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0207
사도행전 15:36-41 성령의 견고함
1. 끊임없는 형제의식의 돌봄입니다. 35-36
견고하게 하다는 기대거나 붙어있을 지지대가 없어 위태롭게 흔들리는 것을 움직이지 않도록 고정시키다는 뜻입니다. 흔들림을 멈추게 한 지지대가 바로 31절부터 유다와 실라가 전한 위로와 권면에 말씀이었고, 주님의 말씀입니다. 말씀이 들리면 마구 흔들리는 상황에서도 요동치 않고 중심을 잡을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말씀을 제대로 들을 때에 형제의식이 생깁니다!!
그리스도인이라 칭함을 받게 하실 때 성령이 강권적으로 1차 선교여행을 보내셨듯이 자신이 전도한 형제들을 다시 돌아보자는 견고한 형제의식으로 2차 선교여행을 준비합니다. 하나님은 이처럼 형제의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을 쓰시는 것 같습니다. 머리로는 알지만 가슴으로 내려오는 것은 참으로 어렵습니다. 그래서 형제의식을 아무리 강조해도 날마다 지나침이 없는 것 같습니다. 설교를 아무리 해도 형제의식을 위해서 하는 것이고 교회 나오는 목적이 형제의식 때문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사람과의 관계에서 가장 크게 요동합니다. 그러하기에 성령의 결정으로 주신 큰 축복은 형제의식의 축복입니다.
모든 문제가 해결되고 인정받는 위치에 있음에도 바울의 형제의식은 이방인도 형제고, 유대인도 형제고, 전도 한 자도 다 같은 형제입니다. 이처럼 진정한 형제의식으로 며칠 후에 다 내려놓고 또 떠나려 준비합니다. 이것이 견고함이라고 생각합니다. 바울이 제안하는 재방문은 15:14에서 읽었던 에피스켑토마인, 파카드로 영혼을 돌보기 위한 심방을 한다고 한 것과 마찬가지 단어입니다. 바울의 관심은 항상 구원의 초점이 맞춰 있습니다. 형제의식이 없다면 이 돌봄이라는 것이 너무도 무서운 자기 의가 됩니다. 우리들은 베드로와 야고보의 형제들아를 생각해야 합니다.
Q. 거친 파도가 와도 날 견고케 하는 것이 형제의식이라는 것이 얼마나 인정되세요?
성령의 견고함으로 나가지 않으면 무너질 수밖에 없습니다. 서로 서로가 돌봄의 대상입니다. 형제의식이 없으면 하루도 힘든 것이 공동체입니다. 목장은 천국 공동체이기 때문에 인내도 연습하고, 말하기도 연습하고, 듣는 연습도 하는 최고의 훈련소입니다. 목장은 당대에서 라도 후손으로 라도 하나님은 여러분의 섬김을 손톱만 한 것도 다 기억하시는 줄 믿습니다.
Q. 목장에서 어떤 목자이고, 어떤 목원인지 서로 허심탄회하게 나누어 보세요. 또 그건 다른 말로 끊임없이 돌보고 있습니까? 여러분은 돌봄을 받아야 합니까?
2. 사람을 의지지 못하게 하십니다. 37-39
바나바가 마가를 데리고 가고자 합니다. 마가는 1차 전도여행 때 수행원의 의미를 잘 몰라 토로스 산맥 앞에서 포기하고 예루살렘으로 돌아갔었습니다. 이 일로 부끄러움과 미안함의 걸림이 있는 마가의 마음을 헤아려 주고 수치를 씻겨준 기회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바나바의 원함)
바울은 반대합니다. 옳고 그름이 아닌 이번 여행을 매우 심각하고 중요하게 여겼기 때문입니다. 그 지역이 유대주의자들의 공격으로 얼마나 휘청거릴지 알기 때문에 언제든지 포기하고 돌아갈 수 있는 마가를 데리고 갈 수가 없었습니다. (바울의 판단)
37-38절 원어로 살펴보겠습니다. 37절 바나바가 데리고 가고 부정과거 부정법 데리고 가고 가고자~ 미완료로 끝까지 할 만한 사람보다는 단회적인 한 번만 기회를 주는 것에 관심을 보고 있는 것이고 38절 같이 데리고 가는 것 현재 부정법으로 한 번 데리고 떠나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끝까지 지속적 반복적으로 다니는 것을 중요하게 보고 있습니다.
사실 이 두 사람의 갈등은 이미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 생긴 갈등에서 시작된 것 아시죠? 7절에 베드로의 형제들아 간증에서 봤지만, 갈라디아서 2장에서 바울은 안디옥에 온 베드로가 이방인과 함께 식사하다가 유대주의자들이 오자 그들을 두려워하여 이방인과 안 어울린 척했다고 했는데 그때 바나바도 그 외식에 유혹되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11절에 베드로를 책망하고 20절에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라고 고백했습니다. 바울의 신앙고백이 있었기 때문에 책망을 한 것이지 인본적으로 베드로를 책망한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바울이 바나바에게는 직접 뭐라고 하지 않았지만 두 사람이 서로에 대해서 불편한 마음을 가졌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서로에 대한 감정이 안 좋게 되었을 것 같습니다. 이런 갈등이 결국 마가를 두고 터집니다. 인본적으로 생각하면 두 사람의 이런 갈라섬은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지만 구속사적으로 본다면 이 갈라섬의 사건은 두 사람에게 이방 선교를 이어 가야 하는 바울에게 반드시 있어야만 하는 사건입니다. 사람을 의지하던 마음을 온전히 깨닫고 돌이키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갈라섬의 사건도 화가 아니라 복입니다. 갈라섬을 통해 사람을 의지하면 안 된다는 것을 다시 마음에 새기며 온전히 지금 하나님을 의지할 수밖에 없게 하셨습니다. 따라서 사람을 의지할 수 없게 되는 것이 성령께서 견고하게 하시는 정말 최고의 성령의 견고함입니다.
Q. 바나바처럼 바울처럼 내가 절대 의지하고 있는 사람이나 환경은 누구입니까? 여러분의 기준은 감정입니까? 이성입니까? 더 나아가 구원입니까? 정입니까?
3. 주의 은혜에 맡기는 것입니다. 40-41
바울과 바나바가 다투고 갈라선 이 일이 41절 교회들을 견고케 하였다고 합니다. 비 온 뒤에 땅이 굳는다고 했는데 이 다툼은 세계적인 다툼이 되어서 세계적인 견고함에 세계적인 선교로 나가게 됐습니다.
바울이 바나바와 갈라서는 사건을 통해 사람을 의지하면 안된다는 것을 깨달았어도 선교의 사명을 홀로 감당할 수는 없기에 양육이 필요한 제자들을 택합니다.
Q. 의지했던 사람 간에 심한 다툼이 지나고 보니 우리를 견고하게 한 일이 있습니까? 아니 믿음 좋은 바울과 바나바도 다툰다고 내 다툼을 합리화하고 있진 않습니까?
[기도제목]
은우
내 안에 마가 바나바가 잘 떠나 가도록
재단의 사건들이 성령의 견고함 주시기 위한 것을 알고 구원의 마무리 결정할 수 있도록
시마다 때마다 핍박이 오는데 이 모든 상황이 있어야 하는 일로 알고 전신갑주 입도록
예선
사람의 말 행동 묵상하지 않기
불안 할 때 큐티하고 말씀에 위로 받을 수 있도록
허락한 자리 잘 지키도록
목장 식구들 이름 불러 가면서 기도하도록
지화
하나님의 뜻 알게 해주시고 상태 악화되지 않고 음향치료 잘 받을 수 있도록.
결혼의 목적이 행복이 아니라 구원인 것과 모든 사단의 방해로부터 막아 주시고 성령의 주목하심으로 은총 내려 주시도록
다인
동생집에 방문할 때 마음, 입, 귀에 성령의 말씀이 심겨져서 응원과 지지하는 말만 하도록
가족들의 영육 회복과 구원
현경
하루만 말씀에 살기
기도가 나오지 않을 정도로 힘이 듭니다. 성령 은혜 구할 수 있도록
몸이 많이 아프고 편도가 부어 있습니다. 환자의 때를 잘 지키도록
실수가 많은데 완벽하지 않음을 인정하고 나를 잘 돌아볼 수 있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