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왕기상 22:29-40
<말씀과 같이 되었더라>
흉한 말씀도 길한 말씀도 여호와의 말씀이면 믿어도 안 믿어도 그대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날마다 말씀을 읽고 묵상하고 적용하려는 것은 이 세상에서 가장 잘하는 일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이 있다는 것은 천하를 얻은 것과 같다. 그러나 교회를 다니면서도 천하를 가지지 못한 사람이 너무 많다. 안 듣고 안 들으니 참을 만큼 참으신 하나님께서는 예고하신 아합을 심판하신다. 말씀과 같이 되었더라 의 심판에 대해서 생각해보자.
1. 변장을 해도 말씀과 같이 되었다.
아합은 세력+돈이라도 자기 생각과 중심성이 강하니 듣지 않는다. 자기생각에 이미 두 차례나 아람과의 전쟁에서 이겼고, 백만 군대의 막강한 군사력을 갖춘 여호사밧이 자신을 지지한다. 남, 북이 연합했으니 명분까지 있어 보인다. 그러니 아무리 생각해도 미가야를 통한 하나님의 경고가 들리지 않는다. 그런데 이렇게 명분이 있어도 하나님이 싸우지 말라는 싸움은 하지 말아야 한다. 그 이유는 아합의 욕심으로 올라갔기 때문이다. 세상은 욕심이 전공이기에 이런 것들을 분별하지 못한다. 아합의 마지막이 다가오는 것만큼 북이스라엘의 왕인 아합의 이름은 언급은 안 되고 남유다의 왕인 여호사밧만이 언급이 된다. 31절에는 아람 왕, 이스라엘 왕 이름 없이 불리는 것처럼 믿는 아합이 이방의 왕과 똑같이 여겨진다. 이 말은 하나님은 마지막까지도 아합에게서 눈을 떼지 않으시고 네가 이방의 왕과 똑같이 그러면 안 된다 메시지를 계속 날리시고 계신다. 이스라엘은 여호와의 말씀대로 결정해야 되는 나라이다. 모든 조건을 갖춘 것 같아도 마지막 하나님의 sign이 없으면 안해야 된다는 것을 가르치신다. 그래서 이 전쟁을 치르게 하신다. 문제는 아합은 들을 마음이 없다. 듣는 것은 행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듣는 것이 쉬운 것 같아도 가장 어렵다.
아합은 물었지만 듣지 않고 끈질기게 자기 고집대로 나가려고 하는 방법은 사기치고 변장을 해서 전쟁터에 가는 것이다. 미가야의 예언이 걸리기 때문이다. 인생의 모든 것이 두렵다. 거짓의 영이 욕심에 의해 들어오게 된다. 아합은 여호사밧이나 벤하닷 만이 죽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여호사밧에게 왕복을 입으라고 한다. 여호사밧이 꾀를 못 읽어서 아합의 왕복을 입었을 까? 영적인 그가 아합에게 끌려가다보니 이제 와서 전쟁 못하겠다 할 수 없고, 내 백성은 네 백성, 운명공동체를 얘기 했으니 안 나갈 수 없다. 아합이 전력에 대해 분별이 안 된다. 그래도 묻고자 하는 여호사밧을 하나님께서 불쌍히 여기셨다.
우리는 이기기 위해 아비마귀에게서 난 사람이 거짓의 영으로 무엇인들 변장을 못하겠는가? 서로 속이는데 다 넘어왔다. 오직 말씀으로 정공법으로 나가야 한다. 우리가 살길은 정공법이다. 변장한다고 될 일이 아니다.
적용: 여러분이 이기기 위해 변장는 것이 무엇인가?
2. 병거를 의지해도 말씀과 같이 되었다.
아합은 무엇이 그렇게 자신이 있었을 까? 아합이 죽기 직전인데 눈에 띄는 단어가 있다. 바로 병거이다. 그 당시 병거는 지금의 미사일이나 탱크정도 되는 최고의 무기였다. 아람왕은 다룰줄 아는 32명의 지휘관에게 명령을 내리면서 이스라엘 왕만 죽이라고 한다. 이 사람들은 특공대이다. 아합이 끝까지 병거를 하나님 보다 더 높이 놓았지만, 병거를 자유자재로 다루는 지휘관들이 있었다. 병거의 노련한 지휘관에 의해서 죽은 것도 아니다. 마지막까지 아합은 병거를 하나님 자리에 놓은 것이 가장 큰 죄이다. 그동안의 실수는 아합의 겸비함으로 용서받았으나 전쟁 없는 동안 회개한 것이 아니라 끝까지 믿은 것이 병거이다. 아합은 결국 병거가 최고라는 사탄의 꾐에 넘어간다. 죽기 직전까지 병거 얘기만 나온다. 아합은 그릇된 긍휼로 벤하닷을 놓아주었기 때문에 벤하닷에 의해 죽는다. 사탄을 우습게 여기면 사탄의 밥이 된다. 그대와 나는 형제라고 하면서 결국 죽임을 당한다. 사람은 믿음의 대상이 아니다.
적용: 우리가 의지하며 자다가도 부르는 병거는 무엇인가? 죽기직전까지도 못 내려놓는 병거는 무엇인가?
대단한 장수들이 모두 왕복을 입은 여호사밧에게 달려오자 결국 소리를 지른다. 하나님께서 주여 라는 한마디에 듣고 지켜주셨다. 그런데 아합은 주여 라는 말 한마디 안한다. 이제는 우상을 섬긴다는 것조차 깨닫지 못할 정도로 부유해 졌다. 하나님 부르는 것을 잊어버렸다.
적용: 우리는 급할 때 무슨 소리를 지르겠는가?
3.무심코 당한 일도 하나님 말씀과 같이 되었다.
병거는 화살을 막기 위한 보호 장치였기에 솔기(가슴 부분)를 맞출 확률은 0% 이지만 아합은 이 화살에 의해 죽는다. 이 모든 것이 우연히 일어난 일인가? 하나님의 흠이 없는 완벽한 셋팅이다. 그 피가 병거 바닥에 고였다는데 아합의 비참한 모습을 보여준다. 그렇지만 화살을 맞으면서도 강퍅한 마음에 회개가 안 된다.
결국 아합은 나가지 말아야 할 전쟁에 나가서 결국 죽는다. 아합의 출전이 사람들에게 많은 고통을 주었을 것이다. 전쟁은 아합의 죽음을 위한 것 같다. 아합이 죽으니 백성들이 평화롭게 귀환하는 상황을 보여준다. 이미 미가야에서 예언한 일이다. 아합이 죽으니 전부다 본향으로 돌아온다. 내가 죽어서 다른 사람이 평안하게 인생이 되면 안 된다. 한 사람이 죽어서 열매 맺는 것과 전혀 다르다 .내가 죽으니 평안은 내가 저사람 때문에 죽어주는 것과는 다르다.
적용: 우연히, 무심코, 재수가 없어 만났다고 아직도 원망하는가? 아니면 이것은 완벽한 하나님의 성실하심이라고 생각하는가?
4. 개들이 피를 핥아도 말씀과 같이 되었다.
아합의 시신이 사마리아로 돌아온다. 전쟁에서 최대의 전리품은 적국의 왕이나 장수의 시신이었기에 아합이 왕복을 입고 있었으면 시신이 돌아오지 못했을 것이다. 아합만 심판하시고 이스라엘은 지키셨다. 말씀대로 된 것이 대박 맞은 인생이다. 내가 믿기만 하면 하나님께서 해주시는게 있다. 창기들이 목욕하는 것은 신전에서 매춘행위를 하던 사람들이 목욕하던 장소이다. 결국 아합의 시신이 그곳에서 씻기고 피가 개들이 핥아먹는다는 하나님의 말씀과 같이 되었다. 모두가 사실 그대로 이루어 졌다.
아합은 아버지 오므리왕조 부터 최고의 번영을 경험했다. 최고의 정치를 잘한 왕이다. 그런데 아합의 숱한 죄악이 6장에 걸쳐서 나오는데 그 많은 아합의 죄악이 쭉 나오는데 그 많은 아합의 죄악 중 치적은 39절 딱 한줄 나온다. 하나님과 인간의 평가는 매우 다르다. 그가 행한 일은 상아궁 건축 밖에 없다.
40절 '조상들과 함께 잤다'에서 천국에 갔다라고 들릴 수 있는데 생각해 보면 이스라엘 왕중 나답 등 조상들과 함께 잤다는 내용은 없다. 무엇을 뜻하는가? 그나마 아합은 가치관, 근본이 다르기 때문이 아닐까? 이방 왕들은 왕으로써 죄책감이 전혀 없다. 가지고 싶은거 다 가지고 죽이고 싶으면 다 죽이면 된다. 그런데 아합은 미가야를 미워하지만 흉한 일을 데려와서 듣는다. 그리고 매일 묻는다. 나봇 사건 때에도 말씀 때문에 근심하고 답답해한다. 엘리야의 사건 때 바알 선지자들을 죽여도 가만히 있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벤하닷 전쟁 때도 결국 도와주셨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하나님 나라를 더 잘사는 모습을 보여주는데 아합만 잘사니 안 된다. 사람이 부할수록 거짓 아비마귀에 있기에 더 힘들다. 하나님 나라의 정체성을 하려해도 너무 오래 걸린다. 돈과 권세 때문에 안 된다. 하나님 나라는 구별된 것인데 안 된다. 하나님 가치관으로 사는게 너무 어렵다.
아합은 끝없이 야단맞는다. 돈, 권세가 많으니 안 들린다. 우리는 그 길을 가면 안 된다는 역할모델을 한다. 우리는 성경을 옳고 그름만 보니 적용이 안 된다.
우리가 아합의 입장이라면 이렇게 고민할 수 있었을 까?
하나님께서는 아합이 돌아오길 원하시기 때문에 계속 지켜보신다. 마지막에 애국을 하고 회개를 하지 않았을 까? 그래서 조상들과 같이 잠들지 않았을 까?
적용: 그래도 내가 이 땅에서 예수 믿는 것이 최고라고 생각하는가?
<기도제목>
이소정
1. 이직 인도하심
2. 치과치료 잘 받을 수 있도록
3. 부모님 영육간의 건강
신정화
1. 가족구원
2. 진심으로 사랑하는 마음을 가질 수 있도록
이소라
1.여행하면서 하나님의 위대함을 체험하는 시간이 되기를.가족 모두 안전하게 다녀오기를
박재인
1. 조건 없는 사랑 베풀도록
2. 초등부 아이들에게 말씀이 잘 전달되도록 풍성한 나눔 할 수 있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