아주 듣지도 않아. 아주 강하게 거부할 거라고 말씀했어요. 그러니까 이 말씀, 이 거부의 말씀을 주시기 위해서 그 전에 황홀을 허락하신 거예요. 우리가 생각하는 황홀의 수단이 말씀이 아니고 반대입니다. 말씀을 조금이라도 더 잘 듣게 하시기 위해서 때에 맞게 황홀함을 경험하게 하신 거예요. 황홀의 목적이 주님의 말씀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말씀 없는 황홀은 인간의 황홀일 뿐이에요. 주님의 말씀을 들어야 성령의 황홀, 최고의 황홀이라는 거죠. 그러니까 이것이 실패에 대한 예언이자나요. 너 실패할 거니까 아예 시도도 하지 말고 즉시 떠나. 사역의 기회조차 허락하지 않으시고, 그런데 이 말 듣기가 쉬워요? 너무 어렵죠. 사도행전 9장 29절, 30절에는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들이 바울을 데리고 가이사랴로 가서 다소로 보냈다고 합니다. 그러면 여기서는 주님이 너 떠나. 그랬는데 9장에서는 제자들이 데리고 떠났다 그러자나요. 그럼 이 두 본문이 모순되나요? 그렇지 않아요. 이 두 본문 모두 바울이 예루살렘을 왜 떠나는지, 어떻게 떠나는지 그 이유를 말하고 있어요. 바울이 예루살렘을 떠나게 된 것은 기도할 때 주신 주님의 말씀과 예루살렘에 거하는 그리스도인 제자들의 충고와 도움이었어요. 주님은 그 바울이 왜 예루살렘을 떠나야 하는지 친절하게 이유까지 설명해주자나요. 너 아무도 안 들을거다. 그런데 그 이유를 주님이 직접 말씀하시고, 그 다음에는 공동체를 통해서 또 알려주신 거자나요. 이 그리스도인 제자들. 그러니까 바울이 처음에 떠날 때는 이런 공동체가 없었어요. 그런데 3년이 지난 지금 바울에게도 지체가 조금 생겼어요. 지체는 어떻게 생기나요? 여러분이 목장에 들어가야, 3년이 지나서 이렇게 조금 지체가 생깁니다. 바울은 3년이지만 우리는 수준이 낮아서 목장에 들어가면 곧 생길 거예요. 아마. 그런데 바울이 이런 엄청난 프로젝트를 가지고 인도함을 요구받는데 바울 같은 사람도 이 자기가 보지 못한 이 지체들의 도움으로 떠나자나요. 그러니까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분의 뜻을 알려주실 때 이 말씀을 통해서, 그리고 공동체 지체들의 나눔을 통해서 알려주신다는 거예요. 성령의 황홀이 이런 거예요. 이런 거. 그러니까 최고의 황홀은 기록된 말씀을, 오늘 선포된 말씀을 오늘 내게 주신 말씀을 듣는 게 최고의 황홀인 거예요. 그러니까 성경과 성경에 근거한 설교를 나와 아무런 상관이 없는 소리로, 소음으로, sound로 듣고 있다면 아무리 뜨겁게 찬양하고 기도해도 이건 성령의 황홀이 아니예요. 지금 나에게 주시는 음성으로 듣는 것. 그 내용이 중요하지 않아요. 주님의 말씀이라는 것이 중요해요. 내 생각과 같아야 내게 주시는 말씀이고 내 생각과 다르면 내게 주시는 말씀이 아니라고 판단하는 태도는 지금 주님의 말씀을 지금 내게 주시는 황홀함으로 듣는 태도가 아니예요. 머물고 싶어도 주님이 떠나라 하시면 떠나고, 있어라 하면 있는 이 태도가 성령의 황홀을 경험하는 사람의 태도죠. 그러니까 날마다 주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하는 것이 이제 큐티책을 펴서 공동체와 함께 같은 본문으로 주님의 뜻을 구하는 것이 사실은 황홀이에요. 아무리 강조해도 이거 모자람이 없습니다. 황홀을 다른데서 찾을 필요가 없어요. 성경을 펴시고, 큐티책 펴시고, 그리고 말씀을 읽고 오늘 나에게 주시는 말씀으로 들리게 해주시길 기도하시고, 그 기도 가운데 황홀을 허락하셔서 말씀이 들리는 은혜를 주실 줄을 믿습니다. 진짜 성령의 황홀, 말씀의 황홀, 그러니까 이게 가장 황홀한 것이라는 것을 알게 해주시기 위해서, 우리가 여러분들이 다 원하는 것은 학벌이니, 돈이니 여러가지 다 원하자나요. 그것만 있으면 내가 황홀하겠다. 그런데 여러분들이 갖고 싶은 이런 것들을 제가 소시민적으로 조금은 가져봤자나요. 그러니까 그걸 가져보니까 이 말씀의 깨달음의 황홀하고는 비교가 안된다는 것을 제가 알았어요. 그런데 그걸 하나도 제가 또, 세상적으로도 그걸 못 가져봤으면 지가 못 가져봤으니까 저러지. 이럴 수가 있는데 제가 이 말씀의 황홀, 깨닫는 황홀을 깨닫게 되니까 이 땅이 다 작게 보여서 순종을 할 수가 있게 되는 거죠. 말씀의 황홀보다는 더 넘어가는 황홀은 이 땅에 없어요. 오늘 그 얘기를 하시는 거예요. 성령께서 우리를 택하셨으면 증인의 사명을 주시는데 그 때 이 황홀함이 없으면 이 증인의 사명을 감당할 수가 없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런 황홀함, 엑스터시스를 하나님께서 주세요. 기쁨이 없으면 어떻게 순종할 수가 있어요. 그러니까 이게 정말 이렇게 맞는 얘기예요.
어떤 분이 나이가 들었는데 골프를 해보니까 성경 공부보다 더 좋더라. 얘기를 하고 싶은데 성경 공부만큼 좋더라고요. 이렇게 얘기를 하시더라고요. 그런데 여러분은 이 저 푸른 초원 위에 골프와 이 성경 공부 중에 무엇이 더 황홀하실 것 같습니까? 뭐가 더 황홀할 것 같아요? 빨리 대답해봐요. 그런데 사실 골프를 우린 안 해봐서 모르자나요. 해 본 사람이 성경 공부가 더 좋더라 이래야 되는데 안 해본 사람이 더 좋다 그러면 우리는 하늘의 언어를 쓴다고 그래요. 모르니까 저러지. 그만큼 아주 푸른 잔디를 하루 종일 걷고 힘들지도 않고 그러니까 랄랄랄라 그러겠죠. 그런데 미국의 여론조사 기관인 갤럽에 따르면 매주 예배에 출석하는 신앙인과 연수입 10만 달러(1억 1960만원)인 직장인 중에 삶의 만족도가 누가 더 높은가? 전반적인 만족도에서는 직장인이 높았다고 해요. 하지만 깊은 만족감은 신앙인이 더 누리는 것으로 나타났고요. 예배도 아주 자주 참석할수록 삶의 만족도가 높은 것으로 조사됐대요. 이게 바로 어제 신문에 나온 여론 조사예요. 요즘도 그렇다고요. 아무리 예배가 이렇게 됐다 그래도. 적용해보세요.
[적용] 여러분의 깊은 만족감은 연봉 10만 달러입니까? 예배와 목장입니까? 현장예배가 더욱 만족도가 큰 것을 경험했습니까? 말씀을 내 생각에 맞추려고 합니까, 내 생각을 말씀에 맞추려고 합니까?
3. 결론은 자기 확신이 아니라 순종입니다. (19-21절)
그러니까 이거는 지금 바울이 YES 한 거예요, 아멘 한 거예요 아닌 거예요? 아멘 안 한 거죠. 그죠? 그러면서 예루살렘 사람들이 자기가 원래 그들 편에 서서 예수 믿는 사람들 박해하고 스데반을 죽인 주동자였음을 다 알아요. 그러니까 저 같은 사람이 이렇게 변했으니까 주님 제가 그 유대인들에게 전하면 딱이지 않아요? 이 얘기를 하는 거예요. 나보고 어디를 가라고 그래요. 저는 유대인 딱 맞춤 복음 전도자예요. 바울도 이렇게 뿌리 깊은 유대인이에요. 그리고 진짜 유대인을 너무 사랑해요. 그래서 이방인 선교로 불렀는데도 날마다 유대인 회당부터 찾아가는 거예요. 하나님이 찾아가라고 그러지도 않았는데. 그런데 그 유대인이 늘 죽이려고 해요. 자기 확신이 얼마나 많은지 바울이 30년 동안 쌓아 올린 게 너무 많아가지고 이 3년의 광야 양육으로는 다 없어지지 않는 확신이 있는 거예요. 내가 유대인 전도할 수 있어. 나만 할 수 있어. 그리고 이건 해야만 해. 이거 누가 말리겠어요. 자기 확신. 그런데 여러분 뒤에 생각해보면 사실 사도 바울이 전도할 때 유대인들이 다 믿었으면 복음이 전세계로 퍼져 나가지 못했어요. 마찬가지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실 때 다 믿었으면 복음이 전세계에 전파되지 못했어요. 그러니까 우리는 눈 앞에서 잘 되는 거 말고 말씀대로 순종하는 게 제일 중요한 거예요. 여러분들이 뜻을 모르니까 목장에서 물어봐야 되는 거예요. 목자는 알아서 처방해요? 그냥 우리가 같이 나누는 가운데 뭐가 결론이 도출될 거예요. 너무 훌륭해서 그 처방이 나오는 게 아니예요. 우리가 공동체를 귀하게 여긴다는 거죠. 바울도 그런데 우리가 왜 안 그러겠어요. 아무리 주님을 깊이 만나고 은혜가 많고 오래 양육을 받고 대단한 사역을 해도 우리는 여전히 교만한 죄인이에요. 그러므로 고난이 많을수록 저마다 확신이 또 더 강합니다. 그래서 끊어지지 않는 이 판단이 있고, 없어지지 않는 기준이 있고, 각자 머리로 그어 놓은 선이 있어가지고 그 선을 넘으면 용납을 하지 못하는 거예요. 내가 이렇게 큐티도 많이 하고, 내가 랄랄랄랄라. 항상 언제나 상대방 말을 들어주고 해야 되는데 아니 왜 그래요. 이 한계를 어떻게 벗어나요? 벗어날 방법이 없어요. 나의 생각하는 게 확신인지 믿음인지 어떻게 알아요? 오늘 바울처럼 그냥 주님 내가 이러고 저러고 해서 유대인에게 딱이지 않을까요? 이렇게 그렇게 고백하는 거예요. 솔직하게. 그러니까 말씀에 치열하게 자기를 지금 갖다 대고 있는 거자나요. 그리고 이제 이거를 공동체에서 나눠보는 것, 그런 것이 성령의 황홀 중에 드리는 기도예요. 이게 자기를 인정하는 거예요. 주님 저는 유대인 전도가 딱 제 전공인 것 같은데 아니예요? 아니예요? 공동체에서 얘기를 해보면 이게 아닐까요? 막 얘기를 해보면 막 기도하면 평강을 주는 게 있어요. 거기서. 이게 인정하고 기도하니까 주님이 또 다시 말씀하세요.
그래서 이방인 전도 아니고 유대인에게 딱이라고 그랬더니 또 떠나가라 이 시제는 현재예요. 한 번 떠나는 게 아니라 멈추지 말고 계속 떠나야 할, 그러니까 유대인하고 이방인은 하나가 절대로 될 수 없고 무시하자나요. 개만도 못하게 여기는 이방인. 그거는 정말 지속적으로 가야하는 십자가의 길을 내가 너를 보내기로 했다. 그러니까 이게 황홀을 맛보지 않으면 이거 어떻게 가겠어요? 이런 명령 주시려고 이런 황홀을 경험하게 하셨어요. 어디로요? 멀리 이방인에게로. 그런데 이제 놀라운 이 보내리라는 단어가 헬라어로 아포스텔로, 사도, 아포스텔로라고 하는데 특별한 단어로 엑스아포스텔로. 밖으로라는 접두어가 붙어가지고 엑스아포스텔로예요. 아포스텔로는 사도라는 말인데 이 정도는 좀 알아도 되셔요. 그런데 이 단어가 아주 신학적으로 특별하게 쓰인 구절이 있는데 갈라디아서 4장 4절과 6절인데요. 성부 하나님이 성자 하나님 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셨다고 했을 때 이 단어를 썼어요. 또 6절에 그 아들의 영, 성령 있자나요. 성령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셨다고 할 때 이 단어를 썼어요. 그러니까 성부 하나님이 성자 하나님을 우리에게 보내시고 성령 하나님을 우리에게 보내실 때 이 단어를 썼는데 바울에게 이방인에게 보낼 때 이 기가막힌 단어를 써서 주님의 너를 얼마나 기대하는지 그리고 내가 너를 보호하리라. 삼위 하나님이 모두가 너를 도와준다. 지난주 택하심이라는 단어도 프로케이리쪼마이라고 아주 예수님에게만 쓴 택하심이라는 단어를 썼다고 그랬자나요. 그런데 여기도 예수님, 성령님이 보내신다고 할 때 이 단어를 썼어요. 이거 황홀하지 않아요? 이 세상이 짧은데 그러면 이게 바울에게만 적용되나요? 아니 그럼 성경이 위인전이죠. 그런데 이거는 역사책이 아니고 성경이에요. 나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이에요. 그렇다면 오늘 여기에 있는 우리 각 사람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이죠. 바로 저와 여러분을 주님께서도 각자의 멀리 있는 이방인에게로 보내신다는 뜻이에요. 삼위 하나님이 도와주셔서 너를 그 이방인에게로 보낸다. 이게 성령의 황홀의 목적이에요. 말씀을 나에게 주시는 음성으로 듣고 이제 이방인에게 보낸다는 거예요. 황홀의 목적은 그러니까 결국 멀리 있는 이방인에게 보내시기 위함인데, 인간의 황홀의 목적은 안주이지만 성령의 황홀의 목적은 보내심이에요. 파송이에요. 파송. 우리끼리 너무 좋아서, 부부도 너무 좋으면 주의 일을 안해요. 정말 우리는 어디로 파송되서 가야 되는데 좋아서 안주하자나요. 그죠? 그러니까 성령의 황홀을 맛보게 하는 이유는 파송인 거예요. 이방인을 구원하러 파송하시기 위해서 우리를 황홀하게 말씀의 깨달음을 허락하시는 거예요. 그러면 멀리 있는 이방인은 바울처럼 문자적으로 이렇게 멀리 있는 이방인들에게 선교사로 보내시기도 하겠지만 대부분 우리에게 멀리 있는 이방인은 물리적 거리가 아니고 실존적인 거리일 수 있는 거죠. 그건 뭐예요? 내가 미워하는 그 한 사람, 한 이불 덮고 같이 살아도 영원한 타인처럼. 세상에 아프리카보다 더 멀어 우리 부부 사이가. 한 이불 덮고 자도 멀게만 느껴지는 그 사람이 바로 멀리 있는 이방인이고요. 주님은 나를 그 이방인에게로 보내신다는 거예요. 성령의 황홀의 결론은 자기 확신이 아니라 순종인 거예요. 황홀을 경험한 결론이 내가 이런 대단한 경험을 했다.가 되어서는 자기가 하나님 자리에 올라가는 거죠. 그게 신비주의의 함정인 경우가 많았어요. 영적 엘리트가 되어가지고 다른 사람 무시하고 자기 확신에 빠져서 독불장군 되가지고 이혼하고 아프리카 선교가고. 어떤 사람은 9년을 연애해서 14년을 살았는데 이제 안 맞아서 맞는 사람하고 아프리카 선교를 가겠다고, 동의해 달라고. 이게 영적 엘리트죠. 그죠? 엄청난 영적 체험을 했다고 그렇게 이상하게 하면 안돼죠. 이런 자기 확신 가지라는 게 아니고요. 멀리 있는 이방인, 내가 너무 힘들어하는 그 한 사람, 미운 그 가족, 그 지체, 그 이웃에게 보내시는 이 주님께 순종하라고 성령의 황홀 가운데 말씀이 들리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먼저 믿은 사람, 먼저 말씀을 들은 사람이 가정에서 그 한사람이 돼야 합니다. 이것을 손해라고 생각하면 그 사람에게는 성령의 황홀이 없는 거예요. 주님이 나를 택하여 보내셨다는 사실을 보셔야 해요. 얼마나 특별히 나를 택해서 보내셨는지 예수님에게만 쓰는 단어를 이렇게 써 주셨다는 거죠. 그런데 우리는 나만 적용하니까 나만 수고하니까 왜 나만 맨날 순종해야 돼? 그런데 손해 보는 것 같은 그 현상 너머를 쳐다 봐야 해요. 치어다 봐야 해요. 치사랑, 아랫사랑 있죠? 치어다 봐야 해요. 지난 주일에 아나블레포라고 그랬자나요. 내 현상 너머의 본질을 봐야 된다고. 그 손해보는 것 같은 현상 너머에 있는 이 성령의 택하심을, 성령의 황홀을, 그리고 나를 도와주시기 위한 삼위 하나님의 사랑을 보아야 합니다. 삼위 하나님. 내가 이방인 그 힘든 사람에게 갈 때 감추어진 하나님의 경륜이 있어요. 그런데 내가 예수님처럼 자궁의 점처럼 너무 작아져서 순종할 때 effective power, 성령 하나님이 나를 도와주신다고, 그 이방인에게 힘든 사람에게 갈 때 삼위 하나님이 나를 도와주신다고요. 할렐루야. 이게 바로 오늘 성령의 황홀이라는 거예요. 그러면 이제 이게 황홀을 느끼게 되면 순종을 하게 되는 거죠. 받은 사랑을 알면 우리가 그때부터 감사하고, 감사를 깨달으면 순종하게 되고, 이게 성령의 황홀의 결론입니다. 그러니까 결론적으로는 순종하는 인생이 최고로 황홀한 인생인 줄 믿습니다. 그런데 기복적으로 무조건 교회 가라, 뭐 해라, 십일조 이렇게 해서 하는 순종 말고 말씀 하나 하나 설득이 되어져서 십자가를 길로 놓고 이 최고의 황홀한 인생을 여러분들이 사시기를 축복합니다. 적용해 보세요.
[적용] 내게 멀리 있는 이방인은 누구입니까? 삼위일체 하나님이 나를 그에게 보내셨음이 얼마나 믿어지십니까?
자 신데렐라의 황홀에서, 자기 자리에서 자기 확신보다는 이 순종의 십자가를 잘 지고 가는 게 택하심의 황홀로 견인되어 가는 거예요. 그죠? 그런데 그렇게 보이는 신빈 김씨 얘기를 좀 더 하겠습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은 신빈 김씨가 예수도 안 믿었는데 이럴 건데 그 당시 복음이 특별 계시로 전해지지는 않았어도 로마서 1장에 보면 해, 달, 별과 사시사철만 봐도 하나님이 계신 것을 핑계할 수가 없다고 그랬어요. 그래서 소수지만 믿는 사람이 있어요. 아브라함, 이삭, 야곱. 소수지만. 예수께서 오셔서 이제 인류가 구원받게 됐지만. 신빈 김씨는 관직이 없는 양반 아버지와 사노비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어요. 그런데 그 당시 아버지가 양반이면 그 아내와 자녀를 양인이 되는, 중인쯤 되는 거죠. 양인이 되는 법을 잠깐 시행을 했는데 이 아버지가 자기 엄마하고 자기를 그러면 노예로 부려먹지 못하자나요. 그래가지고 글쎄 그거를 신청을 안 해가지고 신분을 바꿔주지 않았고 도리어 공노비로 딸을 궁에 들여 보낸 것에 신빈은 한이 아주, 이 사람이 총명하니까 한이 맺혀 있었어요. 그런데 세종의 정비인 소헌왕후도 심온의 딸이었어요. 그랬는데 태종이 외척을 다 멸했기 때문에 그 태종, 자기 부인은 원경왕후 거기도 다 멸하고 소헌왕후의 심온도 죽였고, 그 다음에 소헌왕후의 어머니는 관노비가 되게 하고 모든 형제들이 아주 전부 다 죽던지 여기 소헌왕후 하나 살아남았어요. 여기는 한이 맺힌 게 신빈보다 더한 거죠. 양반 가문이었다가. 세종이 워낙 사랑하니까 이 소헌을 지켰어요. 세종이 사랑하는 부인 소헌왕후와 또 사랑하는 후궁인 신빈이 그렇게 서로 우애할 수는 없거든요. 소헌은 아들을 여덟을 낳았고, 신빈은 아들을 여섯을 낳았다고요. 형님 먼저 아우 먼저 하면서. 그러니까 어떻게 그렇게 우애를 할 수가 있는가. 그런데 지나고 보면, 후 일에 몇 백년이 지나니 지금 이제 그 한글창제 때문이 아니었을까. 왜냐하면 세종 또한 이 부인들 때문에 날마다 관노비, 공노비 이 얘기를 들었을 거 아니예요. 자기 사랑하는 부인이. 그 노비들의 아픔을 알았어요. 그래서 공노비에게 막 휴가도 주고 그랬다고 그래요. 세종이. 백성들의 아픔에 동참을 하면서 소통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었어요. 세종이 성군이자나요. 그러니까 상처가 별이 되어가 정말 맞는데요. 이런 모든 상황이 한글 창제에 영향을 끼쳤다는 거죠. 그러나 그 당시도 백성이 글을 알면 양반을 우습게 알고 부려먹지 못하기 때문에 절대로 창제되어서는 안 된다는 엘리트 반대파 대신들이, 그 중에서는 집현전 학자들도 있는 거예요. 우리가 너무 잘 아는 성삼문, 신숙주, 박팽년 이런 사람들. 요새 시대는 이걸 잘 모르는 거 같아. 그런데 그냥 우리 때는 태정태세문단세를 너무 잘 알아요. 그래서 그냥 옛날에 또 이 굉장히 또 드라마를 잘 쓰기 때문에. 그러니까 그렇게 세종을 사랑하는데 그 태종이 정도전을 죽였자나요. 이 조선왕조에 몰아서 서포트를 했던. 그러니까 이제 거기가 완전히 그 정도전 밑에 다들 대신들이 모여가지고 이 노예 제도를 반대하는 거죠. 절대로 한글이 창제되어서는 안 된다. 아휴 저는 이 다 남의 일 같지 않아가지고. 로마 카톨릭도 신도들에게 성경을 읽히면 안 된다 그래가지고 라틴어로 신부들만 읽었자나요. 지금 이런 게 똑같이 일어나는 거예요. 뿌리 깊은 나무라는 사극에서 봤자나요. 궁극적으로 말하면 세종은 한글 창제를 통해서 이 똘복으로 대표되는 원망으로 가득 찬, 피해 의식으로 가득 찬 백성과의 소통을 이루고자 했고, 한편 소이로 대변되는 문맹의 백성을 구체적으로 돕기 위해서. 그러니까 심언, 장인을 살리려고 했는데, 갈 때 세종은 살리려고 했어요. 태종은 죽이려고 했는데. 그런데 가져가는 그 저기가 밀지를 읽지 못하니까 이걸 심온을 죽이라는 건지 살리라는 건지. 그래서 자기가 장인을 죽였기 때문에 자기 와이프의 그 아픔에 너무 동참을 하고, 그래서 이게 몰라서 지금 이렇게 됐다. 한글을 백성들에게 만들어 줘야 되겠다. 그러니까 구속사라는 것은 무조건 세종이 나라의 성군이라고 하지 않고 세종도 죄를 깨닫고 아픔을 통해 백성을 위해 헌신하는 스토리의 동기 부여가 있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설득이 되는 거죠. 그러니까 한글 창제는 5천년 반만년 빈곤 국가에서 10위 나라로 발돋움하는데 가장 분수령적인 일이 한글 창제예요. 이게 너무나 우수한 문자자나요. 그런데 그 신빈과 소헌왕후 등의 아픔이 이 수 백년 후에 가장 한국의 발전을 위한 최고의 약재료가 된 것이 아닌가. 그러니까 옆에 그런 대단한 학자들도 다 반대를 했는데 가장 사랑하는 사람의 아픔을 통해서 한글이 필요하고, 이 사람은 너무 백성을 사랑하는 건 자기 죄를 봤기 대문이라고 생각하는데요. 그 얘기를 또 하겠어요. 신빈은 황홀하게 후궁이 되었지만 사실 만세 전부터 우리나라를 이렇게 부강하게 하시고 선교사를 파송하는 나라가 되게 하시려고 그 아픔을 허락하셔 가지고 한글 창제로 돕도록 역사하게 하신 이 이타적인 역할이 진정 성령의 황홀이 아닐까. 세종의 후궁이 된 것보다 이 역할을 감당하게 한 게 진정한 황홀이 아닌가. 제가 아까 남양주라 그랬는데 남양리래요. 신빈 김씨 능이 화성의 남양리에 있다고 합니다. 일개 후궁의 능이라기 보다 어떤 임금의 능보다 화려하게 되어 있는데 이 또한 하나님의 세팅이 아닌가 싶어요.
그래서 낮은 자는 높음을 자랑하라고 했는데, 그런데 아까 그 영성 지수 얘기했자나요. 영성 지수가 200 이상이 되는 사람들이 놀랍게도 15%만 있어도 그냥 세상이 살 만한 곳이 된다는 거예요. 그런데 인생이 모두 죄인이라서 모두 골방 속에 부정의 감정들을 숨겨 놓고 사는데 무슨 수로 이 수치스러운 일들을 용기 있게 오픈하면서 사람 답게 살 수 있겠어요. 그런데 이 700의 깨달음의 한 개인은 200이하의 인간 7천만명을 상쇄한다는 거예요. 600의 한계에는 천 만명 상쇄하고, 500의 한계에는 75만명, 400의 한계에는 40만명, 300의 한계에는 9만명을 상쇄한다는 거예요. 그런데 한 개인의 경우 특별한 깨달음이 없는 경우에는 일생동안 그 200의 그거가 인간이 가질 수 있는 모든 감정인데 일생동안 노력해도 5정도의 의식 수준 상승밖에 안 된다는 거예요. 갖은 노력을 해도. 그런데 특별한 경험이나 깨달음을 얻게 되면 수 백 이상의 의식 수준이 가능하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건 산술적인 수치가 아니라 대수적인 수예요. 200의 에너지는 100의 2배가 아니라 100의 10의 제곱만큼 곱한 100의 100승. 그러니까 인간의 지혜로는 이 영성을 도저히 얻을 수가 없다는 거죠. 그런데 일반 계시로 인한, 자연 계시로 인한 주님을 만나니 수 백의 의식 수준의 상승을 가져왔기 때문에, 한글 창제를 통한 세종이 그렇게 주님을 만났기 때문에 그렇게 이타적인 사랑을 할 수가 있지 않았나. 지금 7천 만명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얼마나 많은 사람에게 영향을 끼칩니까. 저는 세종이 주님을 만났다고 생각하고. 왜냐하면 정치를 해도 끊임없는 설득과 타협의 리더십으로. 요즘은 케이팝에까지 영향을 미쳐서 세계 곳곳에서 한글을 배우려고 하자나요. 이 말이 진짜고요. 지구상 인구의 15%가 분기점인 그 200 이상의 의식 수준에 속하지만 나머지 85%에 그 15%가, 15%만 있으면 85%를 항상 상쇄시킨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85%는 늘 200 이하의 감정 속에 살아가는데 우리가 주님 만나는 것은 황홀한 일 중에 황홀한 일, 성령의 황홀 아닐까. 그러니까 내가 아이를 공부를 시키력 갖은 노력을 다해도 5밖에 상승 안되는데 주님을 만나면 수백이 상승을 한다는 거예요. 우리들교회를 보면서 학벌도 공부를 안 하셨어도 다 지금 몇 백명을 지금 상쇄를 시키고 있는 이 장로님, 권사님 너무 많자나요. 아주 실제적을 보자나요. 학벌이 좋아도 이게 전혀 안 들리는 거예요. 직접적으로 보면서 그러니까 신결혼을 해야 되는 것이고 진짜 내 노력이 아니고 우리는 주님 말씀 듣고 성경 펴놓고 같이 공동체에서 나누고자 하는 것이 수 백의 상승을 가져올 수 있는 비결이고 지름길이라고요. 할렐루야. 그래서 오늘 청년부에서 정말 우리가 세상적인 거 보는 게 얼마나 미련한 것인지 주님을 만나지 못한 조선 왕조의 모든 왕들이 얼마나 권력 다툼에 다 희생이 됐습니까. 너무 놀랍지 않습니까? 적용을 해보세요.
[적용] 나의 황홀은 자기 확신입니까? 순종입니까?
기도제목
엄마 피부병 때문에 고생하시는 데 속히 회복시켜 주시고 재발하지 않도록 기도를 같이 부탁드려요. 피부병으로 엄마 많이 두려움으로 울고 계세요. 중보기도를 강력하게 요청합니다. 면역력이 회복되고 두 번 다시는 재발 않도록 치료와 회복의 은혜로 예수님이 낫게 해주시기를
시험 준비를 위해 나의 연약함을 인정하고 주께 아뢰어서 은혜로 도움을 구하고 온전히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도록 기도합니다. 환청증세가 계속되는데 소리에 귀 기울이고 반응하지 않도록 보호하여 주시옵소서. 새로운 시작 새로운 일터도 허락해 주세요. 나의 생명과 소유와 몸을 드리는 예배를 드리도록 하고 주께서 베푸신 은혜로 나눔을 실천하고 갈수 있도록. 주의 길로 들어가도록 힘써 다하도록 결단하고 책임 지는 적용을 하기 원합니다. 내가 주께 드릴 것은 주의날에 예배를 드리고 나의 재물의 출처가 주께로부터 말미암았고 십일조를 온전히 지켜서 이웃과 나누는 삶을 살도록 바라고 원합니다. 내가 받은 은혜를 나누도록 할게요. 입술로도 마음으로도 지켜 주시기를
지혜와 명철 그리고 총명을 구하고 저뿐만 아니라 남동생 동일하게 베풀어 주시기를
여동생이 일본유학을 가지 않고 취업을 준비하고 도전하도록
아버지 무너진 예배가 바로 서도록 예수님 도와주세요. 가장 머리된 자로써 섬기는 적용을 해야 한다고 그렇게 하기위해 힘써 기도와 예배를 지키도록 해야 한다고 주여 긍휼히 여기셔서 붙들어 주시기를
미혜
지난 주 업무로 정신없는 시간을 보내고나서 그런지 이번주는 무얼 할 힘도, 생각할 의지도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저를 일으켜 주시기를, 일어나라 하실 때 일어나기를
직원채용 공고를 내야 하는데 시간만 허송하고 있습니다. 나의 두려움의 골방을 주님께서 불쌍히 여겨주시고 하나하나 주님께 고하고 적용하며 갈 용기 주시기를
우리 목장 식구들 예수님께서 지키시고 보호하시는 은혜를 누리며 가기를
예선
그날 주시는 말씀으로 하루만 잘 살도록
하루에 여러 가지 몰아서 하려고 애쓰지 말고 하나씩만 하도록
말씀으로 알려주셔도 여전히 무섭고 두려운 마음이 먼저 올라옵니다. 나의 연약한 어린 아이 같은 모습 그대로 기도하도록
힘이 없어서 미루고 싶은 마음이 드는데 나를 위해 목장 보고서 올리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