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1031
사도행전 20:1-12 성령의 안아주심
조어락 이라는 심리학자는 안아주는 것이 건강에 아주 좋다고 하는데요. 스트레스 호르몬인 코티솔을 줄여주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안긴다는 것은 전인격으로 흥분하고 반응하는 것이에요. 사람이 안아주는 것만도 이렇게 좋은데, 하나님이 안아주시는 것을 얼마나 더 흥분되겠습니까? 오늘은 10절 유두고를 안아주심처럼 성령의 안아주심에 대해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1. 권면의 말씀으로 위로하십니다. 1-2
에베소 연극장 소동을 겪으며 에베소 성도들이 얼마나 마음을 졸였겠습니까? 성난 군중이 무슨 짓을 할지 모르니 많이 두려웠을 것 같아요. 정말 성경을 보니까 군중심리가 너무 무서운 거 알게 됐죠. 하나님께서 서기장을 쓰셔서 성령의 진정을 주셨지만 그래도 심리적으로 트라우마가 있었을 것 같아요. 돈이 좋아 성령의 세력을 여전히 대적하는 데메드리오 세력이 군중에게도 우리에게도 남아 있었을 거죠? 그래서 언제든 선동을 당해 타오를 준비하고 있는 군중도 여전히 있어요. 제가 아무리 설교를 해도 여러분들의 나눔을 보면 여전히 진영논리에 굳세게 변하지 않는 것을 보게 됩니다.
소요가 그친 후 바울이 제자들을 부릅니다. 바울이 에베소 제자들을 불러 무엇을 했습니까? 권했다고 해요. 원어로 파라 칼레오 파라는 옆에 칼레오는 부르다, 외치다, 부르짖다 이런 뜻도 있고 이것은 파라클레토스와 같은 얘기예요. 곁에 불러놓고 부모의 심정으로 끊임없이 위로하고 권면하는 것이죠. 그냥 옆에 있을 뿐인데, 내 이름 한번 불러줬을 뿐인데, 그냥 우리 목장에서 이 처절한 현실을 그냥 들어줬을 뿐인데, 손 한번 잡아주고 그저 부르는데 그것이 위로가 되고, 격려가 되고, 일으켜 세워서 안아주심이 되는 것입니다. 그 안아주심으로 바울은 자신도 또 파라클레오 하려고 마게도냐로 떠납니다. 바울은 우리와 달라요. 소동이 있을 때는 죽고자 그곳에 있고 소동이 끝나니까 제자들을 권하고 떠납니다. 바울의 관심은 오직 제자들에게 있습니다. 제자란 자발적으로 묶여 있는 사람을 말합니다. 나를 위해서 살지 않고, 나를 부른 그를 위해서 사는 사람 나를 부르신 이의 뜻에 자발적으로 묶여 있는 사람이 제자입니다. 그러니까 바울도 예수님도 무리에 집중하지 않고 항상 소수에 집중합니다. 마게도냐 도시에서 바울이 겪은 일은 생각해 보면 칭찬과 인정이 아니라 매 맞고 갇히고 모함과 괴롭힘이었잖아요. 그런데 바울은 다시 심방하며 거기 제자들을 여러 말로 권합니다. 예수님 때문에, 복음 때문에 사회로부터 경계와 무시와 비난의 대상이 된 형제와 자매들을 향한 바울의 간절한 마음이 여러 말로 표현이 되었을 것이에요. 세상에 기댈 것 하나 없는 성도들에게는 바울이 전해주는 하나님 나라의 말씀이 유일한 피난처가 되었을 것이에요.
코리아 갓 탤런트의 최성봉 형제는 우리 모두에게 희망의 아이콘이었어요. 그런데 이 형제가 거짓으로 말기 암이라고 했다는 거예요. 왜 그랬을까요? 5살부터 공중화장실에서 먹고 자고 매 맞고 그에게 얼마나 트라우마가 많았겠습니까? 누구도 파라클레오하며 옆에서 있어 주며 같이 외쳐줄 사람이 없었겠죠. 고아든 아니든 에베소의 아시아든 마게도냐든 성도의 삶은 말씀 없이는 살 수 없는 상황이에요. 주님은 성도를 고아처럼 내버려 두지 않으세요. 이렇게 왜 소동이 없는지? 왜 분란이 일어나는지? 왜 이런 일을 당해야 하는지? 말씀으로 해석해 주세요. 어떻게 버텨야 하는지 살길을 보여주십니다! 그렇게 하루하루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내면 성령의 해결을 주세요. 이것이 성령의 안아주심이예요. 어찌할 바를 알 수 없는 기가 막힌 상황 가운데 말씀이 임하여 상황을 해석해 주니까 해석이 되어서 통과할 수가 있는 것이에요.
Q. 여러분이 위로받아야 할 트라우마는 무엇입니까? 힘든 사람 옆에서 같은 목소리를 내며 소리치나요? 보기도 힘들어하나요?
2. 함께 가는 우리 공동체 그 자체입니다. 3-6
3-4, 마게도냐 심방을 마치고 헬라 즉 아가야 고린도 지역으로 간 바울은 거기서 석 달을 머물러요. 이제 고린도 중심으로 머물렀겠죠. 그런데 2절 마지막에 고린도라고 해도 되는데 헬라라고 표현해요. 헬라라는 굉장한 긍지가 있기 때문에 일부러 선민의식을 인정해 주려고 헬라라고 표현을 했어요. 바울이 기막힌 이 구원을 위한 디테일에 늘 제가 이렇게 놀랍니다. 그런데 거기서 들리는 소식이 고린도전서 9:1-2 바울의 사도권을 의심하고, 고린도후서 2:4 큰 눌림과 걱정과 눈물이 있다고 했어요. 배신감으로 보고 싶지도 않은 고린도였겠지만 석 달이나 머물면서 사랑과 관심으로 양육합니다. 항상 바울 사도의 가는 여정을 생각해 보면, 항상 우리하고 거꾸로 하는 거예요. 그래서 최대의 걸작 로마서를 이 석 달 동안 기록을 하게 되는 거예요. 이게 성령의 경영이었던 거죠. 곳곳에 바울의 생각, 바울의 계획, 그리고 이제 생각지 못한 적용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바울도 키워 가시고 메시지도 키워가신다는 생각이 들어요.이번 미국 집회도 코로나라는 소요로 막혀 있던 길이 열리자 미국도 보아야 하리라는 저의 작정을 아시고 하나님께서는 성령의 경영으로 미국으로 인도하셨어요. I am put here가 제가 갔던 첫 베델교회의 세미나 주제였어요. 그 말씀 그대로 하나님께서 저를 미국 땅에 던져놓으셨어요. 내 의지와 상관없이 지금까지 이렇게 목회도 하게 됐는데 미국이라는 땅까지 이끄셨는데 이번 선교 여행이 최대의 걸작이 되기를 바랍니다.
바울은 3개월 동안 머물며 로마서를 쓴 후 예루살렘으로 가려고 했어요. 그때 예루살렘에 큰 흉년이 있어서 마게도냐의 여러 교회에서 모은 헌금을 전달하기 위해 지름길로 배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가려고 했는데, 그때가 유월절 기간이어서 많은 유대인들이 배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가는 시기였어요. 그래서 바울은 그들이 배에서 죽이고 바다에 빠뜨리려는 유대인의 간계가 있음을 알고 다시 마게도냐 지방으로 올라가요. 바울은 항상 웬만하면 맞서 싸우지 않아요. 왜냐하면 바울의 적은 어둠의 권세이지 유대인이 아니거든요. 유대인들을 피해 먼 길 육로로 돌아갑니다. 이때 신약성경 중 어떤 사본에는 3절에 성령이 그에게라는 부분이 삽입되어 있어요. 음모에 대한 정보를 들은 게 아니라 성령이 가르쳐주셨다는 거예요. 바울이 늘 권면하며 위로하며 격려하고 가르치니까 성령께서도 바울을 이렇게 똑같이 파라 칼레오 하면서 심방해 주시고 길을 인도해 주시고 위협을 피하게 해주는 것이죠. 바울은 지금 점처럼 낮아져 있는데 이때 효과적인 성령님이 도와주시지 않으면 그냥 점으로 왔다가 밟혀 죽을 거예요. 우리 인생엔 성령이 임하셔야 되요.
여러 교회의 대표들이 왜 바울과 함께 지금 가고 있을까요? 1차적으로는 경제적 어려움을 당한 예루살렘 교회를 위해 모은 헌금을 바울과 함께 전달하기 위함이었어요. 이들이 바울과 함께 가는 중요한 이유는! 바울에게 함께 가는 것 자체가!! 바울의 동행이 되는 것 자체가!! 바울과 바울의 사역에 그리고 이 기록을 읽는 독자인 우리에게 큰 위로가 되기 때문이에요. 1차, 2차, 3차 계획 자체가 쉽지 않은 길이고 오랜 여행을 지금 하고 있는데요.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바울을 대적하는 원수가 있는 거예요. 다른 사람들은 예수 믿고 좋아서 복음화되고 있는데 정작 바울 자신의 삶은 그냥 영육 간의 치열한 전쟁의 연속인 거예요. 이렇게 가는 이 길에 정말 성령님이 좀 안아주시기를 등 두드려 주시기를 바랄 수밖에 없는 처절한 외로움을 겪었을 거예요. 바울이 살기 등등하여서 그리스도인을 죽일 때는 혼자였어요. 주변에 지체가 없어요. 늘 살기등등하고 그냥 남 탓만 하는 사람은 혼자에요. 그리고 사명이 없다고 봐야 합니다. 다메섹 도상에서 회개한 후에도 오랜 기간 홀로 지내다가 때가 되어서 바나바의 권유로 사명의 부름을 받았을 때부터 한 사람씩 지체가 생깁니다. 성령께서 바울에게 함께 가는 지체들을 주셔서 안아주십니다. 옆에서 불러주시고 같이 외쳐주시고 이름을 불러주시고 지체들과 같이 끝까지 이 길을 가라고 합니다. 이것이 성령의 안아주심이에요.
이들을 신뢰한 징표는 무엇일까요? 이들을 먼저 배를 태워서 드로아로 보내는 거예요. 아마 구제 헌금을 가지고 갔을 거예요. 큰돈을 맡긴 채로 먼저 바다를 건너게 할 정도의 신뢰가 형성된 지체들을 허락함을 볼 수 있습니다. 이는 단순히 저 사람이 믿을 만해서 좋아서 나에게 잘해줘서가 아니라, 내가 얼마나 죄인이며 우리 구주께서 얼마나 큰 값을 지불하고 나를 구원하셨는지를 아는 사람만 돈을 넘어설 수 있습니다. 내 사명이 무엇이고 그 사명에 무거움과 내가 받은 구원의 값을 아는 사람만 돈을 다룰 수 있습니다. 아니라면 늘 사람 관계에 불평이 있어요. 성령의 안아주심은 이해타산을 넘은 참된 지체를 내 주변에 허락해 주시는 거예요.
5-6, 바울은 소수의 동역자들을 데리고 드로아까지 갔을 텐데요. 바로 여기에 누가가 있었습니다. 16:24 누가는 바울 일행을 그들이라는 표현을 하다가 20:5 다시 우리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어떤 소동이 와도 말씀으로 하나가 된 우리 공동체가 있으면 진정이 돼요. 왜냐하면 나와 같은 고난을 당하는 우리이고 나와 같이 죄와 싸우고 있는 우리이기 때문이고 나와 같이 성령께서 평안의 매는 줄로 하나가 되게 하신 우리이기 때문이에요. 한 주 예수 그리스도를 섬기며 한 말씀을 듣는 우리이기 때문이죠. 바로 우리들 공동체 자체가 성령의 안아주심입니다. 우리들 공동체에 붙어만 있는 것은 결국 성령님의 강하고 따뜻한 팔에 꼭 안기는 거예요.
Q. 내가 모든 것을 믿고 맡길 지체가 있나요? 믿는다면 그 사람이 사명이 있어서 믿습니까? 내 감정으로 믿습니까? 믿음의 공동체 우리가 되어 그 자체로 위로가 됨을 경험한 일이 있습니까?
3. 떨어지는 약함까지도 안아주시는 회복입니다. 7-12
7-8, 그 주간의 첫날은 주일이구요. 떡을 떼려는 성찬식을 말하죠. 굉장히 독특한 단어인데 떼다, 뜯다, 으깨 뜨리다 뜻이에요. 즉 예수께서 이 땅에 생명으로 오셔서 자기 몸을 십자가에 찢어 떼어 깨뜨린 고난받은 사건을 우리가 성찬식으로 묘사한 거예요. 다락방에서 주일 예배를 함께 드리며 바울의 강론이 밤늦게까지 계속됩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건 내일이면 이곳을 떠나고 언제 다시 올지 모르기 때문이에요. 어둠이 예배에 지장을 주지 않도록 등불을 많이 켰다고 했잖아요. 당시는 등불이 아마 횃불이었을 테니까 다락방 안에 산소가 부족하고 이산화탄소가 많았을 것 같아요.
9, 유두고는 복되다, 행운이라는 뜻의 이름인데요. 주로 일꾼들의 이름이고 노예의 이름으로 압도적으로 많았다고 해요. 그래서 일을 다 마치고 늦게 저녁에 예배를 드리니 피곤했을 것 같아요. 창틀에 걸터앉아서 바울의 강론을 들으려고 했는데 도저히 쏟아지는 잠을 참을 수가 없는 거예요. 그래서 결국 창문 바깥으로 3층 아래로 떨어졌습니다. 우리가 복음을 알지 못했을 때, 모두 유두고와 같이 평생 생활고에 시달리다 각자의 아픔과 고난으로 떨어져 죽은 바 된 인생이에요. 유두고 얘기가 다른 사람이 아니에요. 바로 우리 얘기입니다.
10-11, 옳고 그름으로 율법적으로 생각하면 유두고가 얼마나 연약합니까? 율법적으로 판단하다 보면 결국 하는 일이 거리두기예요. 나는 저들과 달라! 하면서 이상한 사람은 맨날 거리두기 하기에 구원의 역사가 일어날 수가 없죠. 그런데 바울은 유두고가 떨어지는 그 약함의 자리로 내려갔어요! 연약함으로 급기야 죽기까지 한 유두고의 몸에 자신을 떨어뜨렸어요. 원어로 엎드린다는 자신을 떨어뜨렸다로 유두고에게 가서 엎드려 무언가를 밀어 넣고 무언가를 덮어 버린다는 뜻이에요. 사르밧 과부의 죽은 아들을 살리기 위해 엎드린 행위를 묘사하는 단어와 같아요. 안았다는 두 손으로 함께 둘러서 붙들다는 뜻으로 신약에서 여기 딱 한 번 쓰였어요. (구약에서는 에스겔 5:3_너는 터럭 중에서 조금을 네 옷자락에 싸고) 성경에서 포옹을 뜻하는 단어 중 가장 강한 단어를 써서 꼭 끌어 안았다는 거예요. 이것은 구속사적인 공감 즉 성도의 교통을 한 거예요.
내려가서 위에 엎드리고 그 몸을 그냥 꼭 껴안고 뭐라고 말했을까요? 그의 죄가 나의 죄다! 나 역시 이렇게 떨어지는 인생이었다.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을 살인하고 핍박하고 그리스도를 죽였던 나다. 주님 나 역시 이렇게 이 청년과 같이 떨어진 인생이었어요. 나에게 주신 생명을 이 청년에게도 동일하게 허락해 주세요! 우리 주님께서 바울처럼 이렇게 내려오셨어요. 어쩔 수 없는 고단함과 슬픔과 부조리 속에 나 혼자 떨어져 죽은 줄 알았는데 우리 예수님이 내 옆으로 아니 나보다 더 낮은 종의 신분으로 내려오셨다고요. 죽어있던 내 몸에 죽어있던 내 심령에 이렇게 뭔가를 밀어 넣었어요. 나를 안고 나를 덮고 자신의 생명을 생기를 밀어 넣었습니다. 자신의 몸을 찢어 보혈로 우리를 덮어버립니다. 우리가 마땅히 받아야 할 사망이라는 심판으로 떨어져 죽게 되는 심판을 우리 예수님께서 대신 받으십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이 그렇게 안아주시니까 이제 내려갔던 인생이 올라갑니다. 어디까지 올라갑니까? 중단되었던 그 예배의 자리 아들만 먹을 수 있던 그 떡상의 자리 주님의 아들과 딸의 자리까지 우리를 올리십니다. 떨어져 죽는 사건도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를 말씀의 강론을 막을 수가 없습니다. 가장 거룩하신 예수님께서 가장 더러운 십자가를 지셨어요. 우리의 거룩도 결국 구원 때문에 연약한 가족과 지체를 끌어안는 것입니다. 그 연약함과 아픔과 죄악을 내 연약함과 아픔과 죄악으로 안아주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성령의 안아주심이에요.
12, 비천한 인생이었던 유두고의 삶이 다른 사람에게 약재료가 되며 다른 사람의 위로가 됩니다. 유두고는 한 게 아무것도 없어요. 힘든 몸을 이끌고 예배의 자리에 나온 것밖에 없어요. 한 사람의 연약함을 예수의 마음으로 안아주면 공동체 전체가 엄청난 위로를 받게 됩니다. 생명의 회복이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생명보다 돈이 중요하고 명예가 중요하고 쾌락이 중요하다고 착각을 해요. 생명을 주시는 하나님은 보이지 않으니깐 말초적으로 내 눈 앞에서 잘 해주는 사람 외에는 누구도 고맙지가 않아요. 그래서 늘 피해의식 속에 불평을 합니다. 피투성이가 되면 죽어야 한다는 생각은 세상의 생각이고요. 마귀가 주는 착각이에요. 피투성이라도 살아야 한다는 것이 성령의 생각 구원의 생각입니다. 여러분이 어떻든지 여러분이 어떻게 오해하든지 그 연약함 그 떨어지는 연약함을 우리 성령님께서 이 시간 말씀으로 꼭 안아주실 거예요. 아무리 힘들어도 여러분은 살아만 있으면 돼요. 그것이 가장 식구들을 지키는 비결이에요. 살아만 있으라고 살아내라고 그래서 구원을 누리라고 여러분을 끌어 안아주십니다. 성령의 안아주심은 결국 여러분 안에 생명을 회복시키실 거예요.
여러분을 안고 계신 성령께서, 여러분이 당하는 모든 사건과 고난보다 강하시기 때문에 여러분을 반드시 살려주시고 회복시켜주실 것을 믿습니다.
Q. 이제 다 끝났다고 절망하는 것은 무엇이고 나를 안아주시는 성령님의 은혜를 헤아리는 것은 무엇입니까? 지금이라도 성령님의 팔을 붙잡기 위해 내가 내려가 엎드려 끌어안는 적용 중에 어디까지가 되고 어디까지는 안 됩니까?
[기도제목]
은우
1. 매일마다 자리에서 내려와 싸매고 생명이 있다 함으로 전시에 붙여 준 지체 그리고 나의 구원위해 기도하기
2. 성령의 소동 끝에 돈이 있음을 알고 진정시켜 주시고 말씀으로 안아줌 매일 누리도록
3. 전시 기간 모든 사건 사고로부터 보호해 주시고 마무리까지 갈 수 있도록
은진
1. 자다 깨면 놀라지 않고 기도하겠습니다.
2. 성령의 진정으로 말씀으로 나의 모습을 직면하고 인정할 수 있도록
3. 목장과 말씀으로 위로 잘 받고 가며 먼저 나의 구원위해 기도하도록
4. 매일 주시는 말씀으로 해석받아 하나님 뜻으로 인도함 받을 수 있도록
크리스틴
1. 알맞은 치료 받을 수 있는 선생님 만나게 해주시도록
2. 허락해 주신 일 무리하지 않을 수 있게 지혜 주시도록
3. 먹는 것 조절하여 영육의 거룩함 잘 돌볼 수 있도록
지향
1. 미디어 재미있게 즐기기, 큐티 시시때때로 묵상하기
2. 남자친구와 목장에서 편안한 마음으로 잘 나누고 갈 수 있도록
3. 목장 예배를 위한 새로운 처소 허락해 주시고 수고를 계수해 주시도록
예선
1. 부모님과 경계를 잘 지킬 수 있도록
2. 두려움이 아니라 감사하며 사명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3. 양육에서 계속 잘 나누고 갈 수 있도록
보련
1. 백신을 맞고 힘이 듭니다. 속히 회복될 수 있도록
2. 사람의 기대, 말 아닌 예수님이 주신 말씀에 집중할 수 있도록
3. 내일 병원 가는데 오고 가는 길 지켜주시도록
4. 양교 잘 마칠 수 있게 도와주시도록
5. 다니는 직장 잘 마무리하고 회복할 수 있는 시간도 허락해주시고 예비하신 새로운 곳에 연결해주시도록
현경
1. 자립신앙과 나의 구원을 위해 기도하도록
2. 하나님께서 부어주신 은혜에 감사 기도하도록
3. 주님의 십자가 앞에서의 내 모습을 세밀하게 볼 수 있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