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말씀 요약
살다보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들이 있다. 오늘 말씀의 발람과 발락의 모습이 우리 모두에게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내가 하나님의 말씀이 임함에도 진노를 면치 못하는 발람 같지 않을까. 그 뒤에 숨어서 내 생각을 말하고 싶고, 하나님의 뜻보다는 내 생각대로 살고 싶은 모습이 있다. 하나님께서 내 입에 주신 말씀만 전하면 되는데 우리는 우리 생각을 더하고 싶다. 그리고 하나님 말씀과 상관없는 삶을 살고 싶을 때도 있다.
민수기 22-24장 말씀은 모압왕 발락과 거짓 선지자 발람에 관한 이야기이다.
발람을 선지자, 술사, 복술가라고도 한다. 발람이 분명히 하나님을 알고 있는 것 같은데 자기가 아는 여러 신 중에 하나로 하나님을 알았다, 섬기는 방법도 이방신을 섬기는 것과 같은 방법으로 섬기고 있다. 그래서 거짓 선지자, 술사라고 하는 것이다.
민수기 22장 3절에 발락은 이스라엘 백성이 많으므로 심히 두려워했기 때문에 발람을 불렀다고 한다. 힘으로는 이길 수 없다고 생각하니 저주로 유명한 술사 발람을 부른 것이다. 그를 고용해서 이스라엘을 저주하려고 했다. 하지만 하나님은 발람과 발락의 뜻과 달리 이스라엘 백성에게 저주가 아닌 축복의 말씀을 받게 하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두 사람은 끝까지 이스라엘을 곤경에 빠뜨리고, 모압 여인들과 음행하게 하여서 하나님의 진노를 받고 자기들도 저주를 받는 인생이 되었다. 저와 여러분이 이런 모습일 수 있다. 왜냐하면 말씀이 임하는 공동체에 우리가 있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임한 말씀과 상관없이 축복이 아니라 저주, 하나님의 진노로 끝나는 인생이 될 수 있다. 거듭된 경고에도 불구하고 탐욕에 이끌려서 모압 땅까지 온 발람과 이스라엘을 저주하려고 했던 발락의 모습을 보면서 우리가 피해야 되는 우리의 모습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이 진짜 내게 임한 말씀이 되기 위해서 피해야 될 것은 무엇일까?
첫째, 나를 위해 제단을 쌓는 것을 피해야 한다.
1 발람이 발락에게 이르되 나를 위하여 여기 제단 일곱을 쌓고 거기 수송아지 일곱 마리와 숫양 일곱 마리를 준비하소서 하매
2 발락이 발람의 말대로 준비한 후에 발락과 발람이 제단에 수송아지와 숫양을 드리니라
3 발람이 발락에게 이르되 당신의 번제물 곁에 서소서 나는 저리로 가리이다 여호와께서 혹시 오셔서 나를 만나시리니 그가 내게 지시하시는 것은 다 당신에게 알리리이다 하고 언덕길로 가니
모압왕 발락은 이스라엘이 아모리에게 행한 것을 보았다. 그 전쟁에 대한 소식을 들었다.(민수기22장) 자기들도 두려워하고 대단하게 여기던 나라들이 어떻게 이스라엘에게 모조리 당할 수가 있는가. 두려움이 생겼다. 그러나 그 두려움 앞에서 전쟁을 주관하신 하나님을 바라보고 그 분에게 무릎을 꿇어야 되는데 발락과 발람은 이것을 시험거리로만 생각했다. 그래서 지금 곤경에 처한 것이다. 우리의 모습이 그럴 수 있다. 우리도 목사님과 성도님들의 놀라운 간증을 들으면서 ‘그런데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이 있냐’고 생각하며 듣는다면 오늘 이 발람과 발락의 모습이 우리 안에 있는 것이다. 그런 대단한 간증을 듣고도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경외하고 무릎을 꿇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분노하고 생색이 나고 마음에 시험거리가 된다면 발락과 같은 믿음의 소유자인 것을 보아야 한다.
그들이 겨우 생각해낸 것이라고는 미디안 장로들의 조언을 통해, 브올의 아들 발람을 불러서 이스라엘을 저주하려는 것이다. 발람도 이것을 하나님이 막으시는 것을 이미 알았다. 그러나 끊임없는 물질의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나귀를 타고 출발했다. 하나님의 사자가 나타나서 나귀가 길을 벗어나고 난리를 부렸다. 하지만 발람은 하나님의 사자를 보지 못하고 나귀를 채찍질하고 주저앉은 나귀를 때리기까지 한다. 나귀는 도리어 사람의 말을 하며 발람에게 따지기에 이르렀다.
무언가 막으시는 일이 있다. 내 인생에 계속해서 하나님이 막으시는 것 같은 사건들이 있다. 그럴 때 우리는 ‘하나님이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는 것을 분명히 깨달아야 한다.
그런데도 여기서 철저히 나를 위한 제단을 쌓기 위해서 가게 된다면 하나님의 진노를 피할 길이 없게 된다.
예배 드리는 것이 힘든가? 힘들 ‘때’도 있고 또 예배드리기 힘든 ‘교회’도 있다고 말씀하신다. 그런데 우리들교회같은 공동체에서는 은혜받는 사람들은 예배 드리는 것이 힘든 일은 아니다. 우리를 힘들게 하는 것이 예배 자체가 아니다. 그런데 예배를 힘들게 느낄 때가 있다. 그 이유는 예배의 결론이 결국 이타적인 삶에 있는 것인데, 우리 힘든 가족들, 힘든 사람들에게 적용하는 것으로 나아가는 것이 결론이고,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에 그 것을 생각하면서 예배를 드리면 힘들다고 느끼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나를 위한 제단을 쌓는 것으로 간다면 발락과 발람과 같이 하나님의 진노가 기다린다고 말씀하신다. 하나님의 전을 세운 솔로몬조차 하나님의 뜻을 벗어난 수고는 헛되고, 헛된 것이라고 시편127편에서 고백하고 있다. 그런데 우리는 여전히 뭔가 쌓고 싶은 것이 있는 것을 보게 된다. 인간의 욕망은 끝이 없어서 구멍 난 항아리에 물을 붓는 것 같이 수고하지만 그렇게 물을 붓다보면 ‘내가 무엇을 하고 있지?’ 라는 생각이 드는 것이 우리 인생이다. 스펙을 쌓고, 결혼과 일을 통해서 나의 만족과 행복, 물질의 풍요를 쌓는 데만 정신이 팔려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갖고 계신 원래 목적을 잊어버린다. 그렇게 쌓다보니까 무너지는 때가 있다. 무너지는 순간마다 힘들었지만 ‘이것이 내 인생의 목적이 아니었구나. 하나님이 나를 위해서 이렇게 일하셨구나’를 깨닫게 되었다.
지금 이스라엘은 승리를 계속 거듭해오던 때였다. 승리한다고 생각할 때, 발람의 사건과 같은 위기가 온다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어떤 한 경계점에 이를 때마다 우리를(하나님은 승리를 얻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한 단계 성장시키기 위해서 흔드는 사건을 허락하신다. 나를 흔드는 사건 가운데 있다면 이것은 철저히 우리를 위한 영적 훈련의 때라는 것을 믿어야 한다. 하나님께서 나를 성정시키시려는 것임을 믿어야 한다.
우리는 말씀이 임하는 공동체, 말씀으로 인생을 해석해주는 공동체에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 하지만 가족의 손에 이끌려서 억지로 이 자리에 앉아 있기 때문에, 또는 오랫동안 우리들교회 말씀을 들어왔지만 이제는 너무나 익숙해져서 등의 이유로 말씀이 하나님의 음성으로 들리지 않거나 나와 상관없는 이야기로 듣는다면 우리가 결국에는 발락과 발람과 같은 인생이 되고 말 것이라고 엄중히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나를 위한 예배인 것이다.
아까도 말했듯이 발람이 하나님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것에는 전혀 익숙해보이지 않는 서투른 모습이다. 3절에 ‘여호와께서 혹시 오셔서’ 라고 하는 것은 발람이 하나님을 알고 있을지 몰라도 하나님과 제대로 의사소통을 해본 경험이 없다는 반증이다. 그냥 복이나 저주를 빌어봤지만 하나님을 이방신 중의 하나로 생각하고 하나님과 제대로 인격적인 교제가 이뤄지고 있는 언약관계의 백성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제사를 주신 이유도 하나님과 화목 관계를 이루시기 위해서였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가 오셔야 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내 죄가 드러나야 되고, 대속제물을 통해서 우리의 죄가 사해지는 예배를 드려야 된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때마다 어떤 영적인 훈련(부흥회, 집회 몇 번)을 받으면 된다고 생각하는 게 있다. 그런 놀라운 영적 경험만으로 하나님과 만나기 위한 충분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발람처럼 이방신을 대하듯 하나님을 대하고 있는 모습이다. 나를 도와주시는 이방신의 하나처럼 여기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에게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주시면서까지 우리와 인격적인 관계를 맺고 가시기 원했던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
우리들교회에 와서 매일매일 말씀 보는 것이 얼마나 귀한지 조금씩 알게 되었다. 주님은 매일매일 인격적으로 다른 모습으로 나에게 오셔서 말씀하시고 내 죄에 대해서 회개하기 원하신다. 그러나 하나님과 나 사이에 막힌 담을 허물가고 계신 그 하나님의 뜻을 우리가 알지 못했다. 말씀으로 해석해주고, 섬겨주는 공동체가 없었기 때문이다.
나를위한 예배를 드리게 되면 목적을 잃어버린다.
우리가 우리 갈 길만 보고 우리의 맹목적인 제단을 쌓다보면 결국에는 인생이 맹목적으로 변해버린다. 발람이 그랬던 것처럼 길을 잃어버린다. 무엇을 위해서 결혼하고, 무엇을 위해 내가 살아가는지를 매순간 돌아보지 않으면, 마지막 순간이 되어서야 ‘내가 왜 이렇게 살았지?’ 라고 그때 후회하게 될 것이다. 그 때는 이미 늦은 것이다. 발락처럼 다 잃어버리게 된다.
하나님은 우리 인생, 결혼의 목적을, 이유를 이야기 해주실 있는 수많은 대안 중에 하나가 아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생의 목적에 대해서 유일하게 답을 주실 수 있는 분이고, 여러분의 결혼과 교제, 앞으로의 인생에 유일한 이유를 주실 수 있는 분이시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우리가 여전히 여러 대안 중에 하나로 하나님을 생각한다면 그것을 발람의 가치관이고, 바알을 섬기는 우상의 가치관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된다고 말씀하신다.
둘째, 자기의 수고와 공로를 자랑하는 것을 피해야 한다.
4 하나님이 발람에게 임하시는지라 발람이 아뢰되 내가 일곱 제단을 쌓고 각 제단에 수송아지와 숫양을 드렸나이다
5 여호와께서 발람의 입에 말씀을 주시며 이르시되 발락에게 돌아가서 이렇게 말할지니라
6 그가 발락에게로 돌아간즉 발락과 모압의 모든 고관이 번제물 곁에 함께 섰더라
7 발람이 예언을 전하여 말하되 발락이 나를 아람에서, 모압 왕이 동쪽 산에서 데려다가 이르기를 와서 나를 위하여 야곱을 저주하라, 와서 이스라엘을 꾸짖으라 하도다
맹목적으로 예배하고 있는 발람과 발락의 상황에도 불구하고 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임했다고 한다. 우리도 어떤 마음으로 이 자리에 왔는지 모르지만 하나님의 우리 인생을 해석해주시는 말씀이 이 시간에 우리 가운데 임하고 있다.
하나님의 말씀이 임했는데도 발람이 이렇게 말하기 시작한다. ‘내가 일곱 제단을 쌓고 각 제단에 수송아지와 숫양을 드렸나이다’라고 말한다.
발락이 발람을 초대한 것은 그가 실제로 정말 유명한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발람은 본인이 이미 능력이 있고 유명한 사람으로 돈 받고 여기까지 왔는데 뭔가 일어나지 않으면 모양이 빠진다. 당연히 자신이 능력있는 술사라는 것을 증명해보이고 싶었을 것이다. 발락과 발람은 하나님을 알던 사람들이라고 했다. 발락은 무서운 대군을 이겨낸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알았고, 발람 역시 하나님을 알았지만 중요한 것은 믿지는 않았다. 이 두 사람의 문제는 머리로는 이미 하나님을 알았지만 중요한 것은 믿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이들에겐 하나님이 믿음의 대상이 아니었다. 하나님을 믿고 전적으로 의지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아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믿는 것이 중요하다. 불신앙으로 여전히 자신의 수고와 공로를 자랑하는 것은 정말 중요한 순간-우리가 포기해야 될 순간에 포기 하지 못하게 하는 악이 있다.
믿음이라는 것은 우리의 본성을 거스르는 것이다. 죄된 본성을 거스르기 때문에 순간순간 우리가 포기해야 될 것들이 있다고 말씀하신다. 그런데 그때마다 포기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 바로 불신앙이라는 것이다. 우리의 죄된 본성이 나를 포기하지 못한다.
잔느귀용은 ‘믿음 안에서 포기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뜻 안에서 나의 뜻을 끊임없이 버리고, 아무리 내 눈에 선해보일지라도 나의 모든 자연적인 성향을 내려놓는 것이다. 그렇게 해야만 오직 하나님이 선택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온전하게 선택하게 된다. 과거에 내가 잊을 수 없는 나의 상처와 아픔들을 잊게 되고, 미래의 섭리하심을 하나님께 맡기게 되고, 현재가 하나님의 것임을 인정하게 된다’고 말한다.
우리는 과거의 후회와 상처를 끊어버리기 힘든 사람들이다. 내 힘으로 할 수 있는 게 많은데 어떻게 하나님의 섭리를 믿고 맡기고 갈 수 있는가. 현재를 나의 것으로 삼고 싶은 욕망이 가득가득하다. 이것이 우리의 죄 된 성향인 것이다. 그래서 힘들다.
하나님을 알고 두려워하는 것에서 끝나서는 안 된다. 하나님을 믿고 전적으로 의지하는 믿음이 있어야 한다. 여전히 내 생색과 열심으로 제사를 드리면 즉, 하나님이 계속 막으시는 그것들을 포기하지 못하고 내려놓지 못한다면 하나님께서 결국 진노에 머무르게 내버려두신다.
내 마음에 불신앙이 여전이 있기 때문에 전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하지 못한다. 하나님께 전적으로 맡기고 믿고 이겨낸 경험이 우리에게 필요하다.
목사님께서 모압 왕 발락은 자꾸 뭘 달라 달라고 하는 하등 기복의 신앙이고, 발람은 내가 하나님 뜻대로 하지 않았냐고 하면서 자기의 수고와 공로를 이야기하며 이 정도면 뭘 달라고 하는 고등 기복의 신앙이라고 하셨다. 내 수고와 공로를 자랑하는 예배는 스스로 가짜라는 것을 증명하는 예배이다.
7 발람이 예언을 전하여 말하되 발락이 나를 아람에서, 모압 왕이 동쪽 산에서 데려다가 이르기를 와서 나를 위하여 야곱을 저주하라, 와서 이스라엘을 꾸짖으라 하도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발락이 ‘나는 안오겠다고 하는데 모압왕이 복채를 줘서 억지로 끌고 와서 여기 있는 것이고 이스라엘을 저주하라고 하니까 내가 지금 저주하는 것’이라고 만방에 알리고 있는 것이다. ‘나는 돈 주면 저주도 하고, 축복도 하는 가짜’라고 스스로를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복채’는 ‘나만 잘되고 저 사람은 망하게 해주세요’ 라는 것이다. 그에 반해 ‘참된 예배’는 이것과 정반대이다. 나의 구원을 위한 것이 첫째이고,나아가서 내가 죽더라도 누군가의 구원을 위해서 내가 나아가야 한다고 하는 것이 참된 예배이다. ‘나는 이 정도 했고 할 수 있고, 여전히 남아 있는 것 같은데...’라는 마음이 앞서는 예배는 말씀과 공동체보다 앞서가는 것이다. 그 밑에는 돈과 명예를 좋아하는 나의 악이 여전히 깔려있는 것이다.
셋째, 저주의 말과 행동을 끝까지 피해야 한다.
8 하나님이 저주하지 않으신 자를 내가 어찌 저주하며 여호와께서 꾸짖지 않으신 자를 내가 어찌 꾸짖으랴
9 내가 바위 위에서 그들을 보며 작은 산에서 그들을 바라보니 이 백성은 홀로 살 것이라 그를 여러 민족 중의 하나로 여기지 않으리로다
10 야곱의 티끌을 누가 능히 세며 이스라엘 사분의 일을 누가 능히 셀고 나는 의인의 죽음을 죽기 원하며 나의 종말이 그와 같기를 바라노라 하매
11 발락이 발람에게 이르되 그대가 어찌 내게 이같이 행하느냐 나의 원수를 저주하라고 그대를 데려왔거늘 그대가 오히려 축복하였도다
12 발람이 대답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내 입에 주신 말씀을 내가 어찌 말하지 아니할 수 있으리이까
완악하기 그지없는 발람과 발락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주의 말이 저주가 아닌 축복으로 변하게 하셨다. 9절 이하의 말씀은 발람이 이스라엘에 대하여 하나님께 받은 3가지 예언 중 첫 번째 말씀이다.
‘이 백성은 홀로 살 것이라 그를 여러 민족 중의 하나로 여기지 않으리로다’ 긍정적인 강조의 의미로 ‘홀로’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이들이 여러 열방, 이방 족속과는 다르게 비범하고 탁월한 민족이 될 거라고 하신다. 무엇이 그들을 다르게 하는 것인가?
하나님만 전적으로 의지하는 우리들- 구원의 백성, 하나님의 백성인 저와 여러분이 도대체 세상 사람들과 무엇이 다르다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인가.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돈과 물질, 명예가 없이는 살 수 없다고 말할지라도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그 조건이 아니라 우리를 살게 하는 조건이 바로 하나님과 우리와의 약속, 마지막까지 약속의 땅으로 인도해주실거라고 하는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이 주시는 구원이라는 것이다. 그 복을 누리면 충분히 살 수 있는 민족이 바로 저와 여러분이라고 약속의 말씀을 해주시는 것이다. 그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셨던 것처럼 10절에 그들을 통해 구원받을 사람들이 티끌처럼 많을 거라고 말씀하신다.
발람도 그렇게 되고 싶었다. 그러나 결국에는 그렇게 되지 못했다. 발람을 한마디로 정의하자면 말만 앞서는 사람, 입만 둥둥 떠다니는 사람이었다. 말로는 이렇게 하지만 결국에는 이스라엘을 무너뜨리기 위한 계책을 꾸미는 사람이었다. 이미 21장에 처음부터 하나님께서 발람에게 그들과 함께 가지도 말고, 그 백성을 저주하지도 말라고 하셨는데 발람은 처음부터 이 말을 축소해서 ‘하나님께서 허락하지 않는 것 같아.’라고 축소해서 말했다. 우리의 신앙이, 우리의 믿음이 진짜가 되기 위해서는 포기해야 될 것이 있는 것 뿐만 아니라 십자가를 통과해야 된다. 십자가를 통과하는 것은 내가 그리스도 안에 거하고, 그리스도가 내 안에 거하는 신앙이다.
발람과 발락의 이스라엘 저주 목표는 단순히 이스라엘을 망하게 하는 데 있지 않고 이스라엘과 하나님과의 언약관계를 깨뜨리는 것이다. 이스라엘과 하나님과의 언약관계에서 그들을 제외시키려고 했다. 이스라엘을 통해서 수많은 사람들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구원 계획, 구속사를 망가뜨리려는 것이다. 결국에는 하나님을 원수로 삼겠다는 것이다. 하나님을 원수로 삼고 살아남을 수 있는 사람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신다.
우리 안에 입술로는 하지 않는다고 하지만 우리 안에 여전히 저주하고 있는 저주의 말이 있다면 축복의 말로 바꿔야 한다. 입으로 뿐만 아니라 우리의 삶으로 저주의 말들을 축복의 말로 바꿔야 한다. 여전히 내 원수 같은 가족, 사람들, 사건들을 축복하며 구원의 사명을 감당하는 데까지 나가야 된다.
하나님께서 발락과 발람 같은 인간들을 성경에 3장이나 할애해서 말씀하고 있실까. 우리 안에 말씀을 안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타협하고 싶은 마음이 있고, 너무 좋은 것을 달라고 몸부림치는 기복적인 기도가 있기 때문이다.
한 명의 가족, 한 명의 지체를 내 양을 돌보는 것처럼 돌봐주면 안되겠냐고 하시는 하나님 음성을 들어야 된다. 우리가 대단한 일 하라고 하나님이 불러주신 것이 아니라 구원을 위해서 서로 묶여가라고 우리를 묶어주셨다는 것을 깨달아야 된다.
결혼이 엄중한 일이고, 우리의 삶이 하나님의 명령을 받들어야 되는 엄중한 일이기 때문에 오늘 이렇게까지 말씀하고 있다. 육신이 무너지고, 암이 걸리는 사건을 통해서 사명자의 길을 가고 계시는 목사님을 보자. 그리고 그 목사님을 따라서 더한 육신의 고통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질병을 사명으로 붙들고 가는 우리 성도님들의 삶을 보자. 나와는 상관없다고 하기에는 너무나 엄중한 하나님의 음성으로 우리가 들어야 한다. 내 삶의 전 인격을 사용해서 ‘고난과 고통의 사건까지도 나의 사명이 되는구나’ 라는 것을 깨닫고 가라고 주신 말씀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발람과 발락같이 되지 않으려면 우리가 피해야 될 것이 있다고 하신다. 나를 위해서 제단을 쌓는 것. 내 수고, 공로를 이야기하고 싶은 것. 여전히 내가 저주하고 있는 말들을 하나님께서 돌이키라고 하신다.
2. 기도제목
장원영
1. 하나님이 나를 흔드시는 사건이 시험꺼리가 되지 않게 저의 생각을 지켜주시고 내게 주신 말씀대로 훈련 잘 받게 기도해주세요
2. 죄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성령이 함께 하시는 회개할 수 있게 기도해주세요
3. 온전한 언어를 사용하도록 기도해주세요
선애
1. 수술 일정과 병원이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이루어지고 가족들이 같이 설득되어지도록
2. 일대일 양육 받는 가운데
하나님 앞에 엎드려져서 눈이 뜨이도록
3. 내 마음 깊은 가운데 끊어지지 않는 원망과 미움과 저주의 쓴 뿌리가 말씀으로 설득되어져서 끊어지도록
지민
1. 육적인 건강이 속히 회복되길. 운동과 관리 등 하나님께서 인도해주시길
2. 매일 주시는 말씀과 주일예배, 수요예배 말씀이 내 말씀으로 들리길
3. 사건과 사람에 대한 상처들이 끊어지고 주님께서 주권자이시며 인도자이심을 고백할 수 있길
4. 부모님과 동생이 하나님을 만나 구원 받을 수 있길
5. 연구와 공부 방향 인도해주시고 체력과 지혜를 허락해주시길
화진
1. 말씀 매일 빠지지 않고 보기
2. 말씀에 의지하며 매일의 평안 찾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