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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21:7-14 성령의 각오
각오는 오늘 본문의 원어로 언제든 복음을 위해 죽을 수 있음을 준비하는 거에요. 내 본향 천국에 갈 준비가 언제든 되어 있다는 준비입니다. 2021년 마지막 주일입니다. 바울도 마지막 여정에 오릅니다. 성령의 전송을 받고 이제 닷세남은 마지막 주일에 각오를 하라고 합니다. 각오는 보통 새해 첫날 하는 건데 마지막 주일에 본문의 각오가 나왔네요. 오늘은 성령의 각오로 무엇을 해야 할지 생각해볼게요.
1. 복음 때문에 영적 화해를 이루어내야 합니다. 7-10
7, 돌레마이-가이사랴. 분별은 믿음의 끝판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분별해야 하는지 비판해야 하는지 고집을 부려야 하는지 어려운 분별을 생각해보겠습니다. 7절 직역하면 그리고 우리들이 그 여행을 마쳤을 때 원문에는 우리라는 1인칭 복수 대명사가 들어갔는데 여기는 없네요. 누가를 포함한 바울 일행인 우리가 1.2.3차 기나긴 여행을 마치고 드디어 결박당할 예루살렘에 팔레스타인 땅에 도착했다는거에요. 우리가 도착했다는 거에요. 우리 공동체는 듣기만해도 마음이 뭉쿨합니다. 지난주 오직 예루살렘에 복음 전하기 위해서 자기가 핍박했던 이방인 두로의 제자들에게 화해를 청하잖아요. 그리고 오늘 돌레마이에 도착을 합니다. 돌레마이도 예전에 자기에게 박해받은 피해자가 있었겠죠. 안부를 했다는 것은 형제들에게 일일이 포옹을 하고 진심으로 안부를 물었다는 뜻이에요. 돌레마이에서는 하루 만에 화해가 이루어지게 해주셨어요. 하루의 화해도 있게 하시네요. 그래서 바울은 늦지 않게 예루살렘에 향하는 육로여행을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으로 끝이 아니고 그다음 목적지 가이사랴가 있습니다.
8, 가이사랴는 사도행전에서 예루살렘에 이어 두 번째로 자주 언급되는 황제의 도시이구요. 전략적으로 중요한 요새의 도시입니다. 유대와 사마리아와 유럽을 잇는 항구도시입니다. 이 지역 전체를 관할하는 로마 총독부가 여기있어요. 빌립집사가 여기서 전도해서 교회를 세워 돌보고 있어요. 가이사랴에 도착한 바울은 들어가서 머문다고 합니다. 들어가서를 강조해요. 바울이 들어가는 적용을 하고 있다는 얘기에요. 유대인 회당에 들어가듯 루디아 집에 들어가듯 죽이려고 하는 소동이나 에베소극장에 들어가듯 바울은 빌립집사에 들어가고자 합니다. 왜일까요? 바울에게 너무 쉽지 않은 일이었기 때문이에요. 이방인 두로의 제자들과는 차원이 다른 전도자 빌립이었어요. 빌립은 예루살렘교회 일곱집사 중 스데반에 버금가는 일꾼이었어요. 예수님의 사도 중에 빌립이 있거든요 그 빌립과 구별하기 위해서 전도자라고 호칭을 했는데요. 이 때는 전도자가 대단한 호칭이에요. 스데반 순교 후에 전도사역이 기록 된 유일한 집사에요. 스데반하고 너무 가까웠겠죠? 스데반 죽인 주동자 바울에 대해 얼마나 상처가 많았겠습니까? 사역하는 곳곳에서 교회를 핍박하고 성도들을 끌어가고 스데반을 돌로 쳐죽인 그가 마음이 어떻겠어요. 바울은 빌립을 볼 면목이 없어요. 바울은 이미 두차례 가이사랴에 방문한 적이 있어요. 회심한 후 예루살렘에서 다소로 피난하면서 중간에 가이사랴에 들렸어요. 2차 전도여행 마치고 안디옥으로 귀환하면서 가이사랴에 들렀어요. 그때 빌립을 만났다는 기록이 없어요. 만일 만났다면 누가가 반드시 기록했을 거에요. 구원의 확신이 분명하고 사명이 뚜렷한 바울도 그때 당시는 빌립의 집에 들어갈 준비가 안되었던 것 같아요. 화해의 자리에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바울은 인생 마지막 여정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성령의 메이기를 작정하고 죽기를 각오하고 결박과 환란이 기다리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고 있습니다. 그곳 예루살렘은 바울에 대해서 유대인들은 배신자! 기독교인들은 잔멸자! 이니까 바울이 예루살렘 생각에 오금이 저려요. 이제는 목적지가 분명하고 시간이 없고 예루살렘으로 지나는 길에 가이사랴가 있어요. 피할 길이 없어요!! 대사도바울도 이렇게 힘든 만남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제 두로 돌레마이에 화해의 마침표를 찍을 순간이 온건죠. 두로하고는 다른 예루살렘의 들어가기 위한 전초전이라고 할 수 있는 예루살렘의 전설적인 전도자 빌립과 화해를 해야하는거죠.
9-10, 누가가 딸들을 기록하는 것은 빌립이 가정에서도 신앙으로 딸들을 잘 양육했음을 보여주는 거에요. 처녀들이 예언자임을 밝히는 것은 빌립의 가정에도 베드로가 설교했던 요엘서 말씀 내가 내 영을 모든 육체에 부어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라는 말씀이 이루어졌음을 강조하는 것이죠. 빌립은 처음부터 끝까지 여러면에서 모범이 된 것 같아요. 바울은 자기를 지지해주는 가족 없이 홀로 다니는데 빌립은 온가족이 믿음안에서 하나가 되어있으니 바울이 더 위축되었을 것 같아요. 바울에게 하나님은 끝없이 환경을 겸손하게 하셨어요. 10절에 여러 날 머물렀다고 해요. 용서를 구하고 화해하기 위해서 바울에게는 시간이 일각이여삼추인데 충분한 시간을 두고 머물렀어요. 두로에서는 일주일인데 여기에서는 며칠인지 모를 정도로 더 길었어요. 여러 날 머무르면서 얘기했겠죠. 스데반 사건때 어떻게 회심했는지 다소로 피할 수밖에 없었던 일 광야에서의 훈련 바나바가 성령의 소개를 해주어서 안디옥교회를 섬기게 된 일 거기서 파송해서 세차례나 전도여행을 다녀온 일 이방인들이 어떻게 주께로 돌아오는 역사가 일어났는지 등등 20년이상 달려온 사명의 인생을 빌립에게 간증했을 것같아요. 빌립도 마찬가지였겠죠. 스데반 순교 후 어떤 박해를 겪으며 가이사랴에까지 오게 되었는지 어떻게 이지역 교회를 돌보며 지켰는지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의 갈등을 어떻게 풀어가고있는지 등 목회 현장에서 겪은 여러사건과 기적들을 간증하다보니까 서로 말씀으로 인도함 받으면서 살아낸 이야기를 나누니 한 성령님을 느끼면서 저절로 마음이 녹아내렸을 것 같아요. 해석된 인생을 서로 나누니 쌓였던 부정적 마음이 풀어졌을 것 같습니다. 빌립의 집이 화해의 자리가 되었어요. 여러분 한해동안 가족이나 지체에게 서운함이 쌓여 힘드십니까? 그 마음을 말씀으로 해석하시길 바랍니다. 진솔하게 나누어보세요. 나눔 가운데 성령께서 은혜를 주어서 굳은 마음이 부드럽게 되는 역사가 있기를 바랍니다. 성령의 화해가 일어날 줄 믿습니다.
Q. 올해가 가기 전 복음 때문에 화해의 자리에 들어가야 할 사람은 누구입니까? 포옹하며 진심을 다해 안부만 물어도 화해가 시작됐다고 생각합니까? (하루 만에 화해가 될 수도 여러 날 걸릴 수도 있습니다. 마음을 먹었다는 것이 중요한 것 같습니다)
2. 환경에 장사가 없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10-12
바울이 빌립의 집에 머무는 동안 선지자 아가보가 방문을 합니다. 아가보는 글라오디오 황제때 큰 흉년을 예언한 대단한 선지자에요. 그가 너무도 생생하게 바울의 띠를 가져다가 자기 수족을 잡아메고 이 띠 임자가 이렇게 될 것이라고 예언합니다. 그러니 누가를 포함한 바울의 동행자들이 예루살렘에 가지 말라고 함께 권했다고 하는 말이 바로 파라카레로입니다. 사랑으로 같이 외쳐주는거에요. 지금까지 본문을 보면 바울이 힘들었을 것 같아요. 화해한 두로의 제자들도 성령의 감동으로 만류했어요. 그래도 거긴 이방의 교회였잖아요. 이제는 예루살렘에 가야하는데 그곳 출신 거물급 전도자 빌립과 화해를 했어요. 이런 빌립이 만류를 하고 있어요. 바울은 정말 어려웠을 것 같아요. 빌립에 네 :딸이 있는데 예언자에 특별히 처녀라고 합니다. 이런 얘기가 나오면 제가 넘어가지를 못해서 고린도전서 7:34 환난날에 시집가지 않은 자와 처녀를 구별해서 설교하더라구요. 시집가지 않은 자는 노처녀 독신주의 과부일 수있죠. 처녀는 결혼여부가 아닌 주님께 받쳐진 몸으로 살고 있는거에요. 빌립의 딸이 모두 처녀라고 하네요. 여러학설이 있습니다만 저도 한번 결혼했지만 저는 시집가지 않은 자죠. 빌립의 딸들은 결혼은 한번도 안 한 처녀일 수도 있고 그 당시 시절 결혼했지만 같이 사는 남편에게 약속하에 부부관계를 안 한다는 처녀도 있다는 거에요. 그래서 네딸이 처녀로 예언자로 자리매김했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지만 약간 이상하기도 하죠? 초대교회는 워낙 믿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그런 것을 인정하기도 했다고 해요. 그래서 그 당시 빌립의 명성은 대단했다고 합니다. 여러분 분별해서 들으세요. 어쨌든 빌립이 자녀를 잘 키워서 사명 감당했는데 이런 딸들이 눈물로 예언해주면서 예루살렘행을 만류합니다. 아가보는 모두가 몸을 사릴 때 흉년을 예언했던 가문 좋은 유대인 선지자에요. 그는 바울을 보려고 온 것이 아니에요. 바울과는 초면이에요. 예언하는 아가보가 예언하는 딸들을 만나러 온 것이에요. 아가보가 말 뿐아니라 바울의 띠로 손과 발을 묶는 행위를 보이면서 이렇게 예루살렘에서 결박과 환난을 당한다고 생생하게 보여주었어요. 말로만 듣다가 눈으로 보니 강도가 더 확실하게 느껴졌을 건데 딸들이 에베소 장로들처럼 예언의 은사가 없으면 그런가 보다 할텐데 처음 만나 여러 날 회포를 풀며 빌립과 화해가 이루어졌는데 예언자라는 딸들이 만류를 하는거죠. 성경이 예언하는 자라고 인정하는 것 보면 들어야 하지 않겠어요? 아가보, 빌립 딸들이 다 만류하니 바울과 함께 예루살렘에 올라가고 있는 우리 동행들도 술렁입니다. 바울이 어찌해야 합니까? 난감하지 않습니까? 이것을 누가 막을 수가 있어요? 왜 한사람도 바울의 사역을 다 막았을까? 빌립의 사역 사도행전 8:1 유대인들은 선민의식에 가득 차서 사마리아인들은 취급도 안해요. 혼혈적을 무시합니다. 그런데 바로 그 사마리아에 복음을 전했어요. 그곳에서 정착된 삶을 살 수 있었는데 광야로 또 가게 하셨잖아요. 거기서 에디오피아 여왕과 간다게 내시를 만나서 이사야 43장으로 전도를 했었죠. 그래서 빌립은 최초의 이방인 전도자이고 최초로 이방인에게 세례까지 준 전도자에요. 그런 빌립이 8장 마지막 절 38-39 가이사랴에 이르리라 하고 끝나고 오늘 21장에 등장해요. 그 이후가 30년 쯤 되었어요. Think 해보세요! 빌립이 30년동안 딸 넷을 낳았어요. 딸 넷이 같이 살만큼 집이 큰 것같아요. 거기다가 바울 일행이 열명쯤 되니 더 크겠죠. 아가보까지 묶을 정도면 더 크겠죠. 황제의 도시에요. 30년동안 풍족하게 살았다 이것을 볼 수가 있을 것같아요. 빌립은 전도자 칭호를 가지고 안정된 삶을 살고 싶었던 것 같아요. 빌립집은 유명한 믿음의 사람들이 다 모여 유명한 전도자 유명한 선지자 유명한 예언가들이 파라칼레오하면서 다같이 바울의 동행들을 흔들어 놓아서 바울을 말렸습니다. 에베소 장로나 두로의 제자들은요 바울을 사실 잘 모를 수 있잖아요. 믿음이 일천하잖아요. 그러나 여기서 알아 줄 사람은 빌립 한사람 아니겠어요? 빌립의 만류는 차원이 다른거에요. 빌립은 가이사랴의 안정된 삶에 익숙해가지고 십자가 복음 전함이 싫을 수 있었겠다 생각이 드는거에요. 딸들에게 있는 예언의 은사는 맡길,미리 (예) 말씀 (언)으로 말씀을 맡겼는데 그 말씀에 엄청난 지식으로 고난을 피하라고 예언을 하는거에요. 황제의 도시 가이사랴 환경에서 특별한 고난 없이 처음부터 예언하는 딸로 길러졌다면 그럴 수있을 것 같아요. 물론 이 사람들 바울을 사랑합니다. 그러나 저는 빌립 정도나 딸 들 정도면 따라나서는 한 명은 나와야 되지 않는가? 가장 믿었던 바나바도 떠났고 그래서 구브로를 바라보며 안타까워 했는데 빌립 역시 함께하지 못하네요. 계시록 일곱교회가 처음에는 칭찬받고 열심이었지만 다섯교회가 변질되었어요. 환경이 좋아지다 보니 칭찬 받은 교회는 옥에 갇히는 서머나 교회와 작은 빌라델피아 교회만 칭찬 받았어요. 우리의 말씀 묵상은 십자가를 지는 적용이에요. 그래야 영혼구원이 따라옵니다. 그래서 환경이 겸손해야 겸손하다는 말이 정말 맞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안주하지 말고 깨어있어야 되는데 이것이 너무 힘든 걸 보여줘요. 빌립의 딸들이 예언했다고 하는데 이런 아이들을(밥한그릇 먹고 토하고, 거울에 비친 자신이 얼굴이 싫어서 부수고..) 돌보는 엄마와 처녀가 예언하는 것은 너무나 큰 차이가 있지 않겠어요?
Q. 나는 어떤 호칭이 듣고 싶고 어떤 호칭에 익숙해 있습니까? 전도자입니까? 풍족한 가장입니까?
3. 주 예수의 이름으로 각오해야 되는 것입니다. 13-14
바울의 동역자인 빌립 유명한 예언자 네 딸들 유명한 예언자 아가보까지 생생하게 몸으로 보여주면서 가이사랴의 성도들까지 불러들어서 눈물로 파라칼레오하니! 이것 어떻게 분별하지?? 바울은 모든 외침에 단호하게 어찌하여 울어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 질타합니다. 마음이 무너져 내리는 것처럼 나를 못가게 하는 사단이도다! 너무 아프다!! 합니다. 이때라도 빌립과 딸들이 바울의 고백을 듣고 돌이켰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전도가 추억으로 남아있으면 안 됩니다. 전도자의 칭호는 가지고 바울과 같이 떠나는 것은 싫어요. 사단을 한가지 포기하면 두 가지 요구합니다. 교회에 한 번만 나가지 말라는 것을 들어주면 놀러 가자고 합니다. 결혼식 가자고 합니다. 동창모임 가자고 합니다. 결국 교회를 떠나게 합니다. 바울이라고 익숙하고 편한 환경이 왜 싫겠어요. 하지만 바울은 풍족한 환경을 위하여가 아니라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죽을 것도 각오한다고 해요. 마음을 굳게 먹었다는 거에요. 바울이 잘나서 믿음이 좋아서 죽을 것 각오한다고 하나요? 아니요! 누구보다 죄인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잘나지 않았어요. 바울의 인간적인 대담한과 의지를 가지고 희생하면서 각오했던 시절이 있지요. 바로 그리스도인들을 잔멸할 때에요. 그때는 결박당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사람을 결박했어요.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을 결박하고 수많은 사람들의 손을 묶고 가두고 핍박하며 살해했어요. 이처럼 일사각오는 무서운 것입니다. 하지만 바울이 변화된 시점이 있지요. 언제입니까?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났을 때 그때도 여전히 살기가 등등해서 다메섹으로 가던 길이라 사도행전 9장은 기록합니다. 하늘로부터 빛이 둘러 비춰 사울아 사울아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이때 바울이 주여 누구시옵니까?라고 묻습니다. 당신의 이름을 묻습니다.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 이때부터 바울이 변하기 시작했어요. 이름을 묻고 이름을 안 시점부터 나의 이름을 위해서 살다가 예수의 이름을 위해서 사는 시점부터! 그 이름을 알던 그때부터! 바울은 변합니다. 어떻게 변화됩니까? 핍박을 하던 자가 핍박을 당합니다. 논쟁하던 자가 간증을 합니다. 결박하던 자가 결박을 당합니다. 죽이던 자가 몇 번이고 죽임에 위협을 당합니다. 그리고 이제 복음을 위해 죽기로 각오하며 예루살렘으로 향합니다. 이것이 나의 각오에서 성령의 각오로 변화되는 것이죠.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을 당하고 죽기까지 각오하는 거에요. 그때부터 바울은 나는 모든 성도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나라고 했고, 나는 사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라, 내가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하였음으로 사도라 칭함을 감당치 못할자로다, 나는 죄인 중에 괴수니라 성도 중의 작은 자! 사도 중의 지극히 작은 자! 죄인 중의 괴수! 점점점 죄인인 것을 보는 거에요. 그러니 성령의 사명을 나같은 죄인 중에 괴수에게 맡겨 주셨으니 죽기를 각오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는 거에요. 자기 죄를 보는 것이 죽은 자를 일으키는 것보다 더 어려운 것이 맞습니다. 언제든지 사도행전 20:24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말씀을 계속 반복하는 거에요. 에베소에서도 두로에서도 돌레마이에서도 가이사랴에서도 한결같은 답을 반복하고 있어요. 핍박과 유혹에서 한결같은 답이 나와야 하는데 그러나 빌립의 딸들은 바울의 이런 고백에도 따라나서지 않습니다. 빌립은 이제 노년이에요. 바울도 노년이에요. 바울이 예루살렘에 들어가서 복음 때문에 안타까워하는데 빌립 한 사람이 따라나서 주면 그것만으로도 바울에게 큰 힘이 될 것인데요. 보통사람은 몰라도 적어도 빌립과 딸들이 따라나서지 못한다면 막을 일은 아니에요. 인류에 복음이 전해지는 행위를 막으면 어떡해요? 초대교회 뿐 아니라 가고오는 세계속에 전도자로 찬란히 빛나고 있어요. 험담을 하는 것이 아니에요.
바울편에서 보면 생명을 버리기로 했지만 마음이 상했다고 했잖아요. 이렇게 보면 빌립 때문에 굉장히 바울의 마음이 우리는 상했다고 보지만 바울에게 주시는 은혜는요 그런 값싼 은혜가 아니에요! 바울에게 그들이 미워서 마음이 상한 것이 아니죠!! 복음 때문에 애통한거죠! 우리는 바울과는 비교가 안되지만은 이렇게 내가 원하는 것을 누가 계속 거절한다면 별것 아닌 것에 우리는 시험들잖아요! 목장 바꿔도 시험들잖아요. 내가 되고 안되고 시험들잖아요. 별것아닌 것에 시험이 든다면 우리가 받은 은혜도 별것 아닌 은혜 아니겠어요?! 우리가 받은 은혜가 값싼 은혜아니겠어요? 바울의 은혜는 그 정도가 아니라고! 내 하나님! 나에게 베풀어주신 은혜는! 그렇게 값싼 싸구려 은혜가 아니라구요!!! 여러분들이 시험들어서 맨날 떠난다 죽는다 헤어진다 이러면 은혜를 싸구려로 바꿔버리는 거에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죽기까지 각오한 바울은 인간적인 호소에 설득당하지 않았어요. 그러면 어떻게 해야겠어요? 바울은 혼자이고 우리는 여럿이니까 우리 뜻을 관철시키기 위해서 바울을 붙잡아 두겠습니까? 세상방법은 늘 다수결이니까 따라오라고 하죠. 바울의 예루살렘하고 우리 일상생활의 삶하고 똑같아요. 다른 것이 아니에요. 내 주위의 어떤 사람 때문에 환경 때문에 성령의 각오가 내 각오로 희석되지 않기를 바래요. 변질되지 않기를 바래요! 우리가 주의 뜻대로 이루어 지이다 라고 드디어 우리가 그쳤노라!라고 합니다. 이런 길을 가야하는 거죠. 우리한테 이런 시험까지 오지는 않겠지만 결국 여러분들중 말씀이 안들리는 사람은 왜 빌립을 험담하지 하는 사람도 있어요. 그것이 아니라 분별해야하기에 바울이 가야하기 때문이에요. 성경을 가지고 고난을 피하는 걸 가르쳐주는 예언일 수도 있다는 거에요. 여러분 우리는 복음 때문에 살아야 하는거에요. 바울은 특별하다고 생각하면 안되는거에요. 복음 때문에 결혼하고 이혼안하고 자녀교육 시켜야하는데 이원론으로 생각하면 안되니까 구속사적 큐티를 할 때 이렇게 생각해 보는 것은 맞는 거에요.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죽는 각오는 내 본향 천국에 들어갈 최고의 준비가 되는 거에요. 이것이 성령의 각오에요. 우리가 묶길 수 없고 죽을 수 없는 이유는 그것이 끝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잖아요. 내 인생이 실패했다! 이런 생각이 들기 때문이에요 하지만 이 땅이 끝이 아니잖아요. 바울이 이 땅이 끝이 아니니까 자신 있게 내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나의 죽음이 끝이 아니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죽는 죽음은 저 천국에서 시작하는 최고의 준비이기에 이것이 성령의 각오인 것이에요. 예수 이름을 위하여 우리가 잘 결박당해야 합니다. 부모가 힘들다고 부모의 결박을 자르고 자식의 결박을 자르고 결혼 생활이 환난과 핍박이라고 묶긴 끈을 잘라내서는 안 됩니다. 직장생활이 결박과 죽음이라고 묶인 끈을 잘라서도 안 됩니다. 옛날에는 내가 자르고 선택했다면 이제는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잘 묶여가야 하는 거에요. 음란하고 악한 내가 천국에 들어가는 최고의 준비이며 잘 결박당하고 잘 죽어지는것이 성령의 각오입니다.
Q. 나의 믿음이 과거의 추억입니까? 현재 진행형입니까? 내게 묶어주신 환경에 잘 묶여가는 것이 천국을 향한 최고의 준비임을 아십니까?
[기도제목]
은우
1. 전시 마감 금액 정리 잘 하도록
2. 받은 은혜가 예수님 피 값으로 산 것을 알고 작은 것에 흔들리지 않고 감사하도록
3. 2021년 2022년 성령의 각오와 준비 할 수 있도록
크리스틴
1. 한국 가는 준비 잘 할 수 있도록
2. 양육숙제와 리포트 쓸 수 있는 힘과 지혜 주시길
3. 환경의 감사가 아니라 구원에 대한 감사를 할 수 있기를
다인
1. 영육의 강건함 받을 수 있도록 (이번주에 특히 어지러움증이 있어서 힘듭니다. 주님의 보호 받을 수 있도록)
2. 스스로에게 위로의 말 잘 전 할 수 있도록
3. 나의 아픔이 주님이 나를 버리신 것이 아니라 고치시려고 하시는 것임을 알고 감사할 수 있도록
예선
1. 나의 구원 때문에 나 자신과 영적 화해를 이루는 한 주 되도록
2. 여전히 별 것 아닌 사람의 말에 시험드는 연약함을 불쌍히 여겨주시고 그동안 받은 은혜가 싸구려 은혜가 되지 않도록 다시 예약하고 갈 수 있는 용기 주세요
3. 회사 사정이 어려워졌는데 회사에서 나가라고 할 때까지 내게 묶어주신 환경에 잘 묶여가도록
4. 동생 구원을 위해 판단하기보다 경계를 잘 지키고 기도하는 한 주 되도록
5. 날씨가 많이 추워졌는데 목장 식구들 오고 가는 발걸음 지켜주세요.
보련
1. 구직급여 잘 신청 되어진대로 스케쥴 잘 짜서 하루보낼 수 있도록
2. 여전한 방식으로 감사하면서 살기
3. 여러방면에서 수고하고 바쁘고 힘든 일상을 보내는 지체들을 위해 기도하기
4. 구원의 감사
은진
1. 매일 말씀을 묵상하며, 파라티데미한 하루를 잘 살아내기
2. 작은 것에 놀라 시험 들어 값싼 복음으로 전락시키는 것이 아니라 이미 내가 받은 은혜가 엄청난 기적임을 알며 직장에 가정에 공동체에 잘 묶여가도록
3. 다른 사람들이 나의 바운더리를 침범하지 않도록 잘 분별하여 마음을 잘 지키며 전도하는 사명으로 살 수 있기를
지향
1. 2021년 한해 받은 은혜가 너무 큰데, 감사함으로 한해 마무리 잘 하도록
2. 현재 주어진 환경이 나에게 최적화된 환경임을 알고, 말씀 보며 잘 묶여 가도록
3. 받은 은혜를 스스로 값싸게 여기지 않고, 그 은혜를 기억하며 오히려 가족 구원위해 기도하도록
4. 결혼 예배에 하나님의 영광인 영혼 구원이 일어나는 예배 되도록 기대하며 기도할 수 있도록
현경
1. 완전하신 하나님 말씀에 붙잡혀 묶어주신 일상의 하루를 잘 살고 마무리 할 수 있도록
2. 붙여주신 목장식구들 영육을 위해 기도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