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구원>
복음과 상황이라는 잡지에서 바람난 천국이라는 특집 기사를 읽은 적이 있다. 가장 흥미로운 것은 천국에서도 빈부격차가 있다는 것이다. 어떤 집사가 간증하기를 넓은 꽃밭에 사는 사람이 있었는데 이것은 부끄러운 구원을 얻은 사람들이라고, 세상에서 봉사를 안 했기 때문에 천국에 집 지을 재료가 올라오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면서 성가대를 하라고 성가대를 하는 사람만이 하나님의 보좌 앞에 앉을 수 있다고, 전도를 많이 할 수록 천국의 집 평수가 넓어 진다고, 안 하면 화가 미친다고 했다. 또 다른 목사님은 천국에 가보니 다섯가지를 물었는데, 1) 성경을 얼마나 읽었는지, 2) 헌금을 얼마나 했는지, 3) 전도를 얼마나 했는지, 4) 십일조를 얼마나 했는지, 5) 기도생활을 얼마나 했는지 물었다고 한다. 또 한 분은 너무 일찍 죽어서 봉사할 시간이 없었던 아이들이 오는 어린이 천국이 있고, 물질 축복을 받았지만 자신과 가족들만 잘 살고 봉사와 전도에 인색한 사람들이 오는 천국은 지구보다 100배나 큰 별로 천국 변두리에 있는데 수형소 막사 같은 곳에서 영혼들이 살고 있는 수형소 천국이라고 한다. 신 개발 천국도 있다고 한다. 그래서 천국이 3곳으로 구분되어 있다고 한다. 그런데 이런 만화 같은 천국과 지옥의 간증 집회가 아주 인기 폭발이라고 한다. 왜 이렇게 왜곡된 현실을 안고 있는 천국을 그다지 사모하는가? 잘못된 구원관 때문이고 성경을 제대로 모르기 때문이다. 송인규 교수는 특집 기사에서 ‘이런 천국은 오해에서 비롯된다고 한다’고 하였다. 영물이 움직인다던지 노래를 잘 모르는데 계속 찬양만 해야 하는 것은 진정한 천국의 모습이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들 교회는 천국을 모르는 불신자들, 오래 다녔어도 구원을 잘못 알고 있는 사람들, 힘든 일이 와서 고름이 터져서 해석이 안 되어서 오는 사람들, 오랫동안 왜짝 신앙도 있고 치유 받고 돌아가는 분들 등 여러 모델들이 있다. 중요한 것은 이 모든 상처에서 구원 받는 자의 수가 늘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이 것이야말로 이 땅에서 천국이 구현되는 큰 구원이 아닌가 합니다. 날이 갈수록 우리들 교회가 왜 세워졌고 왜 부흥이 되는지 의아하겠지만 잘못된 구원관, 천국 관에서 큰 구원을 이루어 주시고 계시기 때문에 큰 사명이 있다고 생각된다. 사무엘하 22장에서 노래의 말씀으로 하나님에 대한 간증을 했던 다윗이 깨끗함을 이루어 벅찬 마음으로 큰 구원으로 찬양한다. 큰 구원에 대해서 알아보자.
1. 말씀과 구원이 같이 가는 것이다
구원은 모든 것에 방패가 될 수 있다. 구원의 방패는 구원 때문에 한 모든 일들을 하나님께서 책임지신다는 뜻이다. 구원은 인간의 수고와 자격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어떠한 부족한 사람일지라도 차별 없이 구원이 된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구원의 방패를 주셨기에 나의 힘과 능력은 아무 것도 없었지만 모든 일을 구원 때문에 생각하고 결정하고 갈등했더니 그것 자체가 방패가 되었다. 본질을 위해 비 본질을 포기했더니 오히려 사단을 막아주는 방패가 되었다. 에베소서 6장에 전신 갑주 말씀에서는 구원의 투구, 믿음의 방패라고 하였다. 여기서 다윗은 구원의 방패라고 하였다. 방패는 어떤 일을 할 때 앞 장 세울만한 것이나 앞 장 세울 사람이라고 정의를 한다. 정말 모든 사람에게 앞 장 세울 말은 구원이다. 구원이란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서 죄인들을 위해서 죽으심으로 우리에게 얻어진 값 없이 주어진 선물이다. 진노로 힘을 빼고, 하나님으로만 힘을 삼게 되면 하나님만이 구원이시기에 저절로 구원이 방패가 되는 것이 있다. 이 구원을 방패 삼아 지금까지 살아 왔다. 구원은 모든 것의 시작이고 과정이고 마지막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31절에 ‘하나님의 도는 완전하고 여호와의 말씀은 진실하니 그는 자기에게 피하는 모든 자에게 방패시로다’ 36절에는 구원의 방패를 주셨다고 하는데 31절에서는
말씀으로 피하는 자에게 방패라고 하셨다. 말씀과 구원이 같이 가야 큰 구원이 이루어 진다는 것이다. 히브리서 1장3절에는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채의 형상이시라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 죄를 정결하게 하는 일을 하시고 높은 곳에 계신 지극히 크신 이의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셨다고 한다. 이것은 만물의 구원이라고 할 수 있다. 말씀을 덧 입으면 우리도 만물을 구원하고 붙들 수 있다. 내가 어떻게 사람의 마음을 붙들 수 있는가? 잠시 돈, 미모가 있어서 붙들 수 있다. 하지만 무슨 힘으로 영원히 돈과 건강을 붙들고 있을 수 있겠는가? 구원을 방패 삼으면 능력의 말씀으로 돈에서 구원이 되고 건강에서 구원이 된다.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들뿐만 아니라 죄를 정결케 하신다고 한다. 이 말씀을 붙잡고 가는 사람은 항상 겸손하고 자기 잘못을 시인한다는 것이다. 이런 사람이 다른 사람의 마음도 붙들 수 있는 것이다. 내가 먼저 잘못을 시인하면 남들이 나를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높은 곳에 계신 위엄의 우편에 앉히신다. 그러면 높여 주신다고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도는 완전하고 여호와의 말씀은 진실하기 때문이다.
내가 붙들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매일 말씀을 통해서 내 죄를 보고 오다보니 저절로 되는 것이 있다. 무엇보다도 QT를 하시는 분들의 마음을 붙들게 하신 것이다. 이혼하려고 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붙들어 가정을 살리고 예수를 모르는 사람의 마음을 붙들어서 주님을 영접하게 하셨으니 그야말로 구원의 방패요 능력의 말씀이다. 그래서 큰 구원은 우리 삶의 방패이고 능력의 말씀이다. 말씀과 구원이 같이 가고 있는가? 말씀을 보면서 큰 구원을 이루어야 한다. 구원을 받았으면 계속 말씀을 보면서 성화를 이루어 가야 한다. QT의 목적은 내 자신의 치유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영혼 구원이듯이 말씀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말씀의 목적은 구원이 되어야 한다. 구원은 말씀으로 말씀은 구원으로 결론이 나야 한다.
적용) 여러분은 말씀 따로 구원 따로인가? 구원 받았으니 말씀은 필요 없다 하지 않는가? 말씀이 아닌 내 지식과 물질과 감정으로 남편과 아내와 자식의 마음을 붙들려고 애 쓰지는 않는가? 만물을 붙들고 죄를 정결케 하는 능력의 말씀으로 붙들고 있는가? 무엇으로 붙들고 있는가?
2. 온유함이다
구원, 구원, 말씀, 말씀 했더니 주의 온유함이 임했다. 구원의 방패이신 하나님을 신뢰하니 나를 크게 하신 주의 온유함을 경험하게 된다. 마태복음 5장에 ‘가난한 자는 천국이 저의 것이며’ 하였다. 모든 복의 첫 째는 가난한 데서 시작되는 것이다. 이것은 심령이 가난 자라고 했지만 누가복음에 보면 그냥 ‘가난한 자’라고 나온다. 가난한 자의 복이 참 큰거 같다. 그 다음이 ‘애통한 자’ 들이고 그 다음이 ‘온유한 자’ 라고 한다.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이며’ 천국을 소유한 자는 이 땅에서 기업을 받는다고 한다. 자기의 비참한 가난함을 보고 애통하지 않는 사람은 온유하다고 할 수 없다. 온유는 짐승을 길들여서 주인 뜻 대로 사용하는 것을 의미한다. 짐승도 주인 뜻대로 길이 들여지는데 우리는 짐승만도 못 하기에 주인 뜻대로 쓰임을 받지 못 하는 것이다. 온유하려면 내가 짐승만도 못 한 것을 날마다 인정해야 한다. 이런 사람이 위로를 받는다고 한다.
그러면 땅을 기업으로 준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시편 37편 11절에 보면 ‘오직 온유한 자는 땅을 차지하고 풍부한 화평으로 즐기리로다’ 오직 온유한 자가 차지한다고 하니 땅을 내 소유로 만들지 않아도 이 세상 땅이 다 내 것이라는 것을 믿는 자가 온유한 자라는 것이다. 민수기 12장 3절에 보면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에 모든 사람보다 승하더라’ 라고 했다. 그러면 가장 온유한 모세가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얻고 그 곳에서 살다가 가야 하는데 바라보고만 가는 모델이 되게 하셨다. 민수기를 보면 백성들이 모세를 돌로 치려고 한다. 그 때 모세는 참았으므로 온유가 지면에 승하다고 해야 하는데 형제인 미리암과 아론이 비방을 할 때 온유가 지면에서 승했다고 쓰여져 있다. 식구가 힘들게 할 때 가장 큰 온유가 나오는 것이다. 진짜 온유하기 힘든 것이 가정이다. 내가 믿는 자라면 집안 식구, 형제 일에 누구 욕을 하겠는가? 회개할 것 밖에 없는 것이다. 육적인 싸움에서 온유하기 힘들지만 정신적인 싸움에서도 온유하기가 어렵지만 이 세상의 어려운 것은 영적인 싸움에서 온유하기가 제일 어려운데 영적인 지도자들끼리 식구들끼리 가장 어려운 것이다. 제일 어려운데 모세가 그 때 구스 여자를 취했다. 모세에게는 어렸을 때 부터 에굽에서 살아서 문화가 익숙했고 부인이 죽었기 때문에 합당한 이유가 있었다. 남들이 보기에는 이방인이지만 모세는 이해를 해야하는 그래서 그 때 미리암이 문둥병이 발했다. 구원은 온유함인데 특별히 믿는 식구들끼리 싸울 때 온유하기가 가장 어렵다는 애기를 했다. 상한 심령이 되니까 저절로 온유하게 되는 것이다. 온유는 참는 것이다. 나약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어떤 사람은 다른 사람과 좋은 관계를 가지려고 무조건 참는 사람이 있다. 그것은 온유가 아니다. 연약함이고 회피를 하는 것이다. 온유한 사람은 진리를 부여 잡는 사람이다. 진리를 부여 잡기 때문에 진리를 위해서는 죽음도 불사한다. 실제로 온유한 사람들은 결코 약하지 않았다. 하나님의 위로를 받을 줄 아는 사람이 온유한 것이다. 온유하면 이런 뜻도 있다. 본래 굽어보심, 도움, 낮춤, 가난함 이런 다양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다윗은 자기가 왕이 될 능력이 하나도 없음을 알고 있었다. 초라한 목동으로 사울의 미움을 받아서 동굴에서 연명을 하면서 내일을 기약할 수 없는 이 가난한 날들을 너무나 많이 살았다. 밧세바 사건까지 언급한다면 하나님의 온유하심이 아니라면 어찌 왕이 될 수 있겠는가? 반복 적으로 죄를 짓고 바닥을 치는 다윗을 보며 하나님이 얼마나 참으셨겠는가? 지극히 높은데 계신 하나님이시라면 다윗을 구원하기가 어려우셨을 것이다. 다윗을 위해 자기를 낮추시고 찾아오신 주의 온유하심이 나를 크게 하셨다고 하는 고백인 것이다. 주님의 가난하심으로 나를 부유케 하시고 낮아지심으로 나를 높이시는 것이다. 다시 말해 십자가의 하나님의 자기 비하로 죽어주심으로 다윗을 크게 하셨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다윗을 준비 시키기 위해서 이렇게 희생하시고 낮아지시고 굽어보셨다. 구원과 말씀으로 온유해가게 하시는 주님이시다. 주님의 온유가 나를 크게 한다고 하신다. 화를 내면 지는 것이다. 하지만 올바른 화를 내는 것도 온유함이다. 온유는 자기 권리를 쓰지 않는 것이다. 하늘 영광을 버리신 주님의 온유가 우리를 살리셨다. 십자가로 처리된 온유를 주셨기 때문에 다윗을 크게 하셨다. 이것이 구원의 방패를 온유함으로 준비 시켰다는 뜻이다. 이것이 최고의 큰 구원의 준비인 것이다.
적용) 십자가로 처리되는 온유함으로 내가 크게 된 경험이 있는가? 낮추고 굽어보고 도와주고 가난함으로 크게 된 경험이 있는가? 지금 일어날 수도 없는 사람들이 있다. 우리가 굽어보고 낮추어지고 도와주고 가난함으로 찾아가야할 것이다.
3.원수를 완전히 무찌르는 것이다
구원의 방패와 말씀과 온유함으로 준비가 되면 원수를 완전히 무찌르는 것이다. 우리가 싸워야 할 사단의 세력은 우리를 멸망에 빠트릴 수 있는 절망적인 권세를 가졌다. 내 힘으로 할 수 없다. 사단의 권세는 용납, 타협해서도 안 된다. 자기를 알아야 상대를 알 수 있다. 상대에 대해서 알았다면 아주 결사 각오로 나가야 한다. 적당한 것은 없다. 다음으로 미루겠다도 안 된다. 내 속의 사단은 교양 가지고는 물러가지 않는다. 대적 마귀는 쉬거나 지치지 않는다. 원수를 끝까지 쫓아가서 망하기 전까지 기필코 돌이키지 않는 사람은 구원의 방패와 온유함으로 준비된 사람이다. 다윗은 이제는 원수를 완전히 무찌르게 되었다. 주님이 온전히 무찌르게 하셨다는 것이다. 이처럼 당당한 모습은 이 전에는 볼 수 없었던 모습이다. 다윗은 강한 원수들의 틈새에서 숨쉬기도 힘들었던 연약한 자였다. 하지만 하나님은 이런 다윗을 이끌어내셔서 발을 넓게 하시고 넓게 트인 대로를 열어주셨다. 전쟁하게 하려고 능력을 주셨는데 우리는 보통 능력을 주셨다고 하면 눈에 보이는 큰 일을 생각한다. 우리는 하나님을 예배해야 하는데 하나님께서 다윗을 향해서 원하시는 것은 하나님을 예배 하는 것이고 하나님이 누구이신가를 알기를 원하는데 늘 능력하면 교회를 다니면서 예배는 다니지 않고 세상 자랑을 능력이라고 생각한다. 예배를 드리지 않고 자꾸 자랑이 나오는 것이다. ‘능력으로 띠 띠우사’는 어떤 사람이 되는가가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영적 전투의 능력이라는 것은 깨끗함이라고 하였다. 깨끗함으로 계속 준비가 되어 있으면 그것이 능력이고 그래야 중간에 다른 곳으로 가지 않고 넘어지지 않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에서 영혼의 쉼터가 되어야 하지만 동시에 세상의 불의를 물리쳐야 하는 군사이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는 도리어 세상이 교회를 걱정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교회는 세상을 이기고 승리한 간증이 퍼져야 한다. 우리들 교회에서 울려 퍼지는 승리의 간증은 결국 하나님 나라를 세울 것이다.
원수들이 저절로 등을 돌리고 나를 미워하는 자를 끊어버리셨다는 것은 내가 미워하는 자가 없어졌다는 것이다. 원수가 등을 돌리고 패배를 인정했다는 것이다. 원수는 여러가지 형태로 찾아온다. 영적인 싸움을 자꾸 눈에 보이는 육적 싸움으로만 생각을 하는 것이다. 우리는 어떤 사건이 끝나면 쉬고 싶은 것이 있다. 그래서 넘어진다. 그러나 영적으로 말씀을 가지고 잘 싸운 사람은 다윗처럼 잘 서있게 된다. 항상 우리가 원해야 하는 것은 어떤 환경에서도 쉼이 아니라 똑바로 서는 것이다. 이것이 큰 구원이다.
사도행전 QT에서 바울과 전도여행을 갔던 요한이 바울을 떠나서 예루살렘으로 갔다고 했다. 예루살렘이라고 해서 무조건 좋은 것은 아니다. 안 가야 할 때도 있다. QT도, 담임 목사도 우상이 되어서는 안 된다.
노래의 말씀으로 간증, 찬양, 기도를 하니까 깨끗함으로 나아가게 되고 하나님의 공의와 온전함으로 나아가게 되니까 큰 구원이 일어나서 곳곳에서 승전가가 울려 퍼지게 된 것이다. 결국 이 땅에서 원수로부터 승리가 목적이 아니겠는가? 그런데 이렇게 길고 긴 여정이 필요한 것이다. 이 여정의 오직 하나님이 동행하셨다는 것이 다윗의 찬송이다.
적용) 큰 일이 지나고 여러분들은 다 내려놓고 쉬고 싶은가? 여전한 방식으로 똑바로 서고 싶은가? 너무 무거운 짐이라고 포기하고 싶은 것은 무엇인가?
사단은 왜 지는지 도움을 구해도 구원할 자가 없다고 한다. 부르짖어도 대답할 자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다윗이 물리쳤다고 한다. 둘러보아도 대답할 자가 없는 것은 내 인생의 결론이다. 신앙 생활을 오랫동안 한 거 같지만 갑자기 닥쳐온 건강, 육적, 정신적, 물질 등 이런 사건에서 하나님께서 응답하시지 않는 구조로 살았기 때문 에 그것보다 더 비극이 없는 것이다. ‘내가 얼마나 신앙 생활을 했는데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가?’ 이게 바로 응답 받지 못 하는 구조로 신앙 생활을 한 것이다. 고생도 어려서 고생이 낫지 늙어서 이렇게 응답 받지 못 하는 구조로 신앙 생활을 하면 얼마나 이게 어리석은 일인지 모르겠다.
다윗이 자신의 자리에서 통일 왕국의 왕이 될 때 17년 간의 혼란을 거쳐서 이스라엘의 왕이 될 때에 곳곳에서 굴복을 하였다. 사울과의 싸움이 너무 힘든 싸움이라서 그것에 비하면 열방을 무찌르는 것은 쉬운 싸움이었다. 풍성할 수 없는 환경 가운데 풍성을 보여주니 들은 즉시 순복하는 자들이 나오는 것이다.
택함 받은 자라면 돈과 권세와 가문과 어떤 것에 견고함이라도 만족이 있을 수 없다. 복음은 그들을 떨게 만든다. 어찌 돈과 복음을 비교할 수 있겠는가? 내 기도, 순종을 통해 식구들뿐 아니라 이방인들까지 견고한 자가 자기 성에서 떨면서 나오는 것을 염두에 두고 살아야 한다. 다윗의 구원이 가지는 큰 의미는 1) 내 백성의 다툼에서 건져주셨고(가족의 싸움), 2) 모든 이방인들을 굴복 시켜 다윗을 으뜸으로 삼으셨다는 것이다. 소극적, 적극적 구원을 모두 이루었다는 것이다. 가족과의 다툼에서 구원으로 승리하면 열방으로 복종한다고 했는데 이 세상의 가장 무서운 원수는 내 자신이고 내 자신의 이기적이고 남들보다 조금 더 인정받으려는 노예 근성이라고 생각된다. 우리가 남의 평가에 민감한 것은 내 안에 존재하는 노예 근성 때문이다. 고대 노예제도 사회에서 노예는 자기 자신을 주체적으로 평가하지 못 했다. 노예를 평가할 수 있는 사람은 주인 뿐이기 때문이다. 노예는 주인이 잘했다고 하면 기뻐하고 못 했다고 하면 슬퍼한다. 이것이 니체의 이야기이다. 니체의 주장에 따르면 남의 시선과 평가에 연연할 때 우리는 자신을 노예의 지위로 하락 시키고 있다고 한다. 우리는 오직 하나님의 종이어야 한다. 주인 의식을 가지고 종 노릇을 하면 그 종이 주인이 되는 것이다. 어디서나 주인 의식을 가지고 있는 그 분이 그 곳의 주인이다. 그 분은 진짜 섬길 수 있는 사람인 것이다.
적용) 여러분은 응답받는 구조 속에서 살고 있는가? 힘든 일을 당했다면 여러분을 도와줄 사람은 누구라고 생각하는가? 여러분은 노예 근성이 있는가 주인 의식이 있는가? 남의 평가에 민감한가 항상 생색을 내지 않는가?
4. 큰 구원의 목적은 감사와 찬양이다
다윗의 결론은 여호와는 살아 계신다는 것이다. 수많은 고통을 경험했지만 고통은 지나가고 하나님은 존재한다는 것이다. 살아 계신다는 것이다. 다윗이 외로움을 느끼는 것은 보통 사람보다 더 심하지 않았겠는가? 사랑하던 사무엘도 죽고, 친구 요나단도 죽고, 그 일생의 자기의 모사였던 아히도벨도 반역을 해서 자살을 하고, 압살롬도 죽고, 요합은 다윗의 충성된 부하로 알려져 있지만 마음이 안 통해서 긴장 시키는 사람이고 가장 가까운 자가 이런 상태이니 얼마나 외로웠겠는가? 이럴 때 일수록 하나 씩, 하나 씩 배반당하고 죽을 때마다 나의 구원의 바위 되시는 하나님을 알게된 것이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증거는 나를 위하여 보복하시고 복종케 하시며 원수들에게서 이끌어 내시며 대적자 위에 나를 높이시고 강포자에게서 건지시는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원수가 아무리 나를 쳐들어와도 항상 하나님께서 보복해주시고 원수 다 갚아주시고 나를 높이시고 건지시는 하나님을 믿는다. 그러므로 다윗을 구원하시고 다윗 왕국을 보전하신 목적은 결론이 우주적인 통치이고 하나님 나라의 건설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기름 부음을 받은 자 다윗의 감사의 시의 초점이 그리스도에게까지 연결된 것이다. 아브라함이 그렇게 아들과 땅을 원했다. 그런데 나중에 그렇게 원했던 것이 자식도 아니고 땅도 아닌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일생을 나그네라고 히브리서 11장에 표현했고 그 실체가 하나님 나라였던 것이다. 아브라함이 그렇게 원했던 것은 하나님 나라였던 것이다. 다윗이 무언가를 얻기 위해서 일생을 전쟁을 한 것이 아니라 15광야를 건너가고 또 여러가지 어려운 일을 올 때마다 하나님이 누구 신지를 깨우치게 된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누군지를 알려주기 위해서 다윗의 전 인생이 사용되고 있는 것이다. 일생이 처음부터 끝까지 언급된 사람은 다윗 밖에 없다. 대단한 인생이 아니라 찌질하고 시시콜콜하고 이러한 모든 소소한 것들까지 다 보이고 갔다. 죄책감 느낄 일이 많았다. 다윗은 잃은 양처럼 방황한다고 고백을 했다. 그러나 그는 예수님의 조상이 되었고 가장 믿음의 사람으로 자리 매김을 하고 있다. 기도, 봉사, 헌신을 죽도록 하였지만 보이는 것이 없다면 헛 믿었다고 한다. 앉으나 서나 믿으면서 보상을 바라는 것이다. 신앙이라는 것은 사랑하는 하나님이 누구 신가를 아는 것이다. 나에게 피난처 되시는 하나님, 반석되시는 하나님 이것을 아는 것이다. 하나님 자체가 상급이 되어야 한다. 그래서 다윗이 하나님을 이렇게 찬양했듯이 하나님을 알아가기 위해서 사건이 끊임없이 온다. 우리가 깨어질 때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물질의 복이 아니고 하나님을 알아가게 하실려고 깨어지게 하는 것이다. 다윗의 업적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깨어질 때마다 하나님을 알아갔다는 것이 너무나 중요한 핵심이다. 모든 구원 역사의 유일한 근거는 살아 계시는 하나님이심을 찬양함으로서 결론을 짓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다윗을 구원하시고 다윗 왕국을 보전하신 목적은 흑암과 죄악이라는 적대 세력을 완전히 멸망시키고 온 천하를 하나님께 돌아오게 함으로서 영원한 하나님의 왕국을 건설하시려는 것이었다. 이것이 다윗에게 베푼 큰 구원의 가장 완성 판이라는 것이다. 큰 구원은 진노를 경험하면 깨끗해지고 구원의 방패를 가지고 원수를 무찌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감사와 찬송이 나올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기도제목>
신천섭
1. 신결혼
김경배
1. 예배 준수 할 수 있도록
이주홍
1. 신앙서적 읽을 수 있도록
2. ccm 잘 들을 수 있도록
홍주형
1. 취업 잘 알아보도록
2. 명절 잘 보내기를
한덕찬
1. 우리말 잘 배워서 설교 잘 들을 수 있기를
2. 여자친구 응답 잘 기다리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