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래의 말씀>
청년부 수련회에서 찬양을 열광적으로 하는 모습을 보았다. 한 시간을 뛰고 찬양을 하는데 말씀 시간에 졸까봐 걱정이 되었다. 에스겔을 1~40장까지 하는데 잘 들어주었는지 모른다. 찬양으로 주님께 고백하는 것 처럼 보였고 말씀은 내 마음을 만지는 노래의 말씀으로 듣는 것 같았다. 청년들이 이렇게 말씀의 은혜를 받기가 어려운데 받았다고 생각된다. 리스바의 회개 이후 그 후에야 하나님은 그 땅을 위한 기도를 들으셨다고 한다. 다윗의 인생을 살펴보면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가 아닌 것이 없다. 오늘 말씀에 다윗은 하나님이 자신의 보호자 임을 인정하는 것 뿐만 아니라 연인에게 바치는듯한 그 이상의 사랑 고백을 하고 있다. 다윗의 절절한 사랑 고백을 들어보기를 원한다. 다윗의 고백은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여 로 시작하는 유명한 시편 18편의 원형이 되었다. 늘 말하는 구속사의 원리가 여지없이 순서대로 들어가 있다. 시편을 읽기가 어렵다고 하지만 5가지 정도로 시편을 요약해보자
1. 다윗은 환란에서 건지신 하나님을 찬양했다
모든 원수의 손과 사울의 손에서 구원하신 그 날이 있다고 한다. 그 날을 찬양하였다. 사울이 나오는 것을 보니 다윗 왕국의 통일 왕국 통치 초기로 보인다. 사울과 10여 년간 수 없는 전쟁을 치르면서 그 때까지의 삶을 노래의 말씀으로 남겼다. 아뢰었다고 하는 것은 자세히 고백했다는 뜻이다. 이것이 말씀으로 간증하는 것이고 기도하는 것이다. 감사 할 수 없는 환경에서 감사의 노래를 부르고 죽을 수 밖에 없는 환경에서 생명의 노래를 부르는 것이 노래의 말씀이다. 도저히 내 힘으로 할 수 없는 감사의 찬송이 나오게 하신 분이 하나님이라는 것이다.이것이 구속사이다. 시편도 아닌데 역사서에 50절에이나 되는 노래의 말씀으로 하나님을 찬양한 것은 다윗이 중간인 이 시점에서 하나님없이는 한 걸음도 올 수 없었다는 것을 고백하고 싶은 것이다. 구원하신 그날이 각자에게 있을 것이다. 사울도 다윗도 둘 다 두려움을 느끼는 사람이었다. 사울뿐만 아니라 다윗도 두려음을 느낄 떄에는 엉뚱한 판단을 해서 대단한 댓가를 지불하기도 하였다. 이런식으로 바로보면사울과는 별 차이가 없다고 느껴지지만 정 반대의 삶을 살았다. 다윗의 시를 보면 알 수 있다. 사울은 사람과 다윗을 두려워했지만 하나님을 두려워 하지 않았다. 다윗 역시 자신을 괴롭히는 적에 대해서 노골적인 저주와 자신의 기도에 즉시 응답하지 않는 것에 원망을 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이렇게 고백을 하고도 밧세바 사건도 있었지만 하나님을 떠나지 않았다. 하나님 안에서 분노하고 염려하였다. 자기가 조금이라도 떠났다고 생각되면 하나님은 즉시 늘 다루셨다. 그때에 다윗은 돌이켰다. 다윗의 성숙하지 못 함과 각종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다윗을 놓치 않으시고 일생동안 동행해주셨다. 하나님이 쓰시려고 하는 사람에게는 집집마다 어쩔 수 없이 하나님이 부리시는 악신이 임한 가족들이 하나씩 있는 것을 본다. 사울뿐 아니라 사울과 관련된 사람들과 평생 함께 가면서 시달려야 하는 것이 성도의 인생이다. 사울은 끝까지 변하지 않았다. 우리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경륜을 알 수 가 없다. 정말 성령님의 도움이 아니라면 우리의 삶이 인내하고 가는 것을 불가능하다. 때마다 구원하신 그 날이 너무나 많다.
적용) 여러분은 여호와께서 구원하신 그 날이 있는가? 특히 사울의 손에서 구원하신 그 날이 있는가? 원수와 사울의 손에서 구원하신 그 날에 대해 노래의 말씀으로 아뢰고 있는가?
여러분 각자가 되었다 함이 없다. 여러번 구원하신 그 날이 각자 있을 것이다.
2. 나의 하나님을 찬양했다
팔레스타인 지방은 모래로 이루어져서 반석 바위가 최고의 피난처로 표현되는 언어다. 다윗이 15광야를 건너가면서 얼마나 절박했겠는가? 전쟁 중에 죽을 수 밖에 없는 상황에서 나의 요새, 나의 반석, 나를 건지시는 자,나의 하나님, 나의 피할 바위, 나의 구원의 뿔, 나의 높은 망대, 피난처 구원자 결코 잊을 수 없는 상황을 때마다 경험 되어지는 하나님의 속성을 노래했다. 나의 반석, 나의 요새 1인칭 어미가 11번이나 반복되는 것이다. 하나님과 나와의 개인적인 만남을 강조하였다. 교리적인 하나님이 아니고 경험되어진 나의 하나님을 강조했다. 다윗의 시가 아름다운 것은 하나님에 대한 고백이 있기 때문이다. 지난 인생을 돌이켜볼 때 다윗은 기가 막힐 정도로 깊은 웅덩이에서 때마다 구원해주신 하나님을 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모래같은 나에게 바위 같은 하나님이 피난처가 되어주셨다는 것이다. 여러분은 사무엘서를 읽으면서 다윗의 겪은 광야 생활을 다 기억할 것이다. 나의 반석 마혼 황무지에서 십사람들이 사울의 군사들에게 포위되었을 때 하나님께서 블레셋을 불러 일으켜서 철수 하게 하셨다. 또 사울을 피해 숨었던 장소가 동굴에서 사울을 죽일 수 있었지만 하나님을 두려워 하여서 죽이지 않았다. 다윗이 지나온 날을 생각할 때 노래의 말씀으로 하나님을 찬양하지 않을 수 가 없는 것이다. 자기가 적들로 부터 숨었던 요새, 망대, 피난처 절대 절명의 순간에 다윗을 보호해줬던 것들로 지금 하나님을 아무리 부르짖어도 부족함이 없는 하나님의 이름들이다.
적용) 지나온 인생에서 하나님을 어떻게 표현하고 싶은가? 정말 나를 안 돌아보시는 하나님? 바쁘신 하나님? 나만 미워하시는 하나님? 그렇게 표현하고 싶은가? 아니면 반석, 피난처이신 나의 하나님이신가?
여러분의 하나님은 나의 하나님인가? 너의 하나님인가? 정말 나의 하나님이구나. 다윗이 이것을 남겨 놓고 싶었겠구나. 이 때가 죽을 때가 아니고 사울의 전쟁이 끝났는데도 불구하고도 남기고 싶은 것이다.
3. 찬송 받으실 여호와께 기도하였다
우리가 노래의 말씀으로 기도한다는 것은 찬송받으실 여호와께 기도했다는 것이다. 하나님을 속속들이 경험하기 위해서 사망의 물결이 불의의 창수가 오고간 것이다. 불의의 창수라는 것은 벨리알의 강들, 사단의 강들 사람이 불법을 행하면 죽음이 오는 것이다. 내가 죽고 싶은 것은 항상 내 속에 떳떳치 못한 것이 있을 때 죽고 싶다. 모든 것들은 암이 와서 죽고 싶은게 아니라 죄가 많기 때문에 해결되지 않은 것이 있기 때문에 두려운 것이다. 사망의 물결이 나를 에우게 되는 것이다. 사울이 다윗을 수없이 죽이려고 한 것을 기억해보면 이것이 이해가 된다. 이런 환란중에 찬송 받으실 여호와를 아뢰었다는 것은 나의 사정을 자세히 고백하고 나갔더니 하나님께서 성전에서 그 기도를 들으셨다는 것이다. 우리에게는 어떤 사건이 이렇게 사망의 줄이 창수가 난 것처럼 두렵게 하는가? 수억의 별들 우주 속에서 내 모습을 제대로 보지 못 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보여주시려고 우리에게 사망의 물결을 허락하셨다. 하나님 나라는 부러질 때 보여진다. 그것을 보지 못 하면 소경 귀머거리기 때문에 환란은 기도하게 만들고 그 기도는 하나님 귀에 들린다고 말하는 다윗이다. 그래서 환란이 구원인 것이다. 이 세상에서 찬양하고 찬송받으실 대상은 오직 여호와라는 것을 다윗이 알게 되기까지 하나님이 훈련시켜 가신다. 하나님께 노래의 말씀으로 아뢰는 것이다. 가장 진실된모든 기도는 찬양을 통해 관통되며 이러한 아룀으로 이런 분위기는 실제적인 회개와 기도와 간구와 중보의 배경이 된다. 찬양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을 즐거워한다. 더 이상 필요한 것이 없어진다. 이 기도에서 나오는 외침이 외침이 거룩 거룩 거룩이다. 우리가 구속사적인 찬양 기도인 것이다. 사무엘하 22장에 결론으로 나가는 이 때에 찬양이 나오는 것 봐도 그렇다. 우리 21장에 리스바가 그렇게 회개를 한 이후에 노래의 말씀이 나오는 것이다. 우리가 사람간에도 찬양을 해주는 것을 가장 좋아하는데 사람 간에는 찬양이 독이 될 수 있지만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은 기도의 최고의 형태이고 하나님의 선하심을 구하는 것이다.
이인호 목사님의 글에 어린 아이가 배고프면 젖을 찾아 엄마 품으로 파고 든다. 젖을 먹는 동안 배만 채우는 것이 아니다. 엄마와 눈을 마주치고 따뜻하고 친밀한 사랑의 교제를 나눈다. 동물 중에 눈을 맞추며 젖을 먹도록 창조된 존재는 인간 밖에 없다고 한다. 이건 인간의 젖이 아니라 사랑을 먹으며 사람이 되어간다는 의미이다.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기도해서 얻는 응답보다 더 중요한 것은 기도에 응답하시는 하나님과 눈을 마주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사랑의 얼굴을 우리를 향해 비추시는 것 그것이 가장 큰 응답이요 선물이다. 말씀으로 기도를 해야 되고 말씀이 없이 기도를 하는 것은 인격적인 교제가 아니다. 말씀을 보게 되는 것은 주님과 눈을 맞추는 시간이 되었다. 그러다보면 고통이 지나가고 만다. 하나님은 스스로 계신 자 존재 자체이다. 고통은 지나가버리는데 하나님은 존재 자체인 것이다.
외부의 적은 블레셋이고 내부의 적은 사울인데 찬송받으실 여호와께 아뢰니 이 모든 원수를 물리쳐 주시는 것이다. 그러니까 여러분이 심술내어서 기도하지말고 하나님을 찬송하면서 기도하기를 바란다. 찬송은 찬성하여 칭찬하는 것이라고 한다. 하나님을 칭찬하고 찬성하면서 기도를 해야 하는 것이다.
적용) 원수로 인하여 찬송받으실 여호와께 찬성하고 칭찬하면서 기도를 하는가?
하나님은 100% 옳고 우리는 100% 죄인이다.
4. 진노의 응답을 찬양했다
실컷 하나님을 찬양하였는데 기도하였더니 응답이 심판의 진노로 왔다. 하늘의 기초가 요동하였다. 이 세상 세력, 교만, 자아, 자기 의가 남의 속에 있건 내 속에 있건 하나님께서 진노하셔서 요동케 해달라고 기도할 때 요동하는 응답이 오는 것이 응답이 아니겠는가? 내 속의 자아가 진노해서 요동하게 도와주시옵소서. 내 자아, 교만이 흔들리는 것 이게 바로 응답 아니겠는가. 진노의 심판이 없이는 구원이 이루어지기 힘들다. 나의 기도로 인해서 땅이 진동하고 하나님의 진노가 퍼부어줄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내 인생에 하나님께서 임해야 어두컴컴과 비교가 되어 밝음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은 밝음을 모른다. 하나님은 성도의 기도에 지체치 않고 응답하신다. 화살을 쏘아서 원수를 흩으시고 번개로 파하셔서 혼란스럽게 하시는 것이 진노의 심판이다. 내 속이나 집안, 교회, 공동체가 자꾸 분열이 되고 생각이 혼란스러운 것은 하나님의 뜻이 있는 것이다. 진노로 흩으실 때 잠잠히 당하여 생각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이 환란 속에서 기도를 드릴 때 응답으로 진노를 퍼부으시는 것 그것을 알 수 있다. 우리가 구속사적로 말씀을 보는 훈련이 바로 이런 것이다. 영혼구원을 위해서 기도한다면 반드시 먼저 심판이 있고 나서야 구원이 임한다는 것이 순서다. 구원 때문에 심판을 인내 할 수 있어야 한다. 기도응답이 원수에게서 일어난다고 하니까 그 원수가 앞으로 내가 믿게 될 그 사람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땅이 진동하는 것은 부도난 사건, 감옥, 자식 고난, 암 이런 것들이 땅이 진동하는 사건이다. 이것이 기도응답으로 내 속의, 내 원수 속의 사단이 물러갈려고 진동하는 것이다.
적용) 나에게 온 사건은 구원을 위한 하나님께서 진노하신 사건인 것을 믿는가?
우리는 이 세상에 죽을 일이 아무 것도 없다. 그래서 노래의 말씀으로 전하는 것이다. 어디를 가든 우리는 노래의 말씀으로 하나님을 찬양한다. 진노의 사건은 크게 오는 것이 아닌 굉장히 사소하게 일상생활에서 온다. 우리의 심판의 사건은 이렇게 아이들 이야기부터 암, 직장에서부터 곳곳에서 진노가 반드시 기도의 응답으로 구원이 오려고 일어난 선행 사건인줄을 믿는다. 놀라지 말고 구원으로 잘 해석하기를 바란다.
5.한 영혼이 천하보다 귀함을 찬양했다
다윗 한 사람으로 인해서 하늘과 땅의 기초를 흔드실 뿐만 아니라 천지 만물을 동원하셔서 달려오셨다. 우리의 전쟁도 아 뜨거부터 시작한다. 원리로 싸우는 것이 아니다. 4~5절에서 사정을 아뢰었고 6절에 하나님 다윗의 기도가 올바르다 해서 하나님께 들렸다. 8~15절까지 원수에게 진노하심으로 심판하심으로 응답하시고 나서 16절에 이럴 때(1~15절)에 여호와의 꾸지람과 콧김으로 말미암아 물 밑이 드러나고 세상의 기초가 나타났다고 한다. 하나님의 꾸지람을 받으면 물밑이 드러나고 땅의 기초가 나타나는 것이다. 경건주의, 율법주의 밑에 있는 나의 가쉽, 허영, 정욕의 자기의 진짜 모습이 보이기 시작한다. 진노의 심판이 구원이 임하면 내 속의 허영과 모든 인본주의가 보이기 시작한다. 우리가 받은 구원은 위로부터 구원이다. 누군가를 보내서 나의 빚, 미움의 물 흙탕 가운데 많은 물에서 나를 건지셨다. 이 세상은 살면서 나보다 강한 원수가 너무 많다. 내가 끊지 못 하는 강한 원수가 무엇인가? 내 옆에는 돈과 스펙으로 따라갈 수 없는 강한 원수 힘 센 원수가 진을 치고 있다. 이것을 우리는 양 같아서 각기 제 길로 갔다고 한다. 아둔하고 고집 세고 두려워서 한번 넘어지면 다운해서 일어나지도 못 하고 버둥버둥 거리다가 그러면서도 양은 자식은 알아본다고 한다. 이렇게 힘센 원수가 옆에 있는데 나보다 강했기 때문인데 19절에 여호와를 부르는 것이다. 다윗이 잘난척 할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고난과 환란이 심각한 사람은 고난에 집중하느라 시각이 좁을 수 밖에 없다. 양이 자기 앞 밖에 못 본다. 넓은 곳으로 인도하는 역할이 공동체이다. 지경이 넓어진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 구원하심은 전적으로 나를 기뻐하시기 때문이다. 어떤 조건이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때마다 손을 내밀었다. 진노로 기초를 다 들어내게 하시고 바람의 날개로, 광채로, 우뢰소리로 도우셨다. 당근과 채찍을 사용하셔서 나보다 강한 원수와 미워하는 자에게서 건지셨다. 진노를 일생동안 많이 경험했다. 그럼에도 나를 기뻐하시는 하나님께서 발이 넓어지게 하신 것을 믿는다. 진노가 사랑인 줄 깨달아야 한다.
적용) 나를 위해서 천지 만물을 동원할 수 있다는 것을 믿는가? 여러분에게는 무엇을 동원해서 도우셨는가?
내 인생을 하나님의 일로만 기억하면 내 속의 천한 생각이 저절로 없어진다. 하나님의 생각은 우리의 기억을 품위있게 만들어 준다. 인간에 속한 기억은 지나고 보면 슬픔고 연민과 분노가 주를 이룬다. 노인들은 과거만 생각한다. 과거 중에서만 슬픈 것만 생각한다. 섭섭한 것은 태어날 때부터 기억한다.
적용) 여러분들이 과거에 대해 날마다 기억하는 것은 상처인가? 감사인가?
내가 기억하는 것이 하나님에 대한 감사라면 수치를 자유하게 드러낼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수치를 들어내는 것이 자유 의지로 습관화가 되는 것이 훈련같다. 우리들 교회에서는 다른 교회에서 듣지 못한 오픈에 대해서 말씀으로 계속 전한다. 오늘도 노래의 말씀으로 오픈하는 것을 전했다. 그래서 모든 아픔들을 노래의 말씀으로 자세히 고백한다. 이것이 약재료가 되어서 넓은 곳으로 인도되는 것이다.
<기도제목>
김경배
1. 신교제
홍주형
1. 취업
2. 진노의 상황에서 제 모습 보고 열심히 할 수 있도록
3. 가족구원
신천섭
1. 신 결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