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잠을 잘 수 있는 이유
(시편3:1-8)
영적인 나태의 잠은 잠언 6장에서 우리를 빈궁하게 만들지만 시편 127편에서는 육체의 잠은 사랑하는 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합니다. 인생의 수많은 항해에서 짧게라도 잠을 잘 수 있는 비결은 무엇일까요?
시편 1편은 묵상에 대해서 2편은 메시아에 대해서 3편은 고난에 대해서 다루는 내용입니다.
1,2,3편이 시편 전체의 주제가 되겠습니다. 군왕들이 허사를 경영하고 있는 이 땅은 사단이 왕노릇하는 세상이기에
하나님이 비웃으시지만 잠시는 고난이 필수적으로 올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이 시편 3편은 비탄시이지만 문학적으로는 가장 아름다운 서정시의 하나로 꼽힙니다. 시편 3편의 저자 다윗은
고난의 광야길을 일생 걸어 갔다고 봅니다. 같은 동족 친족에게 배신을 당한 시편 54편이 있는데
오늘 3편은 사랑하는 아들에게 배신을 넘어서 죽임을 당하기 직전의 시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가운데서 단잠을 잤다고 합니다. 진정한 왕의 기도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다윗이 단잠을 잘 수 있는 그 이유가 무엇인지 살펴 보겠습니다
1 대적의 정체를 인정했기 때문입니다.(1-2)
이 시의 배경은 사무엘하 15장-18장까지 입니다. 시편 3편 제목에 다윗이 그의 아들 압살롬을 피할 때 지은 시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벌써 제목만 봐도 너무나 슬픕니다. 이 전쟁은 그러므로 이길 수도 질 수도 없는 전쟁입니다.
이긴다고 하면 아들이 죽고 진다고 하면 하나님 나라가 무너집니다. 이것처럼 어려움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대적의 정체를 인정하는게 중요합니다. 1절에 보니 어찌 그리 많은 지요. 2절에도 많은 사람이 있어 6절에도
천만인이 나를 둘러치려 한다고 했습니다. 대적은 너무도 적극적으로 나를 치고 노도와 같은 형태로 몰려 옵니다.
다윗은 너무 몰리고 있어요. 일생 이스라엘의 구원을 위하여 싸워온 다윗이 모든 이스라엘에게 버림을 당하고 있습니다.
외롭고 힘들고 배반까지 당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너무나도 솔직하게 나의 대적이 많다고 세 번이나 고백을 합니다.
그냥 한계 상황을 인정했습니다. 다윗의 대적이 많다는 것이 무슨 의미일까요? 즉, 한계 상황이 무엇인가? 말입니다.
사무엘하를 보면 압살롬을 따르는 백성이 많았다고 해요. 그 당시 압살롬이 자신을 따랐던 백성들의 마음을 다 도둑질했습니다.
다윗의 가장 신뢰했던 모사 아히도벨까지 압살롬의 편에 서서 다윗을 추격할 것을 제안합니다. (시41:9, 시15:12)
아히도벨은 다윗의 기막힌 책략가이고 모사가이고 그에게 묻는 것은 하나님께 묻는 것처럼 여겨지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왜 아히도벨이 예루살렘에 있지 않고 고향 길로이에 있을까요?
이 사람은 벌써 초기에 음모에 가담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도 물론 다윗의 결론입니다.
그런데 아히도벨의 손녀가 바로 다윗이 범했던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였습니다. 그러니 다윗에게 감정이 상해 있었겠죠.
그렇다고 해도 근본적으로 아히도벨이 하나님의 택자가 못됐기 때문에 그 하나의 사건 때문에 다윗을 등지고 말았습니다.
단순히 배반한게 아니에요. 자기 스스로 판단하기에 압살롬이 다윗을 물리치고 정권을 잡으리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밧세바는 핑계고 결국 두 주인을 섬겼습니다. 우리가 어떤 선택을 한다는 것은 참 어렵습니다.
사람들의 마음이 자꾸 압살롬에게 가니까 이 똑똑한 아히도벨도 권력의 흐름을 잘못 파악했어요.
우리가 하나님에게 굳건하게 붙잡혀 있지 않으면 순간의 선택에 따라서 영혼을 좌우하는데 망하는 길로 가게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지지난주 큐티 디모데후서 4장 10절에는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다고 했어요.
또 내게 해를 많이 입힌 알렉산더가 있고 또 내가 힘들 때 나와 변명해 준 자가 없고 그래서 내가 얼마나 힘든지
사자의 입에서 건짐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바울이 마지막 유언을 하면서 바울에게도 배반하고 해를 끼치는 사자같은 제자들이
있어서 거기서 건짐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디모데에게 가까운 친구가 대적하는 경우를 늘 대비해라 그런데
그들이 배반하는 이유는 다른 게 아닙니다. 아히도벨처럼 결국 세상을 사랑하는 것을 내려 놓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택자라면 우리가 세상을 좋아할 수 있지만 그래도 압살롬을 따라가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예수를 믿어도 잘 생기고 스팩있는 사람을 좋아합니다. 정말 압살롬의 외모가 출중합니다.
사단은 우리들을 한계 상황의 고통으로 시험을 하고 그리고 사람들의 조롱으로 재차 시험을 합니다.
이럴 때 내 힘으로 일어나기가 어렵습니다. 지금 압살롬 아들이 아버지 다윗을 죽이려고 달려들고 있습니다.
그런데 모두가 아들편을 들고 있는데 다윗의 마음이 어떠했겠습니까?
다수의 생각과 판단은 우리들의 생각과 활동과 범위를 넓히는 측면이 있긴 합니다.
그러나 판단을 흐리게 할 수도 있습니다. 다수 그 자체가 진리의 기준이 될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다수에게 늘 주눅이 들어 있습니다. 늘 이렇게 주눅이 들다가 우리들 교회가 이렇게 다수가 되었습니다.
한나처럼 성전 뒤에 끝에 앉아 있다가 어떻게 이렇게 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면 소수적에는 성령이 없고 다수가 되어서 성령이 임했습니까? 옛날에는 능력이 없는 것입니까?
대적의 정체는 이렇게 수가 많습니다. 그리고 두번째는 너무나 비열한 저주의 말입니다.
본래 이 말은 사울왕가의 사람이었던 시므이로 부터 이 저주의 말을 들었습니다. 과거를 들춰 내면서 수없이 나라를 위해 전쟁을 할때 피흘린 것을 빗데어 시므이는 다윗을 저주하고 욕을 퍼부었습니다.
그러나 수많은 사람들이 아들이 그러는데는 이유가 있다고 생각하고 다윗을 떠나갔습니다.
다윗과 압살롬 사이에 인간적인 이간 정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내 영혼과 하나님과의 영적인 이간질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영적전쟁에서 사단의 궁극적인 목표인 것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아픔이 배반인데 그것도 사랑하는 아들의 배반은
너무나 고통입니다. 그러나 이 고통이 자신의 죄때문이라는 것을 누구 보다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가 자기 죄를 가리기 위해 무죄한 우리아를 전쟁터에 보내서 죽게 만들었습니다. 그 사건이 끝나는 듯 했으나
하나님은 속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나단선지자를 통해 죄를 지적했습니다.
칼이 네 집에서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시더니 자녀들의 음란과 살인이 시작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아들 압살롬이 다윗을 배반할 때 죄가 없었으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그러나 할 말이 없었습니다.
사단은 과거의 죄를 들춰 내면서 공격을 합니다. 이럴때 숨길 수 없는 나의 죄로 한계상황에 대적이 일어나는 것을 인정하고
그냥 힘든 것을 고백해야 합니다. 다윗은 사단의 목표를 꿰뚫었습니다. 그래서 시므이에게 반응하지 않았습니다.
그대신에 자신의 괴로움을 하나님께 아뢰었습니다. 미움을 받는 것은 죄가 아닙니다.
죄악은 현실과 대면하지 못하고 겉도는 것입니다. 잊는 다던지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는 것은 성경적인 방법이 아닙니다.
힘들면 힘들다고 고백을 해야합니다.
인생은 자존적인 교만이 있어서 고통 가운데 가장 힘든 고통은 주위 사람들의 조롱입니다.
무심하게 뒤에서 악의적으로 조롱하는 소리는 비수가 될 수 있습니다. 대게 우리는 아프고 힘든 말을 들으면 그 말을 생각하고
또 생각합니다. 어린아이는 아빠에게 자기가 당한 일을 이르고 나면 그 다음부터는 다 되었다고 생각하고 다 잊어 버립니다.
아이가 이럴 수 있는 것은 자기가 아빠에게 말하는 순간 그 순간 그 일은 자기의 일이 아닌 아빠의 일이 되었기 때문에
다 잊어 버립니다.그래서 우리도 대적이 많다고 하나님께 고하면 하나님의 문제가 됩니다. 기도는 참 위력이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멍에로 바꿔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힘들 때 2절 후반부에 셀라가 나옵니다.
셀라는 음악의 휴지부 정도 되는데 연주를 할때 보면 바이올린 음으로 튜닝을 합니다. 음이 자꾸 늘어지니까 조절을 해야합니다. 그런 것처럼 기가막힌 고통에서 잠시 숨을 고르라는 것입니다. 자기를 한 번 살펴 보라는 것입니다.
잠깐 멈추어서 깊이 묵상을 하고 숨을 고르고 그리고 내 상황이 한계 상황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그리고 다시 연주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 답입니다.
적용) 지금 나를 괴롭히는 대적의 정체는 무엇입니까? 여러분들 너무 몰리고 있습니까? 아들의 배반을 경험하고 있습니까?
누구에게 일러 바치고 싶습니까?
2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묵상했기 때문입니다.(3)
대적의 정체가 수가 많고 나와 하나님을 이간질 시키는 비열한 저주의 말이라고 했습니다.
시므이가 (16:7-8) 독설을 퍼부을 때 하나님 밖에 부를 이름이 없습니다. 그래서 3절은 ‘여호와여’로 시작합니다.
하나님의 응답을 얻으려면 하나님이 누군가 알고 똑바로 기도해야 하는 것이 믿음의 근거이고 내용입니다.
내용이 없는 믿음 때문에 시련이 오면 자꾸 낙망하고 좌절합니다. 내용있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들이 믿는 믿음의 내용이 너무 허접합니다. 다윗은 방패되시는 하나님을 알았습니다.
방패는 지킨다 보호한다는 의미입니다. 주님이 독설의 아픔을 막아줄 나의 방패가 되기 때문에 나를 지키십니다.
방패의 특징은 누구도 뚫을 수가 없습니다. 주님이 막으시면 나를 상하게 할 수 없습니다.
방패되시는 하나님은 나의 영광이 되시기도 합니다. 나의 영광은 이 세상 지위도 재물도 권력도 아닙니다.
내 삶의 목적은 하나님입니다. 사람들은 명예와 영광을 먹고 사는데 최고의 영광을 경험했던 다윗은 지금 너무나 비참한 지경에
있습니다. 절망에 빠져서 고개를 들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절대절명의 시간에 내가 머리끝 부터 발끝까지 내가 죄인인 것을
고백하고 하나님만이 나의 방패시고 영광이시라고 하면 하나님이 오늘 나의 머리를 들어 주신다고 하십니다.
머리를 드신다는 것은 다윗을 높이고 다윗의 왕권을 회복시키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회개가 중요합니다. 입술의 고백이 정말 이렇게 응답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적용) 주님만이 나의 방패 나의 영광 나의 머리를 드시는 자입니다 라고 입술로 고백을 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3 응답받는 기도를 했기 때문입니다.(4)
기도는 나의 목소리로 해야 합니다. 내가 하는 기도가 가장 힘이 있고 응답받는 첩경이 되는 것입니다.
내 목소리는 기도하라고 주신 것이지 화내라고 주신 목소리가 아닙니다.
기도응답을 체험하고 사는 인생처럼 축복도 없습니다. 그러면 내 목소리로 성산에서 응답 받는게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의 관점에서 해석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을 알면 응답이 풍성해 집니다.
성경을 알아야 주님의 뜻대로 기도를 하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구원이 풍성해 집니다.
압살롬의 인생을 생각하며 큐티할 때 저자의 뜻을 생각합니다.
래서 우리가 주님의 거룩한 산, 성산에서 구속사적인 구별된 가치관을 가지고 저자이신 주님의 뜻을 묵상을 해봐야 되는
것입니다.
다윗의 세번째 부인 마아가의 아들 딸이 다말과 압살롬이었습니다.
그런데 또 다른 부인 아히노암의 아들인 다윗의 장자 암논이 압살롬의 누이 다말을 강간했습니다.
그런데 어머니 배가 같은 누이었기에 압살롬이 이 분노를 해결하지 못합니다. 압살롬 혼자만 누이를 사랑하는 것 같지만
인간의 사랑이 얼마나 얇팍합니까? 암논이나 압살롬이나 둘 다 똑같은 사랑을 하고 있습니다.
육신적으로 사랑해서 강간을 하거나 정신적으로 집착한 압살롬의 사랑은 딸의 이름까지 다말이라고 지었지만
아버지를 죽이려 하고 나라를 말아 먹은 눈먼 사랑이었습니다.
누이에 일에 대한 상처 때문에 아버지에게 원수를 갚으려고 자그만치 11년 동안 계획을 세우고 준비했습니다.
우리 가운데도 그런 상처가 있어서 아무리 예수를 믿어도 죽어도 해결이 안되는 분들이 많습니다.
모든 문제에 내가 미워해야 될 대상을 딱 하나 정해 놓고 늘 거기에 탓을 돌립니다.
다말이 강간당한 사건의 원인을 암논에게 돌리다가 암논을 죽이니 다윗에게 탓을 해야 직성이 풀리는 것입니다.
그렇게 탓하기 좋아하는 암살롬의 다말과 같은 상처가 여러분들에게도 있을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다 병입니다.
인간의 타락에서 온 산물입니다. 그런 사람에게는 사단이 미워하는 마음으로 역사를 합니다.
여러분 가운데 상처와 원망으로 힘들어 하는 분이 계시다면 이제 그만 수고하고 안식하세요.
절대로 누구 때문이 아닙니다. 내가 에매하게 당하는 것 같아도 그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나와 내 가정에게
하시려는 말씀이 있는 것입니다. 나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붙여준 사람들입니다.
이제는 누구를 탓하고 사건자체에 집착하는 것에서 돌아서야 합니다.
다윗은 이것을 깨닫고 서원기도를 하면서 입술을 깨물며 신음기도를 하고 피눈물 나는 기도를 했을 것입니다.
이 기도가 응답받는 기도가 된 것입니다. 응답받는 기도는 영혼의 음식과 같습니다.
에매하게 당해도 우리는 다윗만 쫓아가면 됩니다. 내 속에 압살롬을 물리칠 수 있도록 또 내 속에 있는 끔찍한
다말의 사건을 잊을 수 있도록 그 모든 사건도 하나님께서 우리 가정에게 주신 사건임을 알게해달라고
그렇게 기도하셔야 됩니다.
적용) 구별된 가치관으로 성산에서 응답받아야 할 나의 상처는 무엇입니까? 내가 못나고 부족한 것이 누구 때문이고
어떤 일 때문이라고 습관처럼 말하지는 않습니까? 예수 믿고 큐티를 해도 치유되지 않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4 내가 할 일을 내가 했기 때문입니다.(5)
응답받는 기도는 배반과 두려움과 상실감 속에서 하나님께서 내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것이 아니라
내 속의 생각들을 치료하시기 시작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항상 나 자체를 사랑하십니다.
이 무서운 환경 가운데서 주님이 붙들어 주시니 최초의 응답이 잠을 자는 거에요. 최고의 응답도 잠을 자는 것 같습니다.
잠을 자야 치료가 시작이 됩니다. 잘 자고 깨어나게 하십니다. 그래서 시편 3편을 아침의 노래라고 합니다.
다윗은 원수 앞에서 잠을 잘 정도로 하나님을 신뢰했어요. 단잠을 자면 아침에도 기쁘게 일어 났습니다.
오늘 하나님이 붙들어 주시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6)
이것은 진실된 승리의 고백입니다. 오늘 시편 3편에서 얼마나 ‘내가’ 가 많이 나오는지 모릅니다.
아무리 하나님께 맡겨도 잠이 안온다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맡겼다면 내가 할 일이 있는 것입니다.
기도도 나의 목소리로 해야 되지만 잠도 내가 자야 됩니다.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자유의지는 같이 역사합니다.
그러면 다윗은 무슨 일을 했기에 잠을 청할 수 있었을까요? 다윗은 기도만 한 것이 아닙니다.
압살롬의 반역을 극복하기 위해서 인간적인 모든 노력을 하고 기도했습니다.
다윗은 위험을 무릅쓰고 압살롬에게 아히도벨이라는 모사가 있는데도 후세를 보냈습니다.
그리고 다윗이 이기는 전략을 택하도록 했습니다. 굉장히 위험하지만 하나님 나라의 일이니까 함께하는 지체가 있습니다.
또 제사장 사독과 아비아달을 다윗의 연락책으로 도망 나올 때 거기 남겨 두었습니다.
이 땅에서 전쟁은 사람들 끼리 하는 것이기에 자기가 할 일에 대해서 최선을 다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가 할 일을 대신 해주시지는 않습니다.
적용) 여러분들은 단잠을 자기 위해 영육간에 내가 할 일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5 공의의 기도를 했기 때문입니다.(7)
뺨을 친다는 것은 내 대적들이 수치를 당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악인의 이를 꺾으셨다는 것은 공격하는 자들의 이를 부서뜨린다는 말입니다.
아직도 다윗을 죽이려는 세력들은 강하고 쫓기고 있는 신세입니다. 그런데 이미 다윗은 응답을 받았습니다.
저들은 수치를 당한다는 것입니다.
(8절) 지금 이 백성이 누구입니까? 다윗을 죽이려고 했던 백성들이에요. 그런데 그들의 멸망을 위해서 기도하지 않고
주의 복을 그의 백성들에게 내려달라고 이것이 최고의 응답인줄 믿습니다. 보복기도와는 다릅니다.
시므이의 비열한 비난에 대해 다윗의 대처 방법은 (삼상15:11-12) 주의 복을 주의 백성에게 내려 달라고 기도합니다.
적용) 여러분은 보복의 기도를 하십니까? 공의의 기도를 하십니까?
기도제목>
김지헌
1. 교만하지않고 기도하며 신뢰로 잠들기
2. 가정구원과 생활예배 회복
3. 목장식구들을 위해 기도하기
소지은
1. 말씀으로 준비되어있기
2. 거룩한 사업환경되길
3. 신교제
최윤혜
1. 대적을 직면하기
2. 하나님께 미주알 고주알 말하기
3. 기도응답받는 한주되기
김화용
1. 환경, 상황에 상관없이 큐티하고 적용
2. 깨닫지 못하는 가족들 깨닫고 구원에 이를 수 있도록
3. 남을 미워하고 정죄하는 마음 회개하고 내 죄 부터 볼 수 있는 사람이 되길
4. 재정문제 집문제 예수님과 함께 멍에를 메고 갈 수 있길
박지선
1. 매일매일 아침저녁으로 기도하는 습관들이기
2. 마음에 평화가 오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