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307 성령의 환상
사도행전 16:6-10
그동안 가정에서 목장에서 서로 동역자가 잘 성령의 동역자가 잘 되고 계신가요? 동역자의 원형은 삼위일체 하나님 아니겠습니까?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께서 창조부터 시작해서 우리 각 사람의 구속까지 늘 함께 일하는 동역자가 되어 구속사를 이루어 가십니다.
디모데를 동역자로 얻은 바울과 실라는 이고니온, 비시디아 안디옥을 비롯해, 갈라디아 남부의 교회들을 계속해서 심방하고 있는데요. 굉장한 열매가 있는 거예요. 율법과 할례로 구원받은 게 아니고 오직 믿음으로 죄사함받고 구원 얻는다, 그리고 최소한의 몇 가지 규칙을 지키라고 얘기를 했는데 너무 열매가 많고 그러니까 여기가 평생의 선교할 곳이구나. 그래서 이 심방이 끝난 다음에 그동안 1차 선교 여행 대 돌아봤던 곳도 다 돌아보고 다음의 행로를 고민했을 것입니다. 이 때 하나님이 환상으로 바울과 그의 동역자들을 인도해 주십니다. 특별히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이 총 출동해서 인도를 하시는데요. 삼위일체 하나님의 특별한 인도하심을 보여주는 것이 오늘 성령의 환상입니다. 지금은 성경으로 해석이 됩니다만 그 당시는 신약 성경이 없던 시대이니만큼 갈 길을 환상으로 인도하신 것을 봅니다. 환상이 신약에 12번이 나오는데 사도행전에 11번이 쓰였어요. 오늘은 성령의 환상에 대해서 삼위일체 하나님으로 살펴보겠습니다. 왜냐하면 오늘 삼위일체가 다 등장하셨거든요.
1. 성령 하나님이 효과적인 거절로 인도하십니다. (6절)
우리 성령 하나님은 효과적으로 도우시자나요. Effective Power
갈라디아 남부 심방을 마친 바울은 잘 닦은 로마의 국도를 따라 서쪽으로 더 나아가려고 했습니다. 서쪽으로 약 400km 정도, 그러니까 두 주일 정도 부지런히 걸어가면 아시아 최대 도시인, 아시아의 강남, 에베소가 있었기 때문이죠. 당연히 거기 에베소에는 디아스포라 유대인도 많이 살고 있었고 유대인 회당도 있었어요. 따라서 바울은 애당초 에베소에서 전도할 계획이었습니다. 그런데 성령님께서 바울의 아시아 전도 계획을 거절하셨다는 거예요. 말씀 전하는 일은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지속해야 할 사명 아닙니까? 그런데 그것을 성령께서 금하시다니 바울이 너무 이상한거죠. 여기서 못하게 하시거늘은 아주 강력히 반대했다, 거절했다 이런 뜻이 있어요. 그런데 성령께서 강력히 금하셨다는 것을 볼 때 성령께서는 바울이 깨달을 수 있는 분명한 방법으로 아시아의 전도사역을 막았음을 알 수가 있는데요. 이걸 성경이 침묵하고 있어요. 우리는 성경이 침묵하는 것을 그 당시의 저자의 입장과 거기로 들어가서 깨닫는 게 큐티죠. THINK라고 할 수 있죠. 우리는 생각을 해보는 거예요. 여기 이유가 하나도 안 나와있으니까.
지난주에 우리가 에베소 사진을 보았자나요. 거기 아데미 여신 등 굉장히 화려한 도시자나요. 지금으로 봐도 밑에 다 대리석이고. 그런데 그 대단한 에베소를 전도하러 가야하는데, 이제 막 바울을 따라나선 어린 혼혈아 디모데와 지금 막 초보의 길을 걷고 있는 선교팀이자나요. 실라하고. 그런데 그 사람들이 들어가서 감당하기 힘든 지역이었음을 알 수 있어요. 그동안은 1차 선교 여행지를 돌아보았지만 이제는 새로 시작하는 선교인데 처음부터 너무 강적을 만나면 시작도 못할 수 있자나요. 더군다나 바나바도 떠났죠. 디모데가 혼혈족인데. 그래서 디모데를 이 때 호호 불어야 하는 시점이기도 합니다. 사도바울이 이렇게 되기까지에는 수많은 시험을 거쳤고 스데반도 죽이고, 자기가 돌에 맞아 죽을 뻔도 하고, 배신도 당하고 이런 가운데서 복음의 전사가 됐는데 지금 디모데가 뭘 알겠어요. 시작도 못하고 이 선교팀이 와해될 수가 있다. 이런 생각을 했을 수 있을 거예요. 이 생각은 왜 했냐면 디모데를 사랑하기에. 항상 바울에게 한 영혼이 중요하니까. 그래서 강력하게 성령이 막으신 뜻을 깨달을 수가 있었을 거라고 생각해요. 왜냐하면 후에 바울 선교팀이 2차 선교 여행을 끝나고 훈련된 디모데와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같은 일꾼들이 준비되었을 때는 3차 때는 에베소에 가서 2년이나 두란노 서원에서 복음을 전하게 하시죠. 그러니까 아시아를 무조건 안 간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디모데가 위축될까 그런 얘기를 내놓고 하기가 어려웠을 거예요. 그래서 그런 말을 침묵한 것 같고 그래서 아예 기록자체가 없게 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십자가는 지혜고 타이밍이듯이 우리는 내 옆의 연약한 자들을 위해 끝까지 말씀을 전하지 않고 기다릴 때도 있어야 돼요.
그래서 지난주 피해자인 내가 가해자를 용서할 권세가 있다고 했는데 그렇다고 그것을 하나님의 뜻으로 생각해서 가해자가 용서를 강요하면 안 된다고 했습니다. 용서는 가해자의 면죄부가 아닌 피해자의 영혼을 위한 일이기 때문에 용서는 가해자가, 부모이든 배우자이든지 관계를 유지해서 강요하는 것이 아니죠. 가해자가 십자가 앞에서 자기가 가해자라는 것을 깨달으면 그 다음에는 기다려야 되는 거죠. 니가 예수 믿는데 용서해라. 그런 얘기는 가해자는 하는 게 아니예요. 그때까지 성령이 나에게 말을 못하게 하신다면 성령께서 허락하지 않으신다면 우리는 기다려야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 이루신 구원을 성령이 우리에게 효과적으로 적용하셔서 서로에게 거절을 경험하게 하십니다. 피해자는 이미 거절을 경험했고, 가해자는 후에 예수를 믿었어도 거절을 계속 경험하게 하는 거자나요. 그러므로 거절은 성령님이 우리를 구원으로 효과적으로 인도하시는 방법 중에 하나입니다. 믿음의 사람 요셉도 형들과 화해하는데 20년이 걸렸어요. 결국 성령님은 항상 우리를 효과적으로 도우시는데 아시아 전도가 효과적이지 않다.고 말씀하시는 거죠. 적용해 보세요.
[적용] 아직도 연약한 지체 앞에서 말씀을 멈추고 잠시 기다려줘야 할 것들은 무엇입니까? 용서와 사랑을 강요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연약한 그들도 나도 효과적인 거절의 복을 누리고 있습니까?
2. 낮아지신 성자 예수님의 영으로 거절하십니다. (7-8절)
그러나 바울은 성령의 거절에 대해서 묻거나 따지지 않았어요. 성령께서 아시아에서 전도하지 말라고 하시니까 서쪽으로 향하던 발걸음을 주저없이 북쪽으로 옮기십니다.
삼위 하나님 성령이 나왔고 예수의 영 나왔습니다.
북쪽으로 올라가 브루기아와 갈라디아를 지나면 무시아 지역이 나옵니다. 이 부르기아와 무시아 경계에 이르러 바울은 계속 북진해가지고 비두니아에 가려고 애를 썼어요. 한 150km만 더 가면 비두니아의 중심부에 이를 수 있었거든요. 거기에는 니코메디아와 니케아라는 두 개의 대도시가 있었는데 당연히 회당을 중심으로 한 유대인 공동체도 있었고요. 그래서 에베소에서 펼치지 못한 계획을 여기서 이룰 수 있겠다고 생각했을 거예요.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주님은 이번에도 이렇게 애쓰는 바울의 계획을 거절하십니다. 이번에는 특별히 예수의 영이 허락하지 아니하셨다고 하세요. 아시아에 이어 비두니아까지 남쪽으로 북쪽으로, 다른 일도 아니고 복음을 전하려는 바울의 계획이 그냥 성령님, 예수님이 전부 다 막으신 거예요. 그런데 왜 성령을 특별히 여기는 예수의 영이라고 하셨을까요? 전도 계획을 두 번이나 거절을 당하면서 예수님을 생각했던 것 같아요. 교회를 잔멸하려고 자기가 위협과 살기가 등등해서 다메섹으로 가다가 그런 바울을 예수님이 만나주시면서 그때 뭐라고 그러셨죠? 사울아, 사울아 니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당시 사울은 교회를 박해하고 거절함으로써 예수님을 박해하고 거절했습니다. 예수님이 바울에 의해 거절을 당했던 것입니다. 우주 만물을 만들고 다스리시는 예수님이 바울에게 거절을 당하시다뇨. 이것이 얼마나 큰 낮추심인지 바울은 생각했을 것입니다. 주님이 죄인 중의 괴수인 자신에게 거절을 당하신 정도로 낮추신 데 비하면 지금 자기가 당하는 거절은 아무것도 아님을 깨달았을 거예요. 성경을 자세히 생각하면 구속사적으로 생각하게 돼서 내가 오늘 삶에서 순종이 돼요. 성경을 깊이 보고 한가지 순종을 하면 그 다음날 또 한가지가 깨달아져요. 순종해야 성경이 깨달아져요. 저의 경험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빌립보서 2장 8절에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두 번 거절을 당하며 이렇게 죽기까지 낮아지신 예수님을 생각나게 했기에 특별히 예수의 영이 거절하셨다고 했습니다. 자기 때문에 낮아지신 예수님을 생각하니까 바울도 예수님처럼 낮아지는 적용을 합니다.
내려갔다는 것은 해변가니까 내려갔을 수도 있지만 영적인 의미로 내려갔다는 의미도 있는 것 같아요. 계획이 막히는 일을 두 번 겪고, 막 화를 내거나 포기한다고 내가 못해먹겠다고, 내가 내 일을 하려고 그래? 그런데 왜 이렇게 자꾸 막히는 거야 그렇게 말한다면 여전히 자기 스스로 올라가려는 거예요. 항상 정해주신 경계안에서 주신 사명대로 끝까지 나아가는 것이 낮아지신 예수님을 따라 드로아로 내려가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의 영이 막았자나요.
아시아와 비두니아에 들어가지 않은 바울의 순종을 좀 더 깊이 생각해봤어요. 예수님을 따라 낮아진 바울의 적용은 무엇일까? 왜 성경에 그 이유가 기록되지 않았을까? 그런데 성경에서 아시아와 비두니아가 함께 나오는 구절이 딱 하나가 있어요. 베드로전서 1장 1-2절입니다. 1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 베드로는 본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와 비두니아에 흩어진 나그네 2 곧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성령이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받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지어다 베드로가 자기 형제 지체들에게 편지를 했는데 베드로가 편지를 보낸 지역이 1차 전도 여행을 다닌 토로스 산맥 주변의 남 갈라디아를 제외한 소아시아 일대에요. 베드로가 이 지역에서 전도했다는 기록이 성경에 없지만 이 편지로 미루어 볼 때 이 넓은 지역에 흩어진 교회들은 베드로 사도를 직, 간접적으로 알고 있었을 것이라는 거죠. 직접 보지는 못했어도 수석 사도 베드로의 권위는 다 인정하고 있었죠. 그런데 바울에게는 전도에 관해 중요한 원칙이 하나 있었는데 로마서 15장 19절부터 21절에 보면 19 표적과 기사의 능력으로 성령의 능력으로 이루어졌으며 그리하여 내가 예루살렘으로부터 두루 행하여 일루리곤까지 그리스도의 복음을 편만하게 전하였노라 20 또 내가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곳에는 복음을 전하지 않기를 힘썼노니 이는 남의 터 위에 건축하지 아니하려 함이라 21 기록된 바 주의 소식을 받지 못한 자들이 볼 것이요 듣지 못한 자들이 깨달으리라 함과 같으니라 이 얘기가 뭔가 하면 많은 유대인들이 살았던 아시아와 비두니아에는 바울의 전도 이전에 이미 복음이 전해져 있었어요. 왜 사도행전 2장에 오순절에 예루살렘을 방문했다가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3천명, 5천명이 돌아왔는데 다 흩어졌자나요. 그런 사람들이 곳곳에 있었을 거예요. 그들에게는 베드로가 최고의 사도였겠죠. 그러니까 바울이 이 아시아로 가려고 하다보니까 아시아와 비두니아에게 편지했다고 그랬자나요. 베드로가. 쉽게 말하면 여기는 베드로 구역이라 이거죠. 그러니까 나중에 보면 이거를 막기가 참 힘들었지만 바울이 지금 전도할 곳이 아니라는 거죠. 성령의 뜻이 거기에 있었어요. 따라서 바울이 아시아와 비두니아에 가서 복음을 전했자면 가뜩이나 유대인과 이방인의 갈등이 있는 상황에서 유대인의 사도인 베드로와 이방인의 사도인 바울 사이에 경쟁하는 듯한 이런 불필요한 오해가 생길 수가 있는 거죠. 그리고 이런 얘기를 성경에 쓸 수가 있었겠습니까? 하늘같이 여기는 베드로 사도의 구역인데. 이쪽인 베드로가 잡아서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 성령의 깨달음이 왔겠죠. 그러나 2차 때는 에베소가 남의 터일 수 있지만 3차 때는 가서 가르친 것이 그때는 또 베드로하고 긴장 관계가 해소됐을 수도 있고. 때에 따라서 남의 터 내 터가 좀 바뀔 수가 있는 거죠. 그래서 바울이 아시아와 비두니아에 가지 않은 것은 순종인 동시에 아주 낮아지는 적용입니다. 주님이 정하신 경계를 지켜서 6절에서는 디모데를 굉장히 배려했고, 여기 7절에서는 베드로권위를 인정했죠. 결국 이것이 전체 교회를 세우는 일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죠. 교회와 학교와 일터에서 각자에게 맡기신 구원의 사명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여정이 막힐 때가 있어요. 그러니까 난 교회도 가기 싫고, 회사도 가기 싫고, 집에도 들어가기 싫고, 이 길을 참 그만 가고 싶어요. 알코올 중독자 보기도 싫고,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까 나는 이제 이혼을 하겠어. 뒤로 돌아가야겠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렇게 거절의 사건은 그만두라고 온 사건이 아니라 낮아지신 예수님을 기억하고 그 길을 따라가라고 온 사건이에요. 어떤 거절이라도 그것을 통해 낮아지신 예수님을 다시 만나고 낮아지신 예수님을 따라가게 된다면 그것처럼 복이 없습니다. 그것이야 말로 거절의 복이에요.
바나바와 바울이 다툰 것이 오직 구원 때문이었 듯이 오직 구원 때문에 디모데를 배려하고 베드로의 권위를 지켜 주기 위해서 모든 자기의 전도지를 내버려두고 빈손 들고 떠날 수 있는 것이 구원 때문에. 진짜 짧은 인생이에요. 그리고 그런 말을 여기 성경에 적을 수가 없어서 침묵했지만 여기에서 예수의 영이 허락하지 아니하는지라의 주어는 3인칭 복수예요. 그러니까 이 선교팀들이 이걸 다 알았다는 뜻이에요. 그때 사람들은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글로는 쓰지 않고 입으로 얘기를 하지 않았던 거죠. 선교도 목회도 다 이렇게 내 터, 남의 터를 분간 못해서 충돌이 일어나는 거자나요. 모든 일을 지금 막으신다면 분명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거를 결과를 가지고 큐티를 하니까 성경에 안 나왔으니까 막혔으면 오직 믿음으로 나가면 된다. 이러는데 큐티는 그 당시 내가 들어가서 그 이유를 찾는 게 큐티에요. 저자의 입장으로 계속 생각을, 그 당시는 어땠을까?를 생각해봐야지 성령의 환상을 제대로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적용] 더 낮아지기 싫어 그만두고 싶은 사명은 무엇입니까? 돌아가고 싶은 동쪽은 어디입니까? 나를 구원하기 위해 죽기까지 낮아지신 예수님 따르기를 얼마나 원하십니까?
3. 감추어진 하나님의 경륜입니다. (8-10절)
이 경륜은 결국 마지막 결론이 우리가, 공동체가 한 사람의 구원을 돕는 것이에요. 이 모든 것의 결론은, 삼위 하나님의 결론은 한 사람의 구원을 돕는 것이에요.
8절에 지나는 지나쳤는데 이런 뜻이에요. 그러니까 힘쓰고 애쓰고 계속 지나쳐서 바울이 너무 열심히 드로아로 예수의 영으로 낮아져서 내려갔어요. 엄청난 적용을 해서 내려갔는데 가봤더니 더 이상 갈 곳이 없어요. 막다른 바다가 딱 기다리고 있는 거예요. 동으로 북으로 남으로 다 막혔어요. 나는 지금 엄청나게 적용해서 왔는데 나 선교해야 되는데 막고 또 막으시니까 저 바다로 나가서 물고기 선교를 해야 하나 이러면서 애를 또 쓰고 또 써도 막으시니까 사도 바울이 서 있는 곳은 사방이 막힌 드로아예요. 지금까지 또 포기하고 또 포기하고 적용하고 구원만을 위해서 달려왔는데 사도 바울이 드디어 지금 벼랑 끝에 섰어요. 그러니까 지금 어찌해야 되는가? 여러분들은 어찌해야 되는가? 그런 사람들 여기 많겠지만 믿는 사람은 그런 게 없어요. 막다른 길이라는 게 없어요. 믿는 사람에게는.
성령이 막으시고 예수의 영이 허락하지 않으신 것이 하나님의 뜻이고 감추어진 경륜이었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 엄청난 것 포기하고 사역 다 내려놓고 적용하고 왔는데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야 니가 수가 많아져서 박수 받는 게 아니고, 니가 가야할 곳은 고난 받는 한 사람에게 가라는 것, 고난 받는 한 사람의 외침에 귀를 기울이라 이거예요. 모든 것이 막힌 그 밤에, 그 밤에 이 음성이 들리는 거예요. 그 밤이 축복이에요. 그래서 그 밤에 사도 바울이 환상을 보는데 어떤 환상이에요? 밤처럼 어둠이 짙게 깔린 두려운 이 상황에 이 환상이라는 단어가. 창세기 15장 1절에도 아브라함이 두려운 중에 환상으로 나타나셨죠. 창세기 46장 2절에도 야곱이 그 이상 중에, 오늘 바울에게도 같은 단어의 환상을 보여주셨죠. 전혀 하나님을 모르는, 하나님을 알지도 들어보지도 못한 이방인 마게도냐 사람이, 한 사람이 서서 불러요. 나라가 부르는 것도 아니고, 민족이 부르는 것도 아니고, 교회가 부르는 것도 아니고 한 사람이 서가지고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 지금까지 2차 전도 여행을 다 막고 막고 막고 막고, 한 사람이 도움을 요청합니다. 바울의 생각이 무너졌어요. 드로아는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막으신 땅이 아니라 구원을 위해 바다가 활짝 열린 땅이었던 것입니다. 내 생각은 오직 동쪽 북쪽 남쪽만 가려고 했는데 바다라는 장애를 넘어 생각못했던 서쪽으로, 유럽으로 나를 보내시는 부르심의 땅이라는 거예요.
그때까지 우리가 할 일은 순종 순종 순종 이거밖에 없어요. 그러니까 여러 문화권을 이해하고 그러기 위해서 언어가 가능한 디모데와 실라를 이미 붙여 줌에도, 성령이 막아도, 예수의 영이 막아도 바울이 깨닫지를 못하니까, 말씀하고 말씀하고 말씀해도 깨닫지를 못하니까 하나님께서 환경으로 이미지로 내 눈에 보이는 나를 절실히 필요로 하는 한 사람으로 찾아오신 것이예요. 1차 선교 여행 때는 지역의 한계에 갇혀 있었는데 이제 사람을 향해 나아가니까 지역은 의미가 없어졌어요. 1차 때는 산맥을 넘어 지역의 한계를 넘었는데 이제 한 사람을 생각하니까 도저히 길이 없다고 생각한 바다에 길을 내십니다. 사역이 아닌 사람인 것이죠. 행사가 아닌 예배인 것이에요. 다수가 아닌 한 사람입니다.
바울이 마게도냐 사람의 환상을 본 후에, 그 마게도냐 사람도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고 그랬자나요. 그 한 사람이. 여기도 우리가 있어요. 우리가 두 번이나 10절에 나오죠. 바울, 실라, 디모데가 있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이 글을 쓰고 있는, 사도행전의 글을 쓰고 있는 누가가 여기 합류를 합니다. 자기 이름은 안 내고 우리라고 계속 얘기를 해요. 드로아에서 바울을 따라나선 이후에 끝까지 그의 곁을 지키면서 수행원 역할을 감당했습니다. 누가는 의사고 헬라의 학문과 문화에 능통했어요. 그렇기 때문에 헬라의 중심부로 들어가야 하는 바울에게 누가를 얻은 일은 정말 큰 힘이 되었어요. 유대인 지도자 모두 갔다놔도 누가 하나를 당할 수가 없어요. 누가는 사도행전을 쓰고 누가복음을 썼어요. 신약의 27%를 감당하는 어마어마한 동역자 이방인 누가를 보내주셨습니다. 1차 여행의 동역자였던 바나바와 마가가 다 떠났지만 그때 바울은 실라 한 사람 데리고 출발을 했지만 디모데가 합류하고 누가가 합류했는데, 이 네 명 소도 잡고 말도 잡고 이런 사람을 붙여 주셨어요. 내가 순종을 하면 하나님은 사람을 붙여 주십니다. 삼위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순종을 하니까 뜻을 같이하는 우리를 허락하십니다. 그 사람들을 보면 유대인들이 보기에는, 지금 복음은 유대교에서 나왔는데 유대인 지도자는 없고 디모데는 혼혈이고, 누가는 이방인이고 실라는 로마 사람이고, 예루살렘에서 온 지도자이지만. 그러니까 남들이 보기에는 저 바울이 까다로워가지고 바울 옆에는 좋은 사람이 없어요. 붙어나질 못하자나. 바나바도 마가도 다 내쫓았지 뭐예요 이렇게 악성 루머가 돌지 않았겠어요? 이것도 제 THINK예요. 그러나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총출동하셔서 바울의 선교를 환상으로 분명하게 인도하실 뿐만 아니라 삼위일체의 우리를 닮은 믿음의 공동체를 주셨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해석하고 적용할 우리를 주신 것이죠. 많다고 우리가 되는 건 아니예요.
바울과 실라와 디모데와 누가, 이 네사람은 이제 믿음으로 우리가 되어서 바울이 본 환상에 대해서 의논을 했어요. 어떤 결론을 내렸습니까? 그들은 마게도냐 사람의 환상을 하나님들이 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우리를 부르신 줄로 인정했어요. 하나님, 여기 하나님이 나오죠? 성부, 성자, 성령이 지금 다 등장을 하셨어요. 여기서 인정했다는 말은 단서들을 모아 하나의 결론을 내렸다는 거예요. 고난이 우리 공동체 안에서 말씀으로 해석이 된 것입니다. 이게 어떤 개념이냐면 격렬한 논쟁 끝에 드디어 내가 설득 당했다라는 말이에요. 결국 여러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이 바울을 설득하고 설득하고 또 설득했어요. 이 사도 바울의 의지와 그의 길을 드디어 내려놓게 했다는 뜻이에요. 내가 하고 싶은 것이 하나님의 비전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비전이 우리의 꿈을 무너뜨리고 우리의 인생을 통해 하나님의 꿈을 만들어 가시는 게 하나님의 비전입니다. 그러니까 큐티가 안되고 말씀이 안 드리는 사람들이 하는 얘기가 환상을 보고 싶어하죠. 그거하고 차원이 다른 성령의 환상입니다. 이렇게 공동체 안에서 주신 말씀으로 사건이 해석되니까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그들은 주신 말씀대로 즉시 곧 마게도냐로 적용합니다. 이해타산이 없어요. 계산하지 않아요. 즉시 마게도냐로 떠나기를 힘씁니다. 누가 시키지 않았어요. 해야 할 책임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냥 공동체와 더불어 말씀을 듣고 삶이 해석되니까 저절로 즉시 적용을 하는 거예요. 이게 성령의 환상을 본 사람들의 특징이에요.
바울에게 계속 거절 하셨자나요. 그런데 너무 좋은 일을 거절 하셨자나요. 그러니까 바울이 순종하기가 어려운 거예요. 그런데 거기서 디모데를, 한 사람 생각했죠. 베드로 한 사람 생각했죠. 한 사람을 늘 생각하는, 오직 구원 때문에. 그래서 이 엄청난 복음을 전하라고 불러 놓고는 전도를 하고 있는데 거절하신 것이 너무 미안하신 하나님이 6절부터 10절, 이 짧은 구절에 성령 하나님, 성부, 성자, 삼위 하나님이 다 달려들어서 지금 바울을 도운 거예요. 바울이 딴 길로 갈까봐. 너무 막으니까 내가 이거 안 해버려 호호 불어서 예수의 영이, 성령이, 하나님이. 그래서 결국 이것이 하나님의 경륜을 이루었다고 이렇게 하시는 거예요. 여기에 하나님의 거대한 뜻이 있었던 것이죠. 그래서 오늘 설교의 결론은 한 영혼의 외침에 귀를 기울이라 어떤 사역도 좋지만 감추어진 하나님의 뜻이 있다는 것이고 성령의 이렇게 해석이 되어야 건강한 환상입니다.
[적용] 계속 막혀서 하나님의 경륜을 이룬 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 설득당하기 위해 성경을 제쳐두고 더 구하고 있는 환상이 있습니까?
기도제목
다인
회사는 하나님께서 보내주신 곳임을 알고 말씀으로 하루 하루 잘 지내고 오도록.
회사에서 사람의 수행원이 아니라 성령의 수행원 되도록. 못한다 거절하고 오도록.
팔이 많이 저려서 힘들 때가 있는데 시간 잘 분배해서 육적인 부분도 돌볼 수 있도록
예선
잘하려는 생각을 내려놓고 허락하신 자리에서 성령 수행원하고 올 수 있도록.
사방이 막힌 것 같은 상황에서 나를 만나주신 하나님 기억하는 한 주 되도록.
현경
가정과 회사에서 피해자 코스프레 그만하고 내 안의 악함과 회피하고 싶은 마음이 올라올 때마다 말씀 앞에 엎드려 효과적으로 인도하시는 성령님을 보고 기다리도록
하나님 위에 나의 생각 나의 계획을 올려놓고 주제 파악을 못하는 나의 교만함을 회개하도록
온전한 것은 하나님 뿐임을 알고 참 자존감 찾을 수 있도록
거절을 당하면 분노와 혈기가 올라옵니다. 이것이 내 안의 죄악과 상처에서 올라오는 것임을 설득하여 주시고 기다리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바라보도록
은우
보내주신 환경이 성령의 경륜을 이루기 위함을 알고 아멘 할 수 있도록
거절을 잘 받고 말씀으로 해석하며 인도함 받고 올 수 있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