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2:22-36
<성령의 설교>
사도행전 1장을 보면 교회 사명을 위해서 성령을 받으리라 하시고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고 하셨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자살한 유다 대신 한 사람 맛디아를 채워 넣는 일이었다. 2장은 오순절 성령 강림을 통해 방언이 임하였다. 막힌 관계가 뚫어지는 언어라 천하각국에서 모인 사람들이 공통의 언어로 다 알아듣게 되었다. 그리고 성령이 임하니까 무식한 베드로가 성령의 설교를 한다. 성령의 설교가 무엇인지 다섯 가지로 살펴보자.
1. 잘 들리게 한다.
베드로의 오순절 설교는 그의 첫 공식적인 설교이다. 하나님의 약속과 성취 그리고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승천을 다루고 있다. 베드로는 예수님께 양육 받은 구속사로 구약성경을 해석하면서 어떻게 유대인들이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께서 그리스도가 되게 하였는지 들으라고 한다.
14절에서 '모든 사람들아, 이스라엘 사람들아, 형제들아 들으라...' 계속 들으라고 한다. 그리고 오늘 22절에서는 이 중에 이스라엘 사람보고 들으라고 한다. 그렇다면 그들에게 어떻게 하면 들리게 할까? 계시록 마지막 말씀처럼 성령에 힘입은 교회가 하는 말을 들으라고 했다. 우리들교회 목장 예배처럼 잘 듣는 훈련을 하면 신뢰를 받아서 잘 들리게 할 것 같다. 성령이 없다면 상대방이 안 듣고 공격을 할 때 늘 분이난다. 하지만 우리는 이런 목장에서 이런 공격을 많이 받았기에 훈련이 되어 있어 자기 죄를 보면서 회사에서나 집에서나 비교적 잘 듣고 잘 들리게 전한다고 생각한다.
적용: 우리는 성령의 설교가 잘 들리는가? 안 들린다면 목사님이 성령의 설교를 하지 못해서? 우리가 듣지 못해서? 그리고 목장에서 아픈 얘기도 잘 하고 싫은 얘기도 잘 듣는가?
2. 잘 살게 한다.
베드로는 이 주제를 예수님의 삶의 통해 설교한다. 22절에서 '너희도 아는 바와 같이...' 로 시작한다. 성령의 설교는 상대방이 아는 것으로 복음을 증거 하는 것이 필요하다. 성령의 설교는 무턱대고 결론을 내리며 내 소리를 높이는 것이 아니라 상대가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접촉점을 찾아서 거기서부터 한 단계씩 설득해 가는 것이다.
베드로에게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하고 회복된 후에 이런 지혜가 생겼다. 어떤 지혜를 주셨는가? 베드로는 더할 것도 뺄 것도 없는 사랑하는 예수님을 증언하면서 그의 입에서 처음 나온 말이 나사렛 예수이다. 예수님은 멸시 받는 동네에서 목수의 아들로 자라셨지만 하나님께서 예수님으로 큰 권능과 기사와 표적을 베풀게 하셨다고 증언을 하셨다. 큰 권능과 기사와 표적이라는 이 세 단어로 결합된 표현은 예수님의 사역에만 쓰였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사역은 하나님에 대한 예수님의 증언이었고, 예수님에 대한 하나님의 증언이었다. 이것을 효과적으로 베드로가 성령으로 증언하였다. 권능의 본질은 하나님의 능력을 보이는 것이고 기사의 효력은 놀라움을 계속 만들어 내는 것이다. 표적의 목적은 보이는 것보다 영적 진리에 있다. 예수님의 사역에만 쓰였던 이 단어는 주님이 승천하시고 성령의 운행하심으로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역사하고 계신다.
적용: 우리의 삶을 통해 모두가 알고 있는 하나님의 권능과 기사와 표적은 무엇인가? 즉, 베드로처럼 예수님만 전하면 능력과 놀라움과 말씀의 표적을 보인 일이 있는가?
3. 잘 죽게 한다.
예수님처럼 권능과 기사와 표적으로 잘 산다고 하나님의 능력을 세상이 인정해 주는 것이 아니다. 근본 하나님과 본체이신 성자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사랑을 알기에 철저하게 성부 하나님의 의지에 복종하셨다. 아버지가 뜻이 있어 정하시고 미리아시고 아들이 죽는데 내어 주셨다. 하나님 아버지의 뜻 다 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얼마나 무서운 고독을 경험했겠는가? 이 고독은 누구도 대신해 줄 수 없지만 이 일을 성령님이 도와주신다고 성령의 설교를 하고 있다. 이 세상에 아무도 나를 도와주지 않을 것 같아도 성령님은 나를 도우신다. 그런데 그들은 권능을 행하는 예수님을 왜 그렇게 죽이고자 했을 까? 예수님은 실제 삶으로 설교하고 성도들이 따르니 따라갈 수 없는 지도층들은 하는 일이 예수님을 죽이는 것 밖에 길이 없다고 생각한다. 우리도 혼자 정직하고 싶다. 공동체를 통한 정직은 싫다. 삶이 연결 되서 듣기가 싫다. 그런데 창조주이신 예수님은 이 모든 것을 아시고도 하나님의 정하신 뜻대로 죽으셨다. 우리가 알면서도 죽어야 할 일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우리들 교회 수많은 간증은 다 죽어지는 얘기이다. 정말 잘 사는 것은 내가 삶에서 정말 예수님처럼 십자가에 못 박혀 사는 것이다. 죽은 자도 살리시는 능력을 가지신 예수님이 세상을 위해 하신 것을 십자가를 지신 일이다. 진정한 능력은 자기의 똑똑함과 대단함을 보이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고, 인내하고, 희생하며 죽어지는 것이다. 여기서 말씀의 표적을 본다. 이 땅의 질서를 통해 우리를 훈련시키는데 여기서 잘 사는 것은 죽는 것이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 결국 이런 사람에게 리더쉽이 가게 되어 있다. 그런데 성령이 임하지 않으면 절대 죽을 수가 없다. 우리는 예수님이 죽어주신 성령의 설교가 날마다 필요하다. 자기 자신을 직면하는 것이 너무 힘들지만 이것이 죽는 길이다.
적용: 내가 하나님의 정하신 뜻을 알고도 죽어지지 못하고 고집을 부리는 것은 무엇인가?
4. 다시 살아나게 한다.
24절 '하나님께서 사망의 고통에서 살리셨으니 이는 그가 사망에 매여 있을 수 없었음이라'
고통은 죽이기 위한 사냥꾼의 덫이라는 뜻이 있다. 이 땅에서 가장 큰 고통은 사망이다. 거대한 공동묘지가 입을 쩍 벌리고 있으니 노력할 필요 없이 모두가 가는 넓은 길의 사망의 덫에서 풀릴 사람은 아무도 없다. 풀어 살리실 분은 오직 하나님 밖에 없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부활은 사망에 대한 승리의 선언이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부활을 다윗의 부활신앙으로 연결시킨다.
25절 '다윗이 그를 가리켜 이르되 내가 항상 내 앞에 계신 주를 뵈었음이며, 나로 요동하지 않게 하기 위하여 그가 내 우편에 계시도다' 에서 시편 16:8의 '다윗이 항상 내 앞에 계신 주를 뵈었다'의 인용이다. 다윗은 10대 때 처음에는 사울의 명령을 따라서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거인 골리앗을 물리쳤다. 그러나 사울왕의 시기로 30살 까지 갖은 고생을 하였다. 그런데 왕이 되서 유혹에 넘어져 간음, 살인 등의 죄를 짓기도 하였다. 결국 분수령 적인 회개도 하였다. 그러나 이후에도 사랑하는 아들이 반역하며 울면서 맨발로 피신까지 가는 수치와 조롱도 겪었다. 특히 아들과의 전쟁은 그야말로 이길 수도 질 수도 없는 전쟁이다. 그런데 여기서 항상 자기 앞에 계신 주를 보았다고 한다. 이게 무슨 말인가? 다윗의 인생 속에 항상 하나님이 도와주신 것이 맞지만 눈에 넣어도 안 아플 아들 압살롬의 반역 때 항상 내 앞에 계신 주를 보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바로 하나님 자체가 상급임을 고백하는 것이다. 다윗의 이런 구속사의 정점의 믿음이 되기까지는 사실 마지막에 가장 사랑하는 아들 압살롬이 가장 수고를 했다고 보여 진다. 죽일 수도, 죽을 수도 없는 식구들이 있는가? 항상 말씀과 공동체의 간증을 보고 듣고 있으면 어느 날 육신의 둑이 터지는 경험을 할 것이다.
베드로 역시도 부족해도 때마다 주를 바라보았다. 예수님의 삶을 목격하고도 세 번이나 부인했지만 갈릴리 바닷가에서 주님을 사랑한다고 세 번 고백하게 하시고 회복했다. 이 후 성령의 설교를 하고 복음을 전하다가 감옥을 갇히는 등 수많은 시련을 겪었다. 그리고 네로 황제 때 순교한다. 우리가 성령 충만하다가도 육신의 근심이 충만할 수 있다. 소망이 가득 차다가도 절망이 넘칠 수 있다. 그때마다 예수를 바라보면 다시 살아날 것이다.
25절에서 '나', 그리고 27절에서 '거룩한 자'는 누구인가? 다윗의 시 이니까 다윗인가?
다윗의 묘가 오늘까지 우리 중에 있고 한다(30절). 이 얘기는 다윗 자신의 이야기가 아니다. 다윗은 예수그리스도가 죽어 장사된 후에 무덤에서의 부활을 1000년 전에 미리 본 것이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달리 살리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미리 말한 것이다. 즉, 시편에도 그리스도에 대한 예언이 이미 언급되어 있다. 그 예언이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의해 성취되었다. 이것을 다윗을 미리 봤다는 것이다. 베드로가 목격한 부활의 주님은 다윗이 미리 본 그리스도의 주님과 똑같았다. 미리 보는 죽음과 약속과 부활을 위해 미리 깨달은 성경으로 이 모든 것을 깨닫고 설교하고 전하는 것은 얼마나 성령의 설교 인지 모른다. 다윗이 알았고, 베드로가 알았고, 내가 알아서 내 속의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시고 우리가 다 부활의 증인이다. 제자들과 베드로는 지금까지 부활의 주님을 육신적으로 보았지만 그 능력을 몰랐다. 그런데 오순절 성령강림으로 그 때 이 능력이 나타났고 오직 교회를 위해 주셨다. 나의 모든 사건은 성경에 있었고 지금도 있고 앞으로도 있을 것이다. 이것을 미리 봐야 하는 것이 성령의 설교 핵심이다.
적용: 나는 어떠한 좌절과 절망 가운데서도 항상 내 앞에 계신 주님을 보며 요동하지 않고 다시 살아나고 있는가? 주님만이 상급인가? 세상이 상급인가?
5. 성령의 설교는 높아지게 한다.
베드로는 시편 110:1 인용해서 부활하신 주님을 하나님이 구세주로 통치자로 오른손으로 높이셨다고 한다. 여기서 성부, 성자, 성령 삼위 하나님이 다 나온다. 성령의 설교의 핵심이다. 내가 잘살면 성부, 성자, 성령이 보좌위에서 높이신다는 것이다. 110편은 다윗 얘기는 아니다. 다윗의 무덤은 여전히 있고 몸은 썩은 지 오래 됐다. 그렇다면 다윗은 누구를 주라고 불렀는가? 첫 번째 주는 하나님이고 두 번째 주는 예수님이다. 다윗은 하나님 우편에 앉을 그를 내 주라고 불렀다. 그의 원수를 자기 발아래 완전 굴복시킬 때 까지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우편에 앉게 하실 것이라고 하신다. 다윗은 권능을 행하시고 십자가에 죽으셨다가 부활하시고 하늘에 오셔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계시다가 다시 오셔서 사탄을 완전 정복하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얘기를 시편 110에서 얘기하고 있다. 시편 110편을 인생 후반부에 기록하였기에 다윗도 갖은 고난 다 겪고 메시아 이신 예수님을 알아본 것이다. 죽어지고 십자가 겪지 않으면 나에게 예수님이 그리스도, 메시아가 될 수 없다. 그러나 메시아를 알아보고 내게서 생명의 역사가 시작되어 보고 듣는 자보다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면 하나님은 저절로 높이신다. 그래서 우리의 인생도 무너진 후에 거룩하게 살고자 할 때 육이 무너지고 영이 살아나는 것은 인생 최고의 축복이고 높아짐이다.
무식했던 베드로는 시편과 요엘서를 자유자재로 인용하면서 가장 중요한 신약이슈인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과 부활을 성경으로 꿰면서 너무나 조직적이고 말씀에 근거한 신학적 교리의 체계를 성령으로 설교하고 있다. 이 본문에서 설교를 보면서 누가 무식한 베드로라고 할 수 있는가? 성경을 잘 알면 우리가 무식할 수 없다. 우리 모두 성령 받아서 성령의 설교와 말씀만 전하게 될 때 내 삶과 내 말에 군더더기가 없어지고 집, 교회, 성령의 역사가 이루어 질 것이다.
<기도제목>
이소정
1. 큐티할 때 성령의 도우심을 간구하도록.
2. 치과치료 잘 받도록
3. 이직의 인도하심
이소라
1. 교회정착에 대해서 하나님의 생각을 기도하고 결정할 수 있도록
신정화
1. 가족구원
2. 하나님의 시선으로 나를 바라볼 수 있기를
3. 사람들의 마음을 혼자 상상하기보다 잘 묻고 들을 수 있는 힘주시기를
박재인
1. 성령이 충만하여 소망 가운데 살아가도록
2. 조건 없는 사랑 베풀도록
3. 하나님의 지혜로 주어진 과제들 수행할 수 있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