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설교말씀
“소명” (골로새서1:1~2)
사역에서 섬세함이란 아주 단순하게 말해 다른 누군가의 고통에 대해 마음의 결을 맞추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것은 다른 사람의 눈물을 먹는다는 뜻입니다. 눈물을 먹는다는 것은 눈물을 직접 흘리는 사람에게는 물론이려니와 그 눈물을 닦아주는 사람에게도 유익합니다. 이 사역은 예배 공동체인 교회에서 끊임없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포기하지 않으시고 계속 부르시는 아버지의 부르심처럼 생애 마지막까지 복음을 전하는 것이 우리들교회를 부르신 소명에 응답하는 삶이 아닐까 싶습니다.
1. 소명에는 하나님의 뜻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계획 속에서 한 개인에 대한 하나님의 의도와 기대를 말합니다. 그것은 나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 있다는 것입니다. 바로 그 하나님의 뜻이 소명입니다. 그래서 소명은 부르심으로 번역됩니다. 성경을 소명이라는 시각에서 본다면 그 메시지의 중심은 하나님이 사람들을 자기에게로 부르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소명이란 현재 우리의 모습 및 행위와 다 관련될 뿐 아니라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장차 우리의 될 모습과도 관련됩니다. 부르실 때는 개별적인 소명뿐만아니라 공동체적인 소명도 부여하십니다. 우리들교회의 소명은 이것입니다. 가정을 세우고, 남자들을 세우는 것. 어떤 것 하나도 하나님의 뜻이 아니면 해서도 안되고, 뜻이면 해야합니다. 가정이나 나라나 교회나 하나님의 뜻이 있습니다.
Q. 하나님의 뜻으로 부르심 받은 자리는 어디입니까? 하나님의 뜻이라면 기름부으심이 있을 것입니다. 그 자리가 힘들다면 소명을 다시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2. 소명에는 동역자가 있습니다.
진정한 소명이라면 형제라 부를 수 있는 동역자를 허락하십니다. 아버지가 헬라인인 디모데는 배경은 좋지 못하였습니다. 바울의 동역자가 되기에는 출신이 따르지 못했습니다. 이런 디모데였는데 1차 전도여행때 그리스도인이 된 이후로 한결같이 믿음이 성장하여, 아들로 시작한 디모데가 성정하여 형제로 부름을 받습니다. 이것은 내 힘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맡기고 하나님의 힘으로 가르칠 때 가능합니다. 자기의 재능과 소명은 다릅니다. 은사라고 할 수 있는데, 은사는 정말 십자가를 통과해서 고통이 나타나야 진짜 자기의 은사, 소명이 나타나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을 제쳐놓고 우리가 추구하고자 하는 곳에서 행복을 발견하고자 하면 오산입니다. 우리 자체가 불완전하기 때문에 끊임없이 우리를 완전하게 만들어 줄 무엇을 찾지만, 불완전한 내가 원하는 것은 다 불완전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선 더 이상 떨어질 곳도 없다고 부르짖는 내 인생의 밑바닥 수준으로 내려오셔서 이끌어 주셨습니다. 사랑의 본질은 상대방의 가치와 상관없이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사랑이 나를 불러주시고 더 나아가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로, 또 형제와 동역자로 삼아주십니다.
Q. 소명의 자리에 함께 할 동역자, 형제가 있습니까? 있다면 누구입니까?
3. 소명에는 차별이 없습니다.
디모데도 차별이 없지만, 한 사람에게 차별이 없는 사람이 공동체적으로 차별없는 교회를 찾아가게 됩니다. 골로새교회는 처음에는 라우디게아, 히에라볼리와 함께 성장했으나, 가공할 만한 지진 이후 삼류도시로 전락했습니다. 보통 힘들어지면 신흥이단들이 판을 칩니다. 내 힘든 환경을 잊어버리기 위해 대부분 기복이나 이단으로 가게 되어 있습니다. 현실을 직면하기 싫어합니다. 이 세상에서 회복되는 걸 바라보면서 다 이상한 이단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택한 받은 사람들은 절대로 이단에 가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다 욕심 때문에 간다고 생각합니다. 골로새교회는 학대가 많았기에 2천년이 지난 지금 성경에서 언급하는 교회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소명이 있다면 디모데 같은 사람, 골로새 같은 교회에 찾아가서 차별없이 전하고 또 가르쳐야 합니다. 사람 사이에 모든 인위적인 구별은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녹아 없어져야 합니다. 교회는 자발적으로 그런 공동체를 형성해야 합니다. 그것은 예수그리스도 때문입니다. 이와 같은 공동체는 아무래도 가족의 모습과 유사합니다. 비록 화를 내기도 하고 때려주기도 하고 욕설이 난무할 때도 있지만 가족은 내가 가면 받아주지 않을 수 없는 곳이 아니겠습니까?
Q. 내가 찾아가야 할 영육간에 힘든 소명의 대상, 골로새교회는 누구입니까?
4. 소명에는 은혜와 평강이 따라옵니다.
은혜와 평강이라는 단어를 바울 사도가 잘 쓰는데 은혜는 카리스라는 헬라식 인사이고, 평강은 샬롬이라는 히브리식 인사입니다. 히브리사람들은 소수민족이어도 선민의식이 너무 강해서 절대로 히브리어만 썼습니다. 하지만 이 당시는 팍스로마나 시대로 성경도 헬라어로 쓰여졌습니다. 영적으로 최고로 교만한 사람과 육적으로 최고로 교만한 사람이 불이 붙은 그러한 시대에 바울사도는 이방인을 위한 사도로 부름받아 이 두 문화를 인정해야 했기에 바울서신에는 항상 은혜와 평강이라는 헬라식, 히브리식 인사를 겸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서로의 문화를 인정해주어야 합니다. 서로서로 문화가 다른 걸 인정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본질이 아닌 건은 이해하고 인정하는 것이 학생을 가르칠 때나 복음을 전할 때나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본질을 놓쳐서는 안됩니다. 절대 타협이 대상이 아닌 것이 있습니다.
Q. 본질 때문에 비본질을 포기 혹은 허용하십니까, 비본질 때문에 본질을 포기 혹은 허용 하십니까?
모든 것을 하되 하나님과 연관되어야 합니다. 바울은 하나님 빼면 얘기가 안됩니다. 우리가 어떤 사실을 평가할 때 다 자기 생각대로 합니다. 다 자기 세계관 가치관을 최고로 여기고 갑니다. 복음이라는 것은 얼마나 분별을 잘 해야 하는지 모릅니다. 학교에서나 교회에서나 하나님 중심으로 가르쳐야 한다는 것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습니다. 특별히 어렸을 때부터 하는 것이 너무 중요합니다.
Q. 모든 것을 하나님과 연관시켜서 하고 있습니까?
그래서 골로새 교회 같은 환경에 처해있던 사람들이 복음을 받고 소명을 받아 다시 골로새교회 같은 곳을 찾아가는 간증이 있습니다. 소명이라는 것은 부유한 사람이 아니라 미말에 처해있는 사람이 받는 것이 만고의 진리가 아닌가 합니다.
소명의 자리에 하나님의 뜻으로 부르심 받은 자리는 어디있습니까? 하나님의 뜻이라면 기름부으심이 있을 것입니다. 동역자, 형제가 있습니까? 내가 찾아가야 할 골로새 교회가 어디입니까? 소명의 자리에는 반드시 은혜와 평강이 따라옵니다.
▶ 목장나눔
4월 18일 드디어, 은하언니가 결혼을 했습니다.
목장에서 전참으로 축하해주었습니다. 축하해용~!! ♥
#65279;오늘 목장은 목자언니, 주원이, 현희, 경설이, 은실이 그리고 은실이의 중학교 친구와 함께 했습니다. 계속 우리들교회에 잘 붙어갈 수 있으면 좋겠네요.. 은실이 수고했어~! #65279;
사정이 있어서 못 나온 지숙이, 미영이, 미정이, 이번주엔 꼭 만나.!!
#65279;
Q. 하나님의 뜻으로 부르심 받은 자리는 어디입니까? 하나님의 뜻이라면 기름부으심이 있을 것입니다. 그 자리가 힘들다면 소명을 다시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65279;A: 회사
B: NGO단체에서 아동복지에 관련된 일이 나의 소명이라고 생각되었는데 요즘은 물음표다. 직장문제때문에.
C: 직장.
D: 요즘은 그 자리에 앉아만 있는 건 아닌지 하는 생각이 든다.
E: 공동체.
F: 공동체. 봉사하는 부서.
Q. 소명의 자리에 함께 할 동역자, 형제가 있습니까? 있다면 누구입니까?
A: 있다. 직장에서 함께 일하는 팀장님. 세심하게 케어해주시고 나를 특별하게 대해주신다. 하지만 최근 트러블이 생겨서 마음이 어려운 상태이다. 질서에 순종이 안되고 있다. (목자언니: 사람에 대한 인간적인 기대치를 내려놓고, 거리를 유지해야 한다. 그리고 잘못한 부분에 대해서는 표현하는 것이 좋겠다.)
B: 있다. 꿈에 대한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대학때 친구.
C: 남동생과 친구. 비전과 소명을 나눌 수 있는 대학때 친구 1명.
D: 있다. 가족중엔 언니. 그리고 목장. 하나님이 묶어주신 거라 생각한다.
E: 있다. 교회 내 지체들. 사람에게 관심이 없는 나이지만, 먼저 다가와주고 감싸주는 지체들.
F: 있다. 엄마. 그리고 교회 공동체 지체들.
Q. 내가 찾아가야 할 영육간에 힘든 소명의 대상, 골로새교회는 누구입니까?
#65279;A: 아빠와 동생.
B: 아빠.
C: 할아버지와 사촌동생
D: 언니와 동생
E: 잘 모르겠다.
F: 사촌동생
Q. 본질 때문에 비본질을 포기 혹은 허용하십니까, 비본질 때문에 본질을 포기 혹은 허용 하십니까?
A: 본질을 위해 비본질적인 방법을 쓸 때가 많다.
B: 본질과 비본질 구분못한다.
C: 구분못한다.
D: 삶에 대한 핑계를 대며 본질에서 벗어나는 행동을 할 때가 있는 것 같다.
E: 잘 모르겠다.
F: 비본질때문에 본질을 망칠 때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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