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1.9. 성령의 열심 (행21:19-26) 김양재 담임목사님
성령의 영접한 사람들에게는 사명이 주어진다.그 사명 감당케 하기 위해 우리를 영접하신 성령님께서 함께하시며 힘을 주신다. 내 열심으로가 아니라 성령의 열심으로 해야 하겠다.
1. 하나님의 자기 사역을 낱낱이 보고하는 열심입니다.
19절
바울이 하나님께서 하신 중요한 일들을 순서대로 빼놓지 않고 낱낱히 보고했다고 한다.
여기서 말하니 라고 번역한 단어는 상대방이 알지 못하고 상대방에게 감춰진 것을 말해서 알게 해주는 것이다. 우리가 믿는다 해도 정말 모르는 것이 많다.
예루살렘교회 장로들은 전체 교회를 대표하는 지도자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은 이방에게 복음 전해진 소식을 오랫동안 듣고 이방인 성도들이 주께 돌아와 새 사람이 된 것을 보고도 모르쇠 했다. 하나님께서 이방 가운데 구원 베푸셨다는 것을 인정하지도 않고 몰랐다. 하나님은 여전히 유대인 가운데만 일하신다고 굳게 믿으며 하나님을 자기들 머릿속에 담을 수 있다고 착각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다는 것을 말로만 외웠지, 하나님께서 태초부터 지금까지 이방까지 포함된 창조의 주이심을 실제로 믿지 않았다. 그러나 바울이 근데 자기도 그랬기에 예루살렘교회 장로를 탓할 수 없다. 그들이 어떤 마음으로 하나님이 이방가운데 하신 일에 대해 눈 감고있는지 너무 잘 알았다. 회개하는 겸손한 마음으로 그들에게 하나님께서 이방 가운데 어떻게 하셨는지 낱낱히 고해서 깨닫게 하려는 것이다.
겉으로는 자기가 한 일을 자랑하는 열심과 하나님이 하신 열심을 하나라도 더 알려주려는 열심이 겉으로는 똑같아 보일 수 있지만 결과는 완전히 다르다. 아무리 열변을 토해도 자기자랑은 상대의 마음을 불편하게 하고 눈살 찌푸리게 한다. 그래서 무시하거나 질투하거나 둘 중 하나의 결론을 가져온다. 그러니 자랑해서 좋을 것이 하나도 없다.
하지만 바울의 선교보고는 어떤 결과를 낳았는가?
20절
시제를 보면 바울 보고를 단번에 들었다. 그리고 계속해서 하나님께 영광 돌리기 시작했다.
바울의 상세한 보고를 듣기 전까지는 예루살렘 장로들이 의심의 눈으로 보았다. 이방 가운데 어찌 하나님이 일하실 수 있을까 하는 질문과 무시가 있었다. 그러나 바울의 보고를 듣고 그들의 태도가 변했다. 이방 가운데 행하신 하나님께 영광 돌리고 하나님이 하신 일임을 인정하고 하나님을 높였다.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들에게는 언제나 큰 유혹이 있다. 주님의 도우심으로 내가 했다는 것 이다. 내가 했다는 것이다. 이렇게 말하고 싶은 것이 우리의 솔직한 심정이다. 오늘날 기독교와 교회사에 대해 말하면서 그 기초를 두고 확장하는 것에 대해 사도바울이 차지하는 비율은 절대적이다. 그러나 바울은 내가 했다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이 하신 일을 증언하니 듣는 사람들도, 그 지도자들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 자기가 한 일은 아무리 말해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지 않는다. 하나님이 하신 일을 하나씩 깨달아서 그것을 상대방이 알아듣도록 낱낱히 말해주어야 한다. 그래야 상대방이 이 사람이 말하는 일이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구나 하고 인정하게 되어야 그 마음이 하나님께로 돌아서게 된다.
바울은 복음에 대한 겸손함이 있었다. 자신을 죽이려고 한 예루살렘교회와 유대 성도들을 향해서는 애정이 가득했다. 그리고 그동안 하나님이 하신 일에 대해서는 감사가 있었다. 이것이 성령의 열심이다. 그러나 인간의 열심은 자기를 자랑하고 높이는 열심이다. 성령의 열심은 하나님이 하신 일을 깨달아 고백하는 열심이다. 바울이 무작정 고생만 했다면 성령의 열심으로 하나님의 일을 증언할 수 없었다. 기껏해야 자기의 무용담만 말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바울이 매순간 말씀을 묵상하며 낱낱이 성령의 인도를 구하며 한걸음씩 걸어온 디테일을 살펴보고 있다. 그래서 많은 이방인이 돌아온 결과도, 죽은 사람을 살리는 기적도, 유대인에게 받은 위협과 박해도, 관원에게 받은 억울한 처벌이나 감금도, 그 어떤 사건도 내 열심으로 내가 주인공이 되어 겪기만 한 것이 아니다. 그 모든 좋은 일 나쁜 일에도 그 사건 속에서 하나님이 무어라 말씀하시는지 어떻게 인도하시는지 묻고 듣고 따랐다. 그러니 자신의 그 모든 섬김을 통해 사역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하신 일이 무엇인지를 알았다. 자기 고정관념을 버렸다. 좋은 것만 인도하시는 것이 아니라 나쁜 것도 인도하시는 것이 있다. 그래서 이 고난이 내가 애매하게 당하는 고난이 아니라 구원을 위해 십자가 지게 하시는 하나님의 일이구나 하고 늘 고백한 것이다. 이렇게 구속사적으로 해석한 삶의 고백이 쌓였기에 예루살렘 당회에서 하나님의 일을 증언하는 선교보고를 할 수 있었고 그 보고를 들은 장로들이 의심을 거두고 영광을 돌리게 되었다.
새롭게 목장이 개편되었다. 개편되면 첫 모임때 자기소개를 간증으로 한다.
그러나 매순간 말씀을 묵상하며 말씀으로 걸어온 한걸음이 없으면 간증이 무용담이 된다. 내가 바람폈다고 자신이 드러나는 나눔을 하면 옆에서 그건 죄도 아니라며 자신은 여자가 몇이나 되는지 모른다 한다. 한쪽에서 상사고난을 나누면 다른 쪽에서는 그건 말도 못한다고, 나는 다 이겨냈다고 한다. 목장이 마치 죄 배틀 고난 배틀의 현장이 되어 무언가 오픈 하는 것 같은데 하나님은 없고 오로지 죄도 고난도 자기만 있는 자기자랑이나 연민이 되기가 쉽다.그러나 성숙한 목장은 그것을 다 받아낸다.
또 내 속에 공동체에 대해 무시하는 마음이 있으면 낱낱히 나누는 것이 귀찮고 싫다. 빨리 끝나면 좋겠는데 나누라고 하면 사는 것이 다 그렇다고 한다.
이런 분들을 모시고 목장시작이 된다. 실망도 되지만 위로도 많이 받을 것이다. 그것이 목장이다.
한 부목자님은 예순중반이 넘으셨는데 목장나눔을 A4 20장 넘게 써서 올리신다. 한 주도 빠지지 않고 올리신다. 목장이 자신과 가정을 살렸다고 고백하며 목장 보고서를 낱낱히 써서 올리신다. 이런 목장보고서 읽을 때면 성령의 열심이 느껴진다. 힘든 지체들이 위로와 도전을 받으니 이것이 문서선교이다. 다 주인공들이다.
적용) 내 삶 속에 나타난 사건을 낱낱이 내 열심으로 자랑하나요, 성령의 열심으로 간증하나요?
성령의 열심은 나는 없는 것이다. 나와 세상은 간 곳 없고 하나님이 하신 일만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러니 내 죄가 안 보이는 사람은 성령의 열심으로 간증하기가 어렵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을 다 들어주어야 한다.
2. 세상 열심의 눈치를 보는 열심이 아닙니다.
20-21절
바울이 성령의 열심으로 보고한 내용을 듣고 예루살렘 장로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바울을 형제라고 불렀으나 딱 거기까지이다.
바울에게 이방선교의 보고를 낱낱히 듣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면 구원하신 이방인들을 생각해야 하는데, 그들의 관심은 유대인 중 믿는자 20명에 있었다. 그들은 율법에 열심을 가진 소위 열심당원들이었다.
예수님 12제자 중 시몬이 둘 있다. 시몬 베드로와 셀롯이라는 시몬이 있는데 이 셀롯 시몬이 열심당원이다. 유대교와 모세의 율법과 유대인의 전통과 자부심을 향한 무서운 열심이 있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비슷한 열심을 가진 사람들은 잘 뭉친다. 그래서 열성파들끼리 무리 지어 다녔다. 예루살렘 당원들도 이들을 수 만명으로 볼 정도로 압도적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열심 당원들이 바울에 대해 강한 고정관념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바울에 대한 프레임을 짜 놓았다. 이방에 있는 모든 유대인들에게 모세를 배반하라, 할례를 행하지 말고 유대인의 관습을 따르지 말라고 가르친다는 프레임들이었다. 가짜뉴스다. 열심당원들 눈에 바울은 배신자요 매국노였다.
그것이 한편으로는 맞는 것이, 예수님께서 오셔서 모든 형식이 폐해졌다고 이방인들에게는 그렇게 가르쳤는데 유대인들에게는 그것을 믿어도 수 천년 내려온 율법이 있기에 인정하지 않았다. 그러니 그들 보기에는 바울이 유대인임에도 그러니 매국노 같았을 것이다. 그렇게 프레임을 짜 두니 바울이 무슨 행동하고 어떤 말을 하든 그 프레임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들은 무서운 열심으로 그런 프레임을 주장했다. 지금으로 말하면 모든 언론을 동원해서 사람들에게 알리니 예루살렘 장로들이 그들의 눈치를 볼 수 밖에 없다. 그렇지 않으면 자신들의 기득권이 흔들리고 욕을 먹기에 한 순간에 꼴통 혹은 꼰대가 된다. 이것이 세상의 열심이다. 이처럼 세상의 무서운 열심은 공포를 조장하고 눈치를 보게 한다. 결국 권력을 향한 열심인 셈이다. 그것이 열심의 정체이다. 열심의 명분으로 그럴듯한 거창한 말을 하지만 결국 권력욕이다. 그리고 그 끝에는 돈이 있다. 그런데 교회도 주님의 말씀으로 깨어있지 않으면 무서운 세상열심에 압도되어 눈치 보게 된다.
눈치를 보면 무슨 일을 하는가?
22-24절
교회 대표인 장로들이 열심당원들의 기세에 눌려 그러면 어찌할꼬 한다. 복음을 모르고 자기 열심에 빠진 열심당원들을 향해 애통함을 가지고 외치는 어찌할꼬가 아니다. 그들의 기세에 눌려 눈치를 보며 우리가, 또 복음편에 선 바울이 어찌할꼬 하는 것이다. 번지수가 틀렸다. 그러면서 작전을 제안한다. 지금 상황으로 바울이 열심당원이 지배하는 예루살렘 백성들의 비난과 오해를 피할 길이 없지만 방법이 딱 하나 있으니 이대로 하라고 한다. 나실인의 서원을 했다가 기간이 끝난 4명이 있는데 비용을 내어 머리깎게 하고 서원기간이 끝났음을 알리는 결례를 행하면 사람들의 소문과 달리 바울이 얼마나 율법 잘 지키는지 알게 될거라 했다.
보통은 장로들이 얼마나 바울 사랑하기에 이렇게 처방하나 이야기 한다. 옳고 그름으로 생각하면 그럴 수도 있다.
그러나 바울이 그들을 위한 비용을 지불하며 결례를 행할 필요가 없음에도 결례에 동참한 사람처럼 보이는 것은 실제로는 아니지만 보이기 위한 연기를 하라는 것이다. 율법을 잘 지키는 것 처럼 보이라는 것, 연기를 하라는 것이 장로들의 제안이다. 무서운 열심이 있는 열심당원들은 눈치 보게 만들고 기세에 눌린 장로들은 그들 눈치를 보며 바울에게 헛된 훈수를 둔다. 장로들이 열심히 짠 작전의 본질은 무서운 세상 욕심의 눈치를 보며 연기를 하라는 것이다. 여기는 진리 진정성 구원 애통함도 없다. 아무리 직분 있고 장로 되어도 성령의 열심이 없으면 이처럼 어리석은 세상열심에 빠진다. 이것은 세상열심의 눈치를 보고 연기하는 열심이다. 그래서 양심에 찔린다. 그러나 어찌할꼬에 눌려 양심의 가책에 눈을 감는다. 생존을 위해 어쩔 수 없다고 합리화 한다. 그러면서 자기들의 지위와 권위를 이용하여 이대로 하라고 하며 훈수를 둔다. 그러면서 예루살렘 장로들은 약 8년 전 예루살렘 공회에서 이방인 성도들을 위해 결정한 사항을 리마인드 시켜준다.
25절
사도행전 15:20에서 예루살렘 공회의 때 할례 받아야 구원받는다 해서 야고보가 이렇게 결의 해 주었다.
이 이야기를 예루살렘 장로들이 언급한 이유는 자신들이 잘해주었다고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내용을 정할 때 바울이 그 자리에 있었다. 공의회 자체가 바울의 요청에 의해 열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고, 그것을 야고보도, 그곳의 장로들도 다 안다. 그런데 이 말을 바울에게 하고 있다. 왜 하는가? 자기들이 이런 엄청난 권위를 가지고 이방인 교회를 위해 얼마나 큰 결정을 했는지 은근히 자랑하는 것이다.
바울이 엄청난 선교보고를 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긴 했으나 예루살렘 장로로써 자존심을 세우고 싶었던 것이다. 바울만 이방인을 위해 사역한 것이 아니라고, 우리도 이방을 위해 섬기고 있고 무엇보다도 이방선교의 신학적 목회적 기틀을 잡아주었다는 말을 하고 싶었던 것 같다.열심당원 눈치 보며 그들이 원하는대로 연기 하기를 청한 것이 부끄러웠던 것일까? 장로들은 바울 앞에서 그래도 자기들이 이방인의 영혼구원을 위해 한 일이 있다고 생색 내고 있는 것이다.
이런 열심은 결코 성령의 열심이 아니다. 성령의 열심은 세상 눈치 보는 열심이 아니다. 성경을 통해 성령의 말씀에 귀 기울이고 그 말씀에 순종하려는 열심이다. 말씀대로 행하기 위해 세상 열심의 박해를 받는 십자가를 마다하지 않는 열심이 바로 성령의 열심이다. 한 마디로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열심이다. 세상 백성은 사람 눈치를 보며 자기 열심으로 산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눈치 보며 성령의 열심으로 선한 일, 하나님의 일, 구원의 일에 힘쓴다. 우리는 목장에서 목자는 목원, 목원은 목자 눈치를 본다. 그러나 세상눈치는 잘 보이기 위해 비굴하다. 그런 목적을 성취하지 못하면 폭력적으로 변한다. 비굴한 사람은 늘 세상 눈치를 보니 폭력적이 된다. 하나님 눈치는 늘 내가 한 것이 없으니 겸손하고 매력적이다.
적용) 세상 눈치를 봅니까, 하나님 눈치를 봅니까? 나는 내가 눈치 보게 하는 사람임을 알고 있습니까?
목장에서 눈치 보게하는 사람이 되면 안되는데, 세상 눈치를 보니 세상 모든 사람들이 나에게 잘해야 하는 것이다. 안하면 계속 오해한다.
3. 끝없이 비용지불을 해야 하는 열심입니다.
23-25절
어떤 비용 지불하는지 살펴보자
1) 잘 듣습니다.
바울과 예루살렘 장로들 대화 중 바울이 보고한 내용은 19절 딱 한절이다. 이 말을 들은 장로들이 바울에게 한 말은 무려 6절이나 된다. 내용도 새롭지 않다. 바울은 예루살렘에 열심당원들이 많다는 것 너무 잘 알고 자신이 그들로부터 배신자라는 오해를 받고 있다는 것도 잘 알고 있다. 예루살렘 공회의 결정사항도 너무 잘 안다. 그러나 알고 있는 이 이야기를 대단한 조언을 해주는 것 처럼 말하는 장로들이다. 근데 바울이 이 말을 다 들어준다. 그들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다 할때 까지 다 들어준다. 목장에서는 잘 들어줘야 한다. 너무 길면 부목자가 끊어줘라.
2) 연보에 대하여 한마디도 생색내지 않습니다.
바울은 잘 들을 뿐 아니라 선교보고를 하며 이방인 교회에서 모은 연보에 대해 한마디도 하지 않는다. 바울은 헌금하러 왔다. 각 지역대표들을 다 데리고 예루살렘 교회를 돕기 위한 부조를 받게 하기 위해 온갖 어려움을 무릅쓰고 왔다. 당연히 적지 않은 금액이다. 이방교회들을 향해 여전히 불편한 시선을 가진 예루살렘교회도 이방교회의 재정지원을 받으면 할말이 없어질 것이다. 이런 기대가 있으니 바울도 그것을 보고하고싶고 누가도 그것을 당연히 기록남기고 싶을 것이다. 그러나 막상 보고하러 와서는 바울이 일절 말하지 않았다. 누가도 그것을 기록하지 않았다.
받는 입장에서는 부조가 더 커보이겠지만 본질적으로 보면 부조 보다는 선교사역을 보고하러 오는 것이 큰 일이다. 그러나 예루살렘교회 대표인 장로들 앞에서 사역보고 하면서 부조 이야기 하면 사역보고가 묻혔을 것이다. 이것이 디테일이다.
또 왜 보고하지 않았을까? 예루살렘교회가 모교회라는 자부심이 대단했다. 늘 나눠주어야 하는데받는 입장이 되었다. 그러니 이방교회가 많이 생기고 부흥해도 인정하고 싶지 않다. 예루살렘 교회가 끝까지 최고여야 하고 주인공이어야 한다. 이런 자존심이 대단하니 유대인 수 만명이 바울을 배신자라고 한다. 그러니 장로들에게 이방인 성도들이 모은 부조에 대해 대놓고 말하는 것은 그들의 자존심을 상하게 하는 것이다. 이것은 예루살렘 교회와 이방교회 사이의 화합과 일치를 세워야 하는 일이다. 그러니 끝이 없다.
누군가 화해하려고 하면 끝없이 참아야 하고 끝없이 비용지불을 해야 한다. 내가 이쯤하면 되었지가 없다. 이것이 디테일이다. 아무리 수고해고 생색 한번 내면 그 수고가 물거품 되는 일이 허다하다. 잘 했으나 그것이 하나님의 도움으로 내가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구원의 대의를 위해 자신의 작은 생색을 늘 꺾는 것이 성령의 열심이다.모든 사역과 열심 끝에도 돈이 있다. 바울이 점점 수준 높은 세밀한 디테일의 적용으로 구원을 이루어 가는 것이다.
헌금도 공개하면 많이 내고 안 하면 적게 낸다고 한다. 바울이 헌금을 많이 가져가도 생색 안내는데 우리들교회도 헌금 많이 하고 전혀 생색내지 안내는 분들이 있다.
헌금내역을 선입견 가질까봐 몇 년 동안 보지 않았는데, 이번에 예결산 하면서 보게 되었다. 의외의 몇몇 제자처럼 우리들 교회의 무명한 평신도 중 여러분들이 가장 많은 헌금을 하셨다. 온라인으로 헌금하기도 어려운 때인데도 여러 헌금을 빠지지 않고 하셨다. 직분 때문이 아니라서 정말 신앙고백이다 했다. 물론 코로나로 힘든 가운데서도 온 성도 여러분들이 신앙고백으로 헌금하신 것 하나님이 다 아신다. 이분들은 무명이고 오래되지도 않았다. 이런 헌금이 여러가지로 신앙고백이 맞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일은 사람의 열심이 아니라 성령의 열심이라 생각된다. 하나님 자체가 상급되는 것을 보여주신다. 제가 몇 년간 안 봐서 그분들에게 한번도 치하한적이 없다. 그러나 어느 날 알아질 때가 온다. 큐티하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3) 결례 비용까지 댑니다.
잘 듣고, 부조에 대해 전혀 생색내지 않았는데 결례비용까지 댄다. 더 나아가 장로들은 그들이 말하는 그대로 하라고 했다.
나실인의 서원 종료 절차에 따르면 7일간 결례를 행하고 제 8일에 머리깎아야 하는데, 희생예물이 번제물로 일년된 숫 양 하나, 속죄제물로 일년된 어린 암양 하나, 화목제로 숫양 하나, 그 외에 무교병과 과자 등이었다. 그런데 바울을 포함한 다섯 명의 비용을 지불하라고 했기에 결코 적은 비용이 아니었던 것 같다. 그 네명이 너무 가난해서 마지막 절차인 희생예물을 내는 비용을 감당하기가 어려웠던 것 같다.
우리가 성령의 작별 설교에서 바울도 힘든 고린도 사역을 앞두고 나실인의 서원을 한 후에 겐그리아에서 머리를 깎았다. 화목제 하나인 서원이라는 것은 죽어야 할 나를 위해 흠 없는 제물이신 그리스도를 보내주심으로 우리에게 완성된 구원을 허락해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너무 감사해서 드리는 것이다. 그것이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있으니 너무 감사해서 자원해서 나를 드리는 것이 성경의 서원이다. 그러니 이것은 해도 너무한다가 아니라 내가 드릴 수 있으니 드린다는 것이다. 이것이 성령의 열심이다.
4) 바울은 장로들에게 순종합니다.
26절
사실 바울 입장에서는 점입가경이다. 매질 당하고 고생해서 이방에서 헌금 모아서 예루살렘교회 왔는데 지도부는 영접도 안해주고 가짜뉴스로 뒤덮여 지도자들도 도울 수 없다 한다. 이 때 불세출의 전도자 빌립도 안따라오고 예수님 동생 야고보도 목숨걸고 나서주지 않는다. 헌금 가져오느라 너무 수고했는데도 일절 생색안내고 있는데 또 개인 비용 지불해서 그들의 결례에 동참하라 한다. 그러면 사람들이 니가 소문과 달리 얼마나 율법을 중요하게 여기며 지키는 지를 알게 될 것이라는 처방을 한다.
그러나 바울은 모교회로인 예루살렘 교회의 권위를 인정하고 그 장로들의 역할을 인정하고 그 질서에 순종한다. 왜냐하면 바울에게는 늘 중요한 그 복음의 구원의 일을 이루어야 한다는 목적이 있기 때문이다. 바울이 예루살렘 교회의 결정에 순종하는 것을 보며 수 많은 믿는 유대인들 또한 예루살렘 교회가 이방교회를 향한 결정(25절)이 다시한번 확증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반복해서 이야기 해주어야 했다.
바울 한 사람의 죽어지는 적용을 할 때마다 이방교회와 예루살렘 교회에 끝 없는 안력과 고정관념이 조금씩 무너져 내린다. 예루살렘 교회가 이방교회의 헌금을 받아들이고, 이방교회가 예루살렘 교회의 결정을 받아들임으로 수 천년간 개보다 못한 존재로 무시했던 이방인들과 선민의식으로 똘똘 뭉친 유대인들 사이-복음안에서 결코 하나가 될 수 없는 사이가 바울이 십자가를 길로 놓음으로, 안믿는 사람은 못할 적용을 디테일하게 함으로 하나가 되어 간다. 끝없는 비용 지불 맞다. 이런 적용이 올해 있어야 한다. 사실 예루살렘 교회는 이 때로부터 계속 쇠퇴했다. 적용하는 사람들이 살아남는다.
성경은 인간론이고 그 입장에 서 보는 것이 구속사이다. 늘 바울은 상대방의 입장에서 서 본다. 당시는 구약의 율법시대에서 신약의 복음시대로 이행하는 과도기였다. 바울을 오해하고 그에 대해 적대감을 가졌던 유대인 신자들을 무조건 비난만 할 수 없는 것은 오랫동안 율법이 내려왔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방인들은 이제 믿기 시작했다. 그러니 양쪽을 다 이해해야 한다. 바울 자신도 유대인이다. 율법으로 수 많은 사람을 박해했던 박해자의 최고봉에 서 있던 사람이다. 고정관념이 하루 아침에 안 바뀐다. 이것을 이해해야 한다. 불신자와 결혼하면 안 바뀐다. 이해하고 인정해야 한다. 불신자와의 결혼은 십자가 질 생각을 하고 해야 한다.
바울은 저 사람들이 왜 저러는지 다 알기에 늘 눈물이 난다. 저들의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말라고 한다. 한 사람의 끝없는 비용 지불이 전 세계를 바꾸었다.
여러분들의 똑같은 삶이 계속된다 해도 내가 언제까지 당하고 살아야 하나, 언제 우리에게 볕 들 날이 있는가 해도 날마다의 적용하는 것이다. 오늘도 적용 하나 하면 결국 여러분 가정의 고정관념이 무너질 줄 믿는다.
여러분들이 목장보고서에 다 쓰고 나눔한 것이 유언들이다. 자녀들이 다 볼 유언들이다. 내가 오늘 목장에서 적용한 것들이 결국 여러분 가정을 다 주께로 인도하는 날마다의 볼품없는 적용이나 하나님은 기억하시는 줄 믿는다. 말씀대로 된 것 같다.
개편된 목장 발표되었다. 각자 호불호로 판단 하지 말고 믿어주시고 순종해주시면 좋겠다. 하나님께서 세우신 질서이기 때문이다. 이 편성은 연약한 사람들이 했다. 그러나 고의적으로 한 것은 하나도 없다. 그것을 허락하여 이상한 사람들과도 만나게 하신 분은 하나님이시다. 억지로 악의적으로 한 것은 하나도 없다. 하나님의 주권 하에 이루어지는 질서이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진정성을 가지고 공동체의 질서에 순종할 때 우리의 모든 의지와 행동이 성령의 열심이 되어 2022년 구원의 열매를 풍성히 맺을 줄 믿는다.
목장은 성령의 열심으로 간증하며 무용담으로 말하지 마시고 세상 열심에 눈치보지 말고 끝없는 비용 지불을 예비해야 한다. 쉽지 않다. 그러나 목장에서 이런 것을 나눔 하면 이상한 사람들이 많을 수록 훈련이 된다. 그렇게 훈련해서 회사 가면 사람관계가 아무것도 아니다. 대인관계에서 길이 보인다. 이것이 신앙고백이다. 십일조도 신앙고백이다. 돈과 하나님이 날마다 겨루기 때문이다. 하나님 앞에 주권을 드렸기에 목장에서도 잘 들어주는 훈련되어 회사에서도 부부관계에서도 잘 듣고 생색 내지 않고 비용지불 잘 하고 순종하고 가는 것, 이것이 대대손손 축복받는 비결이 아닐까 싶다.
한 의사 목자님 목장 나눔
딸들이 신천지에 빠진 분의 나눔
알코올 중독 남편으로 인해 힘든 가정의 나눔
오늘 장로권사 사명예배를 드리는 날이다. 모든 장로권사님들이 성령의 열심으로 내가 주어가 아닌 하나님이 주어인 하나님의 자기사역으로 사명을 감당하시기를 바란다.
말씀 맺음
성령의 열심은 하나님의 자기 사역을 낱낱이 보고하는 것이다. 세상 열심에 눈치 보지 않는 열심이다. 끝도 없는 비용지불을 해야 하는 열심이다. 하나님이 내 속에 임하고 주님께서 날 위해 죽어주셨다고 생각하면 바울처럼 할 수 있다. 아골 골짝 빈들에도 갈 수 있는 열심이 될 줄 믿는다.
[기도제목]
* 보련
1. 하루를 감사하게 보내고 배울 수 있는 것 찾아 보기
2. 말씀으로 직장 인도함 받기
3. 나의 존재 자체로 기쁘다 하시는 주님 매일 큐티로 만나서 약속의 말씀 찾아내기
* 지향
1. 하나님의 눈치를 보고 성령의 숨은 경륜을 신뢰하며, 4월2일 있을 결혼예배 위해 기도하기
2. 나의 힘을 빼고 병원 가는 적용으로 일반은총의 은혜 누리도록
3. 결혼예배 소식 전달할 때 십자가 지혜타이밍으로 잘 듣고 yes/no 잘하기
4. 내가 할 수 없을 때 수가 많으신 주님 신뢰하며 안식할 수 있는 말씀 주시도록
* 크리스틴
1. 리포트 잘 마무리 할 수 있는 지혜와 힘 주시길. 한번에 패스 하는 것을 바라는 마음을 불쌍히 여겨주시길
2. 잘 맞는 정신과를 찾을 수 있도록
3. 나의 lord 가 부모님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임을 생각하며 집에서 바운더리를 잘 지킬 수 있도록
4. 다음주에 상담예약 하였는데 일반은총 은혜 잘 누릴 수 있도록
* 교희
1. 여전한 방식으로 하나님과 시간 잘 보내고 살도록
2. 동생 구원을 하나님께 맡깁니다
3. 예수님 나의 왕, 나의 근원이 되는 관계가 되도록
* 은선
1. 학위논문주제 구체화에 성령의 지혜와 기름 부어주시기를
2. 사직하게 되면서 연약한마음과 불안한마음 올라오는데 잘 다스려주시고 끝을 잘 맺을 수 있게 도와주시기를
3. 아빠.외삼촌의 영혼 구원
4. 사직하기 전에 임종 돌봄 주 임상경로 연구 적용 5명에게 해야 하는데 다행히 혈액종양내과 선생님이 도와주기로 하셨는데 잘 적용하고 마무리하게 해주시기를
* 은우
1. 주님이 나에게 하신 일들 낱낱이 목장과 주어진 환경에서 잘 전할 수 있도록
2. 마무리 져야 하는 여러 일들 생색내지 않고 값 지불 할 수 있도록
3. 22년 저희 목장 성령의 열심으로 서로의 구원 위해서 힘 쓰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