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성령의 실상
본문: 사도행전21:27-36
설교: 김양재 목사님
아버지 하나님, 우리는 참 실상을 모릅니다. 그래서 날마다 실수를 많이 하는데, 주님, 오늘 그 실상을 넘어서 성령의 실상을 알 수 있도록 말씀하여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어떤 분이 편지를 보냈어요.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아이는 우상처럼 섬기면서 왜 아내와 남편은 그렇게 서로 사랑하지 못하고 이기적인지 모르겠다고. 우리들교회에서 간증을 하면서도 왜 그러는지 이해가 안된다고. 그리고 메이저리그의 어떤 선수는 마이너리그 시절 6개월 동안 25만원. 1년동안 150만원을 받아가면서 4년동안 고생하면서도. 아주 돈이 없어 피자를 사서 여러번 부인과 쪼개 먹었다는데도 거기는 믿음이 없어도 그렇게 잘 사는데. 무슨 이유 때문에 자기 남편을 그리고 부인을 그렇게 무시하고 외도를 하고 서로 존중을 못하냐고. 너무 이해가 안간다고. 왜 세상 사람한테 손가락질을 받는지 이해가 간다고. 이렇게 편지를 보냈어요. 오늘 설교가 이제 답변이 되면 좋겠는데요. 정답부터 말하면 아직 인간의 100% 죄성을 몰라서. 오늘 목자 임명식이 있었습니다. 목장을 하려면 성령의 열심히도 육적으로도 실상을 파악해야 되잖아요. 영적으로도 파악해야 되요. 그런데 우리의 문제는 다 수준들이 각각 다르다는 데 있어요. 서로가 못 알아들어요. 그래서 처방을 하기도 받기도 힘들어요. 바울의 복음이 틀려서 박해를 받는게 아니고 다 믿음의 분량이 달라서 평생 박해를 받고 있어요. 오늘 34절에 천부장도 왜 바울을 때리는지 바울의 진상을 모르겠다고 해요. 진상이 예전 개역한 글 성경에는 실상으로 되어 있어요. 그래서 평생 실상 파악하다가 간다는 말이 과언이 아닙니다. 올해도 목장하시면서 상처 받지 마시고, 그게 실상이니ᄁᆞ 그러려니하고 가시기 바래요. 그래서 오늘은 <성령의 실상>에 대해서 좀 생각을 해보겠어요.
성령의 실상은 첫째로
그래서 기다려야 합니다. 반드시 드러나게 하십니다. (27-29절)
기다려야 돼요. 영육의 무엇이건 반드시 드러나게 하실 때가 있거든요. 27절이에요.
27. 그 이레가 거의 차매 아시아로부터 온 유대인들이 성전에서 바울을 보고 모든 무리를 충동하여 그를 붙들고
오늘 설교 본문의 지도를 좀 모시겠는데요. 저렇게 성전이 있고 이방인의 뜰- 바깥 뜰-이라고 하죠. 저 성전 안 뜰이 있고 저 위에 북서쪽에 또 이방인의 뜰이 있어요. 이제 그쪽에 끌려가서, 더 위에 안토니아 요새로 끌려가는 거에요. 오늘 안 뜰에서 이방인의 뜰로, 안토니아 요새로 끌려가는 바울의 성경본문입니다.
이레가 차매 그러니까 하나님의 시간을 기다려야 돼요. 7(이레) 완전수잔하용. 그랬더니 오늘 결례를 잘 받고 그 일주일을 잘 기다렸더니 충동질이 기다리고 있네요. 그래서 팔복이에요. 믿는 것은 이 세상에서 짠 하는 게 아니에요. 그러나 알지 못하는 기쁨으로 인도하시는 것이 있는 거에요. 바울은 예루살렘 장로들의 제안에 따라서 결례를 행하고 비용을 지불하고 7일동안에 두 번에 걸쳐 제사를 드렸어요. 사흘에 한 번, 이레 째 또 한 번을 드려야 했어요. 그래서 이렇게 서원이 완료된 시점! 그 이레가 차매! 바울이 유대인의 율법과 관습을 얼마나 열심히 지키는지 이제 증명이 되는 것 같았어요.
그런데 그 이레가 찼을 때! 그 시점에 불청객이 성전에 들어오는 거죠. 오순절을 지키기 위해 아시아의 주도인 에베소에서 온 유대인들이었어요. 그들도 오순절 지키려고 왔으니까 성전에 여러번 들어가 예배를 드렸을 것인데요. 어느날 성전에서 어떤 사람을 보자 그들의 눈이 뒤집혔어요. 바로 성전에서 결례를 지키는 바울을 본 거예요. 이들은 사도행전 19장 9절에 나오는 이 에베소의 유대인들이었을 것인데요. 그들은 회당에서 바울이 전하는 복음을 듣고도 마움이 굳어 순종하지 않고 무리 앞에서 이 도를 비방했다고 그랬어요. 근데 결과적으로 그 유대인 회당이 쪼개져서 회당에 다니던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의 일부가 두란노 서원으로 갔지요. 거기서 성경공부를 했어요. 그들 입장에서 바울은 자기들의 공동체를 깨뜨린 원수예요. 20장 3절에 보면, 바울이 에베소 사역을 끝내고 예루살렘으로 오순절 지키기 위해서 오고자 했을 때, 그들이 배 안에서 바울을 죽이고자 음모를 꾸민 거를 알았기 때문에 배 타기를 멈추고 마게도냐로 돌아가기로 했던 거 기억나시나요? 그래서 그렇게 바울을 죽이고자 따라다니던 사람들이니까 성전에 그렇게 많이 모인 사람 중에서 저 이방인의 뜰에 다 모이고. 그런데 바울이 딱 보였어요. 스토커들 같아요. 분이 확 올라왔죠. 그리고 성이 난 그들은 성전에 있던 모든 무리를 미완료로 계속적으로 충동질 했습니다. 이 충동하다는 홍수가 범란해서 물이 걷잡을 수 없이 넘치는 모습을 묘사하는 단어인데요. 그래서 어떻게 하냐면 28~29절에.
28. 외치되 이스라엘 사람들아 도우라 이 사람은 각처에서 우리 백성과 율법과 이 곳을 비방하여 모든 사람을 가르치는 그 자인데 도 헬라인을 데리고 성전에 들어가서 이 거룩한 곳을 더럽혔다 하니
29. 이는 그들이 전에 에베소 사람 드로비모가 바울과 함께 시내에 있음을 보고 바울이 그를 성전에 데리고 들어간 줄로 생각함이러라
팩트가 아니고 생각함이러라. 이 율법주의자들인 에베소의 유대인들은 바울의 죄목을 밝히ᅟᅩᆨ 나서 결박한 게 아니라 '율법 율법' 하면서도 결박부터 하고 죄목을 밝히고자 했어요. 자기들이 율법을 지금 어기고 있습니다. 큰 범죄를 목격한 사람처럼 흥분해서 큰 소리로 외칩니다. 그러면서 '이스라엘 사람들아 우리를 도우라! 자기가 붙들고 있는 이 사람은 유대인과 율법과 성전을 비방하는 가르침을 퍼트리는 사람이다!' 뿐만 아니라 도라고 시작하며 결정적인 죄목을 만들어 내는데요. 당시 이방인을 그 성전 안뜰로 들인다는 것은 어마어마한 죄악이었어요. 그래서 이방인이 부지중에라도 이방인의 뜰을 지나 아까 성전 안 뜰에 들어가지 못하도록 막 돌로 된 칸막이 벽을 만들어 쌓아서 거기에 들어가면 성전을 더럽혔다고 로마 정부의 승인이 없이도 즉각 사형할 수 있는 유일한 조항이었어요. 심지어 로마 사람일지라도 즉각 사형을 할 수 있었어요. 그러니까 바울이 지금 얼마나 엄청난 누명을 썼는지 알 쑤가 있죠. 왠고하니~ 한 때 자기들과 같은 에베소 회당원이었다가 바울을 따라서 두란노서원으로 떠난 드로비모가 바울과 함께 예루살렘까지 온 것을 보고 더 화가 났겠죠.
그런데! 예루살렘 시내에서 바울과 함께 있는 걸 봤는데. 성전에서는 바울만 봤거든요. 그런데 당연히 드로비모를 이 성전 안뜰가지 끌어들였다고 확신을 한 거에요. 성경을 잘 봐야 되요. 그러니까 이 말이 그냥 성전에 모인 유대인들 귀에 딱 꽂혔어요. 그들이 바울에 대해 가지고 있던 프레임과 딱 맞아떨어지는 증언이었거든요. 그들도 바울이 유대인의 정체성을 무시하고, 율법을 따르지 말라고 가르친다는 것이었기 때문이에요. 딱 맞는 거에요.
그런데 이 프레임과 달리 바울이 모세의 율법대로 결례를 철저히 지켜 행했잖아요. 그러던 중 바울이 이렇게 반 유대교적 사상을 가르쳤다는 증언이 나오죠. 바울 주변으로 막 몰려들어서 이방인을 성전 안들에 데리고 들어왔다고 하면서 분노했어요. 그런데 지금 문제는 바울이 이런 일을 행한 적이 없잖아요. 이게 팩트가 아니고 생각함이러라. 이런 책임 없는 작은 말 한마디가 홍수처럼 범람하여 온 도시를 삼키고 인생을 삼키고 충동질하여서 한 인생과 생명을 빼앗는 결과를 낳을 수가 있는 거에요. 요즘에 그 말 한마디에 얼마나 자살을 많이 하나요? 장로들의 작전이 실패하고 바울이라는 존재가 편견 가득한 유대인 군중 앞에 드러났어요. 장로들이 사람 눈치를 보며 감추려고 했던 이 바울의 모습과, 바울의 사역이 유대인의 고정관념과 너무도 다르다는 실상을 드러나게 하세요. 하나님의 시간에 우리가 예상치 못했던 그 시간, 최선의 카이로스에 성령께서 드러나게 하신 거에요. 그러니까 우리는 하라는 대로 해서 어떤 사건이 일어나든지 그게 실상이 드러나는 거에요. 성령의 실상이 드러나는 거에요. 이 장로들 때문에 2천 년 간에 우리에게 줄 복음을 제대로 가르쳐주기 위해서 그게 묻혀서 지나가면 안되는 거였어요. 장로들 때문에 아프게 영육 간의 실상이 드러나게 하셨죠. 장로들의 말을 안 들었다면 도리어 성전을 일찌감치 떠나서 이런 일을 안 겪었겠죠. 그러니까 우리는 기도하면서 말씀을 보고 순종하고 공동체의 조언을 들으면 '그것 때문에 이렇게 됐어 저렇게 됐어'는 말이 안되는 얘기에요. 적용해보세요.
[적용]
내가 기다리며 공동체의 조언에 따라 적용했는데 '왜 이런 일이 왔냐?며 불평하진 않습니까? 그래서 충동질 했습니까?
성령의 실상은 그래서 기다려야 되고, 그러면 반드시 드러날 때가 오는데 두 번째는
2. 피해의식에 사로잡히면 실상을 볼 수가 없습니다. (30-32절)
30. 온 성이 소동하여 백성이 달려와 모여 바울을 잡아 성전 밖으로 끌고 나가니 문들이 곧 닫히더라
31a. 그들이 그를 죽이려 할 때에....
그러니까 얘루살렘 백성이 소동을 하잖아요. 호기심에 몰려와서 웅성웅성한게 아니고. 바울을 향한 비난에 100%동의 하면서 미움과 분노로 활활 타올랐어요. 군중심리는 무섭다고 했잖아요. 개인보다 똑똑한 사람이 군중에 섞여 있을 때 훨씬 더 잘 속아 넘어간다고 그랬습니다.
최인철 교수의 <프레임>이라는 책에 이런 글이 나와요. 우리 눈에는 보고싶은 것만 보인다는 거죠. 그래서 심리학자들은 자기를 가리켜 독재정권이라고 부른다. 국민들이 읽고,말하고,보는 것까지 간섭하고 통제하는 독재정권처럼, 자기라는 것이 우리가 세상을 보는 방식을 일방적으로 결정해버리기 때문에 독재라는 거에요. 자기 중심성에서 벗어나야 프레임을 바꾸는 길인데 그러니까 자기중심성에서 벗어나는게 이타적인 건데 이게 예수 없이는 안되잖아요. 그러니까 예수가 없는 자신은 이 독재정권이라는 말이 진짜 맞는 거 같아요.
그들이 지금 달려왔다고 하는데 이 성경에서 단 한 번 쓰인 단어인데 아주 의미가 강한 단어예요. 그냥 달려온 게 아니라 많은 사람이 그냥 하나가 되어사 함께 돌진해 온 걸 표현해요. 한 무리로 똘똘뭉쳐서 돌진해와서는 바울을 잡아서 성전 안뜰에서 바깥 뜰(이방인의 뜰)로 끌고 나갔어요. 그러고는 성전 문을 닫았어요. 왜요? 이제 거룩한 성전을 더럽힌 죄인을 죽일 건데 그 피가 성전을 더럽히지 않도록 문을 닫은 거에요. 그들의 전통과 신념을 향한 무서운 열심히 그대로 드러나는 대목인데 그들은 성전의 기물이 더 중요하고 사람 생명은 중요하지 않아요. 한 사람이 중요한데 바울 앞에서 그 성전이 성전의 역할을 안하고 성전을 걸어 잠그면 되겠어요?
그런데 사실 이 결벽증 같은 배타성은 피해의식에서 비롯된 것이에요. 예루살렘 멸망이나 바벨론 포로도 회개하고 주께 돌아오라고 주신 사건인데 이스라엘 백성이 깨닫지를 못해요. 죄를 보지 못하니까 성전이 무너진 것이 이해가 되지 않고 포로로 끌려갔다 온 것을 인정할 수가 없는 거에요. 그냥 자기가 피해받은 것만 생각합니다. 스스로 피해의식에 사로잡혀 있어요. 그러니 유대인이 이 포로로 잡혀갔던 이 바벨론. 이런 이방인이 너무너무 미운 거에요. 자기가 늘 피해자니까 그 이방인은 존재 자체로 가해자인 거에요. 그런데 그 가해자(이방인)가 자기 (유대인)와 똑같이 하나님 백성이 되는 길이 있다고 가르치며 전한ㄴ 바울이 있다니까 용납할 수가 없는 거에요. 성전 문을 닫듯 그를 민족으로부터 그냥 쫓아냈는데, 자기들이 그 역경속에서도 잃어버리지 않고 힘들게 지켜온 전통을 하나도 지키지 않아도 똑같이 하나님 백성이 된다고 하니까 살려 둘 수가 없어요. 죽이려고 해요. 피해의식에 사로잡히니까 자기 죄가 보이지 않고요. 자기 죄가 안 보이니까 회개가 안 되고요. 그러니까 하나님이 뜻하시는 구원의 실상을 전혀 보지 못해요. 아무리 말해줘도 듣지 않고 들어도 외면하고 무시합니다. 들어도 말씀보다는 자기 사연이 위에 있고 자기 피해가 더 커요. 그래서 말씀이 하나도 안 들려요. 그래서 이 진영논리 지역감정이 해결이 안되요. 내가 피해받은 것만 계속 생각하니까. 이스라엘백성이 그 바벨론 포로로 갔다왔다 이거를 들으니까 좀 이해되시지 않아요? 어ᄄᅠᇂ게 거기 가서 내가 70년 포로 생활을 할 수가 있냐? 고요. 그런데 이렇게 피해의식에 쩔어 집단으로 바울 한 사람을 잡아죽이려 하던 그들이 그렇게 죽이겠다고 그러다가 정작 자기보다 더 힘센 존재가 나타나니까 하던 일을 딱 멈추는 거예요. 공권력! 이게 무서워요.
31b. ...온 예루살렘이 요란하다는 소문이 군대의 천부장에게 들리매
32. 그가 급히 군인들과 백부장들을 거느리고 달려 내려가니 그들이 천부장과 군인들을 보고 바울 치기를 그치는 지라
천부장은 로마 장군의 계급으로 천 명의 군사를 통솔하는 장교로 당시 그 휘하에는 6명의 지휘관이 있고 이들 밑에는 가가가 180명 가량의 군사들이 있었어요. 6명의 지휘관을 백부장이라 불렀고 천부장은 6명의 백부장과 그 밑에 있는 군사들을 지휘할 권한을 가졌어요. 근데 당시 로마의 수비대는 성전이 내려다 보이는 성전의 북서쪽의 안토니아 요새에 머물러서 절기에 일어날지도 모르는 폭동을 막기 위해서 그 이방인의 뜰이 훤히 내려다 보이는 곳에 주둔하면서 성전을 감시했어요. 그러니까 이 소동에 대한 보고를 받고 즉시 출동을 했어요.
그러니까 그렇게 죽이려고 하다가 유대인들이 이제 몇 백명이 도착하니까 겁을 먹고 폭행을 멈췄어요. 피해의식에 갇혀 있으면 약자에게는 무서운 화를 쏟아내며 괴롭히고, 강자에게는 눈치보고 겁을 먹으며 아무것도 하지 못합니다. 그러니 그 피해의식이 점점 더 굳어집니다. 약자에게는 점점 더 무서운 화를 쏟아내며 괴롭히게 되는 거지요. 피해의식에서 벗어나는 길은 실상을 파악해야 되는 거에요. 하나님이 사랑해서 바벨론으로 보냈다. 너 미워서 보낸 게 아니다. 근데 이게 이해가 안되요. 자기 실상을 파악하면 하나님의 사랑이 느껴져야 되고, 자기 죄를 보는 회개밖에 할 게 없는데... 날마다 위로만 바래요. 그러나 그 누구도 위로로 피해의식을 해결해 줄 수가 없어요. 그 때뿐이에요. 자기 죄를 회개할 때만이 자신의 죄로 얼마나 자기가 큰 가해자였는지 깨닫게 되고요.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또 가족과 이웃 앞에서 가해자였음을 깨달을 때 비로소 피해의식에서 자유롭게 되는데 이 피해의식이라는 인간의 실상은 사실 허상이라는 거에요. 그런데 실상처럼 착각하면서 너무 인생을 낭비해요. 우리들 교회도 수없은 성도들이 약먹고 치료를 받아가요. 그래도 그 실상을 인정하니까 약을 먹는 거지요. 그러니까 내가 가해자였다는 고백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게서 나를 살려주셨다는 실상이 그 은혜의 실상이 보이는 이것이 바로 성령의 실상입니다. 그 피해의식에서 주님을 만나고 포로로 보냈던 것이 사랑이었다. 내가 이렇게 힘들게 사는 것이 다 하나님의 사랑이었다. 이것이 성령의 실상이에요.
성전문이 굳게 닫히고 바울이 끌려간 곳이 어딘가 하면 바로 성전 바깥이에요. 그 때 당시 기득권과 선민의식으로 가득 차 있던 사회에서 이방인은 결코 들어가지 못하는 이 성전이 아닌. 이 성전 밖 이곳 어ᄄᅠᆫ 곳이죠. 이 성전 밖(바깥뜰) 바로 스데반이 유대인과 바울에 의해 돌로 쳐죽임을 당한 장소잖아요. 예, 그러니까 성령의 실상은요. 그렇게 지금 모든 유대인들이 유대인 성전의 안뜰에서 옳고 그름을 지적하고 있잖아요? 그 성전의 문이 닫히고 내가 그토록 들어가고 싶은 그 문이 억지로 다혔어요. 드디어 내가 죄인 됨을 깨닫는 자리인 성전 밖으로 나를 데려가는 거에요. 이게 성령의 실상이에요. 그러니까 나는 내가 왜 이렇게 끌려가야 되냐? 나는 결박당할 수 없다.가 아니라 내가 얼마나 죄인인지 내가 이렇게 결박 당해서 죽어도 아무 할 말이 없는 그 자리까지 내려가는 거에요. 바울은 스데반을 생각하면서 그랫을 거 같아요. 내가 드디어 똑같은 고난을 받고 있구나. 그러면서 그들을 전혀 미워할 수가 없었을 것 같아요. 평생 스데반을 생각하면서 왔는데. 이것이 바로 나의 실상이 성령의 실상으로 바뀌는 거죠. 자, 바울이 장로들의 말에 순종을 했잖아요. 근데 막상 잡혀가게 되니까 장로들 중 누구도 바울을 위해서 바울은 잘못이 없다!고 목소리를 내주는 사람이 하나도 없어요. 그 일주일을 같이 하면서 서원을 하던 4명도 어디로 갔는지 다 없어졌어요. 목숨을 걸고 막지 않았거나 감히 막을 수 없는 상황이었을지 모릅니다. 오직 폭도들만 자기들을 도우라고 외치고 있어요.
국내 카이스트 대학의 한 연구팀이 코로나19와 관련된 가짜 뉴스가 언제 잘 확산하는지를 분석했다고 해요. 헤어드라이기. 뜨거운 차를 마시면 코로나 감염 위험이 주러든다 등 이 펙트 체크가 끝난 가짜 뉴스 12개를 수집한 뒤에 응답자의 감정이 불안인지 혹은 분노인지를 같이 체크하면서 이 조사를 했대요. 그 결과 이 불안을 느끼는 사람은 정보 검색에 집중하는 반면, 분노를 느끼는 사람은 즉시 행동을 하는 경향이 더 강해진다는 거예요. 그래서 분노한 사람들은 헛소문을 과학적으로 믿을만하다고 생각하면서 훨씬 더 잘 믿었다는 거예요. 그래서 가ᄍᆞ 뉴스를 공유하는 데에도 훨씬 더 적극적이었다는 거죠. 그래서 이제 불안보다는 분노를 느끼는 사람들이 가짜 뉴스를 잘 믿고, 잘 퍼트린다는 거에요. 가짜 뉴스는 사람들의 분노를 먹고 자랍니다. 사람들의 분노를 만들어내어 결국 끝에 가면 권력 돈이 있는 거지요. 이 가짜 뉴스에 요동하면 분노의 희생양이 되는 거잖아요. 그러나 이래도 저래도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긴 바울은 지금 어떤 것도 묵묵히 받아들여요. 바로 이것이 구속사입니다. 이런 바울의 침묵들을 드러나게 하시는거. 이 고난을 통해서 바울의 그 행동. 이 걸 통해서 하나님의 실상과 성령님의 실상이 드러나는 거예요. 장로들은 감추어 주려고 했지만 이게 드러나므로 하나님의 복음이 리얼하게... 이게 성령의 실상이죠. 우리도 실상이 들러나면 좀 자유해지는 거 있죠. 목장에서 감추고 감추고 싶다가 누군가를 통해 드러나면 도리어 시원해지는 거 있어요. 그러니까 영육간에 실상이 드러나는 것이 축복일 때가 많아요.
그런데 이 성전의 문이 굳게 닫히는 이 표현이 사도행전의 성전에 대한 마지막 기록이에요. 그리고 10년쯤 뒤에 예루살렘 폭동에 의해 그 예루살렘 성전이 로마에 의해서 철저히 불타게 되고, 그렇게 이방인과 유대인을 철저히 갈라놓았던 화려했던 이 성전은 로마 장군 티투스에 의해서 돌 위에 돌 하나도 남지 않고 철저히 무너지게 됩니다. 스데반도 성전의 의미를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구원을 얻는다는 이 구속사로 설교하다가 순교했죠. 바울도 성전우상주의 때문에 지금 죽음에 처해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들은요.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했어요. 유대인 중에 수많은 그 믿는 사람. 근데 유대인들의 얘기는 유대인의 율법도 지키면서 예수를 믿겠다는 거예요. 숫양, 숫염소 제사를 지내면서 이제 믿겠다는 거예요. 그러니ᄁᆞ 신인합력설로 믿겠다는 거예요. 이게 그동안 오래 내려오는 거! 이거 도저히 포기 못한다! 저는 이제 많이 살았잖아요. 어렸을 때 예수 믿으면서도 지키는 얼마나 미신이 많은지 몰라요. 그냥 우리는 그게 우상인지 모르고 이게 우리나라 문화인가 보다그러고. 이삿날 택일하는 거는 기본이더라구요. 사주단자를 보내고 점보고 보름에 귀신 쫓는다고 호두 까먹고 시험날 미역국 안 먹고. 4자는 불길하고 문지방은 밟으면 안되고. 온 국민이 이렇게 미신을 따르니까 믿어도 죄책감도 없이 따라 하는 것들이 있었어요. 사람은 율법을 완벽하게 지킬 수 없어요. 그러니까 율법으로 구원을 받을 수 없어요. 근데 인간의 실상은 착한 게 아니라 지금 감추고 있는데 인간이 100%죄인인데 자꾸 율법을 지키면 선해진다고 착각하는 거에요. 그런데 악함을 감추다가 폭팔을 하는 건데. 선함으로 감춰서 구원받는 게 아니고 오직 예수 믿어야 구원이라고 가르치는 것이 지금도 가시밭길 인데 바울 시대에는 어땠겠어요? 그러니까 예수 믿으면 구원받는 것의 가장 받대 이론이 행위로 구원 받는 거에요. 자꾸 옳고 그름으로 정죄를 하는 거에요. 그러니까 서두에 그 집사님이 '왜 안 믿는 사람이 더 잘고 믿는 우리는 이렇게 맨날 싸우냐'그런데, 우리는 드러내는 거고 다른 사람들은 안 드러내는 거고. 왜냐하면 인간은 100%악하고 음란한 죄인이라고 예수님이 그러셨거든요. 그러니까 비본질 때문에 본질이 훼손당하고 있기 때문에 이 성전은 무너졌어야 해요. 여기서 너무 오랫동안 죄를 끝도 없이 짓고 이씩 때문에. 이 세상이 변하지 않는 것은 지금 이 교회의 실상이 세상과 다름 없기 때문이에요. 적용해보세요.
[적용]
_남에게 피해의식이 있다는 것을 지적받을 때 발끈합니까? 인정합니까?
_그리고 약자라고 함부로 하는 사람, 강자라고 무서워하는 사람은 누구인가요?
_나는 불안합니까? 분노합니까?
아이들도 부모 중에 누가 권력이 있는 줄 알아서 힘센 편에 붙어요. 그것은 자녀 교육에 치명적이에요. 약자에게 함부로 하고 강자에게 아부하라고 어려서부터 가르치는 것이죠. 아내의 머리는 남편이고 남편의 머리는 그리스도라는 이 원칙을 어기고 역할에 순종하지 않으면 어떤 교육도 성공할 수 없습니다. 그렇게 능력으로 집에서 아내가 돈 번다고 남편 무시하고 이러면 그건 정말 아이에게 지금 독을 주고 있는 거에요.
자, 성령의 실상 세 번째는
3. 미리 들은 말씀으로 나의 결박을 해석하는 것입니다. (33-34절)
미리 들은 말씀이 중요하죠. 말씀을 이루는 것이니까요. 33절이에요.
33a. 이에 천부장이 가까이 가서 바울을 잡아 두 쇠사슬로 결박하라 명하고
그래서 로마 군대가 와서 집단폭행이 일단 멈췄어요. 병사들에 의해서 문자 그대로 쇠사슬에 결박되는 거에요. 양쪽에 군사들이 한 명씩 이렇게 팔을 끼고 묶었어요. 왜 천부장이 이렇게 하냐면 이전에 4천명의 자객을 거느리고 난을 일으킨 그 애굽인으로 착각을 했어요. 그래서 난폭하고 거친 사람을 다룰 때 사용하는 쇠사슬로 두 명이 지켜서, 아주 정식 죄인으로 결박을 했어요. 이 정식 죄인이 중요해요. 정식 죄인! 이것조차 하나님의 세팅입니다. 예루살렘에 오는 길에 성령께서 각 성에서 바울에게 말씀하셨어요. '결박과 환난이 너를 기다린다' 가이사랴 빌립 집에서 만난 아가보는 바울의 결박을 행위로 예언 했어요. 늘 들었기 때문에 말씀대로 결박을 당하니까 이게 요동하지 않는 비결이 되는 거지요. 이 말씀이 중요해요.
33b-34절이에요. 천부장이 묶어 놓고는 사람들에게 물었어요.
33b. ... 그가 누구이며 그가 무슨 일을 하였느냐 물으니
34. 무리 가운데서 어떤 이는 이런말로, 어떤 이는 저런 말로 소리 치거늘 천부장이 소동으로 말미암아 진상을 알 수 없어 그를 영내로 데려가라 명하니라
여기 진상 나오죠. 바울은 지금 결박된 채 아무 말이 없어요.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처음부터 끝까지 말이 없습니다. 예수님 같죠. 그자 붙잡히고 욕먹고 잡히고 끌려나가고 매를 맞아요. 쇠살에 묶여도 저항하지 않아요. 말도 하지 않고 고난을 그냥 다 당해요. 그러니까 천부장 옆에 사람들을 보고 '그가 누구며, 무슨 죄를 지었냐?'
지난 주 첫 목장을 하셨을텐데 처음 만나면 우리도 항상 천부장처럼 묻죠. '너는 누구며, 무슨 죄를 지어서 결박을 당하고 왔냐?'
자, 바울이 로마로 갈 때 가장 안전한 방법이 내가 죄인임을 알고, 죄인된 신분으로 결박당해서 가는 것이 억울한 일이 아니잖아요. 바울은 늘 '내가 가야 하리라! 로마를 가야 하리라! 복음을 전해야 하리라!'그것처럼 내가 죄인임을 알고 죄인된 신분으로 결박당해 가는 것이 천국을 가는 가장 지름길이라는 것이 성령의 실상이에요. 어떤 결박을 당해도 그냥 그것이 내가 죄인임을 알고 결박을 당하면 천국 가는 지름길이라고요. 그런데 죄인임을 모르니까 사람들은 죄를 모르니 저마다 이말 저말로 소리를 질러요. 그냥 이게 죄를 모르는 사람들끼리 모여 있으면 집이고 뭐고 다 복잡해요. 부부간에도 둘이 사는데 100명이 사는 것 같아요. 자기 죄가 없으니까. 밤낮 랄랄라랄!!! 그러니가 천부장도 진상을 즉, 실상을 알 수가 없는 거예요. 진상이 도대체 뭐야? 그래서 우리 목장에서 이걸 맨날 우리가 심판관돼서 중재해 줘야 되잖아요. 이 사람은 이게 옳고 저 사람은 저게 옳고!
이 진상은요. 실상이고. 원어는 [아스팔레스]인데요. 도로 포장하는 그 아스팔트 아시죠? 옜날에 아스팔트 같은 역할을 한 물질이 역청인데, 노아 방주에서도 역청으로 칠했어요. 그리고 우리들 교회 이 강대상도 노아 방주를 의미해서 만든 거예요. 그런데 재료가 떨어지지 않게 단단히 붙이는 성질인데요. 그래서 [아스팔레스]는 떨어지지 않는 것, 틀림이 없는 것! 그래서 확실한 것!을 의미해요. 한마디로 가짜가 아니라 진짜! 허상이 아니라 진상! 가상이 아니라 실상!을 뜻하죠. 그런데 이 세상의 실상은 다 가짜고, 허상이고, 가상이라는 거예요. 근데 이 세상에서 떨어지지 않는 게 없어요. 돈도 권력도 명예도 건강도 사랑도 시간이 흐르면 결국 다 떨어져요. 근데 떨어지지 않는 것 하나가 있다고 성경이 말하는데 그것이 사랑이라 그러죠. 고린도전서 13장 8절에 사랑은 언제까지나 떨어지지 아니하되! 또 베드로전서 1장 24-25절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그러니까 성경에 기록된 모든 말씀은 우리를 사랑해서 주신 말씀이고요. 책망도 경고도 모두 그 본뜻은 사랑이에요. 바울이 당한 결박과 환란을 미리 들을 때 얼마나 듣기 싫은 말이에요. 얼마나 흉한 말이에요. 그런데 성령의 말씀인 줄을 알고 미리 들어두니ᄁᆞ 진짜 결박을 당했을 때 요동치 않는 거지요. 온 성이 요동하고 있는데 결박을 당한 바울만 전혀 요동하지 않고 있어요. 지금 매 맞고 쇠사슬에 끌려서 죽도록 맞았어요. 아주 죽기 진전까지 맞았어요.
성령의 실상은 미리 말씀으로 들어두는 것이에요. 바울처럼 이렇게 흔들리지 않는 비결입니다. 그러니 목장에서도 이렇게 늘 장차 받을 환란을 얘기해 주면 다 듣기 싫어해요. 그거에 대한 매맞음과 욕과 이걸 당해야 되는거에요. 목자가 당해야 되요. 여러분이 죄인이 아니라서 못 당하는 거예요. 35-36절이에요.
35. 바울이 층대에 이를 때에 무리의 폭행으로 말미암아 군사들에게 들려가니
36. 이는 백성의 무리가 그를 없이하자고 외치며 따라 감이러라
그렇게 해서 가는데도 안토니아 요새까지 가기 전에 이 바울을 죽여야 되니까 '죽여라 죽여라! 없이 하자~'이건 예수님을 죽여라! 하는 단어와 같아요. 누가는 이 동일한 단어를 쓰면서 이제 스데반을 넘어 바울과 예수님을 연결시키고 있어요. 근데 스데반이 결박당할 때 천국을 바라봤다고 했잖아요. 제가 작년 미국 산호세에 다녀왔을 때 거기 악마이 감옥 알카트라츠가 있다고 했어요. 거기가 왜 악마의 감옥인가 하면 물리적으로도 조류가 너무세고, 온도가 낮아서 결코 살아서 탈출할 수 없는 곳이기 때문에 어떤 희망도 없어서 다들 자살 시도 한다는 거에요. 거기가 그래서 악마의 감옥이에요. 중요한 것은 갇혔더라도 내가 무엇을 바라보느냐 이게 중요한데 스데반은 자신의 육신은 돌로 침을 당하고, 찢기고, 부서졌어도 그 눈이 천국을 바라봤죠. 그리고 그 스데반을 죽인 바울은 똑같은 자리에서... 좀 기가 막혔을 거 같아요. 똑같은 자리에서(성전 바깥 뜰에서, 이 죄의 자리에서) 스데반이 바라보는 것을 함께 바라보며 자신의 죄를 위해 죽으신 예수를 바라봅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모든 환경이 결박당한 것 같고, 무너지고 부서져도 실상은 나를 자유케하며 예수께로 인도하는 성령의 실상이기에 '실상은 너를 가두려고 하는게 아니야' 그야말로 요동치 않아요. 저는 도리어 드디어 스데반에 대한 마음의 짐을 덜 수 있다고 생각했을 거 같아요. 나의 무거운 죄 짐을 모두 벗고 하는 말. 예수 인도하셨네! 그 찬양이 저절로 나왔을 거 같아요. 복음은 장차 받을 환란이라고 했어요. 아무리 놀랄 만한 사건이라도 주님께서 사랑의 주님께서 미리 말씀해 주셨기에 그 말씀대로 이루어지까 걱정하지 않을 수가 있는 거예요. 왜? 주님이 떨어지지 않도록 붙들고 계시기 때문에 담대하게 통과하는 거죠. 따라서 미리 말씀을 들어 놓는 것이 너무 중요해요. 이건 예방주사예요. 그렇지만 말씀을 들을 때는 받아들이기가 너무 어려워요.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 결국 하나도 떨어짐 없이 다 이루어졌어요. 저는 큐티를 수십년 했는데 요즘 그 18년 전에 한 여호수아 설교를 다시 들어볼 때 요새 설교랑 다른 게 하나도 없어요. 말씀이기 때문에. 그러니까 나도 놀라는 거예요. 사람은 일관성이 없지만 말씀은 일관성이 있잖아요. 그래서 사람을 믿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믿어야 되고! 말씀의 공동체에 속해야 되는 거죠. 그래서 새해 첫 목장을 하셨을텐데 어떠셨어요?
_다른 목원들의 나눔을 듣고 그 사람에 대해서 프레임을 씌우진 않았어요?
_나눔을 들을수록 그 목원에 대한 고정관념이 혹시 더 심해지지는 않았습니까?
_여러분 이런 나의 고정관념과 프레임은 누군가를 충동하는 걸 넘어서 그 사람 (그 영혼)을 망가뜨릴 수 있다는 걸 기억해야 합니다.
[적용]
_죄인으로 결박당해 가는 것이 천국을 가는 지름길이라는 것이 믿어집니까?
_내 실상이 형편없음이 인정되나요?
_올해 영육간에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일은 무엇입니까?
우리 너무 어려운 얘기 했는데 '올해 이루어지기 바라는 일이 무엇이에요?' 그러면 누구나 답할 수 있잖아요. '올해 무슨 일이 이루어졌으면 좋겠어요?'이렇게 쉬운 질문도 하세요. 그러니까 곳곳에 이렇게 질문을 다 잘하셔야 해요. 그러면 입 다물 사람이 아무도 없어요. ^^
[나눔] 가족 간 싸움이 그 실상이 성령의 실상으로 변한 나눔
가족간 싸움이 커지자 아내가 말리다 거실로 가서 '하나님께 우리가 잘못했다'고 회개 기도를 하고... 다들 갑자기 엄마가 회개기도를 하니까 잠잠해 졌습니다. 이 요란 속에 바울 하나 잠잠하고 있어요. 한 사람이 중심 잡으니까 온 인류가 지금 복음을 듣게 된 것처럼.
자 우리가 유대인들처럼 이렇게 소동하며 싸웠지만 한 사람 엄마가 회개하니까 잠잠해졌어요. 아빠도 말씀으로 회개하며 자기 죄를 보니까 이 땅의 실상으로는 콩가루 같이 싸웠지만 성령의 실상으로 변한 줄 믿습니다.
말씀 맺어요. 성령의 실상은, 기다려야 해요. 반드시 드러나게 하십니다. 바울의 믿음이 드러나게 하시고 장로들의 모든 것, 유대인들. 이 실상이 다 드러나요. 근데 이거를 피해의식에 사로잡히면 볼 수가 없어요. 그래서 우리는 늘 이 모든 걸 미리 들은 말씀으로 나의 모든 결박을 해석해야 성령의 실상이 드러나는 줄 믿습니다! 찬양하고 기도할게요.
[기도제목]
원영목자님
1. 조금의 변화에도 내 경험과 고정관념으로 프레임을 정해놓고 있어서 충동 당할 때가 많은데 그 때에 순종하며 알지 못하는 기쁨으로 인도하시는 것을 기대하며 갈 수 있도록
2. 내 사연에 갇혀 생각함이러라의 피해의식으로 하나님이 뜻하시는 구원의 실상을 깨닫지 못하는 모습이 있는데 꼭 회개 시켜주시길
3. 2022년 결박당하는 자리가 늘어났는데 죄인의 자리에서 순종할 수 있도록
4. 미리 들어둔 말씀으로 한주간 잘 해석하며 주님과 동행할 수 있도록
5. 남동생이 성령의 실상을 깨달을 때까지 잘 기다려줄 수 있도록
6. 아르바이트 구하고 있는데 성령의 실상을 깨달을 때까지 잘 해석하고 기다릴 수 있도록
7. 코로나로부터 지켜주시고, 영혼육의 건강 지켜주시길
8. 우리 목장, 마을 식구들 성령의 실상을 깨닫는 은혜를 누리는 한 주 되게 기도해주세요~
지혜
1. 허상을 쫓는 마음과 과거 놓친 기회들에대한 자괴감을 멈춰주시고, 피해의식은 말씀으로 덮어주시길.
2. 매어주신 자리에서 내 시각의 프레임 내려놓고, 나의 죄 보며 회개하는 매일이 되었으면.
3. 말씀안에서 사는 삶의 기쁨을 알게 해주셔서 가족과 목장에 지혜롭게 나누고, 그 기쁨으로 작업을 할 수 있기를.
4. 절제하여 영육이(특히 위-_-) 건강하길 기도부탁드려요.
지현
1. 방학 영육간에 건강하게 보내길
2. 집 안정적으로 지켜주시길
3. 피해의식에서 벗어나서 가족구원을 위해 섬기기
4. 신교제, 신결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