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소: 커피빈
참석: 송민창목사님 이선애 이은혜 강혜림 박세현
말씀: 수 6:1-21
제목: 여전한 방식으로
설교:
아버지 품으로 돌아와도 천국 가는 그 날까지 끝없는 전쟁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남편의구원도, 우리들 교회의 개척도, 부흥도, 거기까지도 너무나 놀라운 일이었지만, 그 후에도 날마다 힘든 전쟁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우리 각자와 교회가 싸워야 할 영적 전투는 오늘 본문에서처럼 여전한 방식으로 한결같이 예배 드리고, 말씀 보고, 기도 하고, 적용하고, 역할 잘 감당하는 방식입니다. 그것은 어디에서도 통하는 방식입니다. 오늘은 여전한 방식의 예배에 대해서 살펴 보겠습니다. 15절은 전과 같은 방식이라고 썼는데요, 우리는 익숙하게 “여전한 방식”으로 말씀 드리겠습니다.
1. 여전한 방식은 강팍한 적에게도 통합니다. (1절)
여호수아 장 1절은 요단 강을 건너 온 이스라엘 백성들로 인해 아모리 사람들의 마음이녹고, 그들이 정신을 잃었다고 했습니다. 그래도 5장까지 보면, 이스라엘은 이겼어도 여전한 방식으로 할례를 행하며 피를 뿌리면서 희생하고 유월절 예배를 드렸습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이 이렇게 예배에 순종을 해도 여리고는 더 굳게 닫혔고, 출입하는 자도 없다고 합니다. 이것은 싸우자는 이야깁니다. 무시하던 이스라엘이, 무시했지만 그래도 60만이나 되는 병력을 가지고 오는데, 자기들은 둘레 600미터, 면적이 2만 평방 미터의 작은 성을 의지하고 있습니다. 이쯤 되면 여리고가 순순히 손을 들고 나오면 좋겠는데, 여전히 자기들이 승산이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왜냐하면 성 밖으로 3-4미터 높이의 석조 장애물을 설치했고, 성벽이 외벽과 내벽의 이중 구조로 되어 있는데, 외벽 끝과 내벽 안쪽까지의 두께가 무려 11미터였다는 거예요. 그리고 외벽이 내벽에 대하여 35도 각도로 되어 있어서 적이 올라 접근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 했다는 거예요. 그래서 안 그래도 혼자서 제 잘난 맛에 살고 있는데, 이스라엘이 지금 전쟁마다 이기니까, 거기서 하나님의 위엄을 본 것이 아니고, 마음이 더 굳게 닫히고, 아무도 출입을 안 하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망하는 사람들은 절대로 망하고 있는 것을 인정하지 않아서 망합니다. 부도도 거의 90프로 이상이 그래서 망합니다. 끝까지 싸워보겠다고 합니다. 우리는 생각하기를, 지난 주에 내가 회개했으면 이번 주일에는 우리 가족이 다 교회 나오는 줄 압니다. 그런데 여리고 같은 사람은, ‘니가 아무리 그래도 나는 돈이 있어’ 하고 버팁니다. 그래서 우리 사랑하는 가족은 출입문만 더 굳게 닫고 있습니다. 나는 사장을 위해서, 시부모를 위해서, 장인 장모를 위해서, 배우자를 위해서 양피를 베고 예배 열심히 드리면서 기다리고 있는데, 더 마음을 닫고 출입도 못 하게 하는 그들이 바로 여리고 입니다. 하지만 내 가족이 모두 구원받기 까지는 30년이 걸릴 수도 있고, 내가 죽은 다음에 돌아올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시간과 우리의 시간은 다릅니다. 하나님이 치르시는 전쟁은 우리의 예상과는 아주 다릅니다. 그러나 여전한 방식은 아무리 강팍해도 통합니다.
큐티 나눔입니다. 이 부부가 교수님 부부예요. 모두 아버지 품으로 돌아오신 분들이에요. 지난 주일에 아내가 아들에게 부드럽게 말해서 교회에 함께 가기로 하고, 기쁜 마음으로 교회로 향하였습니다만, 아들이 갑자기 차 안 에서부터 기분이 나빠져 소리를 지르고 비판을 하더니 교회 도착 후 그냥 집으로 돌아가 버렸습니다. 왜 이렇게까지 힘들고 오랜 시간 어려운지, 그냥 모든 것을 놓아버리고 하나님께 맡긴다고 핑계 대고, 손을 놓고 싶은 생각도 순간 순간 듭니다. 그런데 아내가 저보고 당신 죄를 보라고, 죄인이라고 하는데, 솔직히 어떨 땐 짜증이 납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지, 모두에게 내가 실정적(?) 죄인이냐?’ 합니다. 그리고 모든 죄인은 인격의 차이도 없느냐? 모두 죄인이지만, 다 같은 죄인이냐? 하늘에서 죄인이지만 이 땅에서도 그러하냐는 마음이 들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다시 한번 여전한 방식으로 말씀의 등불 빛을 높이 들어, 가려진 세속사를 구속사로 비추면서 죄인인 저의 모습을 다시 한번 묵상해 봅니다. 적용으로서 아내의 지적에 옳소이다 고 화답하겠습니다. 여러분, 제일 강적 중에 강적이 자식놈 아니에요? (자식이라고 부르기도 싫은 그 새끼 놈들) 여리고 강적은 정말 자녀예요. 이 부부가 부러울 것이 없는데 이 아들이 이렇게 속을 썩여줘서 나오지 뭐예요. 정말 아들에게 너무 고마워요. 아들 때문에 기도하고, 아들 때때문에 애통합니다. 이 가족이. 여전한 방식의 생활 예배가 내 속의 강팍함을 물리칠 수가 있습니다.
Q. 말씀을 듣고 내가 참아야지 했는데 핍박이 더 심해진 일이 있습니까?
2. 여전한 방식은 내가 이기는 전쟁입니다. (2절)
어떤 왕과 용사라 할지라도, 그들과 싸워도 내가 이기는 전쟁이라고 하십니다. 내가 가난하고, 출세도 못 했고, 병에 걸리고 아무 보잘 것 없어도,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내가 우리 집안, 우리 공동체의 대장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내게 다 넘기셨습니다. 큐티를 하면서도 지난 주에 내가 순종했어도 하나도 바뀐 게 없어. 남편을 술도 많이 먹고, 애는 가출하고, 하나님은 믿을 수 없는 분이야. 도대체 나보고 언제까지 기다리라는 거야. 참는 거 좋아하네. 하고 오신 분이 있을 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이런 경로를 한 단계씩 밟아가는 것이 하나님의 전쟁입니다. 하나님이 전쟁하시는 목적은 단 하나, 나를 거룩하게 하시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이 전쟁을 통해 남편이 술과 여자를 끊고 제 자리에 돌아오거나 자녀가 정신차리고 공부하기를 기대했을지 모르지만 그것은 전쟁의 목적이 아닙니다. 오로지 나를 거룩하게 하기 위해서 여전한 방식으로 나를 이기게 하십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여러 사건이 닥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Q. 부도와 질병과 외도로 가정을 무너뜨리는 강한 대적과, 모함과 술수로 직장을 무너뜨리는 막강한 존재까지도 내 손에 넘기신 주님을 믿으십니까?
Q. 모든 싸움의 목적이 상대방의 변화가 아니라, 나의 변화와 성숙을 위한 것임을 깨닫고 있습니까? (이것이 바로 이기는 전쟁입니다.)
3. 여전한 방식은 인내로 기도하는 것입니다. (3절)
내 전쟁은 내 전쟁이 아니고 하나님의 전쟁이기 때문에 세상 방법이 아니고 하나님의 방법으로 싸우며 기도해야 합니다. 요단을 건넌 후에 하나님은 길갈의 돌 쌓기, 할례와 유월절 지키기 등 전쟁과는 상관이 없을 것 같은 방법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인도하셨습니다. 그리고 강적 여리고에 도착했더니, 하나님은 또 성 주위만 돌라고 하십니다. 정말 돌아가실 지경입니다. 총칼 들고 싸우라고 하셨으면 좋겠는데, 이해되지 않는 명령만 계속 하시는 것입니다.
결혼을 하고 직장에 다니던 어느 형제가 신학을 하고 전도사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부인이 이혼 소송을 냈습니다. 남편에게 실수와 허물이 너무 많기 때문에, 이런 사람은 목사가 되면 안 되기 때문에, 그래서 이혼을 하겠다는 거예요. 부부가 다 좋은 학벌이 있고, 좋은 직장을 가진 엘리트 입니다. 그래서 어떤 경우에도 이혼을 말려야 되겠기에 양 쪽을 만나서 상담을 했습니다. 전도사인 남편은 부인이 교만해서 생긴 문제라고, 자신은 최선을 다 했기 때문에 법원의 판결을 따르겠다고 합니다. 그런데 부인은, 남편이 겸손하게 태도를 바꾸기만 하면, 자기는 소송을 취하하겠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남편이 전도사니까 말씀을 잘 설득하면 되겠구나 하고 부인의 의사를 전했습니다. 그랬더니 자기 부인은 교만해서 안 된다는 거예요. 신학을 했어도, 제가 큐티를 하시냐고 했더니 큐티 안 한다고 해서, 말씀으로 인도함을 좀 받으시면 어떠냐고 그랬더니 그런 거는 본질이 아니라고 그러면서 아무튼 부인이 교만해서 어디서 여자가 이혼 소송을.. 있을 수도 없는 일이라고. 부인보다도 더 말이 안 통하는 사람이 전도사 직분을 가진 남편이었습니다. 항상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하면, 아 그 사람이 상처가 많겠구나 하고 방향을 즉시 돌려 생각해야 합니다. 아버지를 일직 여의고 어려운 형편에서 자란 형제는 오직 공부 잘 하는 것으로 주위 사람들의 인정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좋은 대학에 가고, 좋은 직장에 갔는데, 문제는 어디에서든 사람들과의 관계가 힘들었습니다. 그래서 대인 관계에 문제가 생기고 힘들어 지자, 다시 택한 것이 신학입니다. 자신이 잘 하는 한 가지 공부를 도피처로 삼은 것입니다. 신학 대학원에 가서도 공부를 또 너무 잘 하니까. 누구보다 성경을 많이 알고 있으니, 또 거기서도 사람들에게 인정만 받을 뿐, 자신의 문제를 깨달을 틈이 없습니다. 그런 사람에게 무슨 상담이 가능 하겠습니까. 하는 말마다 성경 구절이 좔좔 나오고, 그런데 정작 대화가 안 통합니다. 자기 문제는 보지 못 하고, 처음부터 끝까지 부인이 교만하다. 이 소리만 하고 있습니다. 그 형제야 말로 난공불락의 여리고성 이었습니다. 그래도 하나님은 그런 사람을 위해 기도하라고 하십니다. 날마다 하라고 하십니다. 말 없이 하라고 하십니다. 현실적인 대책이 없이 기도하고, 여리고 성을 빙빙 도는 것이 무모한 일 같이 보여도, 엿새 동안 그리하라고 하셨습니다. 엿새는 끝이 없어 보이는 시간입니다. 강한 대적 앞에서 침묵하며 순종하기에는 길고 막막한 시간입니다. 그러나 끝이 없어 보이는 그 시간 동안 하나님의 신호가 있을 때까지 그렇게 빙빙 돌라는 것입니다.
4절, 10절입니다. 여섯 바퀴를 돌면서 제일 중요한 것은 침묵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60만 명이 모여 여리고를 치러 가면, 60만 명의 의견이 있지 않겠습니까? 몇 백 명이 모이면, 몇 백 개의 의견이 있습니다. 게다가 믿음이 좋지 않은 사람들도 섞여 있습니다. 여리고 성을 돌면서, 이 전쟁 져요. 여리고 사람들이 화살 한 번만 쏘면 우리는 다 죽어요. 죽으면 책임질 거예요? 이런 의견을 가진 사람들이 얼마나 많았겠습니까. 그래서 주님은 절대 침묵하라고 하십니다. 우리는 무슨 문제가 생기면 남에게 털어놓기를 좋아합니다. 기도해줘. 하고 기도 부탁을 하면서 곳곳에 내 짐을 나누어 줍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오직 하나님 한 분 만이 내가 의지하고 신뢰할 대상이라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기도 부탁을 해도, 하나님이 이 모든 사건의 열쇠를 쥐고 계신다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 신뢰가 없으면 아무리 기도 부탁을 해도 기도 응답을 받을 그릇이 되질 못합니다. 침묵 기도와 외치는 기도를 분별하시겠습니까? 이스라엘이 가나안을 향하여 가는 정복 전쟁에서, 지금 광야에서 얼마나 마음이 곤고하겠습니까. 그런데 60만 명이 여리고를 돌며 저마다 의견을 내면 이 전쟁은 백프로 지는 것입니다. 이럴 때는 조용히 침묵해야 합니다. 왜 침묵하라 그러는지 이걸 묵상을 안 하면, ‘아니, 내가 입이 달렸어. 왜 말 못 해. 요기가 공산당이야?’ 이렇게 되는 거죠. 다 구원 때문에 침묵할 때와 외칠 때를 잘 알아서 침묵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침묵할 때와 외칠 때를 아는 것은 여전한 방식의 예배와 기도가 아니고는, 정말 분별이 너무나 어렵습니다. 그러니까 침묵하면서 도와야 되는데, 그게 안 되기 대문에 다 된 일에 코를 빠트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Q. 난공불락의 성 여리고 같은 내 옆의 가족을 위해서 하루에 한 번 씩 돌면서 기도하십니까? (난공불락의 성은 말을 하면 안 됩니다. 침묵하면서 돌면서 기도해야 합니다.)
믿지 않는 강팍한 남편은 잠 잘 때, 몰래 손을 얹고 기도하십시오. 시아버지 같으면 뒤에서 구두 끈이라도 붙잡고 기도하세요. 시어머니는 어머니~ 하면서 하루에 한번씩 안아드리고 기도하세요. 정말 안 무너지고 안 변하는 나를 위해서, 날마다 가슴에 손을 얹고 기도하십시오. 여러분은 침묵 기도와 외치는 기도가 분별이 되십니까?
4. 여전한 방식은 예배 공동체가 중요합니다. (4-5절)
4절, 5절입니다. 이 전쟁에서 중요한 것은 혼자서는 못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처럼 언약궤가 중심에 있고, 앞에는 무장한 자가 있고, 뒤에는 또 후군이 있고, 이렇게 진행을 하면서 돌아야 합니다. 침묵을 한다고 혼자 돌면 안 됩니다. 말씀을 듣고 기도하면서, 격려 하고 받으면서 같이 가야 여리고 성을 무너뜨릴 수 있습니다. 제일 중요한 것은 ‘언약궤 앞에서’ 입니다. 일곱 제사장이 일곱 나팔을 불고 제 7일에 일곱 바퀴를 돌라고 하셨습니다. 6장에 ‘7’ 이라는 숫자가 열 한 번이 나오고, ‘언약궤’ 라는 말이 13번 나옵니다. 이 전쟁은 총 칼을 들고 싸우는 전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실 인간이 죽고 사는 것은 칼과 총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에 의한 것입니다. 우리 인생은 하나님의 말씀 언약궤를 중심에 두고 싸우는 전쟁과 같습니다. 제사장의 나팔 소리를 들으며, 찬송하면서 찬송으로 이기라는 것입니다. 기도로 이기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기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죽고 사는 것도 예배에 달려 있습니다. 오직 말씀대로 싸워야 하는데, 그것이 비상식적으로 보여서 순종하기가 너무 어렵습니다. 똑같이 침묵하면서 언제 끝날지도 모르는 이 여섯 바퀴를 돌면서 얼마나 소리지르고 싶고, 지루하고, ‘이제 끝내고 싶어.’, ‘이 생을 끝내고 싶어.’, ‘이 결혼을 끝내고 싶어.’ 그렇게 악을 쓰고 싶을 때가 얼마나 많겠습니까. 세상에 저렇게 장대한 여리고 백성들이 쳐다보고 있는데 아무것도 안 하고 여섯 번을 돌라니, 하지만 주님은 인내하라고 하십니다. 힘든 일이 많아도, 그들이 쳐다보는 게 너무 수치스러워도 날마다 기도하며 성을 한 바퀴, 한 바퀴 돌아야 하고, 도 주일 예배에 와서 말씀을 듣고, 목장에 가서 격려를 받으면서 돌아야 합니다. 도저히 무너지지 않을 것 같은 나의 여리고가 앞에 있어도 이런 지체의 교제가 있을 때는 슬프지 않습니다. 집이 없고, 물질이 없고, 아무 것도 없지만, 예배에서 그냥 나누기만 해도, 슬픔이 나누어 집니다. 기쁨은 함께 할수록 커집니다. 그런데 꽁꽁 싸매두고, ‘내 어려움을 누가 알겠어, 아무도 몰라.’ 하는 마음은 마귀의 속성입니다. 마귀의 속성은 폐쇄적인 것입니다. 아무도 몰라 이러면서 마음을 닫는 사람은 문제가 해결되지 않습니다.
아까 1부 예배 끝나고 이 분이 자녀 때문에 너무 힘든 데 문을 안 열어요. 이렇게 저한테 소개를 하더라구요. 믿음은 부끄러움이 없는 것입니다.
Q. 한 주간 생활이 주일 예배, 수요 예배, 목장 예배를 중심으로 움직이고 있습니까, 여러분생활 패턴을 따라서 움직이고 있습니까?
Q. 예배 공동체에 동참하며 위로와 힘을 얻고 있습니까?
5. 여전한 방식은 무장한 군사가 선두에 섭니다. (7절)
4절에는, 하나님이 여호수아에게 말씀 하실 때는 제사장 일곱이 먼저 나왔습니다. 하지만 9절은, 사실은 무장한 군사들이 궤 앞에서 행했습니다. 하나님은 일을 할 때 이렇게 전사들을 선두에 세우지 않으셨습니다. 우리 몫으로 주신 싸움은 하나님의 백성인 우리가 승리로 이끌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각자의 가정에서 영적 전쟁을 할 때, 아버지의 몫을 다 해야 하고, 어머니의 몫을 다 해야 하고, 남편의 몫을 다 해야 하고, 아내의 몫을 다 해야 합니다. 직장에서 여러분의 전투를 감당해야 합니다. 누가 대신해 줄 수 없는 역할이 있습니다. 제사장들이 나팔 불 수 있도록 무장한 자들이 나가서 장애물을 치워줘야 합니다. 말씀이 절대적으로 보호를 받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말씀의 은혜가 넘치는 교회가 되려면 앞과 뒤에서 보호를 해야 합니다. 안타깝게도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전투가 어떤 모습으로 이루어지는지를 모릅니다. 말씀을 보호하는 무장 군인들이 되어야 할 자가 오히려 말씀을 훼방하는 일을 할 때가 많습니다. 여리고 사람들,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교회를 놓고 그 교회가 어쩌고 저쩌고 하더라 그러면 여러분들은 온 몸으로 막아야 합니다. 요단 강을 건널 때는 앞에 장애물이 없었기 때문에 강물밖에 없었기 때문에 언약궤가 먼저 들어갔습니다. 하지만 여리고 전투에서는 무장한 자들이 먼저 나갑니다. 왜냐하면 사람이 제일 무섭기 때문입니다. 교회도 무너지는 것이 항상 사람 때문입니다. 마지막에 돈이 있지만, 그 돈을 움직이는 사람 때문에 무너집니다. 사람대문에 무너집니다. 그래서 무장한 자들이 앞에 서야 합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이 소문을 듣고 왔는데, 무턱대고 아무 설명도 없이 ‘가서 큐티하세요.’ 그러면 큐티가 기적이에요? 그러고 물어보면 완전히 말씀이 조롱 받고 훼방 받게 하시는 것입니다.
부활절에, 전도 주일에 새신자를 우리들 교인이 새신자인줄 모르고 주차장에서 뺑소니범으로 몰아서 경찰에 신고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녁에 경찰서에 가서 조사를 받고 블랙박스를 확인해보니까 들이받은 것이 아니라는 판정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이제 큰일이 일어났습니다. 우리들 교회 교인도 일년이 안 된 새신자 수준입니다. 진짜 오는 것만도 감사한 사람이에요. 근데 그 좋은 차에 그 동안 기스가 여러 번 났는데 (교회 올 때마다) 한 번도 사과를 못 받았다는 거예요. 그래서 이제 참다 참다 그 날은 폭발해가지고 신고를 했다는 거예요. 새가족은 너무 놀라셨으리라 생각이 됩니다. 저는 두 분 모두에게 죄송하다고 전합니다. 몇 년 전에도 휘문 학교 앞 길에서 차를 세우고 야구 방망이를 뒷 차에게 휘둘렀는데 바로 우리들 교회 여집사 였다는 거 아닙니까? 이 자매는 지금까지 교회 나오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새가족이 이번 주에 또 오신다고 해서 얼마나 감사한지 모르겠습니다. 처음부터 인상이 너무 깊으셨겠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이렇게 주차는 이미 우리들 교회에 가장 중요한 사역이 되었습니다. 시험 들 일이 너무 너무 많습니다. 정말 가장 무장된 분들이 주차 봉사 해야 된다고 생각을 합니다. 여러분들도 믿음으로 무장하시고 주차하셔야 됩니다. 직분자들은 앞에 세우지 마셔야 돼요. 굉장히 구원의 사역입니다. 정말 처음 온 사람들은 그 차 긁히고 그러면 그냥 안 옵니다. 여러분들이 구원을 생각하신다면 반드시 주차는 예배의 시작이라고 했습니다. 교회와 말씀이 이런 일로 훼방 받으면 안 됩니다. 이제 여러분들 아마 무차별로 신고할 거예요. 그러니까 정말 조심해서 신고하시고 또 연락처도 잘 남겨두시고. 말씀이 만홀히 여김 받을까봐 언약궤를 감싸고 보호하는 것이다. 우리가 말씀을 들으려면 이렇게 값을 치뤄야 합니다. 이 모두가 구원이라는 작품을 이루기 위해서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것입니다.
Q. 믿음으로 무장하고 힘든 일의 선두에 서서 아내와 남편, 자식의 역할을 잘 하고 있습니까?
Q. 말씀이 훼방 받지 않기 위해서, 교회가 훼방 받지 않기 위해서, 성도로서의 삶을 잘 살고 있습니까?
6. 여전한 방식은 비범한 방식입니다.(12, 15절)
‘일찍이 일어나서’, ‘여전한 방식으로’, 이거는 정말 평범 속에 비범이 있는 것입니다.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여리고 성이 무너지는 승리, 우리 삶의 모든 승리는 여호와의 언약궤 앞에서 여전한 방식으로 아침에 일찍이, 일곱 번 돌 때 이루어 집니다. 주님 앞에 가는 그 날까지. 오늘이 그 날인가. 하는 마음으로 똑같이 살라는 것입니다. 시종이 여일하게 살라는 것입니다. 다른 것 하나도 안 하셔도, 그렇게만 하면 저절로 영적인 예배가 육적인 예배가 됩니다. 그래서 성경도 반복해서 똑 같은 이야기를 합니다. 그냥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여전한 방식으로 잘 살고 있으면 너희 적인 무너지는 그 7일이 온다고 하십니다. 왜 모르십니까. 영적인 예배를 잘 드려야 영적인 여전한 방식으로 생활 예배를 잘 드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건이 해결되기만 바라고, 학교에는 붙기만 바라고, 직장이 잘 되기를 바라고, 우리 애가 좋은 배우자를 얻기를 원하면서도 여전한 방식으로 여러분은 영적 예배, 생활 예배 하나도 안 드리고 있습니다. 주일 예배도 안 드리고 목장 예배도 드리지 않으면서, 집에서 말씀 묵상도 안 하면서 날마다 내 사건만 바뀌기를 바랍니다. 남편이 돈 잘 벌면 뭐합니까. 자녀들이 일류 학교 나온 부모라고 존경할 것 같습니까? 자녀들이 제일 존경하는 부모는 성경대로 사는 부모입니다. 어머니가 학벌이 없고 능력이 없어도 알코올 중독자 남편, 아버지를 섬기는 모습을 볼 때 자녀들이 엄마를 존경합니다. 여전한 방식으로 새벽에 일찍 일어나서 그 끝이 안 보이는 성을 그냥 순종하며 도는 것이 성도의 삶입니다. 그리고 있으면 드디어 나의 7일 새벽이 옵니다. 이세상에서7일을 누리지 못 해도 끝 없이 돌다가 천국가면 됩니다. 7일 째 되는 날은 일곱 번 돌라고 하셨습니다. 그 날은 말씀에 따라 더 기도하면서 더 애통하는 마음으로 정말 힘들게 일곱 번을 돌라는 거예요. 엿새 동안 하루 한번씩 여섯 번 돌고, 칠일 때는 일곱 번을 도니까 지금까지 돌은 것 보다 더 돌라는 거잖아요. 하나 더 돌아서 일곱 번을 도니까 합쳐서 열세 번이에요. 그러니까 마지막에 문제가 해결 되려면 가장 칠흑같이 어둠이 오는 거예요. 더 이상 살 수 없는, 그런 일이 있을 때, 그러니까 이 13이라는 숫자는 내 힘으로는 못 당하는 세력을 상징한다고 보면 됩니다.
저도 남편이 구원 받던 해에는 성령님이 더 기도하게 하시고, 생명을 내놓게 하시고, 그러면서도 더 잠잠히, 더 애통하게 하셨습니다. 남편이 쓰러지던 날 아침에도 눈물로 기도하면서 그 날 큐티 노트에 ‘우리 남편이 구원이 안 되었어도 말세에 이렇게 기도할 수 있는 인생보다 더 기쁜 인생이 어디 있겠는가.’ 제가 이렇게 썼더라구요. 하지만 제가 침묵함의 여리고를 돌 때에, 니가 이래도 돌겠느냐, 이래도 돌겠느냐, 할 사건들도 참 많았어요. 아시다시피. 근데 제가 앉으라면 앉고, 서라면 서고, 하면서 내 인생이 오늘 죽는다면, 예수로 결론이 나야지 남편이 구원받을 텐데. 이렇게 생각하면서 큐티하면서 기도를 하는데도 더 강팍한 일이 그렇게 왔습니다. 그 마지막에 가장 최고의 강팍한 일은 샴푸를 내 옷에 들이붓는 사건이었는데, 정말 이것은 여리고 사건이었습니다. 오늘은 여호수아의 말씀대로 그 6+7의, 13바퀴의, 문자적인 간증을 해보고자 합니다. 그 날, 그 샴푸 사건이 있던 그 전 날, 술을 세 병이나 마시고, 저보고 한 병을 또 사오라고 해서, 그거 독약이니까 제발 그만 마시라고 했다가, 그냥 성경 찢고, 큐티책 찢고, 정말 폭력 당하고, 엄청난 일이 있었습니다. 난리가 나니까, 내가 술 마시지 말라는 얘기를 하는 것이 가만 있어야 하는 일인지, 말해야 하는 일인지를 끝없이 묵상했습니다. 그러니, 침묵은 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그런 상황에서 말을 한 마디라도 하면 안 되는 것이 저절로 침묵이었습니다. 그래서 침묵이 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훈련 시키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저에게 이렇게 말의 훈련을 13년 간이나 지독히 시키셨습니다. 정말 한마디도 하면 안 됩니다. 그런데 한 마디 했다가 이렇게 온 난리가 맨날 일어났습니다. 얼마나 제가 말도 안 된다고 소리지르고 싶었겠습니까. 제가 그게 얼마나 힘들었으면 서울대학교 가는 것의 천 만 배의 노력을 해서 가정을 지켰다고 했겠습니까. 그럼에도 여전한 방식으로 큐티를 하니까, 계속 수모 당하는 일이 날마다 와도 은혜가 임했습니다. 예배마다 은혜가 임하고, 그렇게 제가 적용을 하니까 말만 해도 다른 사람들이 은혜를 받고, 그 날마다의 말씀은, 그 가운데서도 내 죄를 보게 하고, 내 마음을 강타했습니다. 여전한 방식의 큐티는 암초를 넘어가서 은혜의 바다를 항해했습니다. 천국이 있다면 이렇겠구나. 하면서 천국을 사모하게 되는 그런 똑 같은 일이 계속 되었습니다. 그 샴푸 사건은 뭔가 하면요, 더 들어보세요. 샴푸 사건을 제가 그 동안에는 에스겔 3장으로 간증을 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제가 그날 살아난 말씀이었기 때문에. 그런데 문자적으로 그 날 정확한 큐티 말씀은 에스겔14장12에서 23절 말씀 이었습니다. 아침에 한 큐티는, 노아라도, 욥이라도, 다니엘이라도, 그들이 아무리 기도를 해 주어도, 그들의 아들이라도 그들은 자기 생명만 건지고 범죄한 자는 재앙이 임한다고 하는 거예요. 세상에 없는 의인이라도 자기 생명만 구한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저는 남편의 구원을 위해서 생명을 내놓고 기도하는데, 제가 아침에 얼마나 안타까웠겠습니까. 그 전날 남편이 술 먹고 난리를 쳤는데, 우리 남편이 구원받지 못 한다는 안타까움 속에, 그래도 마지막에 피하는 자가 있다는 말씀을 붙들고 남편의 구원을 위해 더욱 눈물로 애통의 기도를 하게 되었습니다. 진짜 밤새 안녕이라고, 그렇게 밤새도록 술을 마시고, 저를 밤새도록 고문을 하고, 내가 술 마시지 말라는 말 한 마디 했다고, 제가 밤새도록 잠도 자지 못 하고 수모를 당했습니다. 주일에는 남편이 병원에 나가기 때문에 그 때 처음으로 이사 가서 잠깐 고3 교사를 했었습니다. 그렇게 밤새 난리를 치고 간 고3 예배에서 아이들과 말씀을 나누면서 제가 얼마나 은혜를 받고, 끼쳤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제가 슬퍼야 되는데 기뻐서 집에 부지런히 왔는데, 남편이 그 날 병원에 안 나간 거예요. 그리고 아침부터 또 술을 마시다가, 교회 갔다 온 것이 너무 싫은 남편은, 아들을 핑계 삼아서, 아들이.. 제가 그 때 스트레스가 많아서 병원에 가서 특별히 약용 샴푸를 지어왔어요. 그게 비싸서가 아니라, 귀찮아서. 그런데 우리 아들이 자구 그 샴푸를 쓰니까 내가 왜 자구 그걸 쓰냐고 그랬더니 우리 남편이 술 먹고 안방에 들어와서 왜 이렇게 큰 소리를 내냐고. 이 사람이 이 세상의 요조 숙녀하고 살기 때문에 제가 조금이라도 소리를 내면 어디다가 여자가 소리를 내냐고. 그래서 우리 아들이 이러고 저러고 해서 내가 이거 쓰지 말라고 했다. 그랬더니 남편이 그래. 애미가 돼 가지고 샴푸가 아까워서 못 쓰게 하냐 그러더니 그걸 머리 끝부터 발끝까지 새 옷에다가 다 부어 버렸어요. 샴푸도 큰 병이었는데 제가 몇 시간을 닦았습니다. 제가 걸레질을 아무리 잘 하지만, 정말 죽자 사자 몇 시간을 닦았습니다. 욥기 7장에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크게 만드사 그에게 마음을 두시고 아침마다 권장하시며 순간마다 단련하시나이까 내가 침을 삼킬 동안도 나를 놓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대가지 하시리이까’ 처럼 분초마다 나를 단련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하게 하셨습니다. 그 날의 샴푸 사건에서, 이제 어젯 밤도 잘 견뎠는데, 그러고 속상해 하지 않고 교회 가서 잘 나누고 왔는데, 또 집에 오자 마자 엄청난 일을 당했습니다. 그런데 그 날은, 아침에 읽었던 에스겔 14장 말씀보다는 제 적용을 해야 되니까 얼마 전 큐티한 에스겔 3장 말씀이 떠오르면서, 성령이 나를 일으켜 집에 들어가 문을 닫고 벙어리가 되며 책망자가 되지 못하리라. 이 말씀으로, 내가 이걸로 남편을 책망하면 안 되겠구나. 내가 벙어리가 돼야 되겠구나. 그래서 입을 다물고 하루 종일 방을 닦았습니다. 그리고 저녁에 위험을 무릅쓰고 저녁 예배를 드리러 갔습니다. 그러니까 계속 저는 힘든 가운데 큐티하고 말씀보고 또 기도하고 그리고 이제 예배 드리러 갔어요. 저녁 예배 때의 본문은 고린도후서 4장 5절이었습니다. 그 말씀대로 하나님은 제가 남편에게 예수가 주 되심을 선포하기 위해서는 너희의 종 된 것, 즉, 내가 남편의 종 된 것도 선포해야 한다고 그 적용을 하도록 한 그 5절 말씀이 눈에 확 들어왔습니다. 내가 남편의 종인데, 주인이 새 한 마리 값도 안 되는 종에게 샴푸를 붓던지 말던지, 성경책을 찢던지 말던지, 폭력을 행하던지 말던지 무슨 상관인가. 나는 남편, 주인의 종인데. 이것을 깨닫자 제가 너무나 기쁨이 몰려왔습니다. 말씀으로 금새 마음을 바꾸신 주님, 이것이야 말로 기적 아닙니까? 그래서 이 말씀이 깨달아 진 게 너무 감사해서, 이렇게 에스겔 3장 말씀 이걸로 깨달아 지는 게 너무 감사해서 나는 왜 이렇게 밟혀야 말씀이 깨달아지나, 생각하면서 집에 와서 무릎을 꿇고 말씀대로 남편에게 적용을 했습니다. ‘당신, 나 같은 것이랑 살아줘서 너무 고마워요. 나 정말 당신의 종이에요.’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 남편은 반응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남편의 태도가 변하기를 기대하면서 말한 것이 아니었어요. 말씀을 깨닫고 그 말씀대로 순종하는 마음으로 말했기 때문에 남편의 변화와 상관 없이 기뻤습니다. 저는 정말 남편의 마음을 체휼 하려고 너무 애썼지만, 제가 해 줄 수 있는 게 없었습니다. 나중에 지나고 나서 보니까 우리 남편은 산부인과 의사로서 자기가 너무 죄 가운데 있으니까 그 죄의 문제를 제가 해결해 줄 수가 없는 거예요. 내가 밥 잘 해줘서 그 사람의 기분을 좋게 해 주는 거면, 제가 백 번 하겠는데, 자기 죄 가운데 있고, 이 때가 클라이막스니까, 정말 자기가 술을 먹어도 먹어도 잊어지지가 않는 거예요, 자기의 죄 문제가. 근데 저는 그냥 그걸 어떻게 해결해야 되는지, 내가 정말 우리 남편의 마음을 좀 체휼 했으면 좋겠는데. 그래서 저는 침묵하는 것 밖에 할 수 있는 것이 없었습니다. 이번에 여호수아 6장을 보면서, 침묵 기도의 뜻을 다시 생각하게 되었어요. 여기 그대 있었던 증인들이 있지만, 제가 그렇게 적용하고 충만하니까 정말 남편이 밉지가 않았어요. 항상 그 사연을 생각해보라 그랬는데 그냥 너무나 불쌍했습니다. 참으로 구원을 위해서 사는 자는 어떤 일이라도 여전한 방식으로 말씀대로 적용하고 간증하니, 상담을 해도 은혜가 충만해서, 제가 이런 식으로 얘기를 하니까 이혼을 철회하고 예수를 영접하는 역사가 막 일어났어요.
16절부터 19절까집니다. 드디어 16절에 이 성을 주셨느니라 고 했으면, 17절에 바로 여리고가 무너진 함락 기사가 나와야 할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이 승전보를 거창하게 알리는 것이 아니라, 무너지기 직전에 여리고가 무너져도 너는 거기서 전리품을 취하지 말라 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남편이 예수님을 믿으면 나한테 잘 해주겠지? 예수 믿으면 우리 애들이 공부 잘 하겠지? 이런 마음으로 기도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시어머니 사장님의 덕을 보려고 전도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 길고 긴 전투의 유일한 상급은 오직 하나님 자체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Q. 하나님 힘으로 무너진 여리고에서 전리품을 취하려는 마음은 없습니까?
Q. 배우자, 자녀, 시부모, 상사를 전도하고, 내가 취하고자 하는 전리품은 무엇입니까?
Q. 내가 전도해서 사람이 달라졌다고 생색내고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이런 모든 것을 저에게 제하기 위해서 수 많은 사건을 허락하셨습니다. 16절 마지막에 일곱 바퀴를 돌고 크게 소리지른 힘든 적용이 저로서는 그렇게 이제 샴푸 사건 날인데, 그 때 에스겔 3장과 고린도후서 5장과 에스겔 14장으로, 그 날 분초마다 제가 말씀으로 제 사건을 해석해 갔어요. 그런데 그렇게 너무나도 이틀의 사건은 정말 제가 죽고 싶을 만큼 수치를 당하고 정말 육체적으로도 힘든 걸 당하고, 그래서 돌기가 너무 힘들었지만 그 날 꼭 7바퀴를 돈 것 같아요. ‘니가 이래도 살겠느냐.’ 하는 그 큰 은혜를 경험한 후에 정말 문자적으로 7일 째에 남편의 육적 여리고가 무너진 사건이 온 것입니다. 급성 간암으로 갑자기 쓰러진 남편은 제게 기도를 부탁했어요. 날마다 제가 벙어리로 침묵하던 저였지만, 기도를 해달라고 할 때 죽음을 앞 둔 그 날, 저는 모든 교양을 내려놓고 6일째 돌다가 7바퀴를 돈 것처럼, 지금 게다가 암 선고를 받았잖아요. 가장 힘든 날, 도리어 회개하고 천국 가지 않으면 나는 살 소망이 없다고 밤새도록 외치고 부르짖었습니다. 바로 이것이 일곱 째 되던 날 외치고 부르짖은 사건이었습니다. 평소에 말 한 마디 못 하다가 진짜 살려야 될 때는 정말 그게 일주일이에요. 14장에서 샴푸 사건이 나고 18장에 우리 남편이 갔으니까 날짜로 보면 딱 7일 째 되던 날 남편의 육적인 여리고가 무너져 내린 것입니다. 생명 내놓고 날마다 여리고 성을 돌며 기도했더니, 그 날 드디어 육적인 여리고가 무너지고 영적으로 세워주셨습니다. 남편은 너무나도 자기의 죄를 인정하고 시인하고, 낙태 수술 한 것에 대해서 회개를 하고, 그리고 주님을 영접하고 다섯 시간 만에 천국에 입성을 했습니다. 너무나 일촉즉발의 시간이 아니었겠습니까. 그게 정말 다섯 시간 전에 제가 막 외치지 않았으면 정말 이것은 무너져 내릴 수가 없었던, 여전한 방식의 생활 예배의 승리였습니다. 십자가는 바로 지혜고, 지혜는 타이밍이었던 것입니다. 내가 그 시간을 알았겠습니까. 여리고는 하루의 침만으로 무너진 것이 아닙니다. 여전한 방식의 엿새 동안의 침묵의 기도가 철벽 여리고를 조금씩 무너뜨리고 있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20절입니다. 여리고성 함락 기사는 6장 전체에서 딱 한 번 나옵니다. 그러니까 여리고가 무너졌다는 것보다 그 과정이 훨씬 더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자녀가 입시에 붙고 떨어지고가 문제가 아닙니다. 바람난 남편이 제자리에 돌아오는 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직장 상사가 예수님 믿게 됐다고 좋아할 게 아닙니다. 내가 어떻게 그런 과정을 거쳤는가, 그때까지 어떤 과정을 거쳤는가가 더욱 중요합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은 한 번의 결정적인 행동에 의해서 규정되는 것이 아니라, 반복되는 행동에 의해서 규정된다. 그러므로 위대한 것은 습관이다.’ 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어떤 삶을 살고 있는지, 날마다의 과정을 보십니다. 날마다 구별된 가치관으로 내가 신을 벗고 전쟁을 하고 있나, 예배 공동체에서 무장한 사람을 앞에 세웠나, 언약궤 말씀을 중심으로 움직이고 있나 를 보시는 것입니다. 제가 남편 구원이라는 여리고 성을 13바퀴 돌면서 무엇을 깨달았겠습니까. 주님, 저는 여리고를 절대로 무너뜨릴 수 없습니다. 저는 여리고를 함락 시킬 수 없습니다. 이것이 제가 깨달은 것입니다. 제가 할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는 거예요. 하나님이 해 주시지 않으면 남편은, 우리 어머니는, 내 자녀는, 우리 아내는, 우리 직장 상사는 변화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을 고백하라는 것입니다. 이 고백이 여전한 방식의 성령 충만의 비결입니다. 여러분은 자꾸 내가 하다가 안 되면 정죄감이 들어가잖아요. 내가 남편의 있는 모습 그대로를 인정해 주지 않아서 남편이 안 변하는 거다. 그런 참소가 자꾸 들어와요. 내가 말씀만 보지, 하늘에 살아가지고 이 땅에 속한 남편과의 소통을 땅의 언어로 하지 않으니까 우리 남편이 구원을 못 받는 거다 라는 계속된 정죄가 제 마음 속에 계속 들어오고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렇게 말씀을 보고 그 날 사건을 해석하니까, 제가 샴푸를 다 들이 부었을 때, 그리고 지금 이게 대화가 안 되는 거잖아요. 남편과 대화가 안 되는 건데, 그 때마다 제가 침묵을 하면서 가만히 있어야 되는 건지 말아야 되는 건지를 사건만 나면 끝도 없이 제가 묵상을 하게 되는 거예요. 얼마나 생각을 많이 했으면 이 성경이 깨달아지고, 결국은 이렇게 여러분들까지 섬기게 됐겠습니까. 여러분들은 너무나도 정죄감도 가지지 마시고, 오직 후회하지 마시고 회개를 해야 되는데, 회개인지 후회인지 경계선이 모호해서 내가 확신 있게 깨닫기가 어려운 거예요. 인간은 100% 죄인이기 때문에, 또 내가 완전하지 못 하잖아요. 내가 완전하지 못 한 부분이 너무 너무 많은데, 하나님이 깨달아서 어떤 한 부분을 저를 깨닫게 하실 뿐이지, 제가 얼마나 완전하지 못 한 부분이 많겠습니까. 지금도 저의 어떤 한 부분을 그냥 쓰시는 거지 제가 부족한 게 너무나 많은 것이에요. 그러니까 하나님 앞에 나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이 고백이 여전한 방식의 성령 충만의 비결인 것 같아요. 내가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거예요. 말씀보고 가지만, 정말 제가 서울 대학에서 피아노를 전공하고 그 열심으로 모든 걸 했으니까 남편도 내 열심으로 섬겨서 순종 잘 해가지고 딱 작품으로 내놓고 싶은데 이게 안 되잖아요. 제가 잘난 거 만큼 너무 인내하고, 하는 게 많은 것 만큼 제가 정말 생각을 많이 하고 정죄의 정죄를 거듭해서 결국은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저로 하여금 정죄가 아닌 회개로 가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려 주셨습니다. 하나님 앞에 돌아오기까지 중요한 것은 언제가 아닌 어떻게 입니다.
Q. 강팍한 배우자, 문제 많은 자녀 여리고를 여전한 방식으로 침묵하고 외치며 13바퀴를 돌면서 구원으로 취한 간증이 있습니까?
Q. 그 간증이 잇기까지 내 삶의 모든 내용들이 기적이요 은혜였음을 깨닫고 있습니까?
여전한 방식은 강팍한 적에게도 통합니다. 여전한 방식의 예배는 내가 이기는 전쟁입니다. 여전한 방식의 예배는 인내로 기도하는 것입니다. 여전한 방식은 예배 공동체가 중요합니다. 여전한 방식의 영육간의 예배는 무장한 군사가 선두에 섭니다. 여전한 방식은 지나고 보니 가장 비범한 방식이 되었습니다. 참으로 은혜 아니면 이 길을 걸어올 수가 없었습니다. 여러분들에게 은혜가 임하셔서 설 수 있도록 도와주시기를 기도합니다.
기도제목
이선애
1. 암 덩어리가 작아져서 수술이 간단해 지도록
2. 사건을 통해 엄마가 구원받기를
이은혜
1. 여전한 방식으로 기도, 예배, 말씀 볼 수 있도록
2. 기도가 필요한 지체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 잊지 않도록
3. 작은 오빠의 구원을 위해서(공동체에 나올 수 있도록)
강혜림
1. 여전한 방식으로 예배드리고 큐티하면서 내 죄 잘 보도록. 여리고 같은 가족, 지체위해 기도하기
2. 논문 미루지 말고 매일 쓰기를
3. 내일(월) 면접에 지혜의 언어로 자기 소개 하고 앞으로의 진로 하나님께 맡기고 순종하기를
4. 남동생 공동체 오고 가족들에게 구속사의 말씀이 들리기를
5. 신결혼
박세현
1. 가족구원(아빠, 엄마, 세라, 동규)
2. 동생(세라)에게 출애굽 간증과 사죄를 했는데, 꼭 교회 와서 함께 예배 드리고 말씀이 들리기를, 목장 참석도 할 수 있도록
3. 여전한 방식으로 생활 예배 잘 드릴 수 있도록
4. 매사에 분별 잘 하고 모든 관계 속에서 지혜롭게 대처하도록
5. 유치부 아이들의 영육 강건
6. 신교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