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919 영광의 왕
시편 24:1-10
이태근 목사님
지난 주일 설교 후에 몇 분의 집사님들이 짧은 피드백을 남겨 주셨어요. 한 집사님은 고등부에서 민산이를 위해 참 많이 기도했었는데 그때는 정말 민산이가 변할 수 있을까?, 우리 다 그렇자나요. 기도하면서도, 그런 마음이 컸었는데, 그런데 이렇게 변하여 부부 목장에 잘 나간다고 하니 너무 기뻤다.고. 한 집사님은 왜 이렇게 힘들어하시냐고 물어보고 안아 주셨던 그 집사님의 마음이 온 교회의 마음이었다고. 또 한 집사님은 민산이의 이야기를 들으며 가정 중수를 외치시는 담임 목사님의 그 마음이 더욱 간절하게 느껴졌다고. 또 한 집사님은 두 손주들을 자랑하느냐고 목소리 톤이 올라가는지도 모르고 목청 높여 그냥 자랑질 해대는 목사님의 모습이 그냥 귀여웠다고, 정겨웠다고, 은혜가 되었다고. 또 한 집사님은 사람이 죽은 것도 아닌데 낙심하지 말라 하시는 그 말씀이 본인한테 하시는 말 같았다고. 또 한 집사님은 나의 광풍 가운데 죽지 말라고 이제는 안심하라고 하는 그 말씀이 자기에게 주시는 음성으로 들렸다고 이렇게 여러 피드백을 주셨는데 가장 무서웠던 피드백은요. 다음 주에 목사님의 간증도 기대하겠다는 그 댓글은 부담이 되더라고요. 그래서 한 주간 부담이 많이 됐습니다. 시편 24편은 영광의 왕을 찬양하는 건데 너무 제목도 크고, 또 제가 그런 인생을 살지 않았기에 입으로만 하는 입으로만 하는 설교가 될 것 같아서 설교를 준비하는 내내 마음이 힘들고, 또 부담이 되었습니다.
여러분의 인생은 어떻습니까? 어떤 인생을 사시다가 오늘 이 자리에 오셨습니까? 영광의 왕 하나님의 찬양하는 인생을 사셨습니까? 아니면 원망과 불평, 왜 나만 겪는 고난이냐고 악을 쓰며 살아오지는 않았습니까? 우리의 원망이 찬양이 되고, 불평이 찬양이 되며, 우리의 고난이 할렐루야와 아멘이 되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1. 내 것이 아니고, 다 주님의 것이 되어야 합니다. (1-2절)
땅과 거기에 충만한 것은 하나님의 모든 창조 세계를 의미하고 세계와 그 가운데에 사는 자들은 모든 인류와 인간 사회를 의미합니다. 이 모든 것이 내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것이 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사회가 고도화되면 될수록, 자본주의가 발달하면 할수록 집도 내 것이고, 차도 내 것이고, 땅 도 내 것이기에 다 여호와의 것이라고 입으로는 고백하지만 삶으로 고백하려면 많은 사건들이 오고 가야 하는 것 같습니다. 1, 2절 말씀을 봅니다.
한글 개역 성경에는 나타나 있지 않지만 원문 1절과 2절 사이에는 접속사 왜냐하면이 들어가 있습니다. 당연히 집도 내 것이고, 차도 내 것이고, 땅 도 내 것이겠지만 이것이 내 것이라고 할 수 없는 이유는 여호와께서 그 터를 바다 위에 세우시고 강들 위에 건설했기 때문입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은 천지창조를 통해서 첫째날에 빛과 어둠을 나누시고, 둘째날에 궁창 위의 물과 궁창 아래의 물을 또 나누셨는데, 궁창 위의 물은 노아 홍수 이전까지 모든 피조물들이 안락하게 최적의 환경에서 살아가도록 모든 유해물질을 차단하고 최적의 환경을 제공해주었을 텐데 인간의 타락으로 노아의 홍수가 발생하자 창조 질서의 일부가 깨지고 궁창 위의 물이 다 쏟아져서 환경에 큰 변화가 생겼습니다. 성경에 보면 노아 홍수 이후로 인간의 수명이 급격하게 줄어드는 것을 볼 수 있어요. 아무튼 첫째날에 빛과 어둠을 나누시고, 둘째날에 궁창 위의 물과 궁창 아래의 물을 나누셨는데, 셋째날에는 물이 한 곳으로 모이고 뭍이 드러나게 하셨습니다. 담임 목사님께서 이 부분을 설명하시면서 이처럼 나눠야 할 것이 있고, 먼저 나눠야 할 것이 있고, 한 곳으로 모으고 드러나야 할 것이 있다고 하셨어요. 한쪽은 모여서 바다와 강이 되고 또 한쪽은 뭍이 드러나 마른 땅이 되어야 합니다. 둘 다 없어져야 할 것이 아니고 각자 알맞게 쓰임을 받아야 하는데, 바다는 물이 모여서 더욱 풍성해지고 뭍은 드러남으로 마른 땅이 되어야 씨 가진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우리의 인생도 창조 질서 속에 살아가야 합니다. 내 인생 가운데 첫째날과 둘째날과 셋째날이 이어져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땅이 혼동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는 것처럼 우리의 인생도 뒤죽박죽, 어디서부터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인생이 공허하고 허무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이 가장 먼저 하신 일은 빛과 어둠을 나누셨습니다. 모으는 것이 먼저가 아니고 나누는 것부터 먼저 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땅에 살면서 모으고 쌓고 더 긁어 모으고 쌓는 것이 인생의 목적이기에 가진 것이 있어도 누리지 못하고, 가진 것이 많아도 인생이 공허하고 허무할 때가 많습니다. 내 인생 가운데 창조의 질서가 세워지려면 내 마음과 생각 속에서 어두움과 빛이 항상 공중(公衆), 뒤죽박죽하고 있는데 그것이 나누어져야 합니다. 세상 나라와 하나님의 나라가 하나가 될 수가 없기에 우리는 날마다 어둠의 생각과 빛의 생각이 나누어져야 합니다. 갈등 충만이 성령 충만이라고 했습니다. 성령님이 깨닫게 해주시지 않으면 우리의 생각이 과연 빛의 생각인지 어둠의 생각인지조차 구분하기가 어렵습니다. 빛으로 오신 예수님을 만나야 그래야 우리의 인생에도 비로소 첫째날을 맞이할 수 있게 됩니다. 1, 2절 말씀을 다시 봅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쉽게 설명해서 너희가 땅 위에 집을 짓고 문화를 만들고 도시를 건설했다고 해서 스스로 교만한 자가 되지 말라는 겁니다. 그 터가 바다 위에 세워졌고 강들 위에 건설되었기 때문입니다. 해변가의 모래성도 쉽게 무너지는데 하물며 바다와 강들 위에 세워진 것들이 온전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은 언제든지 노아의 시대처럼 모든 땅을 바다에 잠기게 하실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무지개 언약을 통해서 다시는 그렇게 하지 않겠다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큰 걱정 없이 살아갈 수 있는 이유는 하나님의 언약과 약속이 지금도 지속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은혜가 계속되면 그것은 나의 권리가 되고 나의 일상이 되기 때문에 집도 땅도 차도 다 내 것이고 자녀도 다 내 것이라고 생각을 하게 됩니다. 하지만 그 터를 바다와 강들 위에 세우고 건설했기에 유라굴로 광풍이 한 번 불면 276명을 태운 큰 배도 한순간에 파선될 수 있다고 지난주와 이번주에 동일한 말씀을 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그 터를 반석 위에 세우지 않으면 우리가 쌓아 올린 모든 것들은 그 기초가 너무나 약하기에 한순간에 다 무너질 수도 있습니다. 적용 질문을 드립니다.
[적용] 여전히 내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말로만 주님의 것이라고 하며 마음대로 결정합니까? 내 힘으로 쌓아 올렸지만 그 터와 기초가 너무 약해서 허망하게 무너진 것은 없습니까? 내 인생 가운데 창조의 질서가 잘 세워지고 있습니까?
지난주 아들 이야기를 많이 했는데요. 저의 주제가는 다른 인생을 꼭 한 번 살아보고 싶었어요. 목사로 부르심을 받았지만 목사가 아닌 다른 인생을 살았으면 어땠을까? 그런 생각이 항상 꼬리표처럼 따라다녔습니다. 인테리어 하는 집사님을 봐도 너무 재밌는 거예요. 따라다니면서 시다를 해도 재밌을 것 같고, 막 프로그램 코딩을 짜는 사람을 보면 너무 신기하고 멋있어 보이고, 하다 못해 그냥 한동안 목사 그만두고 떡볶이 장사라도 할까?, 나랑 같이 할래? 막 아내한테 물어보기도 하고. 그렇다고 제가 목사의 직분을 가볍게 생각했냐, 아니예요. 한 번도 그렇게 생각해본 적이 없어요. 오히려 목사는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기에 내가 언제까지 이 일을 해야 되나, 내가 아니어도 할 사람이 많고 교회도 많고 훌륭한 목사님도 많을 텐데. 내 몸에 맞지 않는 옷을 너무 오랫동안 입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물론 저에게 부르심도 있었지만 어찌하다보니 목사가 되었다는 정리되지 않은 생각, 빛과 어두움이 오랫동안 공존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제가 5번 유형이다보니 뭐든지 직접 해보고 결정하는 것이 하나도 없고, 그냥 뭐든지 앉으나 서나 생각만 하고 있기에 내가 아닌 아들 민산이를 통해서 다른 인생을 살아보고 싶었어요. 그렇다고 제가 민산이에게 너 이거 해봐라, 저거 해봐라. 그렇게 강요한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절대. 어제도 예지가 그러더라고요. 우리 친구 부모님들은 검사가 되라, 판사가 되라, 의사가 되라 그런 얘기 맨날 한다는데, 왜 맨날, 나는 아직 꿈이 없거든? 근데 왜 아빠는 나보고 이거 해봐라 저거 해봐라 그런 얘기를 안 해? 그런데 저는 민산이한테도 이거 해봐라, 저거 해봐라.는 얘기를 안 했어요. 너는 부르심을 받지 말고 니가 하고싶은 것을 하라고 그러면 후회도 없을 거라고. 그때는 그것이 얼마나 악한 생각인지 모르면서, 직접 얘기한 게 아니고, 혼자 그런 생각, 꼬리표처럼 달고 다녔습니다.
바다는 물이 모여서 더욱 풍성해지고 뭍은 드러남으로 마른 땅이 되어야 씨 가진 열매를 맺을 수 있다고 하시는데, 목사로 부르심을 받았지만 소명 의식이 없고 딴 생각, 쓸데없는 생각, 더러운 생각을 하며 살았기에 물에 잠겨 있는 땅처럼 쓸모없는 땅이 되어 인생이 공허하고 허무한 인생을 살다가 망하는 인생이 될 뻔 했습니다.
2. 행위가 아닌 은혜를 구해야 합니다. (3-6절)
성경은 구약과 신약으로 나뉘어지죠. 구약은 율법의 말씀이고 신약은 은혜의 말씀인데, 우리는 마지막 때에 살고 있습니다. 어떻게 성경을 읽어야 할까요? 구약 성경을 읽을 때는 항상 신약의 빛 아래에서 읽어야 합니다. 율법은 언제든지 죄만 지적할 뿐 말씀에 대한 은혜와 구원이 감추어져 있습니다. 없는 게 아니고 감추어져 있는 거죠. 그렇다고 구약을 하찮게 여겨서는 안 됩니다. 구약은 장차 오실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이야기이고, 신약은 이미 오신 예수님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도 언제든지 나의 이야기를 할 때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는 이렇게 살았고, 예쑤님을 만난 후에는 이렇게 살아가고 있다고 고난이 약재료가 되고, 나의 상처가 별이 되어 예수님을 만난 이야기가 우리들의 이야기가 되어야 합니다. 추석 연휴가 이제 시작되었는데 막 모여서 쓸데없는 얘기는 가급적 줄이시고, 예수 만난 이야기를 많이 많이 하는 복되고 즐거운 명절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성경이 구약과 신약으로 나뉘어지는 것처럼 우리가 올라가야 할 산도 양대 산맥으로 나뉘어져 있어요. 첫번째 산은 광야에 있는 시내산이고, 두번째 있는 산은 예루살렘에 있는 시온산입니다. 출애굽기 19장 말씀에 보면 시내산의 위엄이 얼마나 대단한 지를 보여줘요. 아무나 올라갈 수 있는 그런 산이 아닙니다. 목숨을 걸어야, 목숨을 걸고 올라가는 산입니다. 모세 자신도 내가 심히 두렵고 떨린다고 이야기를 했어요. 출애굽기 19장 말씀에 9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12너는 백성을 위하여 주위에 경계를 정하고 이르기를 너희는 삼가 산에 오르거나 그 경계를 침범하지 말지니 산을 침범하는 자는 반드시 죽임을 당할 것이라 13그런 자에게는 손을 대지 말고 돌로 쳐죽이거나 화살로 쏘아 죽여야 하리니 짐승이나 사람을 막론하고 살아남지 못하리라... 구약의 율법은 이처럼 어두움이 빛 가운데로 나아갈 수 없습니다. 빛 되신 예수님이 반드시 먼저 찾아오셔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 기록된 여호와의 산은 율법을 주신 시내산이 아니고, 성전이 세워진 시온산을 가리킵니다. 과거에 아브라함이 자신의 독자 이상을 번제로 드리고자 할 때 하나님께서 미리 어린양을 준비해주신 바로 그 장소입니다. 율법을 주신 시내산에는 오직 모세만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올라갈 수 있었는데, 여호와의 성전이 새워진 시온산에는 과연 누가 올라갈 수 있을까요? 4절 말씀 봅니다.
여호와의 산에 오르려면 세 가진 조건이 필요해요. 첫째, 첫번째 조건은 손이 깨끗해야 합니다. 즉, 눈에 보이는 외적인 행위가 성결해야 된다는 거예요. 겉으로 보기에도 깨끗해야 한다는 거예요. 예수를 믿는다고 나는 율법 아래 있지 않다고 내 마음대로 행동하고 내 마음대로 먹고 마시는 것은 내 손을 더럽히는 것과 같습니다. 두번째, 마음이 청결하여 뜻을 허탄한 데 두지 않아야 합니다. 즉,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나아가고자 하는 자는 외적인 행위만 깨끗해서는 안 되고 그 마음과 뜻이 근본적으로 청결해야 한다, 그 얘기예요. 주님께서도 마태복음 5장에서 8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28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하셨습니다. 마지막 세번째, 거짓 맹세를 하지 말아야 합니다. 앞의 두 가지 조건이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라면 마지막 세번째 조건은 인간간의 관계를 염두해둔 표현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나아가려는 자들은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도 신실해야 합니다. 다시 3절에서 5절 말씀을 봅니다.
율법이 있는 시내산은 너무 무섭고 두려워서 올라가지 못할 것 같고, 성전이 세워진 시온산은 자격이 되지 않아서 올라가지 못할 것 같습니다. 하지만 3, 4절 말씀은 행위가 아닌 은혜를 강조하는 말씀이에요. 나의 손이 얼마나 더러운지를 알고 있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피로 나의 더러운 손을 씻고 깨끗한 손으로 여호와의 산에 올라가라는 의미입니다. 마치 아브라함이 독자 이삭을 바치기 위해 시내산에 올라갔지만 하나님께서 미리 먼저 어린양을 준비해주신 원리와 똑같습니다. 나의 마음이 불결하여 허탄한 것을 계속해서 생각한다면 나의 더러워진 마음을 공동체와 하나님께 고백하고 창녀의 마음이 아닌 청결한 마음으로 여호와의 산에 올라가야 한다, 그런 의미예요. 그래서 5절 말씀을 자세히 보면 의를 행하는 자라고 하지 않고 하나님께 의를 얻는 자라고 했습니다. 내 의로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은혜로 의롭다 칭함을 받았다는 의미인거죠. 더 확실한 증거가 6절 말씀에 나옵니다.
3절에서 5절 말씀이 만약 행위를 강조했다면, 야곱의 하나님이 아닌 요셉의 하나님을 찾았을 텐데 성경은 언제든지 야곱의 하나님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잘 아시는 것처럼 야곱의 뜻은 속이는 자입니다. 팥죽 한그릇에 형 에서의 장자권을 빼앗고, 털가죽과 별미로 아버지 이삭을 기만하고, 그렇게 속이는 인생을 살다가 외삼촌 라반에게 잘못 걸려서 20년간 종노릇을 했습니다. 외삼촌 라반이 너무 못됐다고, 다 그런 분 한 사람씩 있죠? 너무 못됐다고 할 수도 있지만 나보다 더한 사람을 만나게 한 것이 하나님의 은혜이고, 야곱이 여자 좋아하고 돈을 좋아했기 때문에 남에게 책임을 돌릴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 말씀이 여호와의 산에 오를 자가 누구인가를 간절히 찾고 있는 가운데 손이 깨끗하고 마음이 청결하고 거짓 맹세를 하지 않는 자라고 분명히 세 가지 조건을 달았는데, 그 결론이 요셉의 하나님이 아닌 야곱의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자라고 이야기를 하는 것이죠. 결국은 나의 행위로 여호와의 산에 올라갈 자가 아무도 없고 오직 은혜로 여호와의 산에 올라가야 함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우리들 공동체에 어떻게 오셨습니까? 여기까지 오시는 데에 어떤 인생을 살다가 오셨습니까? 내 손에 피를 묻히고 마음으로 음란을 행하며 거짓말을 밥 먹듯이 하다가, 나보다 더 강한 외삼촌 라반같은 사람을 만나 갖은 고생을 하다가, 인생을 낭비하다가 더 이상 갈 곳이 없어서 우리들 공동체까지 찾아오셨습니까? 너무 잘 오셨습니다. 여기까지 오는시데 너무 수고가 많으셨습니다. 내가 요셉처럼 살지 못했을 지라도, 야곱처럼 속이는 인생을 살았을 지라도 나의 손에 피 묻은 손을 보며 회개하고, 나의 창녀와 같은 마음을 회개하며 여호와의 산에 오르는 자에게 복이 있다고 하십니다. 우리가 올라가야 할 산은 무섭고 두려운 시내산이 아니고 은혜가 아니면 올라갈 수 없는 시온산입니다. 적용 질문을 드립니다.
[적용] 나의 피 묻은 손과 창녀같은 마음은 무엇입니까? 나 같은 죄인이 되어 은혜가 아니면 살 수 없는 인생이 되었습니까? 여전히 옳고 그름으로 시온 산이 아닌, 시내 산을 올라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스스로 높은 산이 되어 다른 사람들을 괴롭히고 있지는 않습니까? 은혜로 사는 인생이 되고 싶습니까, 행위로 살아가는 인생이 되고 싶습니까?
부르심을 받았으나 소명 의식이 없고 언제라도 기회가 되면 목사의 직분을 내려놓고 그냥 주의 백성으로 살고 싶었기에 내 인생 가운데 창조의 질서가 세워지지 않고 땅이 혼동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는 것처럼 내 마음대로 사역을 하다가 여러 번의 치리를 받았습니다. 첫번째 치리는 말씀이 아닌 지식으로 목자 모임을 인도하다가 받았고, 두번째 치리는 말씀이 아닌 내 열심으로 다음 세대를 위한 컨퍼런스를 준비하는 가운데 내 생각과 내 방법이 가장 옳은 것 같아서 담임 목사님과 동료 사역자들 앞에서 노트북을 막 들었다 놨다 들었다 놨다 혈기 부리다가 치리 받았습니다. 그리고 세번째 치리는 설교를 들어도 제가 듣고 싶은 것만 듣고 말씀이 잘 깨달아지지 않으니, 믿음으로 구원을 받고 또 행위로 심판을 받는다고 일원론이 아닌 이원론으로 백부장 심판을 설교하다가 치리를 받았습니다. 삼진아웃이라는 말도 있는데 지난 십 여년 동안 세번이나 치리를 받으면서 계속 붙어간다는 것이 부끄럽기도 하고 면이 서지도 않고, 앞으로 내 인생에 더 이상 치리는 받지 않겠다 내 의로 굳게 다짐을 했는데 작년에 코로나가 시작하면서 네번째 치리를 또 받았습니다. 죄송해요. 처음 치리를 받을 때는 사실 솔직히 좀 억울한 것도 있었는데, 치리를 한 번, 두 번, 세 번, 네 번까지 받다 보니 너무 창피하기도 하고, 내가 무엇을 잘못해서 치리를 받는 것도 분명한 사실이지만 여전히 딴 생각을 하고, 언제라도 그만 둘 생각을 하고, 은혜가 없고, 행위로 옳고, 그름을 따지고 동료 사역자들과 소통이 안되고, 혼자 독불장군같이 담임 목사님께서도 정말 어쩔 수 없어서 율법으로 저를 다스려 줄 수 밖에 없었던 것 같습니다.
오랫동안 힘들게 시내산을 올라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시내산으로 올라가다가 한 번, 두 번 그러면 안 된다고 미리 사인을 주시고, 너 그러다가 정말 죽는다고 하셨는데 내가 스스로 율법이 되어서 여전히 옳고 그름을 따지며 시내산을 계속해서 올라가다 보니 네 번의 치리를 받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너무 높이 올라와서 내려가는 길도 잃어버린 것 같고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방황을 하고 있을 때 민산이가 아닌 저에게 큰 사건이 찾아왔습니다.
3. 마음의 문을 열어야 하늘의 문도 열립니다. (7-10절)
저는 정말 찬양, 노래를 못하는데 찬양 잘하시는 분들은 혼자 불러도 감미롭고 은혜로운 찬양이 있는가 하면, 그래도 열 명 보다는 백 명, 천 명, 만 명이 모여서 부르면 부를수록 더 감동이 되고 은혜가 넘치고 웅장한 찬양이 있는데 문들아 머리 들어라 바로 이 곡이 그런 찬양이 아닌가 싶어요. 우리들교회에서도, 생각해보면 코로나 이전에는 한 때, 한창 이 노래를 많이 부를 때가 있었는데 코로나 이후에는 한 번도 부르지 않은 것 같습니다. 코로나가 다 지나가고 다 함께 모여서 이 찬양을 함께 부르는 날이 속히 왔으면 좋겠습니다. 여러분들도 다 그렇게 생각하시죠?
시편 24편은 다윗의 시입니다. 다윗이 언제 이 시를 썼을까 생각을 해보면 아마도 오벳에돔의 집에서 여호와의 언약궤를 시온산이 있는 예루살렘으로 옮겨올 때에 부른 찬양시라고 합니다. 7절을 다시 봅니다.
첫번째 문은 성소의 문을 가리킵니다. 영원한 문은 하늘 성소의 문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어요. 문들아 너희 머리를 들지어다 여기서 들지어다는 능동 명령형이고, 영원한 문들아 들릴지어다 여기서 들릴지어다 수동 명령형입니다. 즉, 짧은 한 절이기는 하지만 이런 의미가 있어요. 내가 마음의 문을 열어야 하늘의 문도 열리고, 내가 마음의 문을 닫고 있으면 하늘의 문도 열리지 않습니다. 들지어다는 문들이 자발적으로 머리를 들어 왕의 입성을 환영하는 모습이고, 들릴지어다는 여호와의 영광 앞에 문들이 필연적으로 들릴 수밖에 없음을 보여줍니다. 다윗과 이스라엘 장로들과 천부장들이 함께 모여 시온산이 있는 예루살렘으로 레위인들이 여호와의 언약궤를 즐거이 메고 들어갈 때에 다윗이 기뻐 뛰며 힘을 다하여 춤을 추었는데, 사울의 딸 미갈이 그 모습을 창틀에 기대어 머리를 빼꼼히 내밀고 쳐다보다가 다윗왕이 여호와 앞에서 뛰놀며 춤 추는 것을 보고 어찌 개집종 앞에서 몸을 드러내며 방탕하게 춤을 추냐고 심중에 자기의 남편을 업신 여겼다고 했습니다. 남편 다윗에게도 닫힌 마음이고 여호와 하나님께도 굳게 닫혀있는 마음입니다. 문들에게 머리를 들라는 것은 시적인 표현인데 빼꼼히 문을 열라는 것이 아니고 문을 활짝, 문짝 전체를 들어 올리라라는 표현입니다. 내 마음이 열려야 하늘의 문도 열립니다. 다윗의 아내이지만 여전히 사울의 딸 미갈이 되어 자기 상처, 자기 연민, 궁궐 안에 홀로 틀어박혀 얼굴만 빼꼼히 내밀고 공동체가 하나도 없이 저렇게 저러고 있는 모습을 보면, 비록 다윗의 아내이지만 여전히 가진 것도 많지만, 집도 궁궐에 살고 있지만 미갈의 인생이 참 불쌍하고 안쓰럽다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의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목장에서 마음의 문을 활짝 열어야 합니다. 남편이 수치를 무릅쓰고 자기 나눔을 할 때 무슨 얘기를 하나 얼굴을 빼꼼히 내밀고 남편을 업신여기지 말라는 이야기입니다. 남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내가 계집종처럼 힘든 얘기를 조잘조잘 할 때 마음의 문을 열고 함께 들어야 합니다. 왜 남 앞에서 저런 이야기까지 하나 이런 생각을 하고 있다면 내 마음이 닫힌 마음이고 미갈과 같은 마음입니다.
지난주에 한 청년으로부터 장문의 카톡이 왔습니다. 짧게 요약하면 이런 내용이었어요. 자기의 죄패는 동성애인데 공동체를 떠나지 않고 말씀을 듣고 있지만 교회에서 기도할 때마다 사용하는 수식어 하나 때문에 시험이 들었다는 얘기입니다. 낙태와 간통에 대해서 기도할 때는 나라의 근간을 흔든다는 수식어를 쓰지 않은 것 같은데 왜 꼭 동성애와 관련된 차별 금지법에만 그런 수식어를 쓰는지 모르겠다고, 인구 절벽 때문에 그런 말을 사용하시는 것 같기도 한데 요즘 남녀가 결혼을 했어도 출산율이 점점점점 떨어지고 있는 이런 시국에 꼭 동성애와 관련해서만 나라의 근간을 흔드는 일이라고 꼭 그런 수식어를 써야하는건지 자꾸 시험에 든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이런 질문에 답하다보면 잘못하면 논쟁이 될 수 있기에 조심스러운 부분도 있었지만 우리들 공동체에 등록한지 오래되셨고, 또 어떻게든 공동체에 붙어가려고 애쓰는 것도 알고 있기에 조심스럽게 댓글을 달아드렸습니다. 잠시 후에 진심 어린 답변과 기도에 감사하다는 댓글이 왔어요. 그런데 또 잠시 후에 이런 댓글이 달렸습니다. 하지만 나라의 근간을 흔드는 수식어가 제게는 이 나라에서 사라져야 할 존재들로 자꾸만 들립니다. 만약 나라의 미래를 망치는 청소년을 위해 기도하자고 하면 목사님 어떻게 생각하세요? 매주, 매일 나라의 근간을 흔들고 있다는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 또 제 마음은 어떻겠어요? 특별한 이유가 없다면 죄송하지만 교회에서 그런 수식어를 사용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많은 갈등 속에서, 또 조심스럽게 자기의 의견을 남겨 주셨기에 저도 조심스러운 마음으로 말씀을 드렸습니다. 당연히 나라의 미래를 망치는 비행청소년을 위해 기도하자고 하면 적절하지 못한 표현인 것이죠. 또 마찬가지로 나라의 근간을 흔드는 동성애자들을 위해서 기도하자고 하면 안 되겠죠. 하지만 나라의 근간을 흔드는 동성애법, 차별금지법을 막아 달라고 기도하는 것은 나라에 대한 교회의 책임입니다. 동성애는 나라의 근간을 흔드는 것이 맞습니다. 따라서 교회는 제약을 조정하는 법이 잘못된, 왜곡된 법이 제정되지 않도록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 그 청년에게는 앞에서도 제가 말씀을 드렸지만, 사실 수식어 하나에 걸린다기 보다는 여러 가지로 걸리는 부분이 있기에 가장 약한 곳이라고 생각하는 그 부분에서 걸리는 것이 아닐까 싶다고. 여러 가지로 힘든 부분이 있을 텐데 그래도 공동체를 떠나지 않고 공동체와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 답을 찾으려고 하는 부분에 응원을 보낸다고. 내가 어떻게 안되는 부분을 주님께서 만져 주시는 은혜가 있기를 기도하겠다고.
머리를 들지어다 영원한 문들아 들릴지어다 능동태와 수동태로 명령을 해 주신 것처럼 내가 먼저 머리를 들어 마음의 문을 열고, 내가 미처 다 열지 못하는 그 문을 주님께서 함께 열어주시기를 온 성도가 함께 간절함으로 기도해야 될 줄 믿습니다. 마지막 9절, 10절 말씀을 봅니다.
앞절과 거의 똑같은 내용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그만큼 중요하고 강조하고 싶은, 강조할 내용이 있기 때문입니다. 시편 24편은 찬양시로 분류되지만 동시에 메시아 예언시로 분류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단순히 말씀의 언약궤로 하지 않고 영광의 왕, 만군의 여호와, 강하고 능한 여호와시요, 전쟁에 능한 여호와라고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오시는 개선장군처럼 메시아의 사역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 사역을 마치시고 사흘만에 부활하신 후 40일간 제자들을 양육하시고 제자들 앞에서 승천하실 때에 천군천사가 함께 모여 행군 나팔을 불며 영광의 왕, 만군의 여호와께서 사탄의 권세를 꺾으시고 강하고 능한 여호와시요, 전쟁에 능한 여호와께서 하늘에 있는 성전에 이제 들어가시니 문들아 너희는 너희의 머리를 들지어다 영원한 문들아 들릴지어다 천군천사가 외치는 장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소의 문도 열리고 하늘의 문도 열린 것처럼 내 마음의 문도 열려야 합니다. 요한계시록 3장 20절 말씀에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다 함께 기뻐하며 찬양하며 뛰어놀 때 자기 연민, 자기 상처로 마음의 문을 열지 못하고 얼굴만 빼꼼히 내밀고 있는 우리의 자녀와 식구들이 많이 있습니다. 먼저 우리가 마음의 문을 열고 문 밖에 서서 예수님의 마음으로 그 마음을 두드려야 합니다. 화가 나서 쾅쾅쾅 두드리지 말고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도 사랑이 느껴지도록, 참고 기다리고 또 기다리는 인내의 노크 소리가 되도록. 자녀의 방문 앞에서, 남편의 방문 앞에서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의 마음으로 닫힌 문이 열릴 때까지 문 밖에 서서 악쓰지 말고, 고함치치 말고. 우리의 소리가 음성이 되어 그 문이 열릴 때까지 함께 기도하는 공동체 식구들이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적용] 나의 마음은 열린 마음입니까, 닫힌 마음입니까? 여전히 마음의 문을 활짝 열지 못하고 얼굴만 빼꼼히 내밀고 있지는 않습니까? 모든 사람이 함께 기뻐하며 찬양할 때 혼자 업신여기는 마음을 품지는 않았습니까? 예수님의 마음으로 문 밖에 서서 두드려야 할 마의 가족은 누구입니까?
네번째 치리를 받는 중에 설상가상으로 민산이가 아닌 저에게 큰 사건이 찾아왔습니다. 주일 아침 새벽에 교회 가려고 눈을 떴는데 뭔가 좀 많이 이상했습니다. 한쪽 눈을 감았다 뜨고, 또 한쪽 눈을 감았다 떠보니 왼쪽 눈이 전혀 보이지 않았습니다. 화장실 가서 거울 앞에서 서서 아무리 봐도 아무 이상이 없었습니다. 핸드폰을 찾아서 라이트 불빛을 최대치로 올린 후 눈동자 바로 앞에 가져가니 흑암처럼 보이지 않던 것이 망막을 통해서 검붉은 색이 비쳤습니다. 망막 쪽에 있는 정맥이 크게 터진 겁니다. 처음 겪는 일이라 너무 무서웠고 두려웠습니다. 뭔가 일을 하다가 제가 다쳤으면 좀 나았을 텐데, 치리 중에 눈이 터지고 앞이 보이지 않으니 하나님도 나에게 또 치리를 주시는 것 같아서 마음이 무겁고 힘이 들었습니다. 한쪽 눈이 상하고 한동안 잠이 오지 않았습니다. 걱정, 근심, 두려움에 사로 잡히고 점점 쓸모없는 사람이 되는 것 같아서 우울감도 밀려왔습니다. 저희 아내가 저를 만나서 고생을 많이 했는데, 잘 아시자나요. 저희 집 별명이 도로 4대 거든요. 도로 4대 할머니, 할아버지 다 보냈는데. 어쨌든 도로 4대가 되서 홀 아버지에 중학생 딸 예지, 민산이, 권혜, 손자들까지 다 이제 사실은 아내의 몫이 되었는데, 나까지 눈이 멀었으니 이러다가 한쪽 눈마저 또, 터진 눈보다는 터지지 않은 눈 때문에 두려웠어요. 이쪽 눈도 터질 수 있으니까. 도 터지면 어떻게 하나. 제가 그렇게 오랫동안 주의 백성으로 살고 싶다고 햇는데 이제는 정말 아내가 주일날 나를 휠체어 태워 주일날 예배당에 들어가는 상상이 그냥 저절로 되는 거예요. 새벽에 잠 안자고 벽에 기대서. 제가 설교문 작성하면서 이거 아내한테 읽어주니까 깔깔 웃더라고요. 그런데 지금이야 웃지만 그때는 진짜 아내도 그 생각, 저도 그 생각이, 막 그랬거든요. 하루는 잠이 오지 않아서 새벽을 뒤척이는데 마태복음 18장 9절 말씀이 자꾸 입술에 맴돌았습니다. 만일 네 눈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한 눈으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 불에 던져지는 것보다 나으니라 목사로 살면서 눈으로 지은 죄가 많습니다. 목사의 신분으로 손과 발로 죄를 짓지 못하다 보니 눈으로 지은 죄가 더 많았습니다. 그렇다고 또 제 손이 깨끗한 것도 아닙니다. 한쪽 눈이 이렇게 된 것이 처음으로 감사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성령님께서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늙은 선지자가 되어, 비둔한 자가 되어 망하는 인생이 되지 말라고, 지옥 불에 떨어지지 말라고, 그만 시내산에서 내려오라고 한쪽 눈을 상하게 하신 것 같아서 감사했고 회개가 되었습니다. 이제 그날 이후로 마음이 평안해졌어요. 그래서 그날 이후로 아침에 눈을 뜰 때마다, 여러분들은 아침에 일어날 때 벌떡 일어나시죠? 벌떡 일어나면 안 돼요. 잘못될 수 있어요. 그래서 이제 저는 아침에 눈을 딱 뜨면 오른쪽 눈 보이자나요. 오른쪽 눈 딱 뜨고 이렇게 고백이, 한 마디 해요. 하나님 감사합니다. 그리고 잘 보이지 않는, 지금은 많이 좋아졌어요. 잘 보이지 않는 왼쪽 눈을 뜨면서 또 이렇게 고백합니다. 하나님 죄송합니다. 아직 사명이 남아 있다면 한쪽 눈은 그래도 남겨 주시겠구나 그런 평안함도 주셨습니다. 오랫동안 꼬리표처럼 따라다녔던 생각, 목사로 부르심을 받았지만 목사가 아닌 다른 인생을 살았으면 어땠을까?, 이처럼 오래된 생각도 이제는 빛과 어두움이 나눠진 것처럼 혼돈 가운데 있지 않고 내 인생 가운데 첫째날이 지나가고 둘째날이 지나 셋째날이 된 것 같습니다.
민산이는 민산이대로 물이 한 곳으로 모여 작은 바다와 강을 이제 이루어 가게 된 것 같고, 저는 또 저대로 뭍이 드러나 씨 가진 열매를 가지라고 말씀해 주신 것 같습니다. 앞으로도 저의 삶 가운데 크고 작은 사건들이 때마다 시마다 찾아오겠지만 뒷걸음치지 않고, 창조의 질서에 역행하지 않고 하루 하루를 은혜로 살아가기를 소망합니다.
기도제목
현경
여전히 나는 옳고 너는 틀리다 생각이 드는데 그때마다 나의 성전을 정화하고 튼튼하게 세워지도록
약할 때 강함 되시는 주님 경험하도록
목장식구들 위해서 중보하도록
지향
시내산이 아니라 시온산으로 갈 수 있도록
양육을 통해서 인생이 해석되도록
주변에 빼꼼하게 하는 얘기에 흔들리지 않고 예수님 반석에 나의 마음을 세울 수 있도록
연휴 때 가족들에게 설득하지 않고 십자가, 지혜, 타이밍 분별하고 성령의 공기, 바람 하도록
예선
내 인생 가운데 창조의 질서가 잘 세워지도록
행위로 사는 인생이 아님을 알고 내 열심을 내려 두고 은혜로 살아가는 인생 되도록
9월말 10월초에 진행되는 프로젝트의 주인이 예수님이 되도록
크리스틴
맡겨진 회사일 잘 끝낼 수 있도록
상담 잘 받을 수 있도록
보련
양교를 잘 받고 인생의 방황이 끝나도록
지금 목장이 얼마 안 남았다고 생각이 드는데 남겨진 시간 동안 서로 위해 중보 할 수 있도록
살 의지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영육의 풍요로움 누릴 수 있는 능력, 힘 주시도록
약할 때 강함 되시는 주님의 의지하고 주변의 시선이 아니라 하나님 마음으로 한 주 잘 살아내도록
은우
전시 가운데 흑암과 빛이 잘 나뉘고 뭍이 드러나서 성령의 씨앗이 잘 심기는 프로젝트 되돌 수 있도록
사람들 구하는데 어려움이 있는 것이 당연한 것임을 알고 붙여준 지체들 위해서 중보하도록
열심을 내려 두고 성령의 은혜와 도움받을 수 있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