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4 주일설교
본문 : 열왕기하 20:1-6
제목 : 의도치 않은 열매에 대하여
인도 : 정갑신 목사
히스기야의 기도를 통해 하나님과의 관계를 되돌아볼 수 있었으면 한다. 나는 A를 심은 것이 분명한데, 왜 결과는 B가 나왔을까? 왜 생각지도 못했던 엉뚱한 결과가 나왔을까? 내가 심은 A 안에 B라는 요소가 있었다는 것을 겸손히 인정해야 한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히스기야 왕은 다윗 왕에 비교할 만한 왕이다. 병에 걸린 히스기야가 열심히 기도해서 15년의 생명을 연장받았다. 그러면서 낳은 아들의 이름이 므낫세이다. 북이스라엘과 남유다를 통틀어서 가장 악한 왕으로 손꼽히는 왕이 므낫세이다.
평생을 믿음으로 살았던 히스기야의 아들 므낫세는 나라를 말아먹었다. 너무나 아이러니하다.
히스기야는 믿음의 기도를 드린 것 같지만, 사실은 히스기야의 기도 속에 므낫세가 이렇게 자랄 만한 요소가 있었음을 봐야 한다. 히스기야가 병에 걸렸을 때 이사야 선지자가 "당신은 살 수 없는 병입니다. 죽을 날을 기다리십시오. 그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라고 말했다. 히스기야가 이사야를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을 때 히스기야의 반응은 삐쳤다.
그것을 1-3절에서 알 수 있다. 히스기야는 벽을 보고 등을 돌렸다. 삐침의 행위(#128584;)이다. 히스기야는 문제가 있을 때 여호와의 성전을 찾았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이 사건에서 벽을 보고 등을 돌렸다. 그리고 통곡했다. 통곡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첫째, 예수님의 통곡. 하나님의 뜻대로 해야 하는 것을 알고 있지만, 내 마음이 하나님의 뜻까지 가서 그분의 뜻대로 가야 하는데 내 육체가 그렇게 가지 못하는 것과 아버지와의 분리와 이별을 겪어야 할 그 고통 때문에.. 그 마음을 알지만 가지 못했기에 예수님의 마음이 아버지의 마음으로 가기 위한 통곡이다.
둘째, 내가 원하는 것이 있는데 하나님께서 들어주실 것 같지 않아서 하나님께 떼 쓰는 통곡이다. 하나님을 내게로 끌어들이는 통곡이다. 히스기야의 기도는 아래와 같다.
(이상적) 모든 것은 주님의 뜻대로 진행되지만 죽음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게 해주세요.
(히스기야의 기도) 하나님 저는 이런 식의 댓가를 받을 만큼 살지 않지 않았나요? 이정도의 댓가를 받으려고 산것이 아니에요. 내가 어떻게 열심히 살아왔는데요. 저는 이것보다 나은 대접을 받아야 되지 않나요?
이것이 굉장히 무서운 기도임을 알아야 한다. 우리의 믿음이 종교화 됐을 경우 이렇게 기도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의 믿음이 그분의 안에 깊이 머물러있다면 이렇게 기도할 수 없다. 그러면 우리의 믿음이 종교화 되어가는 과정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 내가 여기서 행한 열심의 정도, 무엇을 했던지 신으로 부터 보상을 받을 정도를 결정하는 것. 내가 열심으로 살아간 만큼 신은 걸맞는 내 삶에 대답하셔야 하는 것. 우리의 마음 안에는 하나님의 말씀보다 나의 판단이 더 의미있다고 주장한다. 우리 모두의 마음에는 하나님의 자리에 앉고 싶은 신이 되고 싶어 하는 마음이 있다.
세상의 모든 제사는 신에게 승리한 결과를 받아내야 하는 것이다. 내가 수고한 정도가 내가 받을 대가에 대해 결정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세상의 제사이다. 레위기의 제사는 '받았기 때문에' 드리는 제사이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을 받았는데, 뭘 더 바라겠나? 그러나 우리도 모르게 서서히 종교화되기 시작한다. 내가 스스로 무언가를 함으로서 내 존재감을 증명하려 하는 것이 너무나 많다. 히스기야는 자신이 열심히 살아온 삶에 대한 대가로 죽을병이 마땅치 않다고 기도한다. 여기에서의 나의 기도가 신을 조종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왜 우리 다음 세대가 무기력한가? 왜 자녀들을 잃고 있는가를 생각해보니 이렇게 인과적인 신앙생활을 가르치기 때문이다. 그 상태로 아이들이 자라면 돈, 친구, 성적 등을 하나님 사용법 대신에 자신이 이루고자 하는 것을 얻기 위해 사용하게 된다. 우리는 이제 아이들에게 하나님이 우리에게 사용되어지는 분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께 사용되어지는 자임을 가르침으로서 그분을 사랑하게 만들어야 한다. 하나님과 사랑의 관계를 맺게 해야 한다.
(7절)하나님께서 히스기야를 낫게 해주시고 이사야를 통해 치료행위를 해 주신다. 하나님의 말씀은 곧 현실이며 '나으니라'의 선언까지 하셨는데, 히스기야는 그 말씀의 증거를 달라고 한다.
(8절)이 말씀이 진짜인 증거를 달라고 한다. 나을거라는 객관적 증거가 필요하다고 한다. 하나님의 말씀보다 내가 이해할 만한 객관적 증거가 더 믿을 만 하다고 요청하는 것이다. 믿음은 내가 충분히 이해할 만 해서 믿는것이 아니다. 설명을 차근차근 듣고 이해되고 설득되는 것을 믿는다는 것은, 믿을 만 하다고 판단하고 이해한 나의 생각을 믿겠다는 것이다. 믿음이라는 것은 '선악과'이다. 하나님께서 왜 선악과를 만드셨나? 따먹지 말라고 하셔 놓고 에덴동산에서 치우지 않으시는 것은 부당하고 설득되지 않는 모순과 같지만, 그 모든 상황보다도 먹지 말라고 하시는 하나님의 명령이 더 크다는 것을 믿는 것이 믿음이다. 설득되어서 믿는 것이 아니라, 그 말씀이 이해되어서 믿는 것이 아니라, 그 말씀을 하신 분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믿는 것이다.
히스기야의 행동에서 그의 마음의 중심축이 하나님에서 자기 자신에게로 옮겨 온 것을 볼 수 있다.
하나님께서 히스기야를 고쳐 주신 이유는 그의 개인적 문제로 고쳐주신 것이 아니라, 그분의 백성들에게 아직 필요한 존재이기에 고쳐주셨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실 때 다른 사람과의 관계까지 부르신다. 나를 통하여 연결되게 될 수많은 사람들에 대한 '공공적 존재'로 부르시는 것이다. 그러나 히스기야에게는 그런 공공성이 사라졌다. 단순히 자신의 질병의 이유로만 하나님을 찾는 것이다. 또한 히스기야는 왜 15년 인지 질문하지 않았다. 히스기야가 질문을 했어야만 한다. 우리에게는 오직 나를 위한 응답만 중요하다. 히스기야는 당시 후계자를 준비하지 않았다. 히스기야가 후계자를 낳아서 준비시킬 시간이 필요했다. 그래서 15년을 주셨다. 누구든지 자신의 개인적인 문제로 기도할 수 있다. 그러나 왕은 그러면 안 된다. 자신의 존재의 공공성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지 않을 수 있나? 하나님의 응답이 왔을 때 이 응답에 내포된 하나님의 뜻을 물어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았기에 히스기야가 나중에 굉장히 과시적인 태도를 보임과 동시에 하나님을 신뢰하는 마음이 떨어진 행동을 했다. 그래서 그가 보여준 모든 보물들을 바벨론에 빼앗기게 될 것이며, 그의 아들들이 내시로 끌려갈 것이라고 하셨다. 그 말씀에 히스기야는 "제가 살아 있는 동안에 별 문제만 없다면 괜찮습니다." 하는 반응을 보였다. 히스기야는 처음부터 B를 심은 것이다.
우리는 큰 은혜를 경험하면 내가 주인공인것 같은 착각을 한다. 내가 말하는 진리에 사람들이 나에게 반응하면 내 능력으로 착각한다. 히스기야가 그 오류에 빠졌다. 진리는 빛이라서 다가갈수록 확신이 생기고 밝아지지만, 또한 다가갈수록 내 마음의 어두움을 드러낸다. 진리로 다가갈수록 교만할 수 없다. 오히려 매우 겸손한 담대함과 확신이 생긴다. 히스기야가 이것을 잃어버렸다.
우리는 주님께 늘 질문하며 하나님의 뜻을 체험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기도제목 #128146;
소담 붙여주신 공동체, 가족, 친구 사랑하고 하나님의 눈으로 한주 잘 보내고 살피도록, 큐티책 찾도록
혜민 예배회복, 내 연약함 인정하도록, 회사의 경영환경에 요동함 없도록, 시간관리 잘 하도록, 금요일 만남에서 내 얘기 잘 하도록
나래 직장 인도함 잘 받도록
예린 새로운 직장 인도함 잘 받도록
유진 상담과정 잘 밟도록, 소개팅 잘 분별하도록, 신교제
끝으로, #127874; 목장 식구들과 유진 언니의 생일을 (미리)축하 했습니당 :D
사랑 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1293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