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131 성령의 결정
사도행전 15:22-35
우리는 하루에 어마어마하게 많은 결정을 내리며 살고 있어요. 2007년 발표된 코넬 대학교의 한 연구팀 논문에 따르면 한 사람이 하룻동안 단지 먹는 일에 관해 내리는 결정만도 평균 226.7개라고 해요. 그러니 다른 일까지 다 합하면 더 많지 않겠습니까? 그 모든 결정이 다 그렇게 중요한 결정은 아니겠죠. 그러나 어떤 결정들은 인생을 바꿀 만큼, 심지어 인류 역사를 바꿀 만큼 중요한 결정도 있는데 바로 그것은 천하보다 귀한 한 영혼의 구원을 위한 결정이라고 할 수 있죠.
예루살렘 공의회는 결론적으로 한 사람을 구원을 위한 총회였기에 모두가 승자가 되는 성령의 결정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성령의 결정에 대해서 생각을 해 보겠습니다.
1. 마무리를 잘해야 합니다. (22-24, 27절)
15장에서 여러 과정을 거치면서 KO승이 아니고 판정승으로 야고보가 결론을 내렸지만 그러나심판이 손을 들어 결정을 내려야 승자가 되는 거예요. 그러려면 이 마무리가 중요합니다. 땅땅땅이 있어야 되는 거예요. 이 마무리를 위해서 야고보가 결론 내렸어도 온 교회가 결정을 하더라고요. 온 교회가 심판관이 되어서 결정하고 신뢰받는 지도자인 유다와 실라를 증인으로 안디옥 교회에 파송하는 결정을 합니다. 일을 아무리 열심히 하고 잘해도 마무리를 못하면 모든 것은 수포로 돌아갑니다. 이런 결정을 하려면 형제 의식을 가지고 신뢰받도록 배려하고 사과하는 마무리를 잘 해야 되더라고요. 그래서 이 마무리를 잘하도록 하기 위해서 세가지를 보겠는데요.
1) 형제 의식이 있어야 합니다. (22-23절)
자 이 두절에 여러분 형제가 몇 번 나오는지 아세요? 3번 나옵니다. 보내는 사람은 사도들과 장로된 형제들이고 받는 사람은 이방인 형제고요. 보내는 증인들도 형제라고 합니다. 편지는 그 모두를 형제라고 부릅니다. 여기서 베드로의 형제들아와 야고보의 형제들아가 생각나시죠? 자 편지를 쓰는 모교회의 지도자들과 이제 막 예수 믿은 연약한 이방인 신자들이 주 안에서 형제라는 거예요. 동등하다는 거예요. 어떻게 이렇게 나와 너가 형제임을 분명히 하면서 이 결정을 선포하겠다. 여기서부터 안디옥 교회 교인들의 마음이 녹기 시작하지 않았을까 싶어요. 그 대단한 예루살렘 교회 사도들이 너희들과 같은 형제다. 여러분 호칭 하나가 이렇게 중요할 수 있습니다. 호칭 하나가 마음을 녹게 할 수도 굉장히 자존감을 나타낼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23절에 수리아는 안디옥에 있는 로마의 속주, 우리로 보면 경기도 같은 도에 해당하는 것이고 길리기아는 그 서편에 인접한 속주입니다. 바울의 고향 길리기아 주에 있죠. 그러니까 이 편지는 단지 안디옥 교회만 위한 것이 아니라 이방인 성도가 있는 모든 교회를 위한 결정이라는 뜻입니다. 안디옥 교회가 질문을 해서 이런 결정이 나게 되었으니까 굉장히 안디옥 교회의 자존감도 높여줬다고 할 수 있습니다.
2) 배려를 잘해야 합니다. (27절)
신뢰받도록 총력을 기울이고 증인을 세우는 게 배려하는 거예요. 이렇게 의장 야고보의 최후 발언이 끝나고 사도와 장로, 온 교회가 야고보 사도의 의견대로 편지를 써서 안디옥 교회에 부쳤어요. 그리고 형제 중에 인도자인 증인을 보내는 것은 그 편지가 예루살렘 교회의 공식적인 결정이라는 것을 분명히 나타내기 위한 것이고 이 편지가, 이 결정이 진짜라는 뜻으로 증인을 세웠다는 거예요. 바울과 바나바 같은 자도 글쎄 증인이 필요하더라고요. 우리는 어떻게 바울 말을 안들어? 어떻게 바나바 말을 안 들어? 그게 아니고 이게 이제 배려죠. 증인들을 왕복 1000km가 넘는 곳을 이 두 사람을 왜 갔다 오게 하겠습니까? 예루살렘 교회와 안디옥 교회는 이제 형제라는 거죠. 그러니까 미리 생길 수 있는 갈등을 다 미리 차단하려는 배려를 하는 거고, 사도들과 장로들의 대답을 간절히 기다렸을 안디옥 교회 성도들의 마음을 헤아렸어요.
그래서 27절에 보면 한 장의 편지만 보내기보다는 교회가 사랑하고 인정하는 사람들을 뽑아서 객관적으로 이방인 신자들에게 말로 설명하도록 대단한 배려를 하는 거죠. 지도자들이 성령의 결정을 하기까지 어떤 과정을 거쳤나를 생생히 전달할 증인들을 보낸 거예요. 구원 때문에 의논하고 또 하나님의 돌보심 속에 의견개진을 다 하고 이것이 구원 때문이었다. 그리고 바울의 보고와 베드로의 간증과 야고보의 간증, 이걸 다 생생히 전달하도록 했습니다. 그들이 충분히 신뢰하며 안심할 수 있도록 그들 입장에서 먼저 공감하고 배려하는 자세를 보인 것입니다. 예루살렘 교회에서 이렇게 결정했어요 그래서 이게 권세로 밀어부친 게 아니라 이게 복음이기 때문에 복음은 이런 태도가 중요한 거예요. 한국 교회가 지금 안 믿는 사람한테 이런 태도로 나가야 되는 거예요. 우리가 잘났다고 그러면 안 돼요, 지금. 그게 옳다고 해도 이런 태도를, 성령의 결정을 이렇게 해야 되는 거예요.
3) 사과를 잘해야 합니다. (24절)
예루살렘 교회는 거기에 일부 성도들 때문에 안디옥 교회가 겪은 어려움에 대해서 아주 이렇게 공적으로 사과합니다.
안디옥 교회 질문에 대해서 예루살렘 지도자들은 먼저 편지에서 유대주의자들이 너희 이방인 신자들을 곤란하게 했다 그걸 사과를 했어요. 머리로만 이해하고 답한 게 아니라 그들의 정체가 드러난 것을 팩트로 알려줬어요. 그 사람은 예루살렘 교회에서 보낸 사람들이 아니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은 예루살렘 교회 성도 맞아요. 그런데 교회에서 보낸 사람들은 아니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 사람들의 무서운 열심으로 자기 견해가 많으니까 막 안디옥 교회에 가가지고 할례 받아야 된다 이랬자나요. 그래서 1절에 그 사람들이 예루살렘 교회에서 보낸 사람들이 아니었음을 알려주는 거죠. 이거는 예루살렘 교회는 할례주의자들과 관계를 끊고 그들의 독자적인 행동을 비판하는 내용을 인정하는 얘기이기도 한 거예요. 한편 교회의 공인된 가르침과 노선을 따라서 다른 사람들을 가르치는 게 굉장히 중요하다는 것을 발표한 모양이 됐습니다. 그러므로 뭐든지 하려면 이렇게 마무리가 너무 중요합니다. 마무리가 다른 게 아니고 바로 이런 거예요. 형제 의식을 가지고 이렇게 배려하고 사과하고.
교회가 인정하지 않는 성경공부는 참 위험합니다. 그런데 듣기에는 할례만 받으면 구원 얻는다니까 이게 성도들이 듣기에는 사랑하고 용서하고 이러면 힘들자나요. 할례만 받으면 구원받고 천국 간다. 할례만 받으면 대학교 붙고 병이 다 낫는다고 하니까 이게 다 육적인 구원으로 연결이 되어서 혹해서 이단으로 다 몰려가고 그런 복음을 전하면 물불을 안 가리고 모여들게 되어있어요. 그러니까 여러분들은 어디 성경공부를 만약에 하는 데가 있다면 반드시 교회 허락을 받고 하셔야 되는 거예요. 그런 것들은 목장에서 쉬쉬 할 필요가 하나도 없어요. 교회에 물어보고 결정을 하면 결정한대로 여러분들은 따르셔야 돼요. 내가 보기에 그곳은 괜찮아. 교회가 몰라서 그래. 그거 아주 교만한 말입니다. 평신도들은 잘 몰라요. 그러니까 바울 사도도 공격할 만큼 무섭게 공격하는 것이 주의자들입니다. 할례주의자, 유대주의자, 영지주의자, 이런 주의자가 많거든요. 그런데 여러분들이 어찌 분별하겠습니까? 공교회 협의회에서 이단이라고 하면 겸손하게 믿으시는 것이 성령의 사람들인 거죠. 물론 그럼에도 바울도 그들에게 이렇게 공격을 당했자나요.
유대주의자들이 이렇게 괴롭히는 일을 왜 바울 사도가 당해야 하나 싶지만, 여러분 아무렴 무슨 일을 당해도 택자는 당하면 다 결국은 유익한 일이 되는 거예요. 결과적으로 선을 이루게 되는 거예요. 내가 원하는 게 아니었자나요. 말씀으로 인도함 받고 가면, 지금 바울도 그랬기 때문에 그들이 괴롭혀서 예루살렘 공의회가 소집이 됐자나요. 이 총회는 역사적인 총회가 되었고 교회 회의의 롤 모델이 됐어요. 이 일이 또 있어야 되는 일인 거예요. 그러니 결정을 할 때는 우리의 구원을 위한 의논과 의견을 가지고 형제 의식을 가지고 진짜 유리 그릇 다루듯이 배려하고 또 진정성 있는 사과를 하며 증인까지 세운다면 이것이야말로 성령의 결정을 하는 최고의 마무리가 되지 않을까요? 저는 이제 정말 큐티를 하면서 무서워서 피하는 게 아니고 우리는 복음 때문에 뭐든지 이렇게 살살 걸어가야 돼요, 믿는 사람들은. 한국 모든 땅이 유리 그릇이라고 생각하고 가야 돼요. 지금 바울은 예루살렘 공의회에서 입 하나 열지 않고 가만히 있자나요. 남들이 나를 옳다고 그래야지 내가 나를 옳다고 그러면 안돼 자나요.
우리의 마무리는 어떨까요? 부모로써 자녀의 문제를 결정해야 한다면 먼저 자녀의 상황을 진심으로 배려하고 사과할 것은 사과해야 직장에서도 사업장에서도 하는 모든 결정들이 성령의 결정이 되지 않을까요? 목장도 마찬가지죠. 여러분들은 사과하라고 하면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소리지르고 싶겠죠. 누가 사과해야 되는데 그러나 한 사람의 구원을 위한 모든 결정은 성령의 결정이 되어 그 결정이 집안과 회사와 교회와 나라의 구원을 가지고 올 수도 있습니다. 얼마나 많은 성도들이 그동안 자녀 앞에, 남편 앞에, 부모 앞에 무릎을 꿇고 사과했는지 몰라요. 바람 핀 남편 앞에 내가 믿음이 없어서 당신이 내 믿음을 위해서 수고했어요. 미안해요. 이렇게 말도 안 되는 사과를 하는 한 사람의 성령의 결정으로 수많은 가정이 살아났습니다.
[적용] 여러분은 세상에서도 문자적으로 마무리를 잘합니까? 시작만 합니까? 말이 안 되는 상황에서 형제의식을 갖고 배려하고 공감하며 진정한 사과를 한다면 여러분은 어디까지 했나요?
2. 한마음으로 내리는 결정입니다. (25-26절)
여기서 만장일치로 번역한 헬라어는 마음을 하나로 모아라는 뜻입니다. 이 단어가 신약에서 모두 11번 쓰였는데 사도행전에서만 10번 나오는 거예요. 예를 들면, 사도행전 1장 14절에서 오순절에 모인 제자들이 마음을 같이하여 오로지 기도에 힘썼다. 2장 46절에는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썼다. 바로 이 마음을 같이하여가 한 마음이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여기서도 사도들과 장로들과 온 성도들이 마음을 같이하여 이 결정을 내렸다는 말이죠. 이렇게 한마음이 되기까지 얼마나 치열한 변론이 있었는지 우리가 다 살펴보았자나요, 그렇죠? 구원을 목적으로 성령의 의논을 하니까 하나님의 돌보심을 인정하여 모든 성도가 한 마음이 되었습니다.
여기에는 생명을 아끼지 않는 바나바와 바울 같은 자가 있었기 때문이에요. 안디옥 교회 입장에서는 바나바와 바울이 갔는데 예루살렘 교회하고 반대되는 입장이 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겠습니까? 유대인이 내려와서 이상한 얘기를 하니까. 그런데 성령의 의논의 결과 예루살렘 교회가 한 마음이 되어서 바나바와 바울을 지지한다는 얘기를 들으니까 안심이 되고 그 결정대로 하면 된다는 거죠. 사도들은 그 율법과 할례의 문제를 가지고 안디옥 교회 대표로 온 바나바와 바울을 인정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사랑하는 자라고 부를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는 자라고 마음껏 칭찬을 해줍니다. 그것이 주를 위해 수고한 일이라고 한 마음으로 칭찬을 해주고 있어요.
그런데 교회에 혼란을 초래한 1절, 24절의 그 어떤 사람들은 복음에 대한 정확한 이해조차 없는 자들이었어요.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생명을 아끼지 않는 반면에 그들은 이기적이라 자기 생명을 아끼는 사람들이었던 거죠. 완전히 다른 부류가 복음을 전하는 거예요. 설교 잘 할 수 있죠. 그런데 자기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고 전하는 사람이 있고 아끼면서 설교를 잘 하는 사람이 있어요. 길고 짧은 거는 대봐야 되는 거예요. 그런데 김형석 교수님이 백년을 살아보니까 정말 알겠다고 하시면서 절대 행복할 수 없는 두 부류가 있는데 첫째 부류는 정신적 가치를 모르는 사람이라는 거예요. 한마디로 물질적 가치에 모든 것을 두고 있는 사람, 절대로 행복할 수 없다. 두번째는 이기주의자다. 정말 이 사람들이, 24절에 말로 너희를 괴롭히는 자들이 바로 이 이기주의자가 아닐까 싶은데요. 이기주의자는 자신만을 위해 살자나요. 그러니까 인격이라는 게 없어요. 인격은 뭔가요? 인간관계에서 나오는 선한 가치를 가진 사람이에요. 그러니까 그 이기주의자라는 것은 인격이 없다고, 그러니까 이렇게 절대로 행복할 수 없는, 이 가치를 가지지 못한 사람들하고 살려면 인생이 힘들어지자나요. 이 사람들은 선교나 화합에 관심이 없어요. 그런데 예루살렘 교회가 위대한 것은 그들의 주장이 잘못된 것을 과감히 인정한 거예요. 그들도 예루살렘 교인이었어요. 그런데 교회가 지시해서 내보내지는 않았다는 거죠. 그렇지만 너희들에게 엄청난 논란을 초래한 것, 맞자나요? 그것에 대해서 예루살렘 교인들도 자기네 교인이니까 어떻게 하겠습니까? 이런 일들이 있을 수 있는 거죠. 자존심과 체면이 중요해서 끝없는 감정 대립을 가져오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결국 어떤 이상한 사람 때문에 공의회도 열리고 사도들에게도 인정을 받았으니 바울은 아주 가기를 잘 한 거예요. 그러니까 나를 욕한다고 안 가고 가 아니라 말씀대로 하면 욕을 해도 마지막이 좋은 거죠. 그러니까 이 마무리가 참 중요합니다.
그리고 증인도 딸려 보내기로 만장일치로 결정을 했다고 하자나요. 그러니까 바울이 그동안 예루살렘 교회에 당한 것을 생각하면 아주 설움이 다 씻겨졌을 것 같아요. 이런 본문을 볼 때마다 남 얘기가 아니라서 제가 막 울컥합니다. 얼마나 한 마음을 강조했으면 만장일치로 결정했대요. 여러분 한 교회에서 만장일치가 되기 어려워요. 그러니까 여기 예루살렘 공의회에서 만장일치가 되었다는 것은 대단한 일인 거예요. 그래서 만장일치가 되고 마무리를 잘 해야 돼요. 안 믿는 사람을 위해서 죽어지고 썩어지고 밀알이 돼야 되겠는데 믿는 사람이 날마다 들고 일어나서 이렇게 법을 어기면 안되자나요. 이렇게 예루살렘 교회가 한 마음이 되어서 결정할 수 있었던 힘은 어디에 있을까요? 야고보의 최종 결정이 구약의 말씀에 의거해서 내려졌다고 했자나요. 그렇습니다. 그냥 우리는 말씀으로만이 한 마음이 될 수 있는 거예요. 바나바의 착한 성품이나 바울의 대단한 학식이나 베드로의 예수님 만난 경험이나 야고보의 예수님 친동생이라는 권위, 그런 거 가지고 한 마음을 지어낼 수 없어요. 바울처럼 생명을 내어 놓아도 안 돼요. 영원한 진리인 하나님의 말씀만이 우리의 서로 나뉜 마음을 한 마음으로 모으는 줄 믿습니다. 그러니까 제가 잘 한 건 없어도 우리가 온 교회가 같은 본문으로 매일 묵상하는 게 얼마나 귀한지 몰라요. 공동체가 함께 기준으로 삼을 말씀이 있자나요. 이것 때문에 코로나에서도 우리가 살아나는 거예요. 우리가 이렇게 법을 지키자고 하면 여러분들이 다 따라주는 거예요. 평소에 말씀을 안 해 놓으면 이 법을 지키기가 어려운 것 같아. 정말 여러분들이 말씀을 잘 묵상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우리는 누구나 이기적이고 인본적이에요. 그런 죄인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한 공동체를 이루고 있기 때문에 이렇게 가는 거지 말씀이 없으면 각자 다 자기 마음대로 하면 무슨 결정을 내릴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이쪽 진보편을 들랴, 보수편을 들랴 말을 못하는 거자나요. 이쪽 저쪽 편 다 눈치 볼라고. 하지만 온 성도가 같이 묵상할 영생의 말씀을 날마다 주시기 때문에 한 마음으로 성령의 결정을 따라갈 수가 있는 줄 믿습니다. 한 말씀이 구원을 위해서 주시기 때문에 한 마음이 가능한 거예요. 지나고 나서 보니까 정말 말씀 때문에 우리들 교회 일년 잘 지나게 하셨다. 정말 하나님께 감사 드립니다. 왜 이렇게 한 마음이 되어야 하냐면 구원 때문이자나요.
[적용] 공동체에서 내가 아직 한마음이 되지 못하는 일은 영육 간에 무엇이 있습니까?
3. 여전한 방식으로 옳게 살게 하는 결정입니다. (28-35절)
여기서 옳은 줄 알았노니라고 번역한 말은 앞에서 결정이란 말과 똑같은 말이에요. 정확히 번역하면 성령과 우리는 다음과 같이 결정한다가 됩니다. 그러니까 예루살렘 회의 공식 결정 중에서도 마지막 결론을 적으면서 이 결정이 에루살렘 교회 혼자서 내린 결정이 아니라 성령의 결정임을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성령의 구원을 목적으로 성령의 의논을 거쳐 성령의 돌보심을 통해 이른 성령의 결정이라는 것이에요. 말씀대로 이루어진 이 성령의 결정이 중요한 것이죠. 그래서 모든 교회가 듣고 순종해야 할 하나님의 명령임을 말해줍니다. 이 결정은 야고보가 말한 4가지 조건을 이 요긴한 것들이라고 합니다. 그것 외에 짐을 지우지 않겠다고 해요.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내게로 오라고 했는데 도리어 교회가 짐을 지우면 되겠습니까? 각자 안식의 분량이 다르기 때문에 먼저 자유해야 돼요. 자유하게 해주면 책임을 느낍니다. 그런데 먼저 책임부터 지워주면서 교회법을 들이대면 처음 믿는 사람은 무너지는 거예요. 교회도 세상과 다를 것이 없다고 생각을 하는 거예요. 중요하니까 이 의무를 20절, 29절 두번이나 반복을 하자나요. 그런데 이 최소한의 의무도 당장은 불편하고 익숙하지 않고 수고로이 보여도 스스로 삼갈 수 있는 것이 중요하고 그대로 하면 결국에는 잘 되리라는 예언과 약속인 거죠. 그러면 성도에게 잘되는 것이 무엇입니까? 일이 뜻대로 잘 풀리고 만족할 만한 대가를 받는 것일까요? 물론 그언 복도 필요할 때가 있습니다. 넘치도록 부어 주시는 때도 있어요. 하지만 성도에게 정말 중요한 것은 그런 좋은 상급이나 대가가 아니예요. 성도는 이미 최고의 상급을 받았자나요. 하나님이 상급이 되어 주셨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상급으로 삼은 성도에게 잘되는 것은 삶 자체를 잘 사는 거예요. 그런데 이 잘 되리라로 번역한 말이 만사형통이 아니라 원어에는 옳게 행할 것이라, 바르게 행할 것이라 성도는 바르게 행하고, 옳게 행하는 것이 가장 잘 사는 거예요. 이타적으로 살아야지 행복한 거예요. 그러니까 바르게 살지 않으면 행복할 것 같아도 거기는 파멸만 있어요. 그래서 큐티를 하는 거죠. 그래서 각자 맡겨 주신 상황에서 말씀으로 분별하여 옳게 행하는 것이 잘 사는 비결인데 바로 우리가 이렇게 큐티를 하고 있지 않습니까? 나 혼자 사는 게 아니라 목사님이 한 것도 듣고 목장에서 한 것도 듣고 또 얼마나 여러가지 의견을 우리가 청취하는지 몰라요. 이것이 성도의 삶이고 거룩을 목적으로 둔 삶입니다. 그러므로 누군가를 주께로 인도를 하려면 교회가 먼저 본을 보여야 되자나요. 믿음 있는 목자가 본을 보여야 되자나요.
그래서 이 편지를 가지고 30절에 안디옥 교회에 가서 그 편지를 읽혔더니 31절에 읽고 그 위로한 말을 기뻐했대요. 그러니까 위로가 되었다는 것은 그동안에 안디옥 교회가 마음이 상해 있었다는 뜻이자나요. 그러니까 반대편에서 주장하는 유대인들은 너무 기득권자들이자나요. 유대인들이 먼저 믿은 사람, 자기네는 이방인이고 너무 위축이 되어있는데. 그래서 마음이 많이 상했어요. 그렇다고 뭐라고 할 수도 없고 참고 기다릴 수 밖에. 그리고 바울 복음은 혈기를 내지 말라고 하니까 기다리다가 증명이 되어졌으니 그게 너무 위로가 되어서 기뻐했어요. 그러니까 이 형제들이 위로가 되기 위해서 지금 예루살렘 교회가 취한 태도가 형제 의식을 가졌죠. 아까 이렇게 그야말로 여러 가지 방법을, 증인을 보내서 배려하고 공감하고 사과를 했자나요. 위로하기 위해서 이런 방법을 다 썼는데 더 실제적으로 편지를 부치고 그 편지를 말로 전하고, 지금 여기에서, 계속 위로하는 것. 자존감을 높여주었죠. 지금도 이렇게 위로하기 위해서는 문자로, 카톡으로, 메일로, 방문으로, 줌으로, 식사로, 기도로, 전화로, 칭찬으로, 다양한 방법으로. 성령의 결정을 하기 위해서는 안 믿는 사람은 왕인 거예요. 그 왕의 마음을 얻기 위해서 이런 방법을 써야 되는 거예요. 이렇게 권면하여 굳게 하고 등으로 이게 평안히 되어가는 과정이 필요하고 너무도 중요한 것을 봅니다. 이것은 십자가 지는 고통이라고 할 수 있겠어요. 누가 이렇게 하겠습니까? 배려하고 사과하고 공감하고 찾아가고 메일 주고 식사하고, 이거 십자가 지는 고통 아니겠습니까? 성령이 효과적으로 도와주시면 이걸 할 수가 있는 거예요. 여러분의 끊임없는 심방과 편지와 메일과 식사는 우리 공동체 모두를 바르게 살게 하는 결정이 될 수 있고 남들을 위해서 살았을 때 우리 자녀를 바르게 살 수 있는 결정이 될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하니까 유다와 실라가 예루살렘으로 가면서 들은 인사는 평안이었어요. 그들은 평안을 가지로 예루살렘으로 돌아갔다고 합니다. 교회에 평안이라는 단어가 쓰인 것은 사도행전 9장 31절에 그리하여 온 유대와 갈릴리와 사마리아 교회가 평안하여 이후 처음인대요. 그때도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회심한 후에 유대인들에게 완전히 협박을 당하고 너무 복잡했는데 마지막에는 교회가 평안했대요. 여기 예루살렘 공의회도 이렇게 복잡했는데 마지막에는 평안했대요. 여러분들 문제 없는 게 문제가 아니라 문제 있는 게 평안한 거예요. 들으셨죠? 문제가 많은 가운데 항상 평안을 도출해 내는 거죠. 그래서 지금 15장 2절에 적지 않은 다툼과 변론을 겪을 수밖에 없었던 안디옥 교회에 다시 이렇게 평안을 가져온 거예요. 그래서 이 일을 위해서 3절에 전송은 다툼 가운데 묻기 위한 보냄이었고, 30절에 작별은 그 물음에 답하기 위한 보냄이었고, 33절은 그 답이 가져온 평안의 결과를 보여주는 보냄이었어요.
그래서 결론이 35절에 갈등이 그치고 기쁨과 평안을 얻은 안디옥 교회는 다시 주의 말씀에 주목하여 말씀으로 양육하고 양육을 받아야 하는 여전한 방식의 일상을 살아야 하는 것이 저는 성령의 결정의 클라이막스 묘미라고 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여기서 유하며는 14장 3절과 두번이나 나왔는데 디아트리보라고 기억나시죠? 미완료로 쓰이기도 하고, 한번은 부정사로 쓰였는데 여기서는 미완료고. 이 사명의 자리를 반짝반짝 윤이 나도록 비비고 닳도록 문지르듯이 닳아 없어지도록 수고하는 삶이 제자의 삶이자나요. 결국은 여전한 방식으로 제자의 삶을 살 수 있게 하는 것이 성령의 최고의 결정인 것을 믿습니다. 우리가 입시나 진로나 뭘 위해서 결정할 때 여기가 사명의 자리인가? 이 학교가, 이 결혼이, 이 직장이, 이게 사명의 자리인가? 이게 최고의 결정인 거예요. 절대로 하나님은 손해보지 않으세요.
[적용] 여전한 방식으로 자기 삶의 자리에서 맡겨진 역할에 충실하며, 비비고 문지르고 잘 사시나요?
기도제목
보련
인생의 보호자 공급자 주인 되시는 주님의 직장 인도함 받도록
공부를 시작하려고 하는데 물질적인 지원과 사명으로 나아 갈 수 있도록
현경
하나님이 아신다는 것 알고 성령의 수행원 하도록
영육, 내면의 회복되도록
예선
여전한 방식으로 허락하신 자리 지킬 수 있도록
목장 식구들 이름 불러 가면서 기도하도록
생활 예배 잘 드리도록
은우
성령의 결정, 마무리 성령님이 지어 주시도록
재단에 일이 시끄럽고 시마다 때마다 저에게 와서 문제 삼는 중인데 이 모든 것이 주님의 전쟁이 되도록
진정한 사과를 나에게 하고 내 마음에 위로 못한 부분들 말씀으로 해석 되도록
문제가 있는 것이 없는 것임을 알고 모든 사단의 간계로부터 보호하시고 도와 주시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