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말씀 요약
본문 : 삼하 18:19-19:8
제목 : 내 아들 압살롬아
하나님을 믿는다면서 전쟁의 승리만 전하려는 열성파가 있고 승리의 사실만 전하는 사실파, 다윗의 마음을 알면서도 대적하는 대적파가 있다. 그들은 다윗이 원하는 소식을 전하지 못했다. 다윗의 통곡을 알지도 못하고 좋은 소식을 전한다면서도 전하지 못했다. 왜 그런가?
1. 구속사의 시각을 가지지 못했기 때문이다.
오늘 본문에는그런데 다윗이 아들을 너그럽게 대해달라는 의미도 모른 채 전쟁에서 승리한 소식을 전한다. 구속사는 이 세상에서 날마다 구별되어 가는 것인데, 그래서 성도의 인생은 외롭다.
열성파 아히마아스는 왕의 원수를 갚아 준 소식이라고 말한다. 압살롬을 다윗의 원수라고 칭하는 것은 아히마아스가 죄와 죄인을 분리하지 못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자기가 좋은 소식을 전하는 공을 차지하고 싶어서 갔다. 요압은 아히마아스가 앞으로 큰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기에 한사코 그의 요청을 거절했다. 하지만 요압은 사랑이 없으니까 결국 아히마아스에게 가라고 한다. 요압은 다윗이 이 승리를 기뻐할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아말렉 소년이 사울이 죽었다는 소식을 전했는데, 다윗이 그를 죽인 것을 보았기에 아히마아스를 생각하는 순수한 생각보다 다윗의 명령을 어겼기에 떳떳하지 못한 것이다.
요압은 구속사의 믿음이 없는데도 다윗이 압살롬을 죽이기를 싫어한다는 것을 아는 게 무서운 일이다. 요압은 나무에 달린 압살롬에게 아버지의 사랑을 전하지 않고 죽이고, 확인사살까지 했다. 구속사의 공감대가 형성되지 못한 자이다. 다윗의 아들 사랑은 거절되었다. 다윗은 하나님이 자신을 사랑하심같이 압살롬도 아버지의 사랑을 알게 되리라 생각했지만 거절되었다. 요압은 그것을 모른다.
그래서 사실파 구스 사람이자 이방인 노예를 죽어도 양심에 가책이 들지 않는 사람이기에 보냈다. 기뻐해야 할 이 소식이 다윗에겐 비극이었고, 이 비극을 같이할 사람이 없다는 것을 다윗을 통해 보여준다.
믿음이란, 나는 무엇을 위해 사는가이다.
적용 : 무엇을 위해 사는가? 구속사적 시각이 있는가?
2. 구속사적 사랑은 무엇인가?
전쟁의 승리는 다윗 군사들에게와는 다르게 다윗 개인에겐 비극이었다. 압살롬의 죽음은 통곡과 슬픔의 결정판이었다. 그만큼 다윗이 압살롬을 사랑했다. 사랑은 옳고 그름이 아니다. 사랑은 자기 죄를 회개하면서 가는 길이다.
도망가는 다윗에게 시므이가 저주할 때, 다윗은 하나님께 들어야 할 소리라고 시인했다. 기드론 광야 길을 가며 친구인 아히도벨의 배신 소식을 들었고, 그 일을 통해 옛날의 믿음을 회복해 갔다. 예수님이 고난 받고 돌아가시기 위해 가는 그 길을 다윗이 내려가고 있었다. 시므이와 아히도벨, 압살롬에게 배반당한 다윗은 의지할 것이 없어지니 하나님을 깊이 의지하기 시작했다. 자신의 죄악으로 인해 욕을 할 개제가 못되어 절실한 마음이 되었다. 아히도벨의 배신에 대해서도 할 일이 없으니 그의 모략을 어리석게 해달라는 기도밖에 안 되었다. 그래서 기도가 응답받았고 다윗이 회복되어 갔다. 그래서 압살롬도 다윗처럼 회복될 수 있다고 믿었기에 사울을 용서한 믿음보다 더 놀라운 사랑을 보일 수 있었다. 내 죄 때문에 수고한 압살롬을 어떻게 미워하겠는가? 압살롬은 자기 자신이었기 때문이다. 압살롬은 자식이고 곧 자신이다. 자식은 곧 나이다. 그 자식이 나를 반역했다. 이겨도 져도 웃을 수도 울 수도 없다. 인생의 모든 싸움은 압살롬의 싸움까지 가야한다. 좋아할 수도 슬퍼할 수도 없는 지경까지 가야 예수님의 조상이 되는 것이다.
자식을 보는 것은 나와의 싸움이다. 내 마지막 원수는 내 육신이다. 모든 일은 내가 누리고 싶은 게 많기 때문이지 누구 때문이 아니다. 어떤 것 때문에 너무 좋고 싫은 게 없는 게 믿음이다.
"책임감 중독"이라는 책을 쓴 로저 마틴은 모든 인간에게 적용되는 지배질서가 있는데, 사람들은 언제나 이겨야 한다고 생각하며, 모든 일을 통제할 수 있어야 하고 이성적 자세를 유지하려 한다고 한다. 그리고 이 가치를 지키기 위해 발버둥 친다. 요압이 바로 대표적 사람이 아닐까 싶다. 하지만 다윗은 이 가치를 지킬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 기가 막힌 진리를 압살롬 때문에 알게 되었기에 아들도 알게 되기를 바랐다. 그런데 그렇게 깨닫게 된 감사함이 부하들에게는 없다. 다윗은 똑같은 전쟁을 부하들과 같이 치러왔다고 생각했는데, 부하들은 압살롬이 자기 자식이 아니었기에 몰랐다.
다윗이 일평생 이스라엘을 위해 수없는 전쟁을 통해 목숨을 내놨다. 그런데 압살롬이 죽었다고 전쟁에 승리했다며 좋은 소식을 가져왔다. 다윗이 얼마나 외로웠겠는가? 인간은 철이 들면서부터 외로운 길을 갈 수밖에 없다.
사람들이 나의 외로움을 알아주지 않아도 외로움을 인정하며 안고 가야 한다. 다른 길이 없다. 다윗의 인생은 외로움의 극치다. 구속사눈 구원을 위한 것이다. 그런데 교회에서 세속사를 이루며 옳고 그름 때문에 죽고 죽인다. 구원의 관점에서 보자면 아히도벨의 계략도 따를 수 있다. 오늘 밤이 중요하고 피곤하지 말아야 한다. 똑같은 일이지만 하나님 일이 될 수도 사단의 일이 될 수도 있다.
감정도 없이 압살롬이 죽었다고 소식을 전하는 사람도 있다. 다윗이 원하는 것은 압살롬이 회개하고 돌아오는 것인데 같은 마음을 가진 부하가 없다. 하지만 사람들은 다윗의 밑바닥을 경험하지 못했기에 그 밑바닥을 인정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 있다. 그래서 압살롬이 살았다면 회개하고 돌아왔겠느냐고 묻고 싶을 것이다.
돌아오지 않을 사람이었기에 하나님은 요압에게 피를 묻히게 허락하셨다. ‘누구는 압살롬의 역할을 하고 싶어서 하고 누구는 다윗의 역할을 하는가?’라고 묻는 사람은, 자기가 주인이 되고 싶고 항상 이기고 통제하고 싶기에 그런 질문을 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나의 주인이 되어야 하는데 내가 주인이 되고 싶기에 이런 질문이 끊임없이 나온다.
믿음이란 사람 자체에 관심을 가지는 것이다. 다윗의 부하들에게 압살롬은 관심의 대상이 아니라 그저 죽일 놈이었던 것이다.
적용 : 사람에게 관심이 있는가? 자녀가 내 문제라고 인정하는가?
3. 너는 내 아들이라는 것이다.
다윗이 자기 아들에 대해 묻자 아히마아스는 요압의 말이 떠올라 모른다고 대답하고, 구스 사람은 죽었다고 대답했다. 요압의 성정을 잘 아는 다윗은 그가 자기 말을 지킬지 노심초사했을 것이다, 이 전쟁의 책임이 자기에게 있기에 할말이 없어 그저 기다렸다.
아히마아스는 좋은 사람이기에 좋은 소식을 가져올 거라고 했지만, 좋은 사람이 좋은 소식을 가져오는 게 아니다. 성도는 좋은 소식을 전해야 한다, 가장 좋은 소식은 복음이다. 나를 위로하는 소식이 아닌 ‘십자가 복음’이다. 이 세상은 공평한 세상이 아니다. 하나님만이 공평하다. 예수님이 공평한 세상을 살다 가지 않으셨다. 십자가는 예수님이 얼마나 공평하지 않는 삶을 살다 가셨는지 보여준다, 주님이 최고로 불공평한 세상을 살다 가셨다. 좋은 소식은 공평한 것이 아니라 공평치 못한 가운데 구원의 소식이 들리는 것이다.
다윗이 절규하며 부르짖는다. 백성은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인가, 전쟁에서 이겼는데 기뻐하지 못하고 부끄러워하며 다윗을 해석하지 못한다. 다윗은 압살롬의 죽음이 밧세바를 겁탈한 자신의 범죄에서 비롯되었음을 알고 있었다. 이 범죄로 세 자녀가 죽었다. 밧세바가 낳은 아이와 다말을 겁탈한 암논, 그리고 압살롬이 죽었다. 다윗의 절규는 부성애, 사랑, 회개, 아픔을 모두 포함한다. 죽어도 살아도 구원이 안 된 인생이 슬픈 인생인 걸 아는 다윗이다. 죽어서 구원의 기회가 없는 압살롬에 대해, 천국에 가서 볼 수 없기에 창자가 끊어지는 슬픔을 느낄 수밖에 없다. 아들들이 자꾸 구원받지 못하고 죽어가는 것이다. 가정과 나라를 망치고 아버지의 후궁을 겁탈하고 아버지를 죽이겠다고 달려드는 압살롬을 대신해 내가 죽었다면 좋았을 거라는 다윗의 마음은 신비다. 논리로 설명되지 않는다. 이런 억울함을 가지고도 초월적 사랑을 보여주는 것이 부모의 사랑이다. 그러나 구속사의 사랑을 모르면 부모도 자녀도 서로 법정에서 싸운다. 하지만 다윗은 구속사의 사랑을 알았다.
다윗이 이런 모습을 보며 우리를 향한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생각하길 바란다. 입으로 열거하기도 힘든 죄를 지은 압살롬을 '내 아들'이라고 불러 주시는 사랑이다.
적용 : 가장 좋은 소식은 구원의 소식이다. 사랑하는 식구들에게 구원의 소식을 전하라. 너는 내 아들이라는 말씀이 들리는가?
4. 다 같이 일어나야 한다.
요압이 다윗을 협박하며 충고한다. 어쨌든 택한 자는 무슨 말을 들어도 사명을 회복한다. 옳고 그름으로 접근해서는 안 된다. 때마다 다윗의 발목을 잡는 요압이지만, 하나님 나라가 임하려면 멀었기에 요압의 기회주의도 필요했다. 요압은 때마다 다윗을 배반하면서도 떠나지 않는다. 고난이 없는 사람은 세상 소망이 있을 수밖에 없다.
이 세상에 필요악이 있을 수밖에 없음을 보여줄 수밖에 없다. 요압은 실무를 처리하느라 늘 욕을 먹는다. 다윗과 요압은 편한 관계를 가지지도 못하면서 늘 같이 간다. 이 땅에서 다윗도 해결하지 못한 일을 우리가 어떻게 해결하며 가겠는가? 우리가 다윗과 요압을 이해하며 그게 이 땅의 삶임을 인정하고 가야 한다.
적용 : 다 같이 가야 하는 공동체임을 인정하는가? 우리가 되었다함이 무엇이 있겠는가? 아들을 계속 보아가며 가야 한다.
<기도제목>
권내리
1. 큐티하며 하루하루 잘 살아내도록
2. 어머니 건강과 동생, 아버지 구원위해
미화언니
1. 매일 말씀 가운데 내 죄보고 적용하며 가기
2. 직장에서 일이 아닌 사람들을 먼저 볼수 있도록
3. 1월 인사이동 시립병원 외래로 갈수 있도록
4. 가족구원
김나영
1. 김은숙 언니 집구하는데 하나님 뜻하시는대로 구할수 있도록
2. 고지현집사님 쌍둥이 믿음의 동역자 만나도록
3. 배우자 기도
4. 아빠 구원 전도
박윤경
1. 하나님께 온전히 하루하루 감사하고
2. 부모님, 동생, 동생아내가 하나님을 알게 되고
3. 아는 분들 전도할 수 있도록
4. 아프지 않고 하나님 인도하심 따라 나아갈 수 있도록
조미나
1. 매일 말씀 가운데 해석, 인도받으며 주님과 동행하도록
2. 게으르지 않고 시간사용 잘 하도록
3. 회사 일정 조정이 잘 될수 있도록
안무옥
1. 욥기 큐티 우선순위 지키면서 직장에서 해석되지 않는 상황들 가운데
내 죄 먼저 보고 깨닫기 위한 기도에 힘쓰고 구체적인 적용점 찾아 실천하기
2. 3주 남은 양육교사 하나님보며 내 죄보며, 마지막까지 최선 다하며 가기
3. 죄인과 죄가 분리되지 않는 연약함 두고 매일 기도하기