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10.24. '성령의 진정' (행 19:32-41) 김양재 담임목사님
지난주 곳곳에서 소동이 있었다.
한 초원의 부목자님들 나눔
수억의 빚, 연이은 암사건, 급성 전립선 염과 끊어지지 않는 야동, 퇴직 후 다른가족들이 무시하고 반발하는 것, 시험 불합격, 딸의 자퇴소동, 학교가기 싫은 아들, 본부장과의 갈등, 강아지 케어 문제, 아이들의 큰 수술, 금전 손해, 접근금지가 풀렸지만 큰아들이 만나고 싶지 않은 사건, 부동산 투자 취소, 접촉사고 후 목장 처방이 세서 싫다는 소동..
소동 나눈 것 자체가 우리 수준에 맞게 성령께서 소동 진정시켜주시는 것 같다.
성령의 진정에 대해 생각해보겠다.
1. 무리의 분란 때문에 필요합니다.
32절
당시 에베소의 야외극장은 2만5천명 정도 수용할 수 있는 당시 로마 제국에서 가장 큰 극장이었다. 투표권 가진 시민들이 시의 대소사를 결정하기 위해 모이는 장소로도 쓰였다.
지난주 데메드리오의 선동 듣고 바울 따르는 세력에게 아데미가 무시당했다고 생각하는 시민들이 분노하여 가이오와 아리스다고를 붙잡아 처벌하고자 연극장으로 몰려갔다.
그런데 이 부분을 성경이 아주 이상하게 해석 한다. 데메드리오 연설로 모인 무리가 분란하여 태반이나 어찌하여 모인 줄 모른다고 한다. 온 시민을 떠들썩 하게 만들며 인민재판의 현장을 만들었는데 정작 그 내용도 모른 채 각자 자기 소리로 떠들기만 했다.
누가는 이 연극장에 모인 무리를 '에클레시아'라고 부른다. 이 단어는 특정 목적으로 모인 군중을 말한다. 특히 나랏일을 시민들 스스로 결정하기 위해 모인 민회이다. 오늘날 국회나 의회 같은 것이다. 신약에서 교회를 표현할 때 이 단어를 썼다. 그런데 예외가 있는 본문이 오늘 이 구절이다. 즉, 에클레시아 원래 뜻인 시민의 무리, 군중으로 쓰였다.
교회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는 한 마음과 한 뜻이 되는 것이다.
행 4:32절에 믿는 무리가 다 한마음 한 뜻이 되었다고 한다. 화합과 일치가 교회의 중요한 특징이다. 연극장 같이 럭셔리한 곳이 아니라 평범한 가정집에 모여도 교회에는 화합과 일치가 있다. 그런데 화려한 에베소 극장에 모인 사람들에게는 이런 화합과 일치가 없다. 이름은 똑같이 에클레시아 인데, 교회같이 모였지만 극장에 모인 군중은 하나가 되지 못하고 각자 자기 주장만하고 있다.
당시 연극장은 연극 공연 뿐 아니라 연설, 강연도 이루어졌다. 근데 오늘 연극장이 모였다고 한다.
인생은 연극 같다. 맡겨진 연극처럼 사는 것이다. 누구는 생업을 위해 일생 시간을 쓰다 갈 것이다. 모두 남의 인생 살다가 다 허무하게 끝난다.
지난주 쇼팽 국제콩쿨이 있었다. 온라인으로 공개오디션을 했다. 전세계에서 피아니스트가 500명지원하고 결선에 12명 뽑혔는데 거기 한국인 한 명이 들어갔다. 이 한번의 연주로 피를 말렸을 텐데 입상은 못했다. 그런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이 연주를 준비하지 않았다면 인생이 어디로 와서 어디로 가는 줄 모르기에 붙어도 떨어져도 허무할 것이다. 이처럼 인생이 끝날때도 가짜로 살았다면 결론 없이 막이 내릴 것이다.
쇼팽 콩쿨이 정말 유명하다. 그런데 2000년의 대단한 콩쿨의 중국 최연소 우승자였던 리윈디가 어제 성매매로 체포되었다고 한다. 믿음 없이 공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그야말로 연극이다. 최고가 되면 누려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다 끝에는 돈이 있다고 하는데, 돈이 생기면 20년이 지나도누리지 못한다는 들면 내가 왜 피아노를 치지 하는 생각이 들 것이다.
잠깐인 인생의 연극무대에서 있으면 있어서, 없으면 없어서 죽어라 자기 필요를 외친다. 내가 왜 못누리나, 내가 왜 떨어지나, 경제를 살려내라, 입시에서 건저내라, 보수 진보 경상도 전라도 등 관심 있는 자기 이해타산으로 외친다. 데메드리오에게 다 선동당했다고 하지만 결국 다 자기 이해타산으로 가서 외치는 것이다.
그래서 에베소 군중의 특징은 분란이다. 이것은 요란하다는 단어와 같은 어근의 언어이다. 서로 다른 여러 소리가 섞여서 무엇인지 구분할 수 없는 어지러운 소동이다. 바벨탑의 혼란과 분란이다. 아무리 좋은 장소에 품격 있는 이름으로 모였다고 해도 그 중심에 하나님이 없으면 분란만 일어난다. 결국 왜 모였는지 알 수 없는 지경에 이른다.
이렇게 교회 다녀도 성경적 가치관이 없으면 각자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한다. 100% 죄인인 인간이 어찌 선한 것이 있겠는가. 불륜을 행해도 내 소견에 옳으면 그까짓 것이 요즘 세상에서 무슨 죄냐 하고, 유교적 가치관으로 내 소견에 틀렸으면 죽어라고 죄라고 한다. 구원 때문에 생각하는 사람이 없다. 죄의 바로미터가 자기 소견이다. 그래서 싸움이 그칠 날이 없다. 부부나 교회나 어떤 회사나 자기 소견대로 산다.
바울은 청년시절 용감해서 자기 소견대로 옳은대로 그리스도인들을 잔멸하는데 앞장섰다. 하나님과 예수그리스도를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근데 그는 후에 그리스도를 안 후에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겼다. 그렇기에 주님 만난 바울과 에베소 성도들은 달랐다. 에베소에서 죽이고자 해도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는 하나님 나라의 증인된 삶을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왜 그런가? 연극배우가 아닌 진짜 삶을 살고 있었기에 비록 고난 당해도 내가 왜 살고 무엇을 위해 걸어가야 하는지 분명히 알고 있었기에 어떤 일이라도 증인의 길을 갔다.
하나님 나라의 길을 모르면 연극무대에서 떠들고 외치다가 속절없이 이 땅에 어찌 모였는지 알지못하더라 하며 막이 내릴 것이다. 세상의 모든 부를 얻고서도 스스로 실패했다는 슬픈 유언과 함께 떠난 사람, 월마트 창업자인 샘 월튼이 한 이야기다. 결국 그는 자신은 실패했다고 하며 갔다.
그러나 바울이 군중속에서 하나님 나라 전하니 한 두사람이 하나님 나라로 입성한다. 아시아 관리, 아리스다고, 가이오 등이 돌아왔다. 이 소수의 사람이 바울을 돕고 일꾼이 되어 2000년 동안 인류를 변화시키고 있다. 여러분이 변화시키는 한 사람이 앞으로 오는 세대의 주역이 되어 변화시킬 줄 믿는다.
적용) 여러분은 연극무대에서 암, 부도 등의 막이 내려도 갈 곳 없는 각자 삶을 살고 있습니까? 갈 곳이 있는 하나님 나라의 시민입니까?
2. 군중심리를 경계해야 합니다.
33-34절
아마 무리 중 아데미를 모욕하는 사람들 중 유대인이라고 지적하는 사람들이 있었던 것 같다. 그러니 분란 중에도 유대인은 위협을 느꼈을 것이다. 불과 몇 해전에 로마에서 쫒겨난 일이 반복될까 두려웠을 것이다. 그러나 에베소인은 유대교나 기독교를 똑같이 본다. 똑같은 분파에서 나온 종교로 본다. 그래서 유대인들이 유대인과 기독교가 다르다고 알리려고 단결하여 자기 목소리 내려고 구리장색 알렌산더 앞세워 변명 하려 한다. 그러나 유대교 기독교, 심지어 이슬람도 모두 유일신교이다. 그러면 아데미 여신과 우상에 대해서는 유대교도 같은 의견을 가져야 한다. 그러나 자신의 안전을 위해 바울과 일행을 에베소 사람들을 위에 두고 다른 부류로 취급하려고 한다. 기회주의이다. 그래서 에베소 군중들에게 유대인이 기독교인이 아니라고, 바울은 기독교인이라고 우리도 바울 너무 미워하고 있다고 하려 했는데 알렉산더 말을 들으려고도 않고 도리어 손짓까지 하며 말 하려는 알렉산더가 유대인이라는 사실을 알자마자 일치 단결하여 '크다 에베소 사람의 아데미여' 라고 외치기 시작한다. 알렉산더든 누구든 유대인의 말은 안듣겠다는 것이다. 다 필요없고 자기들에게는 오직 에베소 아데미가 제일이라 외친다. 무려 두시간이나 그렇게 외친다. 누가 여러분을 핍박할 때 우리들교회 입장에서 크다 우리들이여, 크다 큐티여 하며 두시간 동안 쉬지않고 외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에베소 군중이나 유대인 군중이나 마음에 하나님을 모시지 않으니 미움과 두려움에서 헤어나지 못한다. 유대인 군중은 동족 바울은 미워하고 에베소 시민은 두려워한다. 에베소 군중은 유대인은 미워하고 아데미는 두려워한다. 거기에 모인 개개인들이 생각 태도 이권이 다 다르다. 미워하는 것과 두려워하는 것이 다르다. 그러나 각자 군중으로 모여 하나가 되니 각자 고유한 판단이 마비가 되고 알 수 없는 군중의 기운에 휩쓸려 누구를 죽이려 하고 누구를 무조건 위하려 하는 맹목적 호불호만 표출한다. 이유 없이 미워하고, 이유 없이 두려워한다. 이럴 때 말 한마디 잘못하면 큰일난다. 알렉산더가 이야기 하니 크다 에베소 하며 관용어를 계속 반복한다. 이것이 바로 군중심리다.
군중심리라는 개념을 처음으로 의미 있게 분석한 사람은 군중은 그 안에 있는 개인들과는 전혀 다른 군중 만의 심리를 가지게 된다고 한다. 군중 안에 있는 개인은 아무리 주관이 뚜렷하고 배운 것이 많아도 군중심리의 지배를 받을 수 밖에 없다. 군중이 나타내는 태도 감정 판단은 그 안에 있는 개인에게 거스를 수 없는 본능을 자극하고 피할 수 없도록 강한 전염성을 가지며 반대할 수 없는 권위로 다가오기 때문에 군중 속 개인들을 지배하게 된다고 보았다.
문제는 이 군중의 태도나 감정이나 판단이 잘못되기 너무 쉽다는 것이다. 개인보다 군중이 훨씬 더 쉽게 속아 넘어간다. 잘못된 일이라고 잘했다고 무조건 우기고 계속 반복하면 결국 대중은 다 믿게 된다고 한다. 그러나 이 믿음이 오래가지 않는다. 잠시 지나 새로운 자극이 생기면 금방 옮겨간다. 사람은 믿음의 대상이 아닌데, 사람의 모임인 군중은 그보다 더 믿음의 대상이 아니다. 천 사람의 죄인이 얼마나 무섭겠는가? 그래서 어떤 무리이든 요란과 분란이 있다. 끊임없이 부딪힌다. 하나님 없이 죄인들만 모이니 분란으로 끝난다.
이익이 있을 때는 잘 지내는 것 처럼 보이지만 사건이 생기면 분란으로 끝난다. 자기 소견이 죄인의 소견이 되니 옳은대로 늘 편 갈라서 싸울 수 밖에 없다. 가족도 교회도 공동체도 회사도 나라도... 죄인의 자기 소견이 있기에 성령의 진정이 필요하다.
성령께서 진정시켜주시지 않으면 개인이든 무리든 분란을 피할길이 없다. 이것을 인정하느냐 하지 않느냐의 차이이다. 나는, 우리 무리의 군중은 분란할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이 믿음이다. 군중은 내 주님이신 하나님을 안 믿고 다 자기를 믿으라 한다. 내게는 절대 분란생기지 않을 것이라 한다. 우리 무리는 절대 분란 없을거라고 하며 착각에서 벗어날 수 없다. 하나님을 믿어야 내 인생이 분란으로 끝날뻔한 인생임을 인정할 수 있다. 그러나 분란이 된다는 것을 안 믿으니 그 여친 남친 말을 믿고 당신 눈에서 눈물 나지 않게 해주겠다는 말을 믿는다. 그 말 듣고 결혼했다가 분란이 생기면 전부 죽으려 하고 이혼하려고 한다.
그래서 믿음의 결혼 해야 한다. 믿음의 결혼은 서로를 믿고 가는 것이 아니라 찌질한 것 다 드러내고 하나님을 믿고 결혼했기 때문에 사람이 아니요 벌레라는 다윗의 고백이 믿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어떤 상황에서도 놀라지 않고 그럴 수도 있지 하며 넘어가는 것이지 내가 잘나고 의로워서 이혼 안하는 것이 아니다. 이혼할 수 밖에 없는 사건이 많다. 우리도 얼마나 극단적인 상황이 많다. 경찰도 왔다. 그러나 아무도 이혼하지 않는다. 18년간 매주 사건이 일어나는데도 그렇다.
어떤 분은 남편의 알코올 중독이 심하다 한다. 온라인 예배 드릴때도,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막걸리 두고 마시고 직장도 가장 오래 다녀봤자 4개월이라 한다. 근데 아내가 너무 잘 참고 온유하여 참고 살려고 했다. 여기도 이혼 말이 나와 우리들교회에 나왔다. 근데 목장에서 남편의 거짓말에 이 온유한 아내가 뻥치시네 했더니 드디어 아내가 건강해지셨다며 목장에서 눈물까지 흘리며 격려해주셨다고 한다. 아내가 늘 남편에게 참고 살다가 남편이 목장에서 나눴을 때 뻥치시네 했더니 드디어 아내가 건강해졌다며, 너무나 감동받으셨다는 것이다.
또 남편과의 다툼으로 딸이 경찰에 신고하는 바람에 남편이 혈기충천해서 폭행하니 딸과 모텔로 피신하는 사건이 있었는데, 가면 자기 완악함을 회개하셨다고 한다.
또 다른 목자님 나눔, 재혼해서 본인이 얼마나 친자식과 차별하는지 회개 되어 눈물 났다고 한다. 그런데 이것은 어려운 목원 감당하고 가니 말씀이 잘 들리고 회개와 적용도 잘 된다고 한다. 남편이 집 나가 있으면 그 아들이 미운 것이 당연한데도 영어도 가르쳐주고 관계 회복되어가는 것 같다고 한다. 말씀이 있으니 상처받은 가족이 모두 살아나는 것 같다고 한다.
그러니 결혼의 목적은 행복이 아니라 거룩이다. 내가 믿음이 안되면 매일 똑같다.
지금 여러분 인생의 분란이 생겼다면 그것은 성령께서 나를 찾고 의지하라고 부르시는 사인이다. 분란은 성령의 진정이 있다는 사인이다. 그러니 분란을 당할 때 어떻게 이럴 수 있냐고 분하고 억울할 것이 아니라, 주님 없이는 영원한 분란 가운데 죽을 수 밖에 없는 내 실체를 인정하고 성령의 진정을 바라고 기대해야 한다.
이 시대를 가리켜 다 민주주의 시대라 한다. 이 민주주의에서 가장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 것은 다수결의 원칙이다. 이 시대에는 절대적인 원칙보다 다수의 여론이 모든 것을 좌우하고 결정한다. 검은 것도 영향력 있는 사람이 희다 하고 거기에 다수가 동의하면 법이고 진리가 된다. 주님이 없다면 민주주의 공산주의가 다 똑같다. 인간이 행복하라고 민주주의를 만든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출애굽 때 가나안 땅에 거의 다 와서 열두 정탐꾼 보낼 때 10명은 부정적으로 보고 우리가 메뚜기 같다고 했고 여호수아와 갈렙은 긍정적으로 우리 밥이라고 했다. 백성들은 다수결의 원칙으로 10명을 선택하고 소수인 여호수아와 갈렙을 돌로 치려 했고, 결국 400년 노예생활하는 애굽으로 다시 돌아가고자 했다. 다수결이 항상 맞는 것은 아니다. 다시 돌아가서 다시 40년 광야생활 했다. 그러나 우리의 훈련 때문에 다수결도 허락하시기도 한다. 우리가 아직 거룩에 이르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니 군중심리를 경계해야 한다. 캄벨 몰가는 군중심리로 떠드는 말을 두려워 할 것이 없다고, 군중심리로 하나님 교회의 전진을 막지 못한다고, 그것은 교회에 위협되는 것이 아니며, 도리어 정치적으로 도움받는 것이 교회 위기의 시작이라고 한다.
이 시대는 군중심리가 왕 노릇하는 시기가 되었다. 우리가 잘 살아져서 그런 것 같다. 예전에는 군중심리라고 하는 자체가 약했다. 너무 못살아서 모든 것이 감사할 지경이었다. 그러나 지금 내가 배부르니 조금만 내 비위를 건드려도 데모 고소 고발 이혼 자살하기에 정확히 보니 이혼율이 아시아 1위, OECD국가 중 9위라 한다. 그런데 9위가 인구대비 상황에서는 심각한 상황이라 한다. 문자적으로 자살률은 세계 중 1위, 그 중 20대 여성들의 비율이 높다고 한다. 왜냐하면 핵가족 시대에서 아이 안낳고 집마다 자녀가 한 둘이니 다 자녀가 우상이 되어 아이들이 인내가 안되고 원하는 것을 못 이루면 쉽게 이혼하고 자살한다. 군중심리를 다 따라 하니 그렇다. 군중심리의 실체를 믿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경계해야 한다.
적용) 내가 지금 외치는 소리가 군중심리에 현혹되었다는 것을 인정하십니까? 군중심리에 현혹되어 지금 외치는 소리는 무엇입니까?
지역감정, 진영논리, 주식, 입시, 경제 등등에서 한 마디만 하면 못 들어주는 말이 있나요?
3. 원칙대로 해야 합니다.
35-36, 40-41절
소요가 2시간 넘게 지속되자 민회를 책임지는 서기장이 나서 모인 무리를 진정시킨다. 진정시키다는 헬라어는 제자리를 떠나 무질서하게 마구 튀어오르는 것을 모아서 제자리에 다시 잘 넣어둔다는 말이다. 잃어버린 질서를 회복시킨다는 뜻이 담겨있다.
이 단어가 35-36절에도 쓰인다.
진정에는 질서가 가장 중요하다. 소동에서 가장 큰 역할 하는 것이 질서이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미물만도 못한 인간에게 세례 받으셨다. 질서에 순종하셨는데 마지막이 십자가로 끝나셨다. 십자가 짐 같은 고생이다. 성경은 어디나 똑같은 이야기 한다.
오늘날도 그렇지만, 정부 관리들의 가장 큰 임무는 질서유지이다. 당시 로마는 민회 같은 지방 민주주의의 요소를 줄이고 황제의 권한을 강화하는 정책을 썼기에 민회가 일으키는 소란을 가만 놔둘리 없었다. 그런데 서기장은 시 정부 로마정부 오가는 연락관 역할을 했기에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연극장에 모인 무리를 진정시켜야 했다. 근데 여자보고 순종하라 그러면 다 뒤집어진다. 말씀이 왕 노릇해서 구속사로 깨달아야 하는데 어거지로 순종하라 하니 들고 일어난다. 교회도 어거지로 하면 안된다.
그런데 연극장을 혼란에 빠트린 무리의 외침이 서기장의 개입으로 가까스로 수그러 들었다. 서기장이 시민들에게 한 연설이 크게 두가지 이다.
첫째가 에베소 시민들이 아데미의 신전지기라는 것을 다 모르는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시민들이 크다 에베소 사람의 아데미요 라고 외치는데 그럴 필요 없다고, 제우스가 돌을 떨어트려 아데미 신전 지은걸 모르는 사람이 없다고 하며 아데미 높이니 진정하고 위험한 행동을 하지 말라고 했다.
둘째는 가이오와 아리스다고가 대표하는 사람들, 즉 두란노 서원에서 날마다 모이는 사람 때문에 흥분할 필요가 없다고 했다.
왜냐하면 37-39절
내가 가이오와 아리스도를 보며 팩트체크 하니 신전이나 아데미 여신에 대해 직접적으로 저지른 잘못이 없다고 했다. 그들 때문에 온 도시가 분란 일으킬 일이 없다고 했다.
고린도에서도 갈리오 총독이 바울 잡아서 고소했다. 바울에게 부정한 일 불량한 행동이 없다고 했었다.
그런데 그 당시 에베소 신전에는 예배드리려고 가져온 보물이 많았다. 그래서 도둑이 너무 많았다고 한다. 복음을 전해도 거짓말하고 도둑질하면 전할 자격이 없는데, 바울과 일행은 남들이 행하는 그 흔한 일을 행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니 데메드리오가 대표하는 직공 조합이 피해보상을 청구하려면 민회의 정식 절차를 밟으라고 권고했다. 그리고 무리의 민회가 행정 시 의회에 안건을 등록하라고 했다.
당시 로마제국은 식민지를 효과적으로 통치하기 위해 시 의회를 소집할 권리와 자유를 주었다. 그러나그러나 이런 배려에도 불법적인 집회 가질 경우 처벌이 엄격했다. 그런데 서기장은 이 모임을 소요사건이자 불법집회라 규정하고 흩어져야 할 모임이라고 규정했다. 합법적인 절차로 문제를 해결하라고 권했다. 이 단어가 민회, 에클레시아라는 교회와 같은 단어로 쓰였다.
교회도 불법적으로 하지 말고 소동이 나도 성령의 소동이 되며 성령의 진정을 하기 위해 모든 것을 합법적으로 해야한다. 늘 잘못한 사람에게는 잘못했다고 말해야 하는데 다른 길이 있을 것이라 말한다. 기도해주면 돈도 생기고 감옥도 안간다는 이야기를 한다. 자기 소견으로 이야기하니 이것을 불법적으로 행하는 것이 많다고 한다. 원칙의 길은 좁은 길이다.
우리는 서기장이 믿는 자 인지 아닌지 알 수 없다. 믿는자여도 밝히기 곤란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가 누구이고 어떤 사람인지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점은, 그가 연극장에서 일어난 분란사건을 진정시켜야 할 책임 가진 사람으로 이땅에 보내졌다는 것이다. 그 역할에 충실해서 분란을 진정시켰다.
잠언 16:4
우리는 서기장 때문에 기쁘고 좋은 것도 아니다. 하나님이 하신 것이다. 항상 나쁜 사람도 좋은 사람도 없다. 구원받아야 할 사람이 있을 뿐이다. 이것은 여호와께서 세팅하셨기에 하나님의 주관아래의 하나님의 섭리이다.
선동 당한 군중심리가 얼마나 무서운가? 우리도 사회적으로 경험한 적이 있고, 그 경험이 현재진행형이다. 선동 당한 군중을 막는 일은 불가능에 가깝다.
데메드리오는 본문을 잘 보면 선동만 하고 사라졌다. 어디로 갔는지 흔적도 없다. 이것이 선동꾼의 실체이다. 교묘한 말로 무리를 선동하여 큰 분란을 일으켜놓고 책임소재가 생긴다 싶으면 사라진다. 선동꾼은 절대 책임지지 않는다. 그래서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하는 사람의 말을 믿으면 안된다. 남은 것은 선동된 무리인데, 이들은 잠시 뒤의 일을 모르고 적어도 지금은 누구의 말도 들리지 않는다. 알렉산더가 나서려고 했는데, 알렉산더가 기독교인이 아니라 유대인이라고 하는 팩트도 안듣는다. 불난집에 기름을 부을 뿐이었다. 왜 이 말을 했을까 생각도 안한다.
그런데 민회의 책임자인 서기장의 말은 아무리 성난 군중이라도 끝까지 무시할 수 없다. 그의 말을 끝까지 무시했다면 감당할 수 없는 대가를 끝까지 치룰 것이다. 이는 서기장이 로마 권세를 대표하기 때문이었다. 모르는 것 처럼 소리를 질러도 로마가 와서 자기를 덮치면 끝나는 것이다. 그러니 이 세상을 위해 세상 권세가 필요할 때가 있다. 이 한 사람의 권세자가 전체를 바꾸기도 한다. 그런데 믿음이 좋아서 도와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권세자를 쓰시는 것이다. 우리가 다 권세자가 되어야 한다는건 아니지만 악인도 악한날에 쓰일때가 있기에 권세도 필요하다.
근데 세상권세가 두려워 세상의 말을 들으면 세상의 진정으로 끝날 뿐이다. 그러나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 성령의 진정이 된다. 우리가 날마다 큐티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매일 소동할 사건이 얼마나 많은가. 우리 마음 자체가 죄의 파동으로 소동을 일으키기에 하루도 잠잠할 날이 없다. 소동을 가라앉히기 위해 사람, 술과 담배, 남자 여자, 돈, 권력, 무엇이든 나를 진정시켜줄 것 같은 것을 찾아 늘 헤메고 방황하는 것이 하나님을 떠난 인생의 모습이다. 그것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또 소동을 얼마나 일으키는가?
오늘 간증하는 집사님이 이혼 안하려고 하는 3년이 가장 힘들었다 한다. 그리고 무언가를 움켜쥐었을 때 일으키는 소동은 얼마나 큰가? 그러나 말씀이 내게 임하면 내 실체 죄가 보이고 회개가 되고 주님을 만난다. 해석 없이 해결만 찾아 소동하던 마음이 드디어 말씀으로 해석되어 진정이 된다. 문제가 말씀으로 해석되어야 진짜 해결이 된다.
따라서 소란스러운 사건을 당할수록 하나님 앞에 가만히 있는 시간, 내 외침을 멈추고 하나님의말씀에 조용히 귀를 기울이는 시간, 음성을 듣는 시간, 큐티하는 시간으로 들어가는 것이 하나님의 원칙을 아는 것이고 이것을 알아야 인간의 원칙도 듣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인간적인 고정관념으로는 소동은 너무 싫고 진정은 좋다. 그러나 소동이 있어야 내 실체를 감추고 있는 포장이 벗겨져서 회개할 수 있는 것이다. 진정되었다고 마냥 좋다고 안주하면 안되고 또다시 생기는 소동을 있어야 할 일로 담담히 받아들일 수 있는 준비를 하는 것이 성령의 진정과 성령의 소동이다. 좋고 싫음의 문제가 아니다 소동과 진정도 성령께서 우리 구원과 거룩을 위해 주시는 것이다.
근데 소동이 왔는데 소동을 소동으로 여기지 않는 것이 가장 큰 문제이다. 그러면 진정이 되어도 절대 진정 성령의 진정이 안된다.
젊은 남편의 치매와 알코올중독의 기막힌 소동이 와서 온 교인이 날마다 기도하고 있다. 그런데 이것 때문에 주님을 만나야 하는데 아내집사님이 변하지 않는다. 듣고 싶은 이야기만 듣는다. 그래서 이것이 성령의 소동이 못되고 성령의 진정이 되지 못한다. 남편이 치매가 왔으면 주님을 만나야 하는데, 듣고 싶은 이야기 듣지 말고 나를 위해 진짜 이야기를 해주는 그것을 들어야 한다.
우리들교회 청년부 출신으로 중국 남편 만나 불신결혼 한 자매가 있다. 지금 남편과 함께 식당사업 하느라 중국 갔는데 코로나로 힘들다 한다. 그러니 공동체가 그립고 외롭다 한다. 이번 주 부터 목장 참석예정이라고 한다. 그래도 힘들면 생각나는 공동체이다.
소동은 소동이 되어야지 소동이 안되면 흘러 떠내려가도 그래도 맛을 보면 돌아온다. 그래서 믿음이 없어도 나오게 하고 목장에 참석하게 해야 힘들면 돌아온다. 성령의 진정이 되려면 이런 모든 것들이 필요하다.
적용) 소동을 진정시키기 위해 원칙을 지키라는 말이 얼마나 이해되십니까? 여러분은 원칙을 지키십니까? 지금 흩어져야 할 모임에 있는 모임은 무엇입니까?
원칙을 지키려면 영적으로 큐티하고 육적으로 공동체에 들어가서 날마다 물어보라. 그래야 영육간의 원칙을 지키게 되어있다. 목자가 아무리 이상해도 물어본 것 자체만으로 하나님이 긍휼을 베푸실 것이다. 우리가 유익을 구하는 모임이 아니기에 하나님께서 역사하신다. 하지만 서기관은 이 모임을 해산시킬 뿐이다. 이것이 그의 한계이다. 하지만 성령의 진정은 소동을 잠재우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생명을 낳는 것이 목적이다.
초등학교 5학년 아이가 외할머니 생신 축하 카드 보내어 부부목장 가시라고 한 이야기
손녀가 편지 쓰고 외할머니 생신에 방문했는데 거절 받았다고 상처 받았다고 목장에서 나눴다 한다. 이모의 아픔이 있고 집이 난리인데도 그렇다. 이 외할머니는 딸로 인한 소동이 찾아왔고 손녀가 생일날 손편지를 썼다. 서기장의 이런 진정처럼 외할머니에게 축하를 드리고 맛있는 음식을 인정해주고 팩트를 말했다. 그리고 서기관은 무리와 같이 해산한 것이 한계지만 목장은 중재한 뒤에 생명의 말씀을 넣어주고 우상 불태운 뒤 사명을 넣어주니 생명을 낳게 되지 않는가? 공동체와 함께 자란 이 귀한 딸의 편지, 목장과 공동체를 신뢰하며 권하는 편지와 아이들의 나눔이 놀랍지 않은가? 아이들이 해결책을 안다. 이모 때문에 너무 힘들어하는 외할머니 외할아버지가 목장가면 해결이 되는데, 본인도 목장가서 이런 이야기 하면 선생님이 다 들어주는데, 그렇게 생각한 것이다. 이렇게 계속 마른뼈에 생기가 들어가는 것이다. 이것이 성령의 진정이다. 외손녀가 진정시키는데 외할아버지 외할머니는 자기 딸의 일인데도 들리지 않는다. 이처럼 성령의 진정은 소동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생명을 낳는 진정이 되는 것이다. 소동이 있어야 성령의 소동이 되고 그 소동이 성령의 진정이 되어야 생명을 낳는다.
우리에게 수많은 사건이 있었는데 경찰 다녀가고 난리를 쳐도 이혼을 안 한다. 간증하시는 분 아내도 교회에 오면 이혼을 안 하는데, 말씀이 안 들려 이혼하는 것이다. 그래서 전도주일에 많은 사람들을 이끌어야 한다. 계속 다 사망의 길로 인도하는 것이다. 간증하신 분이 말씀 한번 듣고 돌이켰다고 한다. 한번이 중요하다.
[말씀맺음]
성령의 진정은 무리의 분란 때문에 반드시 진정시켜야 할 필요가 있다. 사람들은 다 자기 이해타산 때문에 떠든다. 나중에는 내가 왜 이렇게 화났는지 자기도 모른다. 끝에는 돈이 있다.
무서운 것은 군중심리이다. 남들이 말하면 누구도 반발하지 못한다. 똑똑하고 경험 많은 사람도 군중 속에서 말하지 못한다.
길은 원칙대로 영육의 원칙대로 하는 것이다. 큐티하고 공동체 가면 삶에서도 원칙을 지키게 되어있다. 그런데 큐티 안하고 원칙대로 하는 사람은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하는 것이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하는 사람은 기쁨이 없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해야 원칙을 지켜도 생색이 안난다. 자기 원칙대로 가면 자기 의로움 때문에 생색이 나서 옆 사람들이 다 죽는다. 이것은 십자가의 길 순교자의 길이다. 좁은 길을 걸어야 한다.
[기도제목]
*이지현
1. 막이 내린 것 같이 소망이 없어 보여도 세상 기준의 물질, 외모, 나이라는 잣대의 군중심리가 아닌 하나님을 소망하며 때를 잘 인내하고, 불쌍히 여겨주시기를.
2. 여전히 나를 의지하는 연약한 상처를 벗고, 완전한 최고이신 주님을 겸손히 의지할 수 있도록
3. 진로와 건강에 대해 하나님의 인도하심 잘 받아 성령의 경영이 되도록
4. 우리 가정의 예배가 회복되고 특히 아빠의 수고가 그치고 인격적으로 주님을 만나실 수 있도록
5. 추수감사주일 VIP로 예전 대표님 초청할 수 있도록
6. 알맞은 운동 할 수 있게 인도해주시길
*류가영
1. 성전 가까이 오고 싶다는 서울시 전입의 초심을 잊고 살았는데, 예배와 목장 사수하는 원칙 지키기
2. 남자친구 구원
3. 위드코로나로 현재 근무량에서 최소 2~3배의 근무량이 닥칠 예정인데, 근무시간 이상으로 더 근무하려는 욕심 내려놓기
4. 신교제 신결혼이 내 힘으로 되지 않는 것을 인정하고, 목장사수 본을 보이기
5. 영육간 강건
*김교희
1. 현재 겪는 소동이 성령의 소동과 성령의 진정이 되고, 내 안의 교만, 자기연민, 자존심, 옳고 그름의 곡이 진멸되도록
2. 그 사람의구원, 끝까지 적용 잘 하고 갈 수 있도록.
3. 동생 다니는 회사 폐업 사건이 구원의 사건 되도록
4. 올 겨울 거취 잘 마련되도록, 주거안정
5. 내년에는 신결혼하게 해주세요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