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12.12. 성령의 부탁 (행 20:32-38) 김양재 담임목사님
성령의 감독자 말씀 전한 주간에 우리교회에서도 공동 의회에서 평원지기 초원지기를 장로와 권사로 세우기로 했다. 그동안 교회를 위해 수고해주신 평초원지기들을 명실상부한 성령의 감독자로 교회를 보살피는 사명을 맡겼다. 이렇게 중요한 순간마다 늘 말씀으로 분명히 인도해주시니 놀랍고 감사하다. 우리교회를 각별히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이다 그러나 바울은 사람의 감독으로 세워지는 것이 아니라 오직 어린양이신 주님과 성령께서 감독이 되어야 함을 안다. 감독이 되면 오늘을 마지막처럼 살고 늘 삼가고 경계하며 기억하라고 전했다. 그리고 바울은 이 교회를성령님께 부탁했다. 오늘은 성령의 부탁에 대해 생각해보겠다.
성령의 부탁은
1. 은혜의 말씀에 부탁해야 합니다.
32절
우리는 내게 가장 소중한 사람을 누구에게 부탁하는가? 유명한 능력 있는 믿음 있는 후임자에게 부탁할 것이 아니라 이 교회를 주와 그 은혜의 말씀에 부탁한다고 한다.
우리는 지금 계속 바울이 에베소 장로앞에서 하는 고별설교를 묵상하고 있다.
결박과 환란이 기다리는 예루살렘으로 가지만 바울은 자신에 대해 걱정하지 않고 오직 자신이 3년간 수많은 생명의 위협에도 가르치고 전파하여 세워진 생명보다 소중한 에베소 교회와 성도들, 그리고 자신이 전한 복음에 대해 노심초사 걱정한다. 예수님께서도 잡혀가시던 그 밤에도 베드로가 대제사장 종 말고의 귀를 잘랐다. 그 귀까지 붙여주시며 제자들의 실수까지 뒷수습하시며 십자가 향해 가시는 것과 마찬가지다.
여기서 부탁한다는 말의 어원은 파라티테미 이다.
성령의 안아주심 설교에서 파라칼레오를 기억하는가? 파라는 옆 칼레오는 소리치다 인데, 옆에서함께 소리치고 울어주는 것이 안아주심이라 했다.
파라티테미라는 단어에서 파라는 옆 티테미는 놓아두다 이다. 즉 부탁한다는 말은 옆에 놓아두다라는 의미이다. 이것이 중간태로 쓰일 때는 넘기다 위임하다 추천하다 라는 의미를 지닌다.
작가 신경숙씨 소설 중 엄마를 부탁해 라는 책이 있다. 이 소설 처음에 이렇게 시작한다.
'엄마를 잃어버린 지 일주일 째'
치매 걸린 엄마를 잃어버린 것이다. 무언가 많이 가지고 역에 도착했는데, 길을 잘 아는 자녀가 한명이라도 옆에 있었다면, 항상 몇 발자국 앞서 걷던 늙은 아빠가 그 엄마의 손을 붙잡았으면 잃어버리지 않았을 것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부탁한다는 것은 옆에 둔다는 것, 옆에 함께 간다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부탁하는 대상이다. 이 교회를 감독자들에게 부탁하지 않는다. 한 사람의 리더에게 부탁하는 것도 아니다. 바울은 오늘 주와 그 은혜의 말씀에 부탁한다고 한다. 아주 친근하게 표현한다. 즉 내가 가장 사랑하는 대상을 주와 그 은혜의 말씀 옆에 놓는 것이 부탁하는 것이다.
내가 내 자녀를 감독할 수 없음을 알고 내가 내 남편 내 아내를 책임질 수 없음을 깨닫고 내 자녀 내 가족을 주의 말씀 옆에 놓아두는 것, 이것이 성령의 감독자로 해야 할 일이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내 가정 직장 공동체의 감독자로 삼으셨다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그 사람을 말씀 옆에 놓아두는 것이다.
며칠 전 교회의 급한 기도제목이 올라왔다.
어떤 집사님이 우울증과 알코올중독으로 밤에 심한 소동을 일으켜 경찰이 오고 그 경찰 앞에서 아파트에서 뛰어내리려고 하니 급히 강제 입원시켰다. 그리고 그것이 오랫동안 효력 있는 것이 아니라서 사흘인가 입원하고 스스로 본인이 퇴원했는데 집에 돌아왔더니 집에 불이 났다. 어떻게 해서 불이 났는지 조사 중이나 여튼 생명이 위독한 상태이다. 그 아파트 보니 물 한방울도 안남고 전소되었다 한다. 이 집사님에게는 두 자녀가 있고 아파트는 옆 7채에 피해를 끼쳤고 병원비도 만만찮다고 한다. 그리고 현재 이혼소송 중이라 한다. 근데 엄마는 딸에게 울면서 니가 잘못되면 나도 살수 없다 하신다. 이 집사님을 누구에게 부탁할 수 있겠는가? 병원, 사람에게 부탁할 수도 없고 부모도 감당 안된다. 하나님께서 택한 자녀를 끝까지 보호하기에 이 모든 것이 불타는 환경에서 그래도 남은 것이 있어서 지금 산소줄에 생명을 이어가고 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이 분을 은혜의 말씀 옆에 데려다 놓는 것이다. 현재 말씀이 들리는 곳으로 데려올 수 없다면 기회 되는대로 그분을 만날 때 통화할 때 능히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실 예수의 복음이 옆에 들리도록 놓아두고 전하는 것 뿐이다.
말씀이 안 들리는 내 자녀 내 아내를 누가 감당하겠는가? 그래서 나는 감독자가 될 수 없다고 성령께 부탁드린다 고백하면서 그들을 말씀 옆에 데려다 놓도록 우리는 순종하고 사랑하고 대화하고 인내해야 한다.
미국의 저명의 신학자인 스탠리 하워스는 조울증 조현병인 아내와 살기 힘들었다. 결국 20년쯤 후에 이혼을 했다. 그분이 그렇게 유명한 신학자임에도 그 당시 교회공동체는 못 나갔다고 한다. 그러면 그분은 정말 누구와 이것을 나누었을까 싶다. 그것을 생각해보면 우리들 교회는 공동체가 있어 식구들이 견디는데 도움이 되고 그로 인해 주님을 다들 만나고 있다.
이 집사님이 의식이 돌아왔다 한다. 살려주셨으니 이로 인해 은혜의 말씀이 옆에 놓일 수 있도록 기도해주시길 바란다. 그 집사님이 살아남아 모든 식구들을 주님께 인도하기를 바란다. 이분이 남은자가 되기를 원한다. 그리고 우리들 교회 다니시는 남편에게도 은혜가 임해서 가장 좋은 길로 인도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예수님의 마지막 유언 같은 말씀이 눅 23:46에 나온다.
눅 26:46
이 부탁하다가 파라티테미 이다. 즉 아버지의 손에 나를 놓아둔다, 성부 하나님 옆에 나를 둔다는 것이다. 이것이 예수님이 하실 수 있는 마지막 말씀이셨다.
내 자녀 가족을 말씀 옆에 놓아두는 것이 우리의 사명이다. 이것이 성령의 부탁이다. 도무지 말씀과 상관 없는 내가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씀 옆에 내 인생이 놓여졌다면, 내게 맡겨준 한 사람을 말씀 옆에 두기 위함이 우리의 사명이 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왜 말씀 옆에 두려고 이렇게 노력해야 하나?
32절 후반부
말씀 옆에 두었더니 그 말씀이 능히 든든히 세운다고 한다. 능히는 넉넉히 그럴 수 있다는 말이다. 이것이 두나마이 라는 단어인데, 이 원어에서 파생된 말이 다이나마이트이다. 이는 폭발력 있게 충분히 넉넉히 든든히 세운다는 밀이다. 얼마나 이 말씀이 믿음직한지 모른다. 하나님의 말씀이 충분히 넉넉히 강한 힘으로 그 사람의 인생을 세운다는 것이다. 세운다는 말은 집을 짓다 건축한다는 말인데, 그 말씀이 한 사람의 인생을 세워간다는 것이다. 터 닦고 기반 다지고 한 발짝식 말씀으로 세워간다는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건축한다고 하는가? 거룩하게 건축한다. 우리의 인생을 거룩하게 건축한다고 한다. 잡초가 있으면 뽑아야 하고 불법건축물이 있으면 철거해야 하고 더러운 물건은 치워야 하기에 고난이 따른다. 이렇게 육이 무너질수록 영이 세워지고 영이 세워질수록 육이 세워진다. 영육이 일원론이다. 교회에 올 때 단정하게 입고 오시는 것이 일원론이다.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하나님을 중심을 보신다 했다. 그러나 너무 치우치면 안된다. 결국 하나님 앞에 영이 세워지면 육이 세워지고 육이 세워지면 영이 세워진다. 그리고 그 마지막 종착지 기업을 주신다. 그 기업은 구원이다. 이 땅에서 눈물 슬픔 고난이 있으나 이 땅은 영원하지 않기에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기업을 주시기 위해 나를 건축해가는 과정이기에 눈물이 따른다. 내가 감당할 수 없는 사람과 그를 위해 기도해야 한다.
우리 주님이 십자가 위에서 아버지 손에 그 영혼을 부탁하시니, 그 영혼을 그 옆에 놓아두시니 했다. 그 뒤에 어떻게 되는가? 죽어서 끝나는가? 아니다. 능히 영혼을 그 죽음에서 살리시는 그 능력이 우리 주님을 살리신다. 무덤을 깨트리시고 죄와 사망의 권세를 깨트리시고 든든히 세우사 기업으로 왕으로 아들로 다시 살아나시며 우리에게 자신을 첫 열매로 보이시는 것이다. 너희도 나와 같이 될 것을 지금 보이시는 것이다. 이 이야기는 내가 감당할 수 없는 내 아내 자녀를 위해 기도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먼저 그들을 말씀으로 놓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하며 말씀하신 것 처럼 내가 먼저 말씀 앞에 내 인생 내 존재 내 삶을 데려다 놓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말씀이 나를 든든히 세워간다면 내게 맡겨준 한 영혼을 말씀 앞에 데려다 놓기 위해 나아가야 한다. 이것이 성령의 감독자가 해야 할 일이고 성령의 부탁이다.
예수님이 나를 아버지 손에 먼저 부탁하셨다. 말씀 옆에 놓아두셨다. 예수님도 그랬는데 우리도 남을 탓할 것이 아니다. 나부터 말씀 앞에 바로 서야 한다.
적용) 나는 매일 나를 어디에 데려다 놓나요? 티비 핸드폰 술집 앞에 데려다 놓나요 유투브 앞에 데려다 놓나요, 아니면 말씀인가요?
내가 성령께 가장 부탁하고 싶은 한 사람은 누구인가요?
- 티비와 홈쇼핑 / 아빠, 부목자 김...
- 부동산 유투브, 집값 전망 / 엄마
- 병원 탐색 / 아빠, 남자친구
- 잠 / 저를 가장 부탁하고 싶다.
- 회사 / 남자친구, 나 자신
2.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됨을 기억하라고 부탁합니다.
33-35절
바울은 에베소 교회와 성도들을 주와 그 은혜의 말씀에 부탁하며 설교를 끝맺는다. 죽음을 앞에 두고 하는 말은 중요한 말일 수 밖에 없다. 이제 마지막 남긴 유언을 통해 장로들에게 3년간 바울이 어떻게 살아왔는지 삶의 이력서를 상기시켜준다.
사람들은 많은 것들을 기억하지 않는다. 한 문장으로 기억한다. 좁은 문 좁은 길인데 그 좁은 길의 끝에도 돈이 있다고 한다. 그래서 이 설교의 마지막도 돈으로 마무리를 맺는다. 왜냐하면 이 교회를 무너뜨릴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도구가 돈이기 때문이다. 범사에 본을 보이라고 하는 바울에게도 그 당시 비방하는 사람들이 있다.
고후 12: 16-17
예루살렘 교회를 위해 마게도냐 교인들이 전부 구제헌금 했다. 그 돈을 바울이 자신을 위해 사용했다고 소문 내는 사람이 있다. 사도바울은 그 거짓소문에 휩쓸리지 말라 했지만 그보다 중요한 돈의 본질에 대해 알려주고자 했다.
돈은 하나님 자리에 있다.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착각을 하게 한다. 돈 있으면 행복하고 나를 사랑하고 내가 먹고 마시고 입고 마음대로 할 수 있고 나를 사람들이 높게 볼거야. 그러나 제가 늘 강조하지만 제가 가난한 학창시절때는 훨씬 풍요롭고 자유롭고 부요했다. 그러나 부잣집에 시집가서 갇혀있고 할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고 전혀 돈에 전능성과 상관 없는 삶을 살았다.
그러나 돈의 실상이 어떠한가? 생명을 사랑을 만들 수도 지을 수도 없다. 그런데 돈을 전능한 것이라 착각하게 만든다. 돈은 하나님의 일을 하기에 너무 귀한 도구이지만 동시에 우리의 죄성을 불러일으키는 가장 강력한 도구이다. 바울을 비방한 사람도 바울의 복음 때문에 자기가 전한 복음이나 자기 자리가 위태할까 하는 것이다. 결국 돈이다. 옳고 그름의 끝에 돈이 있고 싸움의 끝에는 돈이 있다. 부부간에도 늘 돈이 있다. 지역감정 진영논리 뭐라 해도 모두 끝에는 돈이 있다. 그러므로 많이 벌어 에베소 지역을 바꿔라 로마 선교해라가 아니다. 바울은 내가 은이나 금 의복을 탐하지 않았다고 했다. 탐하지 않았다 했다. 내 쓸 것 충당하며 수고하며 약한 자들을 도왔다고 하며 나와 같이 하라고 했다. 이것이 바울 설교의 마지막이다.
충당하여 라는 말은 선박의 가장 아래에서 노를 젓다는 말이다. 노예들이 한 일로 자신의 섬김에 대해 이런 표현을 쓰고 있다. 이것은 모든 사역자 보고 자비량으로 섬기라는 것이 아니다. 보통은 구약의 십일조 정신으로 그 교회에 생계비를 주었다. 십일조 정신으로 했다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 행했음을 의미한다. 바울은 탐심을 갖지 않고 하나님 나라의 일을 했다는 것이다.
바울에게는 금과 은을 얻을 기회가 많았다. 너무 강력한 말씀 앞에 병자가 나았고 귀신이 쫓겨났고 가정이 합쳐졌다. 돈 인기 명성을 누릴 기회가 얼마든지 있었을 것이다. 가고 오는 세대 속에서 그런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 은혜를 받으면 뭔가 주고 싶은 것이 있다. 처음 보는 사람이 미국 갔다오는 공항에서 초콜릿을 사 주었다. 처음 본 사람이 어떻게 초콜릿을 줄 수 있는가? 이해할 수 없는 일 아닌가?
내가 커질수록 자기 사명이 되어 자신에게 부탁하고 성령께 부탁하지 않는다. 이것이 돈의 전능성의 착각이다. 기도하지 않는다. 내가 하면 되기 때문이다. 성령께 부탁하지 않고 말씀 옆에 나를 두지 않는다. 돈이 있기 때문이다. 내가 의사와 간병인 사면 되니 성령께 부탁할 일이 없다. 그러면 천국 문 앞에 섰을 때 어떠할까? 예수가 그리스도다 라는 떨리는 고백과 죄인임을 고백하기 어렵다. 그런 방법도 모른 채 천국 문 앞에 서는 사람들이 많았다.
저는 우리 남편이 천국 문 앞에서 예수가 그리스도라 고백한 것은 생각할 수록 기적 같다. 어떻게 그 고백을 할 수 있는가? 내 자아를 깨트리는 가장 좋은 방법은 내가 의지하는 것이 물질이 아니라 주님임을 고백하는 것이고, 그 리트머스 시험지가 물질을 약자와 공동체 교회를 위해 흘려보내는 것이다. 이는 내가 물질에게 부탁하지 않고 성령께 나와 내 가정을 부탁한다는 신앙고백이다. 그렇게 바울은 자신 있게 말한다. '주는 것이 받는 것 보다 복이 있다.' 이 말은 주님께서 직접적으로 써서 하신 말씀이 아니다. 그러나 성경 곳곳에 주님의 가르침이 나타난다.
마 19:21,눅 6:38
이런 말씀 들으면 복 받아야 하니 우리가 주려고 하지 않겠는가? 십일조 내면 부자가 되고 약한사람에게 나누어주면 흔들어 넘치도록 채워주니 그렇게 하려 한다. 그런데 이래서 주는 것은 주는 마음인가 받는 마음인가?
이 말씀은 그런 뜻이 아니다. 복이 있다는 말은 마카리우스의 복이 있다는 것이다. 사람이 누리는 복이 아니라 삼위일체 하나님이 누리는 복이다. 팔복 전체의 복이 마카리우스의 복이다. 어떤 존재와 환경이 기쁨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과의 연합과 관계에서 오는 기쁨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팔복의 처음과 끝이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이다. 가장 최상의 상태의 복은 천국이 저희 것 임이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바로 이 복을 주고 싶으시다. 마카리우스의 복을 주고 싶으시다. 근데 이것은 우리 마음대로 못 받는다. 택자여야 받는다.
우리 물질 뿐 아니라 삶을 나눠야 한다. 내 삶의 좋은 부분 뿐 아니라 내 실패 연약함까지도 나누어주는 인생이 복된 인생이다. 가장 힘든 상황에 있는 사람에게 도움이 되는 것은 돈이기도 하지만 같은 아픔을 나눠 줄 때 함께 평안을 누린다. 마카리우스, 삼위일체 하나님을 누리는 것이다.
보이스피싱 때문에 힘들었다는 간증을 들었다. 보이스피싱은 돈만 잃는 것이 아니라 내가 이런 것에 넘어갔다는 자책과 정죄 때문 죽고 싶다. 그런데 요즘은 대부분 보이스 피싱이 욕심이 아니라 자영업자들이 대출에 허덕여서 싼 이자로 빌려준다 하니 생존 때문에 넘어가게 된다. 이 보이스피싱에 걸린 자들에게 큰 위로가 되는 사람들은 같이 당했다는 사람들이다.
지지난주에 제가 보이스피싱에 당할 뻔 했다. 제가 그 밤에 잠도 안자고 초기화 해서 복구했다. 아침에 오니 한 부목사님도 보이스피싱에 당했다 하는데, 제가 당했다고 하니 너무 위로를 받았다.
물론 물질도 많이 흘려보내야 한다. 그러나 우리들 교회는 우리의 약재료 삶까지 나누어주어야 한다. 내가 이런 죄인이다 하는 이런 고백을 나눌 때 나는 내 인생의 주인이 될 수 없는 연약한 자라고, 그래서 내 삶 내 가정을 주님 손에 부탁합니다 하는 것, 이것이 성령께 부탁 드린다는 고백이다.
적용) 내 주변에 본이 되어 힘든 지체에게 다가가 물질로 삶으로 흘려보내는 것은 무엇입니까?
흘려보내게 되면 그 인생이 이 세상은 알 수 없는 천국의 마카리우스 복 됨이 믿어지십니까?
이걸 알 수 없으니 돈돈돈 하며 지옥을 살고 매번 분쟁이 일어나는 것이다.
우리들교회 적용
우리들교회가 여기까지 온 것은 재정이 투명했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몇 년 전 휘문 사건이 있었다. 그래서 우리들교회도 재정감사를 교육청과 경찰에게 받았다. 저희는 늘 원칙 지키느라 힘들었으나 국가 관련기관에서 모든 조사를 받을 때가 올줄 어찌 알았겠는가? 그러나 아무 문제가 없어서 도리어 그쪽에서 많이 놀란 것 같다. 이것을 여러분이 아는 바니 라고 할 수 있다. 개척 첫 주일부터 재정을 공개하겠다는 것은 투명하게 쓰겠다는 의미였다.
그리고 교회에서만 쓰려고 한 큐티인을 여러군데에서 보내달라 했다. 그런데 이것이 많이 나가게 되니 세금내고 정식으로 판매하지 않으면 도리어 그것이 불법이 되었다. 교회는 책 판매를 할 수 없다. 시판을 위해 법인이 필요했다. 법인 인가가 어렵다고 하는데, 실사 나와서 판교 5층에서 책 만들고 있으니 사실이구나 해서 우리들 교회를 신뢰해서 인가가 나왔다. 그래서 큐티선교회는 개척전부터 있었으나 책 판매 위해 2016년도에 경기도에서 법인으로 인가 받았다.
큐티엠 정관을 보면 사업종목 중 목회자 세미나 큐티세미나 세대별 큐티책 출판 해외선교사 네트워크 협력 사역 등이 있고, 국세청에서 발행한 사업자 등록증에 보면 그 종목에 출판서적이라 되어있다. 그리고 경기도 지사가 인가해준 비영리법인 설립허가증이 있다. 그러니 큐티선교회는 개인 선교회가 아니라 학교 처럼 경기도가 감사해주는 법인이고 어찌보면 교회보다 까다로운 것이기에 경기도에 늘 재정보고를 한다. 항상 원칙을 지키는 것은 늘 힘든 일이지만 결국 살아남았다. 이것을 여러분이 아는 바니...
약한 사람들은 교회 밖에도 있지만 교회 안에도 있다. 개척 1주년에 개인 회생을 신청하라 하니 40명이 신청했다. 그래서 변호사비를 지원해서 도왔다. 그 후로 추수감사절 헌금은 성도들을 위해 썼다. 그리고 우리들교회는 자유함이 있어서 신청을 잘 한다. 그럼에도 추수감사절 헌금을 성도들을 위해 쓰지만 10년만에 판교성전을 빚 없이 헌당했다. 은혜의 말씀을 옆에 놓아두니 주님이 보여주신 기적이라 할 수 있다. 큰 부자가 헌금한 것이 없는 개미 군단의 승리였다. 이정도면 너무 기적 아닌가?
그래서 성령의 부탁 세번째
3. 우리는 무릎을 꿇고 기도해야 합니다.
36-38절
우리의 모든 부탁은 결국 기도로 끝을 맺어야 한다. 우리의 모든 목장도 기도로 시작해서 기도로마무리 지어야 한다. 우리의 삶도 기도로 인생을 맺어야 한다. 바울의 고별설교도 기도로 마무리 맺는다. 이것은 이 교회를 성령께 부탁한다는 우리의 고백이며 기도로 마지막 인생의 마침표를 찍는 것도 내 인생 전체를 성령께 부탁드린다는 고백이다. 그런데 기도했는데 무릎을 꿇고 했다고 한다.
그때까지 유대인들은 하늘을 향해 두손 벌리고 서서 기도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래도 성경에 무릎 꿇고 기도한다는 장면이 가끔 등장한다. 솔로몬이 성전건축할 때 성전 건축 후 기도할 때 무릎을 꿇었다. 또 에스라가 백성들이 이방인과 불신결혼한 것을 알고 무릎을 꿇고 회개의 기도를 드렸다. 또 다니엘이 하루 세번씩 예루살렘 향해 무릎 꿇고 기도했다. 우리 주님께서 십자가 지시기 전 감람산에서 기도할 때 무릎 꿇으셨다. 스데반 집사도 순교의 자리에서 무릎 꿇고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하고 기도했다. 그리고 베드로가 죽은 다비다를 위해 기도할 때 무릎을 꿇었다.
언제 무릎꿇었나? 아주 특별히 간절히 기도할 때 무릎을 꿇었다. 무엇 때문에 오는 간절함인가?나는 할 수 없다라는 고백에서 나오는 간절함이다.
바울은 이제 다시는 에베소에 올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자신이 3년간 성령의 제자양육으로 양육한 그들을 이제는 직접 도울 수가 없다. 그들을 위해 에베소 교회를 위해 바울이 직접 해줄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오직 주님께 주님의 은혜의 말씀에 맡길 수 밖에 없었다. 근데 떠나는 바울을 비방하는 자 까지 생겼다. 바울이 구제헌금 다 가져갔다고 했다. 너무 막중한 사명인데 떠나야 하니 저절로 간절함이 생겼을 것 같다. 이상한 소문이 도는데 떠나려고 하니 너무 기가막혔을 것이다.
장로들은 어떤가? 질 수 없는 십자가를 지라 하니 도망가고 싶은 것이 우리 마음이다. 하지만 우리 주님은 말씀을 통해 도망갈 생각 하지말고 무릎 꿇고 기도하라고 하신다.
물론 무릎을 꿇고 기도해도 바울과 작별할 상황이 하나도 바뀌지 않았다. 성령에 매여 무슨 일이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르는 이 예루살렘으로 가야 하는 바울의 상황도 바뀌지 않았다. 그러면 기도할 때 상황이 바뀌라고 기도하는 것이 아니다.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때 기도하면 그것 자체가 응답이다. 그래서 아침마다 은혜의 말씀에 부탁하는 것이다.
내가 원하는 것이 응답이 아니라 은혜의 말씀에 부탁하는 것이 응답이다. 그래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없어도 기도해야 한다. 내가 원하는 것 들으려고 하는 것이 아니다.
원하는 응답 없이 기도가 끝나고 다 운다. 이 울음은 일평생 한번 울어볼까 할 정도의 큰 울음을 뜻하는데 이것이 구원을 위한 울음이고 영혼 위한 울음이다. 바울이 에베소 교회를 성령께 부탁하듯 바울의 인생을 성령께 부탁 드린다는 장로들이 할 수 있는 최고의 고백이자 사랑의 표현이었다. 그래서 서로 크게 울고 목 안고 입 맞추며 안타까운 작별을 했다.
여기서 근심했다는 것은 자신을 심히 슬프게 하는 깊은 슬픔을 말한다. 이는 성부 성자 사이에 느끼는 슬픔이고 그 슬픔의 크기가 클수록 복음으로 말미암은 그들의 연합이 얼마나 깊었는지를 보여주는 슬픔이다. 우리 부부관계가 깊은 연합이면 슬픔이 큰 만큼 이별도 사별의 슬픔처럼 큰 슬픔으로 온다.
그만큼 바울과 장로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얼마나 십자가 안에서 가족 같은 연합으로 한 공동체가 되었는지 보여준다. 그러나 그 신자의 슬픔은 다시 만날 기쁨에 비례하듯 복음으로 말미암아 천국에서 만나면 얼마나 기쁘겠는가?
우리가 우는 것은 포기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눈물이 없어지는 것이 포기했다는 것이다.
앞으로 닥칠 환란 때문에 기도하는 것은 좋은 의미이다. 스데반이 죽었을 때 경건한 자들이 크게 울었다. 초대교회는 바울의 눈물이 많았다. 눈물이 많은 곳은 그래도 이세상에서 소망이 있는 곳이다. 슬퍼서 우는 것은 복음의 장소니 소망이 있고, 이웃을 위해 눈물 흘리는 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차원이니 이래저래 눈물은 좋은 것이라 생각된다.
하지만 그들이 무릎을 꿇고 함께 드린 기도는 땅에 떨어지지 않았다. 이때로부터 한 세대 즉 30년 이상 시간이 지났을 때 에베소 교회는 여전히 아시아 중심교회로 역할을 하고 있었고 요한계시록의 7교회 중 하나로 자리매김 했다. 비록 주님께 처음 사랑을 버렸다고 꾸중 들었지만 그래도 꾸중 받을 수 있는 교회로 남아있었다는 것이다. 이것이 참 중요하다 생각한다.
꾸중을 받을 수 있는 교회, 교인도 많지 않다. 그렇게 꾸중을 받았지만 지금까지 2000년 교회사에 에베소 교회는 그 이름을 찬란히 올리고 있다. 우리들교회가 그동안 치리를 많이 했다. 근데 그 치리를 받아내신 분은 우리들 교회의 진정성을 알렸기에 갑절의 은혜가 있을 줄 믿는다.
그래서 우리의 무릎이 꿇어지는 사건은 사실 축복이다. 우리가 다 저절로 무릎 꿇을 수 없는 교만한 존재들이다. 사람막대기와 인생채찍으로 무릎 꿇게 하시니 우리가 구원의 길을 벗어나지 않게 되는 것이다. 처음사랑을 일어버릴 수 없게 하셨다. 하나님을 향한 간절한 마음으로 성령에 매여 사명을 감당하는 인생을 살 수 있게 해주기에 이것이 감사한 것이다. 우리들교회는 개척때 부터 아둘람 공동체였다. 그래서 간절함이 있다. 말씀 앞에서 무릎 꿇고 기도하는 영성이 그때부터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간절한 기도의 영성을 주님 오시는 날 까지 이어가기를 축복 서원 기도한다.
적용) 여러분은 서서 기도하고 싶은 상황에 있습니까, 무릎을 꿇을 수 밖에 없는 상황에 있습니까?
무릎 꿇고 함께 기도할 공동체 안에 들어와 있습니까, 바깥에서 구경만 하고 있습니까?
- 아무것도 할 수 없이 너무 아픈 상황. 간절히 낫고 싶다. 할 수 없는데 해주시는 것들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나님께 돈을 드리기 아까워 하는 것들이 있다.
=> 무릎이 안꿇어지는 상황을 통해 무릎이 꿇어지는 상황이다. 육이 무너져 영이 세워지면 다시 육도 세워진다 하셨다.
- 나만 아프고 정리 안되고 최소한의 삶을 살고 있다 생각해서 불쌍하게 여겼는데, 남들을 위해 기도할 수 있어서 너무 감사하다.
저만 불쌍하다 생각했는데 나보다 힘든 사람도 많고, 육체적인 고통은 없이 지냈던 것 같다. 여태껏 감사함으로 기도한 적이 없다. 그런데 그렇게 감사하니 정서적으로도 더 좋은 것 같다. 그래서 감사하다는 기도가 나온다. 아인이 생각하며 더 감사해서 무릎이 꿇리는 것 같다.
- 서서 기도하고 싶은 상황. 여전히 내가 잘 번다 하는 교만, 하나님을 못 믿는 불신과 혼자 힘으로 해결하려는 불안, 십일조를 제대로 떼지 않은 것들
네살 아인이 이야기
열이 나서 구급차 안에서 출발 못하고 2시간 가까이 기다렸다. 그런데 그때 가만히 진정하고 생각해보니 잘려나간 손가락 두개 중 하나를 못찾았던 상황이었다. 그런데 기다리는 시간 중 한시간 넘어서 마지막 손가락 하나를 찾아왔다고 한다. 그 다음날 뉴스를 보니 그 안전요원이 그 네살 아이손가락을 찾겠다고 에스컬레이터를 다 뜯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것을 찾아왔다고 한다.
우리는 빨리 가는 것이 기도응답인데 하나님은 두시간 기다려 세번째 손가락을 찾게 하셨다. 우리의 응답은 무엇인지 모르니 기도해야 한다. 가장 좋은 길로 인도해 달라고 공동체와 더불어 기도해야 한다. 이걸 통해서 이번년도 처럼 살아가며 힘든 해가 없었던 것 같다고, 식당하며 힘들어 빚지고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권찰이 유산하고 고소 사건에 얽히고 아들 사건까지 왜 힘든 일이 계속 반복해서 묵상하는데 최종적으로 제가 다른 길을 계속 가는 것이 깨달아졌다고 한다. 하나님께서 자식을 치니 자식을 통해 제가 그렇게 고민하고 붙들고 있고 내려놓지 못하는 것들이 전부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었다.
4년간 11가지의 사업을 했는데 모두 실패하고 빚더미에 앉게 하신 이유를 알게 되었다고 한다. 인생 채찍으로 저의 무릎을 꿇게 하신 것이다. 우리가 해석할 때 왜 빨리 안 가는가 하며 해결되길 원한다. 구급차가 안가려고 해서 안간 것이 아니다. 항상 해석부터 해야 해결이 되는데 늘 해결을 기도응답으로 생각한다. 이 목자님이 청년부 출신인데 아직 세상에 쌓아두는 것이 너무 중요하기에 11가지 사업이 다 안되었다. 다 안되는 이유는 허황되기 때문이다. 하다 하다 안되어 하나님의 택자라서 깨닫게 하신 것이 은혜다. 우리들 교회에 붙어만 있으면 수지맞는 것이 이 말씀이 아닌가 싶다. 안되는 것은 욕심이고 허황된 것이기 때문이다. 이유가 있어 안되는 걸 아셨으면 좋겠다.
뭐가 없어도 하나님의 뜻이면 그 사람이 절대 지옥을 살지 않는다. 주는 것 보다 받는 것이 복이있어서 그렇다. 그러나
내 인생의 목적이 잘먹고 잘 사는 것이니 늘 되는 일이 없다고 한다.
아인이가 큰 일을 했고, 우리가 이렇게 성령의 부탁하며 우리의 모든 식구들을 하나님께 올려드렸으면 좋겠다.
말씀 맺음
성령의 부탁은 은혜의 말씀이 놓여지기를 부탁해야 하는 것이다. 파라티테미의 말씀을 옆에 놓으라고 부탁하는 것이다.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됨을 기억하라 한다. 우리의 복은 이세상의 복이 아니라 천국의 복 마카리우스의 복 삼위 하나님의 복이다. 이 복은 세상이 전혀 알지 못하는 복이다. 그러니 이렇게 사명감당하는 분들이 많다. 그러니 그것을 위해 간절히 무릎 꿇고 기도하라고 한다.
[기도제목]
* 이지현 기도제목
1. 들은 말씀, 일상의 삶으로 잘 살아낼 수 있도록
2. 부모님 판단말고 나부터 전능자 같은 돈의 가치관에서 하나 더 말씀으로 옮겨 가며 주님께 부탁할 수 있도록
3. 부모님 건강 지켜주시길
* 김교희 기도제목
1. 불안과 감정 요동이 가득한 나를 매일 말씀 앞에 맡겨두고 기도하도록
2. 모든 것이 합당하다는 진짜 믿음의 고백이 생기도록
3. 가족을 말씀 앞에 맡길 수 있는 믿음과 지혜 주시고 때에 맞게 적용하게 해 주시도록
4. 적절한 처소 주셔서 감사하고 회개합니다. 남은 과정도 잘 인도해 주시도록
류가영 기도제목
1. 무릎 치료 시 통증을 감해주시고, 후유증 없이 예전의 건강상태로 지켜주시기를
2. 남자친구 코로나 확진 사건에서 건강 지켜주시고, 진정한 구원의 시기가 될 수 있기를
3. 저와 어머니가 더욱 말씀 앞에 나아가고 코로나로부터 지켜 보호해주시기를
4. 12월 및 내년에 십일조를 잘 지키고 기쁘게 드릴 수 있기를
5. 곧 인사이동 희망서 제출 시기가 다가오는데, 저의 건강을 불쌍히 여기시어 도보 20분 거리의 강북 사무실로 인도해주시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