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2.07 주일예배
사도행전 15:36-41
<성령의 견고함>
초대교회가 할례와 율법 문제로 유대인들과 이방인들로 쪼개질 뻔 했지만 성령의 결정으로 위기를 넘겼다. 좋은 결정을 했으니 룰루랄라 앞길이 뻥 뚤렸으면 좋겠는데 본문 보니 그렇지 않고 가장 큰 갈등이 기다리고 있다. 갈등은 성도들을 견고케 하신다. 파도를 지나야 깊은 바다로 들어가는 것이다. 깊은 바다로 들어갈 수록 어떤 상황에도 요동함이 없게 된다. 성령의 견고함은
1. 끊임없는 형제 의식의 돌봄입니다. (35절)
안디오 교회가 할례 문제 때문에 흔들리고 있었다. 많은 이방인들을 전도하고 세계최초로 선교사를 파송하여 여러 교회를 세우기도 했는데 율법 주의자들의 거센공격을 받아서 그 기초부터 흔들리게 되었다. 율법을 지켜야 할지 아니면 이단될 것을 감수하고 무시해야할지 그 사이에서 갈팡질팡한다. 그런데 지난주 32절과 오늘 41절의 견고하게 하다는 말랑말랑하게 한 것을 딱딱하게 한 것이 아니라 흔들리는 것을 움직이지 않도록 고정시키다는 뜻이다. 기대거나 붙어있을 지지대가 없어 위태롭게 흔들리는 것을 튼튼한 지대에 딱 붙이는 것이다. 이 흔들림을 멈추게한 지지대가 바로 31절 부터의 유다와 실라가 전한 위로와 권면의 말씀이었고 주님의 말씀이었다. 말씀이 들리면 마구 흔들리는 어떤 상황에서도 요동하지 않고 중심을 잡을 수가 있다. 돈과 환경이 아니라 말씀이 들리면. 그래서 바울과 바나바도 유다와 실라가 말씀을 전한 여세를 몰아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사명의 자리를 찾아서 유하며 사명의 자리를 닦으면서 말씀을 전파했다. 그러면 이렇게 말씀을 전할 때, 말씀이 들릴 때 나타나는 현상은 계속 강조하는 그 형제의식이 생기는 것이다. 36절) 안디옥 교회를 말씀안에서 뿌리내리고 자라게 하는 일에 전념하던중에 1차 전도여행 때 말씀을 전했던 형제들을 다시가서 돌아보자고 바울이 제안을 했다. 여기서 며칠 후에는 길어야 2-3달 밖에 안되는 기간이다. 그런데 예루살렘에서 돌아온 이후 사도바울이 잠시도 개인적인 일로 시간을 보내지않고 하나님의 일에 매진하였음을 보여주고 하는 의미를 지닌다. 안디옥에서 사람들을 변화시키며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칭함을 받게 됐다. 그 때 성령이 강권적으로 바울과 바나바를 1차 선교여행을 보내셨다. 이제 2차때는 거창한 계획이 있었던게 아니라 성령이 보냈다기 보다 자신이 전도한 형제들을 다시 돌아보자는 소박한 생각으로 떠난 것이다. 이런 형제의식이 참으로 견고함인 것 같다. 물론 궁극적으로 성령의 역사이긴 하지만 소박하게 떠났던 형제의식이 대단한 유럽전도를 가져왔다. 지나고보면 항상 형제를 돌아보는 이런 사람을 쓰신다. 늘 형제 의식이 나온다. 형제 의식을 머리로 알지만 가슴으로 내려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것 같다. 그렇기에 형제의식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설교를 아무리해도 형제의식 때문에 하는 것이고 교회에 나오는 목적이 형제의식 때문인 것을 알아야한다. 우리가 어떨 때 가장 요동하나요? 사람과의 관계에서 가장 요동한다. 가족, 목장, 회사 전부다. 그런데 그 관계가 평안해지는 것이다. 성령의 결정을 하면 주시는 축복이 형제의식의 축복이다. 왕왕 목사가 설교만 잘하면 된다고 하는 사람이 있다. 유대인 회당장들 얼마나 설교를 잘했을까? 그들도 자기들끼리의 형제의식은 대단하다. 끼리끼리. 바울에게 항상 있는 형제의식은 이방인도 형제고 유대인도 형제고 전도한 자도 형제다. 이런 형제 의식이 참으로 진정한 형제의식이고 사람을 견고하게 한다. 이 형제의식 때문에 편지에서도 그는 성도를 직접 방문하고 싶은 마음을 종종 표현했다. 로마서, 고린도전서, 데살로니가전서 등에서. 이미 1차 여행에서도 그는 성도들을 심방하기 위해 짧고 편한 귀향길을 마다하고 토로스산맥을 다시 돌아왔다. 이방인 성도의 할례 논쟁으로 시작된 갈등이 성령의 결정으로 해소되었지만 이미 유대인들의 핍박이 있는 곳이니까 할례 주의자들의 공격이 얼마나 큰 위협이 될지 뻔했기 때문에 공격이 시작된 안디옥, 루스드라, 이고니온 등의 상황을 염려해서 예루살렘 교회에서 보낸 편지를 빨리 보내주고 싶은 것이다. 그런 마음이 있다. 그는 안디옥으로 돌아와서 굉장히 안정된 사역자가 되었다. 선교도 성공했고 예루살렘 교회에서 인정도 받았고. 이렇게 안정된 곳을 내려놓고 형제들을 돌아보고자 한 것이다. 이것이 견고함이다. 바울이 제안하는 이 재 방문은 돌보심이다. 성령의 결정에 따라 이방인을 괴롭히려고 했던 죄에서 돌이켜서 마음의 문을 활짝 열고 다시 이방인에게로 향하는 교회의 적용을 바울이 대표해서 상징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할 수있다. 여기서 부정과거를 썼는데 아주 결정에 단번에 따르기로 결정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바울의 관심은 항상 구원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구원에 초점이 맞춰져있는 사람은 형제의식이 있을 수 밖에 없다. 형제의식이 없다면 돌봄이라는 것이 자기 의가 되고 만다. 돌봐도 형제의식이 없으면 무섭다. 유대인들 형제 잘 돌볼 것이다. 그런데 형제의식이 없다. 끼리끼리는 있어도 형제의식이 없다. 형제하면 베드로와 야고보의 형제들아! 이 간증을 여러분들이 늘 기억하시고 들어보시길 바란다.
적용> 거친 파도가 와도 날 견고하게 하는 것은 형제 의식이라는 것이 얼마나 인정되세요?
성령의 견고함으로 나가지 않으면 말한마디에 우리가 무너진다. 이 세상 어떤 모임에서 밥해가며 듣기 싫은 소리를 기다리겠습니까. 서로가 다 돌봄의 대상이다. 형제의식이 없으면 하루도 힘든게 공동체다. 먼저와서 목자가 된 것이다. 그러면 목장이 필요없나? 예수믿으면 가장 결론이 형제의식이기 때문에 형제의식이 가장 표현되는 곳이 목장이다. 목장에 붙어있기 때문에 받는 축복은 대대손손 내려갈 것이다. 세상에서는 이런 영양가 있는 나눔을 하기 어렵다. 목장은 천국 공동체이기 때문에 인내도 연습하고 말하는 연습도 하고 듣는것도 연습하는 최고의 훈련 장소다. 세상에서는 이런 훈련하면 축복받을 수 밖에 없다. 목장이 축복의 근원이다. 하나님은 여러분의 섬김을 손톱만한 것도 기억하신다. 하나님은 반드시 다 기억하신다. 생색내지 마세요.
적용> 여러분은 목장에서 어떤 목자이고 어떤 목원인지 나눠보세요. 끊임없이 돌보고 있습니까? 돌봄을 받고 있습니까?
듣기 싫어하고 사랑이 없다고 하면 안된다. 그건 다른 이야기로 하면 나는 돌보고 있습니까? 돌봄을 받고만 있습니까? 편한 이야기를 할 수 있어야한다. 맨날 좋은 얘기만 해주면 불편하다는 것이다.
2. 사람을 의지하지 못하게 하십니다. (37절)
이제 가자고 하니까 바나바도 자신의 기득권을 내려놓고 가기로 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마가를 데리고 가자고 하는 것이다. 마가 요한은 예루살렘 출신이다. 예수님도 보고 12사도도 보고 베드로도 보고 바울도 보고 영적, 육적 다이아몬스 수저다. 바나바의 생질이라고도하고 사촌동생이라고도 하고 조카라고도 한다. 바나바가 혈육이다. 많이 아꼈을 것이다. 마가를 잘 세워주는 것이 미래의 교회를 위한 일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래서 1차 여행때도 데리고 갔었다. 그런데 마가는 토로스 산맥을 앞에 두고 밤빌리아 버가에서 힘들다고 포기하고 예루살렘으로 돌아갔다. 그래서 비시디아 안디옥, 이고니온, 루스드라, 더베 등에 세운 교회는 구경도 못했다. 돌아가는 순간에는 '나 힘들어 못해! 한발자국도 못가! 난 돌아갈거야!' 했을 때 바울이 얼마나 화가 났을까. 그런데 예루살렘에 가서는 좀 부끄러웠을 것이다. 걸림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니까 이 마음을 충분히 헤아렸을 바나바는 바울의 제안을 받자마자 마가를 생각했다. 마가를 데려가서 이 수치를 다 씻겨주자! 했을 것이다. 그런데 바울이 반대한다. 38절) 바울은 마가가 밤빌리아 버가에서 예루살렘으로 돌아간 일을 자기들을 버리고 떠난일 그래서 함께 일하러 가지 않은 일로 평가한다. 바울이 판단하게 마가의 중도포기는 자신들을 배신한 것 뿐만아니라 이방 선교의 사명도 배신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한번 배신한 사람을 데리고 다니는 것은 바울에게는 옳지 않은 일이라고 언급하고 있다. 옳고 그름으로 판단했다기 보다는 이번 여행을 아주 심각하고 중요하게 여겼기 때문이다. 그 지역이 지금 유대주의자들의 공격으로 얼마나 휘청거릴지 알기 때문에 이 때 언제든 포기하고 돌아갈 수 있는 마가를 데리고 갈 수 없는 것이다. 그것도 많지도 않고 한명 데리고 가는데 마가를 데리고 가도 될까? 여러분이라면 바나바와 바울 누구의 편을 들 것인가? 바울의 가차없는 거절과 바나바의 맹목적인 애정이 충돌하니까 어떻게 되나요? 그 둘의 차이가 적다면 적고 크다면 큰 것이다. 원어를 살펴보니까 누가의 뛰어난 문학적 자질을 알 수 있다. 37절에 바나바가 마가를 데리고 가고는 부정과거 부정법이다. 이것은 즉시 마가를 데리고 가자고 생각한 것이고 데리고 가고자한 것은 미완료이기 때문에 계속 지속적으로 바울에게 말했다는 것이다. 전도여행을 끝까지 할만한 사람을 선택했다기 보다는 조카에게 한번 더 기회주는 것에 관심이 있었다는 것이다. 한번 기회주는 것에 대해서. 38절에 바울이 같이 데리고 가는 것은 바나바는 과거인데 바울은 현재 부정법이다. 현재 부정법은 지속적 행위로 같이 데리고 다니는 것을 말하는데 한번 데리고 떠나는 게 아니라 이 사명을 이루기 위해 처음부터 같이 다니는 것을 중요하게 보는 것이다. 이것이 바나바와 바울의 큰 차이인 것이다. 바나바에게 있어서는 마가를 데리고가는 것은 단지 한번 데리고 다닌다는 정도의 별수롭지 않은 문제였지만 데리고 가는 것은 끈질기게 요구한 것이다. 그것은 데리고 다니는 것보다 자신의 체면이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바울에게 있어서 마가를 데리고 가는 일은 끝까지가야하기 때문에 현재부정사가 괴롭히는 것이 지속적이고 반복적이고 습관적으로 한것처럼 신뢰감이 없는 사람과 지속적으로 반복적으로 부딪혀야 한다는 부담감을 안겨주는 문제라고 생각한 것을 시제의 차이를 통해서 읽을 수 있었다. 그러니까 바울은 마가를 데리고 가는 것이 처음부터 끝까지 책임을 지고 사역을 해야하니까 데리고 가는 것이 옳지 않다는 정도가 아니라 절대 안된다는 확고한 생각을 표현했다. 바나바는 그냥 한번 데리고 가보지뭐~ 하지만 데리고 가자고 지속적으로 요구한 것이다. 저자의 뜻을 아는 것이 필요하고 중요하다. 바나바의 원함과 바울의 판단의 충돌을 볼 수 있다. 바울은 마가의 행동의 근거로 판단을 내렸지만 바나바는 조카라는 관계에서 비롯된 원함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바나바는 감성으로 바울은 이성으로 바나바는 정으로 바울은 구원의 시각에서 접근하니까 좁혀질 수가 없는 것이다. 가족에게 한번 더 기회를 주고싶은 바나바는 마가의 객관적 행위에 대한 평가를 내놓으며 거절하는 바울이 너무 섭섭한 것이다. 반대로 구속사의 귀한 사역을 위해 최대한 믿을만한 사람을 데리고 가야한다는 이성적 판단이 너무도 당연한 바울은 혈연에 얽매여서 우유부단한 태도를 보이는 바나바에게 실망을 한 것 같다. 39절) 이방인의 눈에도 제우스와 헤르메스로 보일 정도로 환상의 팀사역을 했고 단짝이었던 두 사람이 심히 다투어 결국 갈라섰다. 사실 두 사람의 갈등은 이미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 생긴 갈등에서 시작됐다. 간증에서 봤지만 갈리디아서 2장에서 바울은 안디옥에 온 베드로가 이방인들과 함께 식사하다가 유대주의자들이 오자 그들이 두려워서 이방인과 안 어울린척 했다고 했다. 그 때 바나바도 그 외식에 유혹됐다고 했다. 2장 12-13절이야기인데 그래서 바울은 베드로를 공개적으로 책망했다. 그럼 우리는 어떻게 은혜도 몰라보고 저럴 수 있나? 생각할 것이다. 그런데 11절에 그렇게 책망을 하고 바로 이어지는 20절) 바울이 고백을 한다. 믿음과 주님께 대한 사람이 있었기 때문에 베드로를 책망할 수 있었던 것이고 오직 예수를 위해 사는 사람이잖아요. 그런데 지금 혈연 때문에 복음이 전파되는데 안되는 것이다. 그래서 인본적으로 베드로를 책망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때도 바울이 바나바에게 직접 뭐라고 하진 않았어도 그 상황에서 바나바도 유혹되었느니라 하니까 두 사람이 서로에 대한 불편한 마음을 가졌을 것이다. 그러니 바울이 보기에 바나바는 자기와 함께 이방 선교까지 같이 다녀온 선교사인데 어떻게 저렇게 베드로를 따라 외식을 하나 하면서 마음이 안좋았을 것이다. 그러나 바나바가 보기에 바울은 자신이 추천해서 교회에 데려온 사람인데 자기가 없으면 아무것도 못했을텐데 어떻게 자신을 비판할 수 있나 원망스러웠을 것 같다. 그런데 바울이 너무 원칙주의자 같나요? 바울이 정확한 성격이라서 그런가요? 복음에 목숨을 걸었기 때문에 그에 비해 정인 중요한 바나바는 서로에 대한 감정이 안좋게 되었고 이런 갈등이 있다가 마가를 두고 터진 것이다. 인본적으로 생각하면 두 사람의 이런 갈라섬은 있어서는 안된다.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해 목숨을 아끼지 않고 복음을 전한 두 사람이 결국 싸우고 갈라선 이 사건은 기복적인 가치관으로는 도저히 해석이 안되는 일이다.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바나바가 좋아 바울이 좋아 백번해도 구속사적으로 차례차례 읽어가야하는 것이다. 여러분들의 이혼도 애들 사건도 회사도 구속사적으로 읽지 않으면 해석이 안된다. 억울하고 분해서 살 수가 없다. 그래서 성경은 구속사적으로 잘 읽어야 하는 것이다. 구속사적으로 보면 이 갈라섬의 사건은 두 사람에게 특별히 이방선교를 이어가야 하는 바울에게는 반드시 있어야만하는 사건이다. 바울이 사람을 전혀 의지하지 않도록 일어난 사건이다. 우리가 함께 살펴봤지만 바울은 참 외로웠다. 누구보다 유대민족에 대한 자부심이 있었고 유대교에 열심히 있던 사람인데 그 유대인에게 시기와 미움을 온몸으로 받고 있다. 돌에 맞아 죽을 뻔했다. 유대인들이 죽일려고 했다. 편을 들어주는 사람이 없다. 바나바가 유일한 친구다. 바나바가 있었기에 예루살렘 교회에 들어올 수 있었고 바나바가 있었기에 안디옥에서도 사역을 할 수 있었고 또 바나바가 옆에서 편이 되어주고 위로해주는 바나바가 없었다면 1차 선교전도 여행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방인의 할례 논쟁에서도 예루살렘 교회에서 호소할 수 있었던 것은 바나바가 있었기 때문에. 바나바가 없으면 아무것도 안되는 것이다. 아무리 강직한 바울이어도 저절로 바나바가 의지됐을 것이다. 우리가 교회를 다니고 뭐해도 나한테 돈주는 친정엄마, 안믿어도 시어머니가 최고다. 아무리 교회를 다녀도 맨날 의지한다. 그런데 여기는 같이 복음을 전하니까 그래도 인간이기에 바나바에게 기대는 마음이 없을 수가 없다. 앞으로의 구원 사역을 통해서 바나바의 약점이 드러나는 것이다. 그렇게 유대인과 이방인의 전쟁이 치열한데도 외식을 했다. 같이 밥을 안먹은 척 했다. 마가 사건에서도 인본적인 태도를 보이는 실수를 했다. 바나바의 성품에 클라이막스가 여기에서 드러났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이렇게 바울과 바나바가 갈라선 사건이 바나바나 바울이 사람을 의지하던 마음을 온전히 깨닫고 돌이키는 사건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갈라섬의 사건이 화가 아니라 복이다. 갈라섬을 통해 온전히 하나님을 의지할 수 밖에 없게 하셨다. 따라서 사람을 의지 할 수 없게 하는 것이 성령께서 견고하게 하시는 성령의 견고이다. 성령께서 가장 견고하게 하신다. 바울과 바나바가 심히 다투었다고 했는데 심히는 원문에 없고 그냥 결별했다는 뜻이다. 이 똑같은 단어가 히브리서 10장 24절에서는 사랑과 선행을 강하게 일으키는 자극을 주는 그 말은 이렇게 다투고 헤어졌어도 사랑과 선행을 하는 자극제가 되었다는 것이다. 결국 그렇게 됐다. 그런데 이제 의도하지 않은 갈등으로 바나바는 믿어지지도 않고 믿을 수도 없지만 바울보다는 마가를 선택했다. 그 다음에는 바나바가 딱 마가를 선택하자마자 자기 뜻대로 둘이 선교여행 가야하는데 마가를 딱 데리고 자기 고향 구브로로 먼저 떠나버렸다. 이방 교회를 돌보자는 사명대신 혈육과 고향을 선택했다. 우리가 가장 마지막에 고향이 있고 혈육이 있는 것 같다. 물론 바나바가 마가를 데리고 다니면서 양육했기 때문에 그는 후에 다시 바울의 동역자로 인정받을 수 있었고 마가복음도 기록할 수 있었다. 그러나 바나바는 이렇게 배타고 떠나면서 사도행전의 무대에서 사라졌다. 예루살렘 교회 초기에 밭을 팔아 헌금도 하고 좋은 성품으로 칭찬과 존경을 받으며 등장한 바나바다. 안디옥 교회를 견고하게 하는 일에도 크게 쓰임을 받았고 예루살렘 안디옥에 500km, 1000km 왔다갔다 하면서 바울을 데리고 가고. 그래서 바울과 함께 첫 이방 선교의 주역이었던 바나바가 이렇게 훌쩍 바울을 버리고 마가를 택했다는 것이 말이 되나요? 별인생이 없다는 것이다. 시종일관 인정받는 사역을 했다면 바나바는 본인도 모르는 사이에 하나님 자리에 가지 않았을까 한다. 바울은 스데반을 죽인 죄가 있지만 바나바는 아무리 생각해도 죄가 없다. 인간 성품의 최고의 클라이막스를 보여줬지만 성품의 한계는 여기까지다.
적용> 바나바와 바울처럼 내가 절대 의지하고 있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여러분의 기준은 감정입니까? 이성입니까? 구원입니까? 정입니까?
3. 주의 은혜에 맡기는 것입니다. (40-41절)
이 견고하다는 단어는 신약에서 사도행전에서만 4번 나온다. 그중 지난주에서 32절과 41절 두번이 15장에 나왔다. 바울과 바나바가 다투고 갈라선 이 일이 교회들을 견고하게 하는 일이 되었다는 것이 참 아이러니하다. 비온뒤에 땅이 굳는다고 했는데 그런 것 같다. 과연 이 다툼은 세계적인 다툼이 되어서 세계적인 견고함이 되어서 세계적인 선교로 나가게 된 것이다. 39절) 바나바가 마가를 데리고 떠났다. 갈라섰다. 갈라서자마자 데리고 떠났다. 그러니까 먼저 떠났으니까 바울도 40절에 사람이 없으니까 누군가를 택할 수 밖에 없다. 누가는 누가가 썼지만 바울의 손을 들어주는게 분명해 보인다. 형제들이 주의 은혜에 부탁하는 사람은 바나바가 아니라 바울이다. 바나바가 이 사건 이후에 누가의 기록에서 사라진다는 것만 봐도 그렇다. 바울은 바나바가 떠났기 때문에 할 수 없이 실라를 택하는 것이다. 바울이 바나바와 갈라서는 사건을 통해서 사람을 의지하면 안된다는 것을 깨달았지만 선교의 사명을 홀로 감당할 수는 없다. 하나님의 일이라면 사람을 준비시킨다. 바나바가 떠난 자리에 실라가 있다. 실라도 로마 시민이었다. 지난 성경의 34절에는 없음으로 되어있는데 어떤 사본에는 그들과 함께 유하기를 작정하고 35절에 보면 바울과 바나바도 안디옥에서 유하였다고 읽을 수 있다. 그러니까 아마도 유다와 실라가 같이 편지를 같이 편지를 가지고 오는데 실라는 바울에게 은혜를 받았던 것 같다. 실라가 예루살렘 교회의 인정받는 지도자였는데 그 자리를 딱 내려놓고 안디옥 교회에 바울과 같이 남은 것으로 보인다. 유다는 돌아갔다. 그러니까 이런 믿음이니까 바울의 짝으로 손색이 없다. 그 당시 마가와 비교가 안된다. 이 사람을 쓰겠다고 바울이 그런 것이 아니다. 바나바가 먼저 떠났기 때문에 그래서 실라를 택한다. 주의 일은 하나님 뜻대로만 사람을 꼭 허락하신다. 돈이 있고 건물이 있어도 사람이 없으면 완전 꽝이다. 우리들 교회에 사람이 준비될 줄 믿는다. 이렇게 주의 은혜에 부탁하며 떠난결과 바울은 이 여정이 있는 여러 교회를 심방하며 그들을 견고하게 했다. 1차 선교여행이 구브로에서 출발해서 같이 돌아보려고 했는데 바나바가 마음대로 떠나버렸다. 바나바는 구브로를 떠났는데 바울은 안디옥 교회에서 길리기아와 시리아 북쪽 육로를 택해서 전도일정을 계속 갔다. 일정을 바꾸면서 여러 교회들을 심방했다. 천천히 읽어보니까 정말 바나바가 감정적으로 움직였구나 이 생각이 들었다. 심히 다투자마자 마가를 데리고 떠나버렸다. 마가 택한것도 그렇고 전도 여행을 같이 가야하는데 그것도 안하고 물어보지도 않고 떠나고. 너무 착해보이지만 구원의 일은 이렇게 다른 것이다. 너무 의지했던 바나바이기 때문에 이렇게 까지 해야 헤어질 수있었던 것이다. 바나바는 여기까지가 바울을 돕는 부르심의 사역으로 쓰임 받았다. 은사인 것이다.
적용> 의지했던 사람과의 심한 다툼이 지나고 보니 우리를 견고하게 한 일이 있습니까? 바울과 바나바도 다툰다고 내 다툼을 합리화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성경만 앞뒤로 차례차례 잘 읽으면 원어의 뜻이 다 들어있다. 그 후에는 바나바가 등장하지 않기 때문에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바울의 사역을 펼쳐지게 하셨기 때문에 이때 결정은 바울이 옳은 것이다. 구원의 일과 인본적인 일은 정말 날마다 대결한다. 그런데 바울이 이렇게 열심히 구원의 일을 하는데 유대인들 중에 한명이 없는 것이다. 그 한명이 바나바가 일당 천을 해서 옆에 있었는데 드디어 바나바도 떠난 것이다. 복음을 전하는 것은 외로운 길이다. 바울이 전한 사람만 바울 복음의 제자가 되는 것이다. 이럴 때 좋은게 좋은거라고 하면 안되는 것이다. 이렇게 갔기 때문에 바울에게 엄청난 2차 전도여행의 열매가 열리는 것이다. 구원의 일에 자꾸 나서서 인본적으로 이러고 저러고 하면 될일도 안된다. 전부 직분자들이 이혼 해도 된다 불신결혼 해도 된다 동업해도 된다 그러면서 왜 차타지 말라하고 왜 술마시지말라하고 그러냐고 그런다. 우리는 목장 나간다고 하면 우리는 뭐라고 해야하나.. 고민하고 조금만 마시라고 한다. 어쩔 수 없을 때는 차도 타라고 한다. 그런데 우리들교회에 그런 일이 있었기 때문에 강력하게 말하는 것이다. 미리 보호하는 차원에서 그런 것을 지키라고 하는 것이다.
성령의 견고함은 끊임없는 형제의식의 돌봄이 있어야한다. 사람을 의지하지 못하게 하시는게 견고함이다. 주의 은혜에 맡기는 것이다.
A
1. 가족, 목장, 마을 건강
2. 오빠와 수현이 동생 군제대까지 지켜주시길
3. 사람을 의지하기 보다 관계에 있어서 하나님께 맡길 수 있는 내가 되길
4. 가족들에게 이야기할 때 톤을 낮추고 상냥하게 대할 수 있길
5. 관계에 있어서 판단 기준을 나와 내 경험에 두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과 사랑에 둘 수 있길
B
1. 큐티 3번이상 하기
2. 식이조절 잘 할수있길
3. 예배와 말씀에 집중하기
C
1. 의지했던 사람과의 심한 다툼이 지나고 보니까 우리를 견고하게 한 일이 있었냐는 적용질문에 나의 시기질투로 인한 고난이 있었던 사건이 생각이 나면서 다시 한 번 저를 돌아보게 됐는데, 그 때의 고난을 통해 지금의 내가 될 수 있게 해주심에 감사할 수 있기를.
2. 큐티를 생활화할 수 있도록
3. 충동적인 소비습관 고칠 수 있도록
4. 시기,질투,교만을 놓고 기도할 수 있도록
D
- 회사생활 불만보다는 긍적적이고 담대하게 받아들일 수 있길
E
- 알바 대타 끝나기 전에 맞는 알바 찾을 수있길
-화요일 수강신청인데 상황에 맞게 잘 신청할 수 있도록
F
- 오늘부터 이틀동안 2차 수강 정정기간이고 3월에 개강하고 마지막 수강 정정기간인데, 수업 신청 해야할 것들 시간 잘 맞춰서 신청할 수있길
G
1 이번주에 큐티하기
2 예비번호 받은 학교에서 좋은 결과 있기를
3 코로나 종식되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