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교] 2021.07.11 조은우 목장 보고서
20210711 응답 받는 기도
사도행전 4:23-31
원래 기독교 교회력으로 치면 4월이 고난주간이죠. 그런데 저는 이 여름철 7월이 고난 주간입니다. 그리고 이번주 주일이 사순절 마지막 날이 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하루는 아내가 제 얼굴을 보면서 이러더라구요. 점점 썩어져 가고 있구나. 틀린 말이 아니죠. 다음주 주일에는 제 개인적으로 부활절이 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오늘 함께 보실 본문은 담임 목사님께서 2년 전에 성령의 기도라는 제목으로 설교해주신 내용입니다. 그런데 말씀을 들으면서 아 내가 성령의 기도를 하기 보다는 내 생각으로 떼 부리는 기도만 하고 있구나. 이런 생각이 들어서 회개하게 됐는데요. 이번에 동일한 본문으로 말씀 설교를 준비하면서 여전히 잘 변화되지 않는 제 모습을 돌아보고 또 기도하는 시간이었습니다.
몇 년 전에 인터넷에 이런 제목의 기사가 뜬 적이 있었습니다. 비닐 봉지 메시에게 찾아온 기적 당시 SNS상에서는 몇 장의 사진이 떠돌아다녔습니다. 다름 아니라 한 어린 아이가 비닐 봉지로만든 유니폼을 입고 축구하는 모습이었습니다. 자기가 좋아하는 축구 스타 메시의 유니폼을 비닐봉지로 만들어서 입고 축구를 하던 모습이었거든요. 얼마나 메시를 좋아했으면 이렇게 했을까요? 사실 우리가 하나님을 이렇게 좋아해야 되는데 말이죠. 이 어린 축구 팬의 모습 때문에 전 세계 많은 사람들이 반응했습니다. 이 아이가 어디 사는 누구인지 꼭 찾으면 좋겠다. 그런 바램들이 이어졌죠. 그리고 일주일 뒤에 수소문 끝에 이 아이를 찾았습니다. 다름 아니라 아프가니스탄에 사는다섯 살 된 아흐마디라는 소년이었습니다. 축구를 너무 좋아하지만 가난한 형편에 유니폼을 구하지 못하다 보니까 이 아이의 형이 직접 비닐 봉지로 유니폼을 만들어 준 거죠. 나라의 내전으로 불안한 상황에서도 꿈을 간직한 이 소년의 사연이 많은 사람에게 또 감동을 주었습니다. 물론 메시또한 이 사연을 듣게 됐죠. 그리고 직접 이 아이를 만나 주었습니다. 메시가 자기 유니폼을 친히 선물해주고, 그리고 축구 경기가 열리는 그곳 경기장에도 이 아이를 초청해서 거기서 사진도 찍어 주었습니다. 아마 이 아이에게는 평생 잊을 수 없는 순간이 됐을 것입니다. 지성이면 감천이라는 말도 있자나요. 이 아이의 사모함이 메시에게 전해졌고 또 상상할 수도 없는 선물을 받은 겁니다. 아마 어쩌면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도 그렇지 않을까요? 내가 간절함과 절박한 심정으로 드렸던 기도에 하나님은 언제나 신실하게 응답을 하십니다. 때로는 내가 이 아이처럼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때, 상상하지 못했던 모습으로 응답을 해주시죠. 나의 기도에 응답해주신 그 하나님 때문에 우리는 감격하면서 이 다섯 살 꼬마처럼 평생 잊을 수 없는 기억으로 그 기도를 간직합니다. 그럼 이 시간 하나님께 응답받는 기도는 어떤 기도인지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1. 응답받는 기도는 동료와 한 마음으로 소리높여 이릅니다. (23-24절)
사도행전 4장을 보면 베드로와 요한이 복음을 전하다가 종교 지도자들에게 잡혀서 예루살렘 공회에 서게 됩니다. 이들은 더 이상 전하지 말라고 경고하고 두 사도를 석방해 주죠. 베드로와 요한은 풀려난 다음에 곧장 동료들에게 가죠. 여기서 동료가 누구일까요? 초대 교회 사도들과 성도들입니다. 이 동료라는 단어는 구약의 말라기에서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들이라고 나옵니다.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는 교회이죠. 두 사도는 즉시 이들에게 가서 그 간에 있었던 모든 일을 얘기해줍니다. 아마 제일 생각나고 보고싶었던 얼굴이 바로 이들이었겠죠. 성도에게 있어서 힘든 일이 생기면 가장 먼저 생각하고 찾아야 할 곳이 어딜까요? 바로 믿음의 공동체입니다. 공동체를 찾는다는 것은 하나님을 찾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다 보면 당혹스러운 사건이나 위기가 발생하면 순간 두려움이 엄습하죠. 그리고 그 두려움의 포로가 되어버립니다. 아마 베드로와 요한도 예수님이 안 계신 이 상황에서 처음 겪게 된 이 문제가 당혹스러웠겠죠. 하지만 두려움의 포로가 되지는 않았습니다. 이 들은 이 위기에서 다른 곳을 기웃거리지도 않았습니다. 어떤 권력자를 찾아가거나 줄을 대려고 시도하지 않았습니다. 가장 먼저 공동체를 찾았습니다. 여러분 나는 어떻습니까? 곤혹스런 사건이 일어났을 때 위기 상황에서 내 발걸음과 시선은 어디를 향하고 있습니까? 말씀이 있는 공동체와 동료를 찾기 보다도 이 문제를 뭔가 해결해줄 수 있을 것 같은 사람을 찾고 있지 않습니까? 아니면 나에게 그런 사람이 없다보니까 인터넷의 세계로 들어가서 온갖 이야기와 썰들을 보고 듣느라 일상을 소진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는 이렇게 문제가 생겼을 때 함께 기도할 동료를 찾기 보다도 당장에 해결해 줄 수 있을 것 같은, 도와줄 것 같은 대상을 찾아다닙니다. 눈에 보이는 힘 있는 권세자, 유력자를 찾고 의지하죠. 그러다보면 어떻게 됩니까? 결국 그 대상이 나에게 우상이 됩니다. 우상이 무엇입니까? 그 대상을 하나님의 자리에 올려다놓고 경배합니다. 그런데 우상의 가장 큰 특징이 무엇일까요? 언젠가는 나를 배신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대신에 내가 가장 먼저 찾고 의지하는 그것은 반드시 나를 배신합니다. 그게 사람이든, 돈이든, 권세든, 명예든 반드시 그러합니다.
저도 작년에 교통사고가 난 적이 있었거든요. 그래서 교통사고 난 다음에 이런 저런 궁금한 게 생겨가지고 웹서핑을 하다보니까 정말 몇 시간이 흘러가는 건 금방이더라고요. 큐티할 때는 시간 가는 게 느껴지던데 그런 거 보는 건 세월 지나가는 게 전혀 느껴지지가 않더라고요. 그런데 막상 이런 저런 정보다 쌓여갈수록 오히려 쓸데없는 걱정만 더해졌습니다. 나중에는 차라리 그냥 모르는 게 낫겠다.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런데 사고가 난 날 저에게 주셨던 큐티 말씀이 북이스라엘 왕 예후의 떠나지 않은 죄였습니다. 예후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우상을 의지하는 죄를 말씀해 주셨는데요. 그런데 그게 북이스라엘을 세운 여로보암의 죄라고 하셨습니다. 여러보암의 죄가 무엇입니까? 산당을 세워놓고 백성들을 그곳에서 제사하게 합니다. 금송아지 우상을 세워놓고 그걸 하나님으로 숭배하죠. 그런데 바로 그게 저였던 겁니다. 사건이 생기면 믿음의 공동체로 달려가서 동료들과 삶을 나누고 함께 기도하기 보다는 인터넷과 유튜브로 들어가서 답을 찾으려고만 했던 거죠. 그리고 그곳에서 문제를 회피하면서 마음의 위안을 얻으려고 했습니다. 자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막상 문제가 생겼을 때 내가 찾아갈 동료, 기도 제목을 나눌 지체가 있습니까? 만일 없다면 그건 내가 교만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되기까지 평소 나의 안중에는 공동체가 없었기 때문이죠. 세상 친구가 나에게 있다 할지라도 인간적인 위로에서 벗어나기 어렵습니다. 오직 예수의 피를 나눈 믿음의 공동체 지체들과의 관계에서만 한 마음으로 기도할 수 있기 때문이죠. 여러분 공동체를 떠난 신앙은 결코 존재할 수가 없습니다. 절대 자립할 수도 없겠죠. 우리는 100% 죄인이고 오늘 일어섰다고 할지라도 내일 또 넘어질 수밖에 없는 연약한 존재입니다. 그래서 나를 일으켜 세워줄 함께 이 믿음의 길을 걸어가 줄 지체가 반드시 곁에 있어야 합니다. 혹시 이 자리에 계신 분들 가운데 목장에는 안 나가고 주일 예배만 드린 채 안개처럼 사라지는 분들이 계십니까? 아니면 몸은 내가 공동체에 있지만 마음은 안개 공동체에 속한 분이 계십니까? 그곳에서 하루 속히 나오시길 바랍니다.
얼마 전 저에게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습니다. 모르는 번호라서 무심결에 받았는데 황급하게 떨리는 집사님의 목소리였습니다. 예배를 드리면서 늘 담임 목사님의 설교와 새벽 설교를 들어오셨다고 하시더라고요. 그런데 최근에 아들의 자살 징후가 너무 높게 나온 겁니다. 그래서 도대체 누구와 상의를 해야 될 지를 모르던 차에 제가 청년부를 담당하는 줄 아시고 그렇게 전화를 하셨더라고요. 사연을 들어보니까 이 아들은 우울증이 심한 데다가 한쪽 귀가 들리지 않고 자존감도 많이 낮아서 계속 죽고 싶다고 말을 하는 겁니다. 약을 먹고 자살 시도를 하고 바로 전날에도 한 밤중에 집사님이 주무시고 계신데 그 방으로 들어와서 죽겠다고 소동을 벌이기도 했습니다. 늘 목사님의 설교를 들으시고, 또 예배를 드리시지만 정작이 문제를 나눌 사람이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너무 불안하고 어찌해야 될 지 몰라서 이렇게 저에게까지 전화를 하셨던 거죠. 제가 그 날의 큐티 말씀으로 한참을 이분과 상담을 했습니다. 그리고 제가 그분께 여쭙고 여자 목장에 연결을 해드렸습니다. 다행히도 비슷한 고난을 겪으셨던 목자님과 또 동료들이 계신 목장에 연결이 되셔가지고 온라인으로 목장을 잘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집사님으로부터 다시 이렇게 문자가 왔습니다. 목장에서 예배 잘 드렸습니다. 목장에서 많은 위로를 받고 구원의 사건임을 몸소 깨닫게 해주시니 감사합니다. 잘 인내하면서 가겠습니다. 그 문자를 보면서 가슴을 쓸어내렸습니다. 아 이 집사님이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했던 이 고난을 처음으로 동료들에게 얘기하게 되셨구나. 이렇게 힘들고 고통스러운 삶의 이야기를 솔직하게 말할 수 있고, 또 들을 수 있는 공동체가 이게 얼마나 소중하고 귀한 것인가 그런 느낌이 들었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이 초대 교회처럼 나의 힘든 일을 이야기하고 한마음으로 소리 높여서 기도할 수 있는 공동체가 나에게 있다 라는 것은 복 중의 복인 거죠. 때로는 공동체에서 상처받을 수도 있겠죠. 하지만 그것 때문에 나는 공동체 안 나갈거야. 이것은 자기중심적인 합리화입니다. 오히려 공동체 안에서 오해받고 상처받고, 또 하지만 회복되는 이 시간을 통해서 나를 객관적으로 보게 됩니다. 바로 그게 내가 거룩해져가는 성화의 과정이죠.
자 베드로와 요한으로부터 자초지종을 듣게 된 초대 교회 동료들은 이제 무엇을 할까요? 큰일났다. 야 이제 드디어 올 게 왔다. 우리는 이제 망했다. 이렇게 걱정하면서 염려했을까요? 아니면 앞으로 우리는 뭐하지? 어떻게 이 위기를 극복해야 하지? 이런 이야기를 하면서 대책 회의를 했을까요?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면 이들이 걱정했다는 내용도, 무슨 회의를 했다는 내용도 없습니다. 이들은 두 사도의 이야기를 듣고 곧장 하나님 앞에 소리 높여서 기도했습니다.
여러분 공동체의 동료로부터 그의 나눔을 들었을 때 어떻게 반응하십니까? 목장할 때 어떻습니까? 다른 분들 나눔을 들으면 아이고 찌질하기 짝이 없네. 그렇게 행동하더니 지금 저렇게 됐나보다 집사님 삶의 결론이다. 판단하고 계십니까? 아니면 무슨 나눔이 저렇게 장황하고 두서가 없고 맥락이 없냐? 병원가서 상담받고 약이나 먹으라 할까? 공감도 애정도 없는 반응으로 듣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오늘 초대교회 성도들은 두 사도의 나눔을 듣자마자 한마음으로 곧장 기도합니다. 따라서 지금 내가 속한 공동체에 있는 동료들의 나눔은 무엇입니까? 내가 한 마음으로 기도해야 할 기도 제목입니다 그가 지금 겪고 있는 그 문제는 내가 함께 소리높여서 중보해야 할 기도이죠. 사실 저도 목장을 탐방하거나 모임을 인도할 때면 자동 반사적으로 나눔하는 분들의 나눔을 분석하게 됩니다. 공감도 하지만 때론 판단도 하고 처방질을 할 때도 많더라고요. 하지만 우리가 어떤 이야기를 듣더라도 그것은 그 지체의 기도 제목입니다.
자 그럼 이제 사도와 성도들은 누구에게 기도합니까? 대주재여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물을 지은 이시요 모든 만물을 창조하고 다스리시는 대주재이신 주님께 기도를 합니다. 우리의 기도 대상은 바로 이런 절대 통치자 하나님이죠. 그분께 나의 모든 사정을 아뢰고 일일이 고백하는 겁니다. 여러분 우리가 어린 시절에 배가 고프면 어떻게 했습니까? 엄마에게 배고프다고 말을 하죠. 밥 좀 달라고. 내가 몸이 아프면 아프다고 말을 합니다. 그럼 엄마가 밥도 차려주고 병원도 데려가죠. 그런데 정작 이 애가 배가 고픈데 밥 달라고 말을 안 합니다. 어디가 찍어져서 피가 나는데 아프다고 말을 안 하는 거예요. 그럼 이게 정상적인 관계입니까? 아닌 거죠. 문제가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도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나의 창조자 절대 통치자이신데, 그걸 머리로는 아는데 실상은 찾지도 않고 내가 말을 안 하면 어떻게 됩니까? 우리집에 아들이 배가 고픈데 얘가 나를 외면하면서 옆집 엄마에게 가서 아줌마 저에게 밥 좀 주세요. 그러면 얘가 정상입니까? 아주 이상한 거죠. 이처럼 내가 하나님을 외면한 채 나를 도와줄 것 같은 사람만 찾아 다니고 다른 것 만을 의지한다면 이게 옆집 아줌마에게 가서 밥 달라는 애랑 뭐가 다르겠습니까?
[적용] 나는 문제가 생겼을 때 가장 먼저 무엇을 찾고 어디를 향합니까? 누구와 그 문제를 이야기합니까? 나는 기도를 부탁하고 한마음으로 소리높여 기도할 동료가 있습니까?
2. 응답받는 기도는 말씀으로 하는 기도입니다. (28절)
자 사도와 성도들은 이제 시편 2편을 인용하여 기도합니다. 시편 2편은 메시아에 대한 예언시입니다. 다윗의 입을 통해서 성령으로 하신 말씀이죠. 여기서 열방은 이방 나라들이고 족속은 유대 민족입니다. 세상의 군왕들은 로마 통치자들이고 관리는 종교 지도자들입니다. 이들 모두가 한 편이 되어서 예수님을 못 박아 죽이는 일에 관여했죠. 공통점이 있다면 세상의 권력자입니다 그러다보니까 분노로 떠들어대고 허사를 경영했습니다. 사도와 성도들은 이제 이 말씀으로 기도하다보니 지금 자신들에게 당면한 이 문제를 말씀으로 해석해 나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겪고 있는 이 사건이 이미 성경에 기록되어 있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깨닫고 있습니다. 여러분 말씀이 없는 기도는 기복으로 흐르기 마련입니다. 하나님은 이미 그분의 뜻을 말씀으로 다 계시해주셨는데 기복적인 기도는 말씀을 들으면서도 계속 뭘 달라고만 기도합니다. 기도란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반응이죠. 이 말씀에 대한 반응입니다. 그런데 말씀과는 상관없이 나의 생각만 주구장창 부르짖는다면 이건 소통이 아니라 불통입니다. 정욕으로 구하는 떼부리는 기도에 불과하죠.
제가 우리들교회 부임하고 얼마 안되서 한 모임에서 기도회를 인도하던 때였습니다. 나름대로 기도회를 뜨겁게 잘 인도했다고 생각하고 자리에 앉았는데요. 아니나 다를까 한 사역자님이 저에게 오시더니 목사님 수고하셨어요. 그러시길래 나름 뿌듯해했습니다. 그런데 그 사역자님이 이 말을 덧붙이셨습니다. 수고하셨는데 목사님 앞으론 말씀을 좀 넣어서 기도해주세요. 그순간 내가 했던 이 기도가 말씀은 없고 그저 달라는 외침에 불과했구나. 싶어서 얼굴이 화끈거리더라고요. 그 이후부터는 말씀을 생각하면서 기도하게 됐습니다. 담임 목사님의 책에도 매 챕터가 끝나기 전에는 말씀으로 기도하기 그렇게 적혀져 있죠. 우리가 이렇게 듣게 된 말씀으로 기도할 때 하나님의 마음과 뜻을 알아갑니다. 그래서 진정한 기도의 응답은 상황과 환경이 바뀌기 보다도 이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 의도를 말씀으로 깨달아 가는 겁니다. 영적인 것을 깨닫다 보면 육적인 것도 내가 필요한 만큼 채워주신다는 것을 알게 되죠. 자 이제 이렇게 사도와 성도들이 기도하면서 인용한 이 시편 2편의 말씀은 이제 본문 27절에서 그대로 실현이 됩니다.
헤롯 안디바는 로마 황제에 의해 임명되어서 갈릴리를 다스린 분봉왕이었습니다. 본디오 빌라도는 유다와 사마리아를 다스린 로마 총독입니다. 이들은 이방인과 유대인과 합세해서 거룩한 종 예수를 거스르고 대적했습니다. 사실 이들은 유대지역을 다스리면서도 서로 사이가 좋기 않았습닌다. 개와 고양이 같은 견묘지간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받는 이 일에는 친구가 되었죠. 한 패가 되어서 공모했습니다. 우리가 선한 일을 위해서도 동역하지만 악한 일을 위해서도 함께 동역하자나요. 심지어 평소 사이가 나빴던 원수끼리도 이해관계가 맞아 떨어지면 의기 투합을 합니다.
저도 한 10년 정도 직장 생활을 했는데요. 제 상사로 인해서 참 힘든 시간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저만 그런 게 아니라 다른 부하 직원들도 그랬습니다. 평소 사이가 좋지 않던 직원들이 유일하게 하나가 되는 때가 있으니 그게 언제일까요? 바로 그 상사를 뒷담화할 때였습니다. 함께 모여서 그를 도마 위에 올려놓고 난도질을 합니다. 그를 깎아내리고 험담하면서 심지어는 어떻게 골탕을 먹일까 궁리하죠. 우리가 소극적인 반항이라도 하자면서 치열하게 아이디어를 냅니다. 정말 이런 일을 도모하는데도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머리가 팽팽 돌아가죠. 이렇게 우리는 작은 일에 분노하면서 허사를 경영합니다. 이 허사를 경영한다는 말은 헛된 일을 꾸민다는 뜻이죠. 그런데 비단 직장뿐이겠습니까? 공동체에서 누군가가 맘에 들지 않는다고 나는 이 목장 안 나가겠다고 그렇게 분노하면서 비난하십니까? 그 시간에 나는 그냥 TV나 보고 잠이나 자겠다 그렇게 이야기하십니까? 바로 이게 허사를 경영하는 것입니다. 배우자가 자꾸 나를 뒤집어 놓는다고 분노하다가 공동체 만류에도 불구하고 더 이상 너랑은 못 살겠다고 하면서 이혼을 생각하십니까? 허사를 경영하는 겁니다. 집에 애들이 공동체를 잘 나가고 있는데도 학교 성적이 오르지 않는 것 때문에 분노하다가 이번 수련회는 안 보내겠다면서 그 시간에 학원으로 돌리십니까? 허사를 경영하는 것이죠. 또 청년들은 어떻습니까? 나는 매일 큐티하고 공동체를 이렇게 열심히 섬기고 봉사하는데도 신결혼은 커녕 손바닥만한 신교제의 구름도 안 보인다 그렇게 분노하다가 불신 소개팅을 하고 불신 결혼을 감행합니다. 허사를 경영하는 것이죠. 그런데 바로 이런 것들이 거룩한 종 예수를 거스르고 대적하는 것이죠. 이처럼 자꾸 작은 일에 분노하고 실망하면서 허사를 경영하려는 이유가 왜 입니까? 내가 하나님 자리에 앉아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심판자의 자리에서 통치자 노릇을 하려고 하기 때문이죠. 세상의 군왕과 이 관리들처럼 그 자리에 앉아서 내 뜻대로, 내 마음대로 살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나의 삶의 주권이 이 대주재이신 하나님께 속해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모습입니다. 그러니 늘 옳고 그름만 따지면서 작은 일에 분노하고 허사를 경영하죠.
사실 이렇게 말하는 저야말로 옳고 그름의 화신이었습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제가 참 인간적이거든요. 담임 목사님께서 간혹 저에게 하시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아시죠? 우리들교회에서 듣는 이 인간적이란 말은 절대 칭찬이 아니라는 걸, 그 반대인 걸 아시죠? 그러다보니 구원 때문에 해야할 말은 하지 않고
하지 말아야 할 말을 자꾸 합니다. 이게 내 속에 있는 인본주의더라고요. 이 인본주의라는 것은 내가 하나님의 자리에 앉아서 심판자 노릇을 하려는 것이죠. 옳고 그름의 가치관으로 분노하고 끊임없이 허사를 경영하고 헛된 일을 꾸밉니다. 그런데 제가 그동안 그런 방식으로 예수님을 거스르고 대적해 왔더라고요.
[적용] 나는 말씀으로 기도합니까? 내 생각과 정욕으로 기도합니까? 내가 분노하면서 경영하고 있는 허사, 꾸미고 있는 헛된 일은 무엇입니까? 내가 기름 부으신 자를 대적하는 일은 무엇입니까? 그 일에 누구와 한패가 됩니까?
3. 응답받는 기도에는 하나님의 권능과 뜻이 이루어집니다. (28절)
세상은 이처럼 거룩한 종 예수와 그 분을 따르는 자를 대적하고 거스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분의 뜻대로 예정하신 일을 이루어 가십니다.
자 하나님의 권능과 뜻대로 이루려고 예정하신 일이 무엇입니까?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죽으심입니다. 그런데 거기서 끝이 아닙니다.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그를 믿는 자들에게는 구원을 베푸시는 것이죠. 로마의 정치 지도자들과 유대의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에 죽이는 일에 한 패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이들의 자유의지까지도 사용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죠. 그렇다면 여러분 내가 지금 겪고 있는 이 고난, 내 몫에 태인 이 십자가도 하나님의 권능과 뜻을 이루시기 위해서 예정하신 겁니다. 지금 이 십자가를 벗어 던지지 않고 이걸 지고 가다 보면 내 현재의 이유를 깨닫는 권능을 얻습니다. 이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알아가죠. 아 나를 구원하시고자 이 고난을 사용하시는구나. 나를 거룩하게 빚으시기 위해서 이 일을 쓰시는구나. 그렇게 깨닫습니다.
우리들 공동체에는 오늘도 가족의 십자가, 건강의 십자가, 물질의 십자가, 진로의 십자가, 이런 저런 십자가를 지고 가는 분들이 참 많으십니다. 어제도 제가 양육 교사를 인도하는데 감옥에 갇힌 이 바울과 실라처럼 옥에 갇힌 환경인데도 거기서 찬송하고 기도하는 분들의 나눔이 이어졌습니다. 그 고백을 듣고 있는데 정말 제 마음도 숙연해지더라고요. 비록 내가 옥에 갇혀 있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지금도 그분의 권능과 뜻을 나의 삶 속에서 이루어가고 계신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구원하시고 거룩하게 빚어 가실 것도 믿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혹시 곁에서나를 힘들게 헤롯같은 배우자나 식구가 있습니까? 아니면 빌라도 같은 직장 상사가 있습니까? 그대상이, 아니면 나를 아프게 하는 질병일 수도 있습니다. 직장이나 사업의 문제, 경제적인 어려움일 수도 있죠.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이 모두 합세해서 나를 고통스럽게 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이런 고통의 시간을 통해서 하나님은 그분의 권능과 뜻대로 예정하신 것을 나의 삶 속에 이루어가고 계신다는 것을요. 택자에게는 어떤 것도 지나고 보면 구속사의 과정이기 때문입니다. 만일 우리가 이게 깨달아진다면 더이상 내 잎에서 원망과 불평이 아니라 감사가 나오겠죠. 내가 감사해야지, 감사해야지. 한다고, 감사, 감사를 외친다고 감사가 되겠습니까? 그게 아니죠. 나의 지금의 고난이 성경에 써져있고 내 현재의 이유를 아는 이 권능을 베풀어 주시기에 감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분의 예정하심대로 나와 우리 가정의 구원을 반드시 이루실 것을 믿기에 감사하는 것이죠. 그런데 우리가 이걸 모르니 사건만 일어나면 나는 시험들었다고 합니다. 하나님 나 믿음 없는 거 아시면서 왜 이러십니까? 왜 이런 일이 자꾸 나에게만 일어나냐, 니가 도대체 나에게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느냐 이런 종류의 말들을 반복하죠. 그런데 바로 이런 모습이 하나님의 권능과 뜻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고 그저 지금 당장의 만족만을 구하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그러다보니까 얼굴이 늘 춥고, 차갑고 어둡숩니다. 저도 공동체에서 얼굴이 추워보인다는 얘기를 몇 번 들었습니다. 그래서 거울 볼 때마다 깜작, 깜짝 놀라곤 했습니다. 도대체 이 얼굴이 구원의 소망이 있는 얼굴인가? 기쁨이 있는 얼굴인가? 그러면서 혼자 입꼬리를 들어 올려 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썩은 미소만 지어지더라고요. 사실 그런데 그게 그렇게 한다고 될 일이겠습니까? 내 얼굴에 기쁨이 없는 까닭은 내 생각이 현재의 고난과십자가에만 머물러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나의 구원까지도 예정하고 계신다. 이걸믿고 확신하면 이 얼굴의 주름이 펴지게 되겠죠. 현재의 고난은 장차 올 영광과 족히비교할 수가없는 겁니다. 내가 주님의 죽으심과 부활에 참여함으로써 구원을 얻게 되고 영생을 누리게 되고 천국을 소유한 게, 이게 너무 감사하고 기쁜겁니다. 목사님께서 늘 하시는 말씀처럼 영생 화장품을 얼굴에 바르고 지내는 것이죠. 그러면 내 얼굴에 광채가 나지 않겠습니까?
[적용] 하나님의 권능과 듯대로 예정하신 지금 나의 십자가는 무엇입니까? 지금 내 얼굴은 어떻습니까? 어둡고 춥습니까? 밝고 환하게 빛나고 있습니까?
4. 응답받는 기도로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29-31절)
사도들과 성도들은 계속해서 이렇게 기도합니다.
어떻게 기도하고 있습니까? 주님께서 이들이 받고 있는 이 위협을 굽어 살펴주시길 간구하고 있죠. 이들은 위협을 없애달라고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유대인의 위협을 주목하사 자신들을 지켜주시길 기도합니다.
제가 저희집 아이들이 아주 어릴 때 놀이터에 함께 간 적이 있었습니다. 아이들이 미끄럼틀을 타고 놀다가 간간히 저를 한 번씩 멀끔멀끔 쳐다보더라고요. 얘들이 왜 그러는 걸까요? 아빠가 지금 여기에 우리와 함께 있구나, 나를 지켜보고 있구나, 나를 보호해 줄거야. 이 믿음이 있기 때문이죠. 이 아이들의 그 마음처럼 저 또한 계속 이 아이들을 주목하고 응시했습니다. 혹시나 얘들이 넘어지지 않을까, 어디 부딪혀서 다치지는 않을까 그 마음으로 주목하는 거죠.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를 굽어보시는 것도 그렇습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나를 응시하시고 주목하심으로 지켜봐 주십니다.
이 강팍한 종교 지도자들은 베드로와 요한에게 복음을 전하지 말라고 위협합니다. 하지만 사도들과 성도들은 오히려 우리가 담대하게 전하게 해달라고 기도합니다. 도대체 어떤 이런 기도가 입으로 나올 수 있게 되었을까요? 이들은 자신이 예수로 죽고 예수로 살게 되었음을 믿었습니다.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이 고난을 통해서 예수님의 그 부활에 참여하게 될 거라고 믿었습니다. 자신들 앞에 당면한 지금 이 문제보다도 더 크신 하나님을 바라보았죠. 그리고 신뢰했습니다. 그 믿음이 있으니 이 기도가 나온 것이죠. 여러분 내가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서 구원받고 영생을 소유하게 되었는데 무엇이 두렵겠습니까? 어떤 해를 받는 게 싫겠습니까? 내가 예수로 죽고 예수로 살게 되었는데 예수님 때문에 받게 되는 어떤 해도 나에게 유익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고난을 피하게 해달라고 기도하기 보다는 지금의 고난에서도 나를 지켜주시기를, 이 십자가를 잘 지고 가게 해주시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내 몫에 태인 이 십자가를 통해서 주님은 나와 우리 가정에 구원을 이루어주시기 때문입니다. 나의 죽어짐과 내가 썩어지고 밀알이 되는 자기 부인의 시간을 통해서도 우리 가정에 부활의 빛을 비춰주실 것을 소망하기 때문이죠. 그러다보니까 초대 교인들의 기도는 환경의 변화가 아니라 자신의 변화를 위한 기도였습니다. 회피하는 기도가 아니라 직면하는 기도였죠. 이들은 현실 회피, 문제 회피, 상황 회피하지 않았습니다. 담대하게 이 문제를 직면하게 해 주시기를 기도했습니다. 상황을 돌파하게 해 주시기를 기도했죠. 하나님 저들은 우리를 위협하고 있지만 주님이 우리를 붙드사 우리를 담대하게 하심으로 이 생명의 복음을 전하게 해 주십시오. 그렇게 기도했습니다. 여러분 요즘 나는 어떻게 기도하고 있습니까? 내가 지금 시련 가운데 있다면 주님께서 나를 굽어 살펴주시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이 풀무불같은 고난 한복판에서도 주님 나를 보호하사 이 문제를 통과하게 해주시길 기도하시길 바랍니다. 오늘 내 삶의 형편이 어떠하든지 내가 담대하게 이 말씀을 적용하게 나에게 주신 이 사명을 감당하게 해 달라고 기도하시길 바랍니다. 이어서 사도들과 성도들은 이렇게 기도합니다.
담임 목사님께서는 이 부분을 설교하실 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곤고한 환경에서 나에게 주시는 말씀이 표적이 되고 그 사건이 해석되는 것이 기사라고요. 내가 어떤 환경 속에서도 예수의 이름을 가지면 나의 모든 환경은 남을 죄에서 꺼내줄 수 있는 환경으로 쓰인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 예수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것은 내가 이미 하나님의 자녀라는 증거이죠. 하나님 앞에서 나의 죄와 전적인 부패와 무능력을 시인하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기도할 때 성령님은 나로 하여금 십자가로 난 길, 진리의 길을 선택하게 하시죠. 사명의 길이 아니라 생명의 길을 선택하게 하십니다. 그래서 거룩한 종 예수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것은 이미 그 자체가 응답받는 기도입니다. 자 사도와 성도들이 그렇게 기도했을 때 드디어 기도 응답이 나타났습니다.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요?
기도하던 그들이 변화되었습니다. 헤롯이나 빌라도, 종교 지도자들, 이들이 변화된 게 아니었습니다. 위협의 환경은 여전히 바뀌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기도하던 그들이 성령으로 충만하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내 삶의 지축이 흔들리고 진동하는 사건에서 받는 이 기도 응답은 내가 성령으로 충만해지는 걸로 나타납니다. 두려움 충만, 욕심 충만, 자기애 충만, 의심 충만, 불신 충만에서 성령으로 충만해집니다. 말씀으로 충만해집니다. 기도했더니 내가 변하는 것이죠. 꼴보기 싫은 저 인간이 변하는 것이 아니라 그를 미워하던 내가 먼저 변하게 됩니다. 기도하던 내가 성령으로 충만하게 되는 것, 내가 죽고 내 안의 예수님이 사시는 것, 그게 최고의 기도 응답이죠.
여러분 성령 충만이 무엇입니까? 말씀을 적용하기 위해서 듣기 힘든 그 한마디를 받아내는 것입니다. 내가 그렇게 변하면 성령의 열매는 내 곁에 있는 사람들이 나누어 먹습니다. 내가 말씀 충만, 성령 충만하면 가장 먼저 내 곁에 있는 사람들, 식구들이 기이 여기기 시작하죠. 어 우리 엄마가 왜 저렇게 변했지? 우리 아빠가 뭐 때문 저렇게 달라졌지? 우리 가정의 구원 역사는 바로 그때부터 시작됩니다. 그런데 이 성령 충만은 단 하루만으로 그쳐서는 안됩니다. 매일 이어지고 연속되고 반복되어져야 하죠. 그래서 우리는 날마다 성령 충만하길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가 보통 어떤 계기로 은혜를 딱 받고 하루 이틀 정도는 적용을 하죠. 하지만 다음 날이면 다시 이전으로 돌아가는 모습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모습들을 가장 가까이 있는 자녀들도 알고 있죠. 그래서 어느 날 갑자기 내가 아들에게 아들아 사랑한다. 카톡이라도 보내면 아빠 요즘 일대일 양육 적용하는 거 아냐? 이렇게 묻습니다. 엄마 혹시 목장 처방 때문에 억지로 그러는 거 맞지? 이렇게 애들도 내가 진짜 성령 충만한 건지 아닌지를 아닌지를 다 압니다. 그래도 내가 그렇게라도 들은 말씀 때문에 적용한다면 그게 성령 충만하다는 증거이겠죠. 만일 나는 하나도 변화된 게 없는데 내 기도 응답으로 남편과, 또 자녀가 변화되었다고 생각을 해 보십시오. 오히려 변화된 남편과 자녀입장에서는 전혀 변화가 안 된 아내, 엄마를 보면서 얼마나 실망하겠습니까? 기도하는 나는 하나도 안 바뀌고 상대방이 바뀌기만을 바란다는 것은, 이런 기도는 욕심 충만의 기도이죠. 여러분 성령 충만의 특징은 말씀을 적용하고도 생색내지 않습니다. 듣기 힘든 그 한마디를 겨우 듣고 겨우 겨우 넘어갔는데 나에게 잘했다고 칭찬해주는 사람이 없어도 서운하지 않습니다. 그냥 내가 하나님이 좋아서 내가 이렇게 적용하게 된 것 마저도 황송한 것이죠. 알아주는 사람 단 한 명 없어도, 내가 이렇게 죽어질 수 있는 것 조차도 감사한 겁니다. 성령 충만은 그런 것이죠.
자 이제 성령 충만해진 사도들이 어떤 일을 합니까? 31절 후반부를 보면 담대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응답받는 기도의 결과는 성령 충만이고 이것은 영혼 구원을 위한 복음 증거로 이어집니다. 성령 충만은 말씀 충만입니다. 그래서 성령 충만한 사람은 말씀으로 담대하게 살아가죠. 우리가 바로 곁에 있는 지체들에게 복음조차 전하는데 소심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성령 충만과는 거리가 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내가 성령으로 충만하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확신으로 가득해집니다. 담대하게 말씀을 적용하고 순종하죠. 나에게 찾아온 어떤 유혹에도 타협하지 않습니다. 어떤 위협도 굴하지 않죠. 앞으로 내가 받게 될 어떤 손해나 불이익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성령으로 충만하면 말씀에 사로잡힌 내가 됩니다. 말씀에 붙잡힌 인생이 되는 것이죠. 그 말씀을 전하고 증거하는데도 주저함이 없습니다. 이렇게 기도의 응답은 내가 하나님의 말씀의 사람이 되는 것이죠. 그런 사람을 어떻게 세상이 건드릴 수 있겠습니까? 그런 사람이 이 땅에 살면서 두려운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또 세상의 무엇을 부러워하겠습니까? 저는 이 시간 함께 예배 드리는 우리 모두가 말씀에 붙잡힌 인생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말씀의 능력에 사로잡혀서 사시는 인생이 되기를 바랍니다. 저는 매주 주일 예배가 끝날 때 폐회 찬양을 드릴 때면 가슴이 뜨거워지곤 합니다. 하나님 말씀에 두려워 떠는 자 그 말씀에 생명을 거는 자 그 말씀에 운명을 거는 자 순종하면서 주님을 따라가는 자, 그 한 사람, 그 한 사람이 되고 싶다. 그 소망으로 찬양을 부르곤 합니다. 바라기는 우리 모두가 그 한 사람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적용] 고난을 피하게 해달라고 기도합니까? 고난에서 지켜 달라고 기도합니까? 나는 나 자신의 변화를 위해 기도합니다. 내 곁에 사람과 환경이 변하기만을 기도합니까?
기도제목
다인
일을 해결하면서 느끼는 성취감이 우상이 되지 않도록
경계를 잘 지킬수 있도록
언니 가정의 믿음생활과 아이의 건강을 위해
영육의 회복을 위해
현경
내 삶의 형편이 어떠하던지 담대하게 말씀으로 기도하고 적용하고 감당할 수 있도록
운전면허 다시 준비할 수 있도록
아버지 구원을 위해
예선
보고 가야할 것들이 아직 남았는데 빨리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잘 통과하며 보고 갈 수 있도록
간증문 다시 작성하려고 하는데 지혜 주셔서 꼭 해야 할 말들 잘 정리할 수 있도록
집에서 공기 바람 잘 할 수 있도록
새 마음으로 목장 식구들 위해 말씀으로 기도하기
보련
공동체 위해서 기도합니다
서류 나오는 것 기다리고 직장 연결 알아볼 수 있도록
날씨가 더운데 지치지 않도록
크리스틴
실패한 과거와 상처에 머물러 않을 수 있도록
무기력, 무관심, 방어적인 모습들이 바뀔 수 있도록
내 몸을 소중히 생각하기.
유교적, 율법적, 기복적 행동과 모습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은우
세상의 허사경영을 그치고 매일 말씀으로 프로젝트 진행할 수 있도록
선한 사업으로 사용되도록 옷깃을 여미고 분별하면서 갈 수 있도록
주신 금액들이 투명하게 사용되고 꼭 필요한 곳에 사용되도록
돕는 손길 허락하시고 가고 서는 길 보호해 주시도록
붙여 주신 지체들 위해 중보 하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