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1.16. 성령의 실상 (행21:27-36) 김양재 담임목사님
한 성도님 편지
예수님 믿는다 하면서 아이는 우상숭배 할 정도로 사랑하지만 남편과 아내는 왜 이기적이고 사랑 하지 못하는지 이해가 안간다.
어떤 메이저리그 어느 선수는 마이너리그 때 일년간 150만원을 4년간 받아가며 고생하면서도 여러 번 부인과 피자 쪼개가며 행복하게 살았다 하는데, 우리들교회 성도님들은 그렇게 간증하면서 어떻게 자기 남편과 부인을 무시하며 외도하고 존중 못하는지 이해가 안간다. 왜 기독교인들이 세상 사람들에게 손가락 받는지 조금 이해간다.
오늘 설교로 답을 해달라 하셨다. 답변이 되면 좋겠다. 정답부터 말하면 아직 인간의 100% 죄성을 몰라 그런 것 같다.
오늘 목자 임명식 있었다.
목장 하려면 성령의 열심으로도 육적으로도 영적으로도 실상을 파악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의 문제는 각각 수준이 다르다. 그래서 고통이 있다. 처방 하기도 받기도 힘들다.
바울의 복음은 맞지만 가는 곳마다 박해 받는다. 틀려서 박해 받는 것이 아니다. 34절에 천부장도 그들을 왜 때리는지 바울의 진상을 모른다고 한다. (진상=실상) 우리는 평생 실상 파악하다가 간다는 말이 과언이 아니다. 올해도 목장 하면서 상처받지 말고 그것이 실상이니 그러려니 하고 가야 한다.
오늘은 그래서 성령의 실상에 대해 생각해보겠다.
1. 그래서 기다려야 합니다. 반드시 드러나게 하십니다.
드러나게 하실 때 까지 기다려야 합니다.
27절
성전에 이방인의 뜰, 안뜰, 안토니아 요새가 있다. 오늘 바울이 이방인의 뜰에서 안토니아 요새로 끌려 가는 것이 오늘 본문이다.
이레가 차매 는 하나님의 시간을 기다려야 한다는 것이다.
7은 완전수다. 기다렸더니 충동질이 기다리고 있다. 팔복이다. 믿는 것은 세상에서 짠 하는 것이 아니라 전혀 알지 못했던 기쁨으로 인도하시는 것이다.
바울은 예루살렘 장로들의 제안에 따라 결례를 행했다. 그리고 비용 지불했다. 일주일간 두 번에 걸쳐 제사 드려야 했는데 사흘째 이레째 제사를 드려야 했다. 이렇게 서원이 완료된 시점에서 바울이 얼마나 유대인의 율법과 관습을 잘 지키는지 증명된 것 같다.
그러나 그 이레가 찼을 때 그 시점에 불청객이 성전에 들어왔다. 오순절을 지키기 위해 아시아의 주도인 에베소에서 온 유대인들이었다. 이 사람들도 절기 지키려고 성전에 들어왔는데 성전에서 결례지키려는 바울을 보고 눈이 뒤집혔다. 이들은 행 19:9에 나오는 에베소의 유대인들이었을 것이다. 그들이 회당에서 바울이 전하는 복음을 듣고 마음이 굳어 순종하지 않고 무리 앞에서 이 도를 비방했다. 결과적으로 회당이 쪼개져 회당에 다니던 유대인들과 이방인들 일부가 두란노 서원으로 나갔다.
그들 입장에서 바울은 자기들의 공동체를 깨트린 원수이다. 그래서 20:3 에 보면 바울이 예루살렘으로 오순절 지키고자 오고자 했을 때 배 안에서 바울을 죽이고자 했다. 그런 음모를 알고 바울이 배 안타고 마게도냐로 왔다. 바울과 그렇게 헤어진 그들이 절기 지키려고 왔는데 성전에 모인 그 많은 사람들 중 바울이 보인 것이다. 그러니 분이 확 올라왔다. 성난 그들은 모든 무리를 미완료 동사로 계속적으로 충동질한다. 이 악한 소문을 계속 반복적으로 전하면 좋은 사람도 나쁜 사람이 된다.
충동하다는 홍수가 범람해서 물이 걷잡을 수 없이 넘쳐나는 묘사하는 단어다. 무어라 하는가?
28-29절
생각 했으나 사실이 아니었다. 율법주의자들인 에베소 유대인들은 율법타령을 한다. 이 사람들이 죄목 밝히고 결박한 것이 아니라 결박부터 했다. 율법을 어겼다. 그러면서 큰 범죄를 목격한 사람처럼 자기들을 도우라고 한다. 자기가 붙들고 있는 이 사람은 유대인의 율법과 성전을 비방하는 가르침을 퍼트리는 사람이라 한다. 그러면서 또 라고 시작하면서 결정적 죄목을 만들어낸다.
당시 이방인을 성전 안으로 들인다는 것은 어마어마한 죄목이었다. 그래서 이방인이 부지중에라도 성전 안뜰에 들어가 죽지 않도록 돌로 칸막이를 쌓아놓았다고 한다. 만약 성전 안뜰로 들어가면 로마 정부의 승인이 없어도 즉시 사형이다. 심지어 로마사람일지라도 즉각 사형할 수 있었다. 바울이 얼마나 대단한 누명을 썼는지 알 수 있다.
이들이 왜 그럴까? 한때 자기들과 같은 에베소 회당원이었다가 바울을 따라 두란노 서원으로 간 드로비모가 바울과 함께 헌금을 가져왔다. 예루살렘까지 온 것을 보니 더 화가 난 것 같다. 분명히 예루살렘 시내에서 드로비모가 바울과 있었다고 했고 성전에서는 바울만 봤다. 그런데 드로비모를 성전에 들여왔다고 확신하며 가짜 뉴스를 퍼트렸다.
이 말이 성전에 모인 유대인들의 귀에 꽂혔다. 바울에게 가지고 가지고 있는 프레임과 딱 맞는 증언이다. 그들도 바울이 유대인의 정체성을 무시하고 율법을 따르지 말라고 가르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프레임과 달리 바울이 모세의 결례를 너무 잘 지키니 할말이 없다가 그럼 그렇지 하며 바울 주변으로 몰려들어 분노했다. 문제는 바울이 이런 일을 행한 적이 없다는 것이다.
생각함일러라 처럼 우리도 그 사람이 아마 그럴거야, 내가 그렇게 생각한게 아니라 어디서 들었어 하는 책임 없는 작은 한 마디가 홍수처럼 범람하여 온 도시를 삼키고 한 인생을 삼키고 무리를 충동질해서 한 인생 한 생명을 빼앗을 수 있다.
장로들의 작전이 실패하고 바울이라는 존재가 편견 가득한 유대인 군중앞에 드러났다. 장로들이사람 눈치 보며 감추려 했던 바울의 모습과 사역이 유대인의 고정관념과 너무나 다르다는 실상을 하나님이 드러내게 하셨다. 하나님의 시간에, 예상하지 못했던 최선의 카이로스에 성령께서 드러나게 하신다. 이 장로들 때문에, 순종했기 때문에 장로들의 실상과 바울을 통한 하나님의 실상이 드러나게 하셨다. 장로들의 말을 안 들었다면 도리어 성전을 일찌감치 떠나서 이런 일을 안 겪었을 것이다. 장로들의 말에 순종해서 성령의 실상 하나님의 실상이 드러나게 하신 것이다. 하나님을 나타내는 것이 가장 큰 응답이다. 성령의 실상을 나타내는 것이 가장 큰 응답이다. 말씀대로 한다고 좋은 일만 있는 것이 아니다.
적용) 내가 기다리며 공동체의 조언에 따라 적용했는데, 왜 이런 일이 왔냐며 불평하지는 않습니까? 그래서 충동질했습니까?
말씀대로 장로들에게 순종했더니 매 맞는 일이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그 장로들의 말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옳지 않다 생각하는 것이 아니다. 구원 때문에 적용하는 것이다.
2. 피해의식에 사로잡히면 (실상을) 볼 수 없습니다.
30-31절
잘못된 뉴스가 바울을 죽이려 한다. 선동 당한 백성들이 소동한다. 온 유대인들이 호기심이 아니라 바울을 향한 비난에 100프로 동의하며 미움과 분노가 활활 타올랐다. 군중심리가 무섭다. 개인보다 군중속에 들어가면 아무리 똑똑해도 맥을 못춘다. 군중에 들어가면 절대 반대 못한다. 군중에 들어간 개인은 바보같다.
최인철 교수의 프레임이라는 책에 이런 글이 나온다.
'우리 눈에는 보고 싶은 것만 보인다. 그래서 심리학자들은 자기를 가리켜 독재정권이라고 부른다. 국민들이 읽고 말하고 보는 것 까지 간섭하고 통제하는 독재정권처럼, 자기라는 것이 우리가 세상을 보는 방식을 일방적으로 결정하기 때문이다. 자기 중심성에서 벗어나는 것이 프레임을 바꾸는 길이다.'
자기 중심성의 반대는 이타적인 것이다. 근데 사람은 이타적일 수 없으니 이것이 어떻게 예수 없이 되겠는가? 성품으로 가면 오래 못간다. 예수가 없는 자신은 독재정권이라는 말이 참 와닿는다.
그들이 달려왔다고 한다. 이는 성경에서 단 한번 쓰인 단어로 아주 강한 단어이다. 그냥 달려온 것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하나가 되어 함께 돌진해 온 것을 말한다. 한 무리로 똘똘 뭉쳐 돌진해와서는 바울을 잡아 성전 안뜰을 넘어 밖으로 끌고 나갔다. 그리고 문을 닫았다. 바울이 범죄자라서 성전에서 피를 묻히면 안되었기 때문이다. 끌고 나가서 죽이려 한 것이다. 전통과 신념을 향한 무서운 열심이 그대로 드러나는 대목이다. 그들은 성전의 기물이 훨씬 중요하고 사람의 생명이 중요하지 않았다. 한 영혼, 한 사람이 중요한데 끌려가는 바울 앞에서 성전 문을 잠그면 되겠는가? 그런데 닫았다.
사실 이 결벽증 같은 배타성은 피해의식에서 비롯되었다. 예루살렘 멸망이나 바벨론 포로도 회개하고 주께 돌아오라고 주신 사건인데 이스라엘 백성이 깨닫지 못했다. 죄를 보지 못하니 성전이 왜 무너지고 왜 바벨론의 포로로 가는지 인정할 수 없다. 어찌 이런 일이 내게 일어났는가만 외치며 그때부터 지금까지 자손 대대로 자기가 받은 피해만 말한다. 자기는 아무 잘못도 없는데 피해 받았다고 피해의식에 사로잡혀있다. 그러니 유대인이 포로로 잡혀갔던 바벨론을 생각하면 이가 갈린다. 자신은 늘 피해자이고 이방인은 존재 자채로 가해자이다. 그런데 그 가해자가 자기와 똑같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길이 있다고 가르치니 그걸 전하는 바울을 용납할 수 없다. 그래서 성전문을 닫듯 민족으로부터 쫓아내는 것이다. 자기들이 역경 속에서 잃어버리지 않고 힘들게 지켜온 전통을 하나도 지키지 않아도 똑같이 하나님 백성이 된다 하니 살려둘 수가 없다. 우리들의 열심을 우습게 여긴다 한 것이다.
피해의식에 사로잡히니 자기 죄가 보이지 않는다. 70년 포로가 되면 무엇하겠는가, 안보이는 사람이 너무 많다. 자기 죄를 못보니 회개가 안된다. 그러니 하나님이 뜻하시는 구원의 실상을 못본다. 성경의 하나님은 아무리 바벨론 포로로 보냈어도 그것이 다 사랑이다. 그런데 포로로 간 것만 억울하다. 해석이 안되니 피해의식의 피를 흘리고 있다. 포로로 간 것은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옆에서 아무리 이야기해도 듣지 않는다. 들어도 외면하고 무시한다. 어떻게 나에게 그럴 수 있는가 한다. 말씀을 들어도 말씀보다는 자기 사연, 자기 피해가 더 크다. 이 문제는 해석해야 해결이 되는데 입만 열면 자기 사역 자기 피해를 계속 이야기하게 되는 것이다. 이런 진영논리 지역감정 피해의식은 나라님도 못 고친다.
이렇게 피해의식에 쩔어서 집단으로 바울 한 사람을 잡아죽이려던 그들이 정작 자기보다 힘센 존재가 나타나니 하던 일을 멈춘다.
31-32절
천부장과 군인들을 보고 그쳤다. 천부장은 로마장군의 계급으로 천명의 군사를 통솔하는 장교다. 당시 그 휘하에는 6명의 백부장이 있고, 그 밑에는 각각 180명가량의 군사가 있었다. 천부장은 여섯명 백부장을 지휘할 권한을 가졌다. 백부장들을 거느렸다 했으니 두 부대 이상 되는 것이다. 로마 수비대는 성전이 내려다보이는 성전 북서쪽의 안토니아 요새에 머물러 있다. 절기에 일어날지도 모르는 폭동을 막기 위해 이방인의 뜰이 보이는 곳에 주둔하며 감시했다. 그래서 즉시 천부장이 출동했다.
천부장이 자기 휘하의 병사들을 끌고 도착하니 바울을 그렇게 잡아죽이려던 유대인들이 겁 먹고 폭행을 그쳤다. 이 땅에 그렇게 믿는 사람들을 핍박해도 공권력이 나서면 멈춘다. 피해의식에 갇혀있으니 약자에게는 무서운 화를 쏟아내며 괴롭히고, 강자에게는 눈치보고 겁먹으며 아무것도 못한다. 그러니 그 피해의식이 더 굳어진다.
피해의식을 벗어나는 일은 무엇인가? 자기 죄를 보는 회개 뿐이다. 그 누구도 피해의식을 해결해줄 수 없다. 그 때 뿐이다. 우리가 자꾸 속는다. 자기가 주님 만나 회개하기 전에는 해결해 줄 길이 없다. 자기 죄를 회개할 때 만 자기가 얼마나 큰 가해자였는지 깨닫게 된다. 그런데 조상대대로 내려온 엄마가, 아빠가 나를 괴롭혔다 는 것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우리가 회개할때야 비로소 피해의식에서 자유롭게 된다.
피해의식이라는 인간의 실상은 사실은 허상인데 다들 실상처럼 착각하고 살아오고 있다. 끊어지기가 너무 어렵다. 내가 가해자였다는 고백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나를 살려주셨다는 실상이 그 은혜의 실상이 보이는 것, 이것이 바로 성령의 실상이다. 자기를 보지 않으면 아무것도 해석되지 않는다.
바울이 왜 전도해야 했는지 이해가 되는가? 모든 문제가 해결되면 복음 전하는 것 밖에 길이 없다. 말로 해서 되지 않는다. 돈 준다고 해결되지 않는다. 복음이 들어가야 한다.
성전 문이 굳게 닫히고 바울이 끌려간 곳은 바로 성전 밖이다. 그 당시 기득권과 선민의식으로 가득 찬 사회에서 이방인은 결코 들어가지 못하는 그 성전이 아닌, 성전바깥이다.
이 곳이 어떤 곳인가? 스데반이 유대인과 바울에 의해 돌로 쳐죽임 당한 장소이다. 성령의 실상은 성전 안에서 옳고 그름을 지적하고 분열로 나누는 성전 안의 문은 닫히고 내가 그토록 들어가고 싶은 그 문은 억지로 닫혀 끌려나와 내가 죄인으로 죄인됨을 깨닫는 자리이다. 그 성전 바깥으로 나를 데려가는 것이다. 이럴 때 나는 억울하다 죄 없다 왜 이런 환경을 당해야 하나, 나는 결박 당할 수 없다 가 아니라 내가 얼마나 죄인인지, 내가 이렇게 결박 당해 죽어도 아무 할 말이 없다 하는 자리까지 내려가는 것이다.
바울은 어떻게 그렇게 내려갈 수 있었나? 바울이 스데반 생각하면서 스데반과 똑같은 고난을 받고 있다 생각하니 그들을 도저히 미워할 수가 없었을 것 같다. 이것이 자기 죄를 보는 것이다. 이것이 성령의 실상이다.
자기가 장로들의 말에 순종했지만 막상 잡혀가게 되니 장로들도, 어느 누구도 바울을 위해 바울이 잘못했다고 목소리를 내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 일주일 이레를 같이 하며 서원했던 네명도 없다. 그들은 목숨걸고 막지 않았거나 감히 막을 수 없는 상황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때 바울과 함께 하면 죽는다. 그러니 누가 손가락질 할 수 있겠는가? 그런데 그 때 아이러니하게 폭도들은 자기를 도우라고 한다. 폭도들에게는 사람들이 모인다.
국내 카이스트연구진이 코로나 가짜 뉴스가 언제 가장 잘 확산하는지 분석했다. 팩트체크가 끝난 가짜 뉴스 12개를 수집한 후 응답자의 감정이 불안인지 분노인지 체크했다. 그 결과, 불안을 느끼는 사람은 정보 검색에 집중하는 반면, 분노를 느끼는 사람은 행동한다고 한다. 분노하는 사람들은 행동하는 경향이 강해지고 헛소문을 과학적으로 믿을만하다 생각하며 더 잘 믿기에 가짜뉴스를 공유하는데 더 적극적이라고 한다. 그래서 분노한 사람들이 가짜뉴스, 거짓 소문을 잘 퍼트린다는 연구결과가 나온다. 이렇듯 가짜뉴스는 분노를 먹고 자란다. 사람들의 분노를 만들어 내지만 그 끝에는 결국 권력과 돈이 있다. 우리가 이 가짜뉴스를 무분별하게 받아들이면 나 또한 그 분노의 희생양이 된다.
그러나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긴 바울은 어떤 것도 묵묵히 받아들인다. 바로 이것이 구속사이다. 이런 바울의 침묵들을 드러나게 하셨다. 이 고난을 통해 하나님의 실상과 성령의 실상이 드러나게 하신 것이다.
장로들 이야기를 안 들었으면 바울 속에 계신 하나님이 얼마나 대단한지 나타날 기회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바울의 수준이 높으니 이 역할을 하게 하신다. 우리는 겉으로 나타나는 것을 보며 장로들 말 들었더니 잡혀간다 한다. 이것은 너무 저급한 수준이다. 우리도 실상이 드러나면 자유해지는 것이 있다. 목장에서 감추고 싶다가도 누군가를 통해 드러나면 도리어 시원해지는 것이 많다. 영육간에 실상은 드러나는 것이 축복이다.
그런데 성전의 문이 굳게 닫힌다는 표현이 사도행전의 성전에 대한 마지막 기록이다. 이후 10년쯤 후에 예루살렘은 로마에 의해 철저히 불타게 되고 성전도 불탄다. 이방과 유대인을 철저히 갈라놓았던 그 화려했던 성전은 로마의 장군에 의해 철저히 무너지게 된다.
스데반도 성전의 의미는 그런 것이 아니라고, 예수를 믿어야 구원을 얻는다는 구속사로 설교하다 돌에 맞아 순교했다. 바울도 성전 우상주의 때문에 죽음에 처해있다. 유대인 중에서 그리스도를 믿는 수 만명이 바울을 대적한다. 이 사람들이 예수를 믿는데도,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했어도 유대인의 율법도 지켜야 한다고 한다. 그래서 숫양 숫염소 제사를 다 같이 지내면서 신인 신인 협력설로 인간이 무얼 해야하는 것 처럼, 율법을 지켜야 하는 것 처럼 믿는다고 한다.
우리나라도 예수가 들어온 지 200년 밖에 안된다. 우리가 예수믿으면서도 미신의 나라라 지키는 것이 너무 많다. 믿으면서도 이삿날을 택일하고, 사주단자 보내고 점 보고 보름에 귀신 쫓는다고 호두 까먹고 시험날은 미역국 안먹어야 하고....이런 것들이 우리나라 문화인줄 알고 죄책감 없이 따라하는 것이 있다. 사람은 율법을 완전하게 지킬 수 없다. 그러니 율법으로 구원 받을 수가 없다. 인간의 실상은 착한 것이 아니라 감추는 것이다. 인간은 100% 죄인인데 자꾸 율법을 지키면 선해진다 착각한다. 그래서 이 악함을 감추다가 폭발한다. 선악으로 감춰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 믿어야 구원이라고 가르치는 것이 지금도 가시밭길인데 바울시대는 더했을 것이다.
예수 믿으면 구원 얻는다는 것을 가장 대적하는 이론이 행위이론이다. 착하면, 잘하면, 안믿는 사람사람 나은 것이 무엇이냐 하는 행위로 가는 것이 아닌데 유대인들이 행위로 바울을 죽이려 한다. 비본질 때문에 본질이 훼손당하고 있기 때문에 이 성전은 무너졌어야 한다.
우리도 성전이다. 성전이 금그릇으로 채워지고 있으면 영이 들어올 수 없다. 무너져야 영이 세워진다. 내가 열심히 해서 공부 잘하고 돈도 잘 벌면 영이 들어갈 수가 없다. 똑같다. 예루살렘 성전이 너무 화려하다. 그것만 보면 복 받을 것만 같다. 이 세상이 변하지 않는 것은 교회의 실상이 세상과 똑같이 때문이다.
적용) 남에게 피해의식이 있다는 지적을 받을 때 발끈합니까, 인정합니까? 약자라고 함부로 하는 사람, 강자라고 무서워하는 사람은 누구인가요? 나는 불안합니까, 분노합니까?
아이들도 부모 중 누가 권력 있는 줄 알아서 힘센 편에 붙는다. 자녀 교육에 치명적이다. 약자에게 함부로 하고 강자에게 아부하라고 어려서부터 가르치는 것이다. 아내의 머리가 남편이고 남편의 머리가 그리스도라는 원칙을 어기고 역할에 순종하지 않으면 그 어떤 교육도 성공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부부간에 남편보다 능력있는 부인이 많다. 회사에서 상사보다 능력있는 부하가 많다. 그러나 그 사람이 상사를 우습게 여긴다. 우리는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질서에 순종하셔서 세례요한에게 세례 받으시는 것부터 하셨고 십자가로 결론이 났다. 돈을 아무리 들여서 이쁘게 교육 해도 기본적인 것을 안 하면 무서운 아이들을, 괴물들을 키우게 되어 있다.
3. 미리 들은 말씀으로 결박을 해석하는 것입니다.
33절
바울은 문자 그대로 병사들에게 양쪽으로 쇠사슬로 묶였다. 이것은 이 전에 4천명의 자객을 거느리고 난을 일으킨 애굽인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사람이 다시 온 줄 알았을 것이다. 난폭하고 거친 사람을 다룰 때 사용하는 쇠사슬로 완전히 정식 죄인으로 결박 당했다. 이것이 하나님의 세팅이다. 정식 죄인이 된 것이 축복이다. 로마 군대에 의해 정식 죄인들로 묶였기에 유대인들이 어떻게 할 수가 없다. 결국 로마로 가게 된다.
예루살렘에 오는 길에 성령께서 각 성에서 바울에게 미리 말씀하셨다. 결박과 환란이 기다리고 있다 하셨다. 가이사랴 빌립 집에서 만난 아가보 선지자는 바울의 결박을 행위로 예언했다. 말씀대로 바울이 결박당했다. 말씀대로 이루어지니 놀라지 않는다.
33-34절
여기에서도 바울은 아무 말이 없다. 바울은 그저 붙잡히고 욕먹고 잡히고 매맞고 쇠사슬에 매이고 저항도 안하고 끝까지 묵묵히 당한다. 그런데 천부장이 바울에게 묻지 않고 옆 사람들에게 묻는다. 그가 누구이며 무슨 죄를 지었냐고 했다.
지난 주 첫 목장 했을텐데, 처음 만날 때 천부장처럼 묻는다. 너는 누구며 무슨 죄를 지어 결박당했냐고 물어본다.
바울이 로마로 갈 때 가장 안전한 방법은 정식 죄인으로 묶여가는 것이다. 죄인된 신분으로 결박당하는 것이 억울한 것이 아니라 어마어마한 특혜이다. 이것의 영적 원리는 내가 죄인임을 알고 죄인 된 신분으로 결박 당하는 것이 천국으로 가는 가장 지름길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성령의 실상이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교회를 다녀도 죄를 모른다. 죄를 모르는 사람들은 저마다 소리를 지르고 있다. 천부장이 진상을 부린다. 알 수 없다. 진상들이 모여있으니 진상을 알 수 없다.
죄 없는 사람들은 늘 소리를 지른다. 부부간에도 100명이 모인 것 처럼 소리를 지르고, 목장에서도 회사에서도 소리를 지른다. 내가 결박당하는 것이 천국가는 지름길이라 이야기하면 바울처럼 조용하다. 진상이라는 단어는 개혁한글로는 실상이고 원어로는 아스팔레스, 아스팔트의 어원이다. 역청이다. 노아도 방주 만들때 겉을 역청으로 칠했다. 아스팔레스는 떨어지지 않는 것 틀림없는 것 확실한 것이다. 한마디로 가짜가 아니라 진짜, 허상이 아니라 진상, 가상이 아니라 실상을 뜻한다. 이 세상의 실상은 가짜 허상 가상이다. 이걸 분별해야 한다. 이 세상에서 떨어지지 않는 것이 없다. 돈 권력 명예 미모 건강도 다 떨어진다. 그러나 떨어지지 않는 하나가 있는데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사랑이다. 사랑은 언제까지나 떨어지지 아니하다고 한다. (고전13:8, 벧전 1:24-25)
성경에 기록된 모든 말씀은 우리를 사랑해서 주신 말씀이고 책망도 경고도 그 본뜻은 다 사랑이다. 목장에서 말씀으로 하면 그 어떤 것도 다 사랑인데, 내가 믿음의 분량이 안되니 날마다 왜 나에게 이런 소리 하냐 한다. 바울이 당할 환란과 결박을 미리 말씀해 주셨는데, 그게 얼마나 듣기 싫은 말이고 흉한 말인가? 그러나 자신이 죄인인 것을 아는 사람은 성령의 말씀인 줄 알고 미리 들어두니 진짜 결박당했을 때, 진짜 감옥갈 때, 진짜 어떤 일이 일어날 때 요동하지 않을 수 있다. 온 성이 흔들리고 요동하나 결박당한 바울만 전혀 흔들리지 않는다. 성령의 실상을 미리 말씀으로 들어두었기에 어떤 일에도 흔들리지 않는다. 말씀을 들었기에 흔들리지 않는 것이다. 이런 마음으로 목장에 결박 당해 붙어가시기를 축원한다.
35-36절
바울이 안토니오 요새까지 끌려가는데도 유대인들은 바울이 성전을 나가면 죽일 수 없으니 층대까지 이르러서도 쫒아가면서 죽이려고 폭행한다. 이는 예수님을 죽여라 할 때와 같은 단어이다. 그래서 군사들이 할 수 없이 들어서 간다. 미워하는 사람들은 이렇게 미워한다. 죽이라 한다. 예수님 죽이라는 것도 똑같은 단어이다. 누가는 그 동일한 단어를 쓰며 스데반을 넘어 바울과 예수님을 연결시키고 있다. 스데반도 결박 당해 죽을 때, 모두가 난리 치고 이를 갈며 죽였을 때 요동하지 않았다. 천국을 바라봤기 때문이었다.
작년 미국 다녀왔을 때 악마의 섬 감옥을 다녀왔다. 거기 한번 들어가면 나올 수 없다. 죄수들이 밖을 바라볼 때 희망이 없기 때문에 그 곳은 악마의 감옥이다. 조류가 너무 높고 온도가 너무 낮아 살아 탈출할 사람도, 탈출한 사람도 없다. 한번 들어오면 죽기까지 나갈 수 없으니 모두 감옥안에서 그렇게 자살 시도를 한다 한다. 그래서 악마의 섬이라 불리운다고 한다.
중요한 것은 갇혀있어도 무엇을 바라보는가 이다. 스데반은 자신의 육신은 돌로 침을 당하고 찢기고 부서졌어도 그 눈은 천국을 바라본다. 그리고 그 스데반을 죽인 바울이 똑같은 성전 바깥 뜰에서 죄의 자리에서 스데반이 바라보는 것을 함께 바라보며 자신의 죄를 위해 죽으신 예수님을 바라본다.
우리의 환경이 다 무너지고 부서지고 결박당한 것 같아도 실상은 나를 자유케 하며 예수께로 인도하는 성령의 실상이기에 요동치 않는다. 바벨론 포로로 갔다 온 것은 하나님의 한량없는 사랑인데 죽을 때 까지 용서하지 못한다.스데반이 돌로 침을 당한 곳에서 바울이 당한 것을 보며 도리어 스데반에 대한 마음을 덜었을 것 같다. 나의 무거운 짐 벗고 하는 말, 예수 인도하셨네 하는 마음이 저절로 되었을 것 같다.
복음은 장차 받을 환란이라 했다. 아무리 놀랄 사건이라 해도 주께서 미리 말씀해주셨기에 말씀대로 이루어지니 걱정하지 않고, 주님이 떨어지지 않도록 붙들고 계시기에 담대하게 통과하며, 주님의 계획대로 이루어지는 실상이기에 성령이 효과적으로 도와주신다. 그래서 미리 말씀 들어두는 것은 너무 중요하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때는 너무 어렵다. 늘 큐티를 하지만 제 입에서 나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나간 것이라 몇십년이 지나도 그것이 다 이루어졌다. 여호수아를 들어도 제가 같은 이야기를 한다. 그때 말이나 지금 말이 다른 것이 없다. 말씀대로 다 이루어지는 것이다. 말씀을 전했을 뿐인데 그 말씀대로 이루어져서 그것이 두렵다.
사람을 의지하면 그것이 소동이 된다. 그러니 우리는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새 첫 목장 했을 텐데, 다른 목원들의 나눔을 듣고 사람들에게 프레임 씌우지는 않았는가, 나눔 들으면서 역시 그렇지 하며 고정관념이 심해지지 않았는가? 이런 고정관념과 프레임은 누구를 충동하는 것을 넘어서 그 사람을 해할수도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이 많은 사람들 중에서 바울 하나만 조용히 요동하지 않고 있다. 회개하는 한 사람이 그 곳을 살린다.
적용) 죄인으로 결박 당해 가는 것이 천국을 가는 지름길이란 것이 믿어집니까? 내 실상이 형편없음이 인정되나요? 올해 영육 간에 이루어지기 바라는 일은 무엇입니까?
여기서 중요한 것은 죄인으로 가는 것이다. 자기가 일부러 간 것이 아니라 끌려간 것이다. 우리가 결박당하는 것은 다 끌려가는 것이다. 망하고 힘든 것들을 억지로 가니 천국으로 가는 지름길이 된다.
가족 간의 싸움의 실상이 성령의 실상으로 변한 나눔 - 딸 아이 생일로 일어난 사건
우리가 다 유대인처럼 소동한다. 우리 집의 소동이 더 유대인 소동 같다. 우리는 우리 집 싸움이 가장 무섭다. 그러나 한 사람 엄마가 회개하니 잠잠해졌다 한다. 아빠도 말씀으로 회개하며 자기 죄를 회개하니 이 땅의 실상으로는 콩가루같이 싸웠지만 성령의 실상으로 변하게 된 줄 믿는다.
서두에 편지 쓰신 분에게도 말하고 싶다.
우리는 싸워도 드러내는 것이다. 다른 곳에는 드러내지 않아서 그렇다.
아무리 좋은 사람도 예수가 없으면 나중에 어떻게 될 지 모른다. 답이 되셨기를 바란다.
[말씀맺음]
성령의 실상은 기다려야 한다. 반드시 드러나게 하신다. 좋은 것이 아니라 바울이 잡혀가면서 성령님의 실상이 드러나게 했다. 남들 당하기 힘든 것을 당할수록 성령의 실상이 더 드러난다. 이것이 너무 어렵다. 이것을 피해의식으로 사로잡히면 절대 실상을 볼 수 없다. 죽이라고, 내가 포로로 가냐 한다. 묵묵히 바라보고 기다려야 성령님의 실상을 드러낼 수 있다. 미리 들은 말씀으로 나의 들은 말씀을 해석하는 것이다. 성령의 실상이 드러나는 이런 놀라운 일이 목장과 집에서 일어나면 좋겠다.
[기도제목]
* 보련
1. 실업급여 받을 수 있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2. 주님이 저의 보호자 공급자 큰 도움 되시는 것 알고 미래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 아니라 자세하게 사명 위한 기도 할 수 있도록
3. 큐티 말씀에 하루 만 살고, 믿음 충만 한 하루 보내기
4. 직장을 기다리는 것에 두려운 마음이 있습니다, 나의 힘을 빼고 잘 인내 할 수 있도록.
* 교희
1. 일관성 있는 말씀과 하나님이 나의 안전기지가 되시도록
2. 파랑새 환상 깨고 나의 실상을 잘 보도록
3. 치료 잘 받고 영육 회복되도록
4. 동생 교회와 목장 정착
5. 돌아오는 주에 올 일과 불안 통과하도록
6. 팀장과 면담할 수 있는 용기와 말의 지혜 주시도록
* 크리스틴
1. 일에 대한 걱정 불안 집착을 내려놓을 수 있도록. 그래서 치료 받는데 오픈마인드가 될 수 있도록.
2. 리포트 고치고 마무리 하는데 지혜주시고 할 수 있는 마음 주셔서 자꾸 멈추고 미루지 않고 끝낼 수 있도록.
3. 감사할 수 있도록. 다시 빼앗아 가실까봐 두려운 마음이 드는 나의 교만하고 악한 마음을 용서하여 주시길.
4. 큐티하는 시간이 즐거울 수 있도록.
* 지향
1. 매일 말씀 보고 기도하며 하루만 잘 살 수 있도록
2. 아바 아버지를 신뢰하며 결혼예배 위해 기도하도록
3. 아직 나의 힘이 빠지지 않아서 뭔가를 해야할 것 같은데 성령의 열심으로 성령의 실상이 드러나는 시간을 잘 기다릴 수 있는 믿음 주시도록
4. 말씀 보며 내 죄와 우리 가정의 죄를 회개하며 갈 수 있도록
* 은진
1. 미래를 사서 걱정하지 않고, 하나님이 허락하신 하루를 말씀으로 잘살기
2. 심리학 심리상담학 공부 하고 싶은데 용두사미 마무리 되지 않도록 잘 알아보고 기도하며 시작해보기
3. 아빠와 오빠의 구원을 위해서
* 은선
1. 학위논문주제 구체화에 성령의 지혜와 기름부어주시기를
2. 아빠.외삼촌의 영혼 구원
3. 사직하기 전 임종돌봄 주 임상경로 연구 적용 잘 마무리하기를
* 은우
1. 나의 실상이 형편 없다는 것을 알고 말씀의 방주에 잘 타고 갈 수 있도록
2. 내일 강연 하는데 준비를 못했는데 끝까지 책임지고 준비하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