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법이 죄인가(로 7:7~16)
나를 살리는 회개를 해도 율법은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천국 가는 그날까지 성화를 이뤄야하기 때문입니다. “모든 남자들의 참을 수 없는 유혹”의 저자 중 하나인 프레드 스토커는 예배를 드리고 기도를 해도 계속 하나님과 거리가 생겨서 한동안 괴로워했다고 합니다. 그가 발견한 죄는 주말 신문에 껴오는 전단에 실린 속옷모델의 사진이었다고 합니다. 주일 아침마다 칼라로 찍힌 속옷 모델의 사진을 찾아보며 야한 잡지를 사서 보는 사람보다는 낫다고 생각했다고 합니다. 내속에서 죄라고 알려주는 율법이 있기 때문에 생활 속에 죄가 못 들어갑니다. 그러면 율법은 죄일까요? 아닐까요? 오늘 바울 사도를 통해서 말씀을 듣고자 합니다.
1. 율법은 죄를 알게 해줍니다.
율법과 죄는 불가분의 관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으로 우리의 죄가 죽었습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자유를 가져다주었습니다. 그렇다면 율법자체는 죄일까요? 바울은 그럴 수 없느니라가 바울의 단언입니다. 죄와 율법에 대해 죽었으니 장해지라고 하면 아예 율법이 필요 없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알아야 죄를 알기 때문입니다. 헬라어로 죄의 의미는 '표적을 빗나가는 것', '가지 말라는 곳을 가는 것', ‘건너지 말아야 할 곳을 건너는 것’, ‘불법’, ‘불경건’, ‘불순종’, ‘불의’, '내적인 악행‘, ’외적인 악행', ‘빚’ 등 정도와 수준에 따라 하는 것, 하지 않은 것 모두 죄에 해당합니다.
탐심은 내적인 악행이라 할 수 있는데, 십계명을 보면 첫 번째 계명부터 아홉 번째 계명까지는 외적인 죄를 언급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마지막 열 번째 계명에서는 ‘탐내지 말라’는 내면의 죄를 말합니다. 비중이 약해서가 아니라고,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섬기고, 안식일을 어기고, 부모를 공경하지 않고 살인하고, 도적질하고, 간음하는 모든 죄가 탐심에서 비롯되기 때문입니다.
심리학자들은 탐심을 죄라고 하지 않으며, 인간에게 있는 자연스러운 욕구라고 합니다. 외적인 도둑질이나 살인만 죄라고 합니다. 율법은 외적인 행동과 언어로는 나타나지 않았을지라도 내 속에 있는 탐심이 죄라는 것을 알려줍니다.
프레드는 어떻게 자기 죄를 알게 되었을까요? 그는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이미 마음에 이미 간음 하였느니라”(마 5:28)말씀을 기억했습니다. 자신이 광고 전단을 보는 것 뿐 아니라, 일상생활에서 성적농담이나 비유를 잘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것은 “음행과 온갖 더러운 것과 탐욕은 너희 중에서 이름에서도 부르지 말라”(에 5:3 )는 것을 무시한 것입니다. 책에서 제시하는 남자들이 죄의 목록은 외도나 유흥업소 출입은 포함되지도 않습니다. 저자는 ‘늘씬한 여자가 지나갈 때 곁눈질로 훑어 쳐다보기’, ‘직장여성 동료의 뒷모습을 보면서 속으로 품평하기’, ‘속옷 광고 모델을 멍하게 바라보기’, ‘헐렁한 옷을 입은 여성이 몸을 숙일 때 눈을 피하지 않고 주시하기’ 등 모두가 알고는 있지만 사소하게 여기는 것들을 가차 없이 죄의 범주에 놓고 있습니다. 저자가 상담했던 남성들 중에는 ‘출장 때, 호텔에 머물 때 마다 포르노 채널을 보는 남자’, ‘가족 모두가 자고 있는 아침마다 운동 프로그램에 나오는 여성의 몸을 감상하는 남자’, ‘이웃집 여자가 일광욕하는 모습을 훔쳐보는 남자’ 등이 있습니다. 목욕하는 밧세바를 훔쳐보다가 일을 저지른 다윗의 생각이 납니다.
이런 행동들은 성 중독의 일반적 기준으로 보면 가장 낮은 1단계에도 미치지 못하지만, 그리스도의 기준은 사람이 아닌 하나님께 있기 때문에, 온전한 거룩을 이루는 0단계에 이르러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생각이 지나치게 율법적이라고 하며, 그 정도는 죄가 아니라고 하고 싶지만, 예수님은 “음욕을 품는 자 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 하였느니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출애굽기 20장 17절에도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지니라”, “네 이웃의 아내나 남종이나 여종이나” 등등 소유를 탐내지 말지니라 했습니다.
마음의 탐심을 누가 알게 해줍니까? 율법이 알게 해줍니다, 율법이 탐내지 말라고 하니까, 더 탐심이 나서 내속의 탐심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여자들의 성형중독, 쇼핑중독도 다 마찬가지입니다. 처음에는 보기만 하고 와야지 하지만, 보고 와서 하루 종일 짝사랑 하느라고 생각이 맴돕니다. 다시 사는 것과 외도하는 것과 무슨 차이가 있습니까? 죄라고 생각이 없으면 누가 말립니까.
육신은 죄의 도구이며, 죄는 율법을 통해 드러납니다. 그 결과는 죽음입니다. 육신과 죄와 율법과 죽음은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입니다. 음란은 간음이 드러난 것이고, 미움은 살인이 드러낸 것입니다. 우리 가운데 내 죄를 못 보면, 죽이고 행동으로 나갑니다.
적용) 나에게 드러나지 않는 탐심을 율법으로 알게 된 것이 있습니까?
2. #65279;죄는 살리고 나는 죽입니다.
기회는 거점이라는 뜻인데, 죄가 율법을 거점으로 삼아서 탐심을 이루었다고 합니다. 율법이 하지 말라고 하니까 더욱 호기심이 생겨서 죄를 짓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동산 나무의 모든 실과는 다 먹어도 되지만, 선악을 알게 하는 실과는 먹지 말라고 아니까 사단이 그것을 기회로 삼아 원죄를 짓게 한 것처럼 말입니다. 인간의 본성은 하지 말라고 하면 더 하고 싶어 합니다. 그렇다고 율법이 잘못입니까? 율법은 단지 거점이 됐을 뿐 내속에는 이미 죄성이 있었습니다. 슬그머니 뿌리 내린 탐심을 율법이 휘저어 놓았을 뿐입니다. 내속의 죄성이 있고, 달궈진 화덕 같기 때문에 악하고 음란한 것들을 행할 마음이 있어서 가보는 것이고 내속에 죄성이 있기 때문에 율법이 휘저어 놓을 때, 그것을 하고자하는 마음이 있는 것 입니다.
법을 몰라서 죄의식이 없을 때는 내 뜻대로 살았는데, 계명이 이르매 죄가 살아나고, 내가 죽었다고 합니다. 죄가 무엇인지를 알게 되자 죄의식이 생기기고, 내 힘으로는 율법을 지킬 수 없다는 것을 아는 것이 죄는 살아나고 내가 죽는 것 입니다.
사도바울은 유대인중의 유대인 이였고 율법으로는 흠이 없었지만, 예수님을 만나고 계명이 그에게 이르고 나니까 율법이 복음된 것입니다. 무서운 죄책감을 느꼈습니다. 스데반을 돌로 쳐 죽이고도 죄책감이 없었던 그가, 스스로를 “죄인중의 괴수”라고 고백했습니다. 가공할 만한 자기 죄를 보게 된 것입니다.
죄가 살아나는 것은 은혜입니다. 죄가 살아나고 내가 죽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설명이 안 됩니다. 아무리 율법을 읽고 알아도 계명으로 나에게 이르러야 내가 죽을 수 있습니다. 부모를 공경하라, 간음하지 말라는 하나님의 뜻이지만, 계명으로 내게 이르지 않으면 알 수 없습니다. 성경지식이 아닌 나에게 일러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이 있어야 죄가 무엇인지 알고 내 죄를 깨닫고 죄는 살아나고 내가 죽는 은혜가 임하는 것입니다.
저자가 죄를 이기는 방법을 제시하는 것은 의외로 참 간단합니다. 내속에서 죄가 살아나는 인식이 되면, 사소한 것부터 적용을 합니다. 참을 수 없는 유혹을 이기기 위해서는 먼저 성적 자극으로부터 눈을 피하라는 것입니다. 저자는 실제로 교회에서 강의를 하면서 의도적으로 눈을 돌리는 적용을 6주 동안을 하니, 대부분의 사람이 자유로움을 느꼈다고 합니다. 그 결과를 통해 남성들이 행하는 성적 부도덕은 본능이 아닌 습관인걸 알게 됐습니다. 대부분의 죄는 눈이 죄를 옮기는 통로이기에 의도적으로 습관을 끊습니다. 하지만 그곳에도 예수님의 은혜가 없으면 죄에서 벗어나는 것은 일시적일 뿐이며, 또 다른 유혹에 빠지기 시작합니다. 안목의 정욕을 끊고 나면, 이생의 자랑이 틈타고, 이생의 자랑을 내려놓으니 육신의 정욕이 들어옵니다. 그래도 아주 소소해 보이지만, 눈 돌리는 훈련을 했다는 것 자체가 율법이 그게 죄라는 것을 알려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냥 훈련이 아니라 계명으로 다가오는 것이 있었기 때문에 훈련이 훈련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적용) 매일 묵상하는 말씀이 나를 살리고 있습니까? 정죄하고 있습니까?
죄를 깨닫는 것이 아주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성경에서 문둥병을 저주받은 병으로 표현하는 것은 아파도 고통을 느낄 수 없기 때문입니다. 피부에 감각이 없어서 밤에 잘 때 짐승이 손을 갉아 먹어도 모른다고 합니다. 유리조각을 밟아도 통증을 못 느끼므로 손가락 발가락을 다 잃어 갑니다. 마찬가지로 영적 문둥병은 죄에 대한 감각이 없어서 회개하지 못하고 죽어갑니다. 예수님을 만나서 죄에 대한 감각이 살아났습니다. 이것이 죄가 살아나는 것입니다. 영적 문둥병이 고쳐지기 시작했습니다. 감각이 살아나니까 가시에만 찔려도 아픕니다. 죄에 대한 감각이 살아나고 말씀을 알아서 그 감각이 예민해 질수록 너무 아파서 견딜 수가 없습니다. 남들은 사소한 죄라고 하는데, 나는 그 고통 때문에 참을 수가 없습니다. 내 죄 때문에 너무 아파서 애통하는 것입니다. 만약 내 죄 때문에 애통하는 것이 없다면 내가 영적 문둥병자라는 것을 알아야합니다.
계명이 나에게 이르면 도덕과 윤리를 넘어서는 죄를 알게 됩니다. 노예가 법적인 주인 소유물이라고 해도 그가 나와 동등한 인격체라는 것을 알면 그 누구도 함부로 대할 수 없습니다. 율법의 기능을 모르면 죄도 알 수 없고 피를 흘리며 유리조각 위를 걸어도 아픈 줄 모릅니다. 음욕을 품고 간음을 하고 살인을 해도 죄인 줄을 모릅니다. 그 죄가 자신도 남도 고통스럽게 한다는 것을 전혀 모릅니다. 그래서 바람을 피고 나가는 게 얼마나 힘들게 하는지를 모르고 죄를 모르면 그게 절대 아픔이 되질 않습니다. 자기가 유리 조각 위를 걸어다는 짓을 해도 아픈 줄을 모르기 때문에 돌아오지 않지만 계명이 이르면 그것이 얼마나 무서운 죄인 줄 알고 죽을 만큼의 고통을 느끼는 것입니다.
적) 말씀에도 죄에도 감각이 없는 영적 문둥병자는 아닙니까?
죄는 언제나 기만을 동반합니다. 보인이라는 신학자는 죄의 기만을 ‘죄의 가운데 만족을 찾을 수 있다’. ‘죄의 대해서 충분히 핑계될 수 있다’. ‘죄의 결과로부터 도피할 수 있다’.
이 세 가지로 정의 합니다.죄는 우리가 죄를 지으면 자꾸 만족할 수 있다고 속삭입니다. 죄에 대해서 얼마든지 핑계를 댈 수 있다고 속입니다. 그럴 수밖에 없어서, 부모님과 환경 때문에 죄를 지었다고 합니다. 죄를 핑계대게 해줍니다. 남들도 다 그렇게 산다고 괜찮다고 죄의 결과를 피할 수 있다고 속입니다. 그렇게 속이고 또 속여서 결국은 나를 죽이는 것이 죄의 기만입니다.
율법의 요구는 외적인 것과 내적인 것을 다 포함합니다. 살인하지 말라는 외적인 것이지만, 내적으로 미워하는 것도 살인이니까, 미워하지 말라고 합니다. 간음하지 말라는 외적인 것인데, 내적으로 음욕을 품어도 간음이라고 했습니다. 외적인 살인과 간음도 안 하기가 어려운데, 내적인 미움과 음욕도 품지 말라고 하니까 지킬 수 있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 틈을 타서 사단이 나를 속입니다. "너는 살인은 안했잖아, 너는 간음은 하지 않았잖아, 그런 사람과 질이 틀려", "넌 흠이 없어", "너는 구원에 이를 수 있어", 이것이 죄가 기회를 타고 계명으로 말미암아 나를 속이는 것입니다.
적용) 이래도 나정도면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합니까?
그런 죄의 기만에 넘어가서 회개할 기회를 잃는다면 나에게 남는 것은 죽음뿐입니다.
율법은 죄를 알려줍니다. 율법은 죄를 살리고 나를 죽입니다.
3. 그러나 율법은 선한 것 입니다.
율법에는 하나님의 의로우심이 나타납니다.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습니다. 구별된 삶, 거룩한 삶을 살게 해주는 것이 성경입니다. 어떻게 살게 해주나요? 율법을 보면서 내 자신의 죄를 알게 되고, 절망을 해가니 율법은 거룩하고 의롭고 선한 것 입니다.
자기 죄로 멸망당하는 것이나 자기 죄를 똑바로 보게 되는 것은 힘들기가 같은 고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오픈하기 싫어하는 것이고, 내속에 무언가 죽지 않으면 오픈할 수 없으며, 하나님도 그 안에 뭐가 죽지 않으면 우리를 참으로 용서하실 수 없습니다. 내속에 뭐가 죽어야지 누구도 용서할 수 있는 것입니다.
죄로 심히 죄 되게 하는 것이 무엇 입니까? 로마서 7장에는 “나”라는 단어가 7절에서 25절까지 34번이나 나옵니다. 나를 살리는 회개를 한 이후에, 그만큼 자신과의 싸움이 치열해졌습니다. 분명 내가 하는 일인데도 나도 모르는 일이 있습니다. 예배와 설교의 은혜를 받고, 말씀대로 살기를 기도하고 결단합니다. 하지만 가정과 직장 내 삶의 현장에 가면 도리어 미워하는 그것, 게으름, 거짓말과, 중독으로 살아가는 나를 보게 됩니다.
표준 새 번역에는 “그렇게 미워하는 그런 일을 행하면서도 그것을 행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하는 것”은 곧 율법이 선하다는 것을 동의하는 것입니다. 내가 죄를 지으면서도 죄를 짓지 말아야한다고 생각하는 그 생각이 율법 곧 그 선을 알려주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모를 때는 죄를 안 지어야한다는 생각을 못했는데, 하나님을 믿고 그 말씀이 옳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죄를 지으면서도 안 지어야겠다는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온갖 합리화를 하면서 우리가 미워하는 것을 메어하는 것을 행하는 것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우리가 진짜 나를 살리는 회개를 하고 넘어가는 것은 놀라운 영적인 파워에 넘어가는 것입니다. 놀라운 지식과 능력에 넘어갑니다. 친밀감에 넘어갑니다. 육체적 매력에 넘어갑니다. 감정에 충실하라고 외치는 문화적인 메시지에 모두가 넘어 갑니다. 내감정대로 한다면 이혼안할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부부가 살면서 감정에만 충실 한다면 바람 안 피우고 살 사람이 있겠습니까? 영적인 사람은 영적으로 잘 통해서, 지식적인 사람은 지적수준이 맞는 다고, 육적인 사람은 육체적으로 끌린다고 얼마든지 합리화 할 이유가 있습니다. 일부러 배신하고 상처 줄려고 그런 것이 아닙니다. 저절로 내 감정대로 행하다 보면 원치 않는 외도와 이혼을 행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 위에 하나님이 짝지어준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 할지니라” (마태 19:6), 내 뜻과 감정을 쫓아 행했다가 실패를 맛보고 나면 어쩔 수 없이 그 말씀이 맞다고 말씀이 선한 것을 시인하게 됩니다. 정말 고난이 축이라는 것, 실패를 통해 내 감정과 의지보다 세상 어떤 가치보다 말씀이 우선이라는 것을 인정하게 됩니다.
선한 율법으로 내 죄를 알게 되니까 절망하게 됩니다. 사업이 부도나고 남편이 외도를 하고, 자식이 속을 썩이고, 시어머니가 힘들게 하는 것이, 내 인생 최고의 고난인줄 알았는데, 그보다 더한 고난이 내 자신을 직면하는 것입니다. 내속의 죄와 더러움을 보고 나도 싫은 내 자신을 보면서 죽을 것 같은 절망을 느낍니다. 왜냐하면 나도 싫은 내 자신을 직면해야하는 그게 너무 고통이고 내 자신이 잘못했다는 것을 인정 하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입니까? 그래서 우리는 그것을 인정하지 못합니다.
그렇다고 율법이 나쁜 것 입니까? 율법이 악하다고 할 수 있습니까? 율법은 죄가 아닙니다. 죄로 심히 죄 되게 하는 율법은 고맙고 선하게 하는 것입니다. 죄가 드러나고 죄를 인정하는 것이 너무 힘들지만, 그것을 인정하는 것만이 살길입니다.
자기를 본다는 것은 자기 죄로 죽는 다는 것과 똑같을 만큼 어려운 것입니다. 불치병으로 죽어가는 나에게 치료자인 예수님을 소개해 줍니다. 아무리 많은 학문을 연구하여도 자신에 대해서 무죄한 것이 인간입니다. 율법을 바르게 안다는 것은 내가 얼마나 죄인인지를 깨닫게 해주고 내가 얼마나 불쌍한 존재인지를 깨닫는 것 입니다. 율법 자체는 너무나 선한 것입니다. 선한 것을 지킬 수가 없어서 고통일 뿐입니다. 율법의 행위로는 그의 앞에 의롭다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습니다. 율법을 주신 것은 죄를 깨닫게 해주시기 위함입니다. 율법이 선한 것으로 나에게 역사하려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과해야 합니다. 십자가를 통과하지 않는 사람은 내가 할 수 있다고 내 힘으로 선하게 살 수 있다고 뚝심으로 버티고 살아갑니다.
교회에 못 오게 하는 사람 가운데는 경제적으로 왕 노릇하는 사람, 인본적으로 착한 사람들이 으뜸입니다. 행위로 의롭다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다고 했는데, 인간의 전적 타락과 전적인 하나님의 주권을 믿는다면, 지내 놓고 보면, 이 땅에서 겸손할 수밖에 없는 환경은 축복입니다. 내가 왕 노릇하면 지금은 좋은 것 같아도 인생이 얼마나 슬프고 괴로운지 모릅니다.
낸시 마이어즈는 “범죄를 불가능하게 하는 것은 사랑밖에 없다.”고 했습니다. 어거스틴도 “사랑으로가 아니면 선해질 자가 누구냐? 하나님을 사랑하라 그리고 하고 싶은 데로 다하라”라고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며 술, 담배, 바람, 거짓말, 사기, 시기, 질투, 미움 등을 마음대로 해보아도, 율법이 그것을 죄라는 것을 알게 해주지만, 이런 문제들을 해결해 줄 수는 없습니다. 죄를 끊는 것은 오직 사랑으로만 가능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면 내 가족 이웃, 다 사랑하고 술과 담배도 끊게 됩니다. 내 몸이 하나님의 성전인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율법을 통해 내 죄가 살아나는 은혜를 경험하고 내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죄인이기에 하나님만을 사모하는 것, 삶의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전심으로 사랑하는 것, 이것이 바로 율법의 정신입니다. 그래서 율법의 완성은 사랑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은 선한 것입니다. 율법은 죄가 아닙니다.
적) 죄를 드러내는 말씀이 지겹고 힘듭니까? 큐티를 해도 죄가 해결되지 않는다고 죄를 끊는 대신 큐티를 끊었습니까?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지 않아서 나의 큐티와 예배와 기도가 무력하다는 것을 인정합니까? 율법은 선하다는 것을 인정하십니까?
* 목장 참석자 : 문보호(75), 박정훈(78), 김태원(77), 정율(77), 황순영(78), 정의현(79)
* 나눔:
목원2 의 죄 고백 및 가정사로 인해 지난날 깊게 베여있던 피해자 입장의 상처들로 지금의 모습들을 괴로워하는 사연을 나누며, 목원들의 숨겨진 죄들을 오픈하게 되었고, 상처가 별이 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목원들의 상처와 아픔을 위해 중보기도 하였고, 각자 가지고 있는 음란과 술 중독이 끊어질수 있도록 기도제목을 부탁하였습니다. 특히 일상생활에서 영적으로 홀로 잘 서있고, 혼자만의 시간에 음란의 시간이 아닌 예배의 시간으로 하나님과 교제하고, 혼자 잘 있는 목원들이 되길 하나님께 의지하며, 바로 설수 있길 소망하며 기도로 마쳤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