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12.20. 주일예배
사도행전 14:8-18
성령의 주목
1. 한 영혼을 주목해야 합니다.
9절. 듣거늘 - 다른 사람들은 안 듣는데 이 사람만 혼자 좋아 주목하여 들음.
구원 받을 만한 믿음 -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통해서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바울의 복음이 믿어진 것.
날 때부터 장애를 가지고 태어남. 전적 무능을 실감하는 환경. 말씀을 듣고 전적으로 부패한 자신을 보고 죄인임을 알게 되는 것은 이것이야말로 기적.
그리고 자기와 같은 죄인도 구원 받을 수 있다는 믿음이 생겨났음. 바울은 앉은뱅이에게서 자기 안에 있는 것과 같은 성령의 기운을 느끼고 그를 주목했음.
가인의 후손. 강하고 담대하고 쓸어버린다는 뜻. 셋의 후손. 연약하다는 뜻인 에노스. 인간의 전적 부패와 전적 무능을 고백하는 이름을 자기 자식에게 붙여준 것. 이름을 겸손하게 짓는 것은 이렇게 성경적인 것. 날마다 에노스를 부르며 죄인됨과 부패함과 연약함을 외치니 옆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음. 이것이 최초의 공예배. 우리도 마찬가지로 내 자신의 연약함을 외치면 내 옆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것.
10절. 네 발로 바로 - 즉각 이 아닌 일직선으로, 곧게 라는 뜻. 완전히 발이 쪼그라든 사람에게 어이 없는 명령을 했음. 그런 사람에게 일어서라고 했는데 즉각 순종했음. 믿겨지지 않는 기적이 일어났음. 펄쩍 뛰어오르며 일어났음. 루스드라는 구약의 배경을 모르기 때문에 보이는 이적으로 전할 수밖에 없는 곳. 때마다 비시디 안디옥, 이고니온, 루스드라의 전도 방법이 다름. 우리는 늘 한계 상황에 다다른 불치병의 한 영혼을 주목해야 함.
큐티기도회 나눔 - 이혼 소송 중 별거 중에 있는 아내를 만나준 목자님.
(적용) 치료 불가의 한 영혼을 주목한 적이 있습니까?
2. 자기 주제를 주목해야 합니다.
11절. 당시 로마의 식민지는 헬라어를 쓸 수 있어야 했음. 너무 놀란 나머지 자기들의 모국어인 루스드라어가 자연히 튀어나왔음. 계시된 말씀이 없으니 눈 앞에서 경험한 하나님의 구원이 정확히 무엇인지 이해할 수 없었음. 기적을 통해서 자신들이 알지도 못하는 성육신의 그림자, 즉 자연세계 안에 새겨진 하나님의 자취를 부분적으로나마 고백한 것처럼 되었음. 루스드라 전설 - 사람의 형상으로 방문한 제우스와 헤르메스. 자신들을 영접하지 않은 사람들을 홍수로 멸망시켰음. 이런 사람들이 자신들을 방문했다고 생각한 루스드라 사람들.
13절. 제우스와 헤르메스를 대접하지 않았다가 큰 홍수로 멸망을 당했다고 하니까 일단 화를 면하고자 일사천리로 일을 진행했음. 이처럼 전자동으로 기복적임. 복을 구하고 화를 피하기 위해 예배하는 것이 사람의 본능. 숨 쉴 틈 없이 우상 숭배를 향해 돌진하는 루스드라 사람들의 모습을 보여줌. 예배 중독자. 이것이 각자 자신의 제우스와 헤르메스를 찾아 끊임없이 방황하는 우리 자신의 모습을 상징하는 것. 사람들은 이 모습이 자기자신의 모습인 줄 모름. 과학만능주의, 예배 중독자가 다 똑같음. 루스드라 사람들이 바울과 바나바를 신들로 단정한 것은 그리스 로마 신화에 등장하는 신들이 다들 사람이나 동물의 모습을 하고 있었기 때문.
14절. 루스드라 주민에게는 바나바와 바울로 순서가 바뀌었음. 멋있는 바나바가 제우스이기에 대머리에 메부리 코라고 하는 바울은 뒤로 밀려서 헤르메스가 되었음. 루스드라 말로 할 때는 무슨 말인지 몰랐던 바울과 바나바도 제사 드리려는 액션을 취하자 자신들을 신으로 추앙하려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음. 나에게 신이라고 하면 '아니에요' 하기가 힘듦. 인간은 전부 다 높아지고 싶은 본능이 있음. 높아졌을 때 옷을 찢기가 참 어려움. 하나님이 받으셔야 할 경배를 대신 받을 때가 있음. 그렇지만 바울과 바나바는 옷을 찢고 그들에게 달려 나가서 그렇게 하지 말라고 소리질렀음.
옷을 찢다 - 근심과 슬픔. 하나님이 받으실 영광을 대신 받을 때는 이런 근심과 슬픔이 있어야 함. 개인적인 슬픔을 넘어서 교회적으로 어떻게 되는가를 생각해야 함. 듣자마자 옷을 즉시 찢었고 이어 소리 지르면서 뛰어 들어서 아니라고 외친 것. 헤롯과 대비. 헤롯도 '이는 신의 소리요 사람의 소리가 아니라'는 칭송을 받았음. 그리고는 벌레 먹어 죽었음.
반면, '내가 그로라'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신성모독으로 여기며 몰아간 대제사장의 모습과는 너무 다른 이야기. 예수가 없는 사람은 적용이 안 됨. 겉으로만 봐서는 분별하기 어려움. 그러니 이 세상의 정치가 이상한 방향으로 가게 되는 것. 세례 요한이 '나는 그의 신발 끈을 메기도 어렵다'고 한 것과는 같은 맥락. 창조주가 피조물인 우리와 같이 낮아지셨기 때문. 사람은 벌레 하나도 만들지 못함. 벌레처럼 낮아졌다는 말로도 주님의 낮아지심을 설명할 수 없음. 주님이 사람이 된 것은, 사람이 마이크가 된 것과 같음. 벌레는 생명이라도 있으니...
무생물급이 된 것과 같은 것. 우리는 마이크처럼 낮아지지 못함. 인간이 아무리 낮아졌다고 해도 주님의 낮아지심과는 비교가 안 됨. 따라가지 못할 하나님의 영광, 겸손에서 비롯되는 그 영광을 사람이 받는다는 것은 옷을 찢어야 할 일인 것. 앉으나 서나 사람은 인정 받기 위해 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님. 조금 인정 받으면 교만해지는 것이 바로 자기 주제를 모르는 것. 전자동으로 하나님께 갈 영광을 가로채고도 인식하지도 못하는 것. 사명이 아니기 때문에 조금만 이루었다 생각하면 딴 생각을 하는 것.
목자 직분을 처음에는 기쁘게 감당하다가 사업이 잘 되고 아이들이 학교 붙으면 내려놓고 싶은 것. 주님의 낮아지심은 모르고 자기도 모르게 기복으로 믿었기 때문에 잘 되면 내려놓고 떠나고 싶은 것. 이것이 자기 주제를 모르는 것. 인생은 사명을 위해서 왔다가 사명 때문에 가야 하는 것. 사람과 짐승의 다른 점. 한결같이 여전한 방식으로 우리는 전도를 해야 하고 배척을 받아야 함. 그러려면 공동체 예배를 한결같이 드려야 하는 것. 그러니 안 믿는 사람을 보면 갑갑하고 답답하고 지겨운 것.
몇 달째 유튜브만 찾아보는 마을님. 우리 어디 가서 살까. 여행은 어디로 갈까. 이루고 싶은 것은 다 떠나는 것임. 막상 가보세요. 여행도 동반자가 중요한 것. 와이프만 있으면 재미있을 것 같아도 한 달, 두 달만 살아도 지루한 것. 사람은 영적이기 때문에 밥만 먹고 살 수 없음. 경치보다 중요한 게 동반자. 마을모임을 인도하는 게 너무 힘든데 이런 마음을 누구에게도 말을 할 수 없다는 것이 힘든 점. 예전에 목사님께 전화드려서 초원모임에서 나눔하는 것이 힘들다고 말씀드린 적이 있는데 처방을 받고도 안 되는 것이 있음. 이 분이 세상을 주목해서 생기는 현상. 왜 그런가 하면 먹을 것이 넉넉하기 때문. 그러나 생짜로 오셔서 마을지기까지 되신 게 웬 은혜인지 모르겠음. 기복적인 마음이 있을 수 있지만 이것을 나눌 수 있어야 믿음이 있는 것. 나누고 얘기하셔야 함.
여전한 방식으로 사는 것이 지루해 보여도 최고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삶인 것. 마을님뿐만 아니라 우리 모든 성도들이 코로나 때문에 너무 떠나고 싶어하심.
사역자만 해도 MT를 몇 번을 갔을 건데 한 번도 못 가고 있음. 우리 다들 과거의 추억 속에 살고 있음.
(적용) 예배는 왜 드리십니까? 자기 주제를 주목하려고입니까? 화를 피하기 위해서입니까? 하나님 자체가 상급이 되기 위해서입니까?
3. 하나님을 주목하는 것입니다.
15절. 전혀 믿지 않는 사람에게 설교하는 바울과 바나바. 루스드라식 설교. '나는 너희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신이 아니다. 너희들과 성정이 똑같다. 잠자고 밥 먹고 감정을 느끼며 연약한 육체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하나님 외에 어떤 대상일지라도 그것을 섬기는 일은 우상 숭배이고 헛된 일이다'
헛된 일 - 무가치하고 망령된 일. 아내를, 남편을, 자식을, 돈을, 명예를, 미모를 섬기는 것은 헛된 일. 남편을 섬기는 것 같아도 남편을 속이는 일. 자식을 섬기는 것 같아도 자식을 속이는 일. 하나님 자리에 놓으니까 날마나 무섭고 두려운 것. 복음은 천지와 그 가운데 만물을 지으신 살아계신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
16절. 인류 전체를 죄 가운데 내버려 두신 것 자체가 하나님의 심판. 그들이 원하는 대로 그들을 죄에 넘기셨는데, 하나님께서 이방인들의 죄를 방임하셨다는 것은 그들의 죄를 허용하셨다는 것이 아니라 즉각적인 죄를 유보하셨다는 말. 그러나 자신을 증언하신 하나님. 비를 내리시고 결실기를 주시고 음식과 기쁨을 주신 분이 하나님. 특별 계시를 접하지 못함으로 인하여 하나님이 방임하신 허망한 삶을 산다고 할지라도 그들 자신에게 책임이 없는 것은 아니라는 말. 왜냐하면 로마서 1장 20절처럼 창세로부터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보여 알려졌으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 했음. 사계절만 봐도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느낄 수 있음. 안 믿는 사람들에게는 이렇게 전해야 함. 수금지화목토천해. 목성과 토성이 400년 만에 만남.
18절. 이렇게 설명을 잘해야 겨우 말릴 수 있음. 바울의 설교는 성공적이었음. 좋은 설교는 구원에 이르는 믿음을 불러 일으키는 설교인데, 이것이 지금 당장 드러나지는 않음. 그러나 지금 당장 자기자신을 숭배하지는 못하게 했음. 이것이 주제가 되어야 함. 내가 숭배의 대상이 된다면 잘못된 설교가 되는 것. 자기 주제를 아는 설교, 알게 하는 설교가 최고의 설교. 설교자에게 초점이 맞춰지지 않는 것.
(적용) 자연 계시와 일반 은총으로 경험한 하나님을 나눠보세요.
예를 들어서, 별을 보고 하나님을 만났다. 좋은 의사를 만나서 병을 고쳐서 하나님을 만났다.
#한 주 동안 어떻게 지냈는가?
공치동:
저번에 눈썹 문신을 하고 나서 라섹수술 검사를 하러 안과를 갔는데
각막 모양이 불안정하게 나와서 4달 뒤에 받기로 했다. 아쉽지만 다음에
기약하면서 받기로 했다. 진로를 정하는 가운데 울산에 계속 있기로 했다.
연애가 잘 안 되는 가운데서도 공동체에 잘 붙어가면서 죄를 끊고 나아가겠다.
홍선호:
이번 주에 기분이 안 좋았다.
병원에 갔다오는데 갑자기 기분이 안 좋아진다. 사단이 틈을 타는 것처럼 말이다.
여태까지 참아왔던 것이 올라오는데 친척, 과거의 상처, 신결혼한 사람에 대한 열등감,
등등 여러가지 생각들이 들어서 너무 화가 나고 월화수요일날 기분이 안 좋고
눈물까지 나게 된다. 하지만 그것이 얼마나 나를 힘들게 하는 것에 대해서 알게 된다.
코로나가 진짜 답답하게 느껴진 것도 그렇지만 그 부분에서 견디고 갈 필요가 있다.
홍성민:
회사를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일하고 토요일 날 보드를 타고 스트레스를 풀고
오늘 주일은 1부 예배 드리다가 중간에 많이 잠들며 많이 쉬었다. 이번 한주도
똑같은 한 주를 보낸 것같고 불안함은 여전하다는 생각이 든다.
서동준:
이번 한주에서도 집에 잘 머무르는 것 같다. 우울이 들기도 했지만 그 부분에서
극복하고 갈 필요가 있다. 이번 주에 과외 선생님이 오시는데 몇 시간 가르치실지 모르겠지만
좋은 선생님이 오셨으면 좋겠다. 검정고시를 치르는 가운데 공부하는 입장에서 천천히 나아가겠다.
#적용질문
공치동:
(적용) 예배는 왜 드리십니까? 자기 주제를 주목하려고입니까? 화를 피하기 위해서입니까? 하나님 자체가 상급이 되기 위해서입니까?
예전에 예배를 드리는 것은 간절해서 드리는 것이지만
지금은 의무 반, 형식적으로 반, 간절함 반이다.
진로를 정하는데 있어서도 마찬가지이고 하나님 자체가
상급이라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는다. 예배 드리는 것이 너무 무뎌지기도 했다.
그래서 그 부분들을 이겨내고 예배 드리는 데 있어서 집중할 필요가 있다.
홍선호:
(적용) 예배는 왜 드리십니까? 자기 주제를 주목하려고입니까? 화를 피하기 위해서입니까? 하나님 자체가 상급이 되기 위해서입니까?
사실 교회를 오는 것도 보이기 위해서 교회를 오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바나바와 바울을 신으로 받아들여지는 백성들처럼 나도 인정받고 싶은 마음이 교회에서
자꾸 들게 된다.
이번 주에 형하고 수요일 날 아침에 싸운 것도 어쩌면 내 자신을 보지 못하고
남이 변하기 위해서 연연하고 판단하고 그러는 것이 너무 싫었고 형이 내가 싫은 부분만
중얼거리고 하는 부분도 너무 싫었다. 결국 연애도 안 되고 그러는 것도 생각하다보니까
내 자신을 못보고 가는 것들을 이제서야 말씀을 듣고 알게 되었다.
홍성민:
(적용) 예배는 왜 드리십니까? 자기 주제를 주목하려고입니까? 화를 피하기 위해서입니까? 하나님 자체가 상급이 되기 위해서입니까?
사실 남을 판단하는 마음이 많고 정죄하는 부분들이 많게 된다.
그 부분을 알게 되면서 내 죄가 무엇인지 알게 된 것 만으로도 좋은 것 같다.
담임 목사님이 말씀하시는 공동체 고백도 왜 이제와서 낙태의 죄를 오픈하는 가에
대해서 이제 말씀하시는지 알 수 없다는 생각과 판단이 자꾸 드는 것이다.
이해할 수 없고 지금도 그렇다.그래도 그 부분들을 알게 되고 인식한 것만으로도
좋다는 생각이 들고 공동체에 잘 붙어나가야 겠다는 생각이 든다.
서동준:
(적용) 예배는 왜 드리십니까? 자기 주제를 주목하려고입니까? 화를 피하기 위해서입니까? 하나님 자체가 상급이 되기 위해서입니까?
어렸을 때 아버지 사건을 겪으면서 너무 힘들었다.
아버지가 나한테 소리를 지르시고 많이 나를 때리시는 모습이 너무 무서웠다.
그래서 하나님도 무서운 분이라고 생각하게 되고 잠이 들면서도
하나님이 내가 원하는 것을 가져가시는 분이라고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선호)
하나님이 원하는 방향으로 나랑 같이 가지 않으실 수 있다.
천천히 생각하면서 편하게 받아들이면서 다른 길이 될 수 있지만
그래도 내가 원하는 방향만 가지 않기를 바라시는 하나님이라는 것을
믿고 가야 하는 것이다.
(치동)
하나님이 상급이기 때문에 우리가 원하는 방향으로 가는 길이 아닐 수 있다.
왜냐하면 우리는 연약하기 때문이다.
<기도제목>
치동: 내가 죄인임이 느껴져 진정한 회개를 할 수 있도록
성민 : 직장생활에 있어 불안해 하지 않고 제가 할일에 집중하면서 한주 보낼 수 있도록
선호-신교제 급하게 생각하지 않고편하게 자유해질 수 있도록
-열등감 분노 생각하지 않고내 주제를 돌아보며 갈 수 있도록
-낙태허용법 통과되지 않고 청원이 채워지고차별금지법 또한 막아주시옵소서
동준: 공부할때 집중하게 해주실 수 있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