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516 성령의 신사
사도행전 17:10-15
여러 가지 부족해도 믿음만 있으면 된다가 우리들교회 슬로건인데 우리는 믿음이 있으면 뭐해. 정말 안 믿어도 상식과 인격이 있는 것이 백 번 나아. 결혼도 성품이 좋아야지. 믿음은 다 나중에 생기게 하면 돼 살아보니 이거 너무 공감 되시죠? 이것이 너무 많은 이야기같이 들립니다. 교회 다니면서도 이런 이야기를 너무 자연스럽게 듣고 살았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부족해도 믿음이 최고입니다. 그런데 교회 다니면서 이 쉬운 얘기를 하기가 이렇게 힘든 줄 몰랐습니다. 저는 이 얘기만 하다가 하직할 것 같습니다. 이 너무 쉬운 이야기가 너무 어렵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혼하지 말라, 불신 결혼하지 말라 다 똑같은 맥락입니다. 아주 다 돌로 칠 태세입니다. 그래서 요즘 사도 바울이 돌로 맞는 것이 너무 체휼이 됩니다. 지금도 힘든데 그 당시에 정말 안 들렸을 것 같아요. 바울의 그 얘기가.
데살로니가 전도를 한 후에 베뢰아에 있는 사람들이라고 뱌울을 감탄하게 하며 독특한 사람들이 등장을 합니다. 이름도 기록되어 있지 않은 무명의 사람들이에요. 그런데 이곳 베뢰아의 유대인들은 개역한글 성경에 보면 복음에 대하여 매우 신사적이란 표현을 합니다. 이들이 2천년 동안 알려진 베뢰아의 신사들입니다. 오늘은 베뢰아 교회의 모습을 묵상하면서 성령의 신사, 물론 여기에 숙녀도 포함되겠죠? 성령의 신사에 대해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1. 독불장군이 아닙니다. (10절)
베뢰아는 지난주 데살로니가에서 서남쪽으로 약 80km 정도 떨어진 소도시 그다지 중요한 도시가 아니었어요. 그런데 데살로니가의 형제들은 바울에 대해서 소동이 나자 바울을 밤중에 도시 바깥으로 빠져나가게 합니다. 밤중 여행이 위험하자나요. 빌립보에서 당한 일을 다시 당하는 거 보다 이 밤중에 나가는 게 낫겠다. 감옥에 갇혀서 매 맞는 거 보다는. 야반도주는 굉장히 비겁하게 보일수가 있죠. 그런데 바울은 성령의 전략에 따라서 수치를 무릅쓰고 데살로니가에서 탈출을 합니다. 여기서 보내다는 단어는 신약에서 두 번 쓰였는데 사도행전 13장 4절에서 안디옥 교회에서 바나바와 바울을 파송할 때 쓴 두 사람이 성령의 보내심을 받아 그 단어를 썼는데요. 사도행전 누가가 썼자나요. 누가는 야반도주가 사실상 성령의 전략에 따른 파송임을 표시하기 위해서 같은 단어를 썼어요. 그러나 베뢰아에 도착한 바울이 여전한 방식으로 유대인의 회당에 들어간 것을 볼 때, 유대인으로부터 피하는 것이 바울의 전략은 아니었다는 거죠. 그는 피해야 될 상황에서는 수치를 무릅쓰고서라도 피했지만 관례에 따라 전도하는 일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소아시아 길리기아의 다소 사람이었어요. 그는 마게도냐의 환상을 보기까지는 아시아 전도만 생각하고 유럽에는 올 생각조차 못하고 있었습니다. 순종하고 마게도냐는 왔지만 지리도 잘 모르고 풍습, 문화도 다 모르는 것투성이였어요. 그런데 그 모른다는 것을 바울이 인정을 하고 이 성도들이 시키는 대로 하는 걸 보게 됩니다. 우리는 바울이 항상 주도적이라 이런 모습이 약간 생소하기도 하거든요. 성령의 신사는 모르는 것을 인정하고 그 밑에 제자 동무들에게도 순종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야반도주해야 하는 이 밤과 시골인 베뢰아에 순종을 하는 바울을 보면서, 바나바가 마가를 데리고 가자고 할 때는 그렇게 심히 다투었는데 여기서 바울은 아니, 바나바가 더 낫지? 데살로니가 성도들의 믿음이 더 나아? 이렇게 생각할 수 있죠? 이해가 안됩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은 어디까지 나가냐 하면 울이 유대인들과 협력하지 않아서 그렇게 왕따를 당하고, 그래서 바울이 관계가 안되자나요하는 분도 있어요. 아니, 가는 곳곳 돌에 맞고 핍박을 당하니 울이 독불장군 아니에요? 문제가 많아요. 어떻게 한결같이 이렇게 유대인들이 미워하겠어요? 이럴 수 있죠? 이게 구속사와 세속사의 차이기 때문에 설명이 안되는 부분입니다. 지난번에 행위 구원을 얘기했는데 우리 중에는 직분자들도 그거 잘 모르는 분이 여지껏 계세요. 이렇게 바나바와도 심히 다투어서 갈라섰던 그가 데살로니가의 형제들에게는 지금 순종을 하는 거예요. 이게 어떻게 설명이 되겠습니까? 바울이 바나바를 설득하게 해서 끝까지 같이 가려고 했던 것 기억하시죠? 떠난 사람은 바나바지 바울이 아니예요. 바울이 어린 혼혈인 디모데를 배려하고, 베드로를 생각해서 아시아에 들어가지 않았다는 것도 저희들은 살펴보았어요. 이게 똑같아 보이지만 복음의 본질과 비본질을 잘 구별해서 대처하는 것이 진짜 신사입니다. 복음의 신사는 복음에 유익하다면 즉시 순종합니다. 고리타분하지 않습니다. 바울은 결코 독불장군처럼 하지 않았어요. 늘 다른 사람들과 협력했습니다. 그런데 딱풀 성도라고 자기들끼리만 딱 달라붙는 게 아니고, 주님께 딱 달라붙어 있는 딱풀 성도는 주님의 뜻대로 이타적인 협력을 합니다. 그런데 이 협력을 누구에게 배웠어요? 그거 다 바울에게 배웠죠. 바울만큼 동역자를 중시한 사람이 없어요. 동역자라는 단어 자체가 바울의 단어라고 했습니다. 영적으로 잘 들으셔야 돼요. 데살로니가 성도와 베뢰아 성도들이 바로 이걸 알았어요. 바울이 부탁하지 않았는데도 알아서 적극적으로, 주도적으로 사도 바울을 막 도운 거예요. 유대인들은 그렇게 죽이려고 하는데 바울을 돕는 사람들이 곳곳에 이렇게 있는 거예요. 이렇게 서로 협력하는 신사와 숙녀의 공동체가 있었기 때문에 어디로 가든지 또 여전한 방식으로 전도의 사명을 감당하게 하셨습니다. 우리 예배와 목장이 이런 협력의 기운을 받는, 협력하는 고품격 신사 숙녀가 될 수 있는, 이런 능력을 공급받는 곳인 줄 믿습니다.
[적용] 여러분은 구원을 빙자하여 매사에 독불장군입니까? 순종하고 협력하는 센스가 있습니까?
순종하고 협력하는 믿음이 있습니까? 이러면 더 쉽겠는데, 그런데 이럴 때의 믿음은 갈 때, 안 갈 때를 아는 게, 이게 센스라서 제가 센스라는 단어를 썼어요. 구원은 센스, 믿음은 센스예요. 십자가는 지혜고 타이밍이기 때문에.
2.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습니다. (11-12절)
너그럽다 개역한글로 신사적이라는 말은 원뜻으로 하면 잘났다 이런 뜻이에요. 아주 좋은 태생의 고상한 마음을 가진 관대함을 뜻하는 비교급 단어입니다. 이 얘기는 고정관념에 덜 사로잡혀서 다른 사람의 생각에는 더 열려있는 이런 태도를 가리키는 거예요. 한마디로 좋은 태생과 좋은 배경을 가지고 잘 자랐다는 뜻이고 고품격 인간을 말합니다. 세상적으로 이렇게 고품격인 사람의 대표는 헨리 나우웬이 아닐까 싶어요. 네덜란드 출신의 석학이고, 명문대 교수고, 어렸을 때부터 헌신해서 카톨릭의 신부, 사제였고, 아주 명석한 사고의, 아주 탁월한 작가고, 탁월한 연사예요. 못하는 게 없어요. 얼마나 헨리 나우웬 책 유명합니까? 말도 너무 잘하고. 상처입은 치유자라고 불린 그는 아픔을 솔직히 노출시키는 감정 이입 내지 공감대 형성에 아주 뛰어났어요. 명문도, 하버드, 예일대 교수라는 것도 고품격인데 마지막에 죽기 10년 전부터는 다 내려놓고 라르쉬(LArche)라는 정신장애우 공동체에 가서 그렇게 살다가 갔기 때문에 신사 중의 신사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오늘 이 11절을 보면 우리 번역으로 베뢰아 사람들이 더 너그럽기 때문에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았다 그랬자나요. 그런데 원문의 구조를 보면 그 반대가 맞는 거예요. 베뢰아 사람들이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말씀이 그런지 날마다 성경을 꼼꼼히 묵상했기 때문에 그들이 데살로니가 사람들보다 더 너그러다, 더 신사적이었다, 더 고품격 신사와 숙녀다웠다고 하는 거예요. 무슨 뜻인가요? 베뢰아 사람들이 더 신사적이기 때문에 말씀을 받았다는 게 아니고요. 반대로 말씀을 간절한 마음으로 받고 성경을 상고했기 때문에 그런 간절함과 사모함 때문에 더 신사적이라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잘남의 기준과 출발점이 완전히 다른 거예요.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신사적이어서 간절히 말씀을 사모한 게 아니고 간절히 말씀을 사모했기 때문에 신사적이었다. 아시죠? 그런데 이런 구속사적 가치관에서 잘남의 기준과 출발점은 오직 말씀 묵상에 있어요. 태생과 성품이 어떻든, 배움이 얼마든, 자격이 무엇이든, 어떤 환경에서 살고 있든 그저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으면 그것이 진짜 신사적이고 잘난 인생이라 이겁니다.
베뢰아 사람들은 말씀을 대하는 것도, 열정도 으뜸이었지만 더욱 더 눈 여겨 보게 하는 말씀은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의 구절이에요. 여기서 상고하다라고 번역된 헬라어가 아나크리노라는 단어인데, 이 단어는 강렬한 의지를 갖고 반복하는 접두어 아나. 접속사로는 위에라는 단어인데, 여기다가 구별하여 판결, 결정하다는 동사 크리노가 합쳐진 단어예요. 그러니까 상고하다에는 판결하다가 들어가 있자나요. 아나크리노는 판사가 재판을 하기 위해 증거물들을 꼼꼼하게 반복적으로 살피어 판결할 때 사용했어요. 자, 다시 생각해보면 말씀이 비추어 나를 자세히 살피고 내 삶의 티를 골라낸다는 뜻인데, 티를 골라내려면 막 조사하고 검토하고 먹고 씹어보고 그래서 적용해서 행하는 데까지 가야하는 것이 상고하는 것입니다. 이런 인생이 잘난 인생, 자꾸 반복합니다. 그러면 베뢰아 사람들이 왜 이렇게 지금 이 말씀, 바울의 강론을 듣고 하나님의 말씀인가를 분별하여서 판별했을까요? 13절에 또 데살로니가 성도들이 와가지고 또 바울을 놓고 소동을 했자나요. 그러면 저 바울의 말씀이 진짜인가 분별해야 되자나요. 그래서 여기서 날마다 상고했다는 것이 이런 뜻이 들어가서 이 말이 진짜인가? 가짜인가?. 그래서 유대인들의 그 거짓 가르침을 구별하는 잣대로 하나님의 말씀을 삶의 현장으로 가져가는 것, 진짜인가? 가짜인가?를 삶의 현장으로 가져가는 것, 그리고 고민했다는 거죠. 그러니까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이것이 진짜인가 여기 그러한가 하여. 그래서 존 스토트는 이 베뢰아 성도들이 수용성과 비판적인 질문을 겸비했다는 거죠. 다 받아들이면서도 비판적인. 그래서 그렇게 티를 골라내기 위해서 조사하고 검토하고 먹고 씹어보고 해보니까, 삶에 그거를 가져와서 분별을 해보니까, 성경을 보니까 예수가 그리스도다 이걸 골라낸 거예요. 우리가 성경을 유대주의의 틀로 왜곡해 받아들여서 문제지 사심없이 정밀히 상고하게 되면 다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할 수 있어요. 저도 혼자서 예수가 그리스도인 걸 발견 했자나요. 이런 인생이, 하나님 보시기에 진짜 성경을 자세히 이렇게 상고할 때에 확실한 신앙을 소유하게 되면, 확실한 신앙이 가장 하나님 보시기에 진짜 잘난 인생입니다. 그러니까 이 간절함으로 상고했다는 거는 반드시 간절함은 상고함과 분별과 판단이 따라야 합니다. 그랬더니 베뢰아에 믿는 사람들이 많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여러분에게도 제가 권합니다. 큐티를 하면서 그걸 삶으로 가져와서 내게 주시는 음성으로 삶에서 들어보세요. 그러면 진짜인지 가짜인지가 드러납니다.
그랬더니만 오늘 믿는 사람이 많고 헬라인 귀부인과 남자가 적지 않았다고 합니다. 꼭 우리들교회를 말하는 것 같아요. 믿는 사람들이 많죠? 귀부인과 이 세상적으로 엘리트인 분들도 적지 않아요. 그 표현이 또 맞지 않아요? 우리가 꼭 베뢰아교회 같지 않습니가? 이런 인생이 바로 성령의 신사요, 성령의 숙녀입니다. 그런데 빌립보서, 데살로니가 전서는 책이 있자나요. 그런데 이 베뢰아서는 없자나요. 왜 없을까요? 베뢰아교회는 너무 잘하고 있기 때문에. 편지도 안 쓰고 파송도 안 했어요. 사역자를. 그러면 대체 베뢰아 사람들은 어떻게 이런 간절함을 가지고 성경을 묵상할 수 있었을까요? 이런 것들을 좀 생각해보시라고요. 그저 예수 믿으면 복받는다 이런 쉬운 얘기 말고. 생각을 해야 뇌도 운동을 하자나요. 베뢰아는 빌립보나 데살로니가보다 더 오래된 도시예요. 알렉산더 대왕 시절에는 마게도냐에서 두번째로 큰 도시로 성장하기도 했는데 주전 168년에 로마가 마게도냐 지역을 정복할 때 제일 먼저 로마에 항복했어요. 자존심이 좀 없죠? 그런데 그 이후에 아주 2류 도시로 내려갔어요. 그래서 빌립보가 뉴욕이라면 데살로니가는 워싱턴 DC쯤 돼요. 그런데 지금 이 베뢰아는, 빌립보와 데살로니가가 그때 마게도냐를 관통하는 에그나티아, 동서로 관통하는 에그나티아 도로가 있는데 빌립보하고 데살로니가는 이 도로에 연결되어 있는 거예요. 그런데 베뢰아는 이 도로에서 한참 떨어져 있습니다. 그러니까 지금 경부 고속도로에서 한참 멀리 떨어져 있는 거죠. 그러니까 베뢰아 사람들이 지역적 소외감을 가졌을 것 같아요. 그러니까 역사적으로 뒤치지는 않는데 지금 말하면 텍사스 이런데가 복음의 벨트 라인이에요. 그런데 켄터키 시골 마을쯤 된다고 할 수 있는데, 아주 키케로는 도로에서 떨어진 마을이라고 하죠. 만년 2류 도시라는 피해 의식이 그들의 마음을 딱 사로잡고 있는 고난인데, 진짜 이 켄터키 이런 데가 여자는 바지 안 입고 치마만 입고 경건하고 그리고 켄터키, 텍사스 이 도시 사람들이 굉장히 너그럽고 믿음이 있고 그렇대요. 우리가 저쪽 캘리포니아 이런데 가면 신앙 생활이 안된다고 그래 요. 어렵습니까? 그래서 이쪽 베뢰아가 비교급을 써서 더 너그럽다고 합니다. 결국 이 고난이 구속사의 말씀을 들을 때 간절한 마음을 일으키는 원동력이 되었는데요. 만년 2류니까 늘 눈치를 보고 남의 시선을 늘 의식할 수밖에 없고 그런데 그런 약점이 바울의 증언을 편견 없이, 내가 정답이라는 권위의식 없이 객관적으로 들을 수 있게 하는 바탕이 된 것이죠. 제가 늘 이렇게 보니까 진짜 여러분들이 힘들 때는 다 간절하게 사모하는데 좀 환경이 좋으면 정말 목자하기도 힘들어하고 그러더라고요. 진짜 정말 예외가 없더라고요. 그래서 늘 고난이 오라고 기도할 수도 없고. 저도 사명이 없으면 진짜 이 길을 못 가는데 이게 진짜 맞는 거 같아요. 베뢰아의 열매가 훨씬 많은 거예요. 지금 이 두 도시보다. 우리도 마찬가지죠. 잘난 사람이 말씀을 간절하게 받는 게 아니예요. 아주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는 인생이 아주 고품격 신사인데요. 이 간절한 마음은 저절로 생기지 않아요. 정말 여러분들이 너무 인정하고 싶지 않겠지만, 여러 고난을 겪으면서 이 땅에서 소망이 하나씩 끊어지는 것만큼 그 간절함이 하나씩 생기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 땅에서 소망이 그득그득 찼는데 간절함이 안 생겨요. 간절한 마음은 고난에 비례합니다. 구원의 관점에서는 그래서 우리 인생에서 버릴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래서 신사적이고 너그럽다는 것은 정말 고정관념이 없는 거예요. 내가 육이 무너질수록 내 속의 고정관념이 하나씩 벨트가 끊어지는 거예요. 그래서 간절함이라는 것은 좋은 게 좋은 게 아니고 반드시 상고함과 분별함과 판단이 따라야 하는 것입니다. 적용해 보세요.
[적용] 신사적이라 말씀을 찾습니까? 말씀을 찾다 보니 신사적으로 되었나요? 고난 중에 하나님만 간절히 찾습니까? 오늘도 무사히만 빌며 하나님을 찾습니까?
3. 사명의 길을 멈추지 않습니다. (13-15절)
베뢰아에 많은 유대인들과 헬라인들이 바울의 구속사적 강론을 듣고 믿었다는 소식이 데살로니가에 전해지니까 이 유대인들이 시기심으로 여기까지 또 가서 소동을 막 일으키는 거예요. 하여튼 바울 한 명 잡으려고 참으로 무서운 시기와 무서운 열심을 내면서 또 우르르 몰려왔어요. 데살로니가에서 했던 방식과 똑같은 방식으로 베뢰아 시민들을 선동합니다. 바울이라는 작자가 가이사 외에 다른 임금 예수가 있다며 반역을 꾀한다! 반역죄라는 프레임을 씌우려는 것이죠. 유대인들의 이런 모습을 보는게 바울도 참 어려웠을 거 같아요. 아유, 얼마나 힘들었을까요? 지금도 힘든데, 2천년이 지난 지금도 성품이 아니라 믿음이다. 이 얘기하기가 이렇게 어려운데. 여러분들이 다 성품이고 착하게 살려고 교회 오기 때문에 그게 아니라고 이 본성을 자꾸 거스르는 얘기를 하니까 날마다 힘든 거예요. 내가 착하게 살라고 그랬지 뭐가 고난이 축복이야 이러니까. 그래서 숨이 탁탁 막힙니다. 하지만 바울은 자기 일을 한다고 생각하지 않았어요. 이게 하나님께서 은혜로 부르신 사명의 길임을 확신한 거죠. 고린도전서 9장 16절에서 17절입니다. 16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이로다 17 내가 내 자의로 이것을 행하면 상을 얻으려니와 내가 자의로 아니한다 할지라도 나는 사명을 받았노라 사명 때문에 와서 사명 때문에 살다가 사명 때문에 가는 인생인 걸 알았어요. 성령의 신사는 자기가 원하는 일을 하는 게 아니라 주님께서 불러 주신 사명의 자리를 지키는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사명의 자리를 비비고 닦고 문지르다 보면 의지까지 새롭게 하심을 입어서 내 원이 하나님의 뜻에 맞춰지게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목자로 억지로, 부인이 믿음이 좋으면 남편이 믿음이 약간 연약해도 목자가 되는 수가 있어요. 그러면 내가 왜 됐나?
그 포지션이 중요해서 거기 자꾸 있다 보면 내 원이 하나님의 원에 맞춰지는 게 있어요. 날마다 말씀을 이렇게 묵상을 하다 보면. 우리들교회 직분은 정말 구속사를 깨닫기에 좋은 포지션인 것 같아요. 그래서 내 원을 자꾸 하나님의 원에 합쳐질 수 있는 이런 양육과 훈련을 받으셔야 되는 거죠.
그래서 유대인의 선동으로 도시가 시끄럽게 되자 베뢰아 성도들은 데살로니가 성도들이 했던 것처럼 바울을 탈출을 시키는 거예요. 내보내는 거예요. 이 단어 역시 10절에 아까 했던 보내니처럼 사명의 길로 파송했다는 뜻이에요. 그런데 이제 베뢰아 성도들이 더 신사적이니까, 말씀을 더 좋아하니까 바울을 보내기가 싫었을 거 아니예요. 그런데 성령의 신사들은 자기 유익을 구하지 않고 성령의 보내심에 협력을 하는 거예요. 그런데 바울은 이번에는 혼자만 가는 거예요. 점점 위험하니까 혼자만 가는 거예요. 실라와 디모데를 베뢰아에 남겨 둡니다. 그런데 데살로니가 갈 때는 바울하고 실라만 갔자나요. 기억하십니까? 그런데 그때는 디모데하고 누가는 어디로 갔는지 안보이더니 자기네들 몰래 베뢰아에 그냥 왔나봐요. 혼자. 그랬더니 실라하고 디모데를 그래서 베뢰아에 남겨둔대요. 하루 하루가 일촉즉발의 긴장 속에서 사역을 하는 거예요. 홀로 떠나는 바울도, 유대인의 박해가 시작된 베뢰아에 남은 실라와 디모데도 각자 자기에게 맡겨진 사명의 자리를 잘 지키는 모습입니다. 위험을 감수하면서 공동체를 위해 자기 역할을 다합니다. 정말 다들 고품격 신사 맞습니다. 하지만 베뢰아 성도들은 초신자자나요. 무명의 초신자들은 바울이 이 마게도냐에서 아가야, 여기 아덴까지 가는 길이 약 320km 정도 되거든요. 거기에서부터 쭉 내려오면. 그런데 거기를 시키지도 않았는데 수행해서 동역자가 돼서 바울 모시고 그 다음에 자기네는 그냥 오는 거예요. 그때는 비행기도 없고 차도 없는데. 믿은지 얼마되지도 않은 사람들이 이 길을 동행합니다. 육로가 있지만 그들을 따돌리고 해상으로 갔다고도 해요. 그런데 그렇게 말만 바다로 갔다고 그러고 사실은 육로로 갔다. 그러니까 그렇게 그때가 위험한 여행이었어요. 성령의 공동체에 속한 모든 지체들이 무리가 되고 형제가 되어서 복음을 전하는 사명의 길을 멈추지 않고 걸어갑니다. 질릴 만큼 집요하고 끈질긴 방해와 괴롭힘에도 그 길을 멈추지 않게 하시는 분은 오직 예수님이십니다. 집요하게 공격하는 유대인 공격자들에게 예수님께서도 내 아버지께서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하셨죠. 따라서 우리가 가정과 교회에서, 우리가 또 세상에서 말씀과 가정 중수의 사명의 길에 마침표를 찍지 않고 그 길을 완수하는 것이 주님과 동행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최고의 고품격 인생 성령의 신사, 숙녀로 사는 것입니다. 이것은 영혼 구원에 대한 애통함이 있어야지 이 마음이 생기는 거예요. 지혜가 생기는 거예요. 그런데 늘 허다한 무리에게만 관심이 많고 사역의 영성이 건강하지 못하면 직분에만 탐하고, 이렇게 되면 가장 중요한 것이 말실수가 되서 천냥 빚을 갚는 게 아니라 도리어 얻게 됩니다. 정말 성령의 신사들은 말조심을 해야 돼요. 믿음은 보이는게 아니예요. 또 물질이 아니라 인격적인 거예요. 인격이에요. 그래서 정말 영혼 구원, 사람을 사랑하게 되면 긴박한 가운데에서도 십자가는 지혜고 타이밍이니까, 말을 이 때 이렇게 잘못 해가지고 데살로니가가 날아갈 수 있고, 베뢰아가 날아갈 수가 있자나요. 내 말 하나 잘못해서 이 집안에 구원이 날아갈 수가 있어요. 말실수를 작은 것으로 여기면 안 되는 거예요. 목장이고 어디에서 수도꼭지처럼 하고 싶은 말 다 하시면 안 되는 거예요. 참아야 되는 거예요. 말 참는 게 제일 어려워요.
[적용] 내게 맡기신 사명의 길을 멈추게 하려는 사람들을 원망합니까? 정죄합니까? 불쌍히 여깁니까? 성령의 신사가 되고자 할 때 형제와 무리가 되어 잘 따라가야 할 지체는 누구입니까?
기도제목
다인
눈에 보이는 세상적인 것들 물질과 육적인 건강의 회복을 바라는 연약한 사람입니다. 구속사로 해석하고 구원에 간절해지도록
100% 옳으신 하나님임을 인정하고 나의 아버지라고 고백할 수 있는 믿음 가지도록
현경
목장과 양육의 자리에서 나의 살아난 간증 자세하게 나누고 간증문을 다시 써보도록
목장과 가족 나의 구원 위해서 기도하도록
예선
그날 주신 말씀 간절할 마음으로 보는 한 주 되도록
할아버지 조금 더 집에 계시는데 자녀와 손녀의 자리 지키고 상황에 따라서 십자가 지혜 타이밍 분별하며 갈 수 있도록
직장에서 관계의 어려움이 있는데 성령과 말씀의 경계를 만들고 연약한 그 사람의 수준까지 낮아져서 불쌍한 마음으로 지체 위해 기도하도록
보련
한 주 잘 살도록
직장 인도함 받기
약할 때 강한 되시는 주님 바라보도록
엄마 다리가 아프신데 회복되고 구원의 사건 되도록
지화
5월22일날 결혼식 하는데 하나님께서 함께 하는 예배 되도록
부부 목장 상담 잘 참여하고 나눔 하면서 살 수 있도록
언니, 조카, 엄마, 아빠, 동생 구원받도록
은우
가고 서야 하는 순간들 말씀으로 묻고 갈 수 있도록
프로젝트들 나의 열심 내려 두고 주님께 묻고 갈 수 있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