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의 돌보심 2021. 1.17. 주일말씀
기도제목:
공통:
성령의 돌보심 위해 죽어지고 썩어지는 한 알의 밀알이 되어 눈높이를 잘 맞추게 해주세요
하나님이 심방하시면 변하지 않을 사람이 없음을 기억하며, 가정과 목장의 고난 가운데 있는
그 한 사람이 하나님의 심방을 받게 해주세요
우리의 삶이 말씀과 일치하게 하시고, 목장과 가정에서 말씀이 최종적인 결론 되게 해주세요
장승영
1. 구원을 위해 눈높이와 타이밍을 맞출 수 있게.. 구원의 조심과 지혜를 주세요. 자랑질 하지 않도록 깨어있게 도와주세요.
2. 우리 목장식구들과 남동생을 하나님께서 심방해주세요. 돌보아주세요.
3. 성경대로 하지 않는 내 열심과 돌봄이 이단이라고 하셨는데.. 경고로 잘 듣고 말씀을 넘어서지 않게 ... 도와주세요.
[적용] 매주 짧게라도 목자보고서로 출석체크를 남기고, 제가 말씀의 경계를 넘어 이단이 되지 않도록 조심하겠습니다.
정지윤
1. 사람이나 우상(가족맺기, 인정중독) 환경, 물질이 결론이 되지 않게 성령의 돌보심 구하는 한 주 매일큐티하도록
2. 환경이 아니고 예수님 보고
신경 쓰이는 관계문제 하나님이 일하고 계시지 하면서 내 할 일 하도록 (내가 변하도록)
3. 결론은 말씀으로 끝나야 한다고 했는데 말씀으로 끝맺을 적용 찾아 하도록
이은영
1. 가족, 회사, 공동체 어디에서나 구원을 위해 눈높이를 맞추는 제가 될 수 있게 도와주세요.
2. 성령의 돌보심을 느끼는 한주가 되도록.
3. 이번 호도 잘 마감할 수 있도록 인도해주세요.
차한나
1. 이번 주 집에 내려가는데 안전하고 평안하게 잘 다녀오고, 아빠에게 복음을 간단하기 전할 생각인데 아빠의 마음이 예수님께 열리길
2. 한 주 교육학 공부 잘 하도록
3. 공부와 병행 할 수 있는 알바 인도해주시길
성령의 돌보심 2021. 1.17. 주일말씀
삼위일체 하나님도 우리 구원을 위해서 서로 의논을 하셨겠죠? 그러면 의논대로 무엇을 하셨을까요? 역할대로 돌보셨겠죠. 우리 모두는 서로에게 돌봄받는 사람이라는 것을 느끼기를 원하죠. 14절 :돌보심: 슬픔이나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위로하기 위해 병문안하고 방문하는 것 의미합니다. 그렇게 돌봄을 하고 잘 받는 사람은 정말 다른 사람들을 잘 돌보게 되어있어요. 목자들이 잘 돌보면 다음에 목자가 되었을 때, 그 분이 롤모델이 되서 잘 돌보더라구요. 그래서 오늘은 성령의 돌보심에 대해서 생각을 해보겠습니다.
1. 성령의 돌보심은 눈 높이를 맞추는 것입니다.
12: 온 무리가 가만히 있어 바나바와 바울이 하나님께서 자기들로 말미암아 이방인 중에서 행하신 표적과 기사에 관하여 말하는 것을 듣더니
지난주 베드로의 형제의식에 관한 이 장렬할 변론은 온 무리를 침묵에 빠트릴 정도로 확신있고 분명한 것이었기 때문에, 모두가 다 입을 다물었어요. 온 무리가 잠잠해지자 사도들은 바나바와 바울에게 다시 발언할 기회를 주었어요. 바울과 바나바가 4절에서 처음 보고했을때는 바리세인들이 벌떡 일어나서 그냥 비난을 했잖아요? 이번 두번째 보고에서는 하나님께서 이방인들에게 행하신 표적과 기사에 관해 말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왜 딱 표적과 기사를 집어서 말했을까요? 믿음이 연약한 유대인들은 너무나 표적과 기사를 좋아하기 때문에 그 눈높이에 맞춘것이죠. 그래서 요한복음 4:48 ampndash 예수께서 너희는 표적과 기사를 보지 못하면 도무지 믿지 아니하리라. ampndash 그런데 물론 그들이 표적과 기사를 본다고 잘 믿는것도 아니예요. 그런데 표적과 기사가 있으니 그정도라도 믿는거죠. 그래서 고린도전서 1:22-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니 라고 했습니다. 유대인은 이처럼 눈에 보이는 표적과 기사를 좋아했어요. 남 예기 아니죠? 우리도 그냥 짠 하고 나타나는 기적이 너무 좋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이런 앉음뱅이가 일어나고 많은 사람들이 모였다는 이 표적과 기사에 열광하겠지만 진짜 표적은 십자가잖아요? 그러니까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유대인들의 박해로 쫓겨났고 이고니온에서는 돌로 침을 당했고, 루스드라에서는 앉음뱅이를 일으키고도 죽을만큼 돌로침을 당하고도 복음이 전해진거,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수리아 안디옥으로 돌아오는 지름길을 놔두고 곳곳에 죽이려는 유대인들이 있었지만, 그 복음을 전했던 루스드라 이고니온 비시디아 안디옥을 도로 돌아서 굳게 세우고자 돌아보며 돌아 온 선교 보고. 그것 자체가 표적과 기사가 아니었겠습니까?
주님은 요나의 표적밖에 보여줄 것이 없다고 하셨기 때문에 바로 이것이 진짜 표적인 것이죠. 그러니 지금 유대인들에게는 기복적 관점으로 보고를 했지만 진짜 영이 통하는 사도들에게는 이 팔복의 관점으로 균형 있게 눈높이에 맞춰서 보고를 했으리라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이 대단한 보고도 타이밍이 중요합니다. 예루살렘 공의회의 역할분담은 성령의 조직 맞습니다. 그러므로 오직 예수그리스도를 믿어 죄사함을 받고 의롭게 된다는 이 정통 교리의 가장 강력한 주창자의 주인공은 누가 뭐라해도 바울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공회에서 정한 거예요. 객관적 증인의 역할만 했어요. 나서지 않았어요. 그것은 이 공의회를 개최한 예루살렘 교회 지도자들의 몫이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그 주된 증인의 역할마저 바나바에게 양보를 했습니다.
오늘 12절 보면 뭐가 보이나요? 바나바와 바울이라고 바나바를 앞서 표기했잖아요. 왜냐하면 예루살렘 교회에서는 아직도 바울은 예전에 교회를 잔멸하던 대상으로 기피 대상이었고 이 바나바는 사도들의 발 앞에 밭을 팔아 두었던 정말 예루살렘 교회의 인기 스타입니다. 이걸 이제 간과하면 안되죠. 그래서 바나바와 사울이라고 칭하며 그때는 늘 바나바가 리더였어요. 그런데 선교여행을 시작하고보니 바울의 타고난 복음 실력이 저절로 13장의 안디옥 교회가 시작되서 파송됐는데, 얼마 안가 13절에 바울이 리더가 됐어요. 그래서 바울과 바나바라고 언급 했는데, 그러다 앉음뱅이 고친 루스드라에서는 그 사람들이 또 인물 좋은 바나바를 제우스라고 칭했죠. 그래서 거기에 바나바가 먼저 나왔는데, 예루살렘 공의회에서 또 바나바가 앞서 나오는거예요. 이걸 왜 언급하냐면, 성경 한 구절 한 구절에 숨결이 있다는거예요. 이게 다 큐티 하는데 하나하는 다 소리가 있다는거죠. 이거는 하나님의 연애편지 맞습니다. 정말 놀랍죠?
여러분, 바울이 얼마나 스스로를 절제하고 있는 모습인지 보이십니까? 구원을 위해서 이렇게 자랑질을 하면 안되는거죠. 우리 자신이 중요하지 않아요. 우리의 직분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상황 속에서 주어진 역할이 바뀔수도 있고 거기 순종 하는게 중요해요. 주님도 창조주 주님도 이 땅에 와서 하나님께 죽기까지 십자가에서 순종하는 역할을 맡으셨어요. 그런데 우리는 내가 중요하기 때문에 질서와 상관이 없습니다. 그래서 순종이 안되요. 우리가 항상 가장 많이 하는게 돈 얘기예요. 교회에서 돈거래 하지마라. 목장 초원등에서 늘 처방 합니다. 이것도 눈높이에 맞춰서 해줘야되요. 저 사람은 언제왔나, 새신자인가. 양육은 받았나. 처방은 들을 만 한가? 그래서 바울은 얼마든지 예수 믿어야 의롭게 됩니다. 말 할 수 있지만, 이렇게 조심조심 하는 것이 눈높이에 맞추는 것이예요. 목장만 그러겠습니까? 다 마찬가지죠. 회사나 가정도. 이것이 효과적인 최고의 성령의 돌보심 같아요. 바울을 돌보셔야지 성령이 바울을 돌보셔야지 바울이 다른 사람을 똑같이 돌보지 않겠습니까? 이렇게 눈높이의 절제를 할 수 있는 비결은 구원이 목적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모르면 그냥, 팩트야! 이러면서 나는 할 말은 하겠어! 할 말 다하고 앞으로는 남고 뒤로는 믿져서 구원이 이루어지지 않아요. 그런 성령의 돌보심으로 나를 돌보면 가정을 돌보고 교회를 돌보고 사회를 돌보고 나라를 돌보는 거 같아요. 눈높이에 맞추는 것은 십자가 짐이기 때문에 앞으로는 늘 밑지지만, 뒤로는 남는 장사고 구원이 이루어집니다.
이렇게 한 해 동안 성령의 의논을 하면서, 목장이나 여러 곳에서 각자의 눈높이에서 돌보심을 받고, 돌보는 진정한 성령의 돌보심에 역사가 있으면 좋겠어요.
제가 예전에 입덧으로 힘든 딸에게, 하나도 돌봐주진 않고 입덧도 예민한 애들이 하는데.. 이렇게 했다고 그래요. 전 그것도 모르죠. 근데 사실 입덧을 세게 할수록 아이가 건강하다고 그러다고요. 그 말을 그렇게 바꿨으면 좋았을건데 제가 돌봄이 꽝인거죠. 그래서 제가 돌보지 못하니까 큐티를 시켜서 자신이 자신을 돌보도록 한것같아요. 이 말도 제 위주로 하는 말 맞죠?
늘 이렇게 눈높이를 맞추지 못해요.
적용: 가정이나 회사에서 목장에서, 눈치를 보십니까? 무시를 하십니까? 눈높이를 맞추십니까?
또 눈높이를 맞춘다면, 구원 때문입니까? 열등감 때문입니까?
성령의 돌보심은 눈높이를 맞추고. 두번째는
2 하나님의 심방처럼 우리가 심방을 받고 해야합니다.
하나님의 심방이예요. 두 심방이 있는데, 야고보 심방이 있고 이방의 심방이 있습니다. 첫째, 야고보를 심방하십니다.
13. 말을 마치매 야고보가 대답하여 이르되 형제들아 내 말을 들으라
바나바와 바울이 보고를 마치고 얘기치 못한 야고보를 만납니다. 그리고 야고보는 내 말을 들으라 합니다. 자신이 있는 것 같아요. 베드로는 자신도 어찌할 수 없는 자신의 외식에 대해 애통하며 외식하는 유대주의자들을 형제들아 라고 불렀는데요, 야고보는 또 무슨 죄와 수치가 있어서 애통하며 형제의식을 가지고 형제들아 라고 했을까요?
이런것들을 저는 생각하면서 세월을 보내고 있어요. 항상 우리의 구속사는, 예수님 없는 한 개인은 전적으로 무능하고 부패하다는 것을 늘 생각을 해야 되는거예요. 열 길 물 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속은 모른다고 하지만, 그러나 사람은 대충 알 수 있어요. 왜냐하면, 사람은 전적으로 악하고 음란하기 때문이예요. 그게 백번 맞아요. 대게 인간이란 그저 그렇게 살다가 그렇게 가게 되어 있습니다. 정신의학자 프로이드는, 사람은 실수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 사람이 하는 말과 하나하나는 그 사람의 모든 것을 나타내 주는 바로미터라도 하죠. 그래서 범죄심리학에서 사람을 연구 하면 답이 나온다고 하는 거예요. 국내에 혐오 차별 문제를 깊게 연구하는 김지혜교수가 쓴 책 선량한 차별주의자 에서는 내가 차별하지 않을 가능성은 사실 거의 없다. 거의 없답니다. 이거를 자꾸 간과하고 자꾸 사람을 칭찬하고 사람을 욕하고 이러는 거예요.
그러니까, 사람들은 서로가 기막힌 고정관념을 가지고 있죠. 근데 유대인들이 이것은 상상을 불허하는 고정관념을 가진 거예요. 그러니 지독한 선민의식으로는, 이방 선교가 퍼져나갈 수 가 없습니다. 이 때 예수님의 식구인 동생이 역할을 해주어야 했나봐요. 그러면 이제 야고보가 어떤 사람인가. 갈라디아 2장 보면 기둥 같은 사람이었다고 하잖아요?
그런데 처음에는 그 유대인과 같이 예수님의 형제들은 아무도 예수님을 믿지 않았어요. 예수님 식구들이 왜 모두 안 믿었을까를 제가 참 생각을 많이 해봤어요. 여러분, 그니까 인간이 백프로 죄인이다. 이거는 큐티의 아주 기본이거든요? 우선 성령이 임하지 않았다면, 예수님을 사생아로 볼 거 아닙니까? 그러면 돌로 쳐 죽여야 될 엄마하고 그 형을 보면서 살 때, 말 할 수 없는 수치심으로 저 형 때문에,. 형 때문에 하면서 예수님을 비난하고 무시했겠죠. 게다가 배움도 없고 목수인 예수형이 자기를 메시아라고 하니까, 사람들이 미쳤다고 했어요. 마가복음 3장 21절에.
그러니 형제들이 미친 형을 붙들러 다녔다고 했어요. 그랬더니 33절에는, 또 누가 내 어머니며 동생이냐 하시면서 35절에는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라 하니, 완전 미친 사람 아닙니까? 좀 생각을 해보세요. 예수님은 성령 받지 않고는 알아 볼 수가 없는거예요. 집집마다 말씀을 못 알아들으면 똑같습니다. 이 식구들은 예수님하고 사는 것이 너무 힘들었을 것이기 때문에, 생전에 믿은 사람이 아무도 없어요. 예수님도 살아서 식구들을 어떻게 할 수가 없었어요. 미쳤다는 말만 듣고 사셨어요. 그것이 그런데 지나고보니까 하나님의 경륜이었고 좀처럼 와서 식구들에게 조차도 인정받지 못했던 성자 예수님인데, 성령님이 효과적으로 돌보신거죠. 예수님을.
예수님도 동생들이 뭐라고 했겠습니까? 형이 한게 뭐가 있어? 우리 좀 조용히 살게 좀 내버려둬!! 집에서 부모님이나 잘 돌봐! 형이란 인간 때문에 우리가 얼마나 상처입고 사는지 알아? 형만 메시아면 다야? 그러면서도 초막절에는 이왕 그렇게 하려면 왜 숨어서 해? 나타내고 하지? 이러고 굉장히 기복적으로 자기 형이 짠 하고 나타내주는 것을 바랬어요. 그러니까 이 형을 보니 언제는 메시아라 그러고 언제는 이렇게 숨어야된다 그러고 이러니까, 이야.. 위선자 이기주의자 따로 없네 이러면서 별 소리 다 들었을거 같아요. 악순환이었을 것입니다. 저는 예수님을 미쳤다고 한 한마디로 식구들이 얼마나 예수님을 괴롭혔을까를 생각해보았어요. 그런데 예수님도 살았을 때 형제들이 잘 믿었으면 좋았 겠으나,. 하나님의 경륜은 모르는거예요.. 예수님도 식구들끼리 너무 좋아하고 잘 살았으면 인류가 이렇게 구원받도록 지경이 넓어지기가 힘들지 않았을까? 뭐 이런 생각을 해보는데요.. 그러나 히브리서 5:8 그가 아들이시면서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셨은즉, 자기에게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모델이 되셨다잖아요. 예수님도 고난을 받아서 순종을 배웠다고 하세요.
바로 이게 삼위 하나님의 사역이예요. 성자 하나님이 이렇게 점 처럼 오셔서, 결국 그 고난을 받아냈기 때문에 하나님의 경륜을 이루셨고 이것을 성령님이 효과적으로 돌보신거예요. 그니까 이런 예수님의 역할을 보면서 지금 형제들이 , 식구들이 미쳤다고 해도 여러분 슬퍼하시기 마시기를 바랍니다. 저는 정인이 엄마의 부모들이 다 목사님 가정이라고 하는데, 예수님 가정도 이랬는데, 우리가 어떻게 목사 뭐 아들 딸이 그러냐 그런 말 함부로 하시면 안되는거예요..
예수님도 미쳤다고 그랬는데 식구들이, 마음대로 못하는 거예요. 제 설교가 이해가 안되는 사람들은 그렇게 제 욕을 하는거예요. 베드로가 그렇게 대단한 변론을 해도, 왜 여기서 야고보가 등장했나.. 이걸 생각 해 봐야 하는데, 베드로가 대단한 변론을 해도 최후 판결은, 수석사도 베드로 가지고는 안되는 거예요. 이 때를 위해서 주님은 부활 하시고 고린도전서 15:7 주님이 딱 콕 찝어서 개인적으로 야고보를 찾아가시니까, 주님이 찾아가시니까 단번에 변했어요. 부활의 주님이 찾아가시니까. 이것이 하나님의 심방입니다. 그러니까, 심방도 때가 있는거예요. 예수님이 메시아로 밝혀지고 나서는, 이제 예수님의 식구가 메시아의 식구잖아요? 로얄 페밀리가 됐습니다.
로얄 페밀리로 할 일이 있기 때문에 야고보를 심방하신 것이 하나님의 경륜이라는 거죠. 온 인류의 이방 선교를 위한 법적 한계를 위해서 야고보에게 이 역할을 맡기셨어요. 야고보가 주님을 만나고 나니까 예수님과 어린 시절을 같이 보내고 모든 것을 옆에서 보았다는 것은 막 상상할 수 없는 특권이었어요. 유대인들이 그것을 부적처럼 여기기 때문에 보이는 표적과 기사를 좋아하기 때문에, 그것이 효력을 발휘했어요. 예수님의 동생이라는 것이 효력을 발휘했어요.
그만큼 유대인의 선민의식은 때마다 무너지기가 너무 어려웠는데, 그 때는 야고보가 그렇게 쓰임을 받았어요. 그리고 야고보가 똑똑해서 야고보서도 썼잖아요? 사도 요한의 형제 야고보가 아니죠. (야고보는 순교 했잖아요. 이는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죠) 그때에는 야고보가 쓰였는데, 여전히 우리는 베드로를 예수님의 수제자라고 칭하고 있어요. 그때 그때 맡겨지는 역할에 순종하면 그냥 이것이 정말 눈높이에 늘 맞추는거죠. 이렇게 야고보도 지난 날을 생각할 때 내가 형제가 될 수 없었는데, 나도 너희들하고 똑같이 예수님을 비난했다. 미쳤다고 그랬다 그 얘기를 한거예요. 주님이 만나주셔서 심방 한번 하시면 그 누구도 가능합니다. 야고보의 역할은 어떤 회의가 생산적인 결론에 이르려면, 구성원 모두에게 공증된 의장격인 지도자가 반드시 있어야 함을 보여줍니다. 야고보가 이런 마음으로 나도 너희와 같았다고 형제들아 .. 하니까 이해가 되시죠?
베드로도 야고보도 자랑할 것이 하나도 없었다고요. 다들 이 세상에서 죄인이었을 뿐 이었다는 것을 인식했기 때문에 지금 형제들아.. 하고 공감이 되는 거예요.
제가 지난주에 정인이 엄마가 온다면.. 나눠보라고 했었 잖아요? 우리들교회 성도들 중에서도 너무나 싫다. 그래도 뭐 어쩔 수 없지않냐.. 이런 분들도 많지만, 나는 목장을 안나오겠다. 난 생각하기도 싫어. 그러나 자녀 때문에 식구 때문에 힘들었던 분들은 다들 보내 달라고 난 하겠다고 하셨습니다. 저는 그런 분이 있다는게 너무 진짜 너무 감사하더라고요.. 바로 이것이 형제의식 아니겠습니까?
성 어거스틴도 인육을 먹었던 지존파도, 다들 우리가 믿기 전에는 그야말로 개차반인 인생 아니었습니까? 고재봉은 일가족을 도끼로 살해한 사람이었는데, 예수 믿고 수많은 사람을 주께 인도하고 천국 갔어요. 우리들교회는 옳고 그름으로 좀 안했으면 좋겠는데, 정말 여러분들이 여전히 옳고 그름이 많더라고요.. 한 엄마가 병원에서 아이를 낳았는데요, 그 천사 같은 아이가 성병에 감염되었답니다. 이 엄마는 낳아놓고 병원에서 사라졌대요. 근데 이 아이가 후에 고아원에서 너무 건강해졌답니다. 근데 이 아이의 엄마 보고 어떻게 그럴 수 있냐고 하지마는 저는 그걸 보면서 그 엄마가 낙태하지 않고 열달동안 배아파서 품어서 낳아준 게 얼마나 고마운지. 왜냐하면 성병에 감염되었다면 자기도 성병 이었을거 아니겠습니까? 그러면 너무나 쉽게 낙태하지 않았겠어요? 그러니까, 우리가 아이를 뭐 낳아도 그렇죠. 이렇게 죽일 수도있고 때릴수도 있지만, 최고의 선택은 생명을 낳는거예요. 이거는요 결혼과는 별개의 문제예요. 아이를 낳는 엄마에게는 하나님이 축복을 하신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보이는 것으로 옳고 그름을 열렬히 논하는 것이 바로 예수님을 미쳤다고 하는것과 같죠. 예수님은 미친 사람 아니잖아요. 그런데 이해가 안되니까, 보이는 것으로 예수님이 메시안데 지금 이렇게 미쳤다고 하는거잖아요. 예수님을 가만히 끊고자 해서, 낙태할 뻔 했잖아요. 그러니까 눈 앞에 바라다보는게 다가 아닌거예요. 뱃 속에 정인이처럼 예쁜 아이가 수도 없이 많이 죽어갔고 앞으로도 죽을 예정이예요. 낳아 놓으면 생명의 주인은 하나님이시기에 하나님이 책임 지십니다. 잘 먹고 잘 사는 것이 인생의 목적이 아니예요. 우리들교회도 생 후 2개월 때 고아원 앞에 버려진 집사님이, 고아원에서 돌고 돌고, 돌아서 우리들교회에 왔어요. 이 분은 정말 표적과 기사로 50이 넘어서 서울 법대를 들어갔고, 졸업했고. 근데 많이 아파요. 고아원에 갔는데, 너무 똑똑하니까 굉장히 아플 수 밖에 없어요. 어떻게 그런 사람이 그러겠어요.. 돌보는 사람... 사회에 대해서 적개심이 많을 수 밖에 없어서 왔는데, 나는 이제 그 분이 주님을 만나면, 우리들 교회에선 변하지 않을 사람이 없겠다.. 이렇게 생각을 하고 10년이 넘었는데, 드디어 주님을 만났어요. 그 분도 이제 육이 무너지니까 만나게 되더라고요. 우리는 선한 사람이 없어요. 결국 우리는 천국에서 만나는 사이가 됐습니다. 그런데 그 엄마가, 내가 못 키우겠다고 안 낳았으면 어찌될 뻔 했어요? 생명은 하나님께 속했습니다. 하나님이 심방 한 번 해주시면 구원으로 연결되어서 돌봄을 받고 돌보는 것들이 자연스러워 지는거예요. 성령의 돌보심이 나에게 느껴지면, 나도 남을 돌보게 되어 있거든요. 야고보를 심방하신 주님은,
두번째는 이방인을 심방하십니다.
14. 하나님이 처음으로 이방인 중에서 자기 이름을 위할 백성을 취하시려고 그들을 돌보신 것을 시므온이 말하였으니
베드로도 그렇고 야고보, 나도 그렇지만, 절대로 하나님을 믿을 수 없을 것 이라고 생각했던 이방인들도 (이방인들.. 저주받은 이방인들 아니예요?) 나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심방 한 번 하시니까 나도 구원받았다. 이거예요. 그것이 하나님이 돌보신거라고 한 마디로 야고보가 정의합니다. 여기서 돌보셨다는 단어의 원형 헬라어 에피스케토마이는 히브리어로는 파카드라고 하는데, 이 단어는 너무 중요한 단어가 되서 좀 알려드려요.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돌아보시고 방문하셔서, 그들에게 구원을 배푸시는 이 구원을 나타내는 전문 용어가, 바로 파카드예요. 저의 간증 룻기 1:6 여호와께서 모압 땅에서 자기 백성을 돌보시사 와 같은 단어를 썼어요. 창 21장에도 경수가 끊긴 사라를 돌보셔서 이삭을 낳게 하셨고, 출애굽에도 4장에 에굽에서 탄식하던 백성을 돌보셨어요. 찾아가셨어요. 흑암중에 자기 백성을 돌아보셨어요. 다 같은 단어예요. 절망에서 하나님이 심방 한 번 해주시면, 그냥 구원 해주시는 이 엄청난 표적과 기사잖아요. 근데 이 돌아보신다는게 너무 따듯한 주님의 돌보심의 심방으로 구원이 이뤄진다는거죠. 아프고 힘들 때 이게 그 돌보셨다는 에피스케토마이와 히브리어 파카드라고 했잖아요? 이 에피스케토마이의 기본 의미는 인지, 아닌지. 있는지 없는지 살펴보다 예요. 쉽게 말해 출석체크가 기본 뜻인데요. 이거는 어떤 대상에 대한 관심의 표현 입니다. 관심이 있으니까 살펴보는 것이고요. 가장 확실한 관심의 표현은 직접 찾아가서 함께 있는 것이므로 방문하다의 뜻으로 교회의 심방이 이런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우리의 목장은 기본이 출석체크인거예요. 그리고 방문 해야되요. 카톡으로 하시면 안되요. 줌으로 해야해요. 얼굴과 얼굴로 해서 봐야해요. 아무 말 안해도 되요. 그래서 여러분들이 목장에 출석 체크. 출석 하시면, 출석 하시고 출석체크 하시는거. 이게 목장의 큰 의미예요. 그러면 그 목장에 하나님이 심방 하십니다. 늘 출석만 해도 여러분을 심방 하십니다. 수많은 문제가 해결되어 구속사적인 구원을 해주십니다. 즉 야고보는 베드로가 고넬료 집을 방문한 사건을 하나님이 이방인들을 방문하신 일의 시작으로 해석 해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최고의 돌봄은 하나님의 심방으로 찾아가는 것이고 그것이 구원을 위한 돌봄이예요. 창세기 59:25- 요셉이 또 이스라엘 자손에게 맹세 시켜 이르기를 하나님이 반드시 당신들을 돌보시리니. (파카드) 당신들은 내 해골을 매고 올라가겠다 하라. 내 자녀가 지금은 안 믿어도 내가 죽은 뒤라도 하나님이 반드시 방문해주신다는 것을 믿고 요셉이 지금 유언을 했어요. 창세기 마지막에 그리고 올라가는데 400년 걸렸어요. 그러니까 돌보신다는 것은 시공을 초월해서 구원의 심방이고 약속의 심방이고 그래서 권고하고, 돌아보고, 방문하셨다는 뜻이예요. 돌봄은 심방이예요. 야고보도 이방인도 하나님이 심방 한 번 하시면 기둥 같은 사람이 될 줄을 믿습니다. 올해에는 여러분들이 그러니까 심방 계획을 많이 잡으시기를 바랍니다. Sg 목자님이요 그냥 거기가 평균 나이가 80세니까, 아휴,. 왜 나한테 이렇게 이 분들을 심방하라고 붙여주셨나 했는데, 자기가 그래도 심방을 해야되겠다 생각하니까, 80이 넘으시고 몸도 많이 불편하신 그 (???)집사님 네분이 차를 직접 몰아 원주로 심방을 보내주신거예요. 그랬더니 원주에 사시는 집사님이 목장에 한 번 참석하시고 비대면으로 했기 떄문에 얘기 할 시간이 없었는데 심방 한 번 가셔서 마음을 열게 되셨대요. 청주에 계시는 정 모 집사님도 80세 이셔서 온라인 예배를 못드렸는데, 따님께 부탁해서 함께 드리도록 도와드리라고 했더니 심방갔던 부목사님을 알아보고는 아 저분이 심방 오셨다고 좋아하셨다는거예요. 사람이 나이가 많으나 적으나 이렇게 하나님의 이름을 가지고 가면, 하나님의 심방이 되야 돌봄이 되어 구원으로 연결되는 것이죠. 여기 참고로 이 부목사는, 김태헌 목사예요. 얼굴이 보이니까 내가 이름을 또 언급이 되네..
전부 80이 넘으셨는데, 정말 이거 하나님의 심방 아닌가요? 하나님의 방문 아닌가요? 사역자도 아닌 목자님이, 원주로 청주로 이렇게 심방가겠다고 그러니까, 목원이 또 차를 (80이 넘으신 목원 부부가 같이 동승을 하시고) 진짜 성령의 돌보심 맞습니다.
적용: 여러분은 하나님의 심방이 따듯하게 느껴집니까? 귀찮습니까?
목자의 심방이 즐거우세요? 부담되세요? 마음에 안 든다고 톡방에서 나간적은 없나요?
그래서 성령의 돌보심 세번째는,
3 말씀과 일치해야 합니다.
15. 선지자들의 말씀이 이와 일치하도다 기록된 바
주님은 무엇보다도 말씀으로 우리를 심방하는 것에 일치해야 합니다. 베드로의 간증과 바울과 바나바의 말이나, 즉, 선지자의 말씀이 다 일치한다는 거예요. 우리가 아무리 돌본다고 해도 찾아간다고 해도, 하나님이 심방 하신다고 해도, 최종은 말씀과 일치해야 합니다. 돌보심의 결론은 말씀과 일치하는가 예요. 내가 아무리 도와줘도 말씀과 일치하지 않으면 꽝이예요.
아무리 욕을 해도 말씀과 일치하면 오케이예요. 말씀.. 말씀이 잣대가 되요. 이론적으로 내가 성경을 인정해도 삶에서는 말씀의 인도를 받지 않는다면, 그건 일치하지 않는거예요.
그러면, 어떻게 일치했는가? 그래서 16절-18절 까지를 야고보는 아모스 9장 11절 12절을 인용하면서 그거를 얘기합니다.
16. 이 후에 내가 돌아와서 다윗의 무너진 장막을 다시 지으며 또 그 허물어진 것을 다시 지어 일으키리니 ampndash 이제 바벨론 포로 시대 때,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졌는데, 다시 지을 사람은 다윗의 후손 예수님 인거죠. 그래서 예수님만이 이 퇴락한 성을 지을 수 있는데, 그러면 왜 하나님이 왜 무너진 다윗의 장막을 다시 세우겠다고 했을까요?
17. 이는 그 남은 사람들과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모든 이방인들로 주를 찾게 하려 함이라 하셨으니 ampndash 다윗의 후손 예수 그리스도 메시아를 통하여서 선택된 유대의 남은 자와 또 모든 이방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서라고 하셨죠. 그런데 아모스하고 야고보는 좀 논점이 달라요. 언어가 몇 개 다릅니다. 아모스 9장 11-12: 유대인들이 저주받아 마땅한 애돔에 남은 자들 까지 애돔은 최고로 약속의 민족에서 벗어난 사람들 이잖아요. 에돔에 남은 자들까지 즉 불구대천 원수까지도 내 이름으로 일컷는 만국으로 기업을 얻게 하신다고 되어 있어요. 아모스에서는.
그런데 야고보는 그 본문을 좀 영적으로 해석해서 이방인들 가운데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확장 될 것을 말하는 ampndash 야고보는 구약 히브리 성경이 아니고 헬라어 성경을 인용했어요. 인류의 남은 자, 즉 이방인들이 주를 찾게 하는 것으로 되어 있는데요, 이 얘기는 다윗 시대보다 훨씬 많은 민족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일컬음 받고 있는 것이, 이 퇴락한 장막을 다시 일으키시겠다는 언약이고, 지금 그것이 현실로 이루어진 말씀의 일치라는 것이죠. 교회를 세우신 목적이 유대인만 아니라 모든 이방인들이 주를 찾게 하시기 위함이라고 하셨어요. 이것이 주의 말씀이라고 분명히 밝히시는데,
18. 즉 예로부터 이것을 알게 하시는 주의 말씀이라 함과 같으니라
이것이 아모스는 이 일을 행하시는 여호와의 말씀이라고 하셨고, 야고보는 주의 말씀이라고 썼어요. 주의 말씀이라는 이 주께서 말씀하신다는 현재직설법 동사로 하나님이 항상 현재적으로 말씀하고 계시다는 의미예요. 야고보는, 이방인이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는 것은 어제나 오늘이나 변함없는 진리라는 거예요. 아모스는, 지금 이 시대부터 한 뭐 750년 전의 이야기잖아요.
아모스 얘기나 바울과 바나바 얘기나 다 똑같다는 거예요. 현재에도 어제나 오늘이나 동일하신 진리라는 거죠. 출애굽기 12장에서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으로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에서 나올 때 그 12장 37-8절: 허다한 잡족이 섞여나왔다고 그랬는데, 이것이 바로 그 예전부터, 이방인 또한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을 대상이란걸 보여주죠. 허다한 잡족이라고 그렇게 표현이 되어있어요.
남과 북이 망했어요. 남유다는, BC586 북이스라엘은 BC762년에 망하고 이스라엘 백성이 다 흩어졌잖아요. 그 흩어진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이 우리가 보다시피 지중해 연안으로 다 흩어졌어요. 시간이 갈수록 다 모국어를 잊어버렸어요. 그래서 각자 자기 지방의 언어를 모국어로 쓰고 있는데, 이제 그러다보니 히브리어 성경을 모르는거예요. 그랬는데 그 지중해 연안을 로마가 재패하고 나서 헬라어라는 공용어가 생겼어요. 그래서 구약 성경을 헬라어로 번역해서 읽게 하고자 한 것이 70인역이예요. 그러니까, 이거는 이방인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성경이라는거죠.
바로 이 아모스를 야고보는 히브리어 성경을 인용하지 않고 70인역 성경을 인용했는데, 이것이 바로 야고보가 눈높이를 맞춘 것이란 거죠. 눈높이를 맞춘거예요. 유대인들에게도 구약성경 아모스를 인용했기 떄문에, 예언이 이루어졌다. 말하는거고, 이방인들에게는 헬라어 성경을 써서 아모스에는 유대인을 주인공으로 인류의 구원이 이뤄진다는 것이고 헬라어 성경에는 이방인을 중심으로 전부 다 이루어진다. 지금 비슷한 얘기 같지만, 앞으로 유대인 시대에서 다 흩어져서 나가야 될 거니까, - 우리가 정말 표적과 기사를 보아도, 돌보아줘도 돌봄을 받아도, 중요한건 성경대로인 거예요. 성경대로 일치하지 않으면, 여러분들의 돌봄 다 꽝이예요. 꿔줘도 꽝, 안 꿔줘도 성경대로면 오케이예요. 그러니까 성경대로 하지 않는 나의 열심은 이단인거예요. 이단.
성경대로. 베드로 바나바와 바울 야고보가 바로 이 말을 한것이고, 이것을 야고보가 아모스 성경과 연결 시켰다는 거예요. 항상 우리는 성경으로 얘기해요. 성경으로 얘기하고 나누는데, 우리 목장 같은 공동체가 참 없잖아요.. 그죠. 우리 자기얘기 썰 풀고 고난 얘기 자랑 얘기 이거 않아잖아요. 늘 말씀에 의거해서. 그런데 그것이 어제 또 오늘도 동일하다는 뜻이죠.
적용: 말씀과 일치하기 위해 온라인으로 드리는 모든 예배를 잘 드리고 있나요?
온라인 예배 때 모니터에 열려 있는 화면이 몇 개인가요?
꼭 전체화면을 해서 예배에 집중해 주시길바래요. 모든 것의 결론은 말씀입니다. 성령의 돌보심의 결론도 말씀입니다. 말씀의 결론은 인내입니다. 맨날 같은 결론이예요. 그래서 이제, 공동체 고백은, 우린 늘 간증 들었죠? 부모님이 목사님인데, 군대 갔을 때 두 분 다 이혼하고 제대하기 전에 두 분 다 재혼하신, 이 목사님의 가정 나눔이예요.
얼마 전 오후에 새어머니로부터 연락을 받았는데, 새어머니가 오열을 하셨다는거예요. 아니, 글쎼 재혼까지 해놓고 왜 또 이러시나.. 그랬더니만, 새어머니의 첫마디가 미안해요. 아버지랑 재혼해서.. 그랬다는거예요. 그랬는데, 자초지종을 들어보니까 아버지 목사님께서 이 딸이 너무 보고싶고 손주들도 너무 보고싶은데, 연락은 안되고 그리고 새어머니의 자녀들도 자신과 왠지 모를 벽이 있어 거리감이 있고. 그렇게 요 근래 외로움과 공허함으로 많이 우울해하셨다고 얘기를 해주시는거죠. 그러던 중에 아버지가 새어머니에게 내가 노년의 때에 조강지처를 버린 죗값을 받고 있는 것 같다 라는 말씀을 하셨다고 합니다. 그니까 이 새어머니가 억장이 무너지고 도대체 나에게 어떻게 조강지처 버린 죗값을 받고 있다고 얘기를 할 수 있냐. 그럼 내가 당신에게 형벌 인거냐.. 너무 비참하고 서글프고 억울하고 괴로워서 집을 나와 차 안에서 너무 울다가 하소연할 곳이 없어서 이 아들 목사님께 전화를 했다는 거예요. 위로하고 성령의 돌보심으로 기도를 해 드린 후 전화를 끊었는데, 늦은 밤 새어머니로부터 다시 전화가 왔습니다. 고맙고 미안해요.. 그 사이 또 무슨 일이 있었나 했더니, 새어머니가 제가 감히 상상도 못했던 이야기를 해주는 것이었습니다. 조금 전 유튜브로 김양재 목사님 설교를 들었는데, 가정은 지켜야 하는 것이 맞고. 이혼과 재혼에 대한 값 지불이 있는게 당연한데, 그리고 재혼 가정으로 내가 마땅히 들어야 할 말들 이었는데,. 아버지의 말이 사실 틀맅 말이 하나도 없다 라는 생각이 들었다.. 매번 내 얘기를 잘 들어줘서 고맙고, 내가 참 믿음이 없어 미안하다.. 이렇게 말씀을 해 주셨단거예요. 너무 신기하고 놀라와 새어머니의 이말씀이 굉장한 구원의 고백, 믿음의 고백으로 들려졌습니다. 아버지도, 새어머니도 각자의 자리에서 죄인임을 인정하고 시인하고 가시는구나 라는 생각에 너무나 감격이 되었습니다. 근데 이 새어머니는 집사님이었는데, 재혼을 하신건데 너무 순종적이고 너무 사실은 재혼 하셨지만 잘 하셨고. 그리고 어머니는 재혼하시고 교회를 안 나가신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렇게 그래도 순종적이고 이렇게 자기 일을 열심히 하셨기 때문에, 저는 제 설교가 들렸다고 생각이 되는 거예요. 역할이 각자 다르겠지마는 어떤 역할이 있을지라도 여러분들은 성령의 돌보심으로 심방하셔야 되는거예요. 찾아가셔야 하는거예요. 방문하셔야 하는거예요. 권고 하셔야되는 거예요. 고난이 축복인거. 그런데 친엄마는 잘 사니까, 나는 재혼하고 잘 사는게 참 안 좋은거 같아요. 조금이라도 힘들어야 예수님을 찾게 되는데 정말 우리는 오래 이렇게 아픈 사람들, 다 미운 부모들 많지마는 다 성령의 돌보심으로 이렇게, 가지각종 방법으로 심방을 하시는 한 해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말씀 맺어요.
성령의 돌보심은 그래서 눈높이를 맞추는 것이예요. 정말 영육간에 눈 높이를 맞춰야 해요. 그리고 하나님의 심방인데요, 방문하고 권고하시고 위로하시고 찾아보시고 예.. 백번 나눔해도 한 번 얼굴과 얼굴을 맞대면 하는거. 따라갈수가 없어요. 진짜 힘들 때 주님은 그렇게 찾아가셨어요. 방문하셨어요. 이스라엘이 어려울 때 구속사의 주인공 사라가 아이를 못 낳을 때,. 학대받을 때, 그 때 주님이 찾아가신 것 처럼, 우리도 힘든 사람은 찾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오늘 그 말도 못한 죄인 야고보를 주님이 심방하시니까, 근데 심방도 내가 한 번 찾아간다고 되겠어요? 예수님의 가족들도 아무도 안 믿었잖아요. 때가 되서 그 모든 것이 씨를 뿌리고 있다가 때가 되면 야고보가 한마디로 변하는거죠. 그러니까 이방인도 한 번만 심방하시고 주님의 때가 되면 주님의 경륜에 의한 시간이 되면, 다 달라집니다. 모든것은 말씀과 일치해야 합니다. 어떤 표적과 기사를 보더라도 말씀으로 최종 결론을 내야 합니다. 찬양하고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